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도 연령 |
1910 |
1911 |
1912 |
1913 |
1914 |
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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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1919 |
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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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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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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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1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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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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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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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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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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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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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조선교육령에 의해 2학년 졸업식을 1911년 7월 19일 갖게 되었다.
다시 부연한다면 濟農 제1회 졸업생은 濟農의 전신인 사립 외신학교 고등과에 재학 중 관립 학교인 濟農이 설립되자 濟農 2학년으로 입학하고, 의신학교 보통과에 다니던 재학생은 1학년으로 자연 입학하게 된 것이다. 2학년 학생들은 3학년에 진학한 수 교육령에 의해 졸업하게 되었으며 당시 교장은 인본인민 御田伊太朗이었다 (-->그러나 제1회 졸업생은 1911년 11월 1일 조선교육령이 시행되기 전인 1911년 7월 19일에 3학년 졸업식을 갖게 되었다. 다시 부연한다면 공립 제1회 졸업생은 사립의신학교 고등과에 재학중 공립인 농림학교로 전환되자 2학년으로 편성되고, 의신학교 보통과에 다니던 재학생은 1학년으로 자연 편성하게 된 것이다. 2학년에 편성된 학생들은 의신하교 재학기간도 합산되어 3년 과정을 다 마치고 졸업한 것이다. 당시 교장은 일본인 吉峰源十郞 학감이 대행하고 있었다.)
일제하의 농업교육과 실습교육을 조명하기 위해서 당시의 교육과정을 살펴야 하며 또 교육과정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역시 당시 濟農의 학적부(생활기록부)를 분석 종합 평가하는데서 그 작업이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는 濟農의 학적부 보존은 최상의 상태로 유지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가 모교에 봉직할 때 처음 그렇게 느꼈고 아울러'제주교육사'집필 중에 더욱 그 소중함을 깨달았다.
본래 구한말 때에도 학적부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융희 3년(1909) 7월 5일 학 부령 제1호'실업학교령 시행규칙'제15조에 의해 모든 학교에는 반드시 비치하게 된 것이다. 의신학교에도 학적부는 있었을 것이나 그 양식과 형태가 오늘날 전해지지 않아서 그 내용을 알 수 없어서 아쉽다. 1911년 조선교육령에 의거 학칙이 제정되고 그에 따른 학적부 양식에 의해 1912년에 비로소 현존 학적부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一14一
즉, 1912년 1월 10일 御田伊太朗 당시 濟農 교장이 학적부를 정비 기록한 내역이 현존되어 비로소 밝혀진 것이다. 그 기록 내용을 보면 1910년 6월 부교수 洪淳寧에게 명하여 학적부를 작성하게 하니 당시 불완전한 출석부, 입퇴학 원서 등을 자료로 하여 현존 학적부가 1912년 1월에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학적부야 말로 본도의 최고의 학적부 자료이며 여기에 기재된 당시의 교육과정을 통해 일제 36년간의 濟農의 실업교육을 살펴보면 이를 4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1911~1920)를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시기라고 하면(-->제주공립농업학교 및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 시기라고 하면 )(2년제) , 제2기는 제주공립농업학교(3년제) 전기로서 1921년~1932년에 해당하고 제3기는 제주공립농업학교 후기로 1933년~1940년까지, 끝으로 제4기는 濟農이 5년제로 된 기간인 1941년부터 1945년 해방될 때까지의 시기가 이에 해당된다.
2. 일제 초기 (1911~1920)
결국 1910년대는 곧 6面 1校制, 1920년대는 3面 1校制, 1930년대는 1面 1校制가 완성되고 그 후 1面 2校制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육인구의 급증 등을 생각해보면 30년간의 이와 같은 증설을 가지고서는 우리 민족에게 너무도 허술한 교육정책이었다. 그리고 1면 1교란 것이 1학년에 1학급씩으로 출발했으니 보통교육을 받을 기회란 너무나 좁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엔 濟農에 입학하기 이전의 학력이란 제주, 정의, 대정의 3개 보통학교(4년제) 졸업과 각 지방에 산재해 있던 서당 수료 정도였다.
이런 관계로 제1기의 濟農은 오늘날 초등학교 5, 6학년의 교육과정으로 이해하면 될 것으로 본다. (삭제 )이때의 교과과정은 수신(1단위), 국어(6), 조선어와 한문(2), 수학(3), 이과(7), 체조(1), 농업(7), 실습(10) 등 총 37단위를 부과했으나 오늘날의 교육과정보다 그 단위 시수가 상당히 높게 부과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관계로 제1기의 濟農은 단순히 교과과정만으로만 놓고 보면 오늘날 초등학교 5, 6학년의 교육과정 정도로 오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한국의 교육체제는 오늘날처럼 중학교와 고등학교, 대학과 같은 교육기관이 미쳐 발달되기 이전단계로서, 실업학교는 비록 보통학교 다음 단계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최종 과정이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추가)
그리고 실업교육령 제20조를 보면'농업, 상업, 공업 등에 종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수적인 교육을 하는 곳'으로 설립하였고 실업학교를'농업학교, 상업학교, 공업학교 및 간이실업학교'로 설립하게끔 제21조에 명시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는 개설되어 10년간 운영되고 수업연한은 2년, 입학자격은 연령 12세 이상으로서 수업연한 4년의 보통학교 졸업자로 한 것은 다른 고등보통학교와 같다.
한편, 학교의 개학은 4월 1일부터이고 학년은 3학기로 제1학기는 4월 1일부터 8월 31일까지, 제2학기는 9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제3학기는 1월 1일부터 3월 31일로 정해졌다.
또 여름방학은 7월 31일부터 8월 31일까지, 겨울방학은 12월 29일부터 익년 1월 5일까지, 학년말 방학은 3월 26일부터 3월 31일까지로 정해서 실시했다. 당시는 수업일수가 오늘보다 많았으며 겨울방학이 매우 짧았던 것이 특색이었다. 그리고 휴업일 즉, 공휴일은 四方拜, 元始祭, 孝明天皇祭, 紀元節, 春季皇靈祭, 神武天皇祭, 秋季皇靈祭, 神嘗祭, 天長節 등이었는데 일제 당국이 얼마나 황민화 교육에 열을 올렸나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신입생 선발은 신체검사와 학력시험에 합격한 자로서 입학을 허가했으며 학력시험 과목은 국어(일본어)와 산수 두 과목만의 성적으로 결정했다.
당시 2년제의 濟農을 나온 선배들은 거의 돌아가고 1990년 李基休(전 서귀농고교장: 1906년 생)의 증언을 기술하고자 한다.
李基休 옹이 1920년 4월 1일 입학할 당시 학교명 제주공립간이농업학교였으며 같은 해 10월 1일 조선교육령의 개정에 따라 제주공립농업학교로 개명되었다. (--> 제주공립농업학교로 개명되었다. : 10월 1일 조선교육령 개정과 하등 관계 없음)이 옹은 1922년 3월 18일 2년제로 졸업하게 되었으며 당시 교사는 오현단 앞에 있어서 교실 2개, 교무실 1개, 본관 건물 외로 별관 사무실 1동, 양잠실 1동, 돈사 1동이 있을 뿐이었다. 당시 학교 약도는 李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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休 옹의 기억으로 짐작할 수 있다.(『제농80년사 1』 , P 131 학교 부지 참조)
2. 학교 위치 : 오현고등학교 舊敷地인 오현단
당시 1학년, 2학년 각기 40명이 입학했으나 동기생(연 12회)은 25명만이 졸업하고 1년 후배(연 13회)는 19명이 졸업했는데 이로써 2년제는 마감하고 다음 기부터는 3년제가 시작된다. 당시 교장은 자유주의사상가 美馬米吉로 일본인이다. 그는 수신 교과를 가르쳤으며 학생 중에서 답안지에 한국인으로 황민화에 찬양하는 내용을 쓰면 오히려 감점을 했다고 전할 정도로 황민화교육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편이었다고 한다. 그는 1919년 4월 부임하여 1925년 10월 뇌일혈로 재임 중에 타계했다. 후일 그는 우리 도민으로부터 존경과 숭앙을 받았으며 도민들은 오현단에 공덕비를 건립하여 추모했다. 그러나 조국광복 후 일제의 잔재라 해서 그 비석이 파괴되어 없어졌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또, 당시 교사로는 森田 敎諭와 一宮正則 敎諭, 그리고 유일한 한국인으로 1913년 濟農을 졸업한 崔季淳 선배 등이 근무했다. 崔季淳은 모교를 졸업한 후 도일, 長崎農林을 졸업하고 실과교사로 근무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인인 도립병원장과 도청 직원 한두 명이 시간 강사로 교육현장에 나오기도 했다. 또 李基休 용의 1년 선배인 宋壬生 씨가 1921년부터 서무로 근무하게 되고 廳夫로는 양서방이라 불리는 이가 고용되었다.
당시 도내 수학여행은 없었고 도외 수학여행은 2주간에 걸쳐 실시됐다. 산지항을 출발, 부산을 경유 일본의 下關항에 도착, 門司를 경우 戶畑에 도착하여 戶畑육군병영을 시찰, 그리고 八幡제철소도 견학, 다음 福岡에 도착 농사시험장과 博多港 佐世保군항 등을 보고 久留米에서 숙박, 부산으로 돌아온 후 대구농업학교, 경성, 군산, 목포를 거쳐 제주 산지항에 도착했다고 술회하고 있다.
李基休 전 서농고 교장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학교 부지는 약 1천 평 정도였다는 것이다. 실습지는 약 1백 평, 논은 지금 동문시장 하천변 습지를 개간한 정도이고 뽕나무밭도 약 1백 평 정도이던 것을 3백 평 정도로 확장하였다고 한다. 축사는 돈사뿐인데 양씨가 관리하였으며 목초지 과수원은 전혀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또 이 옹이 회상하는 체육활동을 보면 운동기구란 운동장 모퉁이에 철봉만이 시설되고 체육시간에는 체조와 유희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가을 3개 학교 연합운동대회가 개최되었는데 참가교는 제주농업학교, 제주보통학교, 사립 일신보통학교(애월읍 신엄리 소재)이다. 경기 종목은 육상경기를 위주로 하였는데 당시 심판관 金應斗에 항의한 제농생 宋熺八이 종내 심판관을 구타해버린 불상사가 발생, 교사 崔季淳이 이를 말리기는 했으나 이후 보통학교 양교 사이에는 극한적인 대립과 갈등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또 1921년 구정을 앞두고 1학년생 白貴南의 주동으로'구정 날을 휴업일로 해 달라'는 진정서를 제출하여 학교 당국에서는 휴일 조치를 내렸다. 당시 학생들의 복장은 학생모를 쓰고 한복인 바지저고리를 입고 다녔으나 1921년 9월 도외 수학여행 당시 처음으로 하절 학생복을 입고 고무 구두(제주에서는 처음)를 신고 나갔다. 또 당시 수학여행 경비는 각자 부담으로 30원을 갹출하고 학교 부담 5원을 합쳐 희망 학생 10명이 一宮正則 敎諭 인솔 하에 떠났다고 한다. 당시 하숙비는 가을에 좁쌀 4斗, 여름철에는 精麥 4斗를 내면 한 달 치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3. 일제 중기(1921~1932)-3년제 농업 학교 전반기
이 기간은 3년제인 제주공립농업학교의 전반기에 해당하니 곧 1920년 10월 20일 (-->1922년 10월 22일)3년제 인
一16一
가가 된 후로부터 1932년까지의 가간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제1기가 제농의 창업기라면 제2기는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3년제 제동이 1920에 승격되고 1940년에 5년제로 승격되었는데, 1932년을 기점으로 전후기로 나누어 학교 발전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반도에는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난 다음 일본은'一視同仁'을 내세워 일본인과 추호도 차별을 두지 않겠다는 소위 서정쇄신을 내걸면서 한민족에 대한 유화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핵심은 경찰제도의 변경, 지방자치 제도의 개혁, 조선인 교육의 혁신을 들 수 있다. 특히 교육부분에서 諸學校 규칙을 수정해 나갔다. 그리고 전임 長谷川好道 총독이 수립하여 8년간에 걸쳐 실시하려던 3面 1校 설치계획을 4년간으로 단축시기고 민심을 새롭게 하기 위해 교육제도를 근본적으로 개정할 것을 이유로 해서 1919년 임시교육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익년부터 전반적인 교육조사를 명하였으니 이를 신임 齊藤實 총독의 소위 문화정책이라 한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2년제였던 제동은 1920년 10월 3년제로 승격되어 동시에 자유주의 교육자인 美馬米吉 교장이 부임하여 새로운 발전기의 濟農으로 돌입한다. 그러나 일제는 결국 우리 국민들의 교육발전을 꾀한다는 것을 표면적 구실로 하였으나 내면적으로는 한국민의 독립운동을 막는 새로운 제도를 모색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 濟農의 항일학생운동이 가장 세차게 일어났던 것이다(별항 기록).
제2기에 와서 조선교육령을 개정 공포했다. 1911년에 제정 공포한 교육령을 폐지하고 1922년 4월에 공포한 이 교육령을 제2차 조선교육령이라고 부른다. 새 교육령의 특징은 식민지 교육의 노골적인 표현을 피하고 일시동인으로 일본인과 차별 없는 교육을 하는 것처럼 학제 등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6년을 원칙으로 하여 과거 濟農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이 보통학교 4년 졸업이면 되던 것이 이 교육령에 의해 6년 졸업이 되어야 濟農에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자연 실업교과 내용의 수준도 높아졌다.
농업학교의 교과목을 보면, 지역 실정에 따라 농업과, 양잠과, 원예과, 축산과 또는 임업과 중에서 1학과 또는 2학과 이상을 설치하도록 하였다. 간이농업학교 시절의 학과목에 비해서 농업 학교의 교과목은 다양화, 전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교과목은 수신, 공민, 국어, 수학, 물리 및 화학, 박물(博物), 체조(무도 포함), 그리고 농업에 관한 학과목 및 실습으로 하되 수업 연한이나 지역 실정에 따라 지리, 역사, 부기, 도화, 수공, 외국어, 공업, 상업, 수산 및 기타의 학과목을 가설할 수 있다. 농업에 관한 학과목은 작물, 원예, 토양, 비료, 병해충, 축산, 가축 생리, 농산 제조, 양잠, 농업 경제, 조림, 농림 공학, 수의 등으로 분화되었다. 실습은 1학년은 2개월 이내, 고학년에서는 1개월 이내로 이를 연장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매주 교수 시수는 실습을 제외하고 24시간 이내로 하였다. 경우에 따라 30시간까지 과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필요한 경우에 야간 수업도 할 수 있도록 했다.
다음은 1929년 입학생의 학년별 이수 교과를 표로 나타낸 것이다.1)
물론 실습과정이 있으며 삼림 교과를 임학으로, 농제는 토목, 측량은 병충해, 토양농구는 토양비료, 비료 교과를 농구토목 등으로 그 교과 내용이 바뀐다든가 아니면 교과명이 변경되는 경우 등 학년도에 따라 변화된 때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농과 1개 학급만으로 3년 과정을 거치도록 했었는데 1931년 교과에 수의학이 추가되었음은 눈여겨 둘만한 일이다. 아울러 일반 보통교과서도 수학 교과가 산수 대수, 기하로 분화되고 이과이던 것이 물리 화학 생리 동물 식물로 분화되었다. 1925년에 이르러 영어 교과가 처음 부과됐음을 학적부를 통해 알 수 있다.
1) 제주도교육위원회, ≪제주교육사≫ 1979.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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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목 학년 |
수신 |
공민 |
국어 |
조선어 및 한문 |
산술 및 기하 |
대수 및 기하 |
영 어 |
지 리 |
역 사 |
물 리 |
화 학 |
동 물 |
식 물 |
광 물 |
인체 생리 |
체 조 |
제1학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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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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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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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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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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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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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성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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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목 학년 |
토양 비료 |
작 물 |
원 예 |
잠 업 |
축 산 |
임 산 |
수 산 |
농 제 |
경제 법규 |
측 광 |
수 의 |
병충해 |
실습 |
조행 |
합계 |
평균 |
석차 |
제1학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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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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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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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학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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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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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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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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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학년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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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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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성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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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당시 학생이던 연 18회(1928년) 졸업생의 증언을 통해 당시의 상황을 알아본다. 당시 입학생의 응시자격은 보통학교 4학년 졸업생과 6학년 졸업생을 동시에 인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연 19회 졸업생들의 신입생 입시를 1924년 실시했는데 그 때까지 6년제인 보통학교는 제주보통학교, 정의보통학교, 대정보통학교, 조천보통학교 뿐이었으며 그밖에 애월, 한림, 금녕, 성산, 서귀교와 사립으로 화북, 하도교 등은 4년 졸업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24년의 입시에는 모집정원 40명에 173명이 지원해 당시로서는 사상 최고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 이유는 애월, 한림, 금녕, 성산 등 대부분의 4년제 보통학교 제 1회 졸업생이 대거 지원한 때문이었다. 그러자 처음으로 불합격자 가운데 30여 명을 선발, 제농 부설학교에 입학시켜 1년 과정으로 기초교육을 보충해주기도 했다. 이 부설학교 학생은 실습과 실험을 위주로 하는 교육이었으며 1년 과정 수료 후 다시 제농 신입생 입시에 응모하여 합격하면 영광스러운 제농인이 되고 불합격이 되면 낙향하거나 아니면 도일하여 오사카나 동경 등지의 야간 중학과정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보통학교 4년 과정을 졸업해서 그 해 제농에 입학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애월보통학교 제1회 졸업생인 金 廷淳옹은 당시 혼자 합격했는데, 당초에는 불합격이 될까봐 입학원서 내는 것을 주저하던 끝에 맨 나중에 원서를 제출하니 수험번호가 173번이라는 것을 오늘날까지 기억하고 있다고 회고했다.
당시의 교사로 기억되는 분은 조선어와 식물을 가르쳤던 崔季淳, 일본인 교사로는 농업과 양잠의 山崎, 영어의 柳田 선생이라고 한다.
또 김 옹은 동기생들의 활동으로 도 일주 수학여행, 목포에서 개최한 상업박람회 견학, 한라산 등반 등과 학교 체육장이 비좁아 다른 구기는 어려웠으나 정구를 즐겼으며 후일 제농교사를 역임한 고 高奉植 동기생과 함께 콤비로 라켓을 잡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다음에는 연 23회(1933년) 졸업생의 증언을 들어보기로 한다. 이들의 재학기에는 杉崎勝藏선생이 교장을 맡았다. 이때는 보통학교 6학년 졸업한 자만이 제농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런 관계로 학교 교육내용도 체계화 되었을 뿐 아니라 실습 교육과 실험 교육도 진일보한 상태였다. 밭 실습장은 현재의 동문로타리 주변과 제주동교 자리, 과수원은 현재의 농협중앙회 자리, 논 실습장은 동문천 냇가, 축사는 가락큰물 근처, 목초지는 열안지오름이었다.
그리고 수학여행은 가장 추억 깊은 행사로서 1학년 때는 한라산 등반을 하거나 아니면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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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 수학여행이고, 2학년이 되면 목포, 서울 등 한반도 견학, 3학년 때는 일본 각 도시를 견학했다고 한다. 이 시기의 다른 동기에서는 만주까지 수학여행을 한 때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1931년 9월에 소위 만주사변을 일으켜 다음 해에 위성국으로서의 민주국을 수립했으니 대륙으로의 꿈을 키운다는 그들의 정책에서 나올 법한 일이라 하겠다.
어떻든 이 연 23회 졸업생으로서 현존하는 金東翼 옹은 과거를 회상하며 무엇보다도 당시'農'자의 둘레를 나락 이삭으로 둘러싼 모표가 달린 모자를 쓰고 다녔던 그 시절 그 긍지는 대단했다고 술회한다. 제농은 도내 준재들만이 모여든 것이 아니라 전남 전역에서 재력과 학력 면에서 갑종(5년제)중학교에 갈 수 없는 조건에 있는 자는 제농으로 수학차 왔다는 것이다. 연 18회는 31명 졸업생 중에서 4명이 전남에서 온 학생이었고, 연 23회에서도 23명 중 5명이, 또 연 26회에서도 37명의 졸업생 중 13명이 전남 출신이었음을 학적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출신군을 열거한다면 해남, 무안, 나주, 고흥, 완도, 강진, 함평, 장성, 영암 등지가 많고 이외로 광주, 순천 여수, 보성, 영광 등지에서도 약간 명이 들어와 졸업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1928년 6월에 만든 학교 일람표2)의 내용을 통하여 학교 실정을 살펴보자
1928년 6월 현재 교직원은 모두 9명으로 교장과 교유 5명, 雇員 1명, 小使 및 농부 각 1명이었으며 시간 강사와 校醫는 특히 도청과 경찰서 및 도립병원 등에서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교장 스기사키 가츠죠(杉崎勝藏)는 수신, 法經, 農汎, 양잠을, 교유 다카하시 겐지로(高橋憲治郞)는 토양 비료, 普作, 물리, 식물, 역사, 국어를, 야마가와(山川助夫)는 수학, 측량, 영어, 양잠, 화학을, 교유 이치미야(一宮正則)는 국어, 특작, 지리, 물리, 광물, 수학, 주산, 農製, 병충해를, 교유 崔系順은 동물, 식물, 축산, 임업, 수산, 조선어와 한문을, 교유 모리타(森田親厚)는 국어, 체조, 원예, 농구, 토목을, 校醫 기바(千葉元枝)는 시간 강사로 인체 및 생리 위생을 가르치고, 雇員 宋壬生은 서무와 회계의 일을 맡아 보았다.
1928년 당시 재학생은 1학년 50명, 2학년 46명, 3학년 39명으로 모두 135명이었다. 학생의 본적별 학생 수는 제주 100명, 전남 32명, 경북 1명, 일본인 2명이었다. 학생의 숙소별 통계는 기식이 17명, 하숙이 71명, 통학생이 47명이었다. 학생의 연령은 1학년 최고 19.1세이고 최저는 12.9세, 2학년은 최고 20.2세이고 최저 13.8세, 3학년은 최고 21.2세이고 최저는 17.2세였다. 보호자의 직업은 농업 126명, 관리 4명, 상공업 5명으로 되어 있다. 당시 학교 규모는 교지 1,075평, 운동장 750평, 실습지 5,107평, 도로 기타 959평이고 학교림이 교내에 1,000평, 또 제주시 용강리에 3만 2,729평이 있었다.
아울러 실습지로는 畓作 및 보통 작물포 815평, 특용 작물포는 답 200평과 전 3冊평, 보통작물포 266평, 소채원 1,314평, 桑園 3,600평, 과수원 300평, 임업 묘포 338평, 見木園 205평, 교재원 100평, 과수 및 화훼 묘포 50평, 桑苗圓 100평, 화단 200평 등이다. 또 건물로는 교실 78평, 교재실 25평, 간이 침실 28평, 숙직실 11.3평, 小使室 6.8평, 渡廊下 4.5평, 온실 6.3평, 교장 관사 27.8평, 교원 사택 13.4평, 農夫舍 6.8평, 牛舍 3.6평, 鷄舍 4평, 豚舍 4평, 변소 5평, 기숙사 23평, 식당 5평, 취사장 5평, 기타 19평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 밖에 졸업생의 취업 실태는 5년 간(1922~1927)의 통계로 나타나 있다. 졸업생 146명 가운데 실업계에 종사하는 자 42명, 관공서 공무원 41명, 교육 공원 42명, 진학생 14명, 기타 7명이었다.
한편 1924년 입시에는 40명 모집에 173명이 지원해서 그때까지로 보면 경쟁률이 가장 높았던 때다. 그 이유는 2차 교육령에 의한 학제의 개편으로 보통 학교 4년 졸업생과 6년 졸업생에게 똑같이 응시 자격을 부여했으며 당시 애월, 한림, 김녕, 성산의 4년제 보통 학교
2) 제주농고, 학교 일람표, 192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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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졸업생들이 대거 지원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고 그만큼 제농에 입학할 수 있는 것은 크나큰 긍지였다.
이 학교에는 당시 제주가 전남에 속했던 관계로 갑종(5년제) 중학교 진학이 곤란한 전남 각지의 학생들이 입학하기도 했다.
이 당시는 수학 여행을 비롯하여 한라산 등반, 체육 대회 등의 행사에 대한 인기가 대단했으며 농고의 특성을 살려서 농작물 품평회를 개최하여 주민과 학생들부터 환영을 받았다.
특히, 미마(美馬) 교장은 제주체육회를 결성하여 육상부, 축구부, 야구부, 정구부 등을 만들기도 하여 학교 체육이 활성화되었다.
4. 일제 후기(1933~1940)- 3년제 농업 학교 후반기
이 기간은 3년제인 제주공립농업학교의 후반기에 해당하니 곧 1933년 이후로부터 1940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의 특징은 만주를 점령하여 괴뢰정부를 수립하는데 성공한 일제가 더욱 자신을 얻어 계속 대륙 침략을 감행, 드디어 1937년 중국에서 노구교사건을 조작하여 전면적인 중일전쟁으로 몰고 갔던 때이다.
그러나 광대한 중국에서의 전쟁은 일본의 생각과는 달리 지역적으로 확대되어가 장기전으로 변해 이에 일본은 완전히 전시체제로 변했다. 그래서 1936년에 새로 임명된 조선총독 南次郞은 우리나라를 대륙침공의 병참기지화 하고 일본의 전시체제를 강화하기에 이르렀고 일본인들이 그동안 표면적으로 은폐하여 왔던 우리에 대한 식민지정책과 일본인화 정책을 노골적으로 감행, 공포정치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식민지교육의 본질은 한 마디로 훈련받은 노예적 인간의 양상이며 이를 위해 민족성을 말살하는 한편, 초보적 기능만을 주고 민족분열에 협조할 인부 친일인사의 육성에 초점을 두었으며 겉으로는 황국신민화를 표방하였다. 따라서 교육령 개정 시의 주요 목적은 식민지 정책의 수정에 따른 그 정책 수행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발맞추어 일제의 식민지 정책 내지 교육정책도 모습을 달리하게 되었다. 즉, 점진적인 동화정책으로부터 급격한 황국신민화 정책이 추진되었으니 모든 한국인이 일제의 황국신민화로서 자각과 신념을 갖고 일본인과 같은 정신적 자세를 갖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1936년 8월 宇垣一成의 뒤를 이어 부임한 南次朗 총독은 1937년 金大羽라는 친일 민족반역자가 소위'황국신민서사'를 만들어 이를 행사 대마다 학생과 일반인에게 암송하도록 강요하였다. 이'황국신민서사'를 우리말로 고쳐 옮겨 본다.
1. 우리는 황국신민이다. 충성으로 君國에 보답하련다.
2. 우리 황국신민은 서로 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련다.
3. 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 힘을 길러 皇運을 선양한다.
이 제3기 때의 제농 교장 杉崎勝藏는 1932년 3월에 이임하고 그 후임에 芳賀金彌가 착임, 황민화 교육에 열을 올리다가 1939년 3월에 이임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대 동아건설이라는 미명 아래 침략정책을 수행하는데 교육의 수단이 절대로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특히 芳賀金彌 교장은 1938년 3월에 개정한 조선교육령에 의해 그들이 말하는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전시체제에 부응하는 교육을 시행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즉, 조선교육의 3대 강령이라는 國體明徵, 內鮮一體, 忍苦鍛鍊을 주입시키면서 학생들에게 황실숭배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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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을 위한 희생과 봉사를 강요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때 제농에서 실시했던 실업교육을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실업 교육과정이 3년제 전기 보다 더욱 세분화 구체화 실용화된 느낌이 있다. 이는 일제가 취한 교육에 있어 식민통치에 필요한 실용적 인물 양성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이다.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실업학교에 주안점을 두어 농업 및 축산에 대한 생산성을 높였는데 이에는 그들의 수탈 목적이 내포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실업교과는 농업대의(1학년 공통), 토양(2학년 공통), 비료(2, 3학년 공통), 농구토목(2, 3학년 농과, 2학년 축산과), 작물(1, 2, 3학년 농과, 1, 2학년 축산과), 원예(2, 3학년 농과, 2학년 축산과), 병충해(2, 3학년 농과, 2학년 축산과), 양잠(1, 2학년 공통), 임업(1, 2, 3학년 농과, 1, 2학년 축산과), 측량(2, 3학년 농과, 2학년 축산과), 수산(2학년 공통), 경제법규(3학년 공통), 농축제조(3학년 공통), 축산(1, 2학년 농과, 1, 2, 3학년 축산과), 수의(3학년 축산과), 소채(2학년 공통), 축산경제(3학년 축산과) 등의 교과가 부과되었으며 이를 3년간에 걸쳐 이수해야만 졸업할 수가 있었다.
특히 이 3년제 후반기에 와서 특징을 지을 수 있는 일은 과거 농과만이 있었던 것이 농과, 축산과로 설치학과가 분화되었다는 사실이다. 연 26회 졸업생(1936년)부터는 농과 재학생은 농업 전공과정을, 축산과는 축산 전공과정을 이수 받고 졸업하게 되었다. 그러면 3년제에서 농과, 축산과 졸업생 수를 살펴보기로 한다.(표 13)
졸업기별(졸업연도) |
농 과 |
축 산 과 |
계 |
연26회(1936) |
25 |
12 |
37 |
27(1937) |
33 |
10 |
43 |
28(1938) |
42 |
5 |
47 |
29(1939) |
33 |
7 |
40 |
30(1940) |
31 |
18 |
49 |
31(1941) |
21 |
15 |
48 |
32(1942) |
30 |
18 |
50 |
33(1943) |
29 |
21 |
37 |
34(1944) |
25 |
12 |
37 |
35(1945) |
31 |
16 |
47 |
이때에 와서는 보통 학교 6년을 졸업해야 입시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에 4년제 보통 학교 졸업생들은 6년제 보통 학교 5학년에 편입하여 5.6학년을 마친 후 진학했으며 교육 내용도 체계화되고 실습 교육과 실험 교육이 진일보한 상태였다.
이때에는 학교 시설도 상당한 규모로 갖추어졌는데 1933년 제2차 학생 기숙사가 완공되고, 용강리 임야 17정보, 교래리 임야 47정보, 중문면 야산 647정보를 확보하여 학교 실습림으로 만들었다. 이때의 실습지로는 제1실습지 보통 작물포는 지금의 제주동교부터 주정 공장이 있었던 근처까지 수만 평이고, 제2실습지 채소 작물포는 동문로터리 주변 약 1만 평에, 과수포는 북군 농협이 있었던 부근 3,000여 평이었으며 축사는 가락천 부근에 확장 시설을 하여 돼지, 소, 말, 양, 면양 등을 기르고 교내에는 농산 가공실이 있었다.
당시 교사 진용으로는 원예를 가르쳤던 교무주임인 高橋憲次郞 敎諭, 수학과 측량을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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쳤던 山口助夫 敎揄, 영어와 축산의 福田 敎諭, 교련을 가르쳤던 장교인 森田 교관, 원예를 가르쳤던 新海 敎諭, 국어(일본어)를 가르쳤던 釘宮 敎諭, 수의를 가르쳤던 倉元 敎諭 등이 기억에 떠오르며 유독 한국인으로서는 함북 태생인 趙慶來 敎諭 한 명만이 있었는데 그는 보통작물을 가르쳤다고 한다. 서무과에 근무하던 宋壬生 주사는 주산을 맡아 가르치고 강사로는 도립병원 의사, 島廳 직원 중에서 출강했었다. 특히 유도는 경찰서 순사부장이던 石鎭慶(한국인)이 맡아 가르쳐 제농의 유도부 팀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었다.
당시의 입학시험도 국어와 산수 두 교과의 성적으로 합격을 결정했는데 이는 타 지방에서도 그 당시 하던 방법이다. 신입생은 50명을 선발하였다. 2학년 때 한라산 등반을 실시하는데 2박 3일의 행군이 주였으며 한라산에서 1박, 또 서귀포에서 1박하여 돌아왔다.
그리고 가장 즐거웠던 행사는 3학년 때 20일간에 걸쳐 일본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그 발전한 문물에 접할 수 있었던 때라고 한다. 산지항을 출발하여 여수를 거쳐 일본의 下關, 大阪, 東京, 日光, 京都 등 주요 도시를 순회 견학하고 關釜 연락선으로 부산을 거쳐 제주로 돌아온 일이 추억에 길이 남는 일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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