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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산 안확의 항일투쟁 '조선사 바로 세우기'!~
조선을 강제 병합한 지 10여 년.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무단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다. 이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한 고도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었다.
이 시기 한 조선인 학자가 자신이 저술할 책의 목록을 미리 공개했다. 그것은 일생을 건 집필 계획이었다.
집필 계획을 공개한 주인공은 자산 안확. 조선민족사, 조선문학사, 조선문명사 등 조선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었다.
'조선사 바로 세우기' 그것은 자산 안확의 항일투쟁이었다.
"자산 안확, 여러분은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했던 이 안확이란 인물을 아십니까? 들어는 보셨습니까?
여기 사진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눈매와 빛나는 눈, 그리고 반듯한 자세, 그야말로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하시고 계신데요, 안확 선생은 1886년 194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구한말에 태어나 해방후 돌아가셨으니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것입니다. 왕조의 멸망기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안확 선생님은 수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런데도 이 안확선생님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자산이라는 호를 가져서 안자산이라고 불렸던 안확!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지난 1965년 대구의 어느 고서점.
대구교육대학의 김창규 교수는 자주 드나들던 그곳에서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한다. 뒤섞여 있던 고서적 속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
자산 안확의 조선문학사 원본(1922)
"(이 책을 그 때 얼마 주고 샀습니까?)" "얼마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상당히 싸게 샀습니다."
이 책은 김창규 교수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줬다.
"그 때 참 놀라웠죠. 조선문학사를 1922년에 썼다는 것과 그것을 발견한 것이 상당히 놀라웠죠. 이런 문학사가 나왔는가 저는 전혀 몰랐거든요." - 김창규 명예교수,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내용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조선문학사>는 상고시대부터 1900년대 당시까지 조선의 모든 문학을 시기별로 정리해놓고 있었다.
1946년 권상로 조선문학사. 1948년 이명선 조선문학사. 그 때까지 알려진 문학사 서적은 해방 이후인 1946년부터 출간된 것들이었다.
그 보다 앞서 출간된 문학책은 1937년 조윤제의 조선시가사강이 전부였다. 안확의 조선문학사는 그 보다 15년 앞서 출간된 것이다.
그렇다면 안확의 조선문학사는 왜 묻혀 있었을까?
"정기 대학을 졸업해서 학문을 닦고 자기 제자를 둔 사람 같으면 모르겠는데 제자가 없다는 것에서 안자산이 묻히게 된 첫째 이유이고,
그 다음 두번째로는 경성제국대학이 출발됨으로써 오로지 자기들만이 조선문학사에 있어서만이 최고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자산 같은 경우는 신식 정규과정을 못밟았기 때문에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에 의해 안자산의 책이 무시 당하게 된거죠." - 김창규 명예교수
우리나라 최초로 국문학사를 정리한 자산 안확.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동북아음악연구소.
한국의 전통음악과 아시아 각국의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이곳엔 다양한 악기들과 함께 국악 관련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대학에서 국학 강의를 하며 국악 연구를 하고 있는 권오성 교수. 그 역시 놀라운 경험을 했다.
70년대 중반, 국악 자료를 정리하던 중 새로운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아악을 비롯한 조선의 전통음악에 대해 정리한 논문집. 십여 편의 국악 논문의 저자, 그는 안확이었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악연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조선음악의 연구 - 안확>
"그 당시로써는 그런 음악에 대한 연구가 없었고 또 한학자이시지만 근대적 음악에 굉장히 눈을 많이 돌리신 분이시고 문헌자료도 지금도 볼 수 없는 많은 문헌자료를 보셨단 말이예요. 음악의 문헌사에 있어 후학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 권오성 교수, 한양대 음악대학
동아일보 자료실. 1923년 1월 11일자 신문 기사에서 안확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었다. 기사는 안확의 출판기념회를 알리고 있었다.
출판된 책은 <조선문명사>, 그리고 그것은 최초의 출판기념회였다. 이렇듯 안확은 당대 문학에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최초로 기념회를 열만큼 주목을 받았던 <조선문명사>.
이 책은 최초의 근대적 정치사로써 조선시대 정치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40여 년 전 안확의 조선문학사를 처음 발견한 김창규 교수. 이후 그는 안확의 자료 수집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국내의 여러 곳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많은 안확 관련 자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산의 저술들. 그의 저술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조선의 문학, 조선의 음악, 조선의 문명사, 조선의 예술, 심지어 조선의 무술까지 그의 연구는 성과를 남기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산의 저술은 9권의 책과 140여 편의 논문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남긴 안확. 그는 왜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인 것일까?
"한국에 관한 것이면 뭐든지 연구해서 하나의 국학으로 종합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전문가가 되는 게 아니고 한국의 정수를 체득해서 그것을 전수해서 자기가 살았던 시대, 나라가 멸망해버린 상황에서 다시 살리기 위한 뿌리를 대는 그런 국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최원식 교수, 인하대 국문과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 다양한 분야에 연구와 저술을 남긴 자산 안확. 그 중심엔 조선이 있었다. 그는 식민시대를 조선의 학문으로 극복하려고 한 국학자였다.
2. 독립운동가 안확!~ 조선국권회복단 활동과 고종망명계획!~
"내가 그 때 수하동 소학교에서 배운 것을 생각하면.. 어린아이로 또한 토론과 연설을 하여 선생의 칭찬을 받은 일이 생각나노라...
나도 서북방에 주유하면서 학교를 세움이 몇 곳이요 직접 교수하기도 여러 해에 걸친지라..."
이걸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소학교인 수하동 소학교를 다녔고 또 독립협회에 참여해 연설도 했고 서북방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가르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안확은 일본의 니혼대학에서 2년 동안 정치학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그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평범한 지식인이었을까요?
고종황제의 사진입니다. 1918년 이회영,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 아주 쟁쟁한 인물들은 고종을 해외로 망명시키려 합니다. 그 고종 망명 계획을 추진한 인물 중에 자산 안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확, 그는 앉아서 글만 쓰는 지식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산 안확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경기도 용인시. 수소문 끝에 자산 안확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안확은 낡은 사진첩 속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장남 결혼식 때 친지들과 찍은 사진, 그리고 동료들과 찍은 흑백사진. 몇 장만 남았을 뿐 의외로 그에 대한 자료는 적었다.
"여기 저기 다니시며 활동을 하셨으므로 집에는 거의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7~8세였을 때 집으로 들어오셔서 제가 10살 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족들조차도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모를 정도로 생활을 하셨습니다." - 안동호(66), 안확의 손자
그렇다면 안확은 무엇을 하고 다녔을까?
<조선국권회복단 - 안일암사건>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일제시대 경상북도 경찰부가 만든 자료집에서 안확의 활동을 추적할 수 있었다.
폭도사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안확이 관련된 사건은 일명 '조선국권회복단' 일명 '안일암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사건일까?
대구광역시 앞산
안일암은 대구 외곽에 있는 작은 사찰인데 이곳이 바로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곳이다.
지난 1915년 2월 윤상태, 이시영 등 이 지역 인사들이 요양과 병문안을 핑계로 모여 조선국권회복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국권회복단 요원들은 대부분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남북도 일대의 부호라든가, 중산층, 또는 계몽주의적인 인물, 신학문을 이수한 사람들, 양반 유생들 이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 권대웅 교수, 대경대 한국사
일본 경찰이 조사를 통해 밝혀낸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도다.
통령에 윤상태,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 박영모 등 그리고 마산지부장은 안확이었다.
1910년대 마산항은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한 곳으로 상업이 발달한 지방도시였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는 원동상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업활동을 빙자해 군자금을 모으고, 그것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 부호들에게 쉽게 접근해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조직으로써 상업조직만 한 것이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상업활동을 통해서 그들은 국내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그리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되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 권대웅 교수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정보와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직이었다.
그들은 독립진정서를 입안해 영문으로 번역, 상해 등으로 보냈다. 그들의 독립의지를 해외에 널리 알린 것이다.
또한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호와 상인 등 재력가들과 끊임없이 접촉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하고 만주의 소항령의 노백린 장군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해외의 독립운동단체들과 연계되어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에 대한 일본 경찰 기록들을 살펴보면 스물 일곱, 여덟명에게 일일히 상해를 갔다왔느냐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국권회복단의 자금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되었다고 일경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죠." - 차민기 강사, 경남대 국문과
일본 경찰은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을 예의 주시했다. 그러나 국권회복단의 활동은 결국 '상업시찰'로 되어 있다.
안확의 활동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 있다. 고종망명계획이 그것이다.
한국아나키즘운동사.
1918년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을 북경으로 옮겨 망명정부를 세울 계획을 수립한다. 이회영, 오세창, 한용운, 이시영 등이 참여한 이 계획에 안확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우당 이회영이 중심이 된 이 계획은 고종의 동의하에 북경에 행궁까지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고종이 갑작스레 의문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고종의 장례는 온 국민의 의혹과 분노 속에 진행되었다. 고종의 독살설이 퍼진 가운데 진행된 장례식은 곧 이어 3.1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경남대학교 도서관. 당시 안확이 활동했던 국권회복단의 자료가 있다.
고등경찰관계적록 기록에 진동 헌병주재소 우편소 파괴 기록이 그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마산지부 변상태 등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3.1운동 당시 격렬한 항일투쟁으로 기록된 진동 헌병주재소 사건.
1919년 4월 3일. 만세 시위 군중이 당시 창원군 진동면에 헌병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여덟 명이 사망했다.
그후 많은 관련자들이 체포되거나 수배되는데 대부분의 국권회복단 단원들과 함께 안확 역시 수배령이 내려진다. 그후 그는 약 2년간의 도피생활을 한다.
3. 마산에서의 근대교육활동, 일제에 맞선 실력배양운동!~
"그후 수배령이 해제되자 안확은 다시 서울로 나타납니다. 3.1운동 이후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되는데요, 안확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서울로 상경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국의 청년조직을 하나로 묶은 조선청년연합회 기관지인 아성의 편집장과 지방부장직을 맡습니다. 이 지방부장직을 맡은 것은 아마도 여전히 마산과의 연결을 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안확은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닌 서울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마산으로 가서 활동하게 되었을까요?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안확이 마산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산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그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돝섬.
마산을 상징하는 이 섬엔 높다란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마산을 대표하는 노산 이은상의 시비다.
노산은 마산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마산에서 자랐다. 그가 남긴 회고록 무상. 여기에 자산 안확은 노산의 잊을 수 없는 스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안확은 시국에 대한 울분을 견디지 못한 뜨거운 스승이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성을 일깨워준 깨어있는 스승이었다.
안확은 마산 창신학교의 교사였던 것이다.
1910년대 안확은 이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와 국사를 비롯,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시인 이은상과 국어학자로 잘 알려진 이극로 등이 바로 그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안확은 이 학교의 교사가 되었을까?
창신학교는 1908년 호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따라서 사립 창신학교는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 독자적인 신교육을 펼칠 수 있었다.
1911년 안확의 나이 26세, 그는 창신학교를 찾았다.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민족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8년 동안 창신학교에 재직하면서 어린 조선학생들에게 한글과 조선의 역사 그리고 다양한 신교육을 시킨다. 인재양성을 시킨 것이다.
"우리 창신학교가 경남에서 개교하기 이전에는 한문 서당교육 밖에 없었거든요. 한문교육만 있던 당시에 창신학교가 개교를 해서 수학을 가르키고 영어를 가르키고 했으니까 안확선생님은 이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인재가 양성되어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신 것입니다." - 강병도 학장, 창신대학
이러한 창신학교는 3.1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일제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3월 3일 창신학교가 중심이 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만세운동에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들이 사표를 내고 학생들을 데리고 참여했다. 학교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4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일어난 3월 3일에 만세운동. 이 운동은 이후 7~8차례 더 일어난 마산 대규모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자산을 떼놓고 본다면 국권회복단의 국내활동의 그 모습들, 지식기반활동들, 이런 것들이 일선 교단에서 고스란히 보여졌다고 생각됩니다." - 차민기 강사
자산은 실력배양을 중시했다. 그래서 학생들의 체육활동을 다른 공부 못지않게 강조했다.
창신90년사. 그는 창신학교에 경남 최초로 야구부와 축구부를 신설했다. 오랜 유교적인 전통이 남아있던 당시에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참 암울하고 신문화가 없던 시대인데 신식교육을 열심히 시키면서 그러면서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선 안 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선 체력을 튼튼히 하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그 지방에 없었던 축구도 도입하고 야구도 도입했습니다." - 강병도 학장
안확은 건강한 신체가 나라를 구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창신학교에 축구부와 야구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공이 없었다. 그래서 연습 때는 짚으로 만든 짚공을 사용하고 정식 경기 때에야 선교사들이 구해준 가죽공을 이용했다. 대구 기성학교와 자주 친선경기를 펼쳤는데 이 두 학교의 경기는 지방의 명물이 되었다.
짚공은 새끼줄을 정당한 굵기로 꼬아 마치 멍석을 엮듯이 모양을 잡아나간다. 그런 다음 속에 짚을 채워 넣으면 짚공이 완성된다. 이런 짚공은 60년대까지 일부 농촌에서 볼 수 있었다.
안확은 축구공 뿐만 아니라 야구공도 그렇게 만들어 사용했다. 창신학교의 교감까지 맡은 안확은 학교의 교가까지도 직접 작사, 작곡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었다. 안확과 학교의 민족교육은 일제와 마찰을 일으켰고 이는 학교 재정에 어려움을 불러왔다.
1914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안확은 또 하나의 결심을 한다. 그것은 야외 시국강연이었다.
안확은 활을 쏘던 추산정이란 곳에서 대시민시국강연을 열었다. 최초의 시국강연회였다. 그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1914년 5월 17일
"이제 이 나라를 찾고 이 핍박받는 민족을 일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오직 하나의 길은 교육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비굴했고 우리는 무지했으며 우리는 힘이 약하니 자라는 청소년들에게는 지식을 주고 용기를 주어 다시 힘을 내어 잃었던 나라를 되찾게 해야 합니다.
일본인 학교는 시설도 좋고 학교도 큽니다. 그러나 시설이 외형상 일본인 학교보다 좋지 않은 우리 창신학교로 자녀를 보내주십시요.
그리하여 우리 자녀들이 민족혼을 배우고 나라와 조국을 배워서 잃었던 나라를 되찾는데 큰 일꾼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4. 일제 식민사관, 조선사편수회에 맞선 안확의 항일투쟁!~ 조선문명사, 조선음악사... 국학 연구!~
"마산창신학교 교사이자 비밀결사조직의 지역책임자였던 안확은 국학 관련 연구와 저술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확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의 다양한 저술량 때문만이 아닙니다.
저술에 임하는 태도와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저서 중에 하나인 <조선문명사>입니다. 일명 조선정치사라고도 하는데요, 안확의 철학과 사상이 가장 잘 집약되었다고 평가받는 이 책을 위해 그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안확선생님을 직접 모셔 보겠습니다.
"자산선생님.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정말 온몸으로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자료수집을 위해 정말 많이 돌아다녔지요. 고서적이 있는 곳이라면 국내 서원이나 사가의 장서각 등 어디든지 다녔지요.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도서관도 다녔습니다. 일본의 우에노도서관, 중국 북경의 관립장서각, 상해의 참서루 등 자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습니다."
"그럼 섭렵해놓으신 자료도 정말 엄청 나겠군요?"
"기록해놓은 것을 보니 <조선문명사>를 위해 참고한 책이 대략 8,500여 권 되는 것 같습니다."
"8,500권이요? 정말 엄청난 자료입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렇다면 책만 참고하신 것인가요?"
"아무래도 기록자료는 한계가 있지요. 그래서 실제 인물을 많이 만났습니다. 조선의 행정관리들, 아전 출신의 관리들을 많이 만나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노력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노력을 한 자산의 이 책은 그 내용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 조선문명사는 조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당시의 식민사관에 정면 대응을 했던 것입니다.
식민사관에 맞서 조선의 역사관을 재정립한 안확. 그의 역사관을 보시겠습니다."
안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80년대에 시작됐다. 한영우 교수는 안확을 신채호, 박은식과 함께 우리 역사학을 정립을 중요한 역사학자로 보고 있다.
즉 고대사는 신채호, 현대사는 박은식, 그리고 중,근세사는 안확이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이다.
안확은 많은 부분 신채호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따라서 많은 학설을 공유하고 있지만 자의적인 부분도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신채호 선생은 영토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영토가 넓었던 고구려 역사에 대해 굉장히 중요시하고 높이 평가했는데,
안확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하면 영토문제보다 민권개념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민권문제에 있어 신채호 선생과 견해가 많이 달라지지요." - 한영우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특히 삼국통일에 대해 안확과 신채호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관련 인물들도 혹평을 했다.
즉 김춘추는 당의 의관과 연호를 쓰며 사대주의의 병균을 전파한 자로, 김유신은 재용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한 정치가며, 그 평생의 대공이 전쟁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인국을 난한 자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신채호는 신라가 당이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영토가 줄어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안확은 견해가 달랐다.
신라를 찬란한 문화를 가진 나라, 뛰어난 제도를 가진 나라로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화랑도 등으로 충분히 통일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보고 있다.
"영토보다는 민권, 제도에 주목을 했거든요.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신라의 가치가 재평가 될 수 있단 말이죠. 그러다보니까 신라의 문화 뿐만 아니라 만주에 대한 애착만 버린다면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가 살아나는 게 당연한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죠." - 한영우 교수
안확은 삼국 당시 민족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신라가 민족을 배반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국정쟁지(1907) - 시데하라 아끼라
그러나 안확의 가장 큰 공적은 무엇보다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사관에 맞선 것이다.
일제 당시 시데하라 아끼라는 조선 시대 정치에 대해 '당쟁(黨爭)'이라는 말을 만들어가며 비판을 했다.
그는 조선의 정치를 권력을 향한 음모와 암살의 정치로 규정했다. 또한 정치가들은 음험하며 권력을 위해 골육상쟁도 서슴치 않았다고 악평을 하고 있다.
"시데하라 아끼라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당쟁이 조선의 망국을 불렸다는 거죠. 당쟁을 통해서 조선은 통치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망국의 자리에 일본이 대신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결코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거나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주장입니다." - 신복룡 교수, 건국대 정치행정학부
붕당사화의 검토(1926) - 호소이 하지메
한 발 더 나아가 호소이 하지메 같은 일본학자는 조선인은 피가 더러운 종족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는 종족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결국 식민사관에 의하면 조선은 당쟁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당파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쇠락했기에 일본이 대신 통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 일본이 학자 대부분의 주장이었다.
이런 악의적인 식민사관에 대해 안확은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는 조선의 정치를 진보적이고 진화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일본인이 규정한 '당파' 역시 정치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주장했다.
조선시대 이율곡은 이미 동인은 젊고 진취적인 당으로, 서인은 노련하고 신중한 당으로 파악했다.
안확은 이를 계승함으로 노론과 북인은 진보적인 자유당으로, 소론과 남인은 신중한 보수당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그들의 대립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당쟁이 심했다는 것은 그만큼 조정에서 정치적 논쟁이 첨예하고 대립적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그들 사이 긴장감은 돌았을지도 모르지만 정적의 눈초리 앞에서 부패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컨데 조선 왕정에서 당쟁이 가장 심했던 것이 숙종 때인데 역설적으로 숙종 시대에는 백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성군의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당쟁이 심할수록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역설적 상황이 가능합니다." - 신복룡 교수, 건국대 정치행정학부
안확은 조선 왕조 5백년을 유지한 정치의 근간이 바로 당파정치라고 주장했다. 정치세력간의 견제와 대립이 조선 정치를 유지,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당파로 인해 조선 정치가 발전했다, 왜 그러냐면 당파가 활성화되면서 정치적 자유가 신장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당파 정쟁이 심화되면서 서민들의 정치 참여가 높아졌다 이런 점을 들 수 있구요, 그리고 또 하나는 당파의 견제 때문에 오히려 정치의 중용이 지켜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한영우 교수
안확은 당파정치의 장점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당쟁이 심할수록 왕권이 축소되어 정치적 자유가 늘어났고, 그래서 서민 계층까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봤다. 또한 붕당간의 대립으로 타협적인 정치가 가능하다고 봤다.
그렇다면 안확은 조선왕조의 멸망 원인을 무엇으로 파악했을까? 그것은 정조 사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섰던 안확. 그는 조선의 정치가 당쟁으로 발전했고 당쟁이 없어서 망했다고 봤다.
"이전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에 너무 집착하다보니까 고구려의 영토를 잃어버린 후대, 고려나 조선은 굉장히 후퇴된 것으로 봤어요.
그것은 영토를 가지고 봤을 때 그런 것이고 민권이나 정치사적 관점을 가지고 봤을 때는 무리한 해석이거는요.
안확 선생님은 민권을 중시했기 때문에 정치제도 발달 과정에 자치제도를 굉장히 존중했어요.
말하자면 민권이 자치제로 나타나고 그 자치제가 단계적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가는가 이런 면에 주목을 했죠. 바꿔 말씀드리면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에서 민주화 과정의 토착화,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 한영우 교수
조선의 역사가 식민지를 부른 퇴보가 아니라 민권이 신장된 정치제도 발달과정으로 본 안확.
지금은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게 연구에 몰두했던 안확은 1923년 그의 나이 서른 다섯에 일생일대의 선언을 합니다.
자, 이쪽을 한 번 보실까요?
안확 선생님의 저술 목록인데, 여기 보면 안자산 저술목록,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앞으로 이런 이런 책을 쓰겠노라 공개적으로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미 쓴 책은 제목 위에 하얀 점을 찍어 표시를 했고 또 앞으로 쓸 책은 제목 위에 검은 점을 찍어 표시를 했습니다.
보통의 경우 저술 계획이 있다면 조용히 진행을 시킬텐데 당시 안확은 이런 저술을 하겠다고 미리 공개선언을 한 것입니다.
자, 미리 이렇게 방대한 저술을 하겠다고 공개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1925년 7월. 안확은 또 하나의 놀라운 제안을 한다.
아악정리지의견.
우리의 아악을 정리하겠다고 이왕직아악부에 낸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에 이왕직아악부는 조선시대 궁중음악 아악의 전통을 어렵게, 그리고 유일하게 이어가고 있는 곳이었다.
안확은 이왕직아악부에 촉탁으로 들어가 아무도 하지 않던 조선 음악 정리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이 의견서에서 아악은 절륜한 음악이며 그 전통을 이어가는데 자신이 한몫 하겠다고 밝혔다.
"아악은 모든 곡조와 음악이 절륜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사업진척에 완전을 더 할 것이고..."
그는 특히 중국여행에서 중국의 음악과 악기를 직접 살펴본 후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확인했고 그래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안확이 봤을 때 1920년대 중국은 전통음악이 거의 사라지는 추세였다. 심지어 전통악기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편종, 편경, 뇌도, 영도, 특경 등 전통악기가 많이 남아있으며 이러한 악기로 연주하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은 세계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봤다. 이런 논리로 아악을 정리하게 된 안확은 이후 이왕직아악부에서 4년간 근무하게 된다.
그렇다면 안확이 이처럼 아악연구를 자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사를 쓰셨으니까, 조선음악사, 조선미술사를 전부 쓰실려고 계획을 세우셔서 조선음악사를 쓸 자료를 모으신 거죠. 그래서 악보를 모아 그 계획을 행하셨죠." - 권오성 교수, 한양대 음악대학
안확의 목표는 뚜렷했다. 조선의 전통음악을 연구하고 보존하겠다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조선음악사 집필이었다.
안확의 다방면의 글쓰기는 20대에 한글에 관련된 곳에서 비롯되었다.
1917년 학생들을 가르치며 <조선문법>을 썼고 특히 3.1운동 즈음엔 독립을 고취하는 계몽적인 글을 썼다.
<조선무사영웅전>. 이 책은 조선 고유의 무술을 찾아내 그것을 실력배양으로 이끌기 위해 쓴 책이다. 책 안에는 무사도의 유래와 총술, 공술, 격검, 유술 등 여러 무술을 정리하고 있다.
결국 안확은 이 책을 통해 용감, 인내, 단결 등 항일투쟁에 필요한 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921년 조선총독부는 또 하나의 계획을 세운다.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한 것이다.
여기엔 일본인 역사학자를 필두로 다수의 조선인 학자를 참가시켰다. 조선사편수회는 일본인의 시각으로 조선의 역사를 편찬하겠다는 의도였다. 곧 일본어로 된 조선의 역사가 씌여지는 것이다. 고도의 식민지 통치전략이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사편수회에 많은 청년학자들을 가입시켰고 나중에 그들이 친일사학을 이끌어 가는 핵심 멤버가 됩니다." - 신복룡 교수
1924년 일제는 또 하나의 계획을 추진한다. 경성제국대학 설립이 그것이다.
친일관리를 양성한다는 일차적인 의도 외에 대학을 바탕으로 친일관변조선학을 뿌리내리고 폭넓게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녹아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제의 식민사학을 일부 지식층들이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20년대에 소위 민족개량론, 민족개조론이 나왔습니다. 이광수 등 일부 지식층들이 식민사관을 인정을 하고 많은 젊은 생도들이 그것에 동조도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안확 선생님의 선택은 특이하지요. 식민사관과 대결하시며 그런 행로를 걸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한영우 교수
이러한 친일관변사학에 위기감을 느낀 안확은 다양한 국학 저술로 맞섰다.
1920년 자각론으로 독립운동 진영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1923년 조선문학사로 최초의 국문학사를 썼으며 1923 조선문명사를 통해 식민사관을 극복하려고 하셨고 나아가 1923 조선육해군사를 통해 비롯해 음악, 미술 관련 저술까지 내놓으며 안확은 일제의 관학화에 홀로 맞섰던 것이다.
"바로 이 국민의 탄생, 민족의 탄생을 우리 민족이 쌓아올린 업적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밝혀내고,
또 미래 어떻게 발현시켜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획득하겠는가에 주목하셨습니다." - 최원식 교수, 인하대 국문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국학을 선택한 안확. 그는 자신의 저술을 공개적으로 예고했다.
그의 예고는 친일관변학에 대한 선전포고였으며 그의 저술은 친일관변학에 대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안확은 자신의 저술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9권의 저술과 174편의 각종 논문과 글을 남깁니다.
이 모든 1. 자산 안확의 항일투쟁 '조선사 바로 세우기'!~
조선을 강제 병합한 지 10여 년. 일제는 조선에 대한 식민정책을 무단에서 문화정치로 전환한다. 이는 조선을 영원히 지배하기 위한 고도의 식민지 지배 정책이었다.
이 시기 한 조선인 학자가 자신이 저술할 책의 목록을 미리 공개했다. 그것은 일생을 건 집필 계획이었다.
집필 계획을 공개한 주인공은 자산 안확. 조선민족사, 조선문학사, 조선문명사 등 조선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었다.
'조선사 바로 세우기' 그것은 자산 안확의 항일투쟁이었다.
"자산 안확, 여러분은 역사를 바로 세우려고 했던 이 안확이란 인물을 아십니까? 들어는 보셨습니까?
여기 사진이 있습니다. 날카로운 눈매와 빛나는 눈, 그리고 반듯한 자세, 그야말로 꼿꼿한 선비의 모습을 하시고 계신데요, 안확 선생은 1886년 1946년에 돌아가셨습니다.
구한말에 태어나 해방후 돌아가셨으니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것입니다. 왕조의 멸망기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안확 선생님은 수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런데도 이 안확선생님은 그동안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최근에야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남긴 업적에 비해 관심은 상대적으로 낮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데 자산이라는 호를 가져서 안자산이라고 불렸던 안확!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지난 1965년 대구의 어느 고서점.
대구교육대학의 김창규 교수는 자주 드나들던 그곳에서 깜짝 놀랄만한 경험을 한다. 뒤섞여 있던 고서적 속에서 한 권의 책을 발견한다.
자산 안확의 조선문학사 원본(1922)
"(이 책을 그 때 얼마 주고 샀습니까?)" "얼마인지 기억이 안 나는데 상당히 싸게 샀습니다."
이 책은 김창규 교수에게 상당히 큰 충격을 줬다.
"그 때 참 놀라웠죠. 조선문학사를 1922년에 썼다는 것과 그것을 발견한 것이 상당히 놀라웠죠. 이런 문학사가 나왔는가 저는 전혀 몰랐거든요." - 김창규 명예교수, 대구교육대학교 국어교육과
내용 또한 놀라운 것이었다.
<조선문학사>는 상고시대부터 1900년대 당시까지 조선의 모든 문학을 시기별로 정리해놓고 있었다.
1946년 권상로 조선문학사. 1948년 이명선 조선문학사. 그 때까지 알려진 문학사 서적은 해방 이후인 1946년부터 출간된 것들이었다.
그 보다 앞서 출간된 문학책은 1937년 조윤제의 조선시가사강이 전부였다. 안확의 조선문학사는 그 보다 15년 앞서 출간된 것이다.
그렇다면 안확의 조선문학사는 왜 묻혀 있었을까?
"정기 대학을 졸업해서 학문을 닦고 자기 제자를 둔 사람 같으면 모르겠는데 제자가 없다는 것에서 안자산이 묻히게 된 첫째 이유이고,
그 다음 두번째로는 경성제국대학이 출발됨으로써 오로지 자기들만이 조선문학사에 있어서만이 최고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자산 같은 경우는 신식 정규과정을 못밟았기 때문에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에 의해 안자산의 책이 무시 당하게 된거죠." - 김창규 명예교수
우리나라 최초로 국문학사를 정리한 자산 안확. 그의 또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는 곳을 찾았다.
경기도 남양주시 동북아음악연구소.
한국의 전통음악과 아시아 각국의 전통음악을 연구하는 이곳엔 다양한 악기들과 함께 국악 관련 자료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대학에서 국학 강의를 하며 국악 연구를 하고 있는 권오성 교수. 그 역시 놀라운 경험을 했다.
70년대 중반, 국악 자료를 정리하던 중 새로운 자료를 발견한 것이다. 아악을 비롯한 조선의 전통음악에 대해 정리한 논문집. 십여 편의 국악 논문의 저자, 그는 안확이었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국악연구에도 뚜렷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조선음악의 연구 - 안확>
"그 당시로써는 그런 음악에 대한 연구가 없었고 또 한학자이시지만 근대적 음악에 굉장히 눈을 많이 돌리신 분이시고 문헌자료도 지금도 볼 수 없는 많은 문헌자료를 보셨단 말이예요. 음악의 문헌사에 있어 후학들에게 굉장히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셨습니다." - 권오성 교수, 한양대 음악대학
동아일보 자료실. 1923년 1월 11일자 신문 기사에서 안확 관련 기사를 볼 수 있었다. 기사는 안확의 출판기념회를 알리고 있었다.
출판된 책은 <조선문명사>, 그리고 그것은 최초의 출판기념회였다. 이렇듯 안확은 당대 문학에의 중심인물이었던 것이다.
최초로 기념회를 열만큼 주목을 받았던 <조선문명사>.
이 책은 최초의 근대적 정치사로써 조선시대 정치에 대해 탁월한 분석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40여 년 전 안확의 조선문학사를 처음 발견한 김창규 교수. 이후 그는 안확의 자료 수집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국내의 여러 곳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많은 안확 관련 자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자산의 저술들. 그의 저술은 매우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조선의 문학, 조선의 음악, 조선의 문명사, 조선의 예술, 심지어 조선의 무술까지 그의 연구는 성과를 남기고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자산의 저술은 9권의 책과 140여 편의 논문이 있다.
다양한 분야의 저술을 남긴 안확. 그는 왜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인 것일까?
"한국에 관한 것이면 뭐든지 연구해서 하나의 국학으로 종합해서 그렇게 함으로써 전문가가 되는 게 아니고 한국의 정수를 체득해서 그것을 전수해서 자기가 살았던 시대, 나라가 멸망해버린 상황에서 다시 살리기 위한 뿌리를 대는 그런 국학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최원식 교수, 인하대 국문과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 다양한 분야에 연구와 저술을 남긴 자산 안확. 그 중심엔 조선이 있었다. 그는 식민시대를 조선의 학문으로 극복하려고 한 국학자였다.
2. 독립운동가 안확!~ 조선국권회복단 활동과 고종망명계획!~
"내가 그 때 수하동 소학교에서 배운 것을 생각하면.. 어린아이로 또한 토론과 연설을 하여 선생의 칭찬을 받은 일이 생각나노라...
나도 서북방에 주유하면서 학교를 세움이 몇 곳이요 직접 교수하기도 여러 해에 걸친지라..."
이걸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소학교인 수하동 소학교를 다녔고 또 독립협회에 참여해 연설도 했고 서북방 지역에 학교를 세우고 가르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안확은 일본의 니혼대학에서 2년 동안 정치학 공부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봤을 때 그는 근대적인 교육을 받은 신지식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평범한 지식인이었을까요?
고종황제의 사진입니다. 1918년 이회영, 오세창, 한용운, 이상재 등 아주 쟁쟁한 인물들은 고종을 해외로 망명시키려 합니다. 그 고종 망명 계획을 추진한 인물 중에 자산 안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안확, 그는 앉아서 글만 쓰는 지식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산 안확은 우리 독립운동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요?
경기도 용인시. 수소문 끝에 자산 안확의 후손을 만날 수 있었다.
할아버지 안확은 낡은 사진첩 속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장남 결혼식 때 친지들과 찍은 사진, 그리고 동료들과 찍은 흑백사진. 몇 장만 남았을 뿐 의외로 그에 대한 자료는 적었다.
"여기 저기 다니시며 활동을 하셨으므로 집에는 거의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7~8세였을 때 집으로 들어오셔서 제가 10살 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가족들조차도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모를 정도로 생활을 하셨습니다." - 안동호(66), 안확의 손자
그렇다면 안확은 무엇을 하고 다녔을까?
<조선국권회복단 - 안일암사건>
국회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일제시대 경상북도 경찰부가 만든 자료집에서 안확의 활동을 추적할 수 있었다.
폭도사편집자료 고등경찰요사.
안확이 관련된 사건은 일명 '조선국권회복단' 일명 '안일암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사건일까?
대구광역시 앞산
안일암은 대구 외곽에 있는 작은 사찰인데 이곳이 바로 조선국권회복단이 결성된 곳이다.
지난 1915년 2월 윤상태, 이시영 등 이 지역 인사들이 요양과 병문안을 핑계로 모여 조선국권회복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던 것이다.
"조선국권회복단 요원들은 대부분 대구를 중심으로 경상남북도 일대의 부호라든가, 중산층, 또는 계몽주의적인 인물, 신학문을 이수한 사람들, 양반 유생들 이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 권대웅 교수, 대경대 한국사
일본 경찰이 조사를 통해 밝혀낸 조선국권회복단의 조직도다.
통령에 윤상태,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 박영모 등 그리고 마산지부장은 안확이었다.
1910년대 마산항은 일본과의 무역이 활발한 곳으로 상업이 발달한 지방도시였다.
일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는 원동상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상업활동을 빙자해 군자금을 모으고, 그것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던 것이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하고 부호들에게 쉽게 접근해서 활동할 수 있는 그런 조직으로써 상업조직만 한 것이 없었다고 보여집니다.
이러한 상업활동을 통해서 그들은 국내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 그리고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연계되어서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습니다." - 권대웅 교수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정보와 자금을 모아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조직이었다.
그들은 독립진정서를 입안해 영문으로 번역, 상해 등으로 보냈다. 그들의 독립의지를 해외에 널리 알린 것이다.
또한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부호와 상인 등 재력가들과 끊임없이 접촉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상해 임시정부와 연결하고 만주의 소항령의 노백린 장군에게 자금을 지원하는 등 해외의 독립운동단체들과 연계되어 있었다.
"조선국권회복단에 대한 일본 경찰 기록들을 살펴보면 스물 일곱, 여덟명에게 일일히 상해를 갔다왔느냐 묻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국권회복단의 자금이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되었다고 일경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죠." - 차민기 강사, 경남대 국문과
일본 경찰은 조선국권회복단의 활동을 예의 주시했다. 그러나 국권회복단의 활동은 결국 '상업시찰'로 되어 있다.
안확의 활동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건이 있다. 고종망명계획이 그것이다.
한국아나키즘운동사.
1918년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고종을 북경으로 옮겨 망명정부를 세울 계획을 수립한다. 이회영, 오세창, 한용운, 이시영 등이 참여한 이 계획에 안확도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우당 이회영이 중심이 된 이 계획은 고종의 동의하에 북경에 행궁까지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성공하지 못한다. 고종이 갑작스레 의문의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고종의 장례는 온 국민의 의혹과 분노 속에 진행되었다. 고종의 독살설이 퍼진 가운데 진행된 장례식은 곧 이어 3.1운동으로 이어졌다.
결국 3.1운동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경남대학교 도서관. 당시 안확이 활동했던 국권회복단의 자료가 있다.
고등경찰관계적록 기록에 진동 헌병주재소 우편소 파괴 기록이 그것이다.
또 다른 기록에 따르면 당시 마산지부 변상태 등이 이 사건을 주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3.1운동 당시 격렬한 항일투쟁으로 기록된 진동 헌병주재소 사건.
1919년 4월 3일. 만세 시위 군중이 당시 창원군 진동면에 헌병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여덟 명이 사망했다.
그후 많은 관련자들이 체포되거나 수배되는데 대부분의 국권회복단 단원들과 함께 안확 역시 수배령이 내려진다. 그후 그는 약 2년간의 도피생활을 한다.
3. 마산에서의 근대교육활동, 일제에 맞선 실력배양운동!~
"그후 수배령이 해제되자 안확은 다시 서울로 나타납니다. 3.1운동 이후 젊은 독립운동가들이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하게 되는데요, 안확 역시 다른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서울로 상경한 것입니다.
그리고 전국의 청년조직을 하나로 묶은 조선청년연합회 기관지인 아성의 편집장과 지방부장직을 맡습니다. 이 지방부장직을 맡은 것은 아마도 여전히 마산과의 연결을 꾀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안확은 서울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닌 서울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마산으로 가서 활동하게 되었을까요? 독립운동가이자 국학자인 안확이 마산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마산은 내륙으로 깊숙이 들어온 바다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그 마산 앞바다에 떠 있는 돝섬.
마산을 상징하는 이 섬엔 높다란 기념비가 하나 서 있다. 마산을 대표하는 노산 이은상의 시비다.
노산은 마산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마산에서 자랐다. 그가 남긴 회고록 무상. 여기에 자산 안확은 노산의 잊을 수 없는 스승으로 묘사되어 있다.
안확은 시국에 대한 울분을 견디지 못한 뜨거운 스승이었으며 학생들에게 민족성을 일깨워준 깨어있는 스승이었다.
안확은 마산 창신학교의 교사였던 것이다.
1910년대 안확은 이 학교의 교사로 있으면서 국어와 국사를 비롯, 여러 과목을 가르쳤다. 시인 이은상과 국어학자로 잘 알려진 이극로 등이 바로 그의 제자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안확은 이 학교의 교사가 되었을까?
창신학교는 1908년 호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따라서 사립 창신학교는 일제의 감시를 벗어나 독자적인 신교육을 펼칠 수 있었다.
1911년 안확의 나이 26세, 그는 창신학교를 찾았다.
일본의 간섭에서 벗어나 근대적인 민족교육을 시킬 수 있는 학교를 선택했던 것이다.
그는 8년 동안 창신학교에 재직하면서 어린 조선학생들에게 한글과 조선의 역사 그리고 다양한 신교육을 시킨다. 인재양성을 시킨 것이다.
"우리 창신학교가 경남에서 개교하기 이전에는 한문 서당교육 밖에 없었거든요. 한문교육만 있던 당시에 창신학교가 개교를 해서 수학을 가르키고 영어를 가르키고 했으니까 안확선생님은 이 교육을 통해 인재를 양성하고 인재가 양성되어야 독립운동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보신 것입니다." - 강병도 학장, 창신대학
이러한 창신학교는 3.1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일제 경찰의 기록에 따르면 3월 3일 창신학교가 중심이 된 대규모 만세운동이 일어난다.
이 만세운동에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의 교사들이 사표를 내고 학생들을 데리고 참여했다. 학교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4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일어난 3월 3일에 만세운동. 이 운동은 이후 7~8차례 더 일어난 마산 대규모 만세운동의 시발점이 되었다.
"자산을 떼놓고 본다면 국권회복단의 국내활동의 그 모습들, 지식기반활동들, 이런 것들이 일선 교단에서 고스란히 보여졌다고 생각됩니다." - 차민기 강사
자산은 실력배양을 중시했다. 그래서 학생들의 체육활동을 다른 공부 못지않게 강조했다.
창신90년사. 그는 창신학교에 경남 최초로 야구부와 축구부를 신설했다. 오랜 유교적인 전통이 남아있던 당시에는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참 암울하고 신문화가 없던 시대인데 신식교육을 열심히 시키면서 그러면서 학생들은 공부만 열심히 해선 안 되고 나라를 구하기 위해선 체력을 튼튼히 하기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당시에 그 지방에 없었던 축구도 도입하고 야구도 도입했습니다." - 강병도 학장
안확은 건강한 신체가 나라를 구하는 원동력이 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창신학교에 축구부와 야구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공이 없었다. 그래서 연습 때는 짚으로 만든 짚공을 사용하고 정식 경기 때에야 선교사들이 구해준 가죽공을 이용했다. 대구 기성학교와 자주 친선경기를 펼쳤는데 이 두 학교의 경기는 지방의 명물이 되었다.
짚공은 새끼줄을 정당한 굵기로 꼬아 마치 멍석을 엮듯이 모양을 잡아나간다. 그런 다음 속에 짚을 채워 넣으면 짚공이 완성된다. 이런 짚공은 60년대까지 일부 농촌에서 볼 수 있었다.
안확은 축구공 뿐만 아니라 야구공도 그렇게 만들어 사용했다. 창신학교의 교감까지 맡은 안확은 학교의 교가까지도 직접 작사, 작곡했다.
그러나 어려움이 있었다. 안확과 학교의 민족교육은 일제와 마찰을 일으켰고 이는 학교 재정에 어려움을 불러왔다.
1914년 이를 극복하기 위해 안확은 또 하나의 결심을 한다. 그것은 야외 시국강연이었다.
안확은 활을 쏘던 추산정이란 곳에서 대시민시국강연을 열었다. 최초의 시국강연회였다. 그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사자후를 토했다.
1914년 5월 17일
"이제 이 나라를 찾고 이 핍박받는 민족을 일인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오직 하나의 길은 교육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비굴했고 우리는 무지했으며 우리는 힘이 약하니 자라는 청소년들에게는 지식을 주고 용기를 주어 다시 힘을 내어 잃었던 나라를 되찾게 해야 합니다.
일본인 학교는 시설도 좋고 학교도 큽니다. 그러나 시설이 외형상 일본인 학교보다 좋지 않은 우리 창신학교로 자녀를 보내주십시요.
그리하여 우리 자녀들이 민족혼을 배우고 나라와 조국을 배워서 잃었던 나라를 되찾는데 큰 일꾼이 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
4. 일제 식민사관, 조선사편수회에 맞선 안확의 항일투쟁!~ 조선문명사, 조선음악사... 국학 연구!~
"마산창신학교 교사이자 비밀결사조직의 지역책임자였던 안확은 국학 관련 연구와 저술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안확을 높게 평가하는 것은 그의 다양한 저술량 때문만이 아닙니다.
저술에 임하는 태도와 내용면에서도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의 저서 중에 하나인 <조선문명사>입니다. 일명 조선정치사라고도 하는데요, 안확의 철학과 사상이 가장 잘 집약되었다고 평가받는 이 책을 위해 그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안확선생님을 직접 모셔 보겠습니다.
"자산선생님. 이 책을 집필하기 위해 정말 온몸으로 하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는데요?"
"자료수집을 위해 정말 많이 돌아다녔지요. 고서적이 있는 곳이라면 국내 서원이나 사가의 장서각 등 어디든지 다녔지요.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도서관도 다녔습니다. 일본의 우에노도서관, 중국 북경의 관립장서각, 상해의 참서루 등 자료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갔습니다."
"그럼 섭렵해놓으신 자료도 정말 엄청 나겠군요?"
"기록해놓은 것을 보니 <조선문명사>를 위해 참고한 책이 대략 8,500여 권 되는 것 같습니다."
"8,500권이요? 정말 엄청난 자료입니다. 대단하십니다. 그렇다면 책만 참고하신 것인가요?"
"아무래도 기록자료는 한계가 있지요. 그래서 실제 인물을 많이 만났습니다. 조선의 행정관리들, 아전 출신의 관리들을 많이 만나 자료를 입수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노력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치열한 노력을 한 자산의 이 책은 그 내용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습니다.
이 조선문명사는 조선의 역사를 재조명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해서 당시의 식민사관에 정면 대응을 했던 것입니다.
식민사관에 맞서 조선의 역사관을 재정립한 안확. 그의 역사관을 보시겠습니다."
안확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80년대에 시작됐다. 한영우 교수는 안확을 신채호, 박은식과 함께 우리 역사학을 정립을 중요한 역사학자로 보고 있다.
즉 고대사는 신채호, 현대사는 박은식, 그리고 중,근세사는 안확이 뛰어나다고 평가한 것이다.
안확은 많은 부분 신채호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켰다. 따라서 많은 학설을 공유하고 있지만 자의적인 부분도 있다.
"차이점이 있다면 신채호 선생은 영토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래서 영토가 넓었던 고구려 역사에 대해 굉장히 중요시하고 높이 평가했는데,
안확은 어떻게 차이가 나느냐 하면 영토문제보다 민권개념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민권문제에 있어 신채호 선생과 견해가 많이 달라지지요." - 한영우 교수, 서울대 국사학과
특히 삼국통일에 대해 안확과 신채호는 다른 견해를 보였다.
신채호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봤다. 관련 인물들도 혹평을 했다.
즉 김춘추는 당의 의관과 연호를 쓰며 사대주의의 병균을 전파한 자로, 김유신은 재용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한 정치가며, 그 평생의 대공이 전쟁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인국을 난한 자라고 평하고 있다.
또한 신채호는 신라가 당이라는 외세를 끌여들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바람에 영토가 줄어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안확은 견해가 달랐다.
신라를 찬란한 문화를 가진 나라, 뛰어난 제도를 가진 나라로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화랑도 등으로 충분히 통일을 할 수 있는 나라로 보고 있다.
"영토보다는 민권, 제도에 주목을 했거든요. 그런 시각에서 본다면 신라의 가치가 재평가 될 수 있단 말이죠. 그러다보니까 신라의 문화 뿐만 아니라 만주에 대한 애착만 버린다면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가 살아나는 게 당연한 것이죠. 그런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죠." - 한영우 교수
안확은 삼국 당시 민족의 개념이 없었으므로 신라가 민족을 배반했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한국정쟁지(1907) - 시데하라 아끼라
그러나 안확의 가장 큰 공적은 무엇보다 일본인 학자들의 식민사관에 맞선 것이다.
일제 당시 시데하라 아끼라는 조선 시대 정치에 대해 '당쟁(黨爭)'이라는 말을 만들어가며 비판을 했다.
그는 조선의 정치를 권력을 향한 음모와 암살의 정치로 규정했다. 또한 정치가들은 음험하며 권력을 위해 골육상쟁도 서슴치 않았다고 악평을 하고 있다.
"시데하라 아끼라가 하고자 하는 말의 핵심은 당쟁이 조선의 망국을 불렸다는 거죠. 당쟁을 통해서 조선은 통치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그 망국의 자리에 일본이 대신해서 들어가는 것이지, 결코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거나 전쟁을 일으킨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주장입니다." - 신복룡 교수, 건국대 정치행정학부
붕당사화의 검토(1926) - 호소이 하지메
한 발 더 나아가 호소이 하지메 같은 일본학자는 조선인은 피가 더러운 종족이라는 말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그래서 싸울 수밖에 없는 종족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결국 식민사관에 의하면 조선은 당쟁으로 망할 수밖에 없는 나라라는 것이다. 끊임없이 당파가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쇠락했기에 일본이 대신 통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시 일본이 학자 대부분의 주장이었다.
이런 악의적인 식민사관에 대해 안확은 정면으로 대응했다.
그는 조선의 정치를 진보적이고 진화적인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일본인이 규정한 '당파' 역시 정치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주장했다.
조선시대 이율곡은 이미 동인은 젊고 진취적인 당으로, 서인은 노련하고 신중한 당으로 파악했다.
안확은 이를 계승함으로 노론과 북인은 진보적인 자유당으로, 소론과 남인은 신중한 보수당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그들의 대립은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당쟁이 심했다는 것은 그만큼 조정에서 정치적 논쟁이 첨예하고 대립적이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그들 사이 긴장감은 돌았을지도 모르지만 정적의 눈초리 앞에서 부패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컨데 조선 왕정에서 당쟁이 가장 심했던 것이 숙종 때인데 역설적으로 숙종 시대에는 백성들이 가장 살기 좋은 성군의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니고 당쟁이 심할수록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렸다는 역설적 상황이 가능합니다." - 신복룡 교수, 건국대 정치행정학부
안확은 조선 왕조 5백년을 유지한 정치의 근간이 바로 당파정치라고 주장했다. 정치세력간의 견제와 대립이 조선 정치를 유지,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당파로 인해 조선 정치가 발전했다, 왜 그러냐면 당파가 활성화되면서 정치적 자유가 신장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당파 정쟁이 심화되면서 서민들의 정치 참여가 높아졌다 이런 점을 들 수 있구요, 그리고 또 하나는 당파의 견제 때문에 오히려 정치의 중용이 지켜질 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 한영우 교수
안확은 당파정치의 장점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당쟁이 심할수록 왕권이 축소되어 정치적 자유가 늘어났고, 그래서 서민 계층까지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봤다. 또한 붕당간의 대립으로 타협적인 정치가 가능하다고 봤다.
그렇다면 안확은 조선왕조의 멸망 원인을 무엇으로 파악했을까? 그것은 정조 사후 안동김씨와 풍양조씨에 의한 '세도정치'였다.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섰던 안확. 그는 조선의 정치가 당쟁으로 발전했고 당쟁이 없어서 망했다고 봤다.
"이전의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고구려에 너무 집착하다보니까 고구려의 영토를 잃어버린 후대, 고려나 조선은 굉장히 후퇴된 것으로 봤어요.
그것은 영토를 가지고 봤을 때 그런 것이고 민권이나 정치사적 관점을 가지고 봤을 때는 무리한 해석이거는요.
안확 선생님은 민권을 중시했기 때문에 정치제도 발달 과정에 자치제도를 굉장히 존중했어요.
말하자면 민권이 자치제로 나타나고 그 자치제가 단계적으로 어떻게 발전해나가는가 이런 면에 주목을 했죠. 바꿔 말씀드리면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에서 민주화 과정의 토착화,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 한영우 교수
조선의 역사가 식민지를 부른 퇴보가 아니라 민권이 신장된 정치제도 발달과정으로 본 안확.
지금은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었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역사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렇게 연구에 몰두했던 안확은 1923년 그의 나이 서른 다섯에 일생일대의 선언을 합니다.
자, 이쪽을 한 번 보실까요?
안확 선생님의 저술 목록인데, 여기 보면 안자산 저술목록,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앞으로 이런 이런 책을 쓰겠노라 공개적으로 선언을 한 것입니다.
이미 쓴 책은 제목 위에 하얀 점을 찍어 표시를 했고 또 앞으로 쓸 책은 제목 위에 검은 점을 찍어 표시를 했습니다.
보통의 경우 저술 계획이 있다면 조용히 진행을 시킬텐데 당시 안확은 이런 저술을 하겠다고 미리 공개선언을 한 것입니다.
자, 미리 이렇게 방대한 저술을 하겠다고 공개한 이유가 뭔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1925년 7월. 안확은 또 하나의 놀라운 제안을 한다.
아악정리지의견.
우리의 아악을 정리하겠다고 이왕직아악부에 낸 것이다. 당시 조선총독부 산하에 이왕직아악부는 조선시대 궁중음악 아악의 전통을 어렵게, 그리고 유일하게 이어가고 있는 곳이었다.
안확은 이왕직아악부에 촉탁으로 들어가 아무도 하지 않던 조선 음악 정리를 하겠다고 자청했다.
이 의견서에서 아악은 절륜한 음악이며 그 전통을 이어가는데 자신이 한몫 하겠다고 밝혔다.
"아악은 모든 곡조와 음악이 절륜하지 않은 것이 없다. 내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사업진척에 완전을 더 할 것이고..."
그는 특히 중국여행에서 중국의 음악과 악기를 직접 살펴본 후 우리 음악의 우수성을 확인했고 그래서 보존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했다.
안확이 봤을 때 1920년대 중국은 전통음악이 거의 사라지는 추세였다. 심지어 전통악기조차 사라지고 있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편종, 편경, 뇌도, 영도, 특경 등 전통악기가 많이 남아있으며 이러한 악기로 연주하는 종묘제례악과 문묘제례악은 세계적으로 가치있는 것으로 봤다. 이런 논리로 아악을 정리하게 된 안확은 이후 이왕직아악부에서 4년간 근무하게 된다.
그렇다면 안확이 이처럼 아악연구를 자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문학사를 쓰셨으니까, 조선음악사, 조선미술사를 전부 쓰실려고 계획을 세우셔서 조선음악사를 쓸 자료를 모으신 거죠. 그래서 악보를 모아 그 계획을 행하셨죠." - 권오성 교수, 한양대 음악대학
안확의 목표는 뚜렷했다. 조선의 전통음악을 연구하고 보존하겠다는 것이었다. 궁극적으로는 조선음악사 집필이었다.
안확의 다방면의 글쓰기는 20대에 한글에 관련된 곳에서 비롯되었다.
1917년 학생들을 가르치며 <조선문법>을 썼고 특히 3.1운동 즈음엔 독립을 고취하는 계몽적인 글을 썼다.
<조선무사영웅전>. 이 책은 조선 고유의 무술을 찾아내 그것을 실력배양으로 이끌기 위해 쓴 책이다. 책 안에는 무사도의 유래와 총술, 공술, 격검, 유술 등 여러 무술을 정리하고 있다.
결국 안확은 이 책을 통해 용감, 인내, 단결 등 항일투쟁에 필요한 덕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921년 조선총독부는 또 하나의 계획을 세운다. 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를 조직한 것이다.
여기엔 일본인 역사학자를 필두로 다수의 조선인 학자를 참가시켰다. 조선사편수회는 일본인의 시각으로 조선의 역사를 편찬하겠다는 의도였다. 곧 일본어로 된 조선의 역사가 씌여지는 것이다. 고도의 식민지 통치전략이었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의 역사를 만든다는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를 역사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사편수회에 많은 청년학자들을 가입시켰고 나중에 그들이 친일사학을 이끌어 가는 핵심 멤버가 됩니다." - 신복룡 교수
1924년 일제는 또 하나의 계획을 추진한다. 경성제국대학 설립이 그것이다.
친일관리를 양성한다는 일차적인 의도 외에 대학을 바탕으로 친일관변조선학을 뿌리내리고 폭넓게 확산시키려는 의도가 녹아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제의 식민사학을 일부 지식층들이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20년대에 소위 민족개량론, 민족개조론이 나왔습니다. 이광수 등 일부 지식층들이 식민사관을 인정을 하고 많은 젊은 생도들이 그것에 동조도 했습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안확 선생님의 선택은 특이하지요. 식민사관과 대결하시며 그런 행로를 걸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 한영우 교수
이러한 친일관변사학에 위기감을 느낀 안확은 다양한 국학 저술로 맞섰다.
1920년 자각론으로 독립운동 진영의 새로운 길을 제시했고 1923년 조선문학사로 최초의 국문학사를 썼으며 1923 조선문명사를 통해 식민사관을 극복하려고 하셨고 나아가 1923 조선육해군사를 통해 비롯해 음악, 미술 관련 저술까지 내놓으며 안확은 일제의 관학화에 홀로 맞섰던 것이다.
"바로 이 국민의 탄생, 민족의 탄생을 우리 민족이 쌓아올린 업적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밝혀내고,
또 미래 어떻게 발현시켜서 우리 민족의 독립을 획득하겠는가에 주목하셨습니다." - 최원식 교수, 인하대 국문과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미래를 제시하기 위해 국학을 선택한 안확. 그는 자신의 저술을 공개적으로 예고했다.
그의 예고는 친일관변학에 대한 선전포고였으며 그의 저술은 친일관변학에 대한 투쟁이었던 것이다.
"안확은 자신의 저술 목표를 완전히 달성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9권의 저술과 174편의 각종 논문과 글을 남깁니다.
이 모든 것을 독학으로 이루어냅니다. 그의 뒤를 이을 후배도 제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최근에야 밝혀지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사를 정립한 국학자. 그러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자산 안확.
그는 일제 말기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을 때도 외로운 국학의 길을 걸었던 진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문화관광부는 2003년 1월의 문화인물로 이 자산 안확을 선정했습니다. 일제시대 격동기를 살면서 우리 학문 속에서 민족의 활로를 찾으려 애썼던 안확.
당시 학문의 흐름과는 달리 우리 전통을 계승하는데 노력했고 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또 이것이 아니더라도 자산 안확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 그가 남긴 업적은 민족의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입니다.
것을 독학으로 이루어냅니다. 그의 뒤를 이을 후배도 제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오랫동안 묻혀있다가 최근에야 밝혀지게 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조선사를 정립한 국학자. 그러면서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자산 안확.
그는 일제 말기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의 길을 걸었을 때도 외로운 국학의 길을 걸었던 진정한 지식인이었습니다.
문화관광부는 2003년 1월의 문화인물로 이 자산 안확을 선정했습니다. 일제시대 격동기를 살면서 우리 학문 속에서 민족의 활로를 찾으려 애썼던 안확.
당시 학문의 흐름과는 달리 우리 전통을 계승하는데 노력했고 또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또 이것이 아니더라도 자산 안확에 대한 관심과 평가가 새로워지기를 바랍니다.......퍼온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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