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지의 섬…
그래서 아직 순수하다
최근 행정안전부는 서해와 남해에 있는 섬 10곳을 선정해 ‘명품 섬’으로 탈바꿈하기로 결정했다. 인천에서는 강화군 교동도와 옹진군 이작도가 선정되었다. 이들 섬에는 내년부터 2014년까지 4년간 총 250억원의 국비(200억원)와 지방비(50억원)가 투입돼 섬의 경관과 풍부한 보유자원을 활용한 특성화 사업을 벌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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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영화, 교동읍성
교동도는 품고 있는 역사와 경관을 볼 때 이미 명품 섬의 반열에 서 있다. 빼어난 아름다움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저 무심히 자기 자리만 지켜왔을 뿐이다.
교동도는 강화군 섬 중에서 강화본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서해와 예성강, 임진강 그리고 한강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사람과 물자가 모여든 곳이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수도 개경과 가깝고 중국을 오가는 바닷길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섬이다.
한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지면서 교동도의 북부 해안선은 이제 휴전선의 남방한계선이 되었다. 민통선(민간인출입통제선) 안에 있는 섬이기 때문에 해병대의 출입통제를 받는다. 출입이 편치 않아 외면 받았던 땅. 그 불편함과 통제의 사슬은 개발의 손길까지 막아줌으로써 자연의 순수함과 농촌의 순박함을 그대로 남겨놓게 했다.
도호부와 수영(水營) 등 굵직굵직한 행정기관이 설치됐던 교동도에는 그때의 영화를 말해주는 잔재가 아직도 남아있다. 대표적인 흔적은 교동읍성. 읍성은 읍내리 577번지 일대에 있다. 이 읍성은 교동이 도호부로 승격되고 경기수영이 옮겨오면서 축조된 것으로 전해진다. 둘레는 305m이며 높이는 약 2.4m로 동, 남, 북 세 곳에 각각 성문을 설치했다.
읍성은 세월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했다. 동문과 북문은 언제 무너져 내렸는지 알 수 없고 남문은 1921년 때의 세찬 폭풍우로 문루가 없어졌다. 현재는 무지개 형태의 홍예문만이 달랑 남아있다. 문 안 바로 앞에 양옥집이 자리하고 있어 언뜻 보면 홍예문이 마치 이 집의 문처럼 보일 정도로 초라하다. 안쪽 벽에는 ‘南樓(남루)’ 바깥벽에는 ‘三道統門(삼도통문)’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나마 남아있는 성곽은 민가의 담장으로 쓰이고 있거나 잡초에 묻혀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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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상 가장 먼저 안치한 향교
교동도에는 우리나라 향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자상을 중국으로부터 가져다 봉안한 유서 깊은 향교가 있다. 고려 충렬왕(1286년) 때 유학자 안유(안향)는 원나라에 갔다오는 길에 이곳에 닻을 내려 공자의 화상을 교동향교에 모셨다.
왜 안유는 이 향교에 처음 공자상을 봉헌했을까. 옛날에 교동도는 중국을 오가는 바다 길목에 있어 대부분의 배들은 이곳을 거쳐 갔다. 안유 역시 중국에서 돌아올 때 교동도를 거쳐야만 했는데 이 향교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향교는 섬의 주 봉우리 격인 화개산(해발 259m)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향교로 오르는 오솔길 초입에 다다르면 읍내리 비석군을 만날 수 있다. 이 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 도호부사 등의 공덕과 선정을 새겨놓은 33기의 비석을 한데 모아놓은 곳이다. 비석군을 뒤로하고 향교에 이르면 붉은 홍살문과 하마비(下馬碑)가 먼저 방문객을 맞이한다. 향교는 대성전을 비롯한 오밀조밀한 부속건물들이 주위의 경관과 함께 멋지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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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세트장 같은 대룡시장
막상 교동도에 들어오면 섬에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 사방에 넓은 논과 밭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섬 대부분이 간석지로 조성된 교동도는 ‘교동에서 풍년이 들면 교동사람들은 13년을 먹고, 강화 전체 사람들은 3년을 먹고 남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비옥한 토질을 자랑한다. 몽골군에 대한 항쟁이 장기간 가능했던 이유도 이처럼 풍족한 농사가 뒷받침됐을 것이라는 풀이다.
교동도에서 제일 높은 화개산(260m)을 오른다. 화개산은 조선 명종 때 쌓은 석성이 있다. 성곽의 돌들은 70년대 새마을운동을 하면서 마을에서 도로를 만들 때 사용하고 지금은 정상에 일부만 남아 있다.
면사무소 쪽 뒤편에서 정상으로 가는 중턱에는 연산군이 귀양왔던 유배지터가 있다. 연산군은 이곳에서 3개월 넘게 위리안치(圍籬安置) 당하다가 역질에 걸려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그 터에는 유배지였음을 알리는 비석 하나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교동은 연산군뿐만 아니라 안평대군, 광해군, 임해군 등 조선시대 폐군과 종친의 유배지로 자주 활용됐다. 급한 바다 물살이 길을 막아 외부인과의 접촉을 차단할 수 있고 한양과 가까워 유배인들에 대한 정보가 쉽사리 전달될 수 있다는 장점이 컸기 때문이다. 봉수대와 화개사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동쪽으로는 강화도, 서쪽으로는 볼음도, 남쪽으로는 석모도, 북쪽으로는 연백군이 훤히 보이는 아름다운 둘레길을 형성하고 있었다.
요즘 교동도에서 외지인의 방문이 가장 빈번한 곳은 대룡시장이다. 시간이 멈춘 듯한 1950~60년대 영화세트장 같은 이 시장이 얼마 전에 TV 프로그램 1박2일에 소개되었기 때문이다. 총 길이가 200m가 채 되지 않는 좁은 시장통에는 이발관, 장의사, 약방, 다방 그리고 시계수리점 등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6.25 사변 때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이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던 골목인데 전쟁이 끝나고 군에서 무상으로 지원해 준 나무와 합판을 사용해 주춧대를 놓고 가게를 지었다고 한다.
요즘 교동도는 변화의 거대한 물살 앞에 섰다. 조력발전소와 연륙교 공사가 계획되었거나 진행되고 있다. 발전소와 다리가 완공되면 섬은 어쩔 수 없이 손때를 타게 된다. ‘유배지의 섬’ 교동이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궁금해 진다.
가는 길
강화대교를 건너서 읍을 지나 송해면으로 향한다. 하점초등학교와 하점면사무소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창후리 방향으로 달리면 선착장(933-4268)이 나온다. 교동도 가는 배는 수시로 있다. 선착장에 해병대 초소가 있는데 신고서를 간단하게 기재하면 별 어려움 없이 배를 탈 수 있다. 요금(편도)은 일반 1천5백원이며, 승용차는 1만5천원(운전자 포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