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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섭원부여는 동부여 멸, 즉 고구려 무휼왕시 복속후, 가섭원부여로..
절대 "국"을 쓰지 않았습니다, 즉 신라에 국을 한다면, 신국이지 신라국이라고 낮출 이유가 없습니다.
삼국사[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신라본기로 본기라고 하여 황제국의 벼리로 삼국을 공히 천자국으로 높여서 쓰고 있습니다, 마한세가, 번한세가라는 세가가 아니고 삼국이 공히, 본기입니다.
을파소의 역사이야기을파소 2006/12/09 15:00
김부식을 위한 변명.. 참으로 이상한 변명으로, 최고의 한국사서로 정사인 삼국사가 삼국사기로, 내용면에서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데, 정치적인 목적때문에 삼국사가 왜 삼국사기가 되었을까?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을 위한 변명 | ||||
<삼국사>는 김부식의 이름을 빌린 조선왕조의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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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기록이 절대 권력자와 수구 세력의 야합에 의해 수정(修訂), 삭제(削除)되었다는 역사적 진실 앞에 서면 모골이 송연할 수밖에 없다.
후대를 위한 기록이 수정, 삭제되어 황폐화되었다. 역사에 대한 수구세력의 비상식적이고 무자비한 폭거(暴擧)요, 폭력이다. 진정한 역사에 대한 일말의 배려심도 없이 사라졌다. 수구세력이 휘두른 칼날에 베인 역사의 상처는 600백 여 년 동안 사대(事大)에 묻혀 지나는 줄 몰랐다. 이제 심장에서 핏물이 배 나오고 나서야 겨우 깨달음으로 다가오고 있음이다.
사대주의? 과연 누구를 위한 사대일까? 중국 누구? 당나라? 고려에서 송나라? 엿같은 송나라 이야기로 판을 친 이가 우암이라는 송나라 송가 시열이지, 고려시대에 과연 송나라 황제폐하 하고 놀고 있었을까? 천자국 고려에서? 누구? 금나라? 누구? 거란? 원나라/ 누구냐고? 이 멍청한 이 성계와 이 방원 똘마니야.
사대주의면 누구, 한나라? 당나라? 누구?
오대십국시대 907~960 | 요 916~1125 | ||||||
송 960~1279 | |||||||
북송 960~1127 | 서하 1038~1227 | ||||||
남송 1127~1279 | 금 1115~1234 | ||||||
원 1271~1368 |
요나라? 하나밖에 없네, 송나라[북송-남송]을 사모했다고, 고려에서/??
웃긴 이야기로 미쳤냐고? 송나라 더러운 주희를 위해서? 남송인데? 정말 고려가 송나라 만세? 기자조선 만세하여 모화사상에 찌들었냐고? 누구를 말하냐고? 지금, 요순시대? 당나라 이가, 개같은 도교 노자 이가? 우똥이가의 당나라 잇가?이냐고? 누구냐고? 주체를 말해야지? 그냥 사대주의 모화사상, 누가 왜, 무엇때문에, 고려 천자국이 원에게 침략당했다고 원나라 대국만세했다고? 그게 중화사상이냐고? 엿소리하지 말자고, 쏭나라가 무슨 금나라에게도 패했지, 조의선인 보고 오줌을 줄줄 싼 주희의 이야기, 절대 까마귀하고는 놀지 말라고 凶鳥라고..
웃겨서, 정말 뭘 이야기하더라도 주체가 송나라를 높이 사서, 아이고 송나라 만세, 해야지 송나라 그게 뭔데? 무슨 은나라 패망후, 송나라 쏭가라고, 송나라 왕의 성은?
960년 조광윤이 오대십국 시대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로부터 선양을 받아 개봉(카이펑)에 도읍하여 나라를 세웠다.
송나라 왕의 성은 좃가 趙匡胤[조광윤].. 아하 이좃시대 좃국의 좃나라가 송나라 趙匡胤이라고, 웃겨서 제1등공신 한양 조가가 그래 송나라 황제였다고 받들어 총 하라고, 왜, 뭐때문에 이좃시대나 그렇지 고려시대에 무슨 송나라 쏭, 쫏하냐고?
일제는 왜 ‘삼국사’를 ‘삼국사기’로 번역했나? |
"일본서기 하부 사서인 것처럼 폄하… '삼국사기'라 왜곡 가능성" |
표지에는 분명 ‘삼국사’라고 되어 있는데 ‘삼국사기’라고 부르는 이유가 뭘까?
어느 곳에도 명쾌한 설명은 없다. 삼국사기라는 명칭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14년 일본 사람이 일본어로 번역한 ‘삼국사기 역’ 이고, 이것이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로 이어져 최남선, 이병도의 책도 이를 따랐다.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이 별 생각 없이 삼국사기라고 불렀고, 지금도 그렇다. 문제는 ‘삼국사’가 ‘삼국사기’로 바뀐 데는 일제의 의도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또한 일제가 펴낸 ‘조선사’ 1권 범례에서 “삼국사기 정덕본의 고전간행회영인본을 사료 및 저본으로 활용했다”고 밝혔다. 일본인들은 ‘삼국사기’라고 불렀다는 말이고, 이마니시 류 밑에서 조선사편수회 수사관보 및 촉탁으로 근무했던 이병도가 ‘삼국사기’라고 지칭한 것은 당연했다.
이마니시 류가 없는 것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지만 다수 기록이 ‘삼국사’인데도 일본서기의 하부 사서인 것처럼 폄하하려는 목적에 따라 소수 자료를 내세워 ‘삼국사기’라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옳고 그름보다 목적을 따지는 게 일제 사학자들의 수법이다.
삼국사를 삼국사기로 폄훼하고 수정 가필 조작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그 내용이 아니고, 전부 신라를 신한조선이 아닌 어디서 흉노, 잡놈이 고조선, 신한조선인이 아니고, 무슨 잡놈들이 한반도에 들어와, 고구려 대 고구려제국을 멸망시키고 백제? 전라도 백제를 멸망시켰다고 쪽발이 왜백제론으로 征韓論의 논리호 한반도내에 신라는? 아주 깨알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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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역사교과서 임나일본부를 표시한 일본의 역사교과서. 가야국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다. |
일본교과서대로 신라/삼한/ 신한을 아예 갱상도로 가야보다도 못한 나라로, 그리고 조것이 당나라와 합심해서 대 고구려를 폐망시켰다, 나쁜 시아키들이고 욕을 욕을 하고 지랄만신이다, 전혀 개념이 없다, 가락 김씨와 신라 김씨는 전혀 다른 민족인가? 인도인이냐고? 정말? 아니다, 金성을 쓸 수 있던 민족은 쇠를 만든 알타이부족 티우씨다,
씨도 몰라서 아니, 신라는 왕의 이름도 2자다, 티우씨 좌오지천왕, 포희씨 태우의천왕처럼 씨족으로 2글자를 쓰고 있다, 천자국이다, 천자는 씨를 쓰지 성을 쓰지 않는다, 황제국, 웃기고 자빠졌다, 원리와 원칙을 지키는 고리타분한 면이 있어도 그래도, 그게 동방예의지국의 예법이다, 눌지, 진흥, 진덕, 진지, 선덕, 경순왕까지 모두 씨로 왕, 천자는 2글자다, 도리어 이씨좃선이 1자로 무슨 황제는 1자라고 해서 전주 이씨는 지금도 1자를 쓰고 있다, 왕족은 1자라고, 아니고 황제국은 그래 1자로 쓰든 말든 알아서 해라, 신라, 고려는 천자국으로 천자국은 천문력법을 쓰고 재위기간이다,
④ 우리의 자국의식과 고유성을 명확히 하였다 : 중국의 예법으로 우리나라의 법속을 규제할 수 없다는 논찬과 신라의 방언을 고집하였다.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의 신라고유 왕명과 이벌찬, 파진찬 등의 관명을 직서하였다. 신라시대의 근친혼이나 동성혼을 중국의 예의와 법속으로 다루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우리나라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또 삼국을 아(我)와 삼국시대에 사용한 훙년칭년법(薨年稱年法) 즉 즉위년칭원법(卽位年稱元法 : 전왕이 서거한 해, 즉 신왕 즉위의 해를 원년으로) 사용하였다.
즉위년칭원법을 사용하였다, 이는 년호법의 즉위년칭원으로 고리짝부터 사용한 것이고 년호는 건원을 쓰지 않았다, 건원/ 그게 뭐? 우리는 천문력법 갑자년호가 있기에 당나라 연호 등을 쓰지 않는다, 김부식은 도리어 당나라 년호를 쓴 것에 대해, 질타를 한 사람이다, 천자국에 대한 개념과 천문력법을 알고 있던 사람이지, 황제국, 칭제건원에 대해서는 반역자로 보고 묘청의 난은 자주정신이 아닌, 중국 모화사상으로 난으로 규정하여 진압을 한 사림이다, 칭제건원이 더 이상한 것이다고 말한 당당한 천자국, 천문력법 등 삼국사기에는 천문력, 천문현상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남아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언론인이 마치 삼국사기 조작된 부분을 가지고 역겹다, 사대주의라고 하는데, 이것은 전체적인 사기의 특징이 아니고 이가 병신도와 쪽발이가 가필 수정한 것으로 오역하여 말한 것이다.
한겨레 권태호기자..???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몇 번이나 구역질이 날뻔한 적이 있었다. 어떨 때는 머리가 어질어질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가 이토록 수치스러운 것인가 하고.
“거룩할사 당나라 큰 업을 개발하여/황가의 정치 경륜 높고도 창성하구료/싸움을 끝맺어 천하를 안정하고/전임금 잇받아 문교를 닦았도다/(…)/산악의 기운받아 재상들 태어나고/임금님은 충량한 신하만을 믿으시네/삼황으로 뭉치어 한 덕이 되니/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이 부분의 핵심은 누구 역사서냐? 지금? 우리 당나라, "我 唐" 우리 당나라, 하면 상식적으로 우리는 우리라고 합니다, 즉 우리 당나라 우리 한국하면, 뭐라고 써야 하나? 吾桓.. 吾 당나라, 라고 합니다, 我라고 하는 것은 朕이라는 말로, 저런 쓸데없는 조작된 한문을 가지고, 누가 그래서, 라당전쟁 7년은 안하고, 그냥 주었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정치적인 사대주의 당나라에 김부식이 충성맹세라고 했냐고? 웃길래, 정말,
누가 저따위를 정사에 넣냐고? 왜곡하지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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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법흥왕 때부터 중국과 다른 별도의 연호를 써왔다. 그러나 진덕여왕 때에 이르러 신라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천자의 나라에 소속된 편방 소국은 사사로 연호를 이름지어 쓸 수 없는 것이다. 신라의 경우는 일심으로 중국을 섬기어 사행과 조공이 길에 끊이지 아니하면서도 법흥왕이 연호를 자칭하였으나 의심스러운 일이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서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제와서야(진덕여왕) 비로소 당의 연호를 시행하였으니 비록 마지못해 한 일이기는 하나 돌이켜 생각하면 허물을 지었지만 능히 고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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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호는 갑자년호로, 천문력법을 삼국사기에 전부 쓰고 있다는 것을 밝힙니다, 문구수정으로, 김부식은 진덕여왕때 당나라 연호를 쓴 것에 대해, 질타한 것으로 천자의 나라는 신라고 고려지, 황제국이면 황제국이라고 쓰지 천자국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즉 신라는 천자국인데, 본기인데, 왜 중국의 당나라 연호를 따라 썼냐고, 태종? 이세민이 꾸지람을 해서 진덕여왕때 당의 연호를 사용하니, 위대한 당나라? 엿까고 있다, 김부식이 신라인이면 당나라에게 충성한다고 나당전쟁을 하고 지랄이냐고? 능히 고쳤다고 하나, 엿소리다, 질타다, 건원칭제 및 엿같은 당나라 이가의 개소리는 왜 들어서 쓰냐고? 이에 태종 무열왕은 자체 년호로 태종을 쓴다, 즉 이게 살아생전에 쓰는 년호로 태종이라고 한다, 당고종이 당나라 년호를 쓰라고 하니, 웃기네, 알았다, 태종으로 하지 뭐, 내가 당태종 니 에비의 친구다, 고종아 알아들었느냐? 찍소리도 못했다, 지 애비 년호를 쓰니, 태종 무열대왕이다, 그게 외교술이다, 쓰라고 하니, 쓰는데 나는 니 애비친구다, 고로 태종 년호다, 이놈 고종이냐? 웃기고 있다, 퇴었지? 태종 무열대왕이시다, 그게 당당한 외교지, 누가 역겹냐고? 이 사발아.
"태종 무열왕 김춘추에 대해 <삼국사기>를 읽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삼국통일의 주역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보면,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고구려를 공격할 원군을 요청하러 신라의 사신으로 당에 갔을 때, 당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중국 옷을 입게 해달라”고 요청한 뒤, 중국 옷을 입고 아뢰었고, “신의 자식이 7형제가 있으니, 원컨대 성상(당 태종)의 곁을 시위케 하여 주소서”라며, 자기가 스스로 청해 아들을 중국에 사실상 볼모로 남겨두고 온다. 또다른 역사서에는 김춘추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 연개소문을 만났을 때, 연개소문이 “신라와 우리 고구려가 함께 하면 당나라가 무서울 게 무어냐?”며 “우리가 서로 싸우지 말고, 힘을 합쳐 당나라를 공격하자”고 할 때, 아무 말도 않고 이를 거절했다. 그의 머리 속에는 당나라에 빌붙어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뒤,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는 ‘노예의 평화’만이 있을 뿐이었다."
정말 이런 식으로 엿깔래? 이 개자식 이가 병도하고 쪽발이들, 이게 지금, 정사서에 들어갈 말이냐고? 왜 들어가는데? 들어갈 이유가 뭐냐고? 이 사발아, 조작의 끝판왕이다, 너는 그렇게 정사를 쓰냐고? 당나라 충성을 맹세하옵나이다, 그게 천자국에서 할 말이니? 완전 개벼다귀지 만들려고, 그런 식으로 비하해서 겨우 구걸하여 그래 청천강이남을 얻었다고, 이런 사발들, 삼국사기 지리지도 없어 고려사 지리지도 없어, 이건 뭐 있는게 있어야지, 고려지리지라고 한권이라도 있으면 고려강역이라도 알텐데, 전부 없다고 말살이다, 소실이다, 임진왜란때 불탔다, 아니 조선 지리지말고, 고려사에 대한 지리지는 항상 따라다녀야지, 왜 없어, 없긴, 저런 식으로 완전 김 부식을 개새끼 만들어놓고 신라인은 다 저렇다고?? 그래서 668년 고구려 패방후, 그래 신라땅을 다 내주었다는거냐고? 이 개병신 당나라 우똥 이가놈들아, 어디서 지금 나불나불, 현대판 신라인들, 이런 개백제놈이 놀고 있냐고? 당나라 이가 주제에, 어디서 신한지지에서 왜백제 당나라 이가 만세, 이런 우똥이를 봤나? 사발도 아예 똥통집안의 개백정이다, 어디서, 나라팔아먹고 없는 나라 팔고는 사서에 황칠이냐고? 그걸 보고 역겨워? 웃기고 있다, 이런 사발통들, 한겨레 웃기고 있다, 니네만 한겨레, 엘겨레냐고? 어디서 맨날 오 여호와 한겨레 하나님 신뿡이여, 웃기고 있다, 공산주의하냐고? 공산주의 진보사학자들이냐고? 한겨레가?
"또 삼국통일을 이룩했고,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며 바다에 자기를 묻게 한 문무왕. 그러나 <삼국사기> 문무왕편을 보면, 문무왕은 “교서를 내려 부인들도 중국 의상을 입게 했다”고 한다. 또 <삼국사기>에는 갑자기 뜬금없이 “문무왕 8년, 당으로부터 이후로는 여자를 헌납하지 말라는 칙지가 있었다”고 전한다. 그 이전까지는 당에 바치는 조공에 여자까지 포함됐던 것이다.
참으로 수치스런 역사요, 너무나 낯뜨거운 신라 왕들의 행태다."
정말 저 안동 권씨는 정말 수치스럽고 역겹다, 신라 삼한일통에 대해서 폄훼를 해도 지랄같이 하고 있다, 문무대왕의 업적은 당에 굴복하지 않고 7년 나당전쟁을 완수한 통일완수의 신라왕으로 동해바다의 용황이 되겠다, 뭐라고 이 사발아, "왜구"로부턴 나라를 지켜, 이런 개쌍놈의 새끼를 봣나? 아니 왜구라니, 이 시발아, 왜구가 뭔 새끼야.. 당과의 전쟁만 없었으면 왜구?가 아니고, 아예 일본열도를 확 다 쓸어버리겠다고 했구만, 무서워서 한마디도 못한 것들이 놀고 있다, 백제인이 가서 당장 칠 수나 있냐고? 이런 개자식들, "문무대왕' 수중능이 왜 거기 있냐고, 정말 "왜구"가 무서워서 지키겠다고 완전 소설을 써라, 더럽고 더러워서 안놀란다, 무슨 치우, 껴져라.
아무리 그래도 미화하라는 것이 아니고, 제발 왜곡 좀 하지마라.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고? 웃기고 있다, 쌍놈의 새끼 우똥이가하고 놀고 있다.
중국의상 니나 입어라, 신라는 그 자체가 비단이다, 비단 라, 실크가 新錦신금, 신라금, 신큼, 실큼, 실크라고 하는 페르시안 상인의 이야기도 모르고는 열라 떠든다, 견우과 직녀다, 이런 비단이 마치 중국 것인 줄 아는 바보가 있구나. 으메 똥구녁 아파라. 산동가서 똥한번 공동, 남녀구분없는 둥그런 똥판에서 똥한번 누고 와서 써라, 기자라면서.. 한번도 중국도 못가봤구나.. 절대 김부식이 말하는 송나라, 중국은 하찮은 문화라고 저문화, 아예 저급한 문화생활을 한다고, 신라는 상당히 깨끗한 똥통문화여, 앞뒤 가림판도 없는 남녀 공동화장실이 아니여, 아무리 그래도 기본 문화양식을 알고서 이야기해야지.. 어디서 남방 옷을 북방에서 솜옷도 아니고, 입어 입긴...
에잇 기분이 상당히 나쁘다, 저런 쓰레기 기자들이 하도 날뛰니, 무슨 주류강단이 제대로 된 역사학이라고 조선일보, 그게 민족의 정통지라고 웃겨서.. 언론의 80%가 기리사도교라, 주류 기리사도교 고대사 후원이요, 웃기고 있다. 정말, 신라는 까고 티우, 알타이 금씨는 왜 안까냐고? 왜? 무슨 티우가 마한조선인이냐? 웃기고 있다, 앞뒤도 모르고서는 흉노라고, 안동 권씨가 신라 금씨지 미친 놈. 지랄도 염병질 하고 있다, 그래 기리사독교면 다냐고? 웃기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정치내용이 아니다, 수리학, 국학, 천문학 등은 하나도 고치지 않았다 모르니까, 무장, 칼잽이가 알리가 없다, 구장산술, 방정식 등 그 수준이 엄청 높다, 천문력법만이 아니고 천문학의 수준은 현재보다도 더 높다고 할 수 있다, 첨성대는 천문, 별자리 관측이 아니고 낮에 태양관측소다, 음. 일식, 월식의 관계, 책력법 등 태양관측소로 365.25도의 태양관측소다, 즉 대낮에 금성이 태양에 가까워진다?? 알아요?
"일본인 학자들이 학자라는 탈을 쓰고 현시대에도 여전히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을 하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되리라고 본다. 그들은 과거 자신들의 조상들이 악랄하게 왜곡하고 조작한 우리의 역사가 자신들의 연구에 의해서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즉 그들은 자신들 조상이 저지른 범죄적 행위를 스스로 고백하는 걸 두려워하고 있기에 자신들 조상들이 감행했던 조작과 왜곡으로 점철된 우리겨레의 역사를 여전히 분탕질 하고 있다. 우리는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한다. 결코 이민족들이 우리겨레의 역사를 참역사로 복원해주고 되돌려 세우지는 않는다. 우리 스스로 우리조상들이 걸었던 찬란한 역사와 문화, 사상과 종교 그리고 온누리 인간들의 삶속에 뿌리내린 우리겨레의 발자국을 찾아내야 한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일식 67개, 행성의 움직임 40개, 혜성의 출현 85개, 유성과 운석의 떨어짐 42개, 오로라의 출현 12개 등 240개가 넘은 많은 천문 현상 기록들이 있다. 이중에는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에 동시에 관측되어 기록된 것도 있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기록도 있다.
나는 먼저 1000 ~ 20000년 전에 일어났다는 이런 기록들에 대해 의심을 갖지 않을 수 럾었다. 인간의 시간 척도로 보면 2000년이란 아주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긴 시간이다. 그런데 그 아득한 옛날에 살았던 무지한 사람들이 제대로 천체의 운동과 변화를 읽어 낼 수 있었을까? 아마 이 책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그때의 나와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릇된 선입관이었다. 천체 역학적 계산으로 확이냏본 결과, 놀랍게도 이 시기의 천체 관측 기록들은 대부분 사실이었다. 도한 해와 달과 행성과 별자리들에 관련된 다양한 기록을 실제로 일어난 현상과 전체적으로 맞추어 보았을 때 천체 현상들이 일어난 연대와 날짜, 그리고 상황까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로써 기존의 서지학적 · 금석학적 연구를 통해 밝혀 놓은 삼국 시대의 연대기가 상당히 정확하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나는 과학자로서 선입관을 가졌던 점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옛 선인들의 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시각을 지니기로 했다. ❞(하늘에 새긴 우리의 역사, 박창범. 김영사, 2008년 4월 11일, 42쪽)
《삼국사기》에는 있지만 중국의 사서에는 없으면서, 계산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록 중 주목할 만한 것은 행성과 달의 접근 기사였다. 예를 들면 《삼국사기》에는 달이 금성에 접근했다는 태백범월(太白犯月) 기록이 5개가 있는데 모두 중국 사서에 없는 독자 기록이다. 그중 〈신라본기〉(내해 10년)와 〈백제본기〉(초고 40년)에 동시에 나오는 서기 205년 7월의 ‘태백범월’ 기록을 보자. 달과 금성의 운동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계산하면, 이 고릭에 대응하는 실제 현상들을 이 시기에 찾을 수 있다. 계산상 서기 205년 9월 4일 오후 4시경 달은 금성에 2.1°까지 가까워졌다가 금성을 쉽게 볼 수 있게 되는 일몰 때는 2.5°정도의 거리에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때 금성은 평소의 밝기인 약 –3.9등급보다 0.5등급 밝은 14.4등급이었다. 조선시대에 간행된 〈서운관〉에는 천상을 관측하는 규정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책에 기술된 천문 현상의 정의에 따르면 ‘범(犯)’이란 ‘달과 별이 서로 빛을 미칠 정도로 다가감’을 뜻한다. 백제와 신라는 서기 205년에 금성이 밝아진데다가 달 가까이에 접근한 현상을 보고 금성이 달을 ‘범’했다고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가 동시에 관측했으며, 당시 후한에서는 관측하지 못한 이 천체 현상은 실제로 일어났던 것임이 증명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천문학 역사에도 중요한 사실이다. 백제와 신라가 적어도 서기 205년부터 행성과 달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관측하고 있었으며, 그 관측 결과를 기록하여 남기거나 구전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앞에서 삼국 시대에서 역사를 신뢰할 수 있는 때가 《삼국사기》에 나오는 왕의 이름이 주변국 사성 등장하는 시점으로 정해지기도 한다고 말 했다. 중국과 일본의 문헌에 신라와 백제왕의 이름이 나오는 해는 356년과 346년이므로 서기 205년의 독자 관측 사실 하나만으로도 삼국의 역사를 인정하게 되는 시점이 약 150년이나 앞서게 되는 것이다.
205년의 기록 외에도 달과 행성이 접근한 기록들은 상당수가 사실이었다. 한편 일본의 천문학자들은 행성과 달의 접근 현상에 대한 《삼국사기》의 관측기록이 대부분 잘못된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왔다. 이들과 나의 연구 결과가 다른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 학자들의 천체 역학적 계산도 옛 기록을 확인하기에 문제가 없을 만큼 정확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그 과정에서 숨은 오류가 발견된다. 이들은 달이 행성에 가장 근접했던 때의 시각만을 계산한 뒤, 그 시점이 해가 떠 있을 때라면 모두 잘못된 기록으로 판정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달과 밝은 행성은 낮에도 볼 수 있기 때문에 낮에 접근한 경우를 모두 틀린 기록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또 행성과 달의 상대거리는 느리게 변하기 때문에 최근접점이 낮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일출 전이나 일몰 후에 달과 행성은 여전히 매우 가까이 있게 된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무시하고 최근접 시점만을 근거로 기록의 진위 여부를 판단한 데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205년의 ‘태백범월’ 기록도 그러한 경우였다. 만약 이 기록들이 《삼국사기》가 아니라 일본 사서의 기록이었다 해도 그들은 이러한 ‘실수’를 저질렀을까? ❞(하늘에 새긴 우리의 역사, 박창범. 김영사, 2008년 4월 11일, 42 ~ 48쪽)
삼국사기에 기록된 “태백범월”이 백제본기에서도 신라본기에 동시에 기록이 되었다는 것을 그 관측기록이 정확했다는 것을 증명을 해주는 것이다. 또한 우리 조상들의 천문현상에 대한 과학기술수준이 현대식 첨단의 관측시설을 갖추고 하늘의 변화현상을 관측하는 수준보다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1600년 전의 천문현상 관측 수준이 현대사회와 같다는 것은 대단한 천체과학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 조상들이 남긴 사서들의 내용은 그것이 어떤 사실을 기록한 것이 되었든 신뢰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금성이 낮에 나타난 기록은 사실인가
❝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금성이 낮에 나타났다(太白犯月)”는 기록이었다. ‘태백주현’ 기록은 《삼국사기》에 8개가 있는데 그 중 7개가 독자 기록이다.8개 기록 중 7개가 시기적으로 기상 상태가 좋고 하늘이 짙푸른 가을부터 겨울 사이에 있었다.
금성이 낮에 보였다는 기록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지 금성의 등급을 계산해 알아보았다. 지구에서 보았을 때 금성은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크기가 변하고, 달처럼 위상도 달라진다. 평소에 밝기가 -3.9등급 정도이다가 태양에서 가장 먼 각도로 멀어지는 동방최대이각이나 서방최대이각 근처에서 약 –4.9등급까지 밝아진다. 《삼국사기》에 ‘태백주현’ 기록이 있는 해에 금성의 등급을 계산해 보았다. 놀랍게도 기록 중 4개가 금성이 가장 밝아진 시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백제 구수왕 11년 10월의 ‘태백주현’ 기록은 계산상 서기 224년 겨울에 있었던 실제 상황과 그대로 들어맞는다. 즉 당시 금성은 –4.67등급으로 가장 밝아져 가는 시기여서 기록과 어김없이 일치한다. 그러나 이 현상은 중국 측에도 기록되어 있다.
반면 백제 아신왕(阿莘王) 3년(394) 7월, 고구려 양원왕(陽原王) 11년(555) 11월의 기록은 독자 기록이면서 계산상으로도 역시 금성이 밝아진 시기와 일치해 독자적 관측 사실을 입증해주었다. 이 ‘태백주현’ 기록만 보아도 7세기에 이르러서야 삼국이 천문관측을 독자적으로 수행했을 것이라는 일본 학자들의 주장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독자적 관측의 진위 여부와 함께 이때의 ‘태백주현’ 관측 사실이 시사하는 바가 또 하나 있다. 낮에 금성을 관찰하는 ‘태백주현’의 관측은 전문성을 요한다. 낮이 밤처럼 되어서 누구나 한 눈에 알 수 있는 일식 현상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환한 낮에 금성을 관측하자면 오랜 기간에 걸쳐 금성의 위치 변화를 추적해 두어야 한다. 그 축적된 지식에 따라 당일 낮에 금성이 하늘의 어디쯤에 자리할지 대략적으로 위치를 알고, 그 위치를 주의깊에 관찰해야만 금성을 찾아낼 수 있다. 이 같은 ‘태백주현’ 관측이 가능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당시의 천문학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이 시기에 고도의 관측 기술을 지닌 천문학자들이 있었으며, 장기간 관측 자료가 쌓여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삼국사기》 내용에는 백제 온조왕(溫祚王) 25년(서기 7년)에 천문 관측을 담당했던 관리인 일자(日者)가 등장하고, 일관부(日官部)라는 부서가 존재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태백주현’ 관측은 이러한 기록과 잘 어울리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한편 삼국의 천문 기록에 관하여 이러한 의문도 제기할 만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백제에 한문이 들어온 해는 서기 375년이다. 그런데 그보다 수백 년 전부터 이렇게 다양한 천문 관측 기록이 전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들어온 시기는 중국의 전국 시대와 진나라 때인 서기전 3세기 후반에서 서기전 2세기 전반경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유입된 지역은 평양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해당 시기의 유물을 통해서 확인된 내용이다. … 서기전 2세기경에…중국에 글을 보내고 진국이 국서를 보냈다는 기록들도 보인다…이러한 유물들과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조선반도에서 한자가 사용된 시점은 서기 이전부터임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기록한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삼국 초기의 천문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아니면 한자 도입 이전에 우리의 독자적인 문자가 있었을까? 문화사적으로 흥미로운 문제이다.(후일 논할 것임) ❞(하늘에 새긴 우리의 역사, 박창범. 김영사, 2008년 4월 11일, 48 ~ 51쪽)
이러한 수리학, 천문학 등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일제가 손을 못덴 내용이 바로 천문현상이다, 정치적인 내용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한 병신, 이가 병신도와 쪽발이들, 저런 천문내용을 삭제해야 과학적인 역사 사실 증명이 없어지는데 내용을 모르니, 금성이 낮에 보일 수가 없다고 하는 멍청한 이야기로, 역사학자랍시고 놀고 있다, 증명하고 천문학적으로 이야기히나, 조작이라고 하다가, 실제 일제 천문학자에게 물으니, 아니다, 낮에도 보이고 충분히 관측이 가능하다고. ㅎㅎㅎ 그게 첨성대, 즉 태양관측소의 일이라고, ㅎㅎㅎ 웃겨서, 아예 저 밑바닥으로 깔아뭉게놓고 있는 '강단주류사학자"들은 좀 수학도 공부하고, 자연과학 그중에 천문학, 시간학 년호에 대한 개념도 가져라.
어디서 그래, 전설따라 삼천리, 삼국지 위지 동이전 하나가지고 한국 한반도 찐국과 쌈국, 그리고 원쌈국시대가 있냐고? 바보들, 정말 역겨운 것이 신한조선이 신라다는 신한-신라 말살론이다, 삼국사기 기록 불신론한다고 저런 조작된 내용을 가지고 고구려 마한 말갈족 만세, 해봐, 말갈족 여진족 만세, 우리청나라 만세! 엿이다.
청나라 떼놈 여진족 고구려족 만세, 만사이!
다 가라, 정말 보기 싫다, 고구려도 마한조선의 하나지, 고조선 핵심 신한조선을 찐한쪼선, 찐국이고, 신라는 어디서 줏어와서는 저리도 내팽개치고 좋다고 지랄할까, 티우를 치우라고 ㅎㅎㅎ 웃기고 있다, 신라를 건너뛰고 치우해봐야, 니 줄이 엇다, 가라고, 니네 집줄이 여진족, 당나라 선비족이면 거기 가서 놀아라, 청나라 김행 권행의 후손이라고? 알아서 놀아라.
-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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