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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문학관 아카데미 12기-12차시 습작품(9월 9일 월 용)
1. 세컨드 하우스 꿈을 꾸다/ 권진희
나의 로망은 언덕위의 푸른 세컨드 하우스 다.
샤운드 오브 뮤직에 나오는 주인공인 해군 폰 트랩가의 명문집안의 큰저택은 아니 드라도 큽직큽직한 넓고 큰 푸른잔디가 펼쳐져 있고 큰아름드리 나무들이 우거지고
정원에는 예쁜꽃들과 야생화가 넓게 펼쳐져 있고
거실 한켠에는 벽난로가 있어 체크무늬 쇼울을 걸친 중년부인네들이 사랑하는이들과 함께 따뜻한 차와 빵을 굽는
낭만이 가득한 그런집을 꿈꾸었다.
20대 때 내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황토로 지은 오래된 기와집을 샀다. 집 앞마당 길갓쪽에는 우사로 사용했던곳이 있었고 그당시는 비워둔터라 카페나 공방으로 꾸며도 손색없을 만큼 반듯하고 넓고 큰 공간이 준비되어 있었다ㆍ
그위쪽은 지대가 한 1미터 정도 더높았서 그턱을 경계로 수석 과 야생화로 예쁘게 단장하여 푸른 잔디를 심고 한곁에는 주차장으로 꾸미면 될것 같았다ㆍ
또 지대가 약간 높게 집의 안채가 기역자로 지어져 있었다.
전형적인 남향집이라 양지 밝았다.
가끔 비가오는날이면 아이들과 아궁이에 불을 지펴
고구마를 구워먹기도 했었다. 고구마가 익어갈때 쯤 아련히 떠오르는 군고구마에 대한 추억이 생각났다.할머니가 아궁이에 고구마를구워 주셨는데 옆에 있는 친구랑 한개씩 나누어 주셨다. 다 내꺼라고 욕심부리다가 할머니께서 휘두루시는 부지깽이의 아픈 맛을 봐야했다. 그 할머니의 사랑이 눈물나게 그립다.
그곳에 가면 부자가 된것 같았고 마음에는 평화가 있었고
아무런 터치도 받지 않았고 가을이면 뒷산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도토리를 주워 도토리묵을 만들어 먹기도 했었다.
집뒷쪽으로 100미터정도 올라가면 수다사 라는 절이 있었는데 구미와선산이 합병되면서
그곳을 관광지로 개발하고자 많은 예산을 들여 개발된
덕분에 그집의 환경은 더좋아졌다.
시원한 계곡을 찾아온 관광객들 무리속에 한산하게
나의 동네 내집마당처럼 산책을 즐기기도 했었다.
그집 뒷마당에는 복숭아. 자두. 밤나무. 감나무. 두릅나무등등. .
이름도 다기억 못할만큼 여러가지 과실수와 나무들 있었고 장독대 뒤편은 병풍처럼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ㆍ
내 여유가 주어지면 멋진 정원을 꾸미고자 마당 한곁에 작은 산처럼 큰정원석들과 수석들을 모아놓았고 옛골동품들
큰놋쇠솥ㆍ큰단지.탈곡기. 다림이돌.맺돌.국수판대기.ㆍ바람풍로 등. .들도 모아서 한쪽 창고에 넣어두었다.
사는것이 바빠 자주갈수 없었다.
내 사업체 일이 바빠지면서 찾아가는 주기가 멀어지기 시작 하여 한번씩 갈때마다 골동품들이 없어지기 시작하면서 몇년이 지나자 무쇠솥까지도 떼어가다 못해 방문짝. 부엌 문에 달려 있는 문고리까지 다 떼어 가버렸다.
그리하여 그큰집은 뼈대와 지붕만 남아 있는 우수깡스런 폐가 가 되어버렸다. 내마음만 앞서 꿈꾸어온
언덕위의 푸른 집은 10년만에 막을
내렸다. 나의 소망은 이루진 못해지만 꿈을꾸고
내마음을 그곳에 두고 사랑했으므로 행복했던것 같다.
2. 이런 사람 /변미순
내 아들과 딸에게 그들이 짝을 만날 때 이 다섯가지를 살펴보라고 말한다. 상대의 얼굴, 집안, 경제성, 직업 등이 부부로 살아갈 짝을 만나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랫동안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고 가장 큰 힘이 되어주어야할 사람이다. 세월 속에 그를 아버지로, 그녀를 어머니로 부르게될 자식들이 부모를 훌륭하게 생각할 수 있도록 하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꽃 이름을 많이 아는 사람
잘 웃는 사람
책 읽은 사람
아이들을 좋아하는 사람
욕하지 않는 사람
꽃을 좋아해야 그 이름을 많이 안다. 삶이 팍팍할수록 오히려 여유있는 감성을 가진 사람들이 행복지수가 높다. 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하여야 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니 가능하면 여유를 알고 감성적인 사람이면 더 좋지 않겠니. 경제적으로 불경기 일수록, 힘들 때 일수록 여유롭고 감성적인 사람이 잘 견딘다.
잘 웃는 사람은 사는 방법이 긍정적인 사람이다. 어떤 일도 받아들이기에 따라 극복하는 방법이 많이 다르더라. 가능하면 긍정적인 사람이 불러들이는 좋은 기운이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 역할을 하더라.
책을 통해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는 삶이면 더 좋겠다. 자신의 아집에 갇혀 소극적이고 퇴보적인 행동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더 힘들어 진다. 지혜롭고 현명해지려 노력하는 사람, 발전적인 사람이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고 너에게 큰 의지가 되기도 할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과 악으로 분리 설명하는 철학자까지는 아니더라도 본성이 선한 사람이면 좋겠다. 아이를 보고 웃고 좋아하는 사람은 아직 순수함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선함이 오래 갈 수 있도록 서로 응원하고 지켜가기를 바란다.
요즘 젊은이들이 힘든 생활로 인한 스트레스 해소를 욕으로 하는가 보더라. 하지만 어떤 욕도 스트레스 해소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품위를 깎아 내릴 뿐이다. 남들이 다 한다고해서 맹목적으로 그냥 따라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 욕을 하지 않는 사람을 자세히 보렴. 그 누구보다 예의있는 사람일거다. 예절을 아는 사람은 가까운 아니 먼 사이일지라도 상대방을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을 누구나 함께하고 싶어하고, 내 자식이 부모를 자랑스러워하고, 함께 극복해 가면서 서로에게 에너지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상대이면 우리의 삶은 외롭지 않을 것이야. 너에게 조금 더 이른 나이에 사람을 보는 눈을 키워주고 싶었다. 살아가면서 얻어지는 지혜를 다음 세대에게 잘 전달해야할 어른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여유, 긍정, 노력, 순수, 예의. 이 다섯가지가 분명히 너에게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라 믿는다.
3. 시래기 /최경희
1)시래기를 지진다. 암벽 틈에서도 생명이 자라듯 내 삶의 틈에서 자란 시래기의 노래는 가을비를 맞은 늑골처럼 선득선득하다. 멸치 몇 마리와 함께 된장에 버무려 뭉근히 고운다. 푹 지진 시래기 찜이 식탁 위에 오른다. 피어오른 몇 가닥의 김이 지나간 시간의 도정을 불러다 앉힌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시래기 찜 냄새가 스산한 늑골을 따뜻하게 다독인다. 늦가을 국화꽃 앞에서 애잔하게 울던 벌처럼 나는 저녁 식탁의 시래기 찜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삼킨다.
2)삶이 아슴해지는 날이면 나는 시래기를 삶는다. 가마솥에 장작불로 시래기를 고우던 아버지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아버지와 시래기는 겉모습이나 그 역할이 많이도 닮았다. 갖은 풍파를 오롯이 몸으로 막아내며 식솔들을 건사하던 아버지나, 볼품없고 거칠어도 뜨끈하게 속까지 채워주는 시래기나, 세상에 이만한 닮음이 또 있을까 싶다.
3)요즘의 시래기는 웰빙바람을 타고 재배되어 상품화되었다. 비타민과 미네랄, 식이섬유가 풍부하여 현대인들에게 건강 먹거리로 각광받고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래기는 무를 채취하고 버려지는 무청이나 배추를 다듬고 남은 겉껍질이다. 서울 사람들은 우거지, 경상도 사람들은 시래기라고 부른다. 시래기는 주로 늦가을에 말려뒀다가 봄나물이 나올 때까지 나물, 찌개, 국으로 즐겨 먹는 식재료이다. 추운 날 시락국에 뜨신 밥을 말아 후루룩 후루룩 한 그릇 비우고 나면 언 속이 다 풀렸다. 가슴 속에 이런 기억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을까.
4)시래기를 생각하면 떠 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황제팽귄들의 겨울나기다. 평균기온 60~70도의 칼로 에이는듯한 추위에 맞서서 둥그렇게 스크럼을 짜고, 바깥에서 안으로 조금씩 이동하며 서로에게 의지한 채 겨울을 난다. 이것을 허들링이라고 한다. 시래기도 이와 유사하다. 가장 바깥에서 세찬 바람을 온몸으로 막아내고 흙먼지를 오롯이 받아낸다. 겨우 잎 몇 장으로 세상 풍파와 치열하게 맞선다. 그런 헌신으로 인해 고소하고 뽀얀 배추의 속살을 튼실하게 키워 낸다.
5)나에게도 펭귄의 혹독한 겨울나기 같은 경험이 있다. 삶의 여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복병 없는 삶이 없듯이 우리 가족에게도 한 차례 을씨년이 깊숙이 침범했을 때가 있었다. 21세기에 맞닥뜨린 기막힌 보릿고개를 시래기와 함께 넘었다. 꼴도 보기 싫어야 마땅할 시래기가 지금 우리 가족들의 식탁에서 가장 사랑받는 먹거리로 자리매김했다. 아마 꽁꽁 얼어붙었던 가슴속을 함께 녹여간 동지애 같은 것이리라. 펭귄들이 허들링으로 모진 겨울을 이겨냈듯이 한동안 시래기는 우리 가족의 분절된 삶에 스크럼을 짜고 튼튼한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6)우리 삶에서도 시래기와 같은 역할을 누군가가 하기 때문에 사회가 건강하게 굴러가는 것이리라. 세상의 변방에서 서리와 눈을 맞아가며 묵묵히 헌신하는 이들이 있다. 우리가 무심히 살아가는 터전의 울타리를 불철주야 지켜주는 분들의 손길이 있다. 세상이 점점 각박하고 혼란스럽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의 힘은 더욱 필요하리라. 마지막 보루에서 사회든 가족이든 꽉 붙들어주는 시래기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마음으로나마 고마움을 전해 본다.
7)예전에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지금 우리 가족에게는 남편이 그러할 것이다. 가족이라는 배추 속살을 키워내기 위하여 오늘도 그는 손깍지를 단단히 끼고 허들링을 한다. 가장의 자리에서 역할을 다하는 그의 등도 강인한 시래기처럼 믿음직하고 아름답게 여물어갈 것이다.
8)시래기 익어가는 냄새가 정겹다. 겨울철에 소죽 퍼낸 솥을 대충 훑어 헹구고 시래기를 한 솥 고우시던 아버지가 구수한 냄새에 오버랩된다. 소 혓바닥 같은 거친 시래기가 아파트 주방 가스렌지 위에서 부드럽게 익어간다. 그립다, 그립다.
4. 청량대운도 / 오수미
마음의 배낭을 짊어지고 구름을 따라 청송군 진보면 신촌리 청량산으로 향한다. 청송에도 청량산이 있다. ‘군립 청송 야송미술관’에 야송 이원좌 화백의 청량대운도가 그것이다. 아파트 23층을 눕힌 길이 46m, 높이 6.7m의 세계에서 가장 큰 그림이 있다. 경북 봉화의 청량산을 미술관에 통째로 옮겨놓은, 대작이 그 위엄을 자랑한다. 세밀한 붓 터치로 생명을 얻은 산맥은 거침이 없다. 자연의 경외감을 절로 느끼게 한다.
지난 년 가을 청량대운도를 처음 만났다. 첫눈에 다 담아낼 수 없었던 아쉬움으로 다시 찾은 미술관! 미술관에 바람이 분다. 저 산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봉우리로부터 바람이 불어온다. 청량대운도에는 11개의 봉우리만이 우뚝 솟아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찾아 고개를 돌리니 그림에는 없는 청량산 12번째 봉우리 축융봉에서 하얀 백발을 휘날리며 야송이 서 있다. 그는 자신이 품은 청량산을 조용히 바라본다. 힘차게 춤추던 팔순 노화백의 붓이 이제는 멈추었다. 그림만 그리면 제일 행복하다던 노화백은 이제 현세에선 붓을 잡지 않는다. 지난 4월 27일, 야송은 청량산의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나는 그의 전설을 부족하나마 활자로 남기고 싶다. 청량대운도 작품 안에 숨 쉬는 청량산으로 스며들고 싶다. 지금 같으면 드론을 띄워 청량산의 곳곳을 샅샅이 담아 그림으로 옮기면 그만이지만, 1989년 그의 나이 지천명, 그의 눈은 천리안이 되어야 했고, 붓을 잡은 손은 거침없이 능선을 이어나갔다. 축융봉에 움막을 짓고 수도 없이 산을 들락거리며 청량대운도의 스케치를 담아냈다. 영혼을 걸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청량대운도를 그리는 데는 전지 400매 분량의 화선지가 쓰였다 한다. 쉽게 말하면 전지 한 장의 크기는 우리가 흔히 쓰는 A4용지 16장 정도다. 즉, 6400장의 A4용지가 쓰였다는 말이다. 보통 수필 한편을 쓸 때 13매 정도의 분량을 쓰는 걸로 따지면 대략 493편 정도의 수필을 써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실로 어마어마하다. 감히 청량대운도를 이렇게 짧은 글로 이야기함이 부끄럽다.
수소문 끝에 봉화의 양곡창고를 얻어 화선지 전지 400장을 펼칠 수 있었다. 1992년 4월 드디어 7m 대나무 막대에 목탄을 매어 스케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야송은 청량대운도를 작업하는 180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썼다. ‘작가가 하는 일은 1할도 안 되는 역할이요, 나머지 9할은 동시대에 살아 숨 쉬는 수많은 사람의 몫이란 사실이다’라며 도움 주는 이들에 대한 고마움을 기록했고 매일을 정화수와 촛불을 밝혀 지성을 다해 흐트러진 마음을 잡았다.
청량대운도는 신의 기운을 입은 그림이다. 그의 일기장을 보면 목탄 스케치 둘째 날에 꿈을 꾸고 만수향을 피우고 기도를 하는데 두 줄기 연기가 신묘하게 산 능선과 계곡을 그리며 운무까지 감지되게 흘러가 창고 안이 그야말로 신비하게 느껴졌다 했다. 또 하루는 일이 있어 화실을 비웠는데 촛불이 주변의 것들을 깨끗이 태웠더란다. 그런데, 누군가가 물을 부어 끈 듯 그림에는 근접도 못한 채 꺼져 있더라는 것이다. 모두들 놀라움을 거듭하며 어찌 신이 없다 할 수 있느냐 했고, 야송은 그림 이외는 다른 일을 하지 말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이후 바깥출입은 절제하고 청량대운도에 더욱 열중했다 한다.
청량대운도에는 수 억겁의 시간이 그의 붓 하나로 표현되었다.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과 수려한 산세가 제각각 다른 시간의 옷을 입고 멈추었다. 수만의 물방울이 모여 청량대운도의 계곡마다 스며든 안개의 모습은 정말 장관이다. 마치 청량산이 하늘에 잠긴 느낌이랄까. 안갯속에 잠긴 청량사의 모습이 한줄기 빛처럼 꼬리를 달고 청량정사를 둘러 육덕지게 봉우리마다 퍼진다. 서로 다른 고물의 시루떡을 쌓아놓은 것 같은 어풍대를 오르는 세 사람의 모습이 신기하기 그지없다. 어느 봉우리를 향해 가는 것인지 등 뒤에 진 배낭이 한가득처럼 보인다. 하루의 어느 때가 멈춘 것 인지 알 수는 없지만 경일봉의 숲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다. 청량대운도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노라니 산을 훑고 바람이 사방에서 불어오는 것 같이 시원하다.
지독히도 외로웠던 시간에 마침표를 찍었던 날, 대작에 걸맞게 야송은 온몸으로 새긴 낙관으로 주변의 걱정과 우려가 단지 기우였음을 여실히 증명해 보였다. 그가 아니었다면 끝까지 해낼 수 있었을까! 그렇게 세계 유일의 초대작 진경산수화, 청량대운도는 탄생되었다. 야송의 노력의 먹이 가슴으로 번져와 내 삶을 돌아보게 한다.
그림밖에 몰랐던 인생, 누군가는 미련하다 할지 모른다. 그림 앞에 좌절했던 시간도 있었다. 그것들이 이제는 추억으로 바뀌어 고향을 보고 품고 그려온, 묵묵히 걸어온 그의 길을 따라 청송의 청량산 ‘청량대운도’의 전설이 되어 길이 전해지리라.
5. 아버지의 사랑 / 서인수
아버지의 사랑은 사진 모습이 남아있어 내 영혼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앨범에 사진을 보고 품격/품위를 기억하고 있어 지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다정한 모습은 친한 친구들과 야외 소풍 가서 유쾌하게 웃는 자태였다. 마음을 차분히 갖고 신중하게 행동하지만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인터넷 문화와 교감하게 되었다.
인터넷 시대에 디지털로 이뤄지는 샘터를 만나서 더욱 자세한 모습을 보게 되었다. 디지털 정보는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 정기/정신 energy를 활용하는데 도움이 되어 소망하는 것이 상상한 대로 현실화되고 있었다. 흔히 들을 수 있는 생각의 힘도 기도의 힘과 같이 중성미자 도움으로 작용하는 것이 언젠가 증명이되리라 본다.
아버지는 소중하여도 6.25 전쟁에 의해서 양극화되는 이념 분쟁으로 암살되었다. 6.25 전쟁을 더욱 비참하게 만든 결정적 사건은 선량한 양민 대량 암살사건이었다. 암살당해 억울하지만 인과응보로 마음 편하게 생각해야 된다. 정/기/신 기운으로 인격(인품/인덕)을 도야하는 수준 있는 사람은 정신연령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수많은 느낌을 읽어내어도 슬픔은 잊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술해가야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한 마음으로 인터넷문화 문명을 발전시키도록 열심히 노력하면 빛을 찬미/찬양하고 승승장구하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어 잘 사는 기회가 오는 것이다. 밤하늘 빛을 찬미하는 감각은 보기보다 달라서 잘하면 열정이 가득한 현실이 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 어릴 때 어머니 아버지의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신체를 건강하게 키워주었으니 자신 있게/재미있게 행사/행동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이다. 경쟁무대에 승운과 행운은 마음에 준비가 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라 양심이 지고지순하면 행복한 삶으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양심을 참되게 닦으면 어떠한 힘보다도 현명해지기 때문에 마음 밭의 근본에 대한 정의를 도모하여야 용기 있게 행동할 수 있고 이치에 밝아져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행복은 삶의 보물 상자나 다름없어 성실하게 일할수록 자신감을 얻게 되고, 거기다 경제력이 모이게 되면 세계여행을 일주하면서 아기자기한 인생으로 살아가게 된다.
가정에 따뜻한 인정을 주고받는 가족은 맥박수가 정상이면 건강한 것이다. 건강에 중요한 것은 사랑이라 두뇌가 제대로 작동해야 활기가 있다. 활기가 가득하면 이룰 수 있어 지성이면 감천이라 열정에 꽃피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 사랑을 최고로 아는 덕분에 정기 정신 energy를 끊임없이 수련(수양/수행)하게 되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열정이 정기 정신 energy에 실마리가 되어 충전되는 기분이다. 활력소를 심오하게 궁구하고 지혜안/천리안을 발견하면 선각자가 나타나게 된다. 선각자의 도움으로 번영하고 번창해야 좋은 일이 발생하게 되어 문명 세계를 활짝 열어보게 된다. 아버지 사랑으로 가화만사성하면 가정 발전이 이뤄지기 마련이다.
6.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 부른다/윤필성
오늘 돌아온 당좌 수표가 사장님 통장에 잔액 부족 으로. 결재 되지 못해서 1998. 2. 01. 일 자로 최종 부도 처리 되었음을 통보 합니다. 향후 발생 하는 모든 민 형사상 책임은 전적으로 사장님께 있음을 알려 드릴수 밖에 없어 대단히 유감 입니다".
십년 넘게 거래한 은행 담당자의 목소리가 쇠망치가 되어 머리를 치는 순간. 내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기어이 터지고 말았구나. 지금 까지 쌓아 올린 공든 탑이 여기서 허무 하게 무너 지는 구나. 이런 끝을 보려고 그 긴 세월을 부질 없이 애만 썼구나. 나하고는 상관 없는 내게는 절대로 일어 나지 않을 것만 같은 일이 지금 일어 나고 말았구나!"
은행문을 나서는 내 다리는 힘이 풀려 휘청거렸고 온통 뿌연 횟가루 같은 것이 내 시야를 가리우고 있었으며. 귀에서는 "윙" 하는 파열음이 진동 하고 있었다.
어떻게 정신 없이 퍼 마시고. 어디를 헤매 었는지 수은 빛이 명멸 하는 낯선 가로등 밑에서 . 가물 거리며 스러져 가는 의식의 한쪽 끝자락을부여 잡고 축 처진 육신을 그렇게 찬 시멘트 바닥에 뉘었다.
"이건 말도 않돼! 나는 지금 끔찍한 악몽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러나 나는 그 지독한 악몽에서 끝까지 깨어 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절망의 심연 속으로 끝간데 없이 침몰 하고 있었다. 신문과 방송 에서는 연일 국가 부도 사태를 알렸고.사업자와 자영업자 들은 죽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저마다 밑빠진 독에 물 붓기로 절박한 심정으로 닥치는 대로 자금을 끌어 수표를 막았다. 도산 하는 업체가 날로 늘어 났고. 파산. 실직자들의 눈물을TV에서 앞다투어 방영 했다. 삶을 비관한 자살자가 속출 했고 평범한 가정이 깨어 지고.가출자가 늘어만갔고 말이 살아 있는 것이지 사는게 아니었다.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져 버렸다.
내가 부도가 났다고 전해지자. 거래 은행은 그 즉시로 대출금 회수에 들어 갔고 사업체와 땅이며 집을 압류 했다.돈을 빌려준 사채업자 들은 막무가내로 득달을 했고. 인정 사정 이고 예의고 없었다. 돈 앞에서는 모두가 야차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돈은 그렇게 부모 형제를 친척 친구를 찣어 놓고 갈라 놓고 있었다.
그때. 내가 할수 있는 것이라고는 채권자 들을 피해 숨어 다니는 것 뿐이었다. 전화기는 아예 내려 놓았고 벨소리 에도 가슴이 철렁 내려 않았다. 밤에는 신발도 감추고 커텐을 내리고 불도 마음대로 켤수 없었다. 그것은 죽음 보다 더한 고통의 연속 이었다.
무정한게.세상 인심 이라 했던가. 평소 가깝게 지내던 회사 사장 들이며 거래처 사람 들이 나만 보면 슬금 슬금 자리를 피했다.죽고 못살던 지인들도 하나 둘씩 멀어져 갔다 처음엔 술사주고 밥사주며 위로와 격려해주더니 두번째는 차 한잔으로 세번째는 전화도 받지않았다. 그렇게 나는 그들에게 잊혀져 가고 있었다.재물이란 그렇게 부질 없는 것인가. 내가 부도가 나자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없어 지고 말았다.없어 져도 그렇게 철저히 없어 질수 있다는게 신기 하기 까지 했다. 그리고 뒤이어 빈곤의 불편이 고통으로 다가 왔다.
이세상 천지에 우리 네식구가 거주할 보금자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친척이 있는 지금의 D시로 야반 도주 하다 시피 몸만 간신히 빠져 나왔다. 주민 등록이 말소 되고.채권자 들이 무서워 애들은 몇달간 학교에도 갈수 없었다. 내 잘못으로 인해 죄 없는 아내와 자식들이 끝없이 고통 받고 있었고.견디기 힘든 절망감 만이 길길이 날뛰는 무력감 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으며 파산의 댓가를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고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채권자들을 피해 육개월을 숨어 지냈다 유서를 품속에 넣고 죽음의 그림자를 달고 다녔다.
피를 말리는 괴로움 속에 마냥 이러고 있을수만 없어서 경찰서에 자수를 했다.기소 중지자 신분으로는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어쨌든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가 거두어야 했다.
"피고인 에게 부정 수표 단속법 법률 위반 죄로 징역 일년 이월의 실형을 선고 합니다."
재판장의 형 선고를 듣는 순간. 나는 조용히 눈을 감아 버렸다. 곧 이어 새까만 어둠이 안개 처럼 밀려 왔다.
그로부터 나는 눈을 감고 인고의 세월을 잊기로 했다. 철창 안의세상은. 바깥 세상과는 또 다른 .질서와 법칙이 적용 되고 유지 되는. 이해 할려고 해야만 이해가 되는. 또 다른 한 세상을 알게 해준 특별한 체험 이기도 했다. 한때는 왜 하필 나였느냐고 그분께 까지 억지 항변도 해 보았지만 매일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마음도 사그라져 갔다.내가 가진 물질은 다 잃었지만. 그 잃은 양만큼 가족의 사랑 으로 채워 주신 것으로 치자면그분은 정말 공평 하신 분이 셨다.
내가 영어의 몸이 되자. 아내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그 돈으로 학비를 대고 가장이 없는 가정을 꾸리고 내 옥 바라지를 했다. 면회와서 환히 웃어 보이는 날은 그만큼 힘든 날 이었음을. 아내의 손에 반지가 보이지 않는 날은 그것을 팔아 영치금을 넣어 주었음을. 출소 하고 나서 알았다. 부러울것 없이 곱게 살던 아내가 고생으로 밥 말아 먹듯이 하는 것을 생각 하면 돌아서 눈물 겨웠다. 베게에 눈물 자국이 차츰 선명해 보이면서 더디게 나마 그곳의 시간도 가고 있었다.
형기를 마치고 출소를 했다. 그것도 징역 이라고. 바깥 세상과 단절된 시간 만큼 사회 복귀에 몸도 마음도 더디 걸렸다. 무엇이든 할것 같았던 처음의 의욕도 시간이 갈수록 무뎌지고 위축되어만 갔다.내 앞에 버티고 선 현실의 벽은. 그곳 담벼락 보다 높게만 보였다.
이력서를 들고 뚸어 다녔다. 기술이 없단다. 나이가 많단다. 썩 괜찮은 곳은 신원 증명서가 필요 하단다.무더위와 함께 나도 그렇게 곰 삭아 가고 있었다. 방 구석에 틀어 박혀 술로 울분을 삭이고 있을때 아내가 공공 근로 신청을 해보란다.내 상식 으로는 갈때 까지 간 사람이 할수 있는 최후의 일자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이 절망의 늪에서 벗어 나야 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람 들도 고만 고만한 아픈 사연들을 가슴 깊히 묻고 사는 사람들 이었다. 맡은 일은 산불 감시원. 하루 종일 산속을 미친 듯이 헤집고 다녔다. 산이 있어 오르는게 아니라 산 밖에 오를 데가 없어서 산을 올랐다.
그렇게 한 겨울을 산과 씨름 하며 보내었다. 산을 타면서 나 자신과 치열한 싸움을 끊임 없이 했다.
그럼에도 내게는 아무 것도 달라 진게 없었다. 달라질만한 조건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루 벌어서 하루 버티는 고달픈 생활의 연속 이었지만. 그래도 감사하며 살려고 마음 줄을 다잡았다. 몆번의 이직을 한끝에 조그만 섬유 공장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근로를 했다. 일을 마치고 돌아 가는 밤 하늘의 별들이 왜그리도 차갑게 보이던지!
애들이 형편을 아는지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하고 착해서 부모 속도 못 썩힌다.자식 농사 잘 짓는것 보다 큰 축복이 없단다. 관에서는 여러 가지 빈민 구제책을 내 놓고 있지만 우리 같은 사람 에겐 그림의 떡이다 나처럼 사업 하다가 부도난 사람은영세민 축에도 못 끼고 실업자 축에도 못든다.저소득층 지원 대상자도 안되고 신용 불량자 라서 금융 혜택은 꿈도 못꾼다. 이것이 파산한 사람들의가슴 아픈 현실이다.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면 겁부터 난다. 문 앞에 수북히 쌓여 있는 통고장 독촉장 최고장 세무서 은행 카드사...오늘은 또 어느 기관에서 서슬 퍼런 압류 통고장 붉은 글씨로 쓴 형사 고소장이 날아와 있을까.어느 채권자가 전화로 악담을 퍼부어 댔을까. 내가슴도 이렇게 타는데 아내의 가슴 인들 오죽 했을까! 지금 아내는 고혈압약 에다가 심장약 까지 복용 하고 있다.
귀가때 나는 광고지를 가지고 집에 들어 온다 이젠 아예 습관처럼 익숙해져 버렸다. 그 속에는 세상이 있고 애환이 있고 눈물이 있다.거기에 걸맞게 희망이 있다.뜬 구름 잡는 망상이 아니라 절실한.부르짖음을 들을수 있다.
내가 기대고 비빌 언덕은 희망이란 이 언덕 뿐이다. 요란한 재기도 바라지 않는다. 거창한성공도 꿈꾸지 않는다. 땀과 눈물의 정당한 댓가를 받고 싶을 뿐이다.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애써 가는 길을 바꾸지도 않겠다. 희망이란 반찬이 있는한 지금의 밥상은 결코 초라 하지 않을 것이다.
힘들때 나는 이 글을 읽는다.
"의욕이 있어도 그것을 실행 할수 있는 처지가 아니거나 실행하는데 필요한 힘을 갖지 못했다면 그사람을 비난 할수 없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실행 할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비난 받아 마땅 하다.(비델라우스). 오늘도 희망이란 보석을 캐기 위해 험한 근로의 자갈 밭에서 땀 방울을 흘린다. 우리는 그것을 감히 "희망"이라 부른다.
그대들의 IMF는 끝났을지 몰라도 나에겐 아직도 현재진행형 이다. 나는 집앞 길 모퉁이 전봇대에 꽃힌 광고지를 글자 하나 놓치지 않고 훓어 내려 가는 후줄근한 잠바 차림을 한 중년 남자의.무겁게 처진 듯한 어깨 위로 희망 같은 한줄기 햇살이 쏟아 지고 있음을 본다. 저 남자 에게 신이 함께 하소서!
그로부터. 이십년이 지났고.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창원 병원 에서 근무하는 둘째 아들 에게서 얼마전에 문자를 하나 받았다.AB혈액형 답게 엉뚱한 데가 있는 애다.
"저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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