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1. '무릎도 모르는가?'
조주선사는 대왕이 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일어나지 않은 채 손으로 무릎을 치면서 말했다.
“아시겠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어릴 때 출가하여 이제 이렇게 늙고 나니 사람을 보고도 선상을 내려올 힘도
없습니다.”
오늘은 아마도 조(曹)나라 대왕이 조주가 주석하는 관음원을 기별도 없이 찾아온 모양이다. 조주는 대왕이 방문했는데도 마중 나가지 않고 방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 그러다가 왕이 방 앞에 나타나자 손으로 자신의 무릎을 탁 한번 치고는 묻는다.
“아시겠습니까?”
얼굴을 마주 보자마자 무릎을 치면서 알겠느냐고 물으니, 왕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다. 뭘 알겠느냐고 묻는 것인지 의아해 하면서도 “모르겠습니다.”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러분도 한번 본원(本原)의 바탕에서 질문에 응답해 보라.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제는 아실 법도 한데.. ‘큰스님 신수가 훤합니다.’
조주가 이제는 다시 본분을 떠나 한마디 말한다. “어릴 때 출가하여 이제 이렇게 늙고 나니 사람을 보고도 선상을 내려올 힘도 없습니다.” 너무 늙고 힘이 없어서 높으신 대왕 앞에서 일어서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변명하듯이 하소연한다. 솔직히 더 높은 대왕을 모시고 사는 조주는 세상의 왕 앞에 머리를 굽힐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었을 것이다.
옛날에 효봉선사나 성철선사도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름에 전혀 응하지 않고, 만나고 싶으면 자신이 산꼭대기까지라도 직접 찾아오라고 했다. 그런데 조주는 앞에서 말했다시피 무슨 이유로 “(무릎을 치면서) 아시겠습니까?”라고 물었는지 여러분도 꼭 해결해 밝혀내야 한다. 간단한 숙제이다.
352. '그대의 어머니는 못생겼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충직한 말(忠言)입니까?”
“그대의 어머니는 못생기고 추하다(你娘醜陋)."
선(禪)에서 충직한, 충성스러운 말(忠言)이란 어떤 언구일까? 선지식(作家)이 도를 닦는 자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한다면 이것은 깨달음을 더욱 더디게 만드는 것이다. 선가(禪家)의 말로서, '제호(醍醐)가 도리어 독약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제호(醍醐)는 유락(乳酪)이라고도 하는데, 우유에 칡뿌리 가루를 섞어 쑨 죽이다.
옛날에 이 제호는 맛있는 음식의 대명사로 불렸는데, 이것도 너무 많이 먹으면 오히려 몸에 부작용을 일으켜 병이 생기게 된다. 그래서 도(道)를 닦는 데에는, 쓴 약이 몸에 좋다고 하듯이, 짐독(鴆毒) 같은 무서운 말이 많은 효과를 본다. 바로 직지인심이다.
그래서 조주는 ‘충직한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대의 어머니는 못생기고 추하다."는 독한 말로 대답했다. 이런 말이 도인에게는 가장 충성스러운 말이다. 그러나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수행자라면 속으로 욕만 엄청나게 퍼부으면서 관음원을 떠나갔을 것이다. 가련한 조주선사여! 헐!
353. '잊지 않는 그 사람'
한 스님이 물었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잊지 않는 그 사람(不忘底人)은 어떻습니까?”’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항상 생각해라
(不可得繫心 常思念十方一切佛)."
옛날부터 지금까지 불망저인(不忘底人), 잊지 않는 사람이란 누구인가? 질문 속에 답이 있다. 누구인지 이제 알아채시겠는가. 바로 콱 잡아채야 하는데, 아직까지 감감무소식이면 이 조주록 강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 한 번도 우리를 떠난 적이 없는 그 사람이다.
조주선사의 말씀에도 얽매일 필요가 없다. “마음에 두어서는 안된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항상 생각해라." 다 놓아 버려라. 저 깊숙한 근원 속에서 푹 쉬고, 푹 쉬라고 말한다. 그것이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354. '몽둥이가 약이다'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충직한 말(忠言)입니까?”
“쇠몽둥이나 맞아라(喫鐵棒)”
“무엇이 충직한 말(忠言)입니까?” 바로 위에서 나온 질문이다. 선에서 충성스러운 말이란 몸에 스치기만 해도 죽어나가는 짐독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대의 몸에 스스로 독을 퍼뜨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라! “쇠몽둥이나 맞아라(喫鐵棒)” 그렇지 않으면 사랑의 몽둥이가 약이다. 귀여운 자식일수록 사랑의 매를 들어야 올바른 사람이 된다. 요즘 세상은 그렇지도 않지.
355. '최상을 향한 일'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부처님의 위를 향한 일(佛向上事)입니까?”
조주선사는 손뼉을 치면서 크게 웃었다(便撫掌大笑)."
'불향상사(佛向上事)'란 말은 이전에도 나왔다. 글자대로 풀이하면, 부처가 되는 최고의 위를 향한 일. 마음 하나 깨닫는 것에 대한 용어가 선(禪)에서 참으로 다양하게 쓰인다. 향상사(向上事), 본분사(本分事), 일대사(一大事), 조사서래의,불법대의, 종풍(宗風), 가풍, 한마디, 3구, 말후구 등등. 그렇지만 결국엔 마음 하나뿐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물었는데, 조주는 손뼉을 치면서 박장대소(搏掌大笑) 했다. 그 수행자가 부처가 되려고 하니까 조주는 그것이 가당찮아 보여서 웃었겠는가. 말 없음과 말 있음, 손가락을 들고, 부채를 흔들고, 웃고 춤추고, 씨름하고 레슬링도 하는 그 자리에 도(道)는 항상 숨쉬고 있다.
이전에 효봉선사와 성철선사는 방에서 자주 레슬링을 하곤 했다고 한다. 오랜 만에 만나서 담소를 나누다가 어느 틈에 레슬링하는 장면을 여러 스님들이 봤다고 하니 이 분들이 심심해서 그랬겠는가? 다 도(道)를 깨달으라고 합동으로 가르침을 펼친 것이다. 이것을 아는가?
356. '한 등불로 천 등을 켠다'
한 스님이 물었다.
“한 등불이 백 천 등불을 켠다고 하는데, 그 한 등불은 어디서 켜졌습니까(一燈燃百千燈 一燈未審從什麽處發)?"
조주선사는 한쪽 신발을 툭 차면서 말했다.
“훌륭한 납자(作家)라면 그렇게 묻지 않는다.”
달마대사가 관심론(觀心論)에서 말하기를, '항상 이와 같이 깨달음의 등불을 켜서 모든 무명의 어두움을 비추어 무찌른다. 능히 이러한 법으로 차례차례 깨달으면, 이는 곧 하나의 등불로 백 천개의 등을 켜되 등과 등이 광명을 이어서 마침내 다함이 없는 것이니, 그러므로 장명등(長明燈)이라 이름한다.'고 했다.
여기서 깨달음의 등불, 하나의 등불은 밖에서 가져오는 게 아니라, 자신 안에서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 조사, 선사의 한마디를 의심에 의심을 더해 마침내 부수어 버리면 이 한 등불이 밝혀지고, 이 깨침이 무명(無明)의 번뇌를 연이어 깨뜨려 수백 수천 개의 등불을 밝히듯이 깊은 도(道)의 경지로 깊숙이 들어간다는 말이다. 그리고선 이 한 등불이 세상에 있는 수천수만의 등(燈)에 옮겨붙어, 온 산하대지를 빛나게 밝힐 것이다. 여기서 이 스님은 애초의 그 한 등불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묻고 있다.
조주는 한쪽 신발을 툭 차면서“훌륭한 납자(作家)라면 그렇게 묻지 않는다.”고 말했다. 곧바로 눈을 뜨려면 한쪽 신을 툭 차는 여기서 바로 보라! 이 등불이 보이지 않는가? 조주가 발로 한쪽 신발을 툭 차는 그 자리에서 이 등불, 마음을 체험해야 한다. 가슴 속으로 탁 치받혀야 한다. 수행이 깊은 사람이라면 물을 필요도 없는 말이다. 그 이전을 더듬어 보려 하는 사람은 등신이다.
357. '대답하지 않는 이유'
한 스님이 물었다.
“근본(根)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照)을 따르면 종지를 잃는다고 할때에는 어떻습니까?”
“나는 이 말에 대답하지 않겠다.”
“제발 대답해 주십시오.”
“그래야 마땅하지.”
3조(祖) 승찬(僧璨)대사의 신심명(信心銘)에 이러한 구절이 있다.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못할 데가 없다(絶言絶慮 無處不通).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는다(歸根得旨 隨照失宗).'
여기서 종지(宗旨)란 선(禪)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취지 또는 뜻인데 바로 마음이다. 이 스님은 신심명의 말 가운데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는다’는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어 조주에게 그 뜻을 묻는 것이다.
조주는 “나는 이 물음에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는데, 이 말이 바로 ‘비춤을 따르면 종지를 잃는다’는 구절을 거꾸로 대변하고 있다. 내가 여기서 2중의 공안을 만든 것 같은데, 정말로 이 두 개의 구절을 이해하면 바로 부처, 조사와 같은 동산에서 숨바꼭질 놀이를 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스님은 아주 답답해 한다.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제발 가르쳐달라고 두 손 모아 빈다. “그래야 마땅하지.” 잘 설명해 주어야 마땅하겠지 라곤 했지만 더 이상 말해주지는 않는다. 아니, ‘그래야 마땅하지’ 라는 말속에서 이미 모든 것을 다 가르쳐 주었다.
조주가 주는 이런 쓴 약을 마시고 곧바로 깨어나야 하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깨어날 수 있겠는가? 사람을 조롱하는 어조의 대답이라고 여겼다가는 정말로 하세월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비춤을 따라서 종지를 잃는다고 할 때는 어떠하냐?’고 물었는데, 조주는 왜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는지 깊이깊이 의심해 보기 바란다. 한 마디라도 허튼 소리하는 조주가 아니다.
358. '생각할 수 없는 경지'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생각할 수 없는 경지(不思處)입니까?”
“어서 말해 보아라, 어서 말해(快道快道)!"
'부사처(不思處)'는 ‘불가사의처(不可思議處)’와 같은 말로서, 도대체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곳, 그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위 질문은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곳이란 도대체 어떤 곳입니까?'란 말과 같다만 이 질문도 그 물음 속에 답이 있다.
조주의 “어서 말해라, 어서 말해(快道快道)!"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자리에 있다. 갑갑해서 하는 말인데,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찾지 못하는가? 조주에게 도리어 ‘어서 말해 보십시오! 어서 말해!’ 라고 해보라.
359. '비바시불도 못 얻는 마니구슬'
한 스님이 물었다.
“밤에는 도솔천에 올라가고 낮에는 염부제에 내려오는데, 그 중간에 어째서 마니구슬은 나타나지 않습니까?”
“뭐라고?”
그 스님이 다시 한 번 더 묻자 조주선사가 말했다.
“비바시불이 일찍이 마음에 두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신묘함을 얻지 못했다.”
4세기경 인도에 무착논사(無着論師)란 스님이 있었는데, 유식(唯識)사상으로 대승불교를 완성하였다는 칭송을 얻고 있다. 이 무착은 불심이 매우 깊어 미륵보살까지 감동시켜서 밤에는 선정에 들어 도솔천에 올라가서 미륵의 가르침을 받고, 낮에는 이 사바세계(세상)으로 내려와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지었다는 설화가 있다.
그런데 경전에서 이 도솔천의 궁전은 원래 모두 마니구슬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므로, 이 스님은 무착의 신통력이 자유자재 했으니 마니구슬이 바로 나타나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그 중간에 어째서 마니구슬은 나타나지 않습니까?”라는 말의 근거로,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는 고전을 다 뒤져봐야 나올 것 같다.
조주는 그냥 '뭐라고?'라고 반문(反問)했는데, 이 말은 '그대가 되묻는 그 자리에서 네 마니구슬이나 찾으라'는 의미로 말한 것이다. 한 마디도 허투루 대하지 않는 조주의 그 깊은 경지를 알아채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그 스님은 사실 마니구슬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조주가 응대하는 뜻도 모르니, 다시 한번 더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한다.
“밤에는 도솔천에 올라가고 낮에는 염부제에 내려오는데, 그 중간에 왜 마니구슬이 나타나지 않습니까?” “비바시불이 일찍이 마음에 두었지만 지금까지도 그 신묘함(妙)을 얻지 못했다.” 비바시불(毘婆尸佛)은 과거 칠불(七佛) 가운데 첫번째 부처라고 하는데, 이 첫 부처도 마니구슬에 마음을 두었지만, 아직까지 그 묘함을 득하지 못했다(毗婆尸佛 早留心 直至如今不得妙). 즉, 비바시불도 못 얻었는데 어찌 무착에게 마니구슬이 나타나겠는가? 라고 조주는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로 저 위대한 첫 부처조차도 마니구슬을 얻지 못했을까? 답은 그렇다. 하지만 비바시불도 얻지 못하고, 무착에게도 나타나지 않는 이 마니구슬을 여러분은 모두 다 가지고 있다. 이 말을 잘 알아들어야 마니구슬은 원래 얻을 수 없는 것임을 통달한다. 본래 그냥 부족함 없이 다 갖추고 있는 것이지, 얻거나 새로 나타나는 게 아니다.
360. '헤아릴 수 없는 곳'
한 스님이 물었다.
“생각으로 헤아리지 못하는 경지(非思量處)는 어떻습니까?”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速道速道)!"
'비사량처(非思量處)',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곳이라 했는데, 부사의처, 불가사의처(不可思議處)와 같은 말이다. 말로 생각이 미칠 수 없는 곳, 헤아릴 수 없는 곳, 바로 우리 마음(부처)이다. 그곳은 어디에 있고, 그 상태는 어떠한가?
조주의 “빨리 말해라, 빨리 말해"하는 말 바로 밑에 있다. 여러분 모두 찾았는가? 아직 찾지 못했으면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말고 이 강해의 처음으로 돌아가라. 반복 훈련이 가장 중요하다. 근원 속으로 뚫고 뚫어 들어가 빨리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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