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rning Point에 선 중국경제
2021년 알리 파이낸셜의 상장 좌초 이후 중국 대기업들은 모두 납작 엎드려 불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알리바바, 텐센트에서부터 시작된 규제는 부동산, 교육업계에 이어 전체 경제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세계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시작된 강력한 제재는 줄어들기는커녕 머잖아 중국 경제의 '뉴노멀'이 될 확률이 높다. 중국 산업의 변천사와 터닝포인트를 맞은 기업들의 상황을 돌아보고, 공동부유를 내세운 중국 정부의 새로운 정책 방향이 기업에게 어떻게 작용할지 살펴본다.
1. Hurun Report: 신들의 황혼, 누군가의 신기원
2. Made in CHINA: 메이드 인 차이나의 도약
3. Internet: 갈림길에 선 중국 인터넷업계
4. Yahoo: 야후라는 반면교사
5. Regulation: 중국 기업은 공동부유를 어떻게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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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urun Report: 신들의 황혼, 누군가의 신기원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세계수 위그드라실 아래에는 계속 뿌리를 갉아먹는 독룡(毒龍) 니드호그가 살고 있다. 나무뿌리를 계속 물어뜯다가 언젠가 나무가 쓰러지는 그 날이 오면, 신들의 황혼(라그나로크)이 찾아온다고 전해진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와 같이 낡은 세계가 붕괴하고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는 모습이 반복되고 있다.
후룬 리포트와 중국 경제의 역사
1999년 상하이에서 회계사로 일하고 있던 29세 영국 청년 Rupert Hoogewerf는 직업적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문과 잡지, 상장기업 보고서를 뒤져서 중국 대륙 부자 50인의 명단을 작성했다. 그리고 자신의 중국 이름 후룬(胡潤)을 붙여 후룬 리포트라고 명명했다. 중국 최초의 부자 순위였다.
이 순위가 발표되자, 로이터통신은 즉각 중국의 ‘선부론’(先富論: 우선 먼저 부자가 되고 그다음의 일은 그때 생각하자는 주장)이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니었다고 논평했다. 그 후 20년 동안, 중국 최고 부자는 계속 바뀌고 있다. 새로운 부자의 출현과 함께 후룬의 중국 부자 순위도 계속해서 갱신되고 있다. 부자 리스트와 생애를 이야기로 한데 모으면, 제조업·부동산· 인터넷산업의 흥망성쇠가 뒤얽힌 중국 경제 발전의 역사가 될 것이다.
국제화의 물결 속에서 가장 먼저 발전한 것은 중국의 제조업이었다. 1980년대 신시왕(新希望: 사료 기업)의 류융하오(劉永好), 레노버의 류촨즈(柳傳志), 하이얼의 장루이민(張瑞敏), 와하하의 중칭허우(宗慶後), 정타이(正泰 : 저압변압기 제조)의 난춘후이(南存輝)부터 90년대 타이캉보험(泰康人壽保險)의 천둥성(陳東昇), 쑤닝(蘇寧: 가전제품 판매회사)의 장진둥(張近東), 소호차이나(부동산 개발사)의 판스이(潘石屹)까지 각 세대를 대표하는 기업가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중국 1세대의 부자 신화를 만들었다.
2008년 이후 중국은 경제 엔진을 수출에서 내수로 전환하기 위해 박차를 가했고, 서민의 소득 수준이 높아지면서 주거 여건을 개선하려는 수요가 순식간에 폭발했다. 이와 함께 완다그룹의 왕젠린(王健林), 헝다그룹의 쉬자인(許家印) 등 부동산 개발기업 창업주가 번갈아 중국 부호 1위에 올랐다. 부동산업계가 승승장구하는 사이 제조업은 이전의 빛을 잃고 점점 뒷자리로 밀려났다.
인터넷 기업의 시대
새 천 년에 들어서면서, 세계적으로 인터넷업계가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다. 애플의 아이폰이 사람들의 생활을 바꾸기 시작했고, 모바일 인터넷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아마존은 kindle을 출시해 기존의 독서 방식에 일대 변화를 일으켰다.
SNS는 사람들이 친구를 사귀고 소통하는 방식에 거대한 변화를 만들었고, 대표 기업 페이스북은 세계 3대 사이트로 등극했다. 이런 세계적인 흐름과 함께 중국에서도 넷이즈(網易), 시나닷컴(新浪, sina), 소후닷컴(搜狐, sohu), 알리바바, 바이두와 같은 인터넷 기업이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3년 이후 중국 최고 부자는 인터넷 재벌과 부동산 재벌이 번갈아가며 차지하는 양상을 보였다. 2014년 알리바바의 마윈(馬雲) 회장이 처음으로 중국 부호 1위에 올랐을 때, 그의 자산은 1,500억 위안(약 27조원)이었다.
같은 해, 알리바바 그룹은 미국에서 상장했는데 첫날 38.7% 폭등하면서 한순간에 세계에서 시가총액이 두 번째로 큰 인터넷회사가 되었다. 그리고 2020년 마윈과 그 일가의 자산은 4천억 위안으로 집계됐다.
전성기 때, 알리바바와 텐센트의 시가 총액은 각각 3조 위안을 넘었다. 이와 동시에, 부동산 부호들의 영광은 급속히 쇠락하고 있었다. 인터넷은 부동산을 가볍게 눌렀고, 제조업은 일찌감치 뒤쳐졌다.
신들의 황혼지난 20여년 동안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후룬의 부호 차트는 점점 더 길어졌는데, 1999년 50명에서 2020년에는 2,389명으로 증가했다. 이 부자 순위가 만들어진 초기에는 상위 10대 부자 중 절반이 제조업 출신이었지만, 2009년에는 부동산이 절반, 다시 2020년에는 인터넷업계 출신이 40%를 차지했다. 인터넷업계는 시대적 혜택을 톡톡히 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 잔치도 언젠간 끝이 날 것이다.
아무리 강한 자도 쇠락의 시기를 맞이하게 마련이다. 트래픽 증가의 한계, 거시 경제의 구조조정, 플랫폼의 반독점 문제, 이 세 가지 요인이 함께 작용하면서 인터넷의 황금시대가 저물고 있다. 인터넷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은 근본적인 재조정 요구를 받고 있다. 인터넷 기업은 한때 시대의 총아로 떠받들어졌지만, 제조업과 부동산업계와 같이 쇠락의 길을 걷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시대는 언제나 새로운 손님을 맞이하며, 신들의 황혼은 또 다른 신기원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Miraeasset Securities Magazine, INVESTMENT / The Sage Investor, 2022.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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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Made in CHINA: 메이드 인 차이나의 도약
실물 경제가 흥하면 국가 경제도 좋아진다. 실물 경제의 발전은 줄곧 중국 경제 발전의 중요한 과제였다. 신중국 수립 초기, 중국의 산업 기초는 매우 취약했다. 기술 수준이 낮아 먹고 입는 데 쓸 생활용품 정도만 겨우 제조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수작업이나 단순 제조에 의존하는 상황이었다. 개혁개방 이래 중국은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변모해 왔다. 산업 규모가 확대되고 기술 수준이 향상되면서 제조 혁신에 성공했고, 국제적으로 ‘’Made in China" 제품의 경쟁력과 영향력이 점차 강화되었다.
거대한 제조 시스템
세계인이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해 갖는 구체적인 이미지는 두 장의 커버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다. 하나는 The Times의 2012년 커버로, 각종 노동밀집형 OEM 공장에서 수많은 중국 노동자가 세계 시장을 위해 ‘메이드 인 차이나’ 제품을 만들어내는 모습이다.
또 다른 하나는 2015년 Economist의 커버다. 역시 ‘메이드 인 차이나’가 주제이지만 다른 점은 공장 대신 포효하고 있는 거대한 강철 용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에너지를 대량 소비할 뿐만 아니라 매연도 많이 뿜어내고 있다. 이 두 장의 표지는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해 세계인이 갖는 전형적인 이미지와 변화를 보여준다.
‘메이드 인 차이나’에 대한 첫인상은 중국의 거대한 노동력에서 비롯됐다. 1991년 이래 중국의 산업 노동력은 줄곧 세계 노동력의 30%가량을 차지해왔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두 번째 이미지는 강철 용이다.
월스트리트 저널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벌크 화물 상품의 소비, 즉철·알루미늄·구리 등 주요 광석의 중국 소비량은 전 세계 소비량의 40% 이상을 차지한다.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이 세계에 제공한 수많은 제품은 세계 생산량의 약 2/3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에는 가전제품도 포함되는데, 정보통신기술 영역의 다양한 상품 생산량도 3/4에 달한다. 이제 ‘메이드 인 차이나’가 세계에 제공하는 제품에는 전통적인 셔츠, 양말 같은 잡화뿐만 아니라, 핸드폰을 포함한 다양한 제품이 있다. 중국은 이미 개발 도상국 중에서 높은 시장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다.
글로벌 밸류체인에서 위치가 변화하다
지금은 아이폰 뒷면에 ‘메이드 인 차이나’가 아니라 ‘캘리포니아에서 디자인, 중국에서 조립’이라고 쓰여 있다. 이는 글로벌 밸류체인에서 제품의 설계와 생산을 분리하는 전형적인 표기 방법이다. ‘메이드 인 차이나’의 의미는 이미 조용히 변화하고 있다. 원래 ‘메이드 인 차이나’ 딱지가 붙었던 곳은 신발, 모자, 장난감, 와이셔츠 등의 방직 분야였다.
현재 단일 노동 비용으로 비교한다면 ‘메이드 인 차이나’는 뚜렷한 우위가 없다. 아니,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정보통신기술 분야에서 한정 시간 내에 최고의 품질로 제품을 생산하는 면에서 보면 중국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효율적인 곳이다.
글로벌 밸류체인에서 중국의 위치는 점차 상승하기 시작했다. 특히 둥관(東莞), 선전으로 대표되는 조립가공 지역은 이미 완전히 새로운 밸류체인 형태로 바뀌고 있다. 조사에 따르면, 선전에서는 개인용 전자제품의 설계부터 시제품 제조까지 평균 2주일이면 가능하다. 이는 전 세계 어느 곳에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IMF 제1부총재는 중국이 글로벌 공급체인의 중심인 동시에 중요한 수요처가 되었다고 밝혔다. 이는 중국이 글로벌 밸류체인에 진입한 후 나타난 또 하나의 발전 추세이다. 수출이나 생산에만 의존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중요한 수요처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제 공급과 수요, 즉 수출입 두 방면에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게 됐다.
중국 산업정보화부가 발표한 데이터에 따르면, 중국은 2020년 산업 부가가치가 31조 3천억 위안에 달해, 11년 연속 전 세계 최대 제조업 국가다. 중국은 제조업 대국이지만, 여전히 제조업 강국은 아니다.
규모는 크지만 개선해야 할 부분이 산적해 있다. 전반적인 기술 수준과 글로벌 산업체인에서의 위상으로 볼 때, ‘메이드 인 차이나’는 여전히 글로벌 중간 수준에 머물러 있다. 저가 제품은 과잉이고 중고가 제품은 부족하다. 특히 첨단산업, 핵심기술 분야에서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 경제권과 여전히 적지 않은 격차가 있다. 중국은 ‘메이드 인 차이나’에서 ‘중국 혁신’과 ‘중국 스마트 제조’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을까? 역사적 시험대가 중국을 기다리고 있다. Miraeasset Securities Magazine, INVESTMENT / The Sage Investor, 2022.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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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Internet: 갈림길에 선 중국 인터넷업계
갈림길에 선 중국 인터넷업계
지금은 개인이 부상하는 시대인 동시에 공동체가 폭발하는 시대이다. 수많은 개인이 한 시대의 급행열차에 탑승하며 왕관을 쓰기 시작한다. 인터넷은 의심할 여지없이 초고속 특급열차이다. 바이두의 리옌훙, 알리바바의 마윈, 텐센트의 마화텅, 바이트댄스(진르터우탸오와 틱톡 모회사)의 장이밍, 메이퇀뎬핑(소셜 커머스)의 왕싱, 핀둬둬(소셜 커머스)의 황정은 바로 여기에 탑승한 슈퍼 개인이다.
2020년 글로벌 인터넷 상장사 30위 랭킹 중, 미국은 18개, 중국은 7개 기업이 올랐다. 여기에는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 게임회사 NetEase, JD닷컴, 핀둬둬 등이 포함되었다. 시대는 영웅을 만든다. 마윈처럼 어떤 영어 교사는 ‘어렵지 않은 비즈니스’를 가르치는 대가가 되었고, 주식시장에서 큰 수익을 거둔 광둥 청년은 온라인에서 기존 친구나 새로운 친구와 만나 대화할 수 있는 시스템인 중국판 소셜 소프트웨어를 출시했다.
중국 대표 인터넷 기업과 창업주들은 지난 25년간 중국 인터넷의 진화와 함께 실패와 성공을 모두 겪어왔다. 살얼음판 위를 조심스럽게 걸으며 몇 번이고 전부를 건 도박에서 승리해 업계의 모범이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는 1999년부터 시작된다.
미국 비즈니스 모델의 중국 상륙
1991년 성탄절, 리옌훙은 난생 처음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는 자신이 8년 후 같은 날 고액의 연봉과 미국 영주권을 버리고 새로운 상업 제국을 건설하게 되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그해 처음으로 웹사이트가 탄생했지만, 인터넷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1995년 8월 9일, Netscape는 웹 브라우저를 분리해 상장했다.
설립 후 16개월 동안 수익을 낸 적이 없던 이 회사의 시가총액은 27억 달러였다. 이후 20년간, 투자자들은 더 이상 IT회사를 수익으로만 평가하지 않게 되었다. 아메리카온라인(AOL), 아마존, Craigslist(미국의 지역 생활 정보 사이트)와 eBay는 인터넷 수요를 예리하게 포착, 잇달아 다양한 분야의 리더가 되었다. 이로써 인터넷을 미국에서 인기 아이템으로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 바다 건너 중국에도 인터넷 산업의 씨앗을 뿌렸다.
넷스케이프 상장 즈음 마윈은 인터넷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고, 딩레이(넷이즈 창업주)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광저우로 내려간 상태였다. 리옌훙은 미국에서 귀국해 중국 시장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1997년에는 NetEase가, 1998년에는 소후닷컴(搜狐, sohu.com)과 시나닷컴(新浪, sina.com)이 설립되었다. 1999년 야후차이나가 정식으로 오픈했다. 이로써 중국 인터넷 시대가 열리며 이후 20년 동안 중국 인터넷의 발전 속도는 미국도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났다.
소후닷컴을 오픈한 장차오양 덕분에 창업 열기에 고취된 마화텅은 같은 해 11월 11일 텐센트를 설립했다. 1년 동안 두 번의 창업에 실패한 마윈은 만리장성에서 18명의 창업 멤버와 함께 울부짖었고, ‘Hypertext link 분석’의 특허를 보유하게 된 리옌훙은 브리즈번의 세계 인터넷 컨퍼런스에서 구글 창업자와 첫 만남을 가졌다.
이 3명의 청년은 비슷한 시기 인터넷업계에 잇달아 등장해 20여 년간 지속될 경쟁을 시작한다. 이 1년 동안, 치후360(현 360 시큐리티)의 저우훙이 회장은 Malware(컴퓨터 사용자 몰래 시스템에 침투하거나 피해를 입히기 위해 설계된 소프트웨어)소프트웨어 3721을 만들었다. 1999년 전후는 인터넷시대의 첫 번째 도약 시기였다. 알리바바, 텐센트, 바이두, 넷이즈, Ctrip, JD닷컴 등의 기업이 모두 이 시기에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1984년 중국 전통산업이 급성장한 것처럼, 향후 20년 동안 중국의 거의 모든 비즈니스 제품을 선보일 기업들이 이 때 형태를 갖춘 것이다. 이미 두 번의 실패를 겪은 마윈은 치열한 포털 사이트 경쟁에서 탈피해, 전자상 거래 모델 비즈니스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후판화원(湖畔花園)이라는 아파트 단지에 방을 임대해 사무실을 오픈한 첫째 날, 마윈은 18명의 알리바바 창립멤버에게 개업 연설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세계 최대의 전자상거래 회사를 만들 것이고, 102살까지 살 것이다.” 이 방에 있던 사람들 중 누구도 미래를 예상할 수는 없었지만 순수한 그의 믿음과 열정에 동참했다. 이듬해 1월 리옌훙이 6명의 멤버와 함께 검색엔진 사이트 바이두를 설립했다. 그리고 중국 인터넷의 기본 모델인 ‘포털+커뮤니티+전자상거래+소셜+게임+엔터테인먼트+검색’ 카테고리 구성을 완비 했다.
1999년을 전후해서 이토록 걸출한 인터넷기업이 다수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술 논문 ‘격동30년’(激動三十年)은 이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과학기술사, 예술사, 상업사를 살펴 보면 어떤 분야나 국가에 전성기가 온 특정 해에 여러 위대한 인물이나 회사가 집중적으로 탄생한다. 이런 현상은 이성적인 논리로는 유추하기 힘든, 역사에 내재된 드라마틱한 현상이다.”
1세대 유학파는 미국식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을 중국에 도입했다. 그리고 1세대 프로그래머는 첨단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선두 위치를 다졌다. 유학파와 프로그래머의 조합은 중국 인터넷 시대의 폭발적 성장을 위한 고속도로를 놓는 역할을 했다.
나스닥의 붕괴, 중국 인터넷 모델의 초석
인터넷의 급속한 발전에 사람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마존의 주가는 1년 새 23배 상승하는 등, 전 세계가 인터넷이 몰고 온 과학기술 혁명에 열광하고 있었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처럼 나스닥 지수는 5,132포인트로 정점을 찍고 난 뒤, 인터넷 거품 붕괴와 함께 1,100포인트까지 80% 폭락했다.
인터넷 회사들의 주식은 하루 아침에 휴지조각이 되었다. 넷이즈 주식은 상장 당시의 15.5달러에서 3개월 만에 0.64달러로 떨어졌다. 딩레이는 넷이즈 매각을 시도했지만, 재무감사 문제 때문에 매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소후닷컴의 장차오양은 이사회의 배척으로 실권을 거의 상실했고, 시나닷컴 창업주 왕즈둥(王志東)은 불행하게도 회사 주가가 55달러에서 1.6달러로 떨어지자 이사회에 의해 회사에서 퇴출됐다.
3대 포털 기업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바이두와 알리바바, 텐센트는 운좋게 주식 폭락을 피해갔다.
바이두는 시드 라운드 투자에서 120만 달러를 받았고, 이후 두 번째로 1천만 달러의 자금을 조달하며 비즈니스 모델을 빠르게 확장해 갔다. 2001년 8월 리옌 훙은 처음으로 투자자와 결별까지 강행하며 사업 변신을 거듭, 사용자를 위한 독립적인 검색엔진으로 변신했다. 입사 4개월차의 천재적인 상품 설계자인 위쥔(兪軍)이 리옌훙에게 변신의 기회를 제공했다. 이후 8년간 그들은 함께 구글을 물리치고, 검색과 인터넷 게시판 서비스로 1차 인터넷 대전을 마무리했다.
검색엔진의 최우선 순위는 트래픽이다. 빠르게 인지도를 얻기 위해 바이두는 ‘시나닷컴 셧다운 사건’을 일으켰다. 어느 날 시나닷컴에서 검색창에 키워드를 검색하자 ‘시나닷컴이 비용을 지급하지 않아 바이두에서 시나의 검색 서비스를 중단합니다. 검색을 원하시면 baidu.com으 로 접속하십시오’라는 메시지가 적힌 페이지가 뜬 것이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당시 시나닷컴 포털의 백엔드를 바이두가 하청받아 책임지고 있었는데 시나닷컴에서 한 분기 비용을 지불하지 않았다. 몇 번의 독촉에도 시나닷컴에서는 관리자가 휴가를 갔다는 식의 핑계를 대며 돈을 연체했다. 그러자 바이두의 개발자가 시나닷컴의 검색 엔진을 중단시켜 버린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바이두는 개인 사용자의 대량 유입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같은 해 리옌훙은 검색엔진의 검색 결과 방식을 확립했다. 그 방식은 비용을 많이 지불할수록 검색 상위에 오르도록 배치하는 형태로, 이는 향후 10년 동안 바이두의 핵심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바이두에게 황금알을 낳아준 이 천재적인 설계가 8년 후 여론 비판의 중심에 서게 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모든 것을 시도한 시대
2008년 중국 네티즌 수가 처음으로 미국을 넘어섰다. 자국에서 치뤄지는 올림픽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인터넷 발전을 더욱 촉진시키며 PC 시대는 절정기를 지나고 있었다. 이것도 잠시, 안드로이드 운영체제가 출시되며 모바일 인터넷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2009년 중국 인터넷은 ‘포털의 시대’에서 바이두, 알리바바, 텐센트가 주름잡는 ‘BAT의 시대’로 전환되었다. 세 기업은 BAT가 여러가지 서비스를 시도하며 수익원 확장에 나섰다. 바이두는 전자상거래 ‘여우아’와 소셜 서비스 ‘티에바’를 출시했다. 알리바바는 소셜서비스 왕왕(旺旺)과 알리게임을 출시했다. 텐센트는 서우서우(搜搜)를 열고 검색서비스에 뛰어들었고, 전자상거래 파이파이(拍拍)와 게임, 엔터테인먼트 서비스를 출시했다.
이들 3대 대기업은 서로의 사업을 끊임없이 탐색하고 경계하며 소셜, 검색, 전자상거래, 게임 등의 영역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그들은 자체 서비스에서 발생하는 트래픽과 자금 우위를 이용해 다른 기업의 서비스를 차용하는 영리한 방법을 채택했다. 창업자의 입장에서 만약 텐센트나 알리바바가 자신의 회사 서비스를 모방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분노를 넘어 공포가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PC시대에 대기업들은 제대로 된 규칙과 감독관도 없이 무질서하게 성장을 추구했다.
모바일 인터넷의 초기 키워드, 경쟁
2008년을 기점으로 중국 인터넷업계에 서는 노골적인 경쟁이 번번이 벌어졌다. 2010년 9월 27일, 텐센트와 중국 보안 소프트웨어 개발업체인 치후360이 충돌했다. 당시 텐센트가 ‘QQ닥터’와 ‘QQ컴퓨터관리자’와 같은 백신 프로그램을 내놓자 치후360이 텐센트의 메신저 서비스 QQ에 보안 결함이 있다고 지적하며 ‘360세이프’라는 프로그램을 내놓은 것이다. 이후 텐센트는 치후360 브라우저 사용자의 QQ메신저 사용을 중지, 사용자에게 360과 QQ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요구했다. 이후 이 사건은 ‘3Q대전’이라 불렸다.
구글이 중국에서 철수한 뒤 바이두의 검색 시장 점유율은 한때 80% 이상을 차지, 경쟁자라고는 없는 독점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알리바바의 타오바오는 쇼핑 검색시스템을 선보이며 의도적으로 바이두의 검색을 차단했다. 이후 바이두 검색에서 타오바오는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모바일 시대의 ‘폐쇄형 네트워크 서비스’(Walled Garden)가 번성하자, 개방성을 추구해 온 PC 인터넷의 황금시대는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
악습과 폐단의 발견
2008년 11월, CCTV ‘30분 뉴스’는 이틀 연속 바이두의 폐단을 보도했다. 바이두의 검색광고 서비스에 대해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검색 상위권에 오른 병원을 찾았다 엉터리 치료를 받고 숨진 사례가 드러나면서 바이두의 ‘검색어 장사’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진짜 인기 순위가 아닌 비용을 주고 구매한 순위였기 때문이다. 이런 사건은 다른 기업에서도 터져 나왔다. 1,107명의 중국공급상이 알리바바 직원과 손잡고 사기행각을 벌여, 알리바바에 찬물을 끼얹었다.
결국 2011년 2월, 당시 알리바바 CEO를 맡고 있던 웨이저(衛哲)가 책임지고 사퇴했다. 2011년 10월 10일, 타오바오 쇼핑몰은 온라인 입점업체가 지불하는 기술 서비스 비용과 위약보증금을 증액했다. 이는 150만 소형 판매자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소형 판매자는 대형 판매자를 대상으로 악의적으로 구매와 반품을 반복하고, 오프라인에서는 타오바오 본사를 포위하며 시위를 벌였다. 결국 타오바오는 가격인상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0월 공성전’(十月圍城)이라고 불린다.
변혁은 기업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기업 자체적으로 반성과 고질병 제거가 이어졌다. 2010년 3Q대전 후에 텐센트는 폐쇄적인 구조를 폐기하기로 결정했다. 2011년 바이두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AI의 등장을 예고했다. 2012년 알리바바는 대규모 인수합병을 진행했다. BAT는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소셜 미디어와 알고리즘의 시대
2010년 전후는 중국 인터넷의 두 번째 약진의 시대이다. 메이퇀, 디디추싱(滴滴 : 택시호출 서비스), 진르터우탸오(今日頭 條: 뉴스 알고리즘 서비스), 샤오미(小米), 콰이서우(快手: 숏폼 공유 SNS), 비리비리B잔(Bilibili B站: 동영상 스트리밍 플랫폼), 모모(陌陌: 데이트 및 라이브스트리밍 앱)는 모바일 인터넷 열기에 편승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2010년 샤오미의 레이쥔 회장은 모바일 기업 샤오미의 창립을 발표했다. 그는 파격적인 온라인 판매 방식과 ‘바람이 부는 곳에 서 있으면 돼지도 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중국 젊은 층으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같은 해 3월 미국의 소셜 커머스 기업 그루폰을 복제한 메이퇀이 출시되었다. 명품 쇼핑몰 VIP닷컴은 설립 4년 만에 나스닥에서 상장했고, 동영상 플랫폼 아이치이(愛奇藝)가 저작권 (IP) 경쟁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었다.
차세대 유니콘 기업의 등장과 함께 모바일 인터넷 시대의 골드러시가 벌어졌다. 케빈 켈리(Kevin Kelly)는 “인터넷 시대는 연결된 시대다. 이 시대에 우리는 개체에서 하나의 집단으로 변화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25년이라는 짧은 시간 속에서 중국 인터넷의 성장스토리는 베이징, 선전, 항저우와 상하이를 관통하며 14억 중국인에게 영향을 끼쳤다. 개인의 부상은 곧 집단적 경험과 이야기로 바뀌었다.
중국의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중관춘(中關村) 인근의 주기적인 교통체증, 항저우 알리바바 본사의 야근 불빛, 선전 텐센트 본사 아래서 보너스를 받기 위해 줄지어 선 직원들, 이런 장면들은 중국 인터넷의 성장 스토리에 대한 부러움과 자부심 자체다.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후의 모습을 앞으로도 기대하고 싶다. Miraeasset Securities Magazine, INVESTMENT / The Sage Investor, 2022.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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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Yahoo: 야후라는 반면교사
산업 시대부터 인터넷 시대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외부 환경만 변한 게 아니다. 인간 내면의 정신 세계도 계속해서 변화하며 새로운 문화를 형성해 왔다. 인터넷 세대인 주링허우(90後: 90년대 출생)와 링링허우(00後: 2000년대 출생)에게 Yahoo는 낯선 단어이다. 그러나 70년대와 8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의 마음 속에 야후는 인터넷의 대명사로 아로새겨져 있다. 검색 엔진의 선구자였던 야후의 현재 상황은 처참할 지경이다. 구글과 페이스북을 인수할 여력이 있었던 야후는 오히려 버라이즌에 인수됐다. 그렇게 야후의 가치는 시가총액 1천억 달러에서 48억 달러로 추락했다.
야후의 실패, 무엇이 원인인가?
당시 야후는 세계 최초로 인터넷 내비게이션 서비스를 제공한 사이트였다. 또한 무료 콘텐츠와 유료 광고를 결합한 인터넷 비즈니스 모델을 개척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야후는 줄곧 세계 인터넷 사이트 랭킹에서 1위 왕좌를 차지했다. 또한 2006년 세계 상위 20대 인터넷기업 랭킹에서 야후(1위), 야후 재팬(7위), 야후 차이나(14위)의 세 기업이 세 자리를 차지할 정도였다. 미국의 구글, 페이스북 그리고 중국의 3대 포털 사이트인 시나닷컴(sina, 新浪), Soho(搜狐), NetEase(網易)도 모두 야후의 추종자이거나 모방자였다. 그 당시 야후는 제국이었고, 전체 인터넷 포털과 맞먹을 정도였다.
하지만 야후는 자신에게 졌다. 바로 기업 정체성 탐색에 실패한 것이다. 야후가 이룬 중대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유료 광고 방식을 통해 사용자가 인터넷 콘텐츠를 무료로 접근할 수 있는 웹 포털 모델을 개척한 것이다. 즉, 야후는 처음 시작할 때부터 광고 판매로 수익을 냈다. 더 많은 광고를 더 높은 가격에 판매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사용자를 확대해야 했다. 이처럼 사용자를 늘리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정보와 제품을 제공하고, 전체 인터넷 시장의 활성화를 일궈야 했다.
야후는 전성기에 엄청난 트래픽을 바탕으로 존슨앤존슨(J&J), Nestle, GM 같은 광고주를 유치하며 홈페이지에 브랜드 광고를 게재했다. 당시 인터넷 광고를 거의 지배하다시피 했으며, 고속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캐시카우가 되었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야후는 IT기업이 아니라 미디어 기업이었다. 정보의 포털을 만들고 웹 광고로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바로 야후의 정체성인 것이다. 트래픽을 늘리기 위해 야후는 트래픽이 많이 발생하는 기업을 인수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단편적인 트래픽 추구와 맹목적인 인수합병은 인터넷 버블 현상을 촉발했다. 2000년대 말, 인터넷 버블이 꺼지면서 야후의 주가는 90%나 증발해 업계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야후가 적자를 내던 때, 당시 최고재무책임자(CFO) Susan Lynne Decker는 손실이 나는 온라인 결제, 경매, 쇼핑 등의 서비스를 중단했다. 이를 통해 회사 예산을 빠르게 통제했고, 야후는 일시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와 동시에 미래 발전의 원동력도 상실했다. 인터넷 버블이 꺼지고 난 후, 신임 CEO인 Terry Semel은 전통적인 미디어 사업을 지속했지만, 당시 급부상하던 신기술에는 관심이 부족했다. 당시 야후는 가격 비교 검색이 막대한 부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서둘러 기술을 도입, 온라인 검색서비스에서 구글과 맹목적으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전략적 배치로 야후는 기존의 브랜드 우위를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기만 했다.
또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와의 계약에서 야후는 검색광고 매출의 수익 배분만 중요하게 생각하고, 더 중요한 검색 핵심기술, 인재, 시장 및 사용자 데이터는 순순히 넘겨주었다. 게다가 야후는 검색 서비스를 구글에 아웃소싱하면서, 매년 수백만 달러를 들여 구글을 지원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잘못을 깨달았을 때 이미 구글은 검색의 대명사가 되어있었다. 야후 창업자는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와 같은 강한 카리스마가 없었고, 브랜드 정체성의 버팀목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욱이 전략 아이디어를 기업 문화의 유전자로 발전시키지 못한 것이 야후가 몰락한 근본 원인이다.
다시 쓰여진 비즈니스 논리
지난 10년간 중국 사회는 빠르게 디지털화되며 글로벌 디지털 비즈니스에서 선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소비자가 디지털화를 주도하고, 시장은 똑똑한 소비자를 육성했다. 기업은 빅데이터를 통해 모호한 소비자 집단을 세분화, 그룹화하고 시각화해 수요와 성향을 잘 파악하게 되었다. 반면 개성을 중시하고 즉흥적인 소비자 수요 역시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어 파악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도 하다. 이에 따라 공급측도 두 가지 측면에서 적극 대응한다. 첫 번째는 수요에 따라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즉 소비자 수요를 정확하고 높은 효율로 만족시키려 노력한다. 두 번째는 자발적으로 변화를 추구하며 혁신과 예측을 통해 소비자 니즈에 앞서 수요를 선도하는 것이다.
기업이 미래의 복잡한 비즈니스 환경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싶다면, 새로운 비즈니스 논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계획하고 변화해야 한다. 지금의 시대는 자본을 응집시키는 기회를 제공하는 동시에 냉혹한 파괴도 서슴지 않는다. 분명한 기업 정체성과 성장 가능성이 없는 기업은 운 좋게 다시 일어서더라도 고꾸라지게 되어 있다. 도태와 퇴보의 유전자는 엄격한 체질 개선 없이는 바뀌지 않는다. Miraeasset Securities Magazine, INVESTMENT / The Sage Investor, 202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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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Regulation: 중국 기업은 공동부유를 어떻게 보는가?
79년 전 현대 경영의 아버지인 Peter Drucker와 미국 제너럴 모터스(GM) 회장 Alfred Sloan은 사회에서 기업이 가지는 가장 적합한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였다. 핵심은 기업이 사회적 가치와 상업적 가치 중 어떤 것을 더 중시해야 하는가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드러커가 옳았다는 것이 증명됐다. 기업은 사회 속 ‘기관’으로서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자신의 발전이 주류 가치관과 대중의 도덕성에 부합해야만, 비로소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번영할 수 있다.
대기업의 급성장과 폐단
2021년 7월 JD닷컴(京東)은 갑자기 전 직원의 급여를 인상하는 16급여제(16薪 制)를 전격 발표했다. 1년을 일하면 4개월치 월급을 더 받는 것이다. JD닷컴의 37만 명 직원 중 80%가 농촌 지역 출신으로 4개월 임금은 삶의 질을 크게 개선하는 데 충분한 돈이다. 거의 동시에 텐센트의 한 계열사는 6시 정시 퇴근을 강행했다. 이는 텐센트의 ‘996’(오전 9시부터 밤 9시까지, 매주 6일 근무)에 반하는 첫 번째 시도로 여겨졌다. 곧이어 틱톡, 콰이서우(快手) 등의 숏폼 플랫폼과 소셜 커머스 메이퇀(美團), 온라인여행사 씨트립 등도 토요일 격주 근무제를 폐지하고, 직원에게 완벽한 주말을 보장했다.
8월의 마지막 날, 메이퇀의 창립자 왕싱(王興)은 “메이(美)는 좋은 것을 의미하고, 퇀(團)은 공동을 의미한다. 메이퇀의 유전자는 바로 공동부유(共同富裕)”라고 말했다. 9월 2일 알리바바 그룹은 국가 공동부유 정책에 부응하기 위해 1천억 위안의 자금을 투입해 ‘공동부유 10대 행동’을 시작한다는 대규모 계획을 내놓았다. 9월 9일 텐센트는 전 직원에게 ‘공동부유특별계획’에 투입한 500억 위안 1차 자금을 시작으로 더 많은 민생 분야에 지원할 것을 발표했다.
대기업이 이렇게 보조를 맞춘 이면에는 중국 정부의 강력한 지침이 있었다. 사실 앤트 파이낸셜의 상장 중단부터 대대적인 인터넷 경제 정비, 교육업계 개혁, 연예계 팬덤 규제, 그리고 공동부유 논의를 위한 특별회의 개최, 제3차 분배 장려, 베이징증권거래소 개설에 이르기까지,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정부가 내놓은 일련의 조치에는 ‘중국은 이제 다음 단계의 발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개혁개방 40년 동안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부유층을 탄생시켰다. 그 속도와 수는 역사상 유례가 없었다. 그러나 급성장의 시대가 지나면서 최근 몇 년간 고속성장에 가려졌던 문제들이 점차 수면 위로 드러났다.
금세기 초, 중국 당국의 정책적 지원 하에 인터넷 기업들은 세계가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규모를 키우고 부를 축적했다. 이들은 중국 경제 전반에 거대한 추진력을 일으킨 한편, 동시에 시장 독과점 문제, 데이터 보안 이슈, 사회적 책임 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고속성장을 추구하는 단계에서 국제 경쟁력과 발언권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 당국은 한때 큰 규모의 기업이나 산업체를 구축하는 데 공을 들였다. 초기 단계의 지원을 거쳐 중국 인터넷 산업도 세계 강자와 경쟁할 수 있는 선두 기업을 배출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전자상거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함에 따라, 선두 기업이 업계를 독점하는 추세가 강하게 나타났다. 일단 독과점이 형성되면 국가 차원에서 더 큰 피해를 볼 수 있다. 인터넷 경제의 독점은 공정한 경쟁을 방해할 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의 성장 통로를 차단하는데 그치지 않고 대마불사라는 부실을 낳아 전체 경제를 위협할 수도 있다. 만약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갑자기 오프라인 상태가 된다면, 금융시장 및 소매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까? 결과는 아마 누구도 가늠하기 어려울 것이다. 국가 경제 안정과 금융 질서가 일부 기업의 상황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건전하지 않은 상태이다.
현재 인터넷 경제는 독점 외에도 버블 성장이 나타나면서 실물경제의 일부를 차지하는 모양새다. 최근 몇 년간 미국 경제에 영향을 미친 많은 문제는 모두 산업 공동화와 이에 파생된 중산층의 위축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은 미국의 길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 아직 대마불사 기업이 생기지 않았을 때, 이를 규범화해서 질서있는 성장궤도에 진입시킴으로써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선택이다.
시대적 과제, 속도가 아닌 질적 성장
중국 정부의 또 다른 타격 대상은 금융 시장, 부동산 시장, 교육 시장이었다. 과거 통화정책과 금융감독이 상대적으로 느슨했을 때 P2P금융(개인 간 금융), 상환조건채무 등의 부실사업이 증가하면서 사회 전반에 자산 거품과 채무 리스크가 누적되었다. 이런 상황이 개선되지 않고 오히려 가속화되자 중국 정부는 정책 중심을 자산 거품 억제와 감독 규제로 옮겨 금융 안정을 위협하는 리스크를 손보기 시작했다. P2P금융 규제가 없던 3년간 P2P금융업체가 수천 곳까지 늘었다가 현재 전부 사라진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부동산 경제의 기형적 성장은 사회 공정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중국 당국은 유동성이 부동산 산업으로 과하게 집중되어 발생할 수 있는 복합적 병폐를 피하기 위해 제재를 시작했다.
교육 기관의 정비는 사회 공정성을 고려해, 다음 세대를 위한 상승 통로를 열어주자는 취지에서 비롯되었다. 교육을 중시하고 아이의 교육을 위해 막대한 투자를 하는 것이 중국 부모의 특징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질적 성장은 없고 소모적이기만 한 경쟁을 초래하고, 나아가 다음 세대를 무너뜨릴 수 있다. 다음 세대가 동등한 출발선을 갖도록 보장하는 것은 사회 정의의 첫걸음이다. 동등한 출발선이 영재 육성을 억제하자는 것이 아니다. 각 가정의 부와 출신배경 등 외적 요소가 다음 세대의 발전에 미칠 영향을 약화시키자는 것이다. 또한 교육 자원의 공평한 분배와 기회의 균등을 촉진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이는 더 나아가 사회적 상승 경로를 규범화하고 공정하게 이끄는 데 도움이 된다.
이 모든 거시정책의 핵심은 중국 경제 발전의 초점이 ‘속도’의 문제에서 ‘질’의 문제로 전환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과거 중국 경제는 다른 나라에 비해 산업화 시작이 늦고 기반이 취약해 고속 성장을 우선적으로 추구했다. 그러나 지금 중국 사회는 탄탄하고 안전한 지속가능한 발전을 필요로 한다. 질적 발전은 필연적으로 향후 경제사회의 주요 기조가 될 것이다. 질적 발전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신규 참여자가 두각을 나타낼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한다. 새로 개설된 베이징증권거래소는 바로 이런 논리에서 출발했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에서는 경제 집중의 정도가 중국만큼 심하지 않다. 선두 기업이 전반적인 차원의 핵심 기술을 더 많이 보유하고 있는 게 사실이나 많은 강소기업 역시 핵심 부품 기술과 기술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세부적 차원에서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 강소기업은 대기업에게 함락당하지 않을 수 있다. 현재 중국은 이런 강소기업이 많이 필요하다. 실제로 전도 유망하지만 자금 지원이 부족한 많은 강소기업의 과학기술 성과가 여전히 제품화 구상단계에 머물러 있다. 베이징증권거래소는 중국 최대의 강소기업 인큐베이터, 즉 공동부유의 촉진제가 되기 위해 설립되었다.
공동부유 모델이 가져올 잠재적 효과
중국 인터넷업계는 20여 년간 급성장을 겪었다. 세계가 주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새로운 시대로 이끌었다. 이런 번영의 배후에는 잘 보이지 않는 음지가 있다. 자본시장의 혼란, 독점 위기, 비즈니스 모델의 고갈은 이미 현재 인터넷업계의 새로운 문제가 되었다. 중국 정부의 공동부유 제안은 인터넷 대기업들로 하여금 인터넷 발전 방향을 수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선두 기업들의 공동부유 포석은 거시적 계획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가까운 장래에 더 많은 대기업이 공동부유 대열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된다.
대기업의 공동부유 추진 전략을 분석해 보면 공생, 공동창조, 공동부유, 산업 회복, 실업 회복, 사회 회복에 힘을 보태는 공통의 논리를 볼 수 있다. 이런 발전 논리는 중국 산업의 향후 발전 맥락과 함께한다. 자본의 본질은 언제나 이익을 추구하기 마련이다. 대기업이 공동부유 개념을 이처럼 추종하는 것은 ‘정부의 보이지 않는 손’ 외에도 그들이 공동부유 뒤에 잠재된 거대한 시장을 보았기 때문이다.
공동부유 모델이 가져올 잠재적 효과과거 중앙정부는 ‘솽창’(雙創, 대중창업과 만인혁신) 개념을 제시하면서 일련의 관련 정책을 내놓았다. 공동부유라는 개념이 제시되면 관련 정책이 차례로 도입될 것으로 보여지고, 먼저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자가 센터를 차지하여 정책 추진 속에서 큰 성과를 낼 수 있다. 이것이 대기업의 계산법이기도 하다. 현재 진행되는 ‘농촌진흥’(農村振興: 농업과 농촌의 현대화, 산업과 농업 발전의 상호 촉진, 도시와 농촌의 상호 보완)과 비교하면, 공동부유는 훨씬 더 넓은 개념이다. 공동부유 개념은 도시나 농촌과 같은 2차원적 경제 구조를 돌파해서 더 크고 넓은 시장을 열게 될 것이며, 이 시장은 몇 년 동안 인터넷 수익 감소로 인한 공백을 상쇄할 가능성이 크다.
중국의 2018년 1인당 GDP는 9,770달러에 달했다. 세계은행의 데이터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중위소득 경제권의 1인당 GDP는 3,956달러에서 1만 2,235달러로 증가했다. 돌이켜보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중위소득에서 고소득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경제권은 드물었고, 다수가 장기간 중위소득에서 맴돌았으며, 심지어는 성장 후퇴와 사회 불안까지 나타났다. 국가 차원에서 공동부유로 새로운 발전단계를 시작하고, 고소득 경제라는 목표를 향해 또 다른 진격을 예고하는 것과는 별개로, 공동부유 논리는 앞으로 오랜 기간 정책 수행의 관건이 될 것 이다. Miraeasset Securities Magazine, INVESTMENT / The Sage Investor, 2022. 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