제가 존경하는 분중의 한 분 <간송 전형필>

[솔이]

   

간송미술관(保華閣) 문화재들의 사연

  
1)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그는 나라를 빼앗긴 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문화재(文化財) 수집에 전력을 다한 사람이다.고유섭(高裕燮), 송석하(宋錫夏)가 유형(有形).무형(無形)의 문화유산을 학술적으로 조사하고 연구하여 우리의 뿌리를 잇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면 간송 전형필은 개인적인 상속재산의 부(富)를 이용하여 문화재 수집보호에 심혈을 기울인 사람이다.

그는 일본 와세다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당시 조선 사람을 대표할 수 있는 인텔리기도 하다. 3.1운동 때 민족 대표의 한 분이셨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의 말씀에 감화를 받아 그 많은 유산을 통털어 옛날의 서화.책.도자기 등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괴산군 칠성면에 있는 절터에서 일본인이 마을 사람을 위협하여 반출한 부도탑을 인천항에서 일본으로 반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득달같이 달려가 가로막고 되사온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뿐인가. 오사카 경매장에서 언제, 어떻게 반출된지도 모르는 고려시대의 삼층석탑이 경매장에 나와 경매되는 소식을 듣고 일본사람들과 끈질기게 가격 경쟁에서 낙찰을 받아 되찾아온 이도 간송 전형필이었다.

2) 1936년 11월. 한가롭기만 하던 소화통(昭和通, 지금의 퇴계로)에 아침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그날은 바로 소화통의 한 2층 목조건물에 위치한 경성미술구락부 회관에서 골동품 경매가 있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 골동품 전시겸 경매는 이렇게 해서 성사된 것이다.

모리 고이치(森悟一)는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미술품 수장가였다. 그는 눈이 번쩍 띄는 도자기를 비롯하여 200여점의 고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었는데, 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의 은행장으로 있다가 어느날 갑자기 유언도 없이 죽었다.

"심히 애통한 일입니다. 그런데 고인이 생전에 애장하셨던 미술품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저희도 어떻게 그 많은 도자기를 처리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고인께서는 생전에 도자기를 사면 한번도 팔거나 남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조선 백자는 모두 거물급에 속하는데, 고인께선 따로 미술품에 대하여 유언하시지도 않았습니다. 저희 자손들은 그 점을 고심하고 있습니다, 사사키상."

사사키(佐佐木) 노인은 당시 경성미술구락부 사장이었다.

"저는 경성에 있는 고물상 주인들과 손을 잡고, 이번 기회에 고인에 대한 추모 형식으로 대경매전시회를 열까 합니다. 이에 참가하는 분들로는 저 이외에 온고당 주인 심보상, 명동의 아마이케상, 스즈키상점(鈴木商店) 등 실로 막강한 분들입니다. 물론 고인의 수장품도 훌륭하지만, 백자만 가지고는 구색이 맞지 않으니 다수의 청자와 금속 그리고 서화도 포함시킬 생각입니다. 아마 대단히 인기를 끌 것입니다."

"고맙습니다, 사사키상. 아무쪼록 좋은 전시회가 되길 바랍니다."

사사키는 모리 고이치가 남긴 소장품 처리에 고심하는 유족을 찾아가 경매를 제안했다. 묘안이 없었던 유족들은 흔쾌히 승낙했다.

전시회는 대성황이었다.

출품된 미술품 가운데 백자에 있어서는 전무후무한 명품들이 쏟아져 나왔던 까닭이다. 눈덩이같이 하얀 항아리를 비롯하여 청화(靑華)로 문양을 낸 호화로운 병과 연적들이 즐비했다. 가장 관심을 끌었던 것은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靑華白磁陽刻辰砂鐵彩蘭菊草蟲文甁, 보물 제241호)' 이었고, 그 이외에 '청화백자진사송죽쌍호문팔각병', '청화백자죽재칠현대호', '청화백자산수문사각병' 등 여러 점과 수없이 많은 청화백자진사철사항아리, 병, 문방구류가 있었다.

또 서화 출품작도 대단하였다. 추사(秋史)의 대련을 비롯하여 현재(玄齋)의 산수화, 겸재(謙齋)의 산수도 대폭, 이정(李霆)의 목죽 대폭, 사명당과 유성룡의 간찰 등이 있었다.

또 산수화로서 호화롭기 그지없는 일본과 중국의 그림들도 다수 출품되었다.

3) 온고당 주인 심보는 간송 전형필과 막역한 일본인 골동상이었다.

간송의 마음 씀씀이와 와세다대학 출신의 인격, 그리고 조선의 골동품을 아끼는 민족애(民族愛)에 반하여 그를 숭배하는 사람이었다.

심보도 가지고 있던 물건을 전시회에 출품했다. 때문에 전시회를 위해 찍은 사진을 입수할 수 있어서 출품된 사진과 함께 많은 정보를 갖고 간송선생과 일식집에서 만난 것이 전시회 2주전이다.

간송은 줄담배를 피우며 사진을 들여다보다가 드디어 석 장의 사진을 골라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았다. "간송 선생. 이번 기회를 놓치면 후회하실 겁니다. 이번에 잡지 못하면 이 물건들은 영원히 조선에서 사라질 테니까요. 일전에 산 천학매병과 쌍벽을 이루는 명품중의 명품입니다."

간송이 고른 석 장의 사진 중에서 한 장을 가리키며 심보가 넌지시 재촉했다.

"예상가격은 얼마를 보고 있지요?"

사진에 눈을 고정시킨 채 간송이 입을 얼었다.

"경합이 얼마나 치열한가에 달려있지요. 이번 경매에는 기라성같은 사람들이 모두 참관하고 있습니다. 1만원은 예상해야죠. 하지만 그 이상이 나가도 기회를 잡으셔야 합니다."

"그래 이번 경매에는 어떤 사람들이 참여할 것 같소?"

"먼저 조선인들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장 패기있게 물건을 살 사람은 장택상(張澤相)입니다."

"장택상?"

"지금 조선내에서 조선백자 수장가로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와 쌍벽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유럽 유학까지 갔다온 재력가로서 백자에 대한 수집범위도 넓고 다채롭습니다. 무엇보다 거금을 아끼지 않고 구입하고 있습니다. 김성수와 더불어 감식안도 뛰어납니다."

"……"

"보통 1만원짜리 물건은 이 두 사람이 차지하고, 5천원짜리 정도는 김찬영(金瓚永), 이병직(李秉直), 백인제(白隣濟) 등이 차지할 수 있지요. 따라서 이 난국초충병(蘭菊草蟲甁)에 관해서는 장택상을 조심하면 될 것입니다."

"음…."

"간송 선생. 그러나 지금 조선백자 대수장가는 조선인이 아닙니다. 일본인이지요. 자본으로 따져도 상대가 되질 않습니다.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사람들을 귀담아 들으십시오. 먼저 원산에 살고 있는 미요시(三由), 성환농장 주인 아카보시(赤星), 인천 거부 스즈시게(銓茂), 저축은행 전무 시라이시(百石) 등은 모두 몇만원씩 즉시 동원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심보는 입이 마르는지 청주를 한 모금 마셨다. 간송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심보는 숨을 돌리더니 다시 힘주어 말했다.

"저번에 천학매병을 넘겨달라던 오사카의 무라카미입니다. 그는 간송선생에게 당한 일에 대해 상당히 분개하고 있다 합니다. 이미 이번 경매에 참가하기 위해 일본에서 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큰 전시회 때마다 나타나 가끔 엉뚱한 값을 불러대는 사람이지요."

"……"

간송은 할말을 잊었다. 너무나 막강한 자들과 경합을 해야 했다. 가지고 있는 재산을 가늠해보았다. 마치 소총을 들고 대전차부대를 막아내야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민족 문화재 수호에 생명을 건 간송으로서는 지쳐 쓰러질 때까지 싸우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심보상, 나를 위해 좀더 새로운 정보를 알아봐 주시오. 나도 이제 자금이 풍족하지만은 않소. 저번에 천학매병을 사고 힘들었어요. 하지만 꼭 내가 살 수 있도록 해주시오."

간송의 말은 간곡했다.

4) 남산이 뚜렷이 보이는 맑은 날, 드디어 경매가 이루어졌다.

간송과 심보는 그날 오전까지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작전을 세우고 구락부가 보이는 신도(新都)호텔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점심 후에 두 사람은 호텔에서 나와 길을 건너서 구락부를 향해 걸어갔다.

30세의 간송은 중키에 희고 포동포동한 얼굴이 귀공자 같은 품위를 풍겼다. 머리는 바짝 뒤로 빗어넘겼는데, 온후하고 믿음직스러운 모습이었다. 그 옆에 바짝 붙은 심보는 반백의 머리에 얼굴은 길쭉했고 건장한 체구에 투지와 정력이 넘쳐흘렀다.

두 사람이 경매장으로 들어갔을 때,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경매가 시작되려만 아직 한 시간은 족히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심보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무라카미였다. 짐작대로 일본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것이었다. 문을 들어서며 주위를 살피던 무라카미가 몇 명의 일본인 수장가들과 인사를 나눴다. 거물의 출현에 사람들이 다소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간송도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 구락부 앞 도로에 검은 세단 한 대가 미끄러져 들어오는데,

"앗!"

갑자기 심보의 입에서 절망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차에서 중년신사가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골동을 취급하는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유명한 교토 산중상회(山中商會)의 주인이었다. 본점을 교토에 두고, 조선을 비롯하여 뉴욕.파리.런던.북경에 지점을 개설하여 오대양 육대주를 누비는 세계적 골동 거상이 바로 그였다.

드디어 경매가 시작되었다. 경락봉을 든 사회자는 보통학교 골목에 가게를 가지고 있는 고히라(小平)였다. 처음에는 좀 격이 낮은 백자항아리부터 시작했다. 김찬영이 그걸 너끈히 가져갔다. 다음은 청화백자팔각병이었다. 예상했던대로 원산의 미요시가 일순간 가로챘다. 경매가는 서서히 올리는 것이 재미인데, 성미가 급한 그는 대번에 1,500원에 후리쳤다. 따라 부르는 사람이 없자 사회자가 '탕'하고 책상을 쳤다. 순간 길게 째진 미요시의 입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 당시 백자 값으로는 2천원 이상되는 물건이 없었다. 지방 군수의 월급이 70원이고, 20칸짜리 기와집이 2천원하던 시절이었다. 너무나 엄청난 거물들이 모여 있어서 누구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책상에 올려지는 물건마다 급하게 낙찰되었다. 잠시 딴전을 피우면 금새 주인이 결정되었다. 매순간마다 자기가 점찍었던 물건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면서 모두들 벼르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값이 헐한 것들은 대부분 조선인들에게 떨어지고, 비싼 것들은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일본인들끼리 경쟁도 치열했다.

자질구레한 물건에서 시작하여 제법 굵직한 물건이 팔려나간 오후 2시경 사회자 고히라는 잠시 휴식을 선언했다. 그러자 때를 맞추어 따뜻하게 데운 청주와 맛살이 나왔다. 이 술상은 곧 경매의 클라이막스를 예고하는 것으로서, 술로 얼큰해진 참석자들이 대담하게 경매에 임하도록 하는 효과가 있었다.

술이 한 차례 돌고나자 예상했던 대로 숨이 막히도록 눈부신 백자항아리들이 탁자 위에 올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술기운과 경매 분위기에 고조되어 여기저기서 팔을 들고 검지손가락을 꼿꼿이 치켜들었다. 한바탕 소동을 치른후 굵직한 물건들이 새 임자를 맞이하였고, 그때까지 원하던 물건을 잡지못한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며 애간장을 태우고 있었다.

바로 그때!

때깔이 눈송이같이 고운데다 난.국화.풀.벌레가 진사와 철채로 양각되어 그려진 병이 올라왔다. 순식간에 경매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몇몇 사람들은 물건은 쳐다보지 않고 고개를 돌려 거물들 중 누가 먼저 값을 부르나 살펴보는데 더 관심을 보였다.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靑華白磁陽刻辰砂鐵彩蘭菊草蟲文甁).

높이 42.3㎝의 큰키에 균형잡힌 아름다운 곡선이 동체를 휘감고 있었다. 희고 보드라운 살결에 마치 수를 놓듯, 들국화 몇 가지가 푸른 풀잎과 어우러져 있었다. 그 위쪽에는 나비들이 꽃으로 날아들고 있었다. 문양은 양각으로 처리했다. 드문 예였다.

풀잎은 청화안료로 그리고,들국화는 진사와 철채로 그렸다. 그 또한 드문 예였다. 삼채(三彩)를 구사한 백자는 더욱 드물었다. 실로 도자 사상 유례가 없는 명품중의 명품이었다. 희고도 부드러운 살갗을 화려한 비단천으로 감춘 듯하고, 꽃을 찾아 나비가 나니 향기가 진동하였다. 서릿발 속에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는 오상고절(傲霜孤節)의 암향(暗香)인 것이다. 이 백자는 기교를 초월한 생명의 작품이었다. 가냘픈 여인의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500원이요."

"1천원이요."

"2천원이요."

이쪽저쪽에서 외쳐댔다. 눈깜짝할 사이에 3천원이 되었다. 이제 마음이 약하거나 꼭 살 마음이 없는 사람은 지켜만 보았다.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5천원이요."

일본도의 날처럼 예리한 목소리였다. 모든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쏠렸다. 무라카미였다. 역시 그다웠다. 금세 기와집 한 채 값이 올라간 것이다.

"6천원이요."

또다시 시선이 모아졌다. 그 옆에서 아키야마가 큰 기침을 했다. 고히라가 시선을 좌중으로 돌리면서 방망이를 들었다.

"6천원이요. 더 없습니까?"

"7천원이요."

모두가 또 쳐다보았다. 한국 제일의 백자 수집가 장택상이었다. 그는 단숨에 가격을 불러놓고서 힘겨운 듯 숨을 헐떡거렸다. 다시 사회자의 재창이 있었다.

"8천원이요."

'와'하는 소리가 경매장에 메아리쳤다. 모두 돌아보았다. 값이 정해지려는 순간 심보가 오랜 침묵을 깨고 외친 것이다. 그 옆에 있는 간송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8천원입니다. 더 없습니까……? 그럼."

경락봉을 들며 고히라가 두 번째로 '8천원'을 소리쳐 부르는 순간!

"9천원이요."

또다시 '와'하는 탄성과 함께 모두 그쪽을 쳐다보았다. 심보는 기절을 할 뻔했다. 세계 최고의 골동상 야마나카였다. 심보의 이마에서 땀이 비오듯 했다. 간송의 손에도 땀이 고였다.

"1만원이요."

장내가 떠나갈 듯 심보가 소리질렀다. 마지막 힘을 다해 내뱉은 절박한 음성이었다. 그러자 여유있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야마나카가 나직하게 불렀다.

"1만 5백원이요"

5백원 단위로 시소게임이 한창 이어지다가,

"1만 4,500원이요."

심보가 젖먹던 힘까지 내어 외쳐댔다. 좌중은 조용했다. 모두 기가 질려 말을 잊었다. 당시 백자 값은 최고가 2천원이었다. 심보가 부른 값은 사상 유례가 없는 거금인 셈이었다. 500원 단위로 따라 부르던 야마나카가 한동안 입술이 말라 붙어버린 듯 말이 없었다. 야마나카 자신도 이렇게까지 오르리라 상상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그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이해를 따져보는 것이었다. 승부는 끝난거나 다름없었다.

"1만 4,510원."

야마나카는 지쳐서 목소리가 입속으로 잦아들었다. 심보는 그런 상대방을 읽었다. 심보는 남은 힘을 모아 마지막 일격을 가했다.

"1만 4,580원."

일순간 경매장은 개미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고히라가 몇 번 값을 반복해 외쳤다. 그러나 여전히 침묵이었다. 그 짤지만 긴장된 침묵을 깨는 경락봉이

'탕!' 하고 테이블을 힘껏 내리쳤다.

"와!"

함성이 울려퍼졌다. 고히라도 손수건을 들어 땀을 닦았다. 간송은 심보의 손을 꼭 잡았다. 기라성같은 일본인 골동상들을 물리치고 간송이 천하의 백자병을 손에 넣은 것이다. 이날 간송의 승리는 식민지 백성의 설움을 이기고 민족의 자존을 지켜낸, 자랑스런 조선의 승리였다. 이날의 경성미술구락부는 역사에 길이 남을 문화재 수호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5) 1937년 2월 간송은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동경에 거주하고 있는 영국인 수장가 존 개스비(John Gadsby)에게 좋은 물건이 있다는 정보를 듣고서다.

존 개스비, 그는 어떤 사람인가?

영국 귀족 출신으로 1914년에 일본에 와서 국제변호사로 활약하던 사람인데 도자기 수집광이었다. 동경에 정착하고 얼마 되지 않은 어느날, 25세의 젊은 개스비는 동경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골동상에 진열된 희한하고 아름다운 꽃병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가 도자기와 인연을 맺는 순간이었다. 마치 마법에 이끌린 사람처럼 그는 가게 안으로 빨려들어갔다.

"계세요?"

안에서 게다짝 끄는 소리가 따각따각 나더니 키가 짤막하고 뚱뚱한 초로의 남자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이 꽃병 얼마요?"

가격을 먼저 묻는 것을 보니 독 안에 든 쥐나 다름 없었다.

"500원입니다."

상인은 속으로는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겉으로 진지한 표정으로 값을 불렀다. 그로서는 머리에 떠오르는 가장 비싼 값을 부른 것이었다.

"와! 굉장히 비싸군."

500원이라는 돈은 당시 시세로 호되게 비싼 가격이었다.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고 결국 개스비는 한푼도 깎지 못하고 값을 치렀다. 하지만 개스비의 눈은 정확했다. 그가 산 일본 도자기, 나베시아 색회화훼문병(色繪花卉文甁)은 뒷날 일본의 중요미술품에 지정되었다. 제대로 본 명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술애호가 개스비의 눈에 호화스런 일본 도자기는 금새 싫증이 났다.

개스비는 우연히 청자의 경이로운 아름다움을 접하고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완벽한 아름다움을 담아낸 인간의 능력은 청자외엔 없었다. 개스비는 순수한 미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고려자기의 아름다운 빛과 형태는 세계 어느나라의 도자기보다 훌륭합니다."

그는 만나는 일본인들과 서양인들 앞에서 수차례에 걸쳐 고려청자를 찬양했다. 또한 스스로 열렬한 수집가가 되었다. 물건만 있다면 일본은 물론 조선에까지도 건너왔다. 그는 여러 골동상을 돌아다니며 명품과 일품 위주로 수집하였다.

1930년대 초, 개스비는 점찍어둔 고려청자 두 점을 입수하기 위해 동경에서 경성으로 날아왔다. 일본인 고관이 수장하고 있던 청자상감연지원앙문정병(靑磁象嵌蓮池鴛鴦文淨甁, 국보 제66호)과 백자박산향로(白子博山香爐, 보물 제238호)를 기필코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이런 상황을 심보에게서 전해들은 간송은,

"심보상. 그 두 점은 실로 명품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을 입수하고 싶군요. 일본인이나 또다른 외국인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심보상이 가능한한 모든 정보를 찾아보세요."

"그런데, 개스비가 다시 팔까요? 그토록 어렵게 구해간 것인데."

"제 생각으론 개스비는 언젠가 가지고 있던 물건을 모조리 처분할 것입니다. 현재 일본의 정세로 보아 그는 큰 불안감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무슨 말씀이신지?"

"차차 알게 될 것입니다. 제가 일본에 있을 때 느낀 바니까요. 혹시 그가 물건을 처분한다는 정보가 있으면 지체없이 연락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간송의 예감은 적중했다. 1936년 2월. 일본 육군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구테타를 일으켰다. 이른바 2.26사건이다.

이 사건은 곧 일본 조정내 온건보수파가 밀려나고 호전적인 신흥군국주의자들이 정권을 차지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국체제로 돌변한 일본은 만주사변, 중일전쟁, 노일전쟁으로 번지고 급기야엔 영국, 미국과도 싸움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였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개스비는 소장하고 있던 중요 물건을 모두 처분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게 된 것이다. 1937년 2월, 개스비와 가까이 지내고 있던 동경의 한 골동상이 심보 앞으로 한통의 편지를 보내왔다.

'개스비가 물건을 처분하려 합니다. 연락바랍니다.'

얼마나 학수고대했던 일인가.

"심보상. 이 편지는 미진한 것이 있어요. 처분한다면 전부인지, 아니면 일부인지 알아야겠습니다."

"예?"

거기까지는 미처 확인할 틈이 없었다. 심보는 그만큼 흥분하고 있었다.

"빨리 전보를 쳐서 확실하게 알려달라고 하세요. 그래야만 자금을 준비할 수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며칠후 정확한 회신이 다시 날아왔다.

'전부 처분이 확실하다. 중간 알선은 나 혼자서 일임받았다. 일간 전보를 칠 터이니, 그때는 지체없이 동경으로 오라.'

간송은 급히 공주에 있던 땅을 팔아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얼마후 다시 전보가 오자 간송은 지체없이 동경으로 떠났다.

개스비의 집은 일본궁성이 눈앞에 보이는 호화저택이었다.

"어제 경성에서 온 전선생입니다."

중간상이 간송을 소개하자, 개스비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조선사람?"

"예, 그렇습니다. 전형필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아하, 그러세요. 경성에서 여기까지 오셨군요."

그는 자못 뜻밖이라는 듯이 미소를 띠며 반가워했다. 일본의 골동상은 개스비에게 그때까지 매수인을 밝히지 않았었다. 다만 모 수집가가 내일 올 터이니 준비하라고만 일렀던 것이다. 개스비도 중간상을 전적으로 신임하고 있던 터라, 그 이상은 묻지 않았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동경이나 오사카의 어느 일본인 대수집가일 것이라 생각했다. 조선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의외로 조선사람이 나타난데 기쁜 마음으로 개스비는 간송의 손을 따뜻하게 잡았다.

"말씀으로는 많이 들었습니다. 정말 반갑습니다. 저는 조선의 훌륭한 고미술품이 통째로 일본에 넘어와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그들이 아무리조선의 골동품을 좋아한다 하더라도, 그 미술품의 주인은 일본인이 아니니까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고맙습니다."

짧은 머리에 기름을 발라 더욱 점잖아 보이는 간송이 개스비의 호의에 감사를 표시했다.

"제가 여러번 반도땅에 갔을 때, 점차 조선인 수집가가 생기는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제야 진정한 주인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 같아서요."

"고맙습니다."

개스비의 환대에 간송 또한 기분이 좋았다. 개스비는 특히 그동안 혼신을 다해 수집한 도자기를 조선사람, 그것도 진정한 애정을 가진 젊은 실업가에게 넘길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개스비의 컬렉션은 실로 그 규모나 가치로 볼 때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 그의 애장품 중에는 현대에 와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것만도 대여섯 점이나 될 정도였던 것이다.

그의 애장품 중에는 청자기긴형향로(靑磁麒麟形香爐, 국보 제65호)도 있었다. 삼족의 향로에 뚜껑을 얹었는데, 웅크리고 앉아 뒤쪽 하늘을 쳐다보는 기린을 뚜껑 손잡이에 올려놓은 것이었다. 첫눈에 보아도 희귀하고 귀한 청자였다. 사자 뚜껑은 흔히 있었지만 영물인 기린을 올려놓은 향로는 보기드문 것이었다. 원앙 뚜껑으로된 향로도 있었다.

그밖에도 그의 컬렉션은 청자압형연적(靑磁鴨形硯滴, 국보 제74호), 청자상감포도동자문매병(靑磁象嵌葡萄童子文梅甁, 보물 제286호), 청자상감국목단당초문모자합(靑磁象嵌牧丹唐草文母子盒, 보물 제349호) 등 최고의 명품들로 가득 차 있었다. 이밖에도 각종 접시와 대접.사발.향합.술잔.다기(茶器) 등 모든 기형이 망라되어 있었다.

"그런데, 개스비씨는 왜 중국이나 일본 도자기는 수집하지 않으셨습니까?"

서재나 응접실 어디를 보아도 고려청자 이외에는 꽃이 꽂힌 송나라 때의 청자화병 하나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고려자기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나요? 다른 자기들은 다 연대가 떨어지지 않아요?"

개스비는 진심으로 말했다.

"애써 모으신 수집품을 인수하였으니, 저도 귀하에게 지지않도록 정성껏 보존하겠습니다."

"전선생은 아직 젊으니 아무쪼록 훌륭한 귀국의 고미술품을 많이 수집해서 세상에 알리세요. 비록 제가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물건들이지만 조선의 수집가가 도로 가져가게 되어 정말 기쁩니다."

간송은 고려청자 10여점에 거금 10만원을 지불하였다. 어렵게 얘기를 꺼낸 개스비의 요구에 두말하지 않고 거금을 지불한 것이다. 기와집 50채 값이었다.

이 일을 통해 고미술품 수장가로서 간송의 명성은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정당한 입장에서 서로 팔고 산 것이지만, 서로에게 깊은 우정을 간직한 채 거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개스비는 그후 약 1년 가량 동경에 더 머물다가 영국으로 돌아갔다. 경성으로 돌아온 간송은 소장품들을 전시하고 보관하기 위해서 다음해 성북동에다 보화각(保華閣, 지금의 간송미술관)을 세웠다.
 
출처] http://www.joongangtop.or.kr/secretstory/9.htm

[솔이]

간송미술관....아시는 분 많겠지만 매년 1~2회 전시회를 갖지요.. 장소는 서울시 성북구 서울성북초등학교 교문 바로 우측에 있습니다. 전시회때는 기회되시는 대로 잘 차려놓은 밥상이니 ? 찾아보시길...전시회때마다 알려드리겠습니다.

[난옹]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가슴이 뭉클합니다.

[참새]

이렇게 알고 간다면 참으로 의미가 남 다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