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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 14 강 아산UBF 메시지
그의 말을 들으라
말씀 / 마가복음 9 : 2 -29
요절 / 마가복음 9 :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으실 것과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낙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고난 뒤에 있을 영광을 직접 보게 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그 음성으로 확증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고난 뒤에 있을 영광을 영접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8장에서 고난 받고 죽으시는 메시야의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감당해야 할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과 죽음 너머에 있는 승리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직접 체험하게 될 것이라 예고해주셨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십자가와 고난의 길을 가르쳐 주신 지 6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세 사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그곳에서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
첫째, 광채가 났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옷이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마태복음 17:2절을 보면 이 날 예수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고 하였습니다. 빛은 우리가 볼 수 있는 모든 물리적인 실체와 현상 중에서 예수님을 가장 나타내는 것입니다. 빛은 영광입니다. 평소 예수님께서는 가난해 보이고 고생하시는 모습이었지만 영광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찬란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모습이 예수님의 본래 모습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섬기고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영광을 잠시 버리셨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해같이 빛나는 얼굴과 광채 나는 몸은 창조주의 본래 모습입니다.
둘째, 거룩하고 깨끗한 모습이었습니다. 흰색은 순결과 순수를 표시합니다. 한 점 더러움도 없는 완벽한 깨끗함입니다. 성경의 ‘빨래하는 자’의 본 뜻은 표백하는 자란 말입니다. 사람이 희게 하고자 하는 그 어떤 노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가장 흰 모습을 예수님께서 가지셨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모습은 아무런 죄도 없고 아무런 흠도 없는 최고의 거룩함을 보여주는 모습니다. 예수님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 거룩하신 모습을 보여주신 뜻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본래모습은 영광이며 예수님의 가시는 메시야의 길은 고난을 거치지만 영광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결말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으심은 영광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더불어 예수님의 고난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따라 고난 받는 제자들도 고난 후에는 장차 이 모습을 받게 될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제자들에서 더 나아가 예수 안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자, 예수 안에서 자기십자가를 지는 자, 예수님을 따라서 죽음까지도 따라가는 자에게 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얻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20절에는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과나무가 올해는 사과를 열매로 맺었다가 내년에는 배를 열매 맺지 않습니다. 또 사과가 달립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첫 열매가 되셨으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순결하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입고 모세와 같이 엘리야와 같이 하나님 나라에서 거할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로 더불어 말씀하거늘” 엘리야는 선지자의 대표이며, 모세는 율법을 대표합니다.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두 사람이 영광스러운 모습을 한 예수님께 나타나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대화내용이 누가복음9:30,31절이 기록하였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 모세와 엘리야도 예수님의 고난에 대하여 죽으심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그동안 전해 온 것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는 십자가와 고난을 통해서 죄와 사망에서 인류를 구원하신다고 한 것 것입니다. 이것을 이야기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고난 받으며 고생했던 엘리야와 모세가 나타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고난 뒤에 영광이 있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이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지는 메시아의 길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이는 그들이 심히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이스라엘에는 귀한 손님이 오면 대접하기 위해서 초막 지어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초막을 지어서 예수님을 모시고 이 황홀한 순간을 연장시키고 싶었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을 한 예수님, 영광 중에 있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여기에 계속 있고 싶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장차 입을 영광을 보여주시는 의미를 몰랐으며, 예수님의 메시아의 길이 고난을 통한 영광이라는 것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눈앞의 광경에만 마음이 팔려서 횡설수설하듯 말하였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 뿐 이었더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증언하는 기록은 마가복음에 세 번 나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증언하여 주셨습니다. 두 번 째가 오늘 말씀에서 나오고 있고 세 번 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로마 백부장이 증언하였습니다.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마가복음이 전하는 핵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을 가르치시는 예수님, 메시아의 길은 만민 구원을 위하여 고난 받고 죽는 길임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아들이라 친히 말씀하여 주십니다. 이를 통하여 고난 후에 있을 영광에 대하여 확증하여 주십니다. 메시아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고난 받고 죽으시며 고난과 죽음 후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께서 고난의 메시아의 길을 가르치고자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영광을 보여주시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길을 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심을 친히 말씀으로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영광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움을 지향하여야 합니다. 다만, 어떤 영광을 바라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어떻게 영광에 이르고자 하는가? 하는 것이 또한 관건입니다. 영광에 이를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신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은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사람,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람, 자기 한 말을 지키지 않고 바꾸는 사람은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제가 대전에 있을 때, 목자님이 가르쳐주시기를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은 영광을 입을 수 없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영광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돈 문제, 물질생활입니다. 돈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돈거래에서의 신용과 돈을 벌어서 올바로 쓰는 것 두 가지가 돈 문제의 이슈입니다. 돈을 빌리는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정 어려워 빌렸으면 갚겠다는 때에 꼭 갚아야 합니다. 돈 뿐 아니라 남의 물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의 책도 돈을 주고 산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책은 빌려서 안 돌려주어도 된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습니다. 책이든 자전거든 옷이든 돈 주고 산 것입니다. 돈 3천원 빌려간 것에 예민하여 수십 년 비난하는 사람이 남의 책 2만원 어치 빌려서 돌려주지 않고 전혀 기억도 하지 않고 문제도 삼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빌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빌렸으면 반드시 돌려주는 사람이 되어 신용을 지켜야 합니다. 그런 생활에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잘 드리는 삶이 나옵니다. 우리의 인생, 우리의 생명은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주신 하나님 앞에 내가 드릴 마음, 나의 열정, 나의 물질을 드릴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받은 것을 알고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에게 영광이 있습니다. 세 번째는 깨끗한 삶입니다. 여자문제 있는 사람, 일상이 부도덕한 사람은 영광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몸만 깨끗하면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정적인 죄만 안 지으면 된다며 마음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즐기다가 싹 빠져나오는 전직 고위직 선배를 보았습니다. 자기는 깨끗하다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것을 ‘정신적 불륜’이라고 사회에서도 정죄합니다. ‘육체적 불륜’을 정죄하는 것은 법 차원에서 따지는 것입니다. 실컷 만나고 같이 시간 보내고는 죄는 안 지었다는 사람에게 ‘정신적 불륜’ 을 적용하는 것은 도덕차원에서 따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엄격한 예수님의 기준이 있습니다. 관계를 맺지 않았어도 만나지 않았어도 단지 마음에 음욕만 품어도 이미 간음하였다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는 몸과 생활과 마음까지 순결함을 추구하고 그 순결함에 이르고자 하여야 합니다.
문제는 이것이 어렵습니다. 약속 지키지 않는 사람이 시간과 약속 지키는 사람으로 잘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기 한 말 잊어버리고 그때그때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평생 그렇게 삽니다. 안목의 정욕,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일은 나이 불문, 직위 불문입니다. 추해지고 주위에 상처 주는 일은 흔하게 보는 일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광에 이를 수 있습니다. “고난 받을 때”입니다. 시편 119:71절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시편 말씀이 그대로 응하는 것을 요셉의 삶을 통해서 다윗왕의 삶의 행로를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요셉은 어릴 때 자기 하는 말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어떤 상처를 받을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착하고 정직하였지만, 착하다고 해서 자기 하는 말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어린아이 인격밖에 가지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셉은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그는 비로소 사람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고난 통하여 그는 자기와 함께 하는 사람이 얼굴에 왜 수심이 가득한지 인지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타인을 살피고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그는 자기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괴로움을 살피고 이해할 줄 아는 내면과 인격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세상만민을 기근에서 구원하고 믿음의 조상인 형들과 자손들이 큰 민족을 이루는 요람을 이집트에 만드는데 쓰임 받았습니다. 다윗도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이스라엘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모든 처녀들의 흠모하는 청년 장군이 되어 자기 잘난 맛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집요하게 추격하는 사울 아래에서 배고프고 괴로운 연단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는 괴로운 때가 많았고 이스라엘을 벗어나기도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외국에 피해있지 말고 이스라엘로 들어가 고난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그의 고난은 그가 이스라엘 목자 같은 왕이 되도록,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는 삶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사람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모습이 많다고 탄식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적극 고난 받고자 결단하는 것이 성경을 배운 사람이 할 일입니다. 고난이 없으면 지금 수치와 모욕을 40이 되어서도 받을 것입니다. 50이 되어서도 받을 것이며 60,70에도 젊은 날의 수치를 그대로 겪을 것입니다. 청년의 시기에 받는 수치는 좋은 약입니다. ‘고난’을 영접하고 ‘고난’을 사랑하며 ‘고난’을 결단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고난과 다릅니다. 우리는 죄가 많아 죄를 떨쳐내기 위하여 고난 받아야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흠이 없고 죄 없으신 분이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기 위한 고난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난에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고난 받으신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난 받고 죽으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고난 받는 자들을 위한 소망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길을 가시되 죽기까지 고난 받으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나의 변화를 확신할 수 있으며, 우리도 예수님처럼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고난 받는 예수님의 제자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죄 많은 우리가 부끄러운 모습을 벗어버릴 수 있는 길은 고난을 통한 영광의 길입니다. 우리의 모든 답이 예수님의 길에 있습니다. 우리가 남은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 구원받은 나의 삶을 어떻게 어디에 드릴 것인가? 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고자 고난 받으신 후 영광 받으신 예수님의 길에 답이 있는 것입니다.
9-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날 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죽으셨다가 다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에게는 한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메시야가 오면 반드시 엘리야가 재림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며,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재건시킬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제자들로서는 이것이 궁금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해주십니다. “엘리야가 왔으되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세례요한이 바로 그 엘리야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함부로 대했습니다. 세례요한을 죽여 순교하게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메시야에 앞서서 와서 엘리야의 심정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메시지를 전파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마음을 준비시켰습니다. 그런 위대한 사명인을 정작 이스라엘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산위에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장차 입을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산 아래로 내려와 보니 어려운 상황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홉 명의 제자들 곁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제자들은 서기관들과 말싸움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산에서 내려오시는 예수님을 보고는 달려와 인사를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그들과 변론하느냐” 무리 중 한 사람이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17,18절을 보십시오.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 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아홉 명의 제자들이 귀신 들린 아이를 고쳐주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전에 귀신을 내 쫓고 아픈 사람의 병을 고쳤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전과 같은 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 자리에 있던 아홉 명의 제자들, 아이의 아버지, 시비를 거는 서기관들, 이런 광경을 구경하는 수많은 무리들, 이 모든 사람들은 하나같이 믿음을 찾아 볼 수 없는 불신 세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탄식하며 이 믿음 없는 세대를 책망하셨습니다.
20-2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 아이를 데려오도록 하자, 아이 속에 들어있던 귀신은 예수님을 보고 더욱 발악을 하여 아이를 경련 일으키게 하고 엎드려져 거품을 물게 하였습니다. 도와주시고자 하는 예수님께 아이 아버지는 이상한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것은 그저 할 수 있다면 해주시고 그렇게 못하신다면 뭐 어쩔 수 없겠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고, 전혀 신뢰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말입니다. ‘할려면 하고 말려면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엄히 책망하십니다. 하실만 하거든 하라니, 이것은 불신을 품고 하는 말입니다. 믿음이 아닙니다. 고칠 수 있거든 고치라니 이것은 예수님께 별 기대는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중요하게 보십니다. 만가지 부족함이 있더라도 믿음이 있으면 기뻐하십니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흠이 없어 보이더라도 믿음이 없으면 책망하십니다. 예수님 안에서는 믿을 때 어떤 일이든 이룰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불가능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아버지의 믿음 없음을 먼저 고치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대가 나아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내 주변에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모든 학생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새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믿음이 없어서 내 주위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있다면, 나만이라도 믿음이 있다면, 나부터라도 믿음이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아이의 아버지는 회개하였습니다. 믿음 없는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믿음을 고백하고 믿음을 더하여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즉시로 귀신을 꾸짖어 아이에게서 귀신이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 권세에 귀신은 즉시로 소리 지르며 저항하다가 아이에게서 나와 쫓겨났습니다. 예수님은 귀신이 나가고 쓰러져 죽은 것처럼 쓰러진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은 이날의 사건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조용히 여쭈었습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 내지 못하였나이까” 제자들은 이전에는 귀신을 쫓아냈었습니다. 이번에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명하시자 즉시로 쫓겨나갔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적권세를 배우기 원했습니다. 자신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대답이 무엇입니까? 2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이런 종류의 강한 귀신을 쫓아낼 수 있는 길은 기도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길, 고난의 길 끝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그 영광은 세상 어떤 영광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광으로써 찬란하고 위대하며 영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본래 가지셨던 영광인데,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고난 받으신 후 다시 받으시는 영광입니다. 이 영광은 우리가 장차 입을 영광입니다. 고난을 통하여 영광 받으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잘 감당한 사람에게 이 영광을 주십니다. 빛나는 모습과 순결하고 거룩한 모습의 영광을 예수님께서는 먼저 보여주심으로써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고난 받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영광은 허상이 아니며 공허하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장차 실체로써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 영광을 바라보며 우리의 삶에 그리스도의 고난을 채우는 일에 주저함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가 이 영광을 바라보며 주와 복음을 위하여 예수님 따라 고난에 참여하는 삶을 힘차게 살아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아산 UB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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