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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망대
한국전망대
대마도에서 한국까지의 거리는 51.5㎞로서 일본본토보다 가까운거리에 있기 때문에 날씨가 좋은 날에는 한국의 산들의 모습이 원을그리며 대마도를 둘러싸듯이 보인다. 특히 가을, 봄에 날씨가 좋은날에는 부산의 아파트의 건축물의 윤곽까지도볼수가있다.
전망대는 한국건축물의 팔각정을 본따 지어놓았으며 옆에는 조선역관사의 조난비도 세워져있다.
전망대에서는 한국으로 핸드폰 통화가 가능하다...모두들 집으로 전화를 한다고 신나있다.
조선역관사 순국비(碑文)
조선 숙종29년 1703년2월5일(음력) 청명한 아침에 한 천석이하 108명의 역관(譯官)일행은 저녁무렵 와니우라( 浦)입항직전에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으로 애석하게도 전원이 죽음을 당하였다. 당시 한양을 비롯한 각지에서 선임된 이사절은 정부양사(正副兩使)와 상관(上官)28명 중관(中官)54명 하관(下官)24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대마도의 제3대번주(藩主) 종의진(宗義眞)의죽음을 애도하고 신번주(新藩主)인 제5대 종의방(宗義方)의 습봉(襲封) 축하하기 위하여 파견된국가외교 사절단이었다.
에도시대(江戶時代) 쇄국체제하에서도 일본이 유일하게 국교를 유지한나라가 조선이었다. 그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속에서도 조선과의 신뢰를 지켜온 선린외교였다. 이러한 외교정책을 수행함에있어 조선에서 에도까지 왕복했던 통신사와는달리 대마도의 부중(府中,이즈하라의 옛이름)이었던 이즈하라(嚴原)까지 왕복했던 일행 백명정도의 국가사절이 역관(譯官)이었다.
에도막부(江戶幕府)가 조선과의 외교에 있어서 일본측의권한을 대마번에 일임하고 있었던것만 보아도 진정한 선린외교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이 바로 이역관이라고 하겠다. 에도시대 조선의 사료를 보면 역관이 대마도를 방문한 것이 무려 51회나된다고 기록되어있다. 험한 풍랑속에 묻힌 이 역관 일행의 배에는 4명의 번사(藩士)가승선하여 비운을 함께하였다.
오늘날 점차 더해가는 한.일교류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誠信의 交隣」의 정신으로 순사(殉死)한 일행의 넋을 위로하며 양국간의 영원한 우호증진을 돈독히 하기위하여 여기에 112개의 영석(靈石)으로서 비를 세워 길이 현창(顯彰)코저한다.
히따까쯔 마을앞의 방파제
미네(峰町)
미네쬬(峰町)역사자료관
미네정(町)에는 죠몽시대(繩文時代)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의 중요한 유적이 점점이 분포되어 있어, 그 당시의 생활모습을 잘 엿볼수가있다. 그리고 선인이 남긴 귀중한 문화재도 수 없이 존재하고 있어, 그것들을 집약하여 놓은 본시설은 역사를 공부하는 장소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다하고 있다. 또 자료관에는 한국에서 건너온 문화재도 상당히 많아, 한국과의 깊은 관계도 잘 설명해 주고있다
토요따마(豊玉町)
에보시다께(鳥帽子岳) 전망대
이즈하라마을에서 약1시간거리에 있으며 5분거리에 와따즈미신사가 위치하고 있다.
전망대에 오르면 360。빙돌아서 첩첩히 둘러쳐진 산들을 바라다볼 수가 있으며, 아래에는 잔잔한 호수에 떠있는듯한 수십개의 섬들로 이루어진 아소만을 볼수도있다.
와따즈미시사(和多都美神社)
제신(祭神)은 彦火火山見尊과 豊玉姬命(바다신의 딸)로 「海幸彦山幸彦」의 신화에 얽힌 신사로 전해져 내려오고있다. 본전本殿)정면의 다섯개의 토리이(鳥居)중 2개는 바다속에 세워져있어 조수의 간만에 의하여 그모습을 바꿔 먼 옛날의 신화의 시대를 생각하게 하기도한다. 이즈하라시내로부터는 약1시간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까이에는 에보시다께전망대가있다.
하대마(下縣郡)
미쯔시마(美津島町)
미쯔시마쬬(美津島町)의 안내
대마도최대의 항구와 대마공항이 위치한 마을이다.
대마도내의 거의 모든섬이 모여있는 아소만과 원시림이 그대로남아있어 등산지로서도 인기가많은 시라다께(白岳)산등이있어 자연과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대마도 그린파크(對馬グリンパク)
스포츠, 이벤트, 레크리에이션등, 다목적기능을 갖춘 종합공원으로 해변에는 해수욕장이있어 여름이되면 대마도주민뿐아니라 한국에서온 수영객들도 볼수있다
만제끼바시(万關橋)
명치33년(1901년)에 구일본해군이 함선을 통과시키기위하여 굴삭하여 그위에 다리를 놓았다.간조시에 다리위에서보면 조류가 강물처럼흐르는 박력있는 모습을 볼수있다.
(현재의 다리는 평성8년9월에 개통되었음)
시라다께(白嶽)
아소만(淺茅灣또는淺海灣)
대마도의 상대마와 하대마의 사이에 위치한 리아시스식해안으로 육지가 침강(沈降)또는 해진(海進)함으로써 형성된 지형으로, 아소만은 그섬세함이나 굴곡도에있어서 일본제일이라고 일컬어지고 있으며 대마의 자연경관의 백미로 일컬어지고있다. 그리고 양질의 진주의 산지이며 방어, 돔등의 바다의 진미(珍味)의 보고로서 낚시꾼들의 천국이기도하다.
카네다성(金田城跡)유적
탠찌(天智2년.663년)일본군은 백촌강(白村江.한국의 금강또는 백마강으로 추정됨)의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함으로 일본국방의 최전선이된 대마도는 대륙으로부터의 침입에 대비해 아소만의 남쪽해안에 높이2∼5m, 길이5.4km걸쳐 시로야마(城山)에 카네다성을 쌓아 방위의 거점으로 삼았다.
현존하는 유적은 세개의 성호(城戶)와 그것을 둘러싸는 석루(石累)가 잘남아있다. 날씨가 좋은날이면 산정에서 멀리 한국도 전망할수가있다
카미자까전망대(上見坂公園)
표고 358m의 전망대로부터는 일본의 대표적인 리아시스식해안인 아소만이 정원처럼 눈아래에 펼쳐져 보이는곳이다
이즈하라(嚴原町)
이즈하라정의 안내
바다와 산에 둘러싸인 역사와 문화와 교류의 도시
카마쿠라시대, 宗씨가 미네정사가(峰町沙賀)로부터 文明18(1486)년에 移館이래,명치유신까지 약380년간의 城下町(죠우까마찌).府中,府內라고 불려져왔으며 명치유신후 이즈하라(嚴原)이라고 개칭되었다. 移館이래로 행정,문화의 중심지였으며 고대에도 대마국의 國府가설치되었다.
국경의 섬인 대마도의 영주의 봉록은 10만석이었으며 봉건시대에는 조선통신사는 이즈하라를 지나 번주의 선도로 에도로향했다.문화8(1811)년의 통신사는 여기에서 맞이하였다.
쇄국시대의 일본에있어서 해외에로의 창구는 나가사까뿐이라고 일반에서는 생각하고있지만 여기대마도는 대륙(조선)과의 문화,무역의 창구로서 번영하였으며,부산에는 대마번사가 체재하는 왜관이설치되었다.
이즈하라의 배후의 산이랑,언덕,절과신사,옛성터,마을의 다리의 이름등에는 국경의섬으로서의 역사가 숨쉬고있으며 사적이많아 小京都라고 불리워지는 가라않은 분위기의 마을이다.
옛날부터 남북으로 큰길이 관통하고,그양측에는 돌담으로 둘러쳐진 고급무사의 저택이 위치하고있으며 작은길은 막다른골목처럼보이지만 오른쪽또는 왼쪽으로 굽어있어며 이것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것이라고 한다.
인 구 : 16.084명
정(町)의 꽃 : 등나무
정(町)의 새 : 두견
정(町)의 나무 : 오동나무
이즈하라정의 안내바다와 산에 둘러싸인 역사와 문화와 교류의 도시 카마쿠라시대, 宗씨가 미네정사가(峰町沙賀)로부터 文明18(1486)년에 移館이래,명치유신까지 약380년간의 城下町(죠우까마찌). 府中,府內라고 불리었다.
국분사(國分寺)
금석성(金石城跡)
청수산(淸水山)의 남쪽,예전엔 국분사(國分寺)가 있었던 자리로서 여기에 移館해 세워졌으며 금석관이라고한다. 전국(戰國)시대의 말기로부터 토꾸가와(德川)시대의 초기, 웅장한 축성이 유행한 시대에 대마번에서는 천수각이랑 성루를 가진성은 없었는데 관문(寬文)9년(1669년) 종의진(宗義眞.21대)때에 누각을 세워 금석성이라고 부르게끔 되었다.
지금 운동공원에 남아있는 성벽과 성문,정원의 연못등의 모습이 남아있어, 옛날의 모습을 엿볼수있다. 오오떼(大手)의 누문은 대정(大正)8년까지 남아 있었지만 京都인지 어디인가의 사원(寺院)에 팔렸다고도 한다
대마역사민속자료관
1978년12월에 개관되어 대마도내의 문화재, 고고(考古)역사자료, 민속자료, 종가(宗家)의 문고등 귀중품을 수록,전시하고 있다. 그외에도 조선통신사의 두루마리 그림, 조선시대 부산초량왜관의 그림등도 전시되어 있다.
고려문(高麗門)
조선통신사의 일행을 성대히 맞이하기 위하여 조영된 부중성「府中城」의 유구(遺構)로서 남아있다. 대마도의 名門의 하나로서 현재는 대마역사자료관의 입구에 세워져있다.
조선통신사비
조선통신사의 내력을 적어놓은 기념비이다.
만송원(万松院)
만송원은 대마번주종가(宗家)의 보제사(菩提寺)로서, 元和원년(1615년) 宗씨 제20대義成(요시나리)公이 제19대義智(요시나리)公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소오온지)松音寺)를 元和8년(1622년) 義智公의 법호 만송원을 따라 개칭하고, 역대의 번주 및 부인, 측실등의 무덤이 있으며 훌륭한 묘석이 있어 오따마야(オタマヤ)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元綠,享保의 대화재로 산문을 남기고, 가람은 소실되어 현재의 堂,庫裡는 명치12년의 건물이다. 안의 정원은 寬文년간, 京都의 西川嘉長의 작품으로 山門은 對馬最古의 桃山樣式의 귀중한 건축물이다.
부께야시끼(武家屋敷:무가(武家)의 집)
마을 여기저기에 남아있는 봉건시대에 무사가 살던 가옥으로 주위의 높은 돌담은 과거의 그림자를 그대로 투영하고있는듯하다.
●옛날 일본의 계급제도는 우리와 거의 같았으며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 양반에 해당되는 최고의 계급은 무사(사무라이)로서 여러가지 일반백성에 대하여 절대적인 특권을 누렸으나, 전쟁이 있으면 목숨을 바쳐 주군에대한 충성을 다했다. 그리고 사무라이(侍)란 말의 어원은 시중든다, 곁에서 모시다라는 뜻의 사부라후(侍ふ)란 말에서 나왔다 한다.
슈젠지(修善寺)
순국비의 내력
이즈하라마을의 슈우젠지에는 구한말의 대유학자이자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하신 최익현선생의 순국비가있다.선생께서 의병활동중 포로가되어 대마도로 유배되어 일본인이 주는 음식은 먹지않겠다 하시어 결국은 굶어서 돌아가셨다. 대마도에서 돌아가신 선생의 유해는 백제의 비구니에 의해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이절에서 나흘동안 안치된 뒤 부산으로 운구되셨다고 한다.선생의 넋을 기리고자 전 두환 대통령시절 여기에 순국비가 세워졌다.
●1895년의 단발령(유 길준과 최익현의 논쟁)
내 목은 자를지언정, 뜻은 못굽힌다.
1895년 8월에 터진 국모시해 사건의 충격으로 민심이 온통 술렁이는 가운데 다시 그해 11월15일 양력사용과 아울러 저 유명한 단발령이 반포된다. 온 겨레가 흐느껴 우는 속에서 국왕 이하 정부대신들이 앞장서 머리를 깍고 전국적으로 단발이 강행된다. 이에 유림중심의 재야인사들은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와 단발령반대를 외치면서 의병을 일으킨다. 당시의 내부대신 유길준은 유림의 거두인 면암(勉庵) 최익현을 잡아가두고 단발을 강요하나 면암은『내 목은 자를지언정 내뜻만은 빼앗을수 없다』고 의연하게 버틴다. 다음은 이때 유길준과 최익현이 주고받은 논쟁의 개요다.
◎유 길준의 서신(書信)
면암선생 각하
...부모의 병환이 위독하면 손가락을 끊고 다리를잘라 부모의 명(命)을 구제하는 것이 효자의 떳떳한 도리라면 이제 나라가 병들어 시든 것을 구하려하는 마당에 어찌 한줌의 머리털을 그리고 아끼십니까? 선생은 대신의 몸으로서 마땅히 향중(鄕中)의 청소년들을 모아놓고 국왕으로부터 머리 깍으라는 조칙이 내렸음을 알리신다음 선생부터 먼저 머리를 깍고 솔선수범하시는 것이 마땅한 일인데도, 도리어 무리를 이끌고 성묘에 나아가 통곡을하시다니 가령 공자께서 오늘에 계신다하더라도 머리를 깍으실 일이거늘 선생께서는 장차 이일을 어찌하실 작정이십니까?
이는 선생께서 지하에 가신다해도 부모의 혼령이 나무라실일이요, 만일에 남의 나라에 가신다해도 오늘날 세계의 만국이 모두 머리를 깍고있으며 저 청나라 사람들마저도 땋아내렸던 긴 머리를 돌려깎아버려 머리를 깍지않은 선생께서 오히려 부끄럽게 되실터이니 선생은 이를 알아 빨리 회답해 주소서.....
◎최 익현의 회답
익현은 이곳 경사(京師.서울)에 붙들려 온 후 혼미(昏迷)로 그 죄를 살피지못하고 오직 조가(朝家.조정)의 처분만 기다리던중 이에 성상(聖上)의 전지(傳旨) 나법사(法司)의 고치(拷治.고문)도 거치지않은재 문득 집사(유 길준을 가르킴)의 사사로운 수서(手書.서신)만이 내려와 처음에는 달래고 끝에가 꾸짖으며 마치 아끼어 애석해주는 듯 하고 있으니 이 어찌된 일인가?
그 허실(虛實)도 살피지 않은째 풍문만 듣고 선뜻 잡아다 죄상을 따지지도 않고 다만 의론에만 맡긴다것은 이 모두가 권세를 잡은 사람들의 입법시행(立法施行.백성을 다스리는)하는 체모(도리)가 아니라고 이 늙은사람은 생각한다.
그러나 보내준 글을 받아보니 그 종횡으로 농락하여 백출하는 변괴가 보는이의 가슴을 떨리게 하여 감히 옳게 바라볼수도 없게하니, 그 대치(개요)는 한마디로 오늘의 사세(정세)로 경장개혁(갑오경장)이 없을수 없다는 것이며 다음은 성상(임금)께서 스스로 먼저 단발하셨으니 신하도 마땅히 그 군명(君命.임금의 명령)을 따라 지켜야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집사가 어께를 뽐내며 큰소리로 온나라를 억압해온 내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이 늙은이가 우루(愚陋.어리석음)로 방황하며 누차 그 미혹(혼돈스러워 판단이 서지않음)을 떼내려 노력하였으나 종내 그것을 이루지못한 바로 그 내용이고보니 여기서 불가불 한번 담판해보지 않을수 없다.
무릇 법이 오래되면 폐가 생기고 폐가 생기면 그것을 교정해야한다함은 유국(有國.모든나라)의 상사(흔히있는일)이며, 시세에 따라 의당 그러해야할 이치로보아 없을수없는 일이다. 그래서 국가성법(법)이 아무리 두루 아름답다해도 그에대한 경장변통(更張變通)의 논의는 이미 선현들로부터 내려온바다.
그러나 하물며 이 말세에 당하여 백성들이 병들고 나라가 패하여 오랑캐들이 번갈아 침입해 들어오는때에 있어서야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변혁이 진실로 옭고 개혁 또한 진실로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도 본말(本末)과 경중(輕重)의 구분은 있는것이니, 삼강오륜과 같은 것은 대경대법(대경대법)이니 본(本)이요 부국강병은 기예술수이니 말(末)이다. 본(本)을 마땅히 중요시해야하고 말(末)은 그 뒤에 해야하는 것은 천지를 돌아보고 고금을 통하여도 결코 바꿀 수 없는 이치이다. 그런데 이제 다만 폐법(弊法)을 경장(更張.바꾸다)하지 않을수 없다는 것만을 알고 이나라 강상(綱常)이 결코 추락되어 안된다는 것은 알지못하며, 또 부강으로 병립할수있다는 것만을 알고 강상이 이미 추락하고 상하가 무서(無序)하여 만사불성(萬事不成.하는일마다 되는일이 없음)인 것을 알지못하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가 비록 부강하고자하나 먼저 그정신이 패망하여 그것을 이룰수 있는기반을 빼앗기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근본이 한번 어지러우면 지말(枝末.나무의 가지와 끝)이 비록 갖추었더라도 그 결과를 오히려 믿을수 없는 것이어늘 하물며 그대들같이 이제 지말도 없는채 다만 우리의 근본만을 없애려할때야 말해 무엇하겟는가?
우리나라는 유사(有史.역사)이래로 이속(夷俗.야만인의 풍속)을 변화시켜 문화를 이루어왔으니 본조(本朝.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君君 .臣臣.父父.子子 그 인의(仁義)의 교(敎.가르침)와 예악(禮樂)의 속(俗.풍습)은 빛나고 빛나 중국의 3대(3代)에 결코 못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무슨 천화(天禍.하늘의 재앙)로 왜ㆍ양(일본과 서양)의 무리들이 우내(宇內.나라에)에 그 기세를 떨치고 파렴치하게 비굴하는 무리들만이 조정에 가득차서 적의 꼭두각시가 되어 거리낌없이 그흉악을 펼치고있으니, 위로는 우리임금을 속이어 가려버리고 아래로는 충언을 막아버려 숨막히게 하였다.
그러한 잘못은 점점 쌓이고 커져 드디어 금년 8월과 11월15일의 변(變.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마저 터지게 되었다 이에 이겨레 모든 신민(臣民.백성)들은 모두 난적의 죄인이 되었고 이나라 천지에는 다시 회복될 수 있는 모든 기미가 사라져 버렸으니 아 슬프다. 이를 어찌 다 말할수 있으랴?
그러나 천도(天道.하늘의 도리)에는 한번 가버리고 오지않는 법이 없고 인심(人心.세상의 여론)에는 반드시 돌아오고마는 기약이 있으니 이제라도 천심(天心)이 하루 아침에 개오(改悟.바로잡음)하여 선악(善惡)과 화복(禍福)을 가각 그 유(流)에따라 엄게게 다스린다면 오늘날 득의 양양하여 스스로 만년무패(萬年無敗.망하지 않고 영원히감)하다고 뽐내는 자들도 백일하(白日下.밝은대낮)의 도깨비들같이 봄붙힐곳이 없어질 것이다.
집사는 또한 단발의 공(功)을 주상(임금)에게 돌려 언제나 문득(생각날 때 마다) 그 위중(威重.임금의 권위의 무거움)을 빙자하여 일세(一世.한시대)를 억누르려하나, 그러나 슬프다, 비록 군명(君命.임금의 명령)이라 하더라도 따를것이 있고 따르지못할 것이 있는 법이다. 의(義)에는 언제나 옳고 그른 것이 있는 법이니 그러한 까닭에 여기서 비록 그 사람은 죽일수 있어도 그 도(道)는 허물 수 없는것이며, 그 머리는 비록 베어어버릴수 있어도 그 뜻만은 결코 빼앗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이 사람이 이렇게 상투를 가지고 버티는 것이 어찌 한갖 화(禍를.재난) 받기가 즐거워 군명(君命.임금의 명령)을 어기려 하는 것이겠는가?
돌아보건데 지키는 이 머리털에는 선왕으로부너 받은바 있으니 여기에는 백세성현(百世聖賢)의 문정(門庭)을 지키고(뜻을 받들고) 일대풍속(一代風俗)의 융성함을 주장함에 그의의가 중차대한 것이다. 하물며 오늘의 단발의 명령이 결코 우리 임금의 정사(政事.정치적인 결정)가 하신 것이 아니요 집사같은 사람들이(外人들의) 위협과 제재를 받아 부득이 한 짓들인 것이니 거기에 잘 따르는 것이 결코 경(敬.임금에 대한 충성)도 아니며 또 거기에 따르지 않는 것이 결코 역(逆.임금의 명령을 어기는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敬.임금에 대한 충성)을 다하는 소이(所以.행위.일)인 것이다. 그러나 어찌 집사가 이것을 가지고 구실을 삼을수 있겠는가?
또 집사가 서찰(書札)말미에서 말한바 소위 변고들이 첩첩히 일으나는대도 말한마디도 못하고 ? 대목에 이러러서는 늙은 ? 분기가 끓어올라 ? 지경만 같은 심정이다.
무무 무릇 변(變)가운데 가장 큰 것은 시역(弑逆.임금을 죽이는것)이며 죄가운데 가장 큰 것은 군부(君父)의 원수를 같아드리지못한 일이다. 이 곳 동토(東土.조선)위에 생을 누리는자 그 누가 우리 임금의 함육(涵育)을 받지않은 사람이기에 갑신(1884년)으로부터 금년8월에 이르기까지 역적의 무리들이 마음대로 날뛰며 조정을 휘감고 있으나 그것을 막지못하였으니, 왕법으로 논한다면 이늙은이도 의당 이들 역적들에 앞서 먼저 법의 심판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으로 해서도 이 사람은 집사에게 할말이 있다. .....집사도 다시 한번 반성해보라 . 자신이 이제까지 그 많은 변괴들을 왜 범해았는가를 그러면 반드시, 나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이건마는 어쩌면 이렇게 달라졌나하고 스스로 눈물짓게될 것이다.(외세에 조종된 자기를 깨닫고) 그러나 집사의 공죄는 이미 집사이 권형(權衡)으로 스스로 정해진 바인데도 집사는 자신이 처해야할 옳은 도리를 여전히 모르고있는 것이다.
이 늙은이는 성품도 소우(疎迂.보잘 것 없다)하고 학식도 멸렬(滅裂)하며 구습(舊習.옛날의 풍습)에만 안주하여 늙은 우매함이 이를데 없어 이 세상에는 있으나마나한 사람이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배워온 것은 오직 선왕의 말이며 입어온것은 오직 선왕의 옷이며 조석으로 닦아온 것은 오직 선왕의 덕행이었다. 그러니 비록 앞에서 더없는 곤욕이 밀려오고 뒤에서 무서운 죽음이 따라온다한들 그것이 어찌 이 뜻의 만분의 일인들 움직일수 있겠는가?
이제 집사는 등에 강한 적(賊)을 업고 세권(世權.세상의 권세)을 주장하여, 그 위엄으로 세상에 꺽지못할 것이 없은즉, 무엇 때문에 이 늙은이를 하루빨리 단죄하여 세상에 죽여보임으로써 천하로 하여금 수도수정(守道守正)을 해선 아니되고 국모(명성황후)를 적살(賊殺)하고 임금의 머리를 깍게하는 것이 오히려 당연한 도리임을 알리려 하지는 않고서, 구구하게 늙으이가 머리를 깍지안고 성묘에 통곡한 몇가지 일들을 가지고 이것저것 글로써 논쟁함으로써 스스로 그높은 권위만 손상시키고 있는가?
이 늙은이는 불행하게도 늙어서 죽지를 못하고 이런 때를 당하였으니 그 의리로 보아서는 오늘의 역적배들과 결코 한 하늘밑에 같이 살수없다. 그러나 내 이미 능히 그역적들을 죽여없애지 못하였은적 나는 마땅히 그 역적들의 손에 죽는 것이 이치로 당연하다. 그러기에 입다물고 다만 죽이는 명령만을 기다렸더니 보내온 글에서 회답독촉하는 소리가 높아 가슴안 뜻의 만분의 일을 대략 펴서 초초(草草)히 이렇게 회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경장개혁의 득실여부에 대하여는 여기서 논할 필요조차 없어 말하지 않았으니 양찰있기를 바란다.
(1895년 음력12월 7일 구유(拘幽된 전동사관(典洞私館)에서)
아유모도시 자연공원
아유(鮎)란 은어란 뜻이며, 은어가 되돌아온다는 뜻의 자연공원으로 이즈하라정의 거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즈하라 마을로부터는 자동차로 약30분정도 떨어져있다. 계곡의 바닥은 하나의 넓은 화강암판석으로 이루어져 있어며, 맑은 물이 흐르며, 공원내에는 캠프장이 있어 잔디스키, 미니골프장, 주차장, 산림욕등을 즐길수 있게끔 잘조성 되어있고 여름이 되면 이즈하라마을의 주민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찾는 여행객들로 인하여 캠프장은 대단히 붐빈다.
오후나에(お船江跡)
구전포(久田浦)로 흘러드는 구전강하구에 5基의 선착장으로 대마번의 전용선착장의 유적지이다. 현재의 모습은 寬文3년에 조성되었다고 한다. 선착장의 축대는 당시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정문, 창고, 번주(지방의 영주)가 휴식을 취하던 건물등이 남아있어 당시의 큰규모를 짐작할수가있다.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년), 바다를 접한번(藩)은 그 번선(藩船)을 격납하는 선착장을 가지고 있었으나 남아있는 것이 많지않은 현재, 일본근세사의 귀중한 유적이다.
雨森芳洲(아메노모리호우슈)의 묘
日吉의 장수원에 있으며 아메노모리 호우슈(雨林芳洲.1668∼1755)는 토오또미노 쿠니(近江國.지금의 시가현)에서 출생하였다.
木下順庵(키노시따 쥰안)의 문하생으로 유교를 공부하였으며 元綠2(1689년)년에 대마영주의 부하가되어 조선외교를 담당하였다.쥰안의 동문으로 新井白石(아라이 하꾸세끼.1657∼1725)가 국서에 德川將軍(토쿠가와 쇼군)을 일본국왕으로 표기한 것을 비난한 國號사건은 유명하다. 조선어와 중국어에 능통하였으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이시야네(石屋根.돌지붕)
시이네에 남아있는 건축물로서 지붕에 얇은판석을올려 지붕을이어 태풍이 불어도 날아가지 않게끔만든 고상식(高床式)건축물로서 일본에서는 대마도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건축물이다.
이즈하라의 마을전경
쯔쯔자끼(豆 崎) 전망대
북쪽에서 한국을 바라볼 수 있는 한국전망대가있다면 남쪽에는 날씨가 맑은날이면 일기도까지도 바라다볼 수가 있는 쯔쯔자끼전망대가 있다. 쯔쯔자끼전망대는 동지나해를 찌를 듯이 돌출되어있는 곶으로서 여기에 서면 주변의 바다가 180°로 한눈에 들어와 여행객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어준다.
이주변은 조선해협과 대마해협의 경계에 해당되며, 조류가 빨라 옛날부터 거친바닷길로 알려져 있다.
코모다하마신사(小茂はま神社)와 몽고군 침입지
문영(文永)11년(1274년)10월 9백척에 분승한 원군(元軍)의 내습을 받고 수호대(守護代) 종조국(宗助國)이하 부하80기(騎)로 방어에 힘썼으나 중과부적으로 전원이 전사하였다. 그위패를 코모다하마 신사에서 모시고있다.
대아호텔
대아호텔의 소개
한국의 대아고속해운에서 경영하는 호텔로 위치는 이즈하라마을의 산기슭에 위치하고 있다. 터미널에서 호텔까지는 자동차로 2,3분거리이며 첫날과 마지막날은 부두까지 서비스를 해주는 경우가 많다. 대마오션호텔과 마찬가지로 가까운거리를 이동하는 경우 편리를 봐주기도 한다. 산위에 위치하고 있어 전망이 좋으며 특히 호텔의 뒤편으로는 잔디공원이 넓게 펼쳐져있어 가족과함께 조용한 휴가를 보내기에는최적의 숙소이다. 부대시설로는 공중욕탕이있으며 깔끔한 식당도 갖추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