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그룹(영어: Samsung Group, 한자: 三星그룹)은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기업집단이다. 실제로 삼성그룹이라는 상호의 회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삼성전자를 중심으로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 다수의 자회사를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대표 재벌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전자와 그 계열사들을 1987년 대규모 기업집단으로 지정하였다.그럼 삼성집단이라고 해야겠네.......^^그럼 영어로는?
삼성상회
역사
이병철 이 와세다 대학 중퇴 후 마산 에서 친구 2 명과 1 만 엔씩 출자 설립 한 협동 정미소 사업 실패 후 1938 년 3 월 1 일 에 대구 에서 설립 한 삼성 상회가 오늘의 삼성 그룹 시작이다. 1948 년 에는 삼성 물산 공사가 설립되고 이어 음식과 입는 것이 여의치 않았던 당시의 상황에 가장 수요가 높았던 분야 인 설탕 과 옷감을 생산하는 기업으로서 제일 제당 과 제일 모직 이 만들어졌다 . 이후 "삼성"이라는 상호 아래 여러 계열사를 설립하면서 규모를 키웠다.
1950년대 후반, 인수합병의 대표주자로 발돋움하면서 오늘날 명실상부 재계 서열 1위의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였다. 삼성은 2013년 그룹 전체 380조 원의 매출을 올렸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같은 해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1천428조 원이다. 해외 비중이 훨씬 큰 삼성의 매출액은 GDP와 직접 비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삼성의 매출액이 모국(母國) GDP의 26.6%나 차지한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성의 수출은 2013년 1천572억 달러로 한국 전체 수출액 6천171억 달러의 25%에 해당한다.
Samsung_headquarters 삼성그룹 서초동 사옥 (삼성타운)
연혁
1938-1969: 창업
1940년 6월 삼성상회, 주식회사 삼성상회로 법인 등록
1948년 11월 삼성물산공사 (현 삼성물산) 설립
1953년 8월 제일제당 (현 CJ제일제당) 설립
1954년 9월 제일모직공업 (현 삼성SDI) 설립
1957년 1월 대한민국 최초로 사원공개 채용 실시
1958년 2월 안국화재 (현 삼성화재) 인수
1963년 7월 동화백화점 (현 신세계)과 동방생명 (현 삼성생명) 인수
1963년 12월 동화부동산 (현 제일모직) 설립
1964년 8월 한국비료공업 (현 삼성정밀화학) 설립
1965년 9월 중앙일보 창간
1965년 10월 새한제지공업 (현 한솔제지) 인수
1966년 9월 사카린 밀수 사건이 폭로되면서[5] 이병철 회장 은퇴 선언
1968년 2월 이병철 경영 복귀
1968년 11월 고려병원 (현 강북삼성병원) 개원
1969년 1월 삼성전자공업 (현 삼성전자) 설립
1970-1992: 성장시기
SPC-1000, 1982년에 소개되었다. 삼성의 첫번째 개인용 컴퓨터였다. (한국 시장에서만 해당) 데이터를 로딩하고 저장하기 위해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를 사용했고, 플로피 드라이브는 옵션이었다
1970년 1월 삼성NEC (현 삼성SDI) 설립
1970년 1월 코리아엔지니어링 (현 삼성엔지니어링) 설립
1972년 7월 제일합섬 (현 도레이케미칼) 설립
1973년 1월 제일기획 설립
1973년 5월 임페리얼 (현 호텔신라) 설립
1974년 8월 삼성중공업 설립
1977년 8월 삼성정밀 (현 삼성테크윈) 설립
1982년 2월 삼성라이온즈 창단
1985년 5월 삼성데이타시스템 (현 삼성SDS) 설립
1987년 11월 19일 창업주 이병철 사망
1987년 12월 이건희 삼성그룹 2대 회장으로 취임
1988년 3월 창업 50주년을 맞이하여 제2 창업 선언, KOCA카드 (현 삼성카드) 인수
1991년 11월 신세계백화점 (현 신세계), 전주제지 (현 한솔제지) 계열 분리
1992년 11월 국제증권 (현 삼성증권) 인수
1993-2009: 신경영 선언
1993년 6월 그룹 CI 변경, 삼성 신경영 선언
1993년 7월 제일제당 (현 CJ제일제당), 삼성시계 (현 SWC) 등 10개사 계열 분리
1994년 11월 삼성서울병원 개원
1995년 3월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 설립
1995년 4월 제일합섬 (현 도레이케미칼) 계열 분리
1999년 3월 중앙일보, 보광 등 9개사 계열 분리
2000년 4월 삼성자동차 (현 르노삼성자동차) 매각
2008년 4월 22일 비자금이 폭로되면서 이건희 회장 사퇴,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삼성그룹의 대외대표를 겸함
2008년 11월 태평로 사옥에서 서초 삼성타운으로 그룹 사옥 이전
2010-현재: 경영 복귀와 위기경영
2010년 3월 이건희 경영 복귀
2012년 7월 삼성전자 LCD사업부, 삼성모바일디스플레이, S-LCD가 합병하여 삼성디스플레이 출범
2013년 11월 삼성에버랜드의 급식 식자재 사업을 분사하여 삼성웰스토리 출범, 건물관리사업은 에스원에 편입
2013년 12월 제일모직의 패션 사업을 삼성에버랜드에 양도, 삼성SNS가 삼성SDS에 흡수 합병
2014년 6월 1일 삼성석유화학이 삼성종합화학에 흡수 합병
2014년 7월 1일 제일모직이 삼성SDI에 흡수 합병
삼성그룹 태평로 사옥
지배구조
삼성은 지주회사가 없고, 지배구조가 복잡한 기업이다. 이건희의 아들인 이재용이 삼성에버랜드의 25.1%의 지분을 가진 주주로, 지배구조의 꼭대기에 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이건희 일가가 삼성에버랜드 지분 54%를 가지고 있으며, 삼성에버랜드는 삼성생명의 대주주이다. 삼성생명은 또 여러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데, 삼성에버랜드, 삼성생명, 삼성전자를 비롯한 많은 자회사들이 순환출자로 얽혀 있다. 이러한 구조가 1970년대 정부 주도의 대기업 중심의 경제 성장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만들어진 결과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과세상의 몇 가지 문제와 조세포탈 등 약간의 책임만 해결되면 오히려 삼성으로서는 출자·승계 구도를 완벽하게 합법화하고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다.
순환출자구조가 문제가 되는 이유는 특정인이 자기가 가진 주식 수 이상의 의결권을 행사한다는 점이다. 또 다른 문제점은 이 순환출자의 고리에 금융회사가 끼어 있다는 점이다. 고객에게 빌린 돈으로 기업에 대한 지배구조를 강화하는 데 쓴다는 것이다. 보험회사와 차이는 있지만 은행의 경우 이론적으로는 고객의 예금을 통해 기업지배를 무한히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은행의 기업지배를 제한한다. 이 법을 원용한 법이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이다. 1997년에 제정된 이 법은 금융회사가 계열사의 주식을 5% 이상 갖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 법에 따를 경우 순환고리는 끊어지고 지배력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
또 하나는 증여 과정이다. 삼성카드는 에버랜드 주식을 주당 10만원에 사들였는데 이재용 남매는 전환사채로 7700원에 매입했다는 것이다. 2008년 ~ 2009년까지 삼성특검을 통해 재판이 진행되어 에버랜드 전환사채 발행 부분은 무죄, 신주발행 부분은 유죄로 마무리되었다.
계열사
삼성그룹은 2009년 4월 현재 자산총액 174조8860억원으로서,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제14조에서 규정하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1위)이다. 삼성그룹의 동일인은 이건희 회장이며, 삼성그룹에 속하는 회사는 총 65개로서 이 중 금융 · 보험회사가 10개이다.
50% 이상 출자회사 현황
삼성전자 : 스테코(51%), 세메스(91.5%), 삼성전자서비스(99.3%), 삼성전자판매(100%), 삼성전자축구단(100%), 삼성전자로지텍(100%), 삼성디스플레이(84.8%), 삼성메디슨(68.5%)
제일모직 : 에스디플렉스(50%)
삼성에버랜드 : 콜롬보코리아(100%), 네추럴나인(51%), 삼성웰스토리(100%)
삼성중공업 : 대정해상풍력발전(50.1%), 정암풍력발전(50%)
삼성테크윈 : 삼성탈레스(50%)
삼성정밀화학 : 한덕화학(50%), 에스앤폴(100%), 에스엠피(50%), 에스티엠(50%)
삼성종합화학 : 삼성토탈(50%)
삼성석유화학 : 삼성에스지엘탄소소재(50%)
에스원 : 시큐아이(52.2%), 휴먼티에스에스(100%), 에스원CRM(93.4%)
삼성SDS : 오픈타이드코리아(72.6%), 에스코어(94.8%),오픈핸즈(100%), 미라콤아이앤씨(100%), 누리솔루션(100%)
삼성생명보험 : 생보부동산신탁(50%), 삼성생명서비스손해사정(99.8%), SRA자산운용(100%)
삼성화재해상보험 : 삼성화재손해사정서비스(99.9%), 애니카자동차손해사정(100%)
삼성증권 : 삼성자산운용(65.3%), 삼성선물(51%)
삼성카드 : 삼성카드고객서비스(100%)
SVIC 6호 : 레이(64.6%),
삼성바이오로직스 : 삼성바이오에피스(88.2%),
삼성디스플레이 : 삼성코닝어드밴드스글래스(50%), 에스유머터리얼스(50%)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 : 성균관대학교기숙사(100%)
이전 계열사
신세계 (구 신세계백화점) : 1930년 10월 24일 일본의 미쓰코시 경성점으로서 개업했다. 해방 이후 동화 백화점으로 영업하다가, 1963년에 삼성그룹으로 인수되어 상호를 신세계백화점으로 바꾸었다. 이후, 1991년에 삼성그룹에서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1997년에 완전히 계열 분리되었다. 분리 후, 신세계를 모태로 하여 신세계그룹을 출범시켜 유통, 패션사업을 영위 중이다. 신세계그룹의 회장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딸 이명희다.
한솔제지 (구 전주제지) : 1965년 1월 새한제지공업으로 시작하였다. 같은 해 10월 이병철이 인수하여, 1968년 전주제지로 개칭했다. 1991년 삼성그룹에서 분리, 독립경영체제 선언을 했다. 분리 후, 한솔제지로 개칭하고 한솔제지를 모태로 하여 한솔그룹을 출범시켜 제지, 화학사업을 영위 중이다. 한솔그룹의 회장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외손자 조동길이다.
CJ제일제당 (구 제일제당) : 1953년에 설립된 삼성의 계열사 제일제당에서 출발하였다. 1993년에 제일제당건설, 제일씨앤씨, 제일냉동식품, 제일선물과 함께 삼성에서 분리되었다. 분리 후, 제일제당을 모태로 하여 제일제당그룹을 출범시켰고, 2002년 그룹명을 CJ그룹으로 변경하였다. 식품, 유통, 미디어사업을 영위 중이다. CJ그룹의 회장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손자 이재현이다.
도레이케미칼 (구 제일합섬) : 1972년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모태로 미쓰이, 도레이 등 일본 자본과 합작형태로 제일합섬으로 설립되었다. 1995년 삼성에서 분리되었고, 1997년 제일합섬에서 새한으로 사명을 변경하고, 이창희의 새한미디어그룹을 확장하여 새한그룹을 공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의류, 미디어사업을 중심으로 무리하게 확장하였다가 현재는 매각되거나 청산했다. 새한그룹의 중심이였던 새한은 2008년 웅진그룹에 인수되어 웅진케미칼로 개칭했다. 당시 새한그룹 회장과 부회장은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의 며느리 이영자와 손자 이재관이었다.
중앙일보 : 삼성그룹의 자본으로 설립된 신문이며, 현재는 분리되었다.
르노삼성자동차 (구 삼성자동차): 원래 삼성자동차로 출발하였으나 2000년 프랑스 르노에 지분 70%를 매각하였다.
한국휴렛팩커드 : 1984년에 삼성전자와 미국 휴렛팩커드가 합작법인인 삼성휴렛팩커드를 설립하였다. 1995년에 현재의 사명으로 변경되었고, 1998년 삼성전자 지분 45%가 휴렛팩커드로 인수되어 삼성에서 완전 분리되었다.
네이버 : 1999년 6월에 서비스를 처음 시작한 대한민국의 포털 사이트이다. 1998년 삼성SDS의 사내 벤처에서 시작해 분할된 네이버컴 주식회사에서 운영하다가 현재는 네이버 주식회사에서 운영 중 이다.
동양방송 :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존속했던 대한민국의 텔레비전 및 라디오 방송사이다. 1964년 5월에 라디오 서울(RSB)로 시작했으며, 같은 해 11월에 삼성그룹에 인수되면서 중앙방송(JBS)으로 이름을 바꿨다. 1970년대에 큰 성장을 기록하다가 1980년 언론 통폐합에 따라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되었으며, 라디오는 KBS 3라디오 및 KBS 2FM, 텔레비전은 KBS 2TV로 통합되었다.
Expo_2012_Samsung_pavilion 여수엑스포 삼성관
경영진
회장급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겸 삼성라이온즈 구단주)
부회장급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이건희 장남)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권오현 (삼성전자 DS부문 대표이사 부회장)
강호문 (삼성전자 대외협력담당 대표이사 부회장)
박근희 (삼성사회봉사단장)
사장급
장충기 (미래전략실 차장)
윤부근 (삼성전자 CE부문 대표이사 사장)
신종균 (삼성전자 IM부문 대표이사 사장)
이인용 (삼성전자 커뮤니케이션팀장)
박상진 (삼성SDI 대표이사 사장)
전동수 (삼성SDS 대표이사 사장)
최치훈 (삼성물산 대표이사 사장)
원기찬 (삼성카드 대표이사 사장)
김창수 (삼성생명 대표이사 사장)
안민수 (삼성화재 대표이사 사장)
김봉영 (삼성에버랜드 리조트·건설부문 대표이사 사장)
윤주화 (삼성에버랜드 패션부문 대표이사 사장)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겸 삼성에버랜드 사장, 이건희 장녀)
이서현 (삼성에버랜드 사장 겸 제일기획 사장, 이건희 차녀)
김재열 (삼성엔지니어링 사장, 이건희 사위)
부사장급
임우재 (삼성전기 부사장, 이건희 사위)
미래전략실
삼성그룹 미래전략실은 삼성그룹의 컨트롤타워격으로, 기존의 전략기획실이 삼성 특검 결과로 발표한 삼성 경영 쇄신안으로 인해 폐지되었다가 2010년 12월 다시 부활하면서 만들어진 조직이다. 미래전략실장은 최지성 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이 맡고 있다.
삼성언론재단
삼성언론재단은 언론인의 자질향상과 복지 증진에 기여하기 위하여 1995년 12월 5일 설립허가를 받아 12월 9일 설립등기를 받아, 이건희 회장이 100억원, 삼성전자가 100억원 총 200억원을 출연하여 설립된 문화체육관광부 소관의 재단법인이다. 사무실은 서초구 서초2동 1321-15 삼성생명 서초타워 19층에 있다. 주요 사업은 언론인 양성 및 자질향상을 위한 지원사업과 국내외 언론인의 교류사업이다.
정준호 과장은 1998년 11월초 모 증권사에서 재단기금 227억원중 3억원을 인출, 주식에 투자하는 등 2000년 8월까지 모두 40여차례에 걸쳐 재단기금 208억원을 횡령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8년에 벌금 10억원의 중형과 손해배상액 1백23억원의 배상명령을 받았다. 2002년 2월 28일, 자산총액을 약 40억원으로 축소하였다.
무노조 경영
삼성은 노동조합의 결성을 억지하는 정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삼성그룹의 계열사에는 노동조합이 결성되어 있지 않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삼성그룹의 삼성생명, 삼성화재, 삼성카드, 삼성중공업, 삼성정밀화학, 호텔신라, 에스원에 모두 노조가 존재한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실제 노동자들이 결성한 것이 아니고 회사측에서 문서상의 노동조합을 설립한 것이고 그렇지 않는 노동조합은 기업의 인수합병시 피인수 기업에 존재하던 노동조합이다.
삼성의 인사업무를 맡고 있는 수원삼성SDI 소속의 신모 차장은 과거 노조를 만들려다 해고된 류모 씨의 집을 고성능 도청기로 도청하다 발각돼 한겨레신문에 기사가 나고 고소를 당하기도 했다.
이건희 전 회장은 "삼성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노조가 아니라 노조의 필요성"이라고 말하였으며, "삼성은 노사 안정을 실천하려는 삼성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노사문제를 예방적으로 해결하고 있고, 업계 최고의 처우를 보장하고, 노사협의회를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공정한 인사제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동조합이 필요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평가
삼성은 대한민국 경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직접 수출 부문에서 2000년에 312억 달러로 한국 총 직접 수출부문의 18.1%를 담당했고, 2004년에는 527억 달러 20.7%를 차지했다. 또한 2003년 납세액은 6조 5천억 원으로, 대한민국 정부 조세 예산에서 6.3%에 해당하는 금액을 납부했다.
삼성 측은, 삼성그룹이 실제 그룹이 아니라 삼성물산에서 시작되는, 역사를 같이 하는 기업의 모임으로 설명하고 있으며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또한 한국에서 노조 없는 회사로도 알려져 있다. 삼성은 직원들의 내부 신뢰수준 향상과 노사간의 건전한 조직문화 활성화 프로그램인 GWP(Great Workplace) 운동을 1998년 삼성전자 반도체총괄부문이 처음 도입한 뒤로 2003년부터 계열사별로 GWP를 도입하고 있다. 삼성화재, 삼성SDI, 삼성에버랜드, 삼성물산, 제일모직, 삼성네트웍스 등이 그러하다. 특히, 2006년에는 삼성전자 9개 자회사와 80개 해외법인, 130개 해외사업장으로 GWP를 확대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삼성은 영국 인터브랜드와 미국 비즈니스위크가 공동 선정한 세계 기업 브랜드가치 평가에서 2000년 43위(52억달러), 2001년 42위(64억달러), 2002년 34위(83억달러), 2003년 25위(108억달러), 2004년 21위(125억달러), 2005년 20위(149억달러)를 기록했다.
삼성그룹은 삼성생명 등 금융 관계사 위주로 운영되어 오던 컴플라이언스 프로그램(CP) 제도를 삼성전자 등 전 계열사로 확대하는 등 준법감시경영을 전면 도입할 전망이다.
비판 및 논란
삼성은 금력을 이용해 사회 각층에 로비를 벌이고 있다는 의혹이 있어서 '한국은 삼성 왕국이다'라는 말로 비판을 받는 경우가 간혹 있다. 2007년 10월 30일 삼성의 전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의 삼성 비자금 관련 폭로로 검찰 및 시민단체에 전방위적 로비를 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삼성특검을 실시되었다. 추미애는 삼성이 거액의 선거 자금을 제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떡검, 삼성장학생 등의 풍자 용어도 삼성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다.
삼성그룹이 연루된 주요 사건들은 다음과 같다.
사카린 밀수 사건
구포역 열차 전복 사고
중앙일보 위장 계열 분리
무노조 경영
중소기업과 불공정거래
삼성 X파일 사건
삼성 에버랜드 전환사채 저가 배정 사건
삼성1호-허베이 스피릿 호 원유 유출 사고 (태안 기름유출 사고)
삼성의 비자금 문제
용산참사
특검 수사 과정에서 광범위한 차명계좌 거래 사실이 확인돼 경영일선에서 퇴진했던 배호원 전 삼성증권 사장은 2009년 인사에서 삼성정밀화학 사장으로 복귀했다. 경영권 불법승계 혐의에 연루돼 기소된 유석렬 삼성카드 사장은 삼성토탈 사장이 됐다. 삼성의 정보수집과 로비업무를 총괄했던 장충기 전 전략기획실 부사장은 사장으로 승진해서 삼성 브랜드 관리위원장을 맡게 됐다.
이건희 회장의 차명재산(약 4조 원 이상[30])을 '실명전환 후 좋은 일'에 쓰기로 약속돼 있지만 최소 3000억 원에서 최대 6000억 원이 모자란다. 삼성 측이 금융실명법을 지키지 않고 과징금을 납부 하지 않고 있다.
삼성 비자금 관련 폭로 사건에서 삼성화재가 빼돌린 미지급 보험금(고객의 돈)을 다시 고객의 몫으로 되돌려 놓았다는 말이 아직 없다. 미지급 보험금 횡령 혐의로 조준웅 특별검사가 기소한 황태선 전 삼성화재 대표이사에 대해 집행유예가 확정됐다. 금융감독원은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과 관련해 삼성화재에 기관주의 조치를 했다고 밝혔다.
삼성그룹 총수 일가의 병역면제율이 73%에 이르러 재벌 가족중에 가장 높다.
1998년부터 2012년까지 공정위가 주요 조사방해 행위와 관련해 과태료를 부과한 16건 중 6건이 삼성계열사에서 일어났다. 1998년에는 삼성자동차와 임직원의 조사거부 및 방해(과태료 1억2000만원)가 있었고 2003년은 삼성카드가 허위보고, 허위자료 제출(2000만원)을 했다. 2005년은 삼성토탈 직원의 조사 방해(1억8500만원)도 있었다. 삼성전자는 2005년과 2008년 조사 방해로 5000만원, 4000만원의 과태료를 각각 부과받았으며 2011년의 방해행위로 2012년에 사상 최고액인 4억원의 과태료를 부과받았다.
의료민영화 관련 논란
정부가 추진중인 의료민영화 정책의 최대 수혜자가 삼성그룹이 될 것이라는 논란이 있다. 삼성그룹은 삼성의료원을 필두로 삼성생명, 삼성화재(금융업), 삼성메디슨(의료기기), 삼성바이오로직스(제약), 365홈케어(건강관리), 삼성전자/삼성종합기술원/삼성테크윈/삼성SDS/삼성네트웍스(U-health) 등의 계열사를 소유하고 있으며 2009년부터 헬스케어산업에 매우 공격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이번 의료민영화 정책은 자본이 부족해 의료 사업을 추진하지 못하는 대형병원이 자본투자를 받아 헬스케어산업에 뛰어들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삼성, 현대와 같이 이미 진출해 있는 기업이 보다 손쉽게 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어준 것이라는 것이 주된 평가이다.
스포츠 스폰서십
올림픽 게임
아시안 게임
국제 육상 경기 연맹
국제 하키 연맹
아시아 축구 연맹
아프리카 축구 연맹
대한축구협회
삼성 월드 챔피언십
첼시 FC
로고의 역사
한국어 한자 낱말 "삼성"(三星)의 뜻은 세 개의 별을 가리킨다. 삼성의 '삼(三)'은 크고 많고 강하다는 것을 나타내며, '성(星)'은 밝고 높고 영원히 빛나라는 뜻을 나타낸다. 처음삼성의 상호의미는 친구3명이 동업회사를 만들면서 붙여진 상호였던것 같다.
Past(1938)_samsung_logo 삼성 별표 국수의 로고, 1938년 말부터 1958년 교체 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Past(1969-79)_samsung_logo 삼성그룹 로고, 1969년 말부터 1979년까지 사용되었다
Samsung-old 삼성전자 로고, 1980년부터 1992년 교체 될 때까지 사용되었다.
Samsung_Logo.현재 삼성의 로고, 1993년부터 사용 중이다
삼성그룹
형태; 대규모 기업집단(영어; 그룹)
산업 분야; 복합
창립; 1938년 3월 22일 (삼성상회 설립일)
창립자; 이병철
시장 정보; 한국: 005930
국가; 대한민국
본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74길 11
(서초 삼성타운)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삼성로 129
(삼성 디지털시티, 삼성전자 본사)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67
(태평로 사옥, 금융부문 본사)
사업 지역; 전 세계
핵심 인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최지성; (미래전략실장, 부회장)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 겸 삼성라이온즈 구단주)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
홍라희;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
이부진; (호텔신라 대표이사 사장 겸 제일모직 사장)
이서현; (제일모직 사장 겸 제일기획 사장)
매출액; 310조 662억 원(2013)
영업이익; 38조 1906억 원(2013)
자산 총액; 331조 4000억 원(2013)
자회사; 삼성전자, 삼성중공업, 삼성SDI, 삼성물산
삼성생명, 삼성카드, 삼성증권, 호텔신라
제일모직, 삼성엔지니어링 등
가족관계
이병철(李秉喆,)
이병철(李秉喆, 1910년 2월 12일 ~ 1987년 11월 19일)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삼성그룹과 CJ그룹의 창업주이다. 1938년 삼성상회를 세웠으며 이후 무역업에도 종사하였다. 1951년에는 삼성물산을, 1953년에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을 설립했고, 수출을 통해 제조업을 확장하여 삼성중공업, 삼성물산, 삼성석유화학 등 삼성그룹의 기반을 닦았다.
1964년 5월에 TBC를, 다음해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방송과 언론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일가에게 넘겼다. 그 뒤 기업 활동에 전념하여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전자제품의 수출에 성공을 거두었다.
학력
지수보통학교 → 수송보통학교 졸업
중동중학교 졸업
와세다대학교 전문부 정치경제학과 중퇴
명예 박사 학위
1982년 보스턴 대학교 명예경영학 박사
이병철생가
생애
출생과 가계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에 경상남도 의령군 정곡면에서 아버지 이찬우와 어머니 권재림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경주부 아전이었던 할아버지 이홍석에 이어 진주군의 대지주였다.
그의 조상 중 한 사람이 1600년대에 벼슬을 버리고 진주로 낙향하여 이곳에 정착하여 대대손손 거주지로 삼으면서 진주에 그 뿌리를 내렸다.[1]시골로 낙향하여 향반으로 몰락했지만 할아버지의 때에 1천석의 벼를 생산하던 대농토를 가진 지주로 성장했고, 아버지 역시 1천석지기의 농토를 소유하였다. 이병철의 집안은 대대로 의령과 진주 지역 일대의 대지주였다.
아버지는 지역의 지주로 만족하지 않고 시골에서 큰 농사를 지으면서도 한성을 오고가며 독립협회와 기독교청년회에도 참여하였으며 한성에서 이승만을 만나 서로 교류하였다.
유년기
어려서 할아버지 문산 이홍석이 세운 서당인 문산정(文山亭)에서 천자문, 사서삼경, 논어(論語) 등을 배웠다. 1919년 3월 한학 수학을 인정받아 진주군 지수면의 지수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1920년 지수보통학교 4학년 당시 어머니의 친정이 있는 경성 종로 가회동의 수송보통학교로 전학을 갔다. 학교를 다니는 동안 심한 경상도 사투리 때문에 경성 지역 학생들과 의사소통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곧 학교 생활에 적응, 중동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학습진도가 올라 우수한 성적을 거두게 된다. 이후 17세에 박팽년의 후손인 박기동의 4녀 박두을과 고향에서 결혼하였다. 자서전인《호암자전》에서는 1929년에 결혼하여 그 해 12월 2일에 장녀 인희를 낳았다고 밝혔으나 실제로는 1926년에 결혼하였고 이인희는 1928년 12월 20일에 태어났다.
청소년기
결혼식을 마치고 상경하여 다시 학교에 다니며 학업에 열중하다 4학년 1학기 무렵 일본 유학을 결심한다. 이병철은 부모님이 자신의 일본 유학을 반대하자 옆 동네에 살던 효성그룹의 창업주인 조홍제를 찾아가 사정했다. 일본 유학 경비 500원을 빌려달라고 부탁했는데 조홍제가 흔쾌히 수락, 조홍제의 도움으로 그와 함께 일본에 유학하였다.
청년기
일본 유학
중동중학교를 졸업한 후 1930년에 와세다대학교에 입학했다. 유학 초기 한동안 책에 빠졌다가 틈만 나면 곳곳의 공장을 방문해서 일본 공업의 실상을 자주 살펴보았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이병철은 기업인의 꿈을 꾸게 되었고 유학 시절 고향에서 매달 학비로 200원을 송금해왔는데, 당시 일본 중산층 가정의 한달 생활비가 50원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풍족한 편이었다.
대학 시절 이병철은 공부에 열중하고 스스로 충실하게 생활했으나, 1학년 때 건강의 악화로 쉽게 지치고 조금만 책을 읽어도 쉽게 피로해지는 증상이 생겨 휴학계를 내고 온천을 찾아다니며 병을 치료하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후일 회고에서 그는 "공부해서 무슨 벼슬을 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도쿄의 신학문이 어떤 것인지 알았고 그 사람들의 생각도 알게 되었으니 유학생활을 더 하면 뭣하나 싶은 회의가 들었다."며 입학한지 1년도 되지 않아 돌연 자퇴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휴양하면서 이병철의 건강은 회복되었다. 대학시절 자기 집안의 노예를 해방시켜주었던 톨스토이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병철은 건강이 회복되자 제일 먼저 집안의 머슴들에게 전별금까지 주어 모두 해방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뒤 고향에서 특별히 할일 없이 무위도식하던 이병철은 친구들과 골패노름에 빠졌다. 밤새 노름에 빠져 달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날이 많았다고 이병철 스스로 술회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 노름을 하다 집으로 돌아와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세 아이의 모습을 보는 순간 그는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을 받았다.
훗날 회고에 의하면 "그야말로 허송세월이었다. 어서 빨리 뜻을 세워야 한다."는 회한과 두려움에 며칠 꼬박 새웠으며, 자신에게 맞는 사업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사업을 하겠다고 결심을 굳힌 그는 며칠 후 아버지 이찬우에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그러자 아버지 이찬우는 별말 없이 아들에게 선선히 사업자금을 내주었다.
그는 장사를 할 곳으로 경성부부터 평양, 부산, 대구 등지를 직접 물색하여, 생각해 보았으나 고향 인근의 포근 항구 마산이 떠올랐다. 쌀을 생각한 그는 마산은 조선 각지에서 생산한 쌀을 수집하여 도정해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정공장이 있는 것을 알아냈고, 도정공장은 수 백 가마니씩 도정을 기다리는 벼덤이들이 있었다. 바로 그는 친구 둘과 힘을 합해 동업(同業)으로 정미소를 차렸다.
기업 활동
첫 사업 실패
1936년 고향 친구인 정현용(鄭鉉庸), 박정원(朴正源)과 동업으로 마산에서 도정공장과 협동 정미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동차 회사도 하나 인수했다. 그 간에 그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헌 자동차 열 대에 새 자동차 열 대를 더 구입했다. 당시 자동차 한 대 값은 지금의 비행기 한 대 값과 같았다.
자동차 회사는 문제가 없었으나 정미소의 장사가 되지 않으면서 돈은 벌기는 커녕 본전을 까먹고 있었다. 같이 동업을 시작한 두 친구 중에 한 친구가 그만 두자고 했지만 이병철은 그럴 수 없었다. '쌀 값이 내릴 때는 사고, 올라갈 때는 파는' 방법에 착상한 후 다음 해부터 정미소에서도 큰 돈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동차 회사와 정미소의 일이 풀리면서 막대한 이익을 창출했고, 그 때의 이병철의 머리에 대농(大農)가 출신답게 땅을 생각했다. 이어 김해 평야에 나온 땅을 전부 사기로 작심, 돈은 번 돈과 은행 돈을 쓰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당시에는 농토를 담보로 제공하면 80%까지 은행 융자가 가능했다.
땅을 사놓고 은행과 정산을 하려할 때의 일이다. 은행에서 모자라는 돈을 가지고 오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돈이 남았다고 내주는 것이었다. 이상하다고 여겼으나 당시 땅을 사서 등기하고 정산하는 사이에 땅의 은행 감정가가 올라 융자 돈이 많아져 땅을 사고도 돈이 남았다. 이로써 청년 이병철은 갑자기 일약 200만평의 대지주의 일류 갑부가 되었다. 대구, 부산에 주택 부지도 사놓았다.
그는 정미소와 자동차 회사와 땅을 각각 맡길만한 사람들에게 맡겨놓고 밤 마다 놀러 다녔다. 마산에 몇 안되는 요정들이 모두 그의 단골들이었다. 그래서 낮에는 사업체에서 돈 버는 것을 구경 감독 지휘하고, 밤에는 춤 추고 노래하고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이 터져 조선과 일본의 각 은행은 융자를 중지하고, 이미 융자해 준 대금을 회수하고 있었다. 개인이 아무리 사업 수완이 좋고 운이 있다고 하더라도, '세월(歲月)이 돕지 않으면 재물(財物)은 지킬 수도 없고 늘릴 수도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중일전쟁의 여파로 이병철은 정미소 자동차 회사 김해 땅을 모두 팔아 은행 빚을 갚고 빈털터리가 됐다.
사업가로서의 시작
그 뒤 1938년 3월 29세에 30000원의 자본금으로 대구 수동에〈삼성상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업를 시작하였다. 1941년 주식회사로 개편하고 청과류와 어물 등을 생산자로부터 공급받아 도매, 소매업과 수출 등도 하면서 중국에도 수출하기 시작하였다. 1942년 조선양조를 인수하여 함께 운영하던 중 광복 후 1947년 경성으로 상경하여 다음 해 삼성물산공사를 창설하고 무역업에도 참여하였다.
1950년 초 일본공업시찰단원의 한사람으로 선정되어 출국, 일본 내 제조업, 수공업 등 일본의 공업계와 전후 공업시설 복구 현장을 직접 시찰하고 귀국했으나 그해 6월 25일 서울에서 한국 전쟁을 맞았다. 전쟁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1951년 무렵 부산에서 다시 삼성물산을 세워 다시 무역업에 본격 뛰어들면서 1953년에는 제조업에도 투자하였다.
SPC-1000, 1982년에 소개되었다. 삼성의 첫번째 개인용 컴퓨터였다. (한국 시장에서만 해당) 데이터를 로딩하고 저장하기 위해 오디오 카세트 테이프를 사용했고, 플로피 드라이브는 옵션이었다
제조업과 기업 활동
1953년에 제일제당, 1954년에 제일모직을 설립,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제조업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사업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동방생명, 신세계백화점, 안국화재보험, 전주제지 등을 인수, 경영하였고, 성균관대학교의 재단 이사로도 교육사업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후 사업 영역을 크게 확대해갔으며 중앙개발, 고려병원 등을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1961년부터 1987년까지 한국경제인연합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4년초 한국비료를 인수 운영하였으며, 1964년 5월 동양라디오, 텔레비전 동양방송을 설립하여 방송에도 진출했고, 그 해 대구대학의 재단 이사장이 되었다. 1965년 9월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에도 진출하였다. 그러나 중앙일보 등은 사돈인 홍진기에게 넘겼다. 동양방송은 1980년 언론통폐합이 될 때까지 운영하였다.
사카린 밀수 사건 전후
1964년 8월 13일 알리앙스 프랑세즈 프랑스연합회 한국위원회 이사에 위촉되고, 1964년 동양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과 1965년, 중앙일보를 창설하여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였다.
1966년 5월 24일 삼성에서 경남 울산시에 공장을 짓고 있던 한국비료가 사카린 2259 포대(약 55t)를 건설자재로 꾸며 들여와 판매하려다 들통이 났다. 이 것이 누구의 지시에 의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뒤늦게 이를 적발한 부산세관은 같은해 6월 1059 포대를 압수하고 벌금 2천여만 원을 부과하였다. 삼성은 한국비료 공장을 짓기 위해 일본 미쓰이사로부터 정부의 지급보증 아래 상업차관 4천여만달러까지 들여왔다. 사카린 밀수를 현장지휘했다고 밝힌 이맹희가 1993년 발간한《회상록 - 묻어둔 이야기》에서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사건은 박정희 대통령과 이병철 회장의 공모 아래 정부기관들이 적극 감싸고 돈 엄청난 규모의 조직적인 밀수였다고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다.
“ 1965년 말에 시작된 한국비료 건설과정에서 일본 미쓰이는 공장건설에 필요한 차관 4200만 달러를 기계류로 대신 공급하며 삼성에 리베이트로 100만 달러를 줬다. 아버지는 이 사실을 박 대통령에게 알렸고 박 대통령은 "여러가지를 만족시키는 방향으로 그 돈을 쓰자."고 했다. 현찰 100만달러를 일본에서 가져오는 게 쉽지 않았다. 삼성은 공장 건설용 장비를, 청와대는 정치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돈을 부풀리기 위해 밀수를 하자는 쪽으로 합의했다. 밀수현장은 내가 지휘했으며 박 정권은 은밀히 도와주기로 했다. 밀수를 하기로 결정하자 정부도 모르게 몇가지 욕심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이 참에 평소 들여오기 힘든 공작기계나 건설용 기계를 갖고 오자는 것이다. 밀수한 주요 품목은 변기, 냉장고, 에어컨, 전화기, 스테인레스 판과 사카린 원료 등이었다. ”
후일 이병철은 자신의 자서전 호암자전에서 정부가 삼성을 죽이려고 한 것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러나 이병철 등이 직접 개입되어 있는가, 정부의 재벌 죽이기식 표적수사였는가의 사실관계 여부 확인은 오리무중이다.
생애 후반
복귀와 기업 활동
그러나 1966년에 사카린 밀수가 적발되면서 물의를 빚게 된다. 1966년 11월 한국비료의 상무로 있던 차남 창희가 서울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이후 야당과 재야 단체에서는 진상 조사를 요구했고 그는 결국 이 사건으로 "모든 사업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히고 사업에서 물러났다가 18개월 만인 1968년 2월에 다시 복귀하였다.이때 장준하 등 야당인사는 박정희 등이 특정 재벌을 비호한다며 비난하기도 했고, 국회에서도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병철은 주변의 반대와 비난을 극적으로 극복하고 다시 경영에 복귀하게 된다.
그 뒤 모직회사가 성장하면서 1972년 7월 제일모직 경산공장을 분리하면서 합성섬유를 제조하는 시설을 갖추어 제일합섬을 설립했고, 1969년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설립하여 삼성그룹 육성의 도약대를 만들었다. 1974년 삼성석유화학, 삼성중공업을 설립하여 중화학 공업에 진출하였고, 제3공화국과 제4공화국 당시 수출위주 경제 성장 정책에 맞추어 전자제품, 화학제품과 중공업 등의 대량 해외 수출을 통해 막대한 부를 창출하여 대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삼성정밀·용인자연농원등을 설립하였다.
1975년 5월 특별히 제일합섬의 공장 시스템을 공개하기도 했다. 제일합섬은 1982년부터 새한그룹을 차려 분가한 차남 창희에게 서서히 넘겨주었다. 1977년 5월 삼성전자와 삼성전기를 합병하여 삼성전자로 단일화하고, 1984년 8월 상호를 삼성전자 주식회사로 바꾸었다. 삼성전자는 그의 사후에도 삼성그룹 성장의 기반이 되었다.
말년과 사망
이후 삼성정밀 등을 설립하고 1982년 삼성반도체통신을 설립하였다. 이 밖에도 문화재단·장학회 등을 설립하였고, 백화점·호텔 등의 경영에도 참가해서 사업의 다각화를 통하여 국가경제 발전에도 크게 공헌하였다. 1981년 2월 한일경제협회 고문에 위촉되었고 이듬해 다시 재위촉되었다.
미술에 심취했던 이병철은 많은 소장품을 수집하거나 소장해 오다가 호암미술관을 건립하였고, 국악과 서예에도 큰 관심을 가졌다. 1977년 삼성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 되었으며, 현대그룹 회장이었던 정주영 등과 함께 울산에 공단를 조성하는 데에도 일정부분 투자하거나 기부를 하여 설립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후에 울산공단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이후 금탑산업훈장을 비롯하여 세계최고경영인상을 받았다. 1987년 11월 초 이병철은 한일경제협회 고문직을 사퇴하고 같은 달 19일에 폐암으로 7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의 묘소는 현재 용인에버랜드에 위치하고 있다.
사후
1987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특별 추서되었다. 삼성전자는 3남 건희에게 상속되었고 장녀 인희는 한솔그룹을 창업하였으며 중앙일보는 사돈인 홍진기 계열에게 상속되었고, 제일제당과 제일모직 등 제일그룹은 장남 맹희에게 상속되었다. 차남 창희는 새한그룹을 창립하여 분가하였다. 1995년 제2회 한국경영사학회 창업대상이 추서되었다. 일본으로부터 일훈일등서보장이 추서되었고,1999년 12월에는 매일경제와 전경련이 주관한 20세기 한국을 빛낸 30대 기업인의 한사람으로도 선정되었다.
이건희(李健熙)
이건희(李健熙, 1942년 1월 9일 ~ )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삼성전자의 회장이다. 1987년부터 삼성그룹의 회장직을 지냈으며, 2008년 삼성 비자금 사건이 터진 후 잠시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가 2010년 회장으로 복귀했다. 2014년 5월 11일 밤 늦게 가슴통증 등을 호소하며 쓰러진 이후로 2014년 10월 현재까지 의식이 깨어나지 않고 있다.
이건희 회장이 이끈 20년간 삼성전자는 실적과 시장점유율 면에서 큰 성장을 이루었다. 1993년 29조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2013년 380조원으로 늘었으며, D램 하나 뿐이던 시장점유율 1위 제품은 20개로 늘어났다. 반면 제왕적인 의사결정에 의한 폐해가 삼성자동차의 처참한 실패 등을 낳았고, 편법 상속이나 비자금 조성 등의 전근대적인 경영 행태가 기업 가치를 훼손하는가 하면, 비자금 수사 등을 조직적으로 방해하거나 검사들에게 뇌물을 돌리는 등 국가 시스템을 훼손해온데 대한 비판도 크다.
발언
삼성 위기론
삼성의 최고경영자인 이건희는 위기를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경영에 복귀한 2010년 3월에도 "삼성전자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으며, 앞으로 10년 이내에 삼성전자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제품이 사라질 것이므로 다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밝혔다.[7]
위기에 관한 어록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 2등은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1993년 6월 1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 선언)
천재 한 사람이 10만 명을 먹여살린다. (2003년 6월 5일 인재경영을 강조)
앞으로 우리는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 (2013년 10월 28일 신경영 20주년 만찬)
또한 이건희는 메기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고 전해진다. 미꾸라지가 있는 물 속에 메기를 풀어놓으면 미꾸라지들이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헤엄치기 때문에 오히려 건강해진다는 것이 '메기론'이다. 그러나 메기론은 이건희가 처음 한 발언이 아니라 아버지 이병철이 자주 했던 발언이었다고도 한다.
학력
196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고등학교 졸업
1965년 와세다대학교 경제학부 학사
1966년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수료
명예 박사 학위
2000년 서울대학교 명예철학 박사
2005년 고려대학교 명예철학 박사
2010년 와세다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경력
1966년 : TBC에 이사로 입사
1978년 :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 1987년 : 삼성그룹 부회장
1981년 :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1987년 ~ 2008년 : 삼성그룹 회장
1996년 : IOC 위원 임명
1996년 : 대한레슬링협회 회장
1998년 : 삼성전자 회장
2005년 : 대한올림픽위원회 명예위원장
2008년 : 삼성 비자금 사건으로 조세포탈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면서 그룹 경영쇄신안으로 삼성전자 회장직에서 퇴진
2010년 : 삼성전자 회장으로 경영 복귀
상훈
1984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맹호장
1986년 대한민국 체육훈장 청룡장
1991년 IOC 올림픽훈장
1993년 문화부 장관 감사패
1994년 한국무역학회 무역인대상
1996년 한국능률협회 선정 ‘최고의 경영자상’
200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4년 홍콩 디자인경영자상 초대 수상
2004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3등급) 훈장
사건
2008년 4월 22일에 차명계좌와 1000억원대의 세금포탈 혐의가 적발되면서 이건희는 경영쇄신안을 내놓고 모든 직책을 내놓고 이수빈 삼성생명 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여 전격 퇴진하였다. 이건희가 증여세를 피하면서 삼성그룹의 지분을 물려주려 했다는 의심을 받은 아들 이재용도 최고 고객 책임자(CCO, Chief Customer Officer)의 직위에서 물러났다. 7월 16일 양도소득세 456억원에 대한 조세포탈 혐의로 징역 3년과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을 선고받았다. 이후 2009년 8월 14일에 세금포탈과 주식시장 불법행위, 배임행위가 적발되어 이에 대해 유죄를 확정되었으나 12월 29일 대통령 특별 단독사면을 발표하여 사면되었다.
2010년 2월 7일에 IOC에서도 견책 조치를 취했으며, 향후 5년간 산하 위원회 활동을 금지하였다.하지만 IOC 위원으로서의 활동은 계속할 수 있다.
2014년 5월 11일 밤 늦게 호흡곤란증세로 쓰러져 순천향대학교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응급실에 도착한 직후 심근경색으로 심장이 멎었으나 바로 심폐소생술이 실시되어 호흡과 심장 박동은 살아났으나 의식은 깨어나지 못했다. 이후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져서 스텐트 삽입술을 받고 보조기구를 부착하여 저체온 치료를 했으나 2014년 10월 현재까지 의식이 깨어나지 않고 있다.
기타
정신 질환으로 병역을 면제 받았다.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아내와 자식만 빼고 모두 바꾸자며 신경영을 주창했다.
2004년, 강원 평창 보광휘닉스파크에서 록 밴드 체리필터의 연주 도중, 시끄럽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공연을 중단시켰다.
2009년 3월, 포브스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이건희 일가의 재산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30억 달러로, 세계 205위를 차지했다.
2010년, 이건희는 삼성전자 보통주 4,980,000주와 우선주 12,000주, 삼성물산 2,206,000주, 삼성생명 41,519,000주 등을 보유하고 있는데, 국내 최초로 보유 주식 지분가치가 9,223,000,000,000원을 돌파하였다.
2011년 8월 5일, 이건희와 아내 홍라희는 지난 해부터 최근까지 원불교가 미국 뉴욕 주 컬럼비아 카운티에 건립 중인 ‘원달마센터’에 여러 차례에 걸쳐 120억 원을 기부했다. 홍라희는 독실한 원불교 신자로 알려져 있다. '원달마센터'는 원불교가 개교 100주년인 2015년을 앞두고 뉴욕 주 허드슨 강 상류 지역에 건립될 예정인 포교 센터다. 10월 2일 개원할 예정으로 원불교 해외 포교를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대규모 명상 홀과 사무실·주거 시설 및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이재용(李在鎔, 1968년 6월 23일 ~ )은 대한민국의 기업인이자 삼성전자의 부회장이다.1998년 6월에 대상그룹 명예회장 임창욱의 장녀 임세령과 결혼하였으나 2009년 2월에 이혼하였다.
학력
경복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 학사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DBA 수료
약력
1991년 : 삼성전자 총무그룹 입사
2001년 :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보
2003년 : 삼성전자 경영기획팀 상무
2004년 : S-LCD 등기이사
2007년 : 삼성전자 글로벌고객총괄책임자 전무
2009년 :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 부사장
2010년 : 삼성전자 최고운영책임자(COO) 사장
2012년 : 삼성전자 부회장
Signs,_signs_and_more_signs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있는 삼성의 전광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