淵兮似萬物之宗(연혜사만물지종) : 한없이 심오하여 만물의 근원(宗)인 듯 싶으니,
挫其銳(좌기예) : 날카로운 것(銳)을 무디게 하고,
解其紛(해기분) : 얽힌 것(分)을 풀어주고,
和其光(화기광) : 빛(光)을 부드럽게 하고,
同其塵(동기진) : 티끌(塵)과 하나(同가 되리라.
湛兮似或存(담혜사혹존) : 한없이 맑아서 어쩌면 존재하는 듯 싶으니,
吾不知誰之子(오불지수지자) : 누구 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象帝之先(상제지선) : 상제에 앞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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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텅 비어 있으니,
그 쓰임(用)에 있어 행여라도 넘치게 하는 법이 없다.
한없이 심오하여 만물의 근원(宗)인 듯싶으니,
날카로운 것(銳)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分)을 풀어주고,
빛(光)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塵)과 하나(同가 되리라).
한없이 맑아서 어쩌면 존재하는 듯싶으니,
누구 아들인지는 모르겠으나
상제에 앞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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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도는 그릇처럼 비어,
그 쓰임에 차고 넘치는 일이 없습니다.*
심연처럼 깊어
온갖 것의 근원입니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됩니다.
깊고 고요하여,
뭔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누구의 아들인지 난 알 수 없지만,
하늘님帝보다 먼저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도바당 역>
도는 그릇처럼 텅 비어 있지만 그 쓰임에
혹여 넘치는 일이 없다
심연처럼 깊어 온갖 것의 근원이다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 주고
빛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
깊고 고요하여 뭔가 존재하는 것 같다
누구의 아들인지 난 알 수 없지만
하느님보다 먼저 있었던 거 같다
<임채우 역>
4 도는 비어 있어 아무리 써도 막히지 않고
도는 비어 있어서
아무리 써도 막히지 않고,
깊숙해서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날카로움을 꺾고 엉킴을 풀며,
번쩍거림을 부드럽게 하고 더러움과 같이하니,
맑고 그윽한 속에 뭔가 있는 듯하구나.
나는 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니
상제의 조상이 되는 것 같다.
<James Legge 역>
1. The Tao is (like) the emptiness of a vessel; and in our employment of it we must be on our guard against all fulness. How deep and unfathomable it is, as if it were the Honoured Ancestor of all things!
2. We should blunt our sharp points, and unravel the complications of things; we should attemper our brightness, and bring ourselves into agreement with the obscurity of others. How pure and still the Tao is, as if it would ever so continue!
3. I do not know whose son it is. It might appear to have been before God.
<Lin Derek 역>
The Tao is empty
When utilized, it is not filled up
So deep! It seems to be the source of all things
It blunts the sharpness
Unravels the knots
Dims the glare
Mixes the dusts
So indistinct! It seems to exist
I do not know whose offspring it is
Its image is the predecessor of the Emperor
<장 도연 역>
제4장 道는 비어 있는 환상 같은 것이어서 그 작용이 무궁무진하다
道는 비어 있는 환상 같은 것이어서
그것의 작용은 무궁무진하다.
그 깊이는 바다와 같고
한없이 심오하여 만물의 원천과 같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힘을 풀어주고
빛을 머금어주고
티끌을 고르게 한다.
깊고 깊어서 잘 보이지 않지만
무언가가 현존하고 있는 것 같다.
나는 그가 누구의 아들인지 모르겠으나
아마도 상제보다 앞선 듯싶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도는 비어서 쓰니 혹 차지 않은(혹은 채워지지 않는) 듯하고, 깊숙해서 만물의 근원인 것 같다. 날카로움을 꺾고, 엉킴을 풀고, 번쩍거림을 부드럽게 하고, 더러움과 같이하니, 맑고 그윽해서 뭔가 있는 듯하다. 나는 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지 못하니 상제보다 앞서 있는 것(혹은 상제의 조상이 되는 것) 같다.
<주석>
고형(高亨)은 선(先)을 조선(祖先)으로 보았다.
道沖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저 한 집안을 다스릴 만한 역량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집안을 온전하게 할 수 없고, 한 나라를 다스릴 만한 도량만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라를 편안히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온 힘을 다해서 무거운 것을 들고 있으면 (더 이상 다른 곳에 힘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비록 만물을 다스릴 줄 알더라도, 음양 이의(二儀)의 도로써 다스리지 않으면 넉넉할 수가 없다. 땅은 형체가 정해져 있지만 하늘을 본받지 않으면 그 편안함을 온전히 할 수 없고, 하늘의 상(象)이 정미하지만 도를 본받지 않으면 그 정미함을 보존할 수 없다. 빈 채로 쓰면 다 쓸 수가 없으나, 가득 채워진 채로 또 담으려 하면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비워서 쓰이지만, 다시 채워지지 않으니 그 무궁함이 이미 지극하다. 아무리 큰 물체라 하더라도 그 몸(體)을 얽을 수 없고, 아무리 많은 일(事)이 있더라도 그 양을 채울 수 없으니, 만물이 이것을 버리고 주(主)를 구한다면 다시 어디에 주가 있겠는가? 또 연못처럼 깊숙한 것이 만물의 근본인 듯하지 않은가? 날카로움을 꺾어도 손상됨이 없고, 엉킴을 풀어도 수고롭지 않으며, 번쩍거림을 누그려뜨려도 그 몸을 더럽히지 않고, 더러운 곳에 같이 있어도 그 참모습이 변치 않으니 또한 맑고 그윽해서 있는 듯하지 아니한가? 땅은 자기의 형체를 지키고 있지만(즉 일정한 형체를 유지하고 있지만) (만물을) 실어주는 덕에 그치고, 하늘은 자신의 상(象)에 잘 맞아도 (만물을) 덮어주는 덕을 지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늘이나 땅조차도 (道에는) 미칠 수 없으니 천제(天帝)보다 앞선 듯하지 아니한가? 제(帝)는 천제다.
夫執一家之量者, 不能全家; 執一國之量者, 不能成國; 窮力擧重, 不能爲用. 故人雖知萬物治也, 治而不以二儀之道, 則不能贍也. 地雖形魄, 不法於天則不能全其寧; 天雖精象, 不法於道則不能保其精. 沖而用之, 用乃不能窮. 滿以造實, 實來則溢. 故沖而用之又復不盈, 其爲無窮亦已極矣. 形雖大, 不能累其體; 事雖殷, 不能充其量. 萬物舍此而求主, 主其安在乎? 不亦淵兮似萬物之宗乎? 銳挫而無損, 紛解而不勞, 和光而不汙于其體, 同塵而不渝其眞, 不亦湛兮似或存乎? 地守其形, 德不能過其載; 天慊其象, 德不能過其覆. 天地莫能及之, 不亦似帝之先乎? 帝, 天帝也.
<주석>
『예기』 「교특생」(郊特牲)에 “혼기는 하늘에 돌아가고 형백은 땅으로 돌아간다(魂氣歸于天, 形魄歸于地)”라고 했다.
<주석>
루우열은 ‘이의’(二儀)를 『노자』 25장의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을 근거로 ‘천지지도’(天地之道)라고 했는데 (루우열, 『왕필집교석』, 11쪽), 이는 노자 사상에 근거해서 왕필의 주석을 이해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이의지도’(二儀之道)란 노자 사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역의 음양 사상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야 왕필의 의도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노자』에서는 천지(天地)를 ‘이의’(二儀)라고 한 적도 없거니와, 『주역』 「계사상」의 ‘태극생양의’(太極生兩儀)라는 구절이 있고 『진서』(晉書) 「범녕전」(范寗傳)에도 “저 성인은 덕은 음양을 닮고 도는 삼재에 으뜸이다(夫聖人者, 德侔二儀, 道冠三才)”라는 용례가 나온다. 따라서 『왕필 주역주』(王弼 周易注)의 내용을 참조할 때 음ㆍ양(陰ㆍ陽)의 관계와 그 시의(時義)에 따라 행위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이해하거나(졸고, 「왕필 역 철학 연구」 240쪽 참조), 혹은 유ㆍ무(有ㆍ無)의 두가지 도리를 동시에 사용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합당하다
<Stefan Stenudd 역>
The Way is empty, yet inexhaustible,
Like an abyss!
It seems to be the origin of all things.
It dulls the sharpness,
Unties the knots,
Dims the light,
Becomes one with the dust.
Deeply hidden, as if it only might exist.
I do not know whose child it is.
It seems to precede the ancestor of all.
The Hidden Cause
Lao Tzu returns here to the mysterious nature of Tao, the Way. It’s so vague and distant that we can only guess its existence by the deductions we make from observing the world around us. It’s the inner working of the universe, and probably therefore also the originator of it.
Tao is the natural law by which the universe operates.
A natural law has no form of its own, but governs all there is, and never gets fatigued or diminished. Although it causes all the magnificence of the world we live in, it’s infinitesimal, like the dust of the dust.
This law that governs all can have no preferences. It treats the biggest things the same as the smallest, none with less care. To Tao, they are essentially the same.
Mountains, planets, galaxies, they all consist of atoms, which do in turn consist of particles so minute that their existence may never be confirmed. Since everything in the world consists of things small, the minute is closer to the nature of Tao. And since most things in the world go by unnoticed, the hidden is also closer to the nature of Tao.
Because Lao Tzu sees the Way as the reason behind all, he concludes that it must have the most to do with the things that we regard as lesser. The big events are rare, while everyday proceedings take place constantly. The bigger the size of things, the fewer they are. So, the Way deals mainly with the small.
We should ponder this, so that we remember to pay the most attention to the things that seem to be the least significant.
The most enduring powers in the world are those that stand out the least. Sharpness does not last, nor does the tightness of a knot, or the brightest light. There is nothing that remains longer than its own dust.
So, if we become like dust, we will prevail – and we will be in unison with Tao.
That has not been the typical trait of mankind so far. Instead, we ravel at burning down forests to build temples and palaces, drilling tunnels through mountains, and changing the courses of rivers. Ours is noisy species.
A Vague Deity
The last line of this chapter is the only clear occurrence of a divine entity in the Tao Te Ching . What I have translated as the ancestor of all is Ti , who was the first and supreme god in ancient Chinese mythology.
Although Ti was indeed regarded as a creator god, Lao Tzu doubts that he predates Tao. Even a creator god must obey the natural laws that rule the universe, or it would not have come into existence. If it did, it would not have remained.
A natural law does not exist by itself, but through nature, where it manifests itself. Therefore, it has no birth date. There may be a starting point for its manifestation, but the law itself is timeless. When a world of whatever kind appears, it has to follow the law for such a world. But the law does not change if the world appears or disappears. It remains the same forever and anywhere. So, it’s eternal and ever-present. It was before the gods, and it’s present where they are not.
There can be a universe without any gods to rule it, but not one without laws for it.
<사봉 역>
道沖(도충)
도는 워낙 커서 텅 빈 것 같이 보인다.
而用之或不盈(도충이용지혹불역영)
아무리 채워도 다 채울 수 없을 만큼 크다.
淵兮(연혜)
도는 깊이도 깊고 깊어
似萬物之宗( 사만물지종)
마치 만물의 근원과 같다.
挫其銳(좌기예)
(道란) 날카로운 것을 꺾고
解其紛(해기분)
얽힌 것을 풀며
和其光(해기분)
강한 빛을 부드럽게 만들고
同其塵(동기진)
티끌처럼 하찮게 되기도 하니
湛兮 似或存(심혜 사혹존)
깊고도 깊어 영원한 존재와 같다.
吾不知誰之子(오부지수지자)
누가 도를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으니
象帝之先(상제지선)
하나님보다 도가 먼저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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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조화롭게 사용하니
넘치지 않음이 있다
깊도다 만물의 근본인 것 같구나.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남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하나니
고요하도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구나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 줄 알지 못하나
마치 상제보다도 앞서 있는 것 같다.
道沖而用之, 有不盈也. 淵呵似萬物之宗. 銼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呵似或存. 吾不知誰之子也, 象帝之先.1)
[道沖而用之, 有不盈也]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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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의 기능에 있어 무궁무진 내지는 아련한 면모를 언급하는 장
예외 없이 해석의 논란이 이어지는데,
일각에서는 도의 기능(用)이 무궁무진하다는 해석을 하고
다른 일각에서는 도의 기능이 이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다는 해석을 하는 듯
해석이 이렇게 난무함에도,
1. 道는 텅 비어 있다는 점
2. 노자도 가물가물해서 道의 출생에 대해 잘 모른다는 점
3. 우리와는 달리, 논자는 최소한 道가 제(帝)에 앞선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
에 있어서는 일치를 보고 있다.
그런데, 노자는 도입부에 해당하는 이 소중한 자리에서 이런 얘기를 왜 꺼내고 있을까?
道의 기능이 무궁무진하다 혹은 아련하다고 얘기하는데 과연 그 취지는 무엇일까?
이도 저도 아니고 좀 쉬고 싶은 마음에 잠시 道의 씀새에 대해 찬양하는 자리를 만든 것일까?
어쩌면,
도의 씀새가 이렇게 저렇다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고,
텅 비어 있음으로써 그 많은 것들이 이렇게 저렇게 가능해진다는 점을 얘기한 것은 아닐까?
기능이 다 채워질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고 치고
내 무지한 소견을 얘기한다면,
어느 정도 공간이 확보되어야지 강렬한 빛도 분산이 되어 부드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텅 비어 있는 고로 노자도 가물가물 잘 볼 수 없다고 얘기한 것은 아닐까?
오리무중
沖(虛) 도덕경 비교
(3장) 虛其心, 實其腹, 弱其志, 强其骨
(4장) 道, 沖而用之, 或不盈
(5장) 天地之間, 其猶橐龠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11장) 三十輻共一轂, 當其無, 有車之用(유차지용)
(16장) 致虛極, 守靜篤
(22장) 豈虛言哉, 誠全而歸之
(42장)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45장) 大盈若沖, 其用不窮
(53장) 朝甚除, 田甚蕪, 倉甚虛,
用 도덕경 비교
(4장) 道沖而用之 或不盈
(6장) 用之不勤
(11장) 故有之以爲利 無之以爲用
(28장)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35장) 視之不足見, 聽之不足聞, 用之不足旣
(40장) 反者道之動 弱者道之用
(45장) 大成若缺 其用不弊 大盈若沖 其用不窮
(68장) 善用人者爲之下 是謂用人之力
盈 도덕경 비교
(4장) 道沖而用之, 或不盈
(9장) 持而盈之, 不如其已
(15장) 保此道者, 不欲盈, 夫唯不盈, 故能蔽不新成
(22장) 曲則全, 枉則直, 窪則盈, 幣則新, 少則得, 多則惑
(39장)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 谷無以盈, 將恐竭
(45장) 大盈若沖, 其用不窮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도덕경 비교
(4장) 道沖而用之, 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9장) 猯而銳之, 不可長保
(56장) 知者不言, 言者不知, 塞其兌, 閉其門, 挫其銳, 解其分, 和其光, 同其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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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4
4장 화광동진(和光同塵)과 성육신(成肉身)
- 도(道), 비워서 쓰이는 그릇 -
<도(道)는 비워서 쓰이니 혹 차지 않은 듯 하고, 심연(深淵)처럼 깊음이 만물의 으뜸 같다.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얽힌 것을 풀어주며, 번쩍거리는 것을 부드럽게 하고, 티끌과 하나가 된다. 맑고 그윽하여 혹 있는 듯 하다. 나는 도가 누구의 아들인지 알 수 없으나 상제(上帝)보다 앞서는 것 같다.>
道沖而用之或不盈, 淵兮似萬物之宗. 挫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湛兮似或存, 吾不知誰之子, 象帝之先.
도의 길은 비움에 있다. 도가 비움으로써 쓰임이 있으니, 쓰고 또 써도 비움이 있다. 그러기에 가득 차지 않는 것과 같다. 가득 차게 되면 넘치는 법이지만 도의 존재 방식은 비움에 있기에, 넘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도의 소용(所用)이 부족한 법이 없다. 비움으로써 그 쓰임이 있기 때문이다. 도가 도일 수 있는 까닭, 그것은 비움을 용도(用途)로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는 비움의 용도(用道)가 되기도 한다.
사람을 흔히 그릇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성서도 인간을 흙으로 빚은 도자기나 그릇에 종종 비유하고 있다. 시편 22편 15절에는 다윗이 “내 힘이 말라 질그릇 조각 같다”고 했고, 이사야 45장 9절에서는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로 인간을 비유하고 있다. 이는 모두 인간을 창조주에 비하면 질그릇 같은 연약한 존재임을 비유하고 있는데, 신약성서에서는 상대적으로 인간이 질그릇처럼 연약한 존재이지만 ‘보배(寶貝)’를 담고 있는 존재로 바울은 묘사하고 있다(고후4:7). 질그릇 속에 있는 보배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다. 무엇이 하나님의 영광인가? 바울의 해석에 따르면 그 영광은 이미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나 있다. 그리스도는 고난과 영광이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십자가의 고뇌와 부활의 영광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고난의 질그릇에 부활의 영광이 담겨있는 셈이다.
도의 모습이 쓰임새(用)에 있어서는 빈 그릇과 같으나, 그 본체(體)는 심연처럼 깊고 고요하여 파악하기 어려우면서도 만물의 근원이 되고 있는 듯 하다. 빈 그릇에 담긴 영광을 생각하자. 비어서 깊고 비어서 차지 않는다. 비우고 또 비우니 자연히 깊어지고 깊어지니 만물의 으뜸이 된다. 그리스도가 만물의 으뜸이 된 이유도 거기에 있다(골로새서 1장 15-18).
- 마음을 다스려 화목을 이루는 길 (挫銳解紛)-
도의 길은 끝이 없다. 예리한 것을 둔하게 만들고(挫其銳), 얽힌 것을 풀어준다(解其紛). 예리하다 함은 상처를 내기 쉬운 무기와 같은 것이다. 좌충우돌하는 예리한 성격의 사람은 왕왕 싸움을 일으키기 쉽다. 이런 사람일수록 성격을 좀더 무디게 할 필요가 있다. <도덕경>에서는 예리함 보다는 차라리 둔한 편을 높이 산다. 예리하여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보다는 둔한 것이 낫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는 예리한 것을 둔하게 만들어 모든 관계가 원활해지게 한다.
얽힌 관계를 풀어주는 것도 도의 일이다. 인관관계에서 얽힌다함은 정신적, 물질적 관계를 포함한 일체의 이해관계를 내포한다. 서로가 상처를 받지 않고 모두가 만족 할 수 있는 원활한 관계의 회복, 그 일을 도가 해 낸다.
성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에베소서 4장 26절)고 말하고 있다. 분을 내어 죄를 짓는 일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일이다(4장27절).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듯이, 도(道)의 길 이면에는 마(魔)의 길이 병존한다. 얽힌 일을 푸는 길, 그것은 마의 일을 넘어서는 길이다. 마의 일을 넘어서는 방법은 스스로 이해관계의 분을 삭이고, 마귀에게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사는 정신이 필요하다. 평화가 먼 곳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의 날카롭고 예리한 마음을 다스려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이웃과 더불어 화목하게 살 일이다.
- 티끌과 하나 되는 영성(和光同塵) -
‘번쩍거리는 빛을 누그러뜨린다(和光)’는 것은 잘난 체 하는 이를 겸손하게 한다는 뜻과도 같다. 그렇게 될 때 도는 ‘티끌과 하나(同塵)’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교적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면, 본래는 빛이었으나 그 빛을 감추고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의 성육신 사건에 비유 될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립보서 2장 6-8절).” 이를 사도 요한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한복음 1장 14절).”
마구간에서 먼지나 티끌과 같이 하나가 된 예수, 그를 일러 우리는 하나님의 성육신(成肉身)이라고 일컫는다. 그리스도교에서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겸손의 모델, 곧 케노시스(비움)의 사건이다. 인간이 어디까지 겸손 할 수 있을까? 과연 티끌과 하나 되도록 겸손 할 수 있을까? 빛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하나 되는 길, 그 속에는 과연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 그리고 진리도 충만한 길이었다.
도의 길은 겸손에 있다. 이를 우리는 티끌과 하나 되는 영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대체 이러한 도의 정신, 혹은 도 그 자체는 어디서 왔으며 누구의 아들인가? 그 사실을 알 수는 없으나, 중국에서 말하는 하늘님으로서의 상제(上帝)보다 앞선 존재인 것 같다고 노자는 말한다. 그 어떤 인격적 신명(神名)보다 도가 앞선 듯 하다고 말하는 발상은 과연 노자답다. 그가 이미 1장에서 밝히듯이 도는 일체의 개념에 앞선 존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는 모든 존재의 기반이며, 일체의 인격성을 앞선 궁극적 실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궁극적 실재인 도가 가는 길은 잘난 체 하지 않고 티끌과 하나 되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길이다. 이것이 성육신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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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조화롭게 사용하니 넘치지 않음이 있다
道沖而用之, 有不盈也
'유(有)'는 '우(又)'를 쓰는 경우도 있고 '혹(或)'을 쓰는 경우도 있는데, 역순정이 이미 이야기했고 또 곽점 초간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모두 통한다. 백서도 '우(又)'와 '유(有)'를 호용한다. 통행본에는 '유'를 쓴 경우가 없지만 『태평어람』 권322에서 『묵자』가 『노자』의 이 문장을 인용한 것을 보면 '유'로 되어 있다(역순정).
일부에서는 이 자료에서 『묵자』가 『노자』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노자는 묵자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현행본 『묵자』에는 그런 인용이 없기 때문에 우선 『태평어람』의 정보가 정확한지가 의문이고, 설령 『태평어람』이 맞다고 하더라도 노자가 묵자보다 앞서는 것이 아니라 『노자』가 『묵자』보다 앞서는 것이다. 『묵자』에는 후기 묵가학파의 저작이라고 알려진 묵변(墨辯) 이외에도 「비유」 같은 후대의 문건이 많다. 『묵자』와 묵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문장에는 두 가지 독법이 있다. 하나는 본문과 같은 독법이고, 다른 하나는 '충(沖)'을 '충(盅: 비다)'과 같은 말로 보고 그 뒤에서 단구하여 "도는 텅 비어 있지만 사용하여도 넘치지 않음이 있다(넘치지 않는다)"고 옮기는 독법이다. 후자가 더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후자의 독법은 왕필·하상공·성현영 등 이른 주해에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우선 하상공에 따르면 여기에서 '충'은 '중(中)'의 뜻이다. "도는 이름을 숨기고 명예를 감추므로 그 쓰임은 '중'에 있다." 성현영은 이를 좀더 부연하여 "성인이 베풀고 교화할 때는 쓰임이 되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절실한 말은 중도(中道)에 앞서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도는 조화롭게 사용하니 넘치지 않음이 있다고 하였다. '중'을 쓰임으로 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들이 설명한 것처럼 '충'에는 원래 '화(和)'의 뜻이 있기 때문에 '중(中)'과 통한다. 통행본 42장의 '충기(沖氣)'를 백서에서는 '중기(中氣)'로 쓰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은 상황에 알맞게 처신하는 것, 곧 조화로운 행동을 의미한다.
하상공·성현영은 확실히 본문처럼 단구하고 있다. 왕필도 마찬가지다. 그는 "조화롭게 사용해야만 쓰임에 궁함이 없다. 가득 채움으로써 실질〔實〕이 이루어지지만 실질이 생기면 곧 넘치게 된다. 그러므로 조화롭게 사용해야만 넘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 설명에 앞서 왕필은 "힘을 다하여 무거운 것을 드는 것은 좋은 쓰임이 될 수 없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만물을 다스릴 수 있더라도 반드시 천지로부터 배워야 하고, 천지도 위대하기는 하지만 도에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사람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자기의 입장만 내세우고 자기 힘만으로 세상을 떠받들려고 하면 안 되고, 언제나 주변 환경(자연)과 조화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상공·성현영처럼 분명하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왕필도 같은 입장임을 알 수 있다.
「도응훈」의 해석도 참고해보자. 「도응훈」은 이 문장을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도 기뻐하지 않았던 조 양자(襄子)의 고사에 연결한다. 조 양자는 적(翟)이라는 곳을 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지만 "강하의 넘치는 물도 불과 사흘이고 사나운 바람과 폭우도 한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조씨가 덕행을 쌓은 것도 없는데 하루 아침에 두 성을 함락시켰으니 망하는 것이 나에게 미치겠구나"라며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말을 들은 공자는 조 양자를 크게 칭찬했다. "조씨는 번창하겠구나." 근심은 번창할 수 있는 기반이고, 기쁨은 망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었다. 이 고사에 대한 「도응훈」의 해설은 이렇다.
공자의 힘은 성문의 빗장을 들 수 있었지만 힘으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묵자는 공격을 방어하여 공수반(公輸般)을 굴복시켰지만 군사의 일로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승리를 잘 지키는 자는 강함을 약함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기를 도는 조화롭게 사용하니 넘치지 않음이 있다고 한 것이다.2)
「도응훈」의 이 고사는 『여씨춘추』에서 온 것이다. 『여씨춘추』 「신대람·신대」에 이 고사가 그대로 나온다.
'신대(愼大)'란 큰 것을 조심한다는 말이다. 이 편의 첫머리에는 "현명한 임금은 나라가 클수록 더욱 조심하고, 나라가 강할수록 더욱 두려워한다"는 말이 나온다. 「도응훈」은 크고 강할수록 더 조심하라는 교훈을 지금 『노자』의 문장에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도는 언제나 조화롭게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는 크고 강할수록 조심해야 한다. 이렇게 해석해야 이 문장이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남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한다"는 뒤의 문장과 무리없이 연결된다. 과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문장을 도의 형이상학으로 파악했기 때문에 뒤의 문장이 잘못 들어간 것이라는 등의 논의를 했다. 하지만 잘못 들어간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의 '충(沖)'을 조화롭다는 뜻으로 옮겼다. 그런데 앞에 나온 "크게 채워진 것은 마치 빈 듯하다〔盅〕. 하지만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45)"는 말에서 '충'은 을본에서 '충(沖)'이다. 지금 '조화롭다'고 번역한 글자와 같다. 결론적으로 을본에서 '충(沖)'은 '비다', '조화롭다'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반면 갑본은 조화롭다는 뜻으로는 '중(中: 42)'을, 비었다는 뜻으로는 '충(盅: 45)'을 쓴다. 을본과 가까운 통행본에서는 언제나 '충(沖)'이다. 갑본에서 구분되었던 글자가 후대에는 모두 '충(沖)'으로 통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충(沖)'이라도 경우에 따라서 해석해야 한다. 여기에서는 조화롭다는 뜻이다.
사실 비었다는 말과 조화롭다는 말은 서로 통한다. "크게 채워진 것은 마치 빈 듯하다. 하지만 그 쓰임은 다함이 없다"는 말을 보자. 이것은 「신대」의 정신과 다를 것이 없다. 크게 채워져 있을수록 빈 듯한 태도를 견지해야만 위험을 멀리하고 그 채워짐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을본에서 중(中)·충(盅)을 모두 '충(沖)'으로 통일한 것도 일리가 있다.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것, 비어 있는 것이야말로 조화를 가능하게 한다.
이 문장을 놓고 도체(道體)와 도용(道用) 운운하는 것은 원래의 독법이 아니며, 대체로 통행본 1장을 유·무론으로 독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송대의 형이상학에 영향받은 것이다. 이런 독법을 채택하는 사람의 해설은 대개 이렇다. "도는 진정(眞精)을 체로 삼고, 충허(沖虛)를 용으로 삼는다(육희성)." "도체(道體)는 충허하니 막연하여 조짐이 없지만 그 쓰임은 갖추어지지 않음이 없다(동사정)." "도체는 허하다. 사람들이 이 도를 사용할 때도 마땅히 비워두고 가득 채우지 말아야 한다(오징)." 도를 형이상학으로 해석하고 싶은 사람은 이런 독법을 택해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도는 형이상학 이전에 삶의 길이다.
깊도다 만물의 근본인 것 같구나
淵呵似萬物之宗
'연(淵)'은 깊다는 뜻이다. 갑본에는 '소(潚)'이지만 갑본은 다른 글(8)에서도 '연(淵)' 대신 이 글자를 썼기 때문에 옛날에는 서로 통한 것 같다.
백서는 현행본의 '혜(兮)'가 들어갈 자리에 모두 '가(呵)'를 썼다. '혜'는 『초사』와 같은 초나라 문장에 많이 등장하는 어조사로서 『노자』가 초나라 문건임을 입증하는 작은 증거였다. 하지만 백서에서는 '가'를 썼고, 초간문에서는 '호(
: 乎)'를 썼다. 그러므로 정말로 '혜'가 초나라의 어조사라면 백서와 초간문을 볼 때 『노자』는 초나라 문건이 아니다. 엄영봉(1976)은 '혜'가 옛날에는 '아(阿)'와 '해(奚)' 두 가지 소리로 읽혔다고 하면서 후자는 지금 소리고 전자는 백서의 '가'와 통하는 글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증거가 부족하다. 그라면 초간문의 '호'는 또 어떻게 설명할지 모르겠다.
조화를 견지하는 도는 만물의 근본이다. 만물은 조화롭기 때문이다. 비가 너무 온다 싶으면 해가 나고 너무 가물다 싶으면 비가 오는 것이 자연이다.
날카로움을 꺾고 어지러움을 풀며, 빛남을 누그러뜨리고 먼지와 함께하나니
銼其銳, 解其紛, 和其光, 同其塵
'좌(銼)'는 '좌(挫)'와 같다. 종래에는 이 네 구절이 잘못 들어간 것이므로 삭제해야 한다는 견해가 많았다(유사배·마서륜·고형·왕회·진고응 등). 가령 왕회는 "이 장에서는 모두 도체를 논하고 도의 본체가 어떤 특성을 가지는가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론의 층차(層次)에 속한다. 그리고 이 네 구절은 ……인생론의 층차에 속한다. 이 구절의 앞에 '이 때문에 성인은'이라는 말이 없으니 아래 위 문장의 뜻이 서로 이어지지 않는다. 마땅히 빠져야 할 문장이다"라고 주장했다. 잘못된 견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견해는 이 문장이 통행본 56장에도 나오기 때문에 쉽게 확산되었다. 초간문에는 이 네 구절이 통행본 56장에 해당하는 곳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지금 이 글(4)은 초간문에 없기 때문에 원래 있었는지 없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백서에서는 두 곳에 모두 들어 있기 때문에 빠질 글이 아니다.
보통 이렇게 잘못 들어간 문장이라고 주장할 때 착간(錯簡)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착간이란 죽간의 순서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죽간은 그것을 묶은 끈이 삭아서 없어지면 곧잘 순서를 잃고 뒤섞이기 때문에 착간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곽점 초간에서도 그렇듯이 하나의 죽간은 적어도 스무 자 이상의 글자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착간이 되었다면 20자 이상의 글자가 한꺼번에 착간이 되어야 한다. 지금 문제가 되는 구절은 열두 자뿐이다. 누가 이야기한 대로 착간이라는 말에는 어병(語病)이 있다.
여기에서 "날카로움을 꺾고" "빛을 누그러뜨리는 것"은 설령 그릇을 가득 채울 만한 능력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 날카로움과 빛의 반대면을 항상 염두에 두어 조화를 유지하는 행동이고, 그를 통해서 "어지러움을 풀고" "먼지와 함께하는 것"은 날카로움을 자랑하여 다른 사람과 분란을 만들고 빛남을 뽐내어 뭇사람의 질시를 받게 되는 일, 곧 그릇을 채우려다 넘쳐버리는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길이다. 날카로운 것은 언젠가 무뎌지게 마련이고, 빛나는 것은 언젠가 시들게 마련이므로 무뎌지고 시드는 고통을 맛보기보다는 스스로 날카로움과 빛을 감추는 것이 덜 고통스러울지도 모른다. 다른 글(56)에 대한 해설과 서로 참고해서 보길 바란다(다음 참조).
고요하도다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구나
湛呵似或存
『설문』에 따르면 '담(湛)'은 물에 빠져서 보이지 않는 모습, 곧 '몰(沒)'과 같다. 반드시 그런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고 여러 뜻이 있어서 종잡을 수 없기는 하지만(단옥재) 그것이 기본적 의미다. 도 또는 도를 체현한 성인은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항상 주위와 조화를 이루어 드러나지 않으므로 물에 빠져 보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마치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글자로만 보면 "있는 듯하다"고 옮겨야 하겠지만 그 말에 이미 "없는 듯하다"는 말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옮긴다.
나는 그가 누구의 자식인 줄 알지 못하나 마치 상제보다도 앞서 있는 것 같다
吾不知誰之子也, 象帝之先
'상(象)'은 '사(似)'와 같다. 일부에서는 이 글자를 형상〔有形〕이라는 의미로 보고 "……알지 못하나 유형의 사물이나 상제보다 앞선다"고 해석하기도 하는데(동사정), 일반적이지는 않다. 『상이』에는 '상(像)'으로 되어 있다. 또 근래에는 '선(先)'을 조상이라는 의미로 보아 "……상제의 조상 같다"고 옮기기도 한다(곽말약·고형). 어쨌든 상제보다 앞선다는 의미다
여기에서 도는 전통적 지상신인 상제보다도 우월하다. 상제가 지상신이었을 때는 상제와 관계하는 사람, 즉 상제의 혈족인 천자나 상제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제사 관리 등이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고, 하늘(천)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에서는 하늘을 대신해서 다스리는 천자나 하늘의 이치(천문)를 아는 관료가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도가 이렇게 존귀한 것이 되면 도와 관계하는 사람도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 나머지 이런 묘사가 의미하는 바는 이미 서술했다(다음 참조).
현명한 임금은
나라가 클수록 더욱 조심하고
나라가 강할수록 더욱 두려워한다
―『여씨춘추』 「신대람·신대」
[道沖而用之, 有不盈也]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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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cafe.daum.net/kimpo5858/C998/81?q=%EC%97%AC%EB%B0%B1%EC%9D%98%20%EB%AF%B8%ED%95%99>
1. 글자 풀이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한 곳의 바퀴통으로 모이는데, 그 비어있음에 수레의 쓸모가 있다.
진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에 그릇의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뚫어서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에 방의 쓸모가 있다.
그러므로 있음이 이익이 되는 것은 없음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2. 뜻 풀이
이 장은 유와 무에 대한 이야기이다. 일단 유는 눈에 보이는 형상을 말하는 것이고 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을 말한다. 노자는 말한다.
수레바퀴에는 바퀴살이 있다. 이 바퀴 살은 한 가운데의 바퀴통으로 모인다. 이 바퀴통이 비어있기 때문에 수레가 쓸모가 있다. 바퀴살을 꼽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없다면 바퀴는 힘을 받지 못하고 수레는 굴러갈 수 없다.
진흙을 빚어서 그릇을 만드는데 우리는 그 그릇의 아름다움만 본다. 그릇이 예쁜 모양으로 만들어지거나 좋은 색깔이 칠해져있으면 그릇은 더욱 소중한 물건이 된다. 그러나 그릇의 쓸모는 물건을 담는 데 있고 물건을 담는 곳은 바로 보이지 않는 공간이다.
집 또한 마찬가지이다. 창문을 뚫고 방문을 뚫어 집을 만드는데 그 집의 쓸모는 바로 빈 공간에 있다. 아무리 고급스러운 장식과 좋은 소재로 만든 멋있는 집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그 장식과 소재가 아니라 그것이 만들어내는 빈 공간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있음이 이익이 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있음을 가지고 이익으로 삼는다. 그것을 가지고 사고 팔기도 하고 이래저래 부려먹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사용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다. 만약 빈 공간이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보통 사람들은 모두 형체 있는 것만을 유용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형체 있는 데에만 눈을 팔고 있다. 그러나 노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의 유용성에 주목하였다. 이것은 별 것 아닌 것같지만 실로 놀라운 발견이다. 이는 중국의 사유체계에, 처세철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중에서도 특히 예술 정신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를 통해 중국인들과 그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동북아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동양화와 서양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일단 그림의 구도를 잡는 데 있어 서양화는 초점투시를 중시하지만 동양화는 산점투시를 중시하는 점을 들 수 있고 서양화는 면을 중시하지만 동양화는 선을 중시한다는 점도 들 수 있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서양화에 대한 동양화의 특징으로 가장 두르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역시 여백의 미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동양화가 다 여백의 미를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여백의 미가 담겨있는 산수화야말로 동양적인 분위기를 가장 잘 자아내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양적인 분위기를 대표하는 산수화들은 대부분 화폭 가에만 여백을 남겨놓는 것이 아니라 그림 한 가운데서도 구름이나 안개를 통하여 비어있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산중턱에 걸려있는 구름이나 안개는 왠지 그윽하고 심오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것은 바로 동양의 정신세계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나라 때의 가도라는 시인에게는 <尋隱者不遇(은자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하고)>라는 제목의 시가 있다.
松下問童子 소나무 아래에서 동자에게 물어보니
言師採藥去 스승은 약을 캐러 갔다고 말하네.
只在此山中 이 산 가운데 있기야 하겠지만
雲深不知處 구름이 깊어 찾을 길이 없구나.
이 시는 후대에 산수화의 소재로 널리 쓰이게 된 시이다. 산 허리를 감싸고 있는 흰 구름은 바로 그림 속의 여백의 미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인도해주고 아울러 그윽하고 깊은 맛을 느끼게 해준다.
그림만이 아니다. 서예에서도 보이지 않는 공간은 참으로 중요하다. 서예는 하얀 종이 위에 붓으로써 검은 선을 긋는 예술이다. 서예의 초보단계에서는 검은 선을 얼마나 멋있게 긋는가에 관심을 두지만 나중에 고급단계에 올라가면 검은 선에 의해 나뉘어지는 하얀 공간을 어떻게 잘 배치하는가에 더 많은 관심을 두게 된다. 즉, 눈에 보이는 검은 선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얀 바탕에 대해서도 신경을 쓰는 것이다. 노자가 말한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의 쓸모가 서예에서도 응용되고 있는 것이다.
여백의 미는 사실 노자의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의 유용성을 예술적으로 응용한 것이다. 사실 동양화가 처음부터 여백의 미를 추구한 것은 아니다. 여백의 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은 중국의 송대이다. 송대는 전반적으로 보아서 노자의 미학을 본격적으로 자각하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대교약졸로 바라보는 중국문화>란을 살펴보시면 될 것이다.
사실 노자 사상은 참으로 심오하다. 그래서 그 참맛을 이해하는 데는 비교적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노자의 도덕경이 나온 것은 늦어도 전국시대 중엽 정도, 대략 B.C. 3, 4 세기 정도이다. 노자의 사상을 미학적으로 꽃피운 것은 송대 중엽이후, 대략 A.D. 11세기 이후로 보면 될 것이다. 여기에는 무려 천오백년의 격차가 있다.
그러나 그보다 천년이 더 지난 지금에 있어서도 노자의 이 구절은 참으로 새겨보아야 할 말이다. 지금 이 시대야말로 정말 보이지 않는 것의 소중함이 더욱 절실한 시대이다.
자본주의 말기인 이 시대는 이전의 어떤 시대보다 물질적 이익과 감각적 쾌락을 중시하는 시대이다. 오랫동안 우리의 정신세계를 구속하던 기존의 가치체계가 역사의 변화에 부응하지 못하고 흔들리게 되자 사람들은 가치관의 혼동에 빠지게 되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에 대한 믿음이 무너질 때 사람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이익과 감각적 쾌락뿐이다. 이것들이 가장 확실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물질적 이익과 감각적 쾌락을 얻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삶을 지탱해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이다. 정신세계가 무너질 때 우리의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모두에게 파멸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이 시기는 하루 빨리 쓰러져 가는 정신세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할 시기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눈앞의 물질적 이익과 감각적 쾌락에 대한 추구가 지나치면 감각기관을 망가뜨리고 마음을 교란시키며 결국은 생명력의 고갈을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럴 때일수록 차분히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명상은 바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제는 명상을 통하여 내면과 외면의 조화를 추구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외면만을 추구한다면 인류의 미래는 암담할 것이다.
동양화의 기법 중에 홍운탁월(烘雲拓月)이란 것이 있다. 달을 직접 그리지 않고 주변의 구름을 그림으로써 달의 모습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 달이 있는 곳에는 아무런 운필(運筆)의 흔적이 없다. 그러나 거기에 달이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무(無)의 실체화’라고나 하겠다.
또한 동양화는 ‘홍운탁월로서의 여백’이 아닌 ‘진짜 여백’도 중요시한다. 이런 여백은 무의 실체화가 아니다.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는 곳’을 아무것도 칠하지 않은 채 그냥 놔두는 것이다. 이에 비하여 서양화는 여백이 별로 없다. 화면 가득히 형형색색의 요소들을 빼곡이 집어넣는다. 심지어 동양화 같으면 진짜 여백으로 남겨둘 부분마저 ‘하얀색 물감’으로 칠해 넣기도 한다.
동양과 서양의 이런 차이는 수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양에서도 특히 인도는 예로부터 무의 관념에 아주 익숙했다. 그리하여 수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인 ‘0’을 세계 최초로 만들어냈다. 그러나 서양 학문의 원류를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는 “진공은 불가능하다”라고 단언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0’의 개념이 자발적으로 생겨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 동양에서 전래되어 왔을 때도 상당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후세의 어떤 사람은 이를 가리켜 ‘진공의 공포’라고 불렀다. 서양의 이런 전통은 그 뒤에도 이어진다. 파스칼은 <팡세>에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은 나를 전율케 한다”라고 썼다. 광대무변의 무를 명상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아온 동양적 사고와는 크게 대조되는 자세다.
하지만 서양의 태도가 과학의 발전에는 유리했다. 동양에서는 무 자체뿐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도 무화(無化)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서양에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하여 낱낱이 파고들어갔다. 그러한 분석적 자세를 통하여 엄청난 양의 지식을 축적해갔다.
결과적으로 근대 이후 과학의 주도권은 완전히 서양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 전 세계는 하나의 지구촌을 이루었다. 덕분에 과학도 이제는 인류 전체의 공유 재산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발전도 세계적으로 일체화하여 나아가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보편적인 과학의 시대에 살면서도 비과학적인 경향이 드러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 떠돌고 있는 수많은 미신과 사이비 과학들이 그것이다. 이들은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음에도 오히려 그럴듯한 과학의 탈을 쓰고 떠돌아다닌다. 실제로는 “과학적 근거가 없다”는 공백 상황이 그들을 더욱 설치게 한다.
이런 점에서 현대인들은 점점 더 파스칼을 닮아가는 듯하다. 공백으로부터 편안함이 아니라 두려움을 느낀다. 사이비 과학은 이처럼 공백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파고든다. 어떤 때는 터무니없는 줄 뻔히 알면서도 오직 공백의 두려움을 떨치기 위하여 탐닉한다.
현대인의 가장 큰 심리적 특성으로는 ‘불안’을 꼽는다. 불안 때문에 바쁘게 살고, 빠져들고, 휩쓸리면서 끊임없이 채우려고 든다. 그래서 이제 과학하는 마음과 고유의 미덕을 조화해갈 필요가 있다.
근래 빠름보다 느림, 복잡성보다 단순성을 찾는 움직임이 조금씩 눈에 띈다. 거기에 여백의 미학을 보는 마음의 눈을 더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빈 채로 있을 곳을 빈 채로 두는 것은 우리의 전통에 어울릴 뿐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올바른 자세다.
(출처) 한겨레21 / 고중숙(순천대학교 교수) jsg@sunchon.sunchon.ac.kr
환상 너머 공백과 꽉 찬 무
현상 너머에는 환영만이 존재하는 것일까요? 매우 캄캄한 공간에는 암울한 침묵만이 짙게 깔리고 고통스러운 마음의 심연은 바다의 수심만큼이나 깊었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그 공간과 시간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 공포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다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거기에는 그저 공백, 무, 허무만이 드리워져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나약함, 안일함, 무관심, 방관 등은 충격적인 죽음/죽임으로 몰고 갑니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무능력한 정부의 허둥지둥 대는 꼴이라니 너무나도 어처구니없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밖에 달리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가녀린 목숨들이 하나둘씩 죽어갈 때 무심한 산목숨들은 태연자약이라니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건을 바라보는 필자 역시 슬픔이 몰려오고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리고서는 두 손 모아 기도를 합니다. 대럴 레이(Darrel W. Ray)가 이런 행위를 조롱하듯이 말은 했지만, 이번만큼은 그 객관성이라는 논리를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기도는 버튼을 누르는 행위다. 성경 읽기, 교회에 나가기, 기도용 깔개 위에서 기도하기, 찬송가 부르기도 모두 버튼을 눌러서 악마나 질병 같은 문제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내세에 보상을 받기 위한 방법이다.”(Darrel W. Ray, 김승욱 옮김, 침대위의 신, 어마마마출판사, 2013, 38쪽)라고 통렬하게 종교의 기도에 대해서 비판하더라도 기도가 가진 심리학적 효과를 반감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설령 실제의 사건과 사실로 일어나지 않더라도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의는 삶의 세계에서 발생한 사건을 무(Nichts)나 공허로 보지 않도록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무는 인간에게 참기가 어려운 상황입니다. 자신이 무가 아니라 유라고 생각하는 데서 출발하여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세계 자체에 대한 인식하는 인간은, 무를 돌파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허무나 무가 아니며 더군다나 환상이나 환영도 아닙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지젝(S. Zizek)이 “‘진리’는 빈 자리이며 ‘진리의 효과’는 (상징적으로 구조화된 지식의) ‘허구’의 어떤 조각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을 아주 우연히 발견했을 때 발생한다.”(S. Zizek,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 인간사랑, 2002, 323쪽)고 말했습니다. 진리의 돌파구는 그 허구의 자리, 허무의 자리, 공백의 자리를 뚫고 들어갈 때 생기는 것입니다. 진리가 아니라고 할 때, 진리가 없다고 할 때 오히려 진리는 효력을 발휘하는 법입니다. 종교적 환상이라 여겼던 것들이 이제는 허무 너머, 공허 너머를 짚어 주고 그곳에 현전(現前, darstellung)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진리의 현전을 믿는 이들의 마음이 허무와 공포 너머에 신앙을 던져 넣어야 할 때가 지금이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서 돌아와 다오!” 이것은 간절한 명령이요 진리입니다. 허무를 뚫고 산 생명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때 진리인 체 가장하지 말고 진리를 보여주어야 하는데, 무엇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종교는 믿음을 강화하기 위해 수천 년 동안 상징적인 행위들을 이용해왔다. 이런 행위들은 강력한 심리적 도구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병사들에게 자신이 무적이라는 기분을 심어줄 수도 있고, 엄마에게 자신의 아이가 초자연적인 보호를 받고 있다는 기분을 심어줄 수도 있고, 사람들에게 신이 그들의 질병을 치유해주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도 있다.”(Darrel W. Ray, 앞의 책, 38쪽) 몹시 불편한 설명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분명히 종교는 현상 너머의 불행을 완화시키고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함석헌의 견해로 논박을 해보면, “역사란 결국 자연이라는 무대 위에서 신이라는 감독자의 지도 밑에 배우인 인생이 연출하는 일장극이라 할 수 있다. 고로, 초인간적 신비력을 무시한 역사는 평면화한 기록에 불과하다.”(함석헌, 함석헌전집, 영원의 뱃길 19, 한길사, 1985, 277쪽)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종교는 연기나 공연을 하지 말고 현상 너머의 불길한 징조의 빈 자리에 확신의 자리인 물 자체(Ding an sich)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실체가 공허하다고 인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괜한 희망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분간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실존의 상황은 급박하고 절대적입니다. 절대적 시간과 자리에서 종교가 강박증이 아니라 초감성적인 것의 현상을 숨기지 말고 내보이는 도래 사건을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무의 자리 뒤 베일에 숨겨져 있는 궁극적 존재는 이미 무와 공허의 자리에 함께 하고 있을 것입니다. 숭고 그 자체인 존재는 그들과, 그 대상과 본질적인 속성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환상이나 환영이 없습니다. 아니 공백이 없습니다. 무가 아닙니다. 남는 것은 완전한 무가 아니라 꽉 찬 무 자체, 초월적이면서 내재적 타자입니다. 그가 그들과 더불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물도, 객체도, 대상도 아닌 초월적 존재와 더불어 있는 생명적 주체들입니다(S. Zizek, 앞의 책, 323-332쪽). 참 존재, 참 본질은 감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짓된 이미지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이미 모든 시민의 상처가 되어버렸지만, 극한의 고통과 스트레스, 그리고 공포와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사람들이 무와 공백이라 여기는 그 자리를 메우고 그 생명적 주체들이 즐거운 유희를 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사라져간 이들의 지금과 살아있는 이들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위 이미지는 2014.4.16/뉴스1과 국제신문 2014. 4. 21.에서 퍼온 것임.
김대식 선생님은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B.A.)와 서강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를 졸업(M.A.)한 후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현재 가톨릭대학교 문화영성대학원, 대구가톨릭대학교 대학원 종교학과 강사로 있으면서, 대구가톨릭대학교 인간과 영성연구소 연구원, 종교문화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된 학문적인 관심사는 '환경과 영성', '철학적 인간학과 종교', 그리고 '종교간 대화'로서 이를 풀어가기 위해 종교학을 비롯하여 철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의 학제간 연구를 통한 비판적 사유와 실천을 펼치려고 노력한다.
■저서로는 《생태영성의 이해》, 《중생: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라》,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까: 영성과 신학적 미학》, 《환경문제와 그리스도교 영성》, 《함석헌의 종교인식과 생태철학》, 《길을 묻다, 간디와 함석헌》(공저), 《지중해학성서해석방법이란 무엇인가》(공저), 《종교근본주의: 비판과 대안》(공저), 《생각과 실천》(공저), 《영성, 우매한 세계에 대한 저항》, 《함석헌의 철학과 종교세계》, 《함석헌과 종교문화》, 《식탁의 영성》(공저), 《영성가와 함께 느리게 살기》, 《함석헌의 생철학적 징후들》 등이 있다.
/함석헌평화포럼
<출처 : http://cafe.daum.net/qnselal/5ZBv/99?q=%EA%B3%B5%EB%B0%B1%EC%9D%98%20%EB%AF%B8%ED%95%99>
동양화는 그린 부분보다 그리지 않은 공백을 볼줄 알아야 한다.
서양화는 화폭의 전 공간을 남아나지 않게 그린 그림이요.
따라서 그리지 않은 공백에, 미숙한 서양인들의 심미안 으로는
공백의 미나 그리지 않은 공간에 농축된 동양인의 특히 한국인의
공간에 농축된 정신의 밀도를 포착할줄 모른다.
그린 부분은 뭔가가 있는 물질이요, 비어있는 공백은 정신이다.
그러므로 공백속에 농축된 정신의 표현이 동양화의 생명인 것이다.
때문에 우리의 선조들의 예술작품 을 보면 물질적 고해를 넘어
바늘하나 찌를데 없는 고밀도의 공백의 세계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는 마치 우리가 팔을 허공에 내 두러면 그기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인것 같지만, 사실은 바늘하나 찌를데 없는 공기로 가득차 있는
것처럼 그 공백에는 체험에서 우러나온 정신적 고밀도가
그 공백 속에 녹아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의 물질만능, 금전만능, 서양문명 만능의 풍토 속에서
이 공백의 미학 이야말로 우리의 피폐한 정신문명의 숨통을
트이게 하는 신선한 공간이 아닐수 없다.
우리 한국인의 방황하는 정서가 편안하게 정착할 곳이 있다면
바로 이런 곳일 것이다. *지인의 서화전에 붙여***尋山***
두 마리 진흙소가 서로 싸우다가 바닷 속으로 들어갔네
學人無他術 直似大死人 一點氣也無 方與那人合
수행하는 이에게는 다른 방편이 없나니 學人無他術 直似大死人 一點氣也無 方與那人合
바로 완전히 죽어버린 사람처럼
한점의 기운도 없어야
비로소 主客이 합쳐진 것이네.
但有分別念 心見量隱 絶無情識念 本心全體現
다만 분별하는 생각이 있으면
저절로 지켜 보는 마음이 숨어버리니,
뜻을 알려고 생각하는 마음만 끊어버리면
본바탕의 마음 전체가 드러난다네.
古人契證處 佛法無多子 正要絶情量 當陽便承當
옛사람이 가르쳐 증명해준 곳이긴 하지만
불법이란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니라네.
가장 중요한 것은 뜻을 헤아리는 생각만 끊어버리면
저절로 환해져서 마땅히 편안하게 이어진다네.
本心本空寂 本法本無生 作此智慧觀 是明見佛性
본 마음은 원래 고요하고 텅 비었으며
절대바탕은 원래 생기는 것이 아니라네
이러한 지혜의 빛을 비춰서 지켜 볼때에
비로소 옳바르고 밝은 지혜로 불성을 보는 것이네.
飢食困來眠 無心萬境閑 但依本分事 隨處守現成
배고프면 밥먹고 피곤하면 쉬나니
무심이 되면 삼라만상이 고요하네.
다만 마음이 본바탕에만 의지하고 있으면
어디를 가든간에 항상 완전함이 지켜진다네.
吾心似秋月 任運照無方 萬相影現中 交光獨露成
내 마음 가을 달 같아
비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가는대로 내맡겨 둔다네.
온갖 모양의 그림자 나타나는 가운데에
뒤섞어진 빛의 혼돈 속에서 홀로 드러나 있다네.
了了無可了 無佛亦無人 如何無一物 淨智體自空
모든 것을 끝마쳐서 이제 더 이상 할 것도 없고
깨달음도 없으며 또한 아무것도 없다네.
어찌하여 한물건도 없는 것 같다고 말하는가
맑게 비쳐보면 저절로 텅빈 몸이 되느니.
平常心是道 諸法覿體眞 法法不相到 山山水是水
드러나지 않고 항상 있는 그대로의 마음이 바로 도이며
만법은 참된 바탕에 의해서 주시된다네.
법과 법끼리는 서로 범하지 못하나니
산은 산이요, 물은 곧 물이네.
道本無形色 不在內外中 佛眼覷不見 凡愚豈易明
도는 본래부터 모양이나 빛깔이 없고
안도 바깥도 없으며 가운데도 없네.
부처의 눈으로도 엿볼 수가 없는데
어리석은 범부들이야 어찌 쉽게 밝힐 수 있으랴.
無爲閑道人 在處無蹤跡 經行聲色裏 聲色外威儀
아무 할일도 없는 한가한 도인은
어디에 있던간에 그 자취마저 없도다.
소리와 빛깔 속에서 어떤 행위를 하여도
소리와 빛깔의 밖에서 멀찍히 떨어져 지켜보고만 있네.
石女忽生兒 木人暗點頭 崑崙騎鐵馬 舜若着金鞭
돌여인이 문득 아이를 낳으니
나무사람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곤륜산이 무쇠말을 타고가자
허공이 황금채찍을 휘두르네.
兩箇泥牛鬪 哮吼走入海 過去現未來 料掉無消息
두마리 진흙소가 서로 얽혀서 싸우다가
울부짖으며 바다 속으로 들어갔는데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아무리 찾아 보아도 아직까지 소식이 없네.
-白雲禪師-
[출처] 두 마리 진흙소가 서로 싸우다가 바닷 속으로 들어갔네|작성자 인우
또 십이송을 지어 지공화상에게 올림[又作十二頌呈似] 景閑
1
學人無他術 直似大死人
一點氣也無 方與那人合
공부하는 사람은 다른 방법이 없나니
바로 아주 죽은 사람처럼
한 점의 기운마저 없어야
비로소 저 사람과 합할 것이다.
2
但有分別念 自心見量隱
絶無情識念 本心全體現
분별하는 생각이 있기만 하면
제 마음의 견량이 숨고
정식의 생각이 아주 없으면
본심의 전체가 다 나타난다.
3
古人契證處 佛法無多子
正要絶情量 當陽便承當
옛사람들의 깨달음이라 하지만
불법이란 원래 별것 아니다
감정의 헤아림만 끊어 버리면
당장에 분명 수긍하리라.
4
本心本空寂 本法本無生
此作智慧觀 是明見佛性
본심은 본래 텅 비어 고요하며
본법은 본래 생멸이 없는 것이니
이런 지혜로 잘 관찰하면
그것이 불성을 밝게 보는 것이다.
5
飢食困來眠 無心萬境閑
但衣本分事 隨處守現成
시장하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나니
마음이 없어 모든 경계 한가하다
다만 본분의 일만을 의지하여
어디를 가나 있는 그대로 산다.
6
吾心似秋月 任運照無方
萬相影現中 交光獨露成
내 마음 마치 가을 달과 같아서
어느 곳이나 마음대로 비춘다
온갖 모양 그림자 나타나는 가운데
밝은 광명이 홀로 드러나 있다.
7
了了無可了 無佛亦無人
如何無一物 淨智禮自空
분명하고 분명해 밝힐 것 없고
부처도 없거니와 사람도 없다
어째서 한 물건도 없다 하는가
깨끗한 지혜는 본체가 공이니라.
8
平常心是道 諸法覿體眞
法法不相到 山山水是水
평상시의 마음이 바로 이 도요
모든 법은 목전의 그것이 진실이다
법과 법은 서로 범하지 못하나니
산은 바로 산이요 물은 바로 물이니라.
9
道本無形色 不在內外中
佛眼覷不見 凡愚豈易明
도는 본래 형상이나 빛깔이 없고
안이나 밖이나 중간에도 있지 않아
부처의 눈으로도 볼 수 없거니
범우들이야 어찌 쉽게 밝히리.
10
無爲閑道人 在處無蹤跡
經行聲色裡 聲色外威儀
아무 조작이 없는 한가한 도인
어디 있으나 그 자취가 없다
소리나 빛깔 속에 거닐 때에는
그 소리 빛깔은 바깥의 위의 된다.
▷大死人(대사인)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온통 내어버린 것을 사람에 비유.
▷氣(기) 妄念
▷那人(나인) 저 사람. 크게 깨달은 사람.
▷見量(견량) 비판 분별을 떠나 事象을 있는 그대로 知覺하는 것.
▷情識(정식) 감정의 알음알이.
▷契證(계증) 계합하고 깨달음.
▷無多子(무다자) 아무 것도 아니다. 별것이 없다.
▷情量(정량) 감정의 분별.
▷當陽(당양) 당장 분명히.
▷承當(승당) 首肯함. 點頭함. 머리를 끄덕거림.
▷困來(곤래) 피곤함. 來는 助字.
▷萬境(만경) 모든 상대.
▷本分事(본분사) 내가 부처라는 사실.
▷現成(현성) 現前成就란 뜻으로 지금 있는 그대로를 말함.
▷任運(임운) 아무 사정도 첨가하지 않고 法爾히 자연히. 되는 대로라는 뜻.
▷無方(무방) 일정한 장소가 없음.
▷交光(교광) 빛이 합함
▷了了(요료) 똑똑한 모양. 분명한 모양.
▷平常心(평상심) 평소의 마음. 보통 때의 마음.
▷覿體(적체) 목전의 그 몸. 보이는 그 몸.
▷覷不見(처불견) 엿보아도 보지 못함.
▷無爲(무위) 人爲의 보탬이 없이 자연 그대로임. 모든 법의 眞體를 말함.
▷經行(경행) 참선하다 피로를 풀기 위해 절의 境內를 천천히 거님.
▷聲色(성색) 소리와 빛깔. 모든 外境을 다 포함한 말.
▷外威儀(외위의) 外相. 人體의 모양. 人體에 니타나는 여러 동작.
[출처] 또 십이송을 지어 지공화상에게 올림[又作十二頌呈似] 景閑|작성자 누리마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