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기다와 잇다의 사이 외 4편
당기다와 잇다의 사이
첫 골목 두 번째 집
간판도 없어 지도에도 들지 못한 거기는
끊긴 기억 더듬어 찾아가는 가야하는
수성시장 순대 가게였다
이어진 길을 자르는 점원의 칼질을
주인아줌마가 보고 있다
"힘으로 눌러 썰면 터져 당긴다는 느낌으로 하라니깐"
틈을 내는 게, 자르는 게, 당기는 거라니!
당최 이해할 수 없는 말들
순대 덮은 비닐 위에 똑똑 땀으로 떨어진다
지루하도록 긴 삶의 똬리를 단칼에 끝내는 건 당겨내는 것인가
길거리로 나앉은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거나
주름진 엄마의 손을 잡아 내 쪽으로 당기는 것
당기다 잇다 사이에서 빠져나간
‘끊기다’를 슬픔이나 외로움의 도마에 올려
또박또박 썰어보는 것
초여름 면장갑에 비닐장갑까지 낀 점원의 손이
주문에 맞춰 칼을 당겨내느라 바쁜 가게
제대로 당겨진 저 순대는
누구의 허기진 뱃속에 들어 가
공원의 한적한 벤치나 지하도의 입구가 아닌
수평인 식탁의 삶도 화기애애하게 이어줄까
덜컹대다
2리터 플라스틱 물 한통
안전모 벗는 사내가 공사장 한 켠에서
흘린 땀 갈증을 기울이는데
얼음덩어리가 덜컹 바닥을 친다
그냥도 푹푹 찌는 여름인데 가스 불 위에 주전자 얹고
정성으로 보리우려 끓인 물
베란다로 옮겨져 서서히 식혀
다시 냉동실에 넣어 얼음이 된 그 물
꿀꺽꿀꺽 사내의 목을 타고 넘는다
미처 녹지 못한 얼음덩이 덜컹
벽을 칠 때, 버겁던 사내의 손은
불투명 안쪽 뭉클함 얼마나 남았을까
시멘트 가루 덮어쓴 물병을 닦는다
일사병 걱정에 가슴 쓸어내리는 아내
투명한 웃음이 쥐어준 한통의 물
공사장 소음 속에서도 불볕 걱정은
여기저기서 덜컹 덜커덩
바닥의 사내를 벌떡 일으켜 세운다
얼린 물 한통속에 앉았던 아내가
안전모 줄 팽팽하게 당겨준다
그 꽃, 건네다
나이 오십이 되는 언니에게
무얼 선물하지?
고민하던 나는 드라이플라워 잡아본다
꽃집 주인의 생화 권유에도
앙상한 가지가 더 앙상한
한 송이로는 팔지 않는다며 다발이 된 꽃
생애 처음 나온 밖에서 혹독하게 매달려
그늘진 세상을 보았을 꽃 들어본다
가지와 잎 자르는 다비식 견뎌내었으니
본색은 달라져 버려 메아리 같은 가벼움만 남은 꽃
어떤 복원의 잣대로도 앙상한 몸으로
제 머리에 생기의 왕관 씌울 수 없어도
시들기보다 사라지지 않는 시간을 위해 견디는
나이 오십은 그런 꽃이어야 해
한 다발 드라이플라워 손에 쥐고
폴짝폴짝 가벼워져서
햇빛을 골라 밟을 언니에게 간다
풍요의 더께
우연한 돌출 모서리에 짖긴 가죽 가방
덧대어 깁겠다고 끙끙 바늘 쥐던 손, 화끈거림으로 찾아간 국밥집
아버지는 놋그릇을 맨손으로 옮기신다
뜨겁다며 만류하는 종업원에게 이보다 더한 것도 괜찮다 시며
굳은 살 내 보이신다
눈에 보이는 걱정을 덜어내느라
아버지가 따낸 곁가지며 사과꽃은 얼마나 될까
그깟 몇 바늘 찢긴 가죽을 깁는 일보다
무수한 날을 화끈거렸을 그의 시간들
가족 울타리 여물게 깁는 일은 얼마나 큰 화끈거림의 반복이었기에
바닥부터 차오른 걸까, 아버지의 굳은살
엄지와 검지에 힘에 앞앞이 놋그릇 제자리에 놓여지고
무쇠 솥 안 무르게 익어진 무 건져 첫 술 뜨는 아버지
단련의 시간을 삼키는 저녁상은 뜨끈했다
이젠 차가운 것은 차갑게 뜨거운 것은 뜨겁게 사셔야죠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게 만드는 원망이
무심코 아버지 따라 무 삼킨 목젖 너머까지 벌겋게
추수 앞둔 사과밭 되어 꿈틀거린다
밀려나다
가게 문 유리 너머는 짙은 어둠
<임대문의> 팻말 걸려있다
밖으로 옮겨진 고양이 집
분명 며칠 전 까진 투명의 안 쪽에 있었던 집인데
이젠 집밖의 집이다
야옹에 대답은 야옹
혀의 빗질 기다림 속에 서있다 보면
낯선 목소리도 온기가 될까
홀쭉하다, 드러누워 보여주던 불룩한 배
달그락 거리는 밥그릇 앞에서
젖은 것을 탁탁 털어낼 줄 알았었는데
기억 속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다가
젖은 눈 먹먹하다
쓱쓱 머리부터 등까지 꺼칠하다
살아야지 야옹아
(37회 달구벌백일장 장원)
저녁 놀
동화사 말사
마음 내어 수련 찍다보니
이미 꽃 잎 닫는 시간
물에 비치는 하늘에
피어나는 또 하나의 수련꽃
붉어서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 있나
보여주려고 서로 닮아 있네
저녁 예불 향 끝에 걸려 있거나
풀숲 이슬에도 맺히는 붉음
캄캄히 다가올 밤 앞에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노릉에 번지는 말
약력 : 대구 출생
형상시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