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남선 교수님과 함께하는 풍수답사입니다. *
정기답사는 홀수달 둘째주 일요일에 실시하며 일정에 변동이 생길 시
미리 공지하겠습니다.
이번 답사는 추석명절 연휴인 관계로 한주 뒤인 9월 18일 시행합니다.
안성시 일원에 있는 세종대왕 처가쪽 윗대를 답사합니다.
소헌왕후의 증조부인 "심용 선생 묘"와 증조모인 "심용 선생 부인 묘"
그리고 어머니인 "삼한국대부인 순흥안씨 묘역"을 집중 분석합니다.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여 운영진이 활동하다보면 약간의 제약이 있을수도 있으니
넓은 마음으로 헤아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1. 일시 : 2022년 9월 18일 (일요일)
2. 장소 및 시간 : 아주대 정문 오전 9시 집결
3. 답사지
1) 청송 심씨 3세조 심용 선생 부인 묘 (안성시 도기동 산64)
묘갈(번역문)
부인(夫人)의 성(姓)은 김씨(金氏)이니 청화부원군(靑華府院君)에 증직(贈職)된 심공(沈公) 휘(諱) 용(龍)의 배위(配位)이다. 公은 고려조(高麗朝)에 벼슬하여 전리정랑(典理正郞)이 되었고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덕부(德符)로 좌시중(左侍中) 청성백(靑城伯)이요 시호(諡號)는 정안(定安)이며 次男은 원부(元符)이다.
조선조에 이르러 정안공이 귀(貴)하게 됨으로써 공에게 문하시중 청화부원군을 추봉(追封)하였으나 부인의 은봉(恩封)과 계관(系貫)은 세대가 오래되어 모두 전(傳)함이 없고 유독(唯獨) 정안공의 행장(行狀)에 신해년(辛亥年)에 모부인(母夫人)의 상을 당하여 安城에서 시묘(侍墓)살이를 하였다고만 기록되었으니 신해년은 즉 공민왕(恭愍王) 이십년이다.
묘는 군서(郡西) 침두리(砧頭里:지금의 道基里)에 있고 그 동북쪽으로 오리쯤 되는 실왕리(實旺里:지금의 堂旺里)에 공의 묘가 있으며 자손은 세월이 오래되어 더욱 번창해졌다. 정안공의 아들은 安孝公 온(溫)이요 안효공의 아들은 공숙공(恭肅公) 회(澮)로 3대가 정승을 지냈고 안효공의 따님은 소헌왕후(昭憲王后)요 6대손은 인순왕후(仁順王后)로 다 왕비가 되어 그 복의 혜택이 무궁하였고 公主에게 장가들어 도위(都尉)가 된 분이 둘이요 정승이 되어 국가의 주석(柱石)이 된 분이 대를 이어 나왔고 금관자(金貫子) 옥관자(玉貫子)의 높은 벼슬과 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에 벼슬한 분이 또한 數十百人 이었으니 공과 부인이 덕을 쌓고 善行을 하지 않았으면 어찌 능히 이렇게 되었으리오.
묘소에 아직도 비갈(碑碣)이 없어서 후손 부제학(副提學) 유(攸)와 판중추(判中樞) 재(梓) 현감(縣監) 사홍(思泓) 참지(叅知) 평(枰) 감사(監司) 벌(橃) 대사헌(大司憲) 단(檀) 사인(士人) 해(楷)가 중외(中外)의 모든 일가들과 의논하여 봉분(封墳)을 개축(改築)하고 성금을 모아 비갈을 세움에 나에게 그 사실을 지으라하니 이와 같이 서술(叙述)하고 세계(世系)가 갈라진 것은 대략 부원군의 묘표(墓表)에 기록되어 있다.
숭정기원후(崇禎紀元後) 67년 갑술(甲戌:1694년) 가을에
2) 청송 심씨 3세조 청화부원군 심용 선생 묘 (안성시 당왕동 산19-16)
묘갈(번역문)
우리 청송 심씨는 고려 말 때부터 세상에 나타나니 문림랑위위시승(文林郞衛尉寺丞)을 지낸 휘 홍부(洪孚) 이분이 비조(鼻祖)가 된다. 시승(寺丞)이 합문지후(閤門祗侯) 휘 연(淵)을 낳고 지후가 공(公)인 휘 용(龍)을 낳았는데 벼슬이 전리정랑(典理正郞)에 이르고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문하시중청화부원군(門下侍中靑華府院君)에 추봉(追封) 되었으며 묘는 안성군북실왕리(安城郡北實旺里)에 있다. 부인 김씨의 묘는 군의 서쪽인 침두리(砧頭里)에 있어 공의 묘에서 五리쯤 떨어져 있다.
대수가 이미 멀고 묘에는 현각(顯刻)이 없기 때문에 공의 생졸과 행적과 부인의 계보나 관향 같은 것이 모두 인몰(湮沒)되어 전함이 없다. 우리 종족을 회고해 보면 비조로부터 삼세인 공에게 와서 자손이 처음으로 번연(蕃衍)하고 창대해져서 대대로 명공(名公)과 석보(碩輔)가 나와 나라의 주석(柱石)이 됐다. 또한 두 번이나 왕비(王妃)가 탄생되었으므로 억만년의 기초를 만들어 무강(無疆)한 아름다움이 있게 하였다.
아! 깊지도 아니하고 멀지도 아니하며 두텁지도 아니하고 무성하지도 아니한 적루(積累)에서 나온 것임을 여기서 징험할 수가 있다.
공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맏이는 좌시중청성백(左侍中靑城伯)으로 시호(諡號)가 정안공(定安公)인 휘 덕부(德符)이며 다음은 휘 원부(元符)다.
정안공에게는 일곱 아들이 있는데 인봉(仁鳳)은 도총제요, 의구(義龜)는 판사요, 계년(繼年)은 목사(牧使)요, 징(澄)은 부윤이요, 온(溫)은 영의정청천부원군(領議政靑川府院君)으로 시호가 안효(安孝)다. 이분이 성녀(聖女)를 낳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됐다. 종(淙)은 청원위(靑原尉)로 태조(太祖)의 따님에게 장가들었고 정(泟)은 동지총제(同知摠制)가 됐다. 이로부터 내외의 많은 자손을 다 기록할 수는 없으나 부윤과 안효의 두 집 자손이 가장 번성하니 관찰사 선(璿)과 좌참찬 광언(光彦)과 영의정 지원(之源)과 지사(知事) 지명(之溟)과 청평위(靑平尉) 익현(益顯)은 부윤의 후손이요.
안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준(濬)은 영중추(領中樞)요, 회(澮)는 영의정 청송부원군으로 시호가 공숙(恭肅)이며 결(決)은 영중추로 시호가 정이(靖夷)다. 기백(圻伯) 대(岱)와 참판 연(演)은 모두 준(濬)의 후손이다. 대(岱)는 임진년 병란에 사절(死節)하였고, 공숙의 손자 사인(舍人) 휘 순문(順門)은 직언(直言)을 하다가 연산주 때 화(禍)를 입었다.
아들 넷이 있는데 맏은 영의정 연원(連源)이요, 그 아들 청릉부원군 강(鋼)은 곧 우리의 인순왕후(仁順王后)의 황고(皇考)가 된다. 그 때 공의 묘우(廟宇)가 친진(親盡)되어 신주를 매안후에 인순왕후께서 하교(下敎)하기를
『꿈에 할아버지께서 원하시기를 신주를 묻지 말라고 하였으므로 빨리 신주를 모시고 환궁하여 그 자손이 제사 지내게 하라.』 하였으니
아! 공이 가신지 이미 백팔구십 년이 지났으나 그 정상(精爽)이 유통하여 감격시킴이 이와 같으니 기이하도다. 다음은 수찬(修撰) 달원(達源)이요, 다음은 동돈녕 봉원(逢源)이요, 다음은 우의정 통원(通源)이다. 그 뒤에도 대사헌 의겸(義謙)과 판서 충겸(忠謙)은 강(鋼)의 아들이다. 좌의정 희수(喜壽)는 봉원(逢源)의 손이요, 판서 액(詻)과 판서 즙(諿)은 달원(達源)의 증손(曾孫)이다.
임진 정묘의 병란 뒤에 자손들이 공의 묘를 잃어버렸는데 충겸(忠謙)의 아들 의정 열(悅)이 기백(畿伯)으로 있을 때 찾았고, 희수(喜壽)의 증손 판중추(判中樞) 재(梓)와 즙(諿)의 손자 부제학(副提學) 유(攸)와 달원(達源)의 오대손 대사헌 단(檀)과 헌납(獻納) 사홍(思泓)과 강(鋼)의 현손 참지(叅知) 평(枰)과 액의 손자 감사 벌(橃)과 열(悅)의 손자 지평(持平) 권(權)과 광언(光彦)의 오대손 사인(士人) 해(楷)가 중외(中外)의 모든 친족을 모아 봉분을 개축하고 돈을 내어 비석을 세웠다. 그리고 벌(橃)에게 그 음사(陰辭)를 기록하도록 청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대략 대대로 전해 온 계파를 뒤에 기록하였다.
12대손 통정대부수황해도관찰사(通政大夫守黃海道觀察使) 벌(橃)이 삼가 지음
3) 심온 선생 부인 삼한국대부인 순흥 안씨 묘 (안성시 금광면 오흥리 산32-1)
청송심씨(靑松沈氏)인 안효공(安孝公)에게 출가하여 장녀 소헌왕후를 비롯한 6명의 딸과 아들 3형제의 모두 9남매를 출산했고, 세종대왕의 부부인(府夫人)으로서 남편에 대한 내조와 자녀교육에 헌신했다. 부인이 세종 26(1444)년 11월 24일에 별세하자 사위인 세종의 주선으로 용인시 수지면 이의리에 예장(禮葬)했다가, 세조 13(1467)년 5월 3일 왕명으로 이곳에 천장(遷葬)되었다.
4) 선혜옹주 묘
선혜옹주(善惠翁主, ? - 1456년 3월 26일) 또는 무진군주(茂珍郡主)는 조선 전기의 왕족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익안대군 이방의의 딸이다. 처음에 회인현주(懷仁縣主)에 봉해지고, 태종 때 선혜옹주로 승작되었다가, 1431년(세종 13) 무진군주(茂珍郡主)로 개칭되었다.
그의 분묘는 오랫동안 실전되었다가 7대손 김상빈(金尙賓)이 그의 묘소를 찾아냈다 한다.
아버지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셋째 아들 익안대군 이방의이고, 어머니는 최인두의 딸 정경옹주 삼한국대부인 철원최씨이다. 친여동생이 1명 있었으나 여동생의 작호는 전하지 않는다. 익안대군의 장녀로 처음 회인현주(懷仁縣主)에 봉작되었으며 광산인 중군도총제부(中軍都摠制府) 부총제(副摠制) 김한(金閑)과 혼인하였다. 1411년 남편 김한이 사망하여 경기도 고양군에 안장했는데, 묘소는 후에 실전된다.
1413년(태종 13) 8월 20일 태종 이방원이 종친의 딸을 옹주로 봉할 때, 옹주로 책봉되었다.
1431년(세종 13) 10월 18일에 무진군주로 봉작되었다.[2] 1456년 3월 26일에 사망했다.
처음 양지교동(陽智橋洞)에 안장되었다가, 후에 경기도 안성군 고삼면 월향리 산47번지로 이장되었다. 근처에는 남편 김한의 단소가 세워졌다. 후에 병란으로 묘소가 실전되었다가 7대손으로 풍기군수(豊基郡守)를 지낸 김상빈(金尙賓)이 그녀의 분묘를 찾아냈다 한다.
손자 김면은 이시애의 난의 진압에 참여한 공로로 적개공신 2등에 책록되었고 광천군에 책봉되고 경원부사를 지냈으며 사후에 부원군에 추증되었다.
4. 회비 : 5만원 (차량 대여비 및 중식 석식 기타 비용 포함)
(당일 총무에게 납부)
5. 연락처 : 총무 김 은 희 (010 - 3228 - 6489)
회장 김 종 대 (010 - 4234 - 707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