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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3장, 4장, 5장
구약의 율법과 복음, 이신칭의, 변절자들에 대한 심판, 사랑의 법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자신들을 귀찮게 하는 자들의 유혹적인 가르침에 반대할 다양한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1~5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은 거짓 선생들의 해로운 활동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위험한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이교적인 마술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바울은 자신의 복음 선포가 갈라디아 교인들 앞에서 마치 그들이 십자가 사건의 증인이 된 것처럼 너무나 생생했다고 믿습니다(1절).
'이것을 알려 하노니' 바울은 수사적인 질문을 사용해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율법 전수를 통해 더 충만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그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들 가운데 기적을 일으키셨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은 결과였습니다. '성령을 받은 것'이란 구원 얻는 믿음 이후에 그리스도인의 삶이 시작할 때 삶과 다양한 사회 속에서 신자를 거룩하게 하고 능력을 부여하기 위해 일하는 성령의 새 언약의 사역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이 경험이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너무나 생생해서 그들도 이를 기억할 것임을 알았습니다(2절).
'성령을 주시고....능력을 행하시는', 이 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앙생활 초기에 있었던 성령의 역사를 언급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지속적인 매일의 성령의 사역을 언급합니다. 바울은 오래 전에 이 교회들을 떠나왔고 현재는 다른 사도가 아무도 없지만 성령은 여전히 함께 계시며 여전히 그들 가운데 기적을 행하고 계셨습니다. '듣고 믿음에서냐', 이는 그리스도의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뿐만 아니라 그 삶을 매일 지속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합니다(5절).
<구약의 율법과 복음>
6~9절을 볼께요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구약에 담긴 복음 (1): 아브라함,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두 번째로 직접적으로 호소합니다. 구원은 율법이 아닌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점을 그들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그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복음을 받아들인 경험뿐만 아니라 구약의 아브라함의 예도 사람이 의롭다고 여기지는 것은 율법이 아닌 참된 믿음을 통해서임을 가리켜 줍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생물학적 조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믿은 것처럼 믿음으로써 자신의 발자취를 따르는 영적인 자녀들의 가족을 이루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죽은 몸에서 생명을 가져올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롬 4장). 따라서 아브라함은 복음에 대한 살아 있는 구약의 예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셨습니다(6~9절).
10~14절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구약에 담긴 복음 (2): 레위기, 신명기, 하박국 율법을 통해 의롭다함을 받으려는 일체의 시도는 저주를 가져옵니다. 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속제 사역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오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주하는 모든 사람은 아브라함의 복을 누립니다.
바울은 방금 7절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에 대해 말합니다. 이제 바울은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에 대해 밝힙니다. 이들은 바울이 2:18에서 말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집을 다시 지었다면 율법의 요구와 정죄는 바울을 찾아와 당혹스럽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율법 준수에 여전히 집착하는 이들은 정확히 이러한 입장에 처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데 실패했고 그래서 신실하지 못한 이스라엘에게 임한 저주 아래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과 복을 받는 모든 신자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 인간의 경험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요구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과 따라서 모든 사람이 저주 아래 있다는 점을 입증합니다. 아무도 '율법'에서 명한 모든 것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10절).
하박국 2장4절에서 잘 보여주듯이 구약 자체가 율법을 통해서는 의에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합니다(11절).
바울은 레 18:5를 사용하여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아마도 여기서 롬 10:5에서 의도한 바와 동일한 것을 말하려 했을 것입니다. 로마서 10장5절에서는 레 18:5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와 동일시됩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참조 레 18:5)라는 말씀이 그 원래의 문맥에서는 율법을 행하는 자에게 임할 현세적인 복과 삶에 충만함과 관계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는 또한 순종이 의로 이어질 것을 가리키는, 율법 안에 있는 조건적인 약속으로 보이기도 합니다(참조, 신 6:25).
하지만 이 약속은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조건의 성취에 의존하기 때문에, 즉 인간이 완벽하고 충분하게 '율법을 행하는' 것에 의존하기 때문에 성취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레 18:5의 원래 문맥은 주로 하나님의 규례와 규법을 지침으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운데 삶을 사는 수단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레 18:5에 바울이 여기 이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부정적인 방식과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바울이 이 구절의 유대주의자들의 잘못 사용된 구호로 인용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레 18:5를 모형론적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즉, 이스라엘 땅에서의 삶을 영원한 삶에 대한 모형론적 언급으로 보고 있다고- 이해하는 것이 더 나아 보입니다. 모세 언약에서 구원은 메시아에서 절정에 이르는 하나님의 약속과 속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새 언약이 이르렀음으로 옛 언약에 들어가는 조건을 고집하는 이들은 회생 제사의 유익을 얻지 못하며 따라서 영원히 살기 위해서는 모세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일을 행해야 합니다(12절).
하나님의 저주는 불순종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저주의 무거운 짐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통해 제거되었습니다. 바울은 2장 20절에서 개인적으로 자신을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말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대속적 사역에 초점을 맞춥니다(13절).
그리스도가 나무에 달리신 일(13절)은 이스라엘에 복을 가져다 주셨을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고 발생했습니다. 성령의 새로운 능력으로 임하신 일은 그리스도로 통해 시작된 새 시대의 핵심적인 유익 가운데 하나입니다. 신자들은 죄 용서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하나님의 임재도 경험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과 6장에서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합니다(14절).
15~18절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에서 율법의 위치를 설명하기 위해 일상적인 예를 사용합니다. 언약 또는 유언은 변경될 수 없으며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받은 약속도 단지 율법이 등장했다는 이유로 변경될 수는 없습니다.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바울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과 가나안에 거주한지 사백삼십 년이라"는 출 12:40의 70인역 번역을 언급하고 있는 듯한데 이는 아브라함 때부터 출애굽 때까지 430년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2장 21절에서 바울은 의가 율법을 통해 온다면 그리스도는 헛되이 죽으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기서도 그와 비슷하게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은 그 유업의 기초가 아니라고 말합니다(15~18절).
19~29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이신칭의>
종에서 아들이 됨, 율법은 결코 영원히 효력을 갖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었으며 이제 약속된 메시아가 오셨으므로 그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따라서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만일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에 뿌리를 둔 하나님의 계획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면 율법은 애당초에 왜 주어졌는가?
'범법함으로 더하여진 것이라', 이는 (1) '범죄를 일시적으로 해결할 제사 제도를 마련하기 위해서', (2)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이를 통해 범죄를 억제하기 위해서', (3) '범죄가 명시적인 기록된 율법을 위반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또는 (4) '사람들의 죄악성과 구주의 필요성을 드러내기 위해서'라는 뜻일 것입니다(참조,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로마서 3:22]).
이 네 가지 의미 모두 신학적으로 옳지만 마지막 의미가 아마도 바울의 생각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였을 것입니다.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신명기 33:2에서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시는 모습을 언급합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일만 성도 가운데에' 율법을 주셨고 그래서 그 상황에서 천사들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참조, 행 7:53, 히 2:2).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이 수여됨에 있어서 하나님의 '중보자'였습니다(레 26:46, 요 1:17). 모세 율법은 결코 영원히 지속되도록 의도되지 않은 일시적인 언약의 일부였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아브라함의 참된 자손으로 오셨으므로 모세 율법은 더 이상 효력이 없습니다. 따라서 할례는 더 이상 요구되지 않습니다. 할례는 모세 언약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19절).
이스라엘에 율법이 수여된 사건에는 '한 편만' 개입된 것이 아니라 중보자 모세가 개입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한분이시므로 하나님의 궁극적 계시는 중보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 참된 한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며 그 까닭은 그리스도가 온전히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복음이 인간에게서나 인간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직접 자신에게 임했다는 1장에 나오는 바울의 항변(1장1절)의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20절).
율법은 분명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율법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한 것으로 간주합니다(로마서 7장12). 그러나 인간의 죄악성 때문에 율법은 결코 '능히 살게' 할 수 없었습니다(로마서 8장3절). (21절).
율법(성경)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21절)을 주는 대신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습니다(참조, 로마서 3장9~20절). 따라서 율법은 모든 이스라엘의 백성에게 약속된 것을 믿을 수 있게 한 것이 아닙니다. 단 한 명의 자손인 그리스도가 그 복을 받도록 주어졌습니다. 그 복은 그들 자신의 순종을 통해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어집니다. 하나님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으셨습니다. 사실 모세는 율법을 수여하는 마지막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율법에 순종하지 않을 것임을 예언했습니다(신명기 31장 24~29절). 따라서 율법은 의롭다함이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올 것이라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을 확증했습니다(22절).
'믿음이 오기 전에', 바울이 말하는 '믿음'이란 그리스도에 대한 새 언약의 믿음을 뜻합니다. 따라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고 그와 더불어 그리스도를 믿는 새 언약의 믿음이 오기 전에" 바울은 아브라함을 이신칭의의 한 예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바울이 한 말은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에는 구원 얻는 믿음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에 대한 지식에 기초한 새 언약의 믿음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23절).
'너희가 다....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이는 옛 언약의 신자와 새 언약의 신자 사이의 핵심적인 차이입니다. 율법 아래서의 삶은 노예생활이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데서 오는 자유로 특정지어 집니다. 여기서는 남녀 모두 아들의 권리를 지닌 것으로 묘사됩니다. 아들됨과 함께 상속권이 오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단어 '회오이'('아들')는 1세기 로마의 입양 및 상속법에서 사용된 법적인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바울이 여기와 그의 편지에 다른 곳에서 그렇게 사용하듯이 남녀를 막론하고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어 현재 하나님의 자녀의 모든 특권과 의무와 상속권의 향유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지위를 가리킵니다(26절).
바울은 아들됨 외에도 이 새로운 시대와 관련된 것에 대한 묘사를 두 가지 더 덧붙입니다. 세례를 받은 신자들은 죽음 속으로 내려가 율법과 죄와 죽음의 옛 시대에 대해 죽고(롬 6:3~4) 새 창조에 참여하는 자로서 물밖으로 나왔습니다(고후 5:7).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옷 입었다'는 표현은 옷에 대해 사용되듯이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써 새로운 삶과 목적을 덧입는 것을 암시합니다(27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세 율법이 옛 시대 속에 남겨졌다는 사실은 새 창조 속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별이 철폐되었음을 뜻합니다.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이는 이런 집단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있어서 아무런 구별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다른 편지에서 종(노예)과 주인에게 서로 다르게 명령하며 남편과 아내에게도 서로 다르게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명백히 모든 구별의 배제나 동성끼리의 결혼 내지 동성애의 용인 가능성을 옹호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로마서 1장 26~27절).
오히려 바울은 과거의 구별과 남보다 우월하다거나 열등하다는 식의 잘못된 태도는 없어졌다고 가르칩니다.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남자와 여자의 구별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남녀가 '한' 몸인 교회 안에서 연합되고 함께 결합되었다고 말합니다. 이 구절은 다양성 안에서의 통일성을 가르치지 동일성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28절).
'아브라함의 자손', 바울은 자신의 논증에 주된 요점을 진술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은 아브라함의 가족의 일원이며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이 되기 위해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29절).
1~7절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하나님의 자녀됨>
'초등학문', 여기서와 9절에서 이 표현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이전에 따르던 초보적인 원리를 가리키는데 그 원리란 유대인에게는 모세 율법이 될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그들의 이방 종교에 기본적 개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9절에서 귀신의 속박이라는 부가적인 의미도 무시해선 안됩니다. 그들은 그 사고방식과 삶의 상황이라는 측면에서 율법주의적인 체계 아래 종 노릇하고 있었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하는 종노릇이라고 설명합니다. 율법주의적인 미신과 귀신의 지배는 서로 긴밀히 관련되어 있습니다(3절).
'때가 차매', 하나님은 섭리로 세상의 사건들을 주관하셔서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사역 및 복음 선포를 위해 민족들과 나라들을 지휘하시고 준비시키신 뒤 인간 역사에서 적절한 순간에 아들을 보내셨습니다(4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그리스도는 이제 아들이고 '성년'이므로 약속된 '그 아들의 영'을 시작으로 상속을 받을 위치에 있습니다. '아빠'는 '아버지'라는 뜻의 아람어 단어입니다(6~7절).
8~11절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우상 숭배에서 참된 하나님께로 나아감, 갈라디아 교인들이 다시 사로잡힐 위험성이 있는 노예 상태는 단지 아들됨을 상징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참 하나님을 버리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거짓 신들, 세속적인 원리와 구조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들은 마치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어본 적도 없는 사람들처럼 될 것입니다. 이 이방인 출신의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유대인의 율법으로 돌아서는 것은 마치 그들의 이교 신앙으로도 되돌아가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이란 갈라디아 교인들의 과거 종교적 관행을 지배했던 귀신의 영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이는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함축합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는 모두 모세 언약의 의식법의 일부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런 구약 율법을 따르라고 요구하는 것은 곧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칭의의 복음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분명 그리스도인에게는 더 이상 모세 언약 아래 있지 않음을 뜻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서의 날을 유대인의 제칠일 안식일 계명도 그리스도인이 새 언약 아래서 더 이상 따를 필요가 없는 의식법의 일부라는 증거로 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매주에 안식일 계명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패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며 이 구절은 유대인의 절기력에서 다른 안식일들과 관련 있다고 생각합니다(8~10절).
21~31절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율법', 바울은 율법의 서로 다른 의미를 이용합니다. 율법은 갈라비아 사람들이 그 전체를 순종하려고 잘못 생각한 광야 방랑 기간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계명을 뜻할 수도 있지만 성경에 처음 5권 전체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21절).
'육체'는 인간의 욕구, 원칙과 그런 것들을 오염시키는 죄를 상징합니다. 이스마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들 손으로 하갈을 통해 혈통을 잇는 일을 하려했을 때 태어난 아들입니다. 반면 약속은 육체와 절대적으로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약속은 이삭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 태어난 것처럼 하나님에 의해 성취될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기 때문입니다(23절).
'아라비아', '종 노릇 하고', '예루살렘' 성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수도가 되어야 하지만 도리어 여전히 육체를 따른 이스라엘 즉, 예수님께로 돌아가지 않은 유대인들의 근거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은 이사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25절).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천상의 예루살렘 속에 있으며 참된 이스라엘 입니다. 이사야가 예언했듯이(이사야 54장1절) 바벨론 유수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종말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자녀가 없는 곳 심지어 이방인 가운데서 자녀의 새로운 탄생을 이루시기 위해 또 다시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실 것입니다(26~27절).
'이삭과 같이', 이삭의 기적적인 출생과 비슷한 방식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은 인간의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롭고 기적적인 능력의 역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28절).
'이제도 그러하도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박해한 것처럼 이는 구약의 명시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창 21:9 에 암시된 사실입니다. 지금도 인간적인 노력으로 칭의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신칭의의 약속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습니다. 창 16:4에서 하갈은 임신하자 '그의 여주인을 멸시'했습니다. 이 또한 현재 비그리스도인 내지 가짜 그리스도인인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역사는 계속 반복됩니다(29절).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기에는 함축적으로 이 비유에서 그 두 사람이 상징하는 모든 이들, 즉 자신의 노력으로 칭의를 추구하는 이들이 포함됩니다. 이 말은 행위로 말미암은 칭의라는 거짓 복음을 가르치는 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에 머물며 가르치도록 내버려두어선 안 된다는 뜻을 내포합니다(30절).
<복음에서 돌아선 변절자들에 대한 심판>
구원을 위해 율법에 의지하는 이들은 구원에서 끊어질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변절하지 말라고 경고하며 권면합니다.
1~12절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유대인의 의식법과 규정들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도덕적 기준에 대한 순종에서 자유롭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은 할래를 요구하는 것이 별다른 변화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할례는 만일 그들이 칭의를 위해 모세 율법에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순종을 요구한다면 이제 완벽하게 순종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그들 중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말합니다(1~2절).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바울은 여기서 참된 신자가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 거라는 질문에 대해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단지 한때 신앙 고백을 했던 사람들도 현재 진실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 사실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고 자신들에게 제공되고 가능하게 된 은혜에서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4절).
'우리가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이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서 자신의 노력을 통해 완벽한 의를 이루려하지 않음을 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그들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인들은 죽어서 주님과 함께 있을 때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때 하나님이 자신 안에서 의를 완성해 주시기를 기다립니다(5절).
만일 바울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했다면 인간적인 노력에 대한 인간의 자긍심이 뒤에서 되살아날 것이므로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어떤 행위도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만들지 못한다고 선언함으로써 우리를 낮추는 어떤 걸림돌도 없었을 것입니다(11절).
<사랑의 법, 성령 안에서의 삶>
13~26절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사랑의 법, 그리스도인의 삶은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제시하는 다양한 노예 상태의 삶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이 기분 내키는 대로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타인을 섬기고 사랑하는 것은 속박에서 벗어나고 율법의 궁극적인 내용을 성취하는 길입니다.
바울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계명에서 이뤄졌다고 말하고 그 명령을 갈라디아 교인들이 "서로 종 노릇" 해야 할 이유로 삼을 때 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법'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기준을 따라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음을 뜻합니다. 순종은 칭의의 수단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핵심적인 요소입니다(14절).
바울은 육체를 사랑과 대조한 뒤 이제 육체를 성령과 대조합니다. 육체를 정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라', 이는 방향과 능력 부여, 즉 성령의 인도에 따라 결정과 선택을 내리고 성령의 공급하시는 영적인 능력으로 행하는 것을 뜻합니다. 성경에서 행한다는 말은 통상적으로 한 사람의 삶 전체의 행동 패턴을 의미합니다. 육체의 욕심은 단순히 신체적인 욕구만이 아니라 타락한 인간 본성의 일반적인 욕구 전체를 의미할 것입니다(16절).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일종의 분투- 육체와 성령 사이의 전쟁- 임을 인정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 이 동사(헬 '아고')는 성령이 그리스도인을 인도 하시는 일에 능동적이고 인격적으로 관여하심을 뜻하며 현재 시제("너희가 만일....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는 성령의 지속적인 활동을 가리킵니다.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신자의 삶 속에서 성령의 적극적인 임재는 신자가 더 이상 기독교 이전에 체계 아래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17~18절).
육체의 일은 타락한 인간 본성과 그 본성의 욕구에서 나오는 행동을 뜻합니다. 성령의 변화시키기는 역사가 없으면 이런 행동은 악한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끌리는 행동입니다. '우상 숭배와 주술'. 이는 인간적으로 고안된 수단을 통해 영적인 세계와 접촉하려는 욕구의 증거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을 그 궁극적 대상으로 삼는다고 하지만 계시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므로(요 14:6) 하나님께 이르는 다른 모든 길은 거짓입니다.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사람들은 하나님을 거부할 때 자기만으로만 몰입하여 그 결과 인간들 사이와의 관계도 파괴됩니다(19~20절).
'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것을 만족하지 않고 그 대신 다른 사람에게 주신 것을 갈망할 때 발생합니다. '술취함과 방탕함'은 사람들이 모든 좋은 것들을 은혜로 주시는 분이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하나님의 선한 선물을 파괴적이고 악한 방식으로 잘못 사용한 예들입니다. 구약에서 포도주는 기쁨과 축하와 연관되었지만 남용될 때는 매우 파괴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술취함은 성경 전체에 걸쳐 끊임없이 정죄됩니다.
성은 남편과 아내를 위한 소중한 선물이지만 남용될 때는 또한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매우 파괴적인 영향을 끼칩니다.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을 관행으로 하나의 삶의 패턴으로 삼는 이들을 가리킵니다. 그들의 외적인 행동은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나지 않고 그 속에 성령이 없으며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아닌, 그들의 내적인 영적 상태를 가리킵니다(21절).
'성령'은 단지 방어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공격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 안에 경건한 성품의 긍정적인 속성들을 창조하심으로써 죄와 싸우시며 이 모든 속성들은 복음서에서 예수님 안에 명백히 나타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분명히 반영한다는 점에서 가장 위대한 특성이므로 제일 먼저 등장합니다. '희락'이 두 번째 등장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뻐하는 가운데 자신의 감정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 안에 바르게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화평'은 하나님이 죄인들을 자신과 화목하게 하신 결과물이고 그래서 죄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며 이 사실은 하나님께 나아갈 때 확신과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오래 참음'은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계획과 시간표가 아닌 하나님의 계획과 시간표를 따르고 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을 버렸음을 보여줍니다. '자비'란 타인에 대한 선량함, 관대함, 연민을 보여주는 것을 뜻하며 이 또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한 속성입니다. '양선'은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의 유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뜻합니다. '충성'은 또 다른 신적인 특성이며 자기가 하겠다고 말한 것을 일관되게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온유'는 예수님이 마태복음 11장29절에서 자신의 성품으로 묘사하신 특성입니다. 온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고 타인을 격려하며 경건하게 할 수 있게합니다. '절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육체의 권능에 저항하게 하는 성령이 주시는 자제심입니다. '이같은 것을 금지 할 법이 없느니라', 따라서 이런 성품들을 나타내는 이들은 유대인의 의식을 고집하는 이들보다 더 그리고 마찬가지로 19~21절에서 살펴본 육체의 행위를 따르는 이들보다 더 율법을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22~23절).
그리스도와 성령은 또다시 신자의 삶의 원천으로서 협력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즉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롬 6:4~6). 이제 신자들에게 옛 질서는 사라졌으므로 그 질서에 속한 신자들의 악한 옛 사람도 허물어졌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은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여선 안됩니다. 여기서 육체는 물리적인 몸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타락하고 악한 인간 본성과 그 모든 욕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24절).
'성령으로 행할지니', 바울은 아마도 구체적으로 갈라디아 교회에서 문제가 된 것으로 보이는 태도들을 지칭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이런 악한 태도와 행동은 명백히 로마의 한 속주에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방금 원수 맺는 것, 분쟁, 시기, 투기를 일반적인 '육체의 일'로 언급했습니다(25~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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