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板門店 JSA: Joint Security Area)
서울에서 북북 서로 약 60km 지점, 북위 37° 57' 20″, 동경 126° 40' 40″,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조산리,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 휴전선)상에,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측과 공산측(북한ㆍ중국)이 군사정전위원회 회의를 원만히 운영하기
위하여, 1953년 10월에 설치한, 동서 800m, 남북 400m 장방형의 군사정전위원회 본부구역으로 UN측과 북한 측
‘공동경비구역(JSA)’ 이다.
1951년 10월 25일 이곳에서 휴전회담이 시작 되었으며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조인되면서 이곳 명칭으로 결정되었다.
공동경비구역 설치 이후 쌍방 군정위 관계자들은 구역 내에서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 8.18 도끼만행사건 이후
군사분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이 분할경계를 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는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다.
'판문각' 북한측 본부 건물 이다. 북한 경비병 한명이 남쪽을 보고 있다. 서로 사전 약속이 되어 있어서 남한 쪽 방문객이 오면
북한 경비병들이 피해 주고, 북한 쪽 방문객들이 오면 남한 경비병들이 피해 준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북한 경비병들을 딱 한명 밖에 볼 수 없었다. 이 병사도 우리가 사진 촬영을 하자, 기둥 뒤로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
왼쪽 T2 파란 건물이 회담장이다. 남한 경비병 앞 건물과 건물 사이 회색빛 콘크리트 띠가 군사분계선이다.
방문객 통제가 심해 지정된 장소에서 짧은 시간동안만 사진 촬영이 허락 되었고, 안내 병사를 따라 두줄로 대형을 이루어
회담장 안(內) 약 5분 정도 관람 외에는 다른 장소나 건물 관람이 허락 되지 않았다.
판문점 촬영도 남한 쪽 본부건물 바같 계단 위에서 북쪽 '판문각'을 향해서만 가능 했고, 그외는 허락 되지 않았다.
하얀색 콘크리트 띠는 회담장 밖 군사 분계선, 자갈 깔린곳이 남한이다.
회담장 회담 테이블 정면 헌병 기준으로 왼쪽(위쪽)이 북한 측, 오른쪽(아래쪽)이 유엔 측,
판문점에서도 군사 분계선을 넘어 가면 월북이지만 회담장 안에서는 허용 된다.
북한 측 경비병을 향해 소리를 질러서도 않되며, 북한 쪽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하여도 안되었다. 또한 우리 측 경비병에게도
절대로 말을 걸면 안된다.
사진 속 하얀 건물 오른 쪽 줄로 이어진 하얀색 봉이 남북한 군사분계선(MDL: military demarcation line 휴전선)이다. 한반도 동쪽
동해바다 에서 서해 바다까지, 155마일(약 250km) 뻗어 있다. 이 선을 기준으로 남북 각각 2km씩 너비 4km를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
DMZ:demilitarized zone)라 한다.
이 사진을 촬영 하면서, 카메라가 북한쪽 방향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찍는것 같자, 남한 경비 장교가 다가와 사진 내용을 확인 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
원 이름이 ‘널문다리’로 판문점 서쪽 사천 내에 놓여 있다, 휴전 이후 1953년 8월 5일∼9월 6일까지 1개월에 걸친 포로교환
(8만 2493명의 북한군과 중국군 포로가 북으로 송환되고, 1만 3444명의 유엔군 포로가 남으로 송환)과 1953년 10월 15일∼
12월 23일까지 북한 송환거부 포로 2만 2000여 명의 중 북한군 188명, 중국군 440명이 이 다리를 통해 돌아가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었다.
지금은 베어져 그 상징물만 남아 있는 1976년 8월 18일 북한 경비군에 의한 도끼만행사건의 발단이 된 미루나무가 근처에 서 있었다,
판문점 답사 차량을 타고 지나며 잠시 정차 하여 차창 밖으로 볼 수는 있으나 촬영은 허락 되지 않았다.
판문점에 들어가기 전, 도라산역 근처 개성공단 출입문 이다, 이 문을 통해서만 개성 공단을 왕래 할 수 있다.
전광판 문구들이 가슴 한 구석을 아리게 했다. 통일이 되었다면 이런 문구들은 필요 없는데...
멀리 보이는 건물 들이 우리가 북한 땅에 조성한 개성 공단이다.
첫댓글 분단의 아픔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경험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저도 2014년 7월에 다녀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