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의 개요
이사야서의 제목은 본서의 중심인물이며 저자인 이사야(히 היעשי 에샤야; 여호와는 구원이시다. 헬 70인 역은 HΣAIAΣ)의 이름을 따라서 이사야서라고 명명했다.
본서의 저자는 이사야이다. 저자에 대한 이론이 있으나 충분한 내적 증거가 있고, 70인 역(The Septuagint), 탈무드, 신약의 여러 구절이 이사야의 1인 저작으로 보게 한다. 본서의 문장 진술과 사상의 통일성 등이 이사야의 1인 저작임을 뒷받침한다.
기록연대는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시작되던 해 즉 웃시야 왕이 죽던 해 739 B.C.이후(사6:1), 므낫세 왕 통치 기간 중 순교한 680 B.C.이전에 저작되었을 것이다.
기록목적은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때는 이제 유다 왕국마저 기울어 가는 때이다. 유다왕국의 장래를 바라보면서 우상숭배와 사회적, 도덕적 해이 상태에 있는 백성의 회개와 경성을 촉구하여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가르치고 언약백성의 메시아 희망을 전하기 위한 기록이다.
이사야서 특징: 이사야서는 39장을 전반으로, 40장 이후를 후반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상식화 되어있다. 그 특성을 보면
1. 1장-39장까지 구약성경과 유사하게 죄에 대한 심판이 드러나 있다.
2. 40장-66장까지는 신약성경과 맥을 같이하는 메시아 구원에 대한 소망의 파노라마를 전계 한다.
3. 이사야서는 전반 39장, 후반 27장으로 구약성경 39권, 신약성경 27권을 대변하는 것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 성경의 축소판이라 해야 할까?
4. 이사야서는 산문(散文)과 시(詩)의 형태를 모두 갖추고 있다. 주요 산문 형식은 36장-39장에서 나타나며 이는 이사야 서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해 주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5. 시의 형식을 취한 부분은 13장-23장으로 계시(啓示) 문학(文學)에 속한다.
이사야서의 주요내용
1. 심판의 선언(1:1-39:8)
1)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사1:1-12:6)
2) 불신앙에 대한 심판(사13:1-23:18)
3) 심판의 목적(사24:1-27:13)
4) 예루살렘의 참 소망과 헛된 소망(사28:1-35:10)
5) 히스기야 치세의 사건들(사36:1-39:8)
2. 약속의 선언(사40:1-66:24)
1) 포로의 귀환(사40:1-48:22)
2) 미래에 올 구세주(사49:1-57:21)
3) 미래 메시아왕국(사58:1-66:24)
성경에 나타난 계시문학
성경에서 계시(啓示)는 히브리어 “갈라 Πלנ”, 헬라어 “아포칼륍시스 αποκάλυψι,ς” 영어 “계시 revelation"로 표기한다. 꿈(夢), 묵시(黙示), 어떤 주관적 자극을 통하여 마음에 나타나는 환상(幻想)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은 계시를 전달할 사람을 특별히 선택하신다. 이들이 선지자이다(민12:6).
꿈은 계시의 통상적 방법이었다(삼상28:6; 욜2:8).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사람에게도 나타난다(창20:3-6; 31:24; 40:5; 삿7:13).
환상은 꿈보다 직접적인 계시 방법이다(겔1-3장; 8-11장; 사6장, 단1:17; 2:19; 7-10장; 암7-9장). 환상은 주로 선지자들에게 나타났는데 하나님이 계시의 영을 통하시든지 내적 조명(詔命)을 주시기도 하였다.
꿈과 환상은 때에 따라서 주셨고 예언(豫言)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관한 하나님의 메시지였다(창15:3-5; 삼상3:1-21; 단10:7; 슥13:4). 묵시로서 이상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에 관한 내용을 주시기도 한다.
신약시대의 계시는 성령과 관련된 감동으로 나타났다(행10:10; 11:12, 15; 22:17).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과 관련되어 나타났다.
<제 1 장> 부패한 사회와 종교의식에 대한 책망과 회개의 촉구
[이사야서의 저자 소개] (사1:1)
남조 유다 왕국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우상 숭배와 타락으로 점차 하나님의 율법에서 떠나고 국가적 위기를 당한다. 북조 이스라엘 보다는 낳은 편이었고 간헐적으로 좋은 왕이 나왔지만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사울 왕국이 세워지고 므낫세 왕이 등극할 때까지는 약 450년이 경과 했다. 르호보암 왕 때(930B.C.-913B.C.) 남북조가 갈리고도 므낫세 왕이 될 때까지 233년이 지났다(서론 부문에 제시한 중요 연대 참조). 이런 흐름 속에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는 성군은 그리 많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혼란기에 이사야는 부름을 받은 것이다.
[비참한 유다 상황에 대한 비탄] (사1:2-9)
북조 이스라엘은 멸망하였고 남조 유다마저 예루살렘만 유지하고(8절) 변방은 아시리아의 침범으로 수없는 백성이 포로가 되어 갔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 그 왕성하던 나라가 왜 이리 위축되었을까?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인데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으니 어찌 나라가 온전하겠는가? 이 민족에게 하나님은 아시리아라고 하는 도구를 이용하시어 매를 드신 것이다. 이사야의 회개 촉구는 그 길이 바로 유다 백성이 살길이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통렬한 책망] (사1:10-17)
이사야는 백성과 관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촉구한다. 하나님은 제사를 원하지 않으신다. 헛된 가식적 제사 그리고 불의를 행하는 백성들은 가증스러운 것이다. 형식적으로 드리는 월삭(매월 초하루)과 절기에 드려지는 제사를 원하시지 않는다. 악을 버리고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라. 악한 행위는 어디서 오는가? 그 심령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천천의 수양과 만만의 강물과 같은 기름이 아니라, 정의와 사랑과 겸손이라 하셨다. 이사야는 터질 것 같은 아픈 가슴으로 백성의 회개를 촉구한다.
[회개의 촉구와 하나님 사랑의 약속] (사1:18-27)
여호와의 말씀; 허구적 제사와 사회적 불의를 책망하시고 만일 회개하면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과 회개하지 않으면 남의 종이 될 것을 선언하신다. 이사야는 회상한다. 과거 정의가 있던 시가(市街)가 이제 불의로 가득 찼도다. 그들의 고관은 도둑과 패거리가 되었고,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즐기며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는 패역을 행했다. 하나님은 이들을 쓸어버릴 것이요 남아돌아 온 자들에게는 정의의 구원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성읍을 다시 의의 성읍으로 재건하실 것이다.
[불순종에 대한 최후 심판] (사1:28-31)
패역한 무리는 패망하고 여호와를 떠난 자들은 멸망할 것이다. 상수리나무와 동산은 우상을 숭배하던 장소이다. 자기 욕심으로 우상을 숭배하였음으로 말미암아서 부끄러움이 오고 수치를 당하며 무능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준열하고 견딜 자가 없을 것이다.
<제 2 장> 왕국에 대한 약속과 여호와의 날
[장차 올 왕국에 대한 약속] (사2:1-4)
신정 왕국의 도래를 의미한다.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 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나오고, 무리는 칼을 쳐서 보습(쟁기의 날)을 만들고, 전쟁은 없어지며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의 나라가 도래할 것을 말한다. 아!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 그것이 메시아 왕국이다.
[여호와의 날: 유다에 대한 심판; 물질주의] (사2:5-7)
도래할 하나님의 왕국을 바라보면서 이사야는 다시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빛 가운데 행하려 하지 않고 이방 특히 동방의 우상을 섬기며 그들과 결혼하며 그들의 죄악에 동참하는 죄를 지었다. 그곳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군사력이 강하기 때문에 그들과 손을 잡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를 야곱의 자손들은 떠나지 못했다.
[여호와의 날: 유다에 대한 심판; 인본주의] (사2:8-17)
우상숭배는 인본주의의 극치이다. 그것은 인간의 욕심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만 해도 충분한데 그를 넘어서 인간의 힘으로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하는 욕망 그것은 불과 같다. 타오르기 시작하면 끄기 어렵다. 하나님의 진노는 준엄하시다. 이사야는 이 진노를 피하여 바위틈으로 피하라고 한다. 물질문명은 그것이 심화한 정신문화에 토대할 때 튼튼히 설 수 있다. 문화는 하나님의 율법에 토대할 때 가장 강렬한 힘을 가진다. 세상의 번영은 허상에 불과하다. 물질적 번영이 믿음의 터 위에 세워진다면 반석과 같은 것이다.
[여호와의 날: 유다에 대한 심판; 의지할 분은 오직 여호와] (사2:18-22)
우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든 공예품이다. 아이들 장난감과 같은 것이며 책상이나 화병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 거기 왜 절을 하고 섬기는가? 그를 통하여 무엇이고 많이 얻겠다는 욕심, 바보 같은 행위이다. 인간에게 해악(害惡)은 있겠지만, 유익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복을 원하시기 때문에 이 불행한 행위를 금하신다. 그 날 심판의 날에 우상을 모두 버릴 것이고 하나님을 피하여 동굴에 모두 숨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의지하지 말자! 오로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자!
<제 3 장> 유다왕국에 대한 심판
[유다에 대한 심판; 예루살렘의 멸망] (사3:1-12)
첫째, 이사야서 3장1절-3절 사이에서 지도자의 책임을 물으신다. 지도자는 사회에 대한 책무성을 지닌다. 그런데 이들이 사회질서를 어지럽힌다면 그 사회는 아노미 현상에 빠질 것이다. 예루살렘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들을 의지함으로 그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둘째, 사3:4-7 사이에 그 사회의 아노미 현상을 생생하게 표현한다. 어린아이가 고관이 되고 서로 잔해하고 학대하며, 통치자가 되어 달라 해도 될 사람이 없으며, 노소가 질서가 없으며 사회 위계가 붕괴한다. 셋째, 사3:9-12 사이에 악인의 징벌과 의인에 응보를 시적으로 표현하고 아이가 백성을 학대하고 여자가 다스린다면 어떤 사회를 의미하겠는가? 이때는 2,700여 년 전의 고대사회이다. 여자는 계수도 하지 않던 사회이다.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유다왕국은 멸망할 것이 분명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구한다.
[백성을 심판하시는 여호와] (사3:13-15)
여호와 하나님이 백성들과 변론하시려고 일어서시었다. 심판의 임박을 의미한다. 장로와 고관들을 심문하실 것이다. 이들은 권력을 남용한 죄악이 크기 때문이다. 백성의 물건을 탈취하고 가난한 백성을 짓밟는다. 극한 표현으로 “얼굴에 맷돌질하느냐?”라고 한다. 어느 사회나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 오늘 우리 사회의 정치지도자, 경제계의 CEO, 교육계 지도자 이들의 타락과 부도덕성은 우리 사회를 혼란으로 빨려 들어가게 한다. 이들이 지은 죄는 파급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정치, 종교, 경제, 교육, 사회 지도자의 도덕성과 생명력은 그 사회의 건강과 직결된다.
[시온의 딸들에게 이르시는 말씀] (사3:16-26)
시온은 하나님이 거처하시는 곳이다. 또 유다 왕국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흔히 시온을 딸로 표현한다. 유다의 교만과 음란으로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며 그가 지니고 있던 모든 장신구는 사라지고 썩는 냄새가 진동할 것이다. 썩는 냄새는 죽음에서 나오는 냄새이다. 장정은 칼에 맞아 죽고 용사는 전쟁에서 죽을 것을 예언한다. 죽은 자에게 장식은 필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부패만이 있고 내어 버림만이 있을 것이다. 유다가 하나님을 떠나면 이처럼 된다는 예언이다.
<제 4 장> 남은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
[멸망 후의 참상] (사4:1)
멸망으로 남자는 다 죽고 여자만 남은 형상을 말한다. 남편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했다. 남편의 의무는 여자에 대한 보호와 생계 보장일 것이다. 히브리인에게 숫자 7은 완전을 표한다. 일곱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라는 표현은 모든 여자가 한 남자를 붙잡고 라 해야 할 것이다. 즉 많은 여인이 한 남성에게 보호, 생계, 다 돌볼 것 없이 오로지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거둬 달라는 표현이다. 전후의 참상을 저자는 사실적으로 표현한다. 회개하지 않으면 이렇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을 청결 하실 때; 남은 자들에게 주실 복] (사4:2-6)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실 것을 예언한다. 소산(所産)이 나올 것이며, 남아있는 자들은 거룩하다 칭함을 받을 것이요, 청결하게 하시며, 낮에는 구름으로 밤에는 화광으로 인도하시며, 초막을 주시어 낮에는 더위를 피하고 비바람을 피하게 하실 것이다. 완전한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을 것을 예언한다. 남아있는 자가 누구인가? 순수한 신앙을 지키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행하는 자가 아니겠는가!
<제 5 장> 유다의 죄악과 하나님의 심판
* 유다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원인은 1) 사5:8, 2) 사5:11, 12, 3) 사5:18, 19, 4) 사5:20, 5) 사5:21,
6) 사5:22, 23이고, 심판의 결과는 1) 사5:9, 10, 2) 사5:13-17, 3) 사5:24-34절에서 기술한다.
* 10장까지 시간의 흐름을 보면 6장→10장→1장→5장순이 된다.
[포도원 노래] (사5:1-7)
이 단락은 유명한 이사야의 “포도원 노래”이다. 포도원은 이스라엘이며 포도나무는 유다 족속이다. 옥토를 일구시고 그 옥토에 극상품 포도를 심었는데 그 나무에서 들 포도를 맺어 그 포도원을 폐하여야 할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하면 좋을까? 그 울타리와 담장을 헐어 버리어 짓밟히게 하고 먹히게 하겠다는 준엄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그 포도원에 찔레와 가시나무가 나서 못쓰게 되며, 비를 내리지 않게 하여 황폐해질 것이다. 처참한 광경이다. 하나님이 유다에게 내리신 처분이다.
[포도원에 비유한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원인 1과 결과 1] (사5:8-10)
원인 1: 권력자, 부자들이 공동생활을 거부하고 독점적 자기 영역을 확보하여 격리되고자 하는 욕심이다(8절). 탐욕의 결과로 공동체를 붕괴시킨다. 이에 대한 심판의 결과 1:혼자서 잘 살아 보겠다는 욕심은 성읍의 폐허와 사람이 살지 않는 공성(空城)이 되고 밭에서는 소산이 나오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
* 열흘 갈이 포도원은 대략 12,000평의 넓이이다.
* 바트(bath)은 22리터이다(왕상7:26).
* 호멜(homer)는 220리터이다(레27:16; 겔45:11-14).
* 에바(ephah)는 22리터이다(출16:36).
[포도원에 비유한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원인 2와 결과 2](사5:11-17)
원인 2:술 취함과 방탕이다(사5:11, 12). 주색은 예부터 패가망신이라 하였다. 술에 취하여 있는 동안 사람은 옳은 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래서 또 다른 방탕으로 연계된다. 이 결과(결과 2)는 포로가 될 것이고, 굶주리고 목마를 것이며, 즐기고 놀던 자들은 스올에 빠지게 될 것이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높아지고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사5:13-17). 원인 없는 결과가 없다. 유다 백성의 오만함은 반드시 징치(懲治)될 것이고,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 유다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원인은 1) 사5:8, 2) 사5:11, 12, 3) 사5:18, 19, 4) 사5:20, 5) 사5:21,
6) 사5:22, 23이고, 심판의 결과는 1) 사5:9, 10, 2) 사5:13-17, 3) 사5:24-34절에서 기술한다.
[포도원에 비유한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원인 3-6] (사5:18-23)
원인 3:죄의 타성(惰性)에 빠져서 하나님의 심판을 조롱하는 죄이다(사5:18, 19).
원인 4:선악을 구별하지 못하는 가치관의 혼돈에서 오는 죄이다(사5:20)
원인 5:스스로 명철하다는 지적 교만이다. 하나님은 이를 용납하시지 않는다(사5:21).
원인 6:술로 가늠되는 개인의 죄와 뇌물에 인한 사회적 타락이다(사5:22, 23).
유다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이유로 6가지를 들고 있는데 이는 모두 하나님의 율례를 따르지 않고 오만방자한 생활에서 오는 것이다. 인간의 욕심과 방종에서 오는 것들이며 하나님을 떠난 백성의 오만에서 생긴 문제들이다.
* 유다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원인은 1) 사5:8, 2) 사5:11, 12, 3) 사5:18, 19, 4) 사5:20, 5) 사5:21,
6) 사5:22, 23이고, 심판의 결과는 1) 사5:9, 10, 2) 사5:13-17, 3) 사5:24-34절에서 기술한다.
[포도원에 비유한 이스라엘의 죄와 심판: 심판의 결과 3](사5:24-30)
사5:24, 25에서 심판의 정도를 언급한다. 이 심판은 그 화려하던 나무의 뿌리까지 살라버리고, 썩게 하여 생명의 근원을 없애는 수준이 될 것이다. 백성의 시체가 길가에 방치되어 분토(糞土, 썩은 흙)와 같이 되는 수준이니 얼마나 강도 높은 심판인가? 사5:26 부터는 이방을 도구로 사용하여 유다를 징계하실 것이다. 그들이 달려오는데 얼마나 그 위용이 호대(浩大) 하며 무시무시하며 사자와 같이 덤벼들 것이다. 그날 햇빛이 가리어서 흑암이 될 것이다. 이방은 언제나 유다를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도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된다.
* 유다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원인은 1) 사5:8, 2) 사5:11, 12, 3) 사5:18, 19, 4) 사5:20, 5) 사5:21,
6) 사5:22, 23이고, 심판의 결과는 1) 사5:9, 10, 2) 사5:13-17, 3) 사5:24-34절에서 기술한다.
<제 6 장> 부르심을 받는 이사야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 (사6:1-7)
이사야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750B.C.)에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하나님의 모습은 높은 보좌에 좌정, 옷자락은 성전을 덮음, 스랍의 도열과 찬양으로 표현된다(출24:15-18; 삿6:22, 23; 행7:30). 하나님을 모시어 선 스랍의 모습은 여섯 날개(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 나는 모습)를 가졌고 서로 불러 “거룩하다.”를 반복하는 찬양을 부르며 하나님의 영광은 온 땅에 가득하였다. 이사야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은 그를 정결하게 하시고 그로 하나님 앞에 서게 하셨다.
* 10장까지 시간의 흐름을 보면 6장→10장→1장→5장순이 된다.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는 이사야] (사6:8-13)
이사야 6장 8절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이사야는 즉시 “내가 여기 있나이다.”로 응답하였다. 이 백성으로 눈과 귀가 어둡게 하여서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아도 알지 못하며, 마음이 둔하게 하라는 역설적 지시이시다. 사실 이들에게 들려주어도, 보여주어도, 마음으로 알게 하여도 알지 못하는 백성이다. 결국, 이들이 징계를 받고 다 없어지고 그 1/10이 남아도, 아직 황폐한 때가 되어도, 돌아서지 않는 민족이다. 그러나 거룩한 자들이 남아서 이 땅의 생명의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제 7 장> 유다 아하스 왕의 잘못
* 사7:1-10:4에서는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록한다.
시리아(Syria; 아람; 수리아)와 동맹한 이스라엘, 이에 대응한 아시리아(Assyria)와 동맹한
유다 왕국. 모두 잘 못된 행위들이다. 이방과의 동맹은 하나님을 떠난 행위이다.
* 10장까지 시간의 흐름을 보면 6장→10장→1장→5장순이 된다.
[아하스 왕에게 임하신 하나님의 말씀] (사7:1-9)
하나님은 아하스 왕에게 삼가며 조용히 하라고 하시었다. 당시 북조 이스라엘은 아람(수리아, 시리아)과 동맹하여 예루살렘을 공격했다(왕하16:5). 이에 놀란 남조 유다 아하스 왕이 이사야의 권고(사7:3-16)를 무시하고 아시리아와 동맹하여 이에 대응한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아하스가 아시리아를 의지하려 했으니 이는 하나님과 정면 대결을 한 것이다. 큰 죄를 범한 것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많은 백성이 아시리아에 포로로 잡혀갔다(왕하15:29; 16:9). 이것을 갈릴리 포로(734 B.C.)라 일컫는다. 그리고 12년 뒤에 북조 이스라엘은 멸망하게 된다(722 B.C.).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세상을 의지하는 사람은 그 자체가 죄이다. 유다가 하나님에게 의지했을 때는 전쟁에서 항상 승리하였음을 주시해야 한다.
* 잠7:5의 에브라임 왕은 북조 이스라엘의 왕을 이르는 말이다.
[임마누엘의 징조] (사7:10-16)
이사야는 아하스 왕에게 구원 요청은 하나님께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거절한다.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에게 의지해야 할 왕이 하나님께 의지할 것을 거절한 것이다. 사7:14, 15은 임마누엘의 처녀 탄생을 예언하신 것이다. 선악을 알만한 나이 12, 3세경에 엉킨 젖(치즈)과 꿀을 먹을 것이다. 그리고 사7:16에서 아람과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예언한다. 이 예언 후 12년 뒤 두 왕국은 멸망한다. 악의 세계를 구원하실 이는 오직 메시아이시다. 이 단락에서 메시아탄생에 대한 예언은 아노미 세상에 빛을 주실 하나님의 경륜이라 할 것이다.
[아시리아 왕이 유다 땅에 오는 날 유다가 당할 일들] (사7:17-20)
아하스 왕이 아람과 이스라엘 동맹군을 물리치기 위하여서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아니하고 아시리아에 금은을 주고 원군(援軍)을 청하여 아시리아 왕이 유다에 와서 행한 일은 기가 막힌 일들이다. 개국 이래 경험해 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정복이 기다리고 있다.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될 파리(이집트)와 벌(아시리아)이 와서 굴이고 산골짜기고 유다 백성이 숨을 곳이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당할 것을 예언한다.
* 애굽(이집트) 하수는 나일 강을 이른다.
[패전 후의 황폐와 남은 자들의 생활상] (사7:21-25)
이 단락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신 것이다. 남아있는 자들은 거룩한 자들이라 할 것이다. 그들은 젖과 꿀을 먹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땅은 황폐해지고 소산을 거둘 수 없는 황량한 산야가 될 것이다.
<제 8 장> 아시리아아 침입에 대한 예언
* 사7:1-10:4에서는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록한다.
시리아(Syria; 아람; 수리아)와 동맹한 이스라엘, 이에 대응한 아시리아(Assyria)와 동맹한
유다 왕국. 모두 잘 못된 행위들이다.
* 10장까지 시간의 흐름을 보면 6장→10장→1장→5장순이 된다.
[세상을 의지하는 우매한 아하스 왕] (사8:1-4)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두 번 즉 사7:1(스알여습)과 사7:14(임마누엘)의 징조에서도 확신을 얻지 못하였는데 세 번째 마헬살랄하스바스의 징조를 주신다. 끝까지 인내하시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하나님은 아하스가 이스라엘과 알람을 쳐부수는데 아시리아와 동맹을 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실 것을 암시하셨다. 결국, 아시리아를 믿은 유다가 아시리아의 종이 될 것을 예언한다. 이사야의 아들 마헬살랄하스바스가 말을 하기 전 즉 3세 이전에 알람과 사마리아가 함락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에 증인으로 스가랴를 세웠다.
* 마헬살랄하스바스(Maher-shalal-hash-baz) 뜻은 “급히 노략질하고 서둘러 약탈하다.” 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셋째 아들 이름이다(사8:3).
[아시리아 왕의 침략 예언] (사8:5-8)
조용하며 잔잔히 흐르는 실로아(실로암) 물과 같은 하나님의 은총을 저버리고 아시리아를 의지함으로 큰 하수 즉 아시리아에 의해 침략당하고 유다 전체가 그들의 점령과 탈취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하나님이 그 땅을 덮을 것을 암시한다.
[여호와 하나님의 깨우치심] (사8:9-15)
이사야 8장 9절과 10절은 이방에 대한 경고이다. 그들이 아무리 연합하여 온다 해도 패망할 것을 예언하며 사8:11-13에서는 일반 백성에게 하나님의 깨우치심을 준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라 하신다. 두려움은 불 신앙에서 오는 것이다. 믿음 위에 굳건히 서면 두려울 것이 없다(사41:10). 사8:14, 15에서 성소가 악인에게는 걸려 넘어지는 돌이 되며 그들이 망하게 된다.
[율법과 증거의 말씀의 보존] (사8:16-18)
하나님의 주신 예언을 잘 보존하였다가 그것이 이루어진 후에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인정하고 그 권위와 우주를 섭리하시는 여호와를 기념해야 한다.
[유다의 종교적 타락상] (사8:19-22)
유다 백성이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자기 미래 일을 물으며 잘되기를 비는 어리석은 무속 행위를 하였다. 지금 사회도 무속 행위는 끊이지 않고 수행된다. 왜 무속인가? 진리가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지 못하면 무속으로 빠져든다. 하나님을 떠난 백성은 그 무엇이고 의지할 것을 찾게 된다. 하나님 앞에 패역이다. 이들은 흑암의 세계에 거하는 자들이고, 욕심으로 충만한 사람들이고, 불평과 불만이 삶 전부인 사람들이다. 유다는 신정국가이다. 하나님을 떠난 국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제 9 장> 메시아 출현과 동족상쟁(同族相爭)
* 9장에는 두 가지 성격의 내용이 들어있다. 첫째는 사9:1-7에서 메시아에 관한 예언이며
둘째는 사9:8부터 사마리아 즉 북조 이스라엘에 관한 심판 예언이다.
[평강의 왕; 예수 탄생 예고] (사9:1, 2)
이사야서는 크게 3가지 내용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죄악상 고발과 심판, 둘째는 남북조의 멸망과 남은 자를 통한 구원, 셋째는 이스라엘을 영원히 세워주실 메시아의 도래에 관한 것이다. 이런 내용이 섞여 있어서 세심한 구분이 필요하다. 이사야서 9장 1절에서 7절까지는 메시아의 출현을 다룬다. 메시아의 출현으로 변방 버려진 땅들에 먼저 복음이 임하며(사9:1) 흑암에 처해있던 나라가 “큰 빛”으로 사망을 이기게 된다. 그 큰 빛이 메시아이시다.
[메시아의 탄생과 그의 모습] (사9:3-7)
메시아의 오심으로 나라가 창성(昌盛)하고 즐거움이 있게 되고, 모든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적을 꺾으시며(사9:4), 전쟁이 사라지고(사9:5), 이런 일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이루어진다. 메시아의 속성(사9:6)을 보면 1. 아버지, 하나님; 메시아의 신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낸다. 2. 기묘자, 모사; 통치자로서의 메시아의 능력, 3. 평강(平康)의 왕; 통치자로서 그의 덕과 사랑을 나타낸다. 메시아 오신 후에는 영원한 평화와 정의가 행해지는 아름다운 나라로 세워질 것이다.
[에브라임에 대한 심판 예언] (사9:8-12)
이사야 9장 8절부터는 장르가 바뀌어서 북조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에 찬 심판을 말씀하신다. 에브라임과 사마리아는 북 왕국을 지칭한다. 사마리아는 북 왕국의 수도였으니 이를 대표할 것이요, 에브라임은 북조 10 지파 중에 가장 뛰어난 지파였으니 북조를 대표한다 할 수 있다. 이들의 죄는 교만이다. 하나님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다(사9:10)고 생각하고 돌아서지 아니하는 완고함 또한 그들의 죄이다. 이스라엘은 아람과 블레셋에 의한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아람의 느신 왕이나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동맹국이었다. 하나님은 그들의 동맹을 깨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여 괴롭히게 만드신다(사9:11,12). 인간을 믿는대서 오는 불행이었다.
* 아람 사람(Arameans; Syrians) 노아의 손자인 아람의 후손들로 시리아 동북쪽에 살았으나
나중에 시리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래서 KJV에서는 이들을 Syrians로 번역했다.
[고아와 과부라도 불쌍히 여기지 않으실 하나님] (사9:13-17)
이스라엘의 죄악상은 지도자들에게 있었다. 장로와 존귀한 자들, 거짓말을 가르치는 선지자들 때문에 백성이 죄에 빠지고 도탄에 빠지는 것이다. 어느 시대이고 지도자들이 타락하면 그 사회는 무너지게 되어있다. 최근 우리 사회의 아노미 현상도 바로 이런 지도자들의 도덕적 해이에서 온 것이다. 하나님은 철저히 이들을 끊으시고 과부와 고아까지도 돌보지 않으실 것을 이르신다. 극한 한 하나님의 분노이며 그들의 죄악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내적 갈등] (사9:18-21)
북조 이스라엘을 구성한 10 지파 중 므낫세와 에브라임은 2대 중심 지파이며 이들은 요셉의 아들들로 가장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산불과 같은 것이다. 모든 것을 다 태우고 없애버리시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형제 지파인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의 내전을 할 것과 그 참상은 자기 팔의 고기를 먹는 것에 비유한 것이며 이 때문에 백성은 기근에 시달릴 것을 예언한다. 잠시 유다를 대적하기 위하여 두 지파는 연합하게 되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허용하시지 않으신다.
<제 10 장> 아시리아아의 패망
* 사7:1-10:4에서는 북조 이스라엘의 멸망을 기록한다.
시리아(Syria; 아람; 수리아)와 동맹한 이스라엘, 이에 대응한 아시리아(Assyria)와 동맹한
유다 왕국. 모두 잘 못된 행위들이다.
사10:5-12:6에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던 아시리아의 멸망을 예언한다.
* 우리나라 외래어표기법에는 바벨론→바빌로니아로, 앗수르→아시리아로, 바사→페르시아로 한다.
* 10장까지 시간의 흐름을 보면 6장→10장→1장→5장순이 된다.
[사회 약자에 대한 보호] (사10:1-4)
성경은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 것은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본능력이 없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회보장 제도를 사회가 마련해야 한다(신10:18; 시10:14; 잠23:10; 약1:27). 하물며 지도층이 고아와 과부에게 불의를 행한다면 그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아시리아(앗수르)의 교만과 패망] (사10:5-11)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은 유다와 이스라엘이다. 아시리아는 그들이 범죄 할 때 도구(道具)로 그들을 징계하시는 데 사용하셨다. 도구는 목적이 아니다. 그런데 아시리아는 교만하고 오만(사10:7-11)하여 자기들의 힘이 강성하여 다른 나라를 정복한다고 생각하고 그들을 아주 없애 버릴 생각을 하였다.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 도구로 사용되는 나라나 사람은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그러면 높이 드실 것이다. 아시리아는 분을 모르는 교만으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그 백성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 재물을 약탈하는 우를 범하고 이것이 자기들의 힘이라 생각했다.
* 갈로(Calno) 알렙포 서북쪽 13km 지점에 있고 쿨란이와 동일시되고 암6:2에서 갈레도갈로와
같은 곳으로 보인다. 738 B.C.에 아시리아에 의해 정복되었다.
* 하맛(Hamath) “요새” 라는 뜻으로 수리아의 주요도시로서 하맛 어귀는 이스라엘이 이상으로
생각하는 북쪽 경계지역이다.
* 사마리아(Samaria) 예루살렘으로부터 북쪽 56km 지점, 지중해로부터 동쪽 33km에 위치한
갈멜산 동남쪽 끝자락에 위치한다. 북조 이스라엘의 수도였다.
[아시리아(앗수르)의 교만과 패망: 벌하실 때와 그 이유] (사10:12-14)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신 후에 아시리아를 벌하실 것이다. 나의 힘으로 근접국가를 멸하여서 국경을 없앴다. 내가 나아가는 길에 막을 자들이 없었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는 교만의 극치이다. 하나님은 교만을 싫어하시고 징계(懲戒)하신다. 도구로 사용되는 자는 온유와 겸손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이 높이시고 귀한 그릇이 되게 하신다.
[하나님의 도구와 그가 가져야 할 자세] (사10:15-19)
도끼나 톱이 그 사용자에게 어찌 큰 체하겠는가? 아시리아는 도끼나 톱과 같은 존재인데 스스로 자만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들을 불로 소멸하실 것을 예언하신다. 환자가 점점 소진하여 죽는 것과 같이 소멸할 것을 예언하신다. 결국, 아시리아는 612 B.C.바빌로니아의 나보폴라사르 왕에게 수도 니느웨가 함락되고 제국은 멸망한다.
[구원받을 유다의 남은 사람들] (사10:20-23)
바빌로니아에서 귀환하는 사람은 제한적일 것이다. 남은 자들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다시 그들을 정복한 자를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이나 대다수는 멸절되고 의의 종들만 돌아올 것이다. 722B.C.이스라엘의 함락과 아수르에 포로, 586B.C.에 남조 유다의 패망과 바빌로니아 포로로 이 백성이 남의 종이 되었으나 하나님은 그들 중 의로운 자들을 남겨두셨다.
[아시리아(앗수르) 패망 예언 1: 시온 백성은 두려워 말라] (사10:24-27)
시온 백성은 아시리아를 두려워 말라 그들을 내가 멸하리라고 선언하신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밖에 있지 않으며 내 안에 있는 죄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불 신앙이 문제이다. 믿는 사람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믿음 위에 굳건히 서있는 나라는 외침(外侵)이 두렵지 않다.
[아시리아(앗수르) 패망 예언 2: 침공을 받겠지만 두려워 말라] (사10:28-34)
아시리아의 침공 예언이다. 아시리아가 북방으로부터 내려와서 예루살렘 동북방 12km에 있는 믹마스에 중장비와 병참을 두고 여기서 예루살렘으로 침공해 올 것을 예언한다. 그러나 아시리아가 예루살렘에 진군하여 기세 등등이 나아오나! 결국은 멸망할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은 하나님의 섭리를 설계도면을 보는 것 같이 선명하게 그린 것이다.
* 미그론(Migron) 사울의 진지이며 게바 부근에 있었다( 삼상14:2 ). 믹마스 북쪽, 아얏과 믹마스
사이, 믹마스 에서 아이에 이르는 길에 있으며 아시리아 군대의 진로가 되리라고 말한
성읍( 사10:28 )이다.
* 믹마스(Michmash) “그모스의 곳” 이란 뜻이며 예루살렘 동북쪽 13km 지점 산지의 벤야민
지파의 땅이다. 믹마스는 북방에서 예루살렘을 침략하는 자들의 전진기지였던 것 같다.
중장비와 보급을 두고 가볍게 예루살렘을 공격한 모양이다. 현재는 무크마스(Mukmas)와 동일시
된다. 전술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삼상13:2-14:13)
* 게바(Geba) 예루살렘 북쪽 9km, 믹마스 서남쪽 3km 지점으로 오늘 예바(Jeba)로 추정되며
베냐민 지파의 제사장 성읍이었다.
* 라마(Ramah) “높은 곳” 이란 뜻이며 예루살렘 북쪽 8km 지점의 성읍으로 바아사가 기지화했다.
바빌로니아 포로를 집결시켰던 곳이다(렘40:1).
* 기브아(Gibeah) 히브리어로 “구릉”을 의미한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벧엘로가는 도로변에 있는
기브아는 이스라엘 초대 왕인 사울의 고향이다(삼상 10:26).
* 갈림(Gallim) “돌무더기” 란 뜻이고 기브아와 아나돗에 인접한 지역이며
바후림 근처로 사울의 딸 미갈의 남편 말다의 고향이기도 하다(삼상25:44)
* 라이사(Laish) 벤야민 촌락으로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다.
* 아나돗(Anathoth) 예루살렘 북서쪽 5km 지점에 있고 현대 지명은 ‘아나타’이다.
그러나 옛 아나돗이 있던 자리는 ‘아나타’ 남서쪽 1km 지점에 있는 ‘라스 엘-카루베’로
추정한다.
* 맛메나(Madmena) “거름더미” 라는 뜻으로 가사에서 24km 예루살렘 북쪽 아나돗과
게빔 사이에 있던 베냐민의 한 성읍(사 10:31)이다.
* 게빔(Gebim) 베냐민의 한 마을로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예루살렘 바깥쪽에 있었을 것으로만 추정하고 있다(사 10:31).
* 놉(Nob) 사울 왕 때 다윗이 도피 중 찾아가 제사장 아히도벨의 후대를 받았던 곳이다.
이 때문에 제사장과 가족 85명이 사울에게 학살을 당했다(삼상21:1-6; 22:6-23).
<제 11 장> 장차 실현될 왕국; 이새의 뿌리에서 나올 통치자
[메시아의 품성과 정의로운 통치] (사11:1-5)
이새의 줄기에서 나오는 한 싹 그는 메시아이다. 첫째 그의 성품은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며,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다. 둘째, 인자하신 심판자이며 정의와 정직으로 판단하시고 심판하신다. 새 왕이신 메시아는 많이 참으시고 인자하시다.
[낙원에 대한 환상(幻想)] (사11:6-10)
이새의 싹에서 난 싹이 거하는 곳은 영화롭고 모두가 화합하고 공생하는 평화의 왕국이다. 여기서는 투쟁이나 서로 상함이 없다. 그 산천 초야(山川 草野)는 평화롭고 아름다움의 극치일 것이다. 그곳은 모든 생명이 공생 공영(共生 共榮)하는 평화의 나라가 전개될 것이며, 메시아가 다스리시는 정의(正義)의 왕국이다.
[메시아 나라의 세계적 확산] (사11:10-16)
메시아 왕국은 세계국가이다. 그의 백성을 그들이 포로로 잡혀갔던 나라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등의 나라에서 성지(聖地)로 귀환한다는 뜻이며 나아가서 메시아 왕국은 그의 영적 세계가 전 세계로 확산한다는 뜻이 있다. 이스라엘 내부의 갈등도 없으며 그들은 인근 각국 서쪽으로는 블레셋, 동방으로는 에돔, 암몬, 모압을 넘어서며, 남방으로는 멀리 이집트를 지배할 것이고, 북쪽으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에서 유다로 대로를 여시어 백성이 돌아올 것을 예언한다.
* 바드로스(Pathros) 이집트의 남쪽 지방이다. 멤피스 바로 남쪽에서 나일 강 제1 폭포까지이다.
* 구스(Cush), 에티오피아와 엘람(Elam)은 남서부의 고원지대, 시날(Shinar)은 바빌로니아가
포함된 지역, 하맛(Hamath)은 “요새” 라는 뜻이며 시리아의 주요 도시이다.
<제 12 장> 감사 찬송;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감사
[시온의 노래: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길라] (사12:1-3)
이제 여호와의 노(怒)는 거두셨고 안위하시니 두려움이 사라지고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노래이시며, 구원이시다. 뭇 백성은 시온의 노래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왜 두려울까? 죄를 짓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고 믿음이 사라졌을 때 생긴다. 이것이 회복되면 두려움은 사라진다.
[시온의 노래: 만국을 향한 선포] (사12:4-6)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의 이름이 만국에 높다 할 것이다. 크고 크신 하나님의 이름을 만국에 높이 부르고 그가 이루신 구원의 역사를 온 땅에 알게 하여야 한다.
<제 13 장> 바빌로니아에 대한 경고
*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啓示文學)에 속한다.
사13:1-14:23에서 바빌로니아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다.
* 우리나라 외래어표기법에는 바벨론→바빌로니아로, 앗수르→아시리아로, 바사→페르시아로 한다.
[바빌로니아를 멸하실 도구] (사13:1-5)
하나님은 교만해진 바빌로니아를 멸하시기 위하여 군대를 모으신다.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키기 위한 군대는 메대와 바사(페르시아) 사람들인데 이들은 바빌로니아 동남쪽 560km나 떨어진 먼 곳의 군대이다. 이들을 하나님이 동원하신다. 깃발을 민둥산에 세워 잘 보이게 하고 군대가 모여서 큰 세력을 집결시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바빌로니아도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았으나 626B.C.나보폴라살이 아시리아를 멸망시키고 그의 세력권에서 벗어났으며 605B.C.에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성전 기물을 탈취하고 다니엘 등 3 친구를 포로로 잡아갔다. 그리고 586B.C.에 남조 유다가 멸망하고, 539B.C.페르시아(바사)에 의해 바빌로니아가 멸망한다. 이사야의 예언 활동 기간은 740B.C.-680B.C. 이며 이 예언은 180년 뒤에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그림과 같이 선명하다.
[여호와의 날] (사13:6-10)
여호와의 날은 남은 의인에게는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가 있지만, 비록 선민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악의 무리에게는 하나님 진노의 화살이 임할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당할 고통과 슬픔은 말할 수 없을 것이며 땅의 황폐와 해가 빛을 잃음은 하나님의 크신 진노를 은유로 설명한다. 구약시대에는 세상 정치와 관련하여 생각했지만, 신약에서는 종말론과 연관(살전5:2; 벧후3:10)하여 생각한다.
[바빌로니아 백성이 당할 일들 즉 죽임] (사13:11-19)
바빌로니아의 교만은 하나님 진노의 대상이다. 그들은 처참하게 침략자에게 당할 것이다. 약탈, 학살, 강간을 당하고 그들 백성을 모으는 자도 없고 모두 도망갈 것이다. 그들이 당하는 처참한 모습은 그들이 예루살렘을 침공하여 저지른 잔학한 행동과 같은 모양이 될 것이다. 비록 도구로 사용되어 침공했어도 극에 달하는 악을 행해서는 아니 된다.
[바빌로니아의 멸망의 길] (사13:17-22)
바빌로니아를 치는데 메데는 선봉으로 쓰였다. 그 결과 바빌로니아는 황폐화와 적막만이 남을 것이다. 이 예언은 180년 뒤인 539B.C.에 사실로 나타났다. 당시 메데는 소국이었다. 그런데 열방의 영광인 바빌로니아의 정복자로 묘사한다. 바빌로니아 침공에 앞장선 메데는 페르시아 제국 건설에 이바지하게 된다. 멸망 후의 바빌로니아는 폐허와 사람이 살지 않는 황무지로 돌아간다는 예언이다.
* 메데(Med, Media) 영어사전에서 “메디아”로 표기하며 카스피 해 남쪽 아르메니아 동쪽,
메소포타미아 동북쪽에 유치한 나라로 국민은 인도아리안 민족들이다.
<제 14 장> 바빌로니아, 아시리아아, 불레셋의 멸망 예언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에 속한다.
사13:1-14:23에서는 바빌로니아, 사14:24-27절에서 아시리아,
사14:28-32절 에서는 블레셋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다.
[포획하던 자를 주관하게 될 포로였던 자] (사14:1, 2)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고 본토 가나안 땅에서 이들을 주관하던 자들을 오히려 노비로 삼고 주관하는 입장이 된다. 하나님이 남겨둔 사람들이 가나안으로 귀환하는 영광을 누릴 것이다.
[바빌로니아 왕을 풍자한 노래: 스올로 내려간 바빌로니아 왕] (사14:3-20)
이사야서 14장 3, 4절에서 “안식을 주시는 날”은 이스라엘에 평화를 주시는 날에 노래를 지어 부를 것이며, 사14:5, 6에 바빌로니아로 인근 국가들을 정복한 사실 특히 605 B.C.에는 이집트를 갈그미에서 몰아낸 전쟁 등 그들을 대항할 나라가 없었다. 사14:7, 8에서는 바빌로니아가 멸망함으로 이웃 국가들이 평안을 찾는다. 사14:9-11에서 바빌로니아 왕이 스올에 떨어져서 세상 영웅들의 영접을 받으며 그들이 “너도 우리와 같은 신세가 되었구나!” 라는 조롱을 감수해야 한다. 그의 밑에는 구더기와 지렁이가 깔린 비참한 상황을 그린다. 사14:12-15에서 바빌로니아 왕의 교만한 모습을 묘사한다. 자신을 “아침의 계명성”이라 부르고 하나님 위에 앉는다는 교만은 하루아침에 계명성처럼 떨어진다. 교만한 자의 당할 참상이다. 사14:16-20에서 바빌로니아 왕의 악행은 열국을 황폐시키고 포로를 놓아주지 않고 악을 행하던 그가 스올의 밑바닥에서 고난을 겪는다고 풍자한 노래이다.
[바빌로니아 멸망 예언] (사14:21-23)
여호와께서 바빌로니아를 멸하시리라. 바빌로니아는 실로 길지 않은 번영을 누렸다. 바빌로니아는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나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바빌로니아는 신바빌로니아 제국이다. 이들은 626 B.C.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제국을 건설 하였고 539 B.C. 페르시아에 의해 멸망한다. 겨우 87년간 유지한 샘이 된다. 이는 교만 때문이다. 피정복민족에게 지나친 악을 행한 결과이며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 위에 오를 수 있다는 망상의 결과이니 얼마나 교만하였는가? 도구는 도구로 겸손해야 한다. 바빌로니아 멸망 후에 바빌로니아 옛터는 사람이 살지 아니하는 황량한 들이 될 것이다.
[아시리아(앗수르)의 멸망 예언] (사14:24-27)
여호와께서 아시리아를 파하시리라. 아시리아의 멸망은 바빌로니아 멸망보다 앞선다. 즉 87년 앞서는데 이사야는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먼저 예언하고 나서 아시리아의 멸망을 기술한다. 이사야 예언 당시에는 아시리아의 세력이 근동을 지배할 때이다. 그러나 그들 역시 교만하여 피정복민족을 학대하고 악정을 베풀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를 저주할 것이라(출23:22; 민24:9) 하셨다. 목적과 수단 사이에 차이는 무엇일까? 이스라엘의 패역은 분명 징계를 받지만, 회개를 통한 구원이 있지만, 이방의 교만으로 인한 범죄에는 구원이 따르지 않는다.
[불레셋에 대한 멸망 예언] (사14:28-32)
여호와께서 블레셋을 소멸시키시리라고 하셨다. 불레셋은 이스라엘이 넘어야 할 나라였다. 가나안 정복 시 멸절시켜야 할 민족인데 그리하지 못했다. 그 결과 끊임없는 분쟁이 일어났다.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이다. 이사야는 725 B.C.에예언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불레셋은 701 B.C.아시리아 산혜립의 침공, 609 B.C. 이집트 왕 느고의 침공과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의 침공을 받아 유다가 멸망하는 비슷한 시기에 멸망하고 그 통치자와 백성이 추방되어 영원히 멸망했다. 이사야의 예언이 있었던 후 약 120여 년 뒤에 성취된 일들이다.
* 우리나라 외래어표기법에는 “느부갓네살”을 “네부카드네자르”로 표기한다.
<제 15 장> 모압에 관한 경고 1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에 속한다.
* 모압은 롯의 후손(창19:36, 37)이다. 큰 민족을 이루었다(민21:28, 30).
사해 동쪽 지역에 거주함. 모압의 알(Ar)은 모압의 수도로, 아르논강 남쪽에 위치한다.
기르(Kir)는 모압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며 천연 요새이다.
[모압에 대한 경고] (사15:1-9)
여호와께서 모압을 황폐하게 하시리라. 그의 중요성읍이 하루아침에 황폐할 것이나 그들은 사15:2-4에서 보면 우상(그모스) 앞에 나아가서 비는 어리석음, 그러나 이사야는 오히려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이 슬피 울며 피난길에 선다는 것을 예언한다. 사15:6에 니므림 물은 모압의 맑은 물로 사해로 흘러간다. 수원이 풍부하여 마르지 않은 물이다. 그런데 이것이 마르고 작물을 기를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살육을 피할 수 없게 된다(디몬 물=디본)는 예언이며 이들이 당할 고난이다.
* 알(Ar) 모압의 수도이고, 기르(Kir) 모압의 관문 도시이다(사15:1).
* 디본(Dibon) 사해 동쪽 21km 지점에 있는 모압의 성읍인데 시혼에게 점령당하였고(민21:26,
사15:9) 후에 갓 지파에 분배되어 디본 갓이라 불렀다(민33:45). 후에 다시 모압에게 귀속되었다
(헴48:18,22). 지금의 텔 에드 데이브(Tell ed Dheib)인 남부 유대 성읍 디모나(Dimonah)인 듯하다.
* 느보(Nebo) 바빌로니아 신(神) 느보에서 유래한 이름과 고지나 높은 곳을 의미하는 아랍어에서 온
'네보'로서 느보성은 르우벤 지파가 건설(민32:3, 대상5:8)하였고 느보 산은 높이 835m이며,
모세가 죽기 전에 이산에 올라가서 가나안을 내려다보았다(민33:47, 신32:49, 34:1-4).
* 메드바(Medeba) 고요하게 흐르는 물이란 뜻이고 헤스본에서 남쪽으로 9km, 사해로 들어가는
요단 강 입구에서 남동쪽 약 24km 지점. 현재 이곳은 마다바(Madaba) 라는 도시가 있다.
* 헤스본(Heshbon) 요단 강 하류 요단 강 동쪽 25km 지점의 도시로
아모리 왕 시혼의 도읍지였고 방랑자들이 모여 모압을 괴롭힌 거점이었다.
* 엘르알레(Elealeh) 길르앗 남쪽 경계선과 요단 동편에 있었으며 이 땅은 헤스본에서
동쪽으로 약 1.6km 떨어진 곳이며 사해의 북쪽에서 동쪽에 있다.
갓과 루우벤 두 지파가 빼앗아 재건한 모압 고지대의 마을(민32:3, 37, 사15:4, 16:9, 렘48:34)이다.
* 야하스(Jahaz) 야사(Jahzab) 라고도 부르며 요단 동쪽 왕의 대로상의 메드바 동쪽 5.6 km
지점, 헤스본 북쪽 9km 지점으로 추정하나 확실하지 않고 메드바 근처 인 것은 확실하다.
모세가 아모리왕 시혼을 이긴 곳이다(민21:23; 수13:18; 21:36; 삿11:20)
* 니므림(Nimrim) “맑은 샘”이란 뜻으로 사해 북쪽 13km 지점에 요단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이물이 말랐다고 이사야와 에레미아가 말했다(사15:6; 렘48:34).
<제 16 장> 모압에 관한 경고 2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에 속한다.
* 모압은 롯의 후손(창19:36, 37)이다. 큰 민족을 이루었다(민21:28, 30).
사해 동쪽 지역에 거주함. 모압의 알(Ar)은 모압의 수도로, 아르논강 남쪽에 위치한다.
[다윗 왕권에 대한 복종] (사16:1-5)
이사야는 모압 난민에게 다윗의 왕권에 복종하고 그 복종의 표시로서 조공을 바칠 것을 제안한다. 실제로 조공을 드림으로 화친했었는데 이를 배반하였다(왕하3:4, 5). 사16:3, 4는 아시리아(뜻: 멸절하는 자)의 침공으로부터 유다의 피난민이 피할 곳이 되라는 말이다. 사16:5는 유다의 부흥 또는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한 왕국 건설을 뜻하나 사16:3, 4와 연관해 보면 고통당하는 유다 피난민에게 안전한 피난처가 되라는 뜻이다. 롯은 아브라함의 족하(足下)이고 실은 한 가족이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에는 그들이 멸망한다는 예언이기보다는 경종을 울리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바란다.
* 셀라(Sela) 사해 남부를 차지하고 있던 에돔 족속의 성읍(왕하 14:7; 사 16:1; 42:11)으로
본다면 많은 학자는 이 셀라가 나바테아 왕국의 수도 페트라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이 셀라는 페트라를 내려다볼 수 있는 산 고지를 가리킨다.
[모압의 교만과 영적 분별력의 상실] (사16:6-14)
이사야서 16장 1-5절에서 이사야는 두 가지를 권고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거부하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능력을 상실하였다. 그 결과 교만하여 망하게 되고 통곡하고 근심하게 된다. 모압은 풍부한 수자원과 목초지를 갖고 있어서 농업과 동시에 목축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런 부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촉진 시키고 우상을 숭배하는 우를 범하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의 근원을 막으시고 초원에 풀이 자라지 못하게 하신다. 그리고 침략군이 와서 그 땅을 노략질하고 황폐화한다. 이들이 우상 숭배 때문에 피곤할 정도로 애쓰지만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에게로 향하는 그들에게는 환란이 오게 되어있다.
* 길하레셋(Kir-hareseth) 모압의 한 성읍이다. 은유적으로 모압을 지칭하는 말이다.
* 헤스본(Heshbon) 요단강 하류 요단 동쪽 25km 지점의 도시로 아모리왕 시혼의 도읍지였고
방랑자들이 모여 모압을 괴롭힌 거점이었다.
* 십마(Sibmah) 헤스본에 인접한 모압의 대표적 포도산지이다(이16:8,9). 모압 전체의 경제를
나타낸다. 야셀은 모압 북쪽의 십마에 버금가는 포도산지 이다.
* 야셀(Jaazer) 아모리인의 성읍이었고 목장과 포도 산지였다. 람바 서쪽 14km 지점의 현재
이아셀(Jazer)로 추정된다(민21:32;32:35; 수21:39; 사16:8).
* 길하레셋(Kir-hareseth) 모압의 한 성읍이다. 은유적으로 모압을 지칭하는 말이다.
<제 17 장> 에브라임과 다메섹 멸망 예언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에 속한다.
여기서 에브라임은 북조 이스라엘, 다메섹은 아람(시리아)을 지칭한다.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 (사17:1-3)
시리아(수리아; 아람)는 북조 이스라엘과 연합하여서 남조 유다를 공경한다. 아람과 유다는 다윗 이후 좋은 관계가 아니고 적대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형제 나라이다. 그런데 이방 아람과 연합한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의 멸망도 예언되고 아람의 멸망도 예언한다. 이로 다메섹이 돌무더기가 될 것이다. 이 장에서 책망한 내용은 왕하16:5-18 그리고 대하28:5-21에 기술되어있다.
* 아로엘(Aroer) 사해 동쪽 24km 지점의 성읍 아르논강 북쪽, 요단강 동쪽에 위치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1] (사17:4-6)
에브라임의 심판으로 남은 자가 극소함을 예언한다. 에브라임은 북조 이스라엘의 대표적 지파이고 이스라엘을 은유적으로 이른다.
* 르바임 골자(the valley of Rephaim) 길이 약 5km, 넓이 약 3km로 블레셋과 전쟁이 자주
있던 곳이다(삼하5:17-25). 예루살렘 남서쪽 베들레헴 쪽으로 5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2] (사17:7-11)
이스라엘이 황폐하게 되는 이유는 이방 신의 수입이지만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다. 선민의 타락과 그 남은 자는 묘한 관계를 나타낸다. 죄악이 만연(蔓延)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남은 자들이 있다.
[아시리아의 유다 침공 실패] (사17:12-14)
이 단락에 내용은 앞 절과는 장르가 다르다. 아시리아(앗수르)가 아람을 침공하고 유다도 침공하지만 유다에서는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언한다. 하나님의 개입으로 아시리아는 실패한다(왕하18:17; 19:35-37; 대하32:21). 그러나 회개하지 않은 유다는 결국 아시리아를 멸망시킨 바벨론에게 멸망한다.
<제 18 장> 구스(에티오피아)에 대한 예언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啓示文學)에 속한다.
[구스(에티오피아)에 관한 예언] (사18:1-7)
이 예언은 책망이나 멸망에 대한 예언이기보다는 앞으로 구스가 유다 왕궁에 예물을 드릴 것이라는 예언이다. 당시(721B.C.-701B.C.) 사정은 아시리아가 아람(시리아)과 북조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다시 남조 유다를 1차 침공(왕하18:14-18)하고, 다시 2차 침공(왕하18:19 이하)을 시도하고 있었다. 그런데 에티오피아는 이때 이집트 전역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유다가 무너지면 다음은 에티오피아가 침공 대상이 된다는 판단으로 군사를 일으키고 주변 국가에도 독전을 하였으나 유다가 하나님의 구원으로 아시리아를 물리치는 것을 보게 되면 에티오피아가 예물을 보낼 것이라는 예언이다. 이 예언(대하32:23)은 그대로 이루어 졌다.
<제 19 장> 이집트에 대한 예언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의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啓示文學)에 속한다.
[이집트(애굽)의 정치적 쇠퇴(衰退)] (사19:1-4)
이사야는 이집트에서 일어날 사회, 정치, 종교의 혼란을 가져올 내분이 일어나겠고 이런 내분은 국력의 약화를 가져와서 외 침(外 侵)에 견디지 못하게 된다. 그런 결과 그들의 정신은 쇠약해지고 점술이 성행함으로 더 사회를 혼란하게 만든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포악한 왕에게 넘기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 예언은 725B.C.년 전에 했던 것 같다.
[이집트의 경제적 쇠퇴] (사19:5-10)
이집트인은 가뭄으로 극한 고통을 당하리라. 이집트는 물의 나라이다. 그런데 이 수자원이 고갈되어서 농업, 수산업, 목축, 가내공업이 다 문을 닫게 된다. 이런 상상은 참 어려운 것이다. 나일 강 삼각주의 퇴적층은 비옥한 토양과 수많은 생명을 탄생시키는 곳이다. 이런 물이 말라버린다는 것이다.
[이집트의 정신적 퇴보] (사19:11-15)
이집트인의 지혜가 어리석게 변한다. 이집트의 주요 3대 도시는 멤피스(Memphis), 놉(Noph), 소안(Zoan) 인데 소안의 방백과 놉의 방백이 모두 어리석어진 것이다. 이집트의 지혜 자가 다 어리석은 자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이 지혜를 거두어 가시면 우매 자가 된다. 어떤 때 우리는 아주 어리석은 행위를 할 때가 있다. 그 뒤에 후회하는 경우가 많다.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망할 때 사람들에게서 이 지혜가 흐려지고 어리석게 된다. 더욱이 죄를 범했을 때 사람들에게서 지혜가 흐려지게 된다. 또한, 욕심이 커지면 그만큼 지혜는 사라지고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아시리아의 침입과 민족성의 파괴] (사19:16, 17)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다. 모든 역사과정에 개입하시며 섭리하시고 주관하신다. 이집트가 나약해지고 유다가 이집트의 두려움이 될 것임을 예언하시고 이집트인들이 떨게 될 것을 예언한다.
[세계 평화와 여호와 경배에 대한 예언] (사19:18-25)
앞의 심판에 대한 예언과는 전연 다른 장르로서 이스라엘, 이집트, 아시리아(앗수르)까지 모두 하나님에게 돌아오고 하나님을 찬양 할 것임을 예언한다. 신약시대 복음이 모두 전파되고 그들 중에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일어날 것을 예언한다. 사19:18-22에서는 유다의 종교적 영향력이 이집트까지 미칠 것을 예언하고 사19:23-25에서는 아시리아와 이집트의 화친을 유다가 중재역할을 할 것이며 세계 모든 나라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것을 예언한다.
<제 20 장> 아시리아아의 이집트와 구스 정복 예언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啓示文學)에 속한다.
[벌거벗은 선지자의 예 표] (사20:1-6)
이 예언은 사20:1의 아시리아(앗수르)의 장군 다르단이 아스돗을 치던 해인 713B.C. 년에 선포된 것이다. 구스(에티오피아)는 이집트의 24 왕조를 711B.C.에 무너뜨리고 이집트 전역을 장악했다. 그리고 아시리아가 에티오피아인과 이집트인을 포로로 잡아간 것은 681B.C.-663B.C.사이이다. 이때 포로가 잡혀갈 때 모습의 예표(豫表)로 이사야가 3년 동안 벗은 몸과 맨발로 다녔다. 이집트는 유다가 대국으로 생각하고 의지하던 나라이다. 그러니 유다의 허탈감이 어떠하였겠는가? 신정국가인 유다는 이런 유의 외세를 의지할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여야 했다. 유다는 하나님을 힘과 방패와 요새로 생각해야 한다. 우리의 삶 역시 세상의 지식, 재물, 지위, 권력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의탁하고 살면 승리한다. 이는 믿음의 승리를 의미한다.
* 아스돗(Ashdod) 지중해 동쪽의 해안대로 상의 성읍으로 아시리아에서 이집트로 연결하는
교통요충지로서 군사적으로 중요 성읍이었다. (김정권. 2016. p. 135, 지도 11참조)
<제 21 장> 바빌로니아 멸망, 두마와 아라비아에 대한 경고.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의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啓示文學)에 속한다.
[바빌로니아(바벨론) 멸망에 관한 묵시] (사21:1-10)
이사야서 21장 1-5절에서는 바빌로니아 멸망의 공포를 다룬다. 바빌로니아는 다른 나라를 침공하던 나라인데 이제 그들도 멸망의 종말을 맞을 것이다. 그들의 우상숭배와 교만은 이웃 국가들의 연합으로 위협적인 공격을 받는데 그 위세가 무시무시하다. 사21:6-9에서 침략군의 위세를 설명한다. 바빌로니아를 침공하는 군대는 기마병이 쌍쌍이 올라오는데 그들에게 함락되고 바빌로니아의 우상(Anu, 아누의 딸 Ishtar, 달의 신, 태양신 Shamash 등)이 다 부서지고 완전히 파괴된다. 사21:10에서는 유대인들에게 위로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강대한 바빌로니아가 순식간에 무너진다는 말이 예언 당시 유다 백성에게 믿어졌겠는가?
[에돔(두마)에 관한 경고] (사21:11, 12)
에돔의 수도 세일에서 이사야에게 묻는 형식이다. “파수꾼이여 밤이 어떻게 되었느냐?”를 두 번 반복해서 묻는다. 에돔 역시 아시리아(앗수르)와 바빌로니아(바벨론)의 침공을 받아서 고통 속에 지냈기 때문에 언제 끝날 것인가? 라는 질문이기도 하고 죄악의 어둠이 언제 끝날 것인가? 묻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침은 오겠지만, 다시 밤이 올 것이라 하셨다.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 (사21:13-17)
열 번째 이방 국가에 대한 경고이다. 이들은 이스마엘의 후손인 아라비아이다. 솔로몬 때부터 교역 등 긴밀한 관계를 가져왔다(왕상10:14, 15). 드단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무역업을 하던 대표적 상인들이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로 농업과 목축을 하여 상당한 세력을 확보했었다. 그러나 일 년 안에 쇠하여질 것을 예언한다.
<제 22 장> 환상의 골자기와 셈나에 대한 경고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啓示文學)에 속한다.
[유다의 패망: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 (사22:1-7)
이방에 대한 경고를 전개하던 이사야는 이방에 의해서 유다를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다. 유다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이지만 그들은 계속되는 선지자들의 회개 촉구에도 불구하고 돌아서지 아니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선민의 타락을 가슴 아파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애정 어린 표현으로 경고한다. 즐거이 먹고 마시던 성읍이 위기를 맞아서 지붕 위로 피하고(이스라엘 지붕은 슬래브 지붕처럼 평평하다.) 도망하였다가 다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다. 엘람과 기르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성읍으로 당시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던 지방이다.
* 엘람(Elam) “고원지대” 라는 뜻이고 이란 남서쪽의 쿠지스탄 평원과 자그로스 산맥 근처에 살던
고대민족으로 교통 요충 지대이며, 풍부한 자원과 상업이 발달했던 것 같다(렘49:34; 렘49:34).
바빌로니아를 도와 아시리아를 멸망시키는데 참여했다.
* 기르(Kir 또는 ‘길’로도 표기) 바빌로니아 티그리스 강 변의 성읍으로 위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사22:6).
[유다의 패망의 원인: 환상의 골짜기에 관한 경고] (사22:8-14)
유다는 지키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아니하고 회개를 촉구하였으나 오히려 먹고 마시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이로써 그들의 멸망은 정해진 것이다. 사22:8-10에서 유다가 군사적 방위력을 증강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 국가가 방위력을 증강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나면 그것은 소용이 없다. 사22:12-14에서 회개를 촉구하나 이들은 오히려 방자하게 살았다.
[유다 관리인 셉나에 대한 경고] (사22:15-25)
왕의 곳간을 맡은 셈나는 부정축재를 하여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게 되고 그 후임으로 엘리아김을 세워서 그가 신실하게 일을 했으나 후에 타락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 결과 마지막에 그의 영광스런 일들이 허사가 된다는 예언이다. 엘리야김은 처음에는 단단히 박힌 못으로 표현되지만, 후에 그 못이 부러져서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근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 셈나(Shebna) 히스기야 왕과 동시대인으로 이집트인 같으며 친 이집트파로 인정되며,
이사야가 개인을 경고한 경우는 셈나 하나뿐이다(사22:15-25).
<제 23 장> 두로와 시돈에 대한 경고
* 이사야서 13장에서 23장까지는 시(詩)의 형식을 취한 계시문학(啓示文學)에 속한다.
[두로 심판을 위한 호출] (사23:1-7)
두로는 예루살렘 서북방에 있는 무역항이며 상업을 통한 부를 축적한 지중해 연안 나라이다. 이들은 원양항해술과 공예기술이 특출한 사람들이다(왕상7:14). 그래서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교역이 왕성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우상을 유다에 수출하는 결과도 낳았다(왕상16:31-33). 두로(시돈의 남쪽)와 시돈은 64km 떨어져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들이다. 같은 경제권이었다. 고대사회에 부와 명성을 지닌 도시들이다.
* 다시스(Tarshish) “녹주석 ?” 이란 뜻으로 스페인 남방 지중해 항구로 지부롤터 해협 근처에
있는 무역항으로 본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아주 먼 곳을 지칭했던 것 같다(사23:1).
때로는 페니키아를 이르는 것 같기도 하다(사23:1, 14; 겔27:25; 왕상10:22; 22:18; 대하20:36, 37;
사23:6).
* 깃딤(Chittim)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구부로 섬의 옛 이름이다. 넓은 의미로는 지중해
동쪽 해안의 도시들을 지칭한다(민24:24; 렘2:10; 단11:30).
[바빌로니아를 통한 두로의 멸망 선언] (사23:4-14)
두로의 멸망은 시돈과 이집트에 고통이 될 것이다. 일종의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것을 말한다. 멸망의 원인은 부에서 오는 방탕 그리고 교만과 우상 숭배 등이다. 두로는 572B.C.바빌로니아 느부갓네살 왕에게 침공당하여 성읍들이 함락되었고, 333B.C.에는 마케도니아 알렉산더 대왕에게 완전히 멸망하였다. 이때, 두로 시민 30,000명이 포로가 되었고 그 지도자들은 모두 교수형에 처해 졌다고 한다.
* 다시스(Tarshish) 스페인 남방 지브롤터해협 근처 지중해 항구로 무역항이다.
예루살렘에서 다시스까지 거리는 273km이다.
* 깃딤(Chittim) 지중해 동쪽 끝에 있는 구부로 섬의 옛 이름이다. 넓은 의미로는 지중해
동쪽 해안의 도시들을 가르친다(민24:24; 렘2:10; 단11:30).
[두로의 회복 예언] (사23:15-18)
칠십 년 후에 두로는 회복하나 여호와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음녀(淫女)와 같이 돈을 벌겠지만 사23:18에서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라 하여 상반되는 진술을 한다. 이방이 회복되어도 하나님께 돌아오지 못함과 일부 회개한 자들은 그들의 소득으로 하나님의 일에 사용할 수 있음을 언급한다고 할 수 있다.
<제 24 장> 여호와께서 땅에 내리실 벌
* 사24:1-27:13에서는 13장에서 23장까지 심판의 결론으로 종말에 있을 심판과 축복 예언이다.
[땅이 공허하고 황폐될 것] (사24:1-3)
땅이 황폐해지고 모든 사회가 혼돈해지는 아노미 현상이 나타난다. 땅이 황폐된다는 것은 소산이 없어진다는 이야기이고 사회적 변별력이 없어진다는 것은 무질서한 사회를 의미한다. 종말에 나타날 하나의 현상이다. 최후의 날에 나타날 한 사회현상이다.
[최후 심판에서 나타날 일들] (사24:4-13)
첫째 하나님의 진노의 불 즉 “소멸할 맹렬할 불”(히10:27)과 “진노의 불”(사30:27)로 말미암아서 남은 자가 많지 않을 것이다(사24:6). 둘째,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땅은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다(사24:7-9). 셋째, 약탈과 파괴로 사람들이 괴롭힘을 당한다(사24:10-12). 그 결과 성읍이 황폐하고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땅이 된다.
[하나님께 찬양] (사24:14-16)
이사야서 24장 14-16절은 24장의 중간 부분으로 전후를 나누는 부분인데 사람들이 여호와께 영광을 돌릴 것을 예언한다. 동서양 그리고 온 땅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다. 종말이 가까울수록 여호와에 대한 찬양은 더 계속될 것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 개입] (사24:17-20)
인간의 죄악으로 자연계가 요동치며 그가 인간을 심판하여 가둔다.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심판 주 하나님 그리고 영광의 하나님] (사24:21-23)
왕과 군대를 벌하시고 하나님이 시온 산에서 왕이 되어 영광을 나타내신다. 세상의 잘못된 왕들은 죄인이 되어 형벌을 받게 된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은 만방에 빛나는 영광을 누리시게 된다.
<제 25 장> 여호와께서 베푸시는 연회와 찬송
* 사24:1-27:13에서는 13장에서 23장까지 심판의 결론으로 종말에 있을 심판과 축복예언이다.
[성도를 지키시는 여호와께 찬송] (사25:1-5)
비록 고난을 겪더라도 성도를 하나님이 지키셔서 고난을 이길 수 있게 하시고 넉넉히 이기는 힘을 주신다. 또 원수를 대적해서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하나님은 고난을 겪는 우리들의 요새이시며, 피난처이시오, 그늘이 되신다.
[온 이방이 구원에 동참할 것에 대한 비전] (사25:6-9)
여호와께서 연회를 베푸시리라. 이 연회는 구원 얻은 백성들의 잔치이다. 열방의 구원 얻은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은 큰 잔치를 배설하시어서 기쁨을 나타내신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모압에 대한 심판] (사25:9-12)
앞에서 구원 얻은 백성의 잔치에 이어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백성은 벌하신다. 모압은 에돔과 마찬가지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음으로 여호와께서 모압을 벌하실 것이다. 성도는 악을 이겨야 하고 이기도록 능력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고 항상 전투하는 사람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제 26 장> 새 왕국에서 부를 종말론적 찬양
* 사24:1-27:13에서는 13장에서 23장까지 심판의 결론으로 종말에 있을 심판과 축복 예언이다.
[구원의 노래] (사26:1-10)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승리를 주신다. 하나님 구원의 날이 임한다.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평강(平康)을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는 여호와께서 친히 반석이 되신다. 그러나 교만한 자들은 낮추신다. 그들은 여호와의 돌보심을 알지 못하며 스스로 자기가 잘 났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잘될 때 그것이 여호와에게서 온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겸손하게 받아야 한다.
[구원의 노래: 주가 되신 하나님] (사26:11-15)
주는 보호자, 관리자, 치리 자 등의 뜻을 가지며 우리를 보호하시는 분이다. 그분이 우리를 높이시고 평강(平康)을 베푸시고 우리의 모든 일을 이루시는 분이다. 그분을 노래한다. 그분 외에 우리를 구원하실 자가 없으니 오직 그분에게만 영광과 노래를 드려야 한다.
[구원의 노래: 부활의 영광] (사26:16-19)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스스로 벗어 날 수 없었던 유다 백성 그들은 하나님께 구원을 부르짖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은 귀환하고 이것은 죄에 빠져서 스스로 벗어 날 수 없었던 죄인들이 회개와 회복으로 부활하는 축복을 누리게 된 구원 얻은 자들의 부활 노래이다.
[노래 부를 날을 기다리라] (사26:20, 21)
고난의 때에는 몸을 낮추고 숨으라. 그리고 기도하라. 공연히 나다니다가 해를 입는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 즉 최후의 심판이 있고 성도는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제 27 장> 이스라엘의 회복
* 사24:1-27:13에서는 13장에서 23장까지 심판의 결론으로 종말에 있을 심판과 축복 예언이다.
[원수들에 대한 심판과 포도원의 노래] (사27:1-6)
이사야서 27장 1절의 리오야단과 용은 부정한 세력을 상징한다. 당시 사회의 정치, 경제, 학문,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타락한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을 강조함으로 성도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이기게 하는 교육이며, 고통을 이기게 하고 악의 세력에 가담한 자들을 경고하기 위함이다, 사27:2-6은 포도원 노래이다. 여기서 포도원은 교회를 가르친다고 볼 수 있다. 사5:1-6 사이의 포도원 노래가 있었다. 5장의 포도원의 노래는 악한 열매를 맺은 포도원이 심판받게 된다는 노래이다. 27장의 포도원의 노래는 하나님의 은혜로 앞으로 의의 열매를 맺게 될 포도원이다. 두 포도원은 아주 다른 의미를 지닌 포도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열매를 맺을 일이 남아있다. 사27:6은 특히 교회의 번영과 발전에 대한 예언이다. 구속사(救贖史)의 전계를 다룬다. 택한 백성들은 뿌리가 박히고, 꽃이 피고, 열매로 온 땅을 채우게 된다.
[하나님의 자애로운 견책] (사27:7-11)
유다에 대한 견책(譴責)과 유다를 징계한 도구인 타국이 받아야 하는 벌의 정도는 전연 다른 것이다. 유다는 회개와 회복을 위한 것이고 도구로 사용된 나라는 멸망을 받게 된다. 결국, 이스라엘을 죄 없는 자 같게 하셔서 움이 돋고 꽃피게 하실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전제로 한 견책이다.
[이스라엘의 회복] (사27:12, 13)
이스라엘 족속이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상(城上)에서 예배하리라. 말세에 이산(離散)으로 세계 각 곳에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족속이 예루살렘에 다 모일 것이란 뜻으로 볼 수 있다.
<제 28 장>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책망
[밟히게 될 에브라임의 면류관] (사28:1-6)
북조 이스라엘의 대표 지파는 에브라임이다. 사마리아가 멸망(722B.C.)하기 직전에 이사야가 선포한 예언이다. 사치와 교만으로 타락해 있던 이스라엘은 환란의 임박을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돌이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시리아는 국토 확장 정책으로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된다. 여기서 심판을 대비한 성도의 자세를 언급한다. 사28:3에 에브라임의 면류관이 땅에 밟힐 것이다. 거부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의 역사이다. 그러나 사28:5, 6에서는 정 반대의 예언이 이루어진다. 남은 자에게는 심판주가 그들의 면류관이 되며, 화관(花冠 꽃으로 만든 관)이 되시며 재판관이 되시며, 성의 장로에게는 힘이 되신다. 선민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총이다.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책망] (사28:7-13)
종교지도 자들이 백성과 마찬가지로 아니 더 타락하고 술 취하고 잘못된 지식을 가르치고 왜곡시킴으로 백성이 잘못된 길로 가게 했다면 그들의 죄는 얼마나 컸을까? 지도자의 타락 은 사회 붕괴에 아주 큰 영향력을 미치게 된다. 특히 종교 지도자의 타락을 생각해 보라 영적 멸망을 가져오지 않겠는가?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경계에 경계를 더 하며”를 두 번 반복하신다. 결국은 아시리아에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다. 오늘 우리 사회도 보라 정치, 경제 지도자들만 타락했는가?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은 성도를 죽이고 더 나아가서 국가 사회를 멸망시키는 원인이 된다.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경고] (사28:14-22)
정치지도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아시리아(앗수르), 아람, 이집트 등과 맹약을 맺어서 안전을 보장받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토끼가 호랑이하고 맹약을 맺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정치지도자들의 오만이 빚은 결과이다. 사28:21, 22에서는 유다의 원수를 이전에 징계하셨던 것과 같이 유다도 범죄 하면 징계하신다(삼하12:9-12; 27:7-11)는 경고이며 선민이나 성도가 범죄 하면 하나님의 징계는 반듯이 따른다.
* 브라심 산(Mount Perazim) 바알 브라심(Baal Perazim)과 같은 곳이며 예루살렘 근처의
르바임 골짜기를 가리킨다. 다윗이 이곳에서 블레셋을 물리쳤다(삼하5:20; 대상14:11).
사28:21의 브라심산은 다윗이 블레셋을 바알을 물리친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언급한 것이다.
* 기브온(Gibeon) “여러 개의 높은 언덕” 이란 뜻으로 예루살렘 북서방 9.6km에 위치하며
현재는 엘집(el-Jib)으로 추정된다.
[농부의 지혜] (사28:23-29)
여호와의 모략과 지혜를 농부에 비유하여 설명하신다. 먼저 하나님은 적당한 방법과 정한 때, 순서를 따라서 자기 백성을 통치하신다(사28:23-25). 둘째는 곡식은 껍질 즉 죄악을 벗겨 버려야 하는데 알곡이 깨지지 않을 정도로 탈곡과 정미가 이루어져야 한다(사28:26-28). 셋째는 이런 지혜와 능력은 하나님께 있음을 밝힌다(사28:29).
* 소회향(caraway) 1년생 식물로 향미료나 약용으로 쓰인다.
대회향(cummin) 목련과의 나무 또는 떨기나무의 열매로 흥분제나 구충제로 쓰인다.
<제 29 장>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배우라
[유다 침공을 한 아시리아(앗수르) 왕 산혜립이 주는 교훈](사29:1-4)
이사야서 29장 1-8절에서는 아시리아 왕 산혜립이 유다를 침공하나 하나님이 대신 싸우시는 장면이 나타난다. 이런 장면은 이사야서 여러 곳에서 분산적으로 설명되고 있다(사18:1-7; 37:21-38). 이사야서에서 주로 다루고 있는 아시리아에 의한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 이집트의 쇠퇴, 아시리아의 유다 침공 실패, 바빌로니아에 의한 유다 멸망, 메데와 페르시아(파사)에 의한 바빌로니아의 멸망 등이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성도에게 종말론적 비전과 하나님의 정의를 교육하시는 것이다. 1, 2절에서 형식적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의 죄와 유다가 불 탈 것을 말하며 3, 4절에서 성이 포위되어 공격을 받는 경우 악인들은 두려움에 떨고 불안정할 것이다. 그러나 의인에게는 두려움이 없다.
* 아리엘(Ariel) 일반적으로 유다 예루살렘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제단 아래로 떨어져 불타도록 만들어진 부분 즉 화상(火床)을 말한다.
[아시리아(앗수르)를 벌하시는 하나님] (사29:5-8)
앞의 단락에서 무서운 심판의 말씀과는 아주 다른 장르가 이 단락에서 열린다. 예루살렘을 공격해 온 무리가 여호와께서 그들을 패배케 하실 것이다. 우레와 지진과 큰 소리와 회오리바람과 폭풍과 맹렬한 불꽃으로 그들을 치신다. 하나님의 권능 앞에 인간의 능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꿈속에서 먹으면 배가 부를까? 환상 속에서 얻은 것이 내 손안에 있을까? 그들의 행동은 그런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삶에서도 헛것을 추구하여 얻었다 하자 그것이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어질까? 자기 혁명 즉 내적 변화가 있어야 한다.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람을 바라보고, 사물을 바라보고, 일을 바라보고, 자연을 바라볼 때 그 속에 무안한 힘을 갖게 된다.
* 아리엘(Ariel)은 일반적으로 유다 예루살렘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제단 아래로 떨어져 불타도록 만들어진 부분 즉 화상(火床)을 말한다.
[신앙적으로 타락한 유다에 대한 책망] (사29:9-16)
하나님이 아시리아를 대적하시는 장르와는 아주 다르게 이 단락에서는 유다의 죄악상을 다시 거론한다. 유다 백성은 세 가지 죄가 있다. 즉 1. 잘못을 깨닫지 못하는 무지는 최악의 무지이다. 깨닫지 못하게 하는 영이라면 병들었으나 통증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사29:9-12). 2. 다음 외식 화 된 하나님 공경은 공경히 아니라 입술로는 공경한다 하나 마음은 떠난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사람들은 진실로 말씀을 배우려 하지 아니한다(사29:13, 14). 3. 하나님은 모르실 것이라는 하나님을 속이려는 행동 등은 자위(自慰)행위이다. 이런 정도는 용인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비밀스러운 행동을 하나님이 어떻게 아실까? 이는 기만적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하나님이 용인하실 수 없는 행동이다.
[메시아에 대한 비전] (사29:17-24)
심판 후에 있을 회복은 메시아 왕국을 소망한다. 앞으로 올 세대는 하나님의 은혜의 때이며, 회복(回復)과 성화(聖化)의 때이다. 심판의 선포와 그다음 회복을 공포하는 것은 예언의 공통점이다(렘21:1-23; 겔33:1-39; 단12:1-13; 호10:1-14:9). 의인은 악인과 더불어 고통당하지만, 의인은 참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신약시대에 메시아의 도래로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며 이를 기반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로 모두 우뚝 서게 된다.
<제 30 장> 순종하는 백성의 복
* 이사야 30장과 31장은 내적 죄악과 이집트와 동맹에 대한 심판과 회복을 다룬다.
[유다가 이집트와 동맹을 맺은 것에 대한 심판](사30:1-7)
이집트와 맺은 맹약이 헛되다. 오로지 유다를 도울 힘은 여호와뿐이시다. 이 전제를 유다는 긍정하지 못했다. 이집트가 자신들의 위기를 건져줄 것으로 믿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패역이다. 당연히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데 이집트를 의지함으로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된다. 이집트는 유다를 도울 형편도 못되고 도울 수도 없는 나라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세상의 재화나, 권력이나, 지식이나, 배경에 의지하는 것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 소안(Zoan)과 하네스(Hanes)는 이집트의 성읍들이다.
[유다와 이집트 동맹에 대한 심판: 패악(悖惡)한 백성의 멸망](사30:8-17)
하나님은 이사야에게 예언의 내용을 서판에 기록하도록 한다. 그러나 구원받을 수 있도록 회개와 믿음을 촉구한다. 이는 하나님의 일반적 경륜이시다.
[하나님의 구속역사: 위로와 회복] (사30:18-26)
하나님을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징계하고 그를 어루만져 치유하는 것과 같은 따사로움이 느껴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가 우리를 일방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비록 죄를 지어 징계는 받았어도 치유와 위로는 항상 주신다.
[아시리아의 패망] (사30:27-33)
여호와께서 아시리아를 치시리라. 아시리아는 하나님의 도구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유다를 침공하여 괴롭히고 이웃 많은 나라를 어렵게 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이런 일로 교만과 오만한 마음을 가져서 여호와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유다와 다르게 아시리아는 하나님의 분노로 종말을 맡게 된다.
* 도벳(Tophet)은 예루살렘 남쪽 흰놈의 골짜기에 있는 아이를 제물로 드리는
우상제단이다(렘7:31, 32; 32:35)
<제 31 장> 이집트를 의지하는 이스라엘에 대한 권면
* 이사야 30장과 31장은 내적 죄악과 이집트와 동맹에 대한 심판과 회복을 다룬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집트를 의지한 유다] (사31:1-3)
아시리아(앗수르)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이집트의 구원을 요청한 유다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범죄 한 것이다. 당연히 고난이 닥치면 하나님께 의지하여 구원을 요청했어야 했다.
적용: 사람은 물질과 환경을 의지하게 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한다.
고난이 닥쳐와도 우리는 굴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의 조건을 의지하지 말자.
기도: 우리가 어려울 때 진정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간절히 구하자. 사람과 의논하지 말고
묵상과 간절한 기도로 하나님 구원의 지혜를 구한다.
[예루살렘을 지키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 (사31:4-9)
이집트로 구원을 요청하려 내려가는 자들은 어리석고 패악한 무리다. 그들 이집트는 아무것도 유다를 위하여 해 줄 수 없는 나라이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나라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오로지 하나님을 의뢰하고 나아가야 한다. 이사야서 31장 5절 “새가 날개 치며 그 새끼를 보호함 같이 나 만군의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보호할 것”이라하나님은 선언하신다. 그런데 유다는 이집트를 의뢰하였다.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백성이다.
<제 32 장> 메시아 나라의 준비: 의(義)의 나라로 회복
[의로 통치할 왕; 의(義)의 나라 출현] (사32:1-8)
정의의 왕이 오신다. 그는 정의로 다스리시고 안식처가 되신다. 당시로써는 히스기야 왕의 도래를 예언한 점도 있겠고 멀리 신약시대에는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 것이다. 왕의 도래는 보는 눈, 듣는 귀, 분명히 말을 하는 혀, 지식을 깨닫는 영적 밝음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사32:5-7에서 왕은 약한 자를 보호하시고 활기를 넣어 주신다. 사32:8에서 존귀한 자는 남은 자 즉 그리스도를 영접한 자를 의미한다. 이들의 일이 무엇이겠는가? 이들은 존귀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여인들의 영적 무지에 대한 경고] (사32:9-14)
이사야가 여성의 무지에 관해서는 사3:16-4:1에서 1차 예언했고 본 단락에서 두 번째 예언한다. 앞에서는 이교도적 사치와 허식을 주로 경고했는데 본 단락에서는 장차 올 재난에 대비하지 아니하고 현실에 안주함을 경고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두 예언의 공통점은 여인들이 영적 분별력이 없다는 것이다. 분별력은 지식에 속하지만, 영적 문제는 믿음의 문제이다.
[회복: 메시아 시대의 도래] (사32:15-20)
황폐한 상황에서 회복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때 가능하다. 결국, 하나님이 복을 주시면 황무지가 아름다운 밭이 되고, 사회는 정의와 정의가 행해지고, 화평과 평안함이 머무는 사회가 된다. 메시아 왕국의 도래는 지상 낙원을 이룰 것이며, 성도의 성화가 이루어지는 사랑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이상향이라고 하는 샹그릴라(Shangri-La)나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El Dorado)와 같은 곳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빛나는 나라일 것이다. 메시아 왕국의 위용과 광채와 분위기를 상상해 보라.
적용: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 공간적, 가시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의 나라는
의의 나라, 영적 나라이며 우리 심령에 이루어진다. 우리는 세상의 환경을
초탈한 자들이다. 물질 그 너머의 주님이 주시는 메시아의 나라를 이루도록 하자
기도: 물질세계를 이기고 영의 세계에서 승리하는 삶을 구하자
<제 33 장> 아시리아아의 패망과 예루살렘의 안전
[은혜를 구하는 기도] (사33:1-6)
이사야서 33장 1절에서 포악한 적에 대한 저주를 말하며 사33:2에서 환란에서 구원하시기를 기도드리고, 사33:3-6 사이에서 기도의 응답을 예언한다. 주께서 일어나시니 모두 도망가고 하나님의 정의와 정의가 시온에 충만할 것이다. 그리고 한 시대가 평안할 것임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보배가 될 것이다. 믿음의 백성은 항상 구원의 확신과 성화(聖化)가 이루어진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며] (사33:7-16)
높은 곳에 거할 자; 그에게는 양식이 공급되고 물이 부족하지 않으리라. 사33:7-9에서 아시리아에 대한 심판을 언급한다. 아시리아는 이스라엘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그들은 욕심으로 완전 정복을 꾀하였다. 산헤립이 예루살렘까지 침공하여 수탈하는 것 등 그들은 악랄했었다. 사33:10-13에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설명하고 사33:14-16에서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성도의 모습을 그린다. 정의와 정직, 토색 하지 않는 자, 뇌물을 받지 않는 자, 남을 해하려는 꾀를 쫓지 아니하는 자, 악을 피하는 자 등은 이미 복을 받은 사람들의 행위이다.
* 샤론 평야(Sharon)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 가운데 인구가 가장 밀집된 곳이다.
카르멜 산의 해안 부분에서 텔아비브야포의 야르콘 강 유역까지 약 89㎞에 걸쳐 남북방향으로
펼쳐져 있는 대략 삼각형 형태의 지대로서 동쪽으로 카르멜 산 맥 및 구릉(丘陵)이 많은
사마리아 지방과 접하고 있다
* 바산(Bashan) “과실이 많은 땅” 이란 뜻이고 요단 강 동쪽의 비옥한 지역이다. 즉 동은 하우란
산악, 서는 갈릴리 호수, 남은 길르앗, 북은 헬몬 산 사이에 펼쳐진 사이에 광대한 지역이다.
땅이 비옥하여 목축에 알맞은 곳(시22:12, 암4:1, 신32:14), 백향목이 우거진 지대이며 곡창
지대이다(사2:13, 겔27:6, 스11:2). 바산 왕 옥에게서 모세의 백성이 빼앗은 땅이다(민21:33-35).
[영광스러운 새 나라의 구가(謳歌)] (사33:17-24)
이사야서 33장 3-6절에서 이사야가 회복과 구원을 노래한 것의 연장으로 예루살렘에 이루어질 평화를 그린다. 앞으로 도래할 예루살렘은 굳게 박힌 말뚝이며, 옮겨지지 않은 장막이라, 예루살렘은 큰 호수 가운데 섬과 같이 난공불락의 성이 될 것이다. 신약의 메시아 도래와 같은 차원에서 이해하면 좋을 것 같다.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는 새 나라를 이루고 영광을 이룰 것이다.
<제 34 장> 하나님을 대적하는 에돔에 대한 심판
[원수들을 벌하실 여호와] (사34:1-4)
앞에서 주로 예루살렘을 침공한 아시리아를 중심으로 그들에게 내릴 심판을 다루었다. 그러나 34장에서는 이방을 대표한 에돔을 중심으로 한 심판과 원수들의 멸망을 다룬다. 예루살렘을 괴롭힌 이방은 포도나무 잎이나 무화과나무 잎이 마름 같이 멸망하게 될 것을 예언 한다.
[에돔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사34:5-15)
에돔으로 대표되는 이방의 심판이다. 에돔은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아들들의 후손이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우상을 숭배하고(대하25:20), 더 나아가서 무자비와 피 흘림에 앞장섰다. 그래서 사34:5-7에서 심판 장면을 연출했지만 사34:8-15에서는 심판의 결과를 설명한다. 심판의 결과는 에돔 지역이 완전 폐허가 되는 것이다. 폐허 뒤에 야생 동물들의 거처가 되며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변한다. 이 지역은 900 A.D. 경 이슬람에 의해 완전 폐허가 되었다.
* 보스라(Bozrah) “요새” 라는 뜻이다. 에돔의 수도(창36:33,사34:6,63:1,렘49:13,암1:12)로
사해 동남쪽 40km 떨어진 현재의 엘브라세로 보인다.
* 당아는 가마우지 즉 욕심 많은 대식가를 이른다.
[이 예언의 근거는 하나님] (사34:16, 17)
물론 이 예언의 근거는 하나님이 시다. 하나님의 섭리는 즉흥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만세 전에 이미 예정하시고 섭리하신 일들을 이루시는 것이다.
적용: 하나님은 역사의 운행자이시며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섭리하신다.
그 가운데 나를 선택하시고 자녀로 삼으신 은혜를 항상 찬양하고
그의 역사 과정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자부심을 느끼고 살아간다.
기도: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깨닫고 찬양으로 내 생애가 존속되기를 간절히 구한다.
<제 35 장> 새 왕국의 회복과 영광; 거룩한 길
[새 왕국의 영광] (사35:1, 2)
이사야서 34장과는 전연 다른 새 왕국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노래한다. 황무지가 변하여 꽃을 피우고 아름다움을 얻어 즐거워하는 회복이 있을 것이다. 레바논, 갈멜, 샤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표현하는 곳이며 이들이 영광을 얻고 아름다움을 얻어서 여호와의 영광을 드러낼 것이다.
* 사론(Sharon)평야 현재 이스라엘의 영토 가운데 인구가 가장 밀집된 곳이다.
카르멜 산의 해안 부분에서 텔아비브야포의 야르콘 강 유역까지 약 89㎞에 걸쳐
남북방향으로 펼쳐져 있는 대략 삼각형 형태의 지대로서 동쪽으로 카르멜(갈멜) 산맥 및
언덕이 많은 사마리아 지방과 접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믿고 굳세고 담대하고 두려워 말라] (사35:3, 4)
하나님이 약한 손을 강하게 하시면 그는 강해진다. 믿음으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는 담대해진다. 우리 성도는 이 믿음으로 인하여 항상 담대하고 두려움 없이 나아가야 한다. 환란, 공포, 불안 가운데서 평안, 기쁨, 담대함을 항상 갖고 살아간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이다.
[오로지 하나님의 힘으로] (사35: 5-7)
사람의 힘으로 회복할 수 없는 일들이 회복된다. 눈이 밝아질 것이고, 귀가 열리며, 가슴이 뜨거워지며, 말문이 열릴 것이고, 마른 땅에서 샘물이 터질 것이며, 산천에 풀이 무성히 날 것이니 목초가 많아서 들짐승이 왕성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새 왕궁의 모습이다.
[구원에 대한 감사] (사35: 8-10)
구원을 얻은 깨끗한 자들이 즐거움으로 찬양을 하며 그들이 지나가는 대로에는 의의 행진이 있다. 거기에는 악인이 다닐 수 없는 거룩한 길이다. 여호와께서 이루신 새 왕국을 거룩한 백성들은 찬양 한다.
적용: 현세에서도 의인이 가는 길은 거룩한 길이다. 비록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으나
그들은 의인의 길을 걸을 수 없다. 의인의 길은 주님이 주시는 평화, 평강,
희락이 넘치는 길이다. 악인이 넘볼 수 없는 길이다. 기쁨으로 살자.
기도: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항상 찬양할 수 있는
힘을 구하자.
<제 36 장> 예루살렘을 협박하는 아시리아
* 사36:1-37:38에서는 아시리아 산헤립 왕의 예루살렘 2차 침입(왕하18:13-20:19)을 다룬다.
[히스기야 왕 14년(701B.C.)에 아시리아의 침공] (사36:1)
산헤립은 705B.C.에 아시리아 왕이 되어 국토 확장에 매진하였다. 701년 이전에는 바빌로니아와 알람 연합국과의 전투로 동진했다가 이것이 끝나고 서진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에 벌써 유다의 많은 성은 아시리아의 점령 아래 있었다. 당시 히스기야 왕 때는 유다가 개혁을 단행하여 하나님 앞에 반듯하게 서 있을 때이다. 연도에 의문이 있다. 히스기야 14년은 712B.C.이고, 히스기야 25년이 701B.C.이다. 필사에 문제가 있지 않았을까?
* 히스기야 왕(Hezekiah, king of Judah; 715B.C.- 697B.C.)
남조 유다 13대 왕으로 29년간 재위(왕하16:20; 18:1-20:21; 대하29:1-32:33)하였다.
아하스 왕과 공위(共位) 기간 등으로 재위 기간은 실질적 통치 기간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북조 이스라엘 호세아 왕 3년에 유다 왕이 되다(왕하18:1, 2).
아하스의 아들 히스기야 어머니는 아비요(Abijah)로 스가랴의 딸이다.
히스기야 왕은 성군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고 우상을 훼파하였다.
* 아시리아 왕 산헤립(Sennacherib; 705B.C.-681B.C.)은 왕위에 오르자 니느웨를 수도로 삼고
701B.C.에 반기를 든 유다 왕 히스기야를 공격하여 조공을 받아냈다(왕하18:13-16).
그 후 외람된 산헤립은 그의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두 번째 아시리아의 침공] (사36:2-10)
아시리아 왕 산혜립이 보낸 랍사게(개인 이름이 아니라, 관직명이다.)가 히스기야의 신하들(엘리아김과 서기관 셉나와 사관 요아)에게 4가지 이유를 들어 항복할 것을 권유한다. 1. 너희는 싸울 용맹도 계략도 없다. 2. 너희가 믿을 자가 누구냐? 이집트이냐? 아니다. 2. 여호와 하나님을 믿느냐? 히스기야가 그 산당을 헐지 않았느냐? (종교 개혁의 일환임), 4. 너희에게는 말 2천 필을 주어도 말을 탈 사람도 없다. 등 진실로 맹랑한 제안을 한 것이다. 신정국가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나라이다.
* 라기스(Lachish) 예루살렘 남서쪽 45km 지점에 위치하며 유다 남부 요새이다.
군사 요충지로서 말을 기르는 방위산업의 중심지이다(대하11:9). 오늘날의 텔 엣듀봐이르 이다.
[랍사게의 외람됨] (사36:11-20)
랍사게가 왕의 신하와 모든 백성에게 아시리아 왕의 강대함과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지 못하니 항복할 것을 강조한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백성 앞에서 아시리아의 군사력을 앞세워 오만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왕에게 보고한 유다의 수치] (사36:21, 22)
히스기야 왕의 신하들이 랍사게가 한 말들을 옷을 찢으며 왕에게 보고한다. 하나님을 떠나 살아온 유다 백성은 이방의 침공을 받고 수치를 당하며 정부는 있지만, 지방 성읍은 모두 남의 손에 들어가 수탈을 당하는 입장에서 예루살렘마저 침공을 당하여 국가 존망이 불투명한 상황인데, 적의 모사가 불경스러운 언사로 하나님과 왕을 모독하여도 해결할 대책을 내놓을 형편이 아니라면, 옷을 찢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으로 애통해 했을 것이다.
적용: 우리의 삶에서 고난과 수치를 당할 때 묵상과 말씀에 의지하여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더 나아가고 더 순종하는 삶을 살도록 한다.
기도: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할 때 진정 우리의 행 할 바를 주님께 구하도록 하자.
<제 37 장> 히스기야의 기도와 여호와의 구원
[선지자 이사야에게 기도를 요청 하는 히스기야 왕] (사37:1-4)
랍사게의 오만한 말을 전해들은 히스기야는 자신이 회개하고 신하들도 회개하게 하고 이사야 선지자에게 중보의 기도를 요청하였다. 이 단락은 히스기야의 영적 부흥기의 일이다. 히스기야는 자신의 나라의 처지가 정말 안타까운 상태이며 국가의 힘이 아이 낳는 여인이 아이 낳을 힘이 없음에 비유한다. 그리고 선지자의 중보 기도를 요청하는 믿음을 보인다.
[하나님의 첫 번째 약속] (사37:5-7)
하나님은 아시리아 산헤립을 바빌로니아를 통하여 귀환하도록 하신다. 바빌로니아의 반란은 당시로써는 산헤립을 귀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이 예정하신 일이다. 그뿐 아니라 아들들에게 죽임을 당할 것도 예언한다. 아시리아가 바빌로니아를 평정한 것은 689B.C.이고 그 후로부터 8, 9년 후 아들들에게 피살된다.
[아시리아의 또 다른 협박] (사37:8-13)
산헤립은 구스 왕 디르하가가 싸우려 함을 듣고 그와 대적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산헤립은 히스기야에게 사람을 보내 자기가 패권을 장악한 왕임을 다시 상기시키고 협박을 하였다. 지금 일시로 철군하지만, 다시 오겠다는 선언으로 들어야 할 것이다.
[히스기야의 기도] (사37:14-20)
완전히 위협이 끝난 것이 아니다. 히스기야는 이사야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한 것과 더 나아가서 자신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만방에 알려지기를 기도한다. 더 하나님께 매달리는 신앙으로 발전한다.
[하나님의 두 번째 약속; 산혜립에 대한 저주와 책망] (사37:21-29)
아시리아(앗수르) 왕 산헤립의 오만무례를 하나님께서 치리(治理)하실 것임을 이사야를 통해서 히스기야 왕에게 말씀하신다. 당시 아시리아는 내분이 있었던 것 같다. 반면 히스기야 왕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세를 보였고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약속을 받는다.
[하나님의 세 번째 약속; 히스기야 왕에게 구원과 보호 약속](사37:30-35)
소산을 먹을 것과 피난한 자들이 돌아올 것과 아시리아(앗수르) 왕은 유다에 화살 하나도 쏘지 못할 것을 이사야가 왕에게 전한다.
[하나님의 군대가 싸우시고 산헤립이 아들들에게 죽다] (사37:36-38)
여호와의 사자가 산헤립 군사를 쳐 죽이고, 산헤립은 니느웨로 돌아갔으나 그의 아들들에게 살해 되었다.
* 에살핫돈(Esar-haddon; 681B.C.-669B.C.) 이집트를 정복하였으며, 아시리아의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왕이다.
<제 38 장> 히스기야 왕의 발병과 치유
* 이사야서 38장과 39장은 시간상으로 36장과 37장에 앞선다.
이사야서 38장에서 히스기야 왕에게 축복이, 39장에서 저주가 예언된다.
[히스기야의 생명 연장] (사38:1-8)
히스기야 왕의 발병과 그의 간절한 기도와 하나님이 그의 수한(壽限)을 15년 연장하시며 그 증거를 보여 주신다. 히스기야에게 이사야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히스기야는 그의 생명을 구하였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15년간을 연장하며 나라를 보존할 것과 왕의 요청으로 해시계가 10도 뒤로 물러가는 징조(徵兆)를 주시어 하나님이 구원(救援)하심을 보여 주었다.
[히스기야 왕의 감사 노래] (사38:9-20)
이 노래는 한나의 노래(삼상2:1-10), 요나의 기도(욘2:2-9), 다윗의 노래(시6:1-10) 등과 같이 개인의 감사 노래이다. 위험에서 벗어난 후 성전에 올라가서 감사 예물을 바치는 의식을 위하여 만든 노래이다. 히스기야 왕이 죽게 되었을 때를 토로하는 심경(心境)과 감사이다. 세상에서 다시 보지 못할 것들에 대한 독백, 구원에 대한 기도, 각오, 그리고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노래이다. 사람은 위기에 처했을 때 기도와 각오가 있으나 평안할 때 잊어버린다는 점이다. 항상 깨어있고 근신하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 히스기야의 삶을 귀감(龜鑑)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의 처방과 징조를 구함] (사38:21, 22)
무화과를 상처에 바를 것을 처방하나 이것은 그의 믿음을 보시는 것이고 도구에 불과하다. 또 왕이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였고 이를 이루어 주셨다(왕하20:7-11). 공동번역에서는 이사야서 38장 21절과 22절을 6절과 7절 사이에 배치한다.
<제 39 장> 바빌로니아 사자(使者)의 예루살렘 방문
[히스기야 왕의 경거망동(輕擧妄動)] (사39:1, 2)
이 단락의 이야기는 아시리아 제국시대의 이야기이다. 바빌로니아도 아시리아의 지배아래 있을 때 일어난 일이다. 바릴로니아 왕이 히스기야의 병 고침을 듣고 축하사절로 보낸 사람들에게 행 한 일이다. 바빌로니아 왕의 사자에게 보물창고와 궁중의 소유와 모든 것을 보여 주었다. 바빌로니아 왕 므로닥발라단은 721B.C., 712B.C., 701B.C.에 아시리아에 반기를 들었으나 모두 진압 당했다. 712B.C.경 아시리아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다와 연합하려고 보낸 방문사절이었을 것으로 본다. 므로닥발라단은 신바빌로니아 나보폴라살(626B.C.-605B.C.) 이전의 바빌로니아 왕이었다. 히스기야는 무슨 연유로 인지 알 수 없으나 그들에게 보물창고, 무기고, 모든 소유를 보여주는 우를 범했다.
[이사야의 바빌로니아에 의한 멸망예언] (사39:3-8)
이사야는 예루살렘이 바빌로니아에 멸망하고 그의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하나 히스기야 왕은 당대의 안일함에 만족해 있었다. 왕이 바빌로니아 사절에게 보여 준 것은 다 그들에게 빼앗길 것이요 자손이 바빌로니아에 포로가 되어 환관이 될 것을 예언한다. 이때 히스기야는 회개와 구원요청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대에는 안일할 것임을 위안으로 삼는 태도이다. 결국, 유다는 바빌로니아에 망한다. 왜 바빌로니아 사절에게 호의를 베풀었을까? 그들을 의지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분명히 이런 행위에 대하여 용납하시지 않으신다.
적용: 내적(內的) 은밀한 비밀 즉 영적 보물은 남에게 쉽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타자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 진수를 보기보다는 외형적 가치에 매혹되어 탈취하고자 한다.
하나님이 주신 보화를 잘 지키는 자가 되도록 하자.
기도: 내가 가벼운 사람이 되지 않고 믿음의 도를 잘 지켜나가게 은혜와 지혜를 구하자.
<제 40 장> 전능하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주시는 새 힘
* 이사야서 40장으로부터 66장까지는 신약의 모형이라 할 수 있다.
[희망의 메시지 1] (사40:1-5)
바빌로니아 포로 이후에 회복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구원하시고 예루살렘을 위로하시고, 그 죄를 사하여 주신다. 여호와의 영광이 속히 임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죄 성(광야, 사막, 골자기)에서 벗어나서 믿음의 대로로 향하게 하신다는 선지자의 외침이며, 이는 하나님 계시의 말씀이다.
[희망의 메시지 2] (사40:6-11)
하나님의 회복이 눈에 보이게 임하실 것이다. 포로생활에서 위축된 백성들에게 이 세상의 삶은 초로(草露)와 같은 것이며 잠시적(暫時的)이며 초개(草芥)와 같은 것이다. 다윗의 시(시103:15)를 이사야는 예로 들며 이에 집념하지 말 것을 권한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는 높은 산에 올라서 널리 선포할 메시지 그것은 하나님의 자애와 온유하심으로 백성을 포로에서 귀환시키실 것임을 전한다(시80:1; 요10:11). 예루살렘에 전파되는 희망의 메시지이며 이는 신약시대 메시아의 오심과 맥을 같이 한다. 9-12절의 메시지는 요한복음 3장 16절의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심 1] (사40:12-17)
하나님의 창조물을 어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다. 사40:12-14은 하나님과 어떤 개인과의 비교에서 비교 대상이 아님을 보이고, 사40:15-17에서는 하나님과 국제 권력과의 비교인데 세상의 어떤 권력도 하나님의 섭리 앞에 보잘것없음을 설명한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비교의 대상이 못 된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섭리 아래 존재하는 것으로 인간은 그에 따라야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심 2] (사40:18-26)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며 이 세상의 어느 나라, 개인, 우상 그런 것과 비교할 수 없으신 위대한 존재이시다. 사40:18-20에서는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한다. 사40:21-26에서는 하나님의 품성과 그의 존재에 대한 사람의 각성과 신앙을 촉구한다.
[믿음의 교훈] (사40:27-31)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새 힘을 주신다. 야곱, 이스라엘이란 이름의 영원성을 말한다. 그동안 그들의 죄악으로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포로가 되고 국토가 유린 되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선민을 지키시고 그들이 독수리처럼 힘차게 올라갈 것을 예언한다. 특히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은혜로 말미암아서 새 힘을 얻을 것이다. 그 힘은 쇠하지 않을 힘이며, 수고를 아무리 하여도 피곤하지 않은 힘이다.
<제 41 장> 여호와께서 지키시는 이스라엘
[이방을 향한 유다의 구원 약속 선포] (사41:1-7)
이사야서 41장 1절에서 하나님은 재판자리 즉 변론하자고 하신다. 이런 경우는 인간의 죄를 밝히고 깨끗하게 하시고자 할 때, 심판과 하나님의 의를 들어내실 때, 진리를 알리기 위할 때 등이 있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잘못한 것을 바로 잡으실 때 변론을 하셨다. 섬들아 라고 부르는 말은 해안지방의 모든 나라를 이르는 말이다. 사41:2에서 페르시아의 고레스왕(558 B.C.-629 B.C.)의 포로 귀환을 이루고, 사41:3 고레스가 바빌로니아 정복을 위해 간 길은 새로 개척한 길이며, 사41:4에 처음이요 나중이란 영원 전부터 계셔서 영원까지 계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하나님이 유다를 지키심을 선포하신 것이다. 사41:5-7에서는 우상숭배에 대한 경계와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 루디아, 이집트 동맹군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다(사41:5). 이 이사야의 예언은 적어도 100년 뒤에 이루어질 일을 예언했다.
[유다에게 주실 안전과 승리의 선언 1] (사41:8-16)
아브라함의 자손은 하나님의 벗이고, 역할을 부여한 사람들이고, 그 일을 수행하는 종(일꾼)이다. 도구로 사용한 어떤 나라들과는 다른 지위에 있다. 아브라함의 자손 너 이스라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진정 하나님의 의지는 이스라엘을 도우시는 것이다. 도구로 사용된 나라들은 수치를 당할 것이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두려워 말라고 하시며 오히려 열방을 쳐부술 것을 예언하신다. 이는 신약시대의 복음으로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을 의미하신 것이다.
[유다에게 주실 안전과 승리의 선언 2] (사41:17-20)
바빌로니아에 포로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의 말씀이다. 앞으로 돌아오는 길의 어려움도 같이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광야를 초원으로 만드시고 물이 있게 하실 것을 이스라엘이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우상에 대한 선포] (사41:21-24)
여호와께서 거짓 신들에게 말씀하시다. 우상은 인간이 그 손으로 만든 공예품에 불과하다. 그에게 절을 하고 복을 비는 것은 허사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 복을 비는 인간의 심리는 무엇일까? 인간의 끊임없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인간을 황폐화하고 무력하게 만든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사41:25-29)
시온에 기쁜 소식을 전해 줄자를 보내 주리라. 바빌로니아의 포로생활에서 귀환이나, 죄인이 주님의 은혜로 구원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 진리를 배우는 것은 교회나 사람을 통해서 할 수 있지만, 구원을 이루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에12:8). 우상은 구원과 아무 관계가 없는 무능한 존재이다. 새 생명을 얻는 길은 “진리를 아는 것→깨달아 마음에 담는 일→하나님의 은혜로 믿어 구원에 이르는 역사→성화(사랑의 사람)된 사람”의 과정을 거친다. 그러니까 새 생명은 하나님이 은혜의 선물 즉 주신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제 42 장> 메시아를 통한 구원 사역
[종의 노래 1-1: 메시아의 소개] (사42:1-4)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치유하실 하나님 종의 성품은 인내와 정의를 세우시고 낙심하지 않으시는 분이다.
* 이사야서의 종(메시아)의 노래 4편 가운데 첫 번째 노래는 사42:1-9로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노래이다. 두 번째 노래는 사49:1-7, 세 번째 노래는 사50:4-9이며 둘째와 셋째 노래는 메시아
자신이 부르시는 노래이다. 넷째 노래는 사52:13-53:12로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종의 노래 1-2: 메시아의 경륜] (사42:5-9)
하나님이 구속자를 주시어 세상을 구원하실 경륜을 펴신다. 메시아는 죄인을 불러내신다. 그들은 어둠에서 광명으로 인도되고 오로지 하나님만을 믿고 섬기게 하신다.
[새 노래로 부르는 찬송] (사42:10-13)
구원의 감격은 새 노래로 연계된다. 만방의 국민은 그 노래를 만방에 알리도록 산꼭대기에서 부르며 이곳에서 저곳으로 노래가 전파되도록 해야 한다. 감격의 노래는 과거 어떤 노래보다 아주 다른 구원의 새 노래이다.
* 게달(Kedar) 이스마엘의 둘째아들(차25:13; 대상1:29)로 그 후손들이며 아라비아 사막에서 검은 양털로
천막을 짜서 사는 유목민이다(사42:11; 겔27:21).
[구원의 약속](사42:14-17)
세계 열방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경륜을 밝히신다. 구원받을 백성을 위한 해산의 수고(사42:14)와 죄악에 빠진 이스라엘의 해방(사42:15), 어둠에서 광명으로 인도하고 지키실 것(사42:16)을 말씀하시고 우상 숭배자에게는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구원에 대한 확신을 그 백성에게 주신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들] (사42:18-22)
이사야서 42장 18-20절에서 유다 백성의 우매함과 부패를 책망하신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이다. 죄를 짓고도 씻을 줄 모르면 죽은 백성이다. 영적 생명이 있는 사람은 죄에 대해 민감하며 회개가 있다. 유다 백성은 그리 민감한 것 같지 않았다. 사42:21, 22은 이런 죄 탓에 바빌로니아에 포로가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이사야의 글은 그 내용이 좀 산발적으로 진술되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자의 어리석음과 고난] (사42:23-25)
유다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아니하고 패역 하여 결과로 바빌로니아의 포수 되어 고난을 받을 것을 예언한다. 깨달음과 회개 그리고 돌이킴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백성에게는 그런 행위가 없었다. 예언인데 시제가 과거형으로 되어 있다. 이는 그 내용이 확정적임을 의미한다.
<제 43 장> 이스라엘의 선택과 구원의 약속
* 이사야서 43장과 44장은 사죄의 은총을 다룬다.
[창조주의 구원 약속] (사43:1-7)
구원은 일방적이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섭리이다.“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는 모든 구원 얻은 백성에게 통하는 말씀이다. 그분이 지명하여 부르신 것이다. 절대적 사랑과 지명된 수의 사람에게만 한정된다. 또 이 구원의 역사는 온 세계에 어디서나 이루어지는 것이며 메시아 복음은 온 인류를 대상으로 이루어진다.
[구원을 이루시는 분](사43:8-13)
이스라엘은 여호와의 증인이다. 이 백성은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백성이다. 그러나 그들을 구원하신다. 구원을 이루실 분은 오로지 여호와 한 분 뿐이다.
[구원의 방법과 결과] (사43:14-21)
이사야서 43장 14-17절에서 바빌로니아 멸망을 노래한다. 이사야서에서 바빌로니아의 멸망은 반복적으로 언급된다. 사43:18-21에서 하나님이 자기가 지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바빌로니아로부터 구원하신다. 바빌로니아의 멸망과 더불어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시 반복적으로 예언한다. 또 죄의 책망과 회개의 촉구 역시 반복적이고 간헐적으로 언급된다. 상황에 따라서 예언되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일방적 사랑에 의한 구원] (사43:22-28)
이스라엘의 죄악은 크지만, 여호와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죄 가운데 있지만, 일방적으로 구원의 은총을 베푸신다. 사람의 행위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다(엡2:9). 죄인인데 구원을 얻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신약시대 메시아의 오심으로 만민에게 이 같은 길이 열려있다.
<제 44 장> 유일하신 구원자 하나님
* 이사야서 43장과 44장은 사죄의 은총을 다룬다.
[이방과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신 하나님] (사44:1-5)
이 단락은 이사야서 43장 1-7절의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하나님이 구원자이심을 선포한다. 그의 주실 복은 두려움이 사라지는 일이다. 믿음에는 두려움이 없다. 물을 주며, 물(aqua)은 생명을 의미한다.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된다. 생명의 역사가 넘쳐난다는 뜻이다. 이 물은 소생, 성장, 열매 등으로 연결된다. 이는 복이며 생명의 노래이다.
* 여수룬(Jesurun)은 시에서만 사용하는 이스라엘의 다른 이름이다.
[우상의 허구성과 책망 1] (사44:6-8)
이사야서 44장 6-20절까지의 내용은 우상의 허구성과 그에 대한 책망인데 이 내용은 43장의 8-13절의 내용과 맥을 같이 한다. 하나님만이 영원 전부터 영원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신이심을 갈파한다. 하나님은 시간의 초월자, 공간의 초월자, 능력의 초월자이시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이 세 가지 즉 공간의 제약 자이며, 시간의 제약 자이고, 능력의 제약 자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이다. 이를 증거 할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과 우리 믿음의 성도들이다.
[우상의 허구성과 책망 2] (사44:9-17)
우상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공예품이다. 목공이나, 철공, 금은세공 등이 만든 물건인데 여기에 절하며 복을 빈다는 것은 우매한 사람들의 소행이다. 이들은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된다. 왜 사람은 우상을 섬길까? 사람의 욕심이다. 무엇을 노력하여 얻기보다는 빌어서 얻고자 하는 욕심이다. 기독교 역시 복을 받기 위한 기도나 나눔을 했다면 우상숭배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우리는 이미 받은바 은혜 즉 구원의 복을 감사하는 신앙고백이 있을 뿐 무엇을 얻기 위한 헌금, 헌신, 봉사는 기복 사상에서 결과된 것임을 간과해서는 아니 된다.
[우상의 허구성과 책망 3] (사44:18-20)
우상을 무익한 존재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만드는 자, 섬기는 자에게 책망을 내리신다.
적용: 노력 없이 얻고자 하는 행위가 우상 숭배이다. 믿음으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
영과 육이 풍요로워지도록 하자.
기도: 믿음 안에서 사랑하며, 사랑의 삶을 살아서 평생을 즐거워하는 지혜를 구하자.
[돌아와서 찬양하라] (사44:21-23)
창조자요 구속자이신 여호와께 귀의(歸依)하고 찬양을 할 것을 명하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원히 찬양을 받으실 분이다.
[전능자 하나님의 사역 선포] (사44:24-27)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生死) 화복(禍福)을 주관하시며 예루살렘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전능자이신 하나님의 사역은 거대한 것으로부터 세밀한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와 성전 건축] (사44:28)
고레스는 하나님의 도구요 예루살렘은 중건될 것이다. 성전은 재건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야 한다.
*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 559B.C.-530B.C)은 539B.C에 바빌로니아(Babylon)을 멸망시키고
유대 포로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조치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한 페르시아 왕이다(느1:1-4; 6:3-5).
* 선지자 이사야가 유다를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한 기간은 740 B.C.-681B.C.이다.
고래스 왕 보다 200년 이상 먼저 이루어진 예언들이다.
<제 45 장> 고레스 왕을 통한 시온의 회복
* 이사야서 45장은 전반부 사45:1-13절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후반부 사45:14-25절에서 열방을 향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예언한다.
[고레스의 등장] (사45:1)
페르시아가 바빌로니아를 멸하고 여호와께서 고레스를 기름 부은 자로 세우셨다.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해방하는 역할은 그리스도가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신 역사와 일맥상통(一脈相通)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기름 부어 세우는 직은 왕(삼상10:1), 제사장(출30:30), 선지자(왕상19:16)이기 때문에 이방 왕을 기름 부어 세웠다는 것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고레스는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세우셨기 때문에 기름 부어 세웠다고 기록한다.
[도구로 사용된 고레스 왕] (사45:2-7)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고레스 왕을 통하여 구원을 계획하신다. 이 단락은 하나님이 이방의 왕인 고레스에게 직접 계시한 내용이다. 첫째, 이스라엘 하나님을 알게 하려하여서(사45:3), 둘째,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한 도구(사45:4)로, 셋째,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유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하여(사45:5-7) 계시를 내리셨다.
[창조의 주, 역사의 주] (사45:8-10)
질그릇과 토기장이 관계를 생각해 보라 토기가 그 만든 사람에게 항의 할 수 있겠는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이런 것이다.
적용: 피조물은 불평을 할 수 없다. 믿음의 사람은 불평하지 않는다.
다만 주어진 상황이 어떠하든 감사로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도: 나의 삶 전체가 감사로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자(살전5:18).
[고레스를 택하신 이유] (사45:11-13)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을 단호히 거절하신 분께서 다른 방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격려하신다. 장래 이스라엘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하나님께 물어보라는 것과 백성의 기도를 들어 주실 능력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 그리고 여호와께서 고레스로 그의 성을 세우게 하셨다는 메시지는 모든 역사과정이 하나님의 섭리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과 우상 만드는 자의 화] (사45:14-17)
페르시아 고레스 왕은 이집트, 구스(에티오피아), 스바 등에서 탈취한 물건을 유다의 성전 건축에 기증할 것과 신약시대 모든 이방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표면에 나타나시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숨어서 배후에서 역사하시며 우리를 주시하시면서 보호해 주신다. 우상 만드는 자는 화를 당할 것이요 이스라엘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섭리] (사45:18, 19)
하나님의 창조 섭리는 밝고 아름답고 질서정연하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그러나 인위적인 것은 파괴와 무질서와 혼란이 있을 뿐이다.
적용: 하나님의 창조 섭리에 따라서 사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
믿음과 사랑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의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기도: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주님의 길로 인도되기를 간절히 구한다.
[우상 숭배자의 무지함] (사45:20)
우상 숭배자는 무지한 존재들이다. 절대자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우상을 섬긴다. 무속(巫俗)은 인간의 욕심에서 생기는 것으로 노력 없이 공(空)으로 얻고자 하는 사람들이 빠져드는 행위이다. 무지한 행위이다.
[맹세로 약속하신 하나님] (사45:21-25)
고레스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회복된다는 것을 알려준 자가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이시다. 이 약속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맹세로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참되심을 밝힌 것이다. 이스라엘인은 모두 의롭다 함을 입을 것이며 스스로 자랑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지키시는 사람들은 이러하다.
<제 46 장> 바빌로니아 우상에 대한 심판
[바빌로니아 우상의 폐기] (사46:1, 2)
바빌로니아의 신들(벨과 느보)도 페르시아로 잡혀간다. 바빌로니아 신들은 아누(Anu), 헤아(Hea), 벨티스(Beltis), 이쉬타르(Ishtar), 네르갈(Nergal), 신(Sin), 사마스(Shamas), 굴라(Gula), 벨(Bel), 느보(Nebo) 등인데 이들 중 주신(主神)은 벨과 느보이다. 바빌로니아는 4월 축제 때 이들 신상을 수레에 실어 축제장으로 이동하였다. 이를 연상해서 이사야의 그림이 그려진 것 같다.
[야곱의 집 구원과 우상의 허무(虛無)] (사46:3-7)
하나님은 야곱의 집을 구원하신다는 약속과 우상의 허무함을 설명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은 끝까지 품으시고 지키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상에 대해 경계를 하신다. 그들은 인간의 고안품이며, 생산품이다. 왜 그에게 경배하는가? 그것은 말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한다. 이에 절을 하고 경배하는 것은 인간의 욕심을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 제일 나쁜 것이 욕심이다. 이 욕심에서 모든 죄악이 나오고 사회를 붕괴시키는 행위가 나온다. 오늘 우리 사회를 보라 CEO들의 욕심이 재정위기를 가져오지 않는가? 이는 세계를 붕괴시키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회개를 촉구하고 돌아오라는 권고] (사46:8-11)
바빌로니아를 징계하시고 그 우상을 훼파하시는 가운데에서도 옛날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 유다백성(출32:1-6; 삿8:27; 17:4, 7; 왕상12:25-33)의 회개를 촉구하신다. 그래서 과감히 옛 습관을 벗어버리는 장부가 되라고 하신다. 유다 백성은 과거 하나님의 은혜로 수많은 이적과 기사를 경험했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한 분뿐이시다. 그들이 이방 우상으로 당한 고통은 어떠했던가? 하나님은 사46:11에서 동쪽에서 사나운 짐승을 불러오시리라 하셨다. 이는 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킬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을 의미하며 실제로 바빌로니아가 멸망하게 된다.
[죄에 빠진 인간도 구원하시는 하나님] (사46:12, 13)
인간은 정의를 떠났으나 하나님은 정의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이스라엘뿐만이 아니라 온 인류 즉 죄악에 빠진 자들을 하나님이 구원하신다. 이 구원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 주셨다.
<제 47 장> 바빌로니아에 대한 심판
* 신바빌로니아 왕조의 연대는 626 B.C.-539 B.C.사이 87년간 아주 짧은 기간 존속했다.
[바빌로니아의 멸망 선언] (사47:1-5)
바빌로니아는 멸망하고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을 예언한다. 그 국민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다. 한 국가가 교만하면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기는 너무 힘든 일이다. 국가가 융성할 때 겸손히 잘 지켜야 한다. 이 원리는 개인에게도 적용된다. 사람이 잘될 때 겸손과 성실로 지켜야 할 것이다.
* 바빌로니아의 주요 민족이 갈대아 인이다. 로마의 주요민족이 라틴족인 것과 같은 뜻이다.
[바빌로니아에 대한 심판의 이유] (사47:6-11)
유다를 정복하면서 성전을 훼파하고 성물을 수탈하며 예루살렘 성을 폐허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고 피정복 국민을 불쌍히 여기지 않고 멍에를 심히 무겁게 하며 오만방자(傲慢放恣)하여 영원히 자기가 주인이라 생각했으니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된 나라가 하나님의 뜻을 망각한 것이다. 비록 하나님이 유다를 징계하신다 해도 그 도구는 하나님을 욕되게 해서는 아니 된다. 그들은 멸망하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근신하여 겸손이 살아야 한다. 비록 악을 제거한다 하여도 극한의 방법을 사용하면 아니 된다. 정당한 방법과 온유한 심령으로 하여야 한다.
[허상(虛像)인 바빌로니아의 우상] (사47:12-15)
바빌로니아의 주문, 주술, 계략은 모두 허사가 되고 우상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
<제 48 장> 죄지은 백성이라도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여호와
* 이사야서 48장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사야 시기, 바빌로니아 연대,
고레스 연대를 이해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 선지자 이사야가 유다를 중심으로 예언 활동을 한 기간은 740 B.C.-681B.C.이다.
고래스 왕 보다 200년 이상 먼저 이루어진 예언들이다.
* 신바빌로니아 왕조의 연대는 626 B.C.-539 B.C.사이 87년간 아주 짧은 기간 존속했다.
*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 559B.C.-530B.C)은 539B.C에 바빌로니아(Babylon)을 멸망시키고
유대 포로를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도록 조치했으며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한 페르시아 왕이다(느1:1-4; 6:3-5).
[회개가 없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사48:1-8)
이스라엘이 거룩한 성의 출신이라 하며,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며, 만군의 여호와를 부르면서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을 떠난 백성이지만, 그들은 선택된 민족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패악한 무리이다. 항상 타락과 우상 숭배로 하나님의 진노를 면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노하시지만, 항상 회개를 촉구하시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구원을 약속하시는 하나님] (사48:9-11)
패악한 백성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다. 그래서 구원을 확정하고 구원하신다. 일방적 사랑과 구원의 약속이시다. 우리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엡2:8, 9),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바빌로니아 멸망을 다시 밝히시는 하나님] (사48:12-16)
처음이요 마지막이신 분이 바빌로니아의 멸망을 다시 언급하시며 교만과 오만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한 그들을 고레스 손에 넘기고 멸망하게 될 것임을 다시 천명하신다.
[최후의 권면과 경고] (사48:16-2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으면 복을 더 많이 누렸을 것이나 순종하지 아니하였어도 바빌로니아에서 나오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순종하였으면 평강이 강같이 넘쳤을 것이고 그 자손이 모래알같이 많았을 것이다. 하나님을 수시로 떠나서 항상 징계를 받아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끝까지 지키신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와서 그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제 49 장> 메시아의 노래와 예루살렘의 영광
* 사49:1-57:21은 이스라엘의 구속자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다.
[종의 노래 2: 이방의 빛, 이스라엘] (사49:1-7)
내 종은 “나의 종” 나의 영광을 나타낼 “이스라엘(사49:3), 존귀한 자(사49:5), 이방에 그 빛을 비추는 자(사49:6). 등으로 메시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예언한다. 결국, 메시아가 오셔서 모두를 다스리시는 것을 의미한다.
* 이사야서의 종(메시아)의 노래 4편 가운데
첫 번째 노래는 사42:1-9로 여호와께서 부르시는 노래이다.
두 번째 노래는 사49:1-7, 세 번째 노래는 사50:4-9이며
둘째와 셋째 노래는 메시아 자신이 부르시는 노래이다.
넷째 노래는 사52:13-53:12로 성도들이 부르는 노래이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회복 1] (사49:8-13)
이사야서 49장 8절에서“은혜의 때, 구원의 날”의 선포는 내가 한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종의 노래에 대한 화자(話者)가 메시아 즉 예수님이라면 죄악에서 인류의 구원을 의미하지 않을까? 구약의 상황으로 보면 희년(禧年)을 가르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하나님은 고난을 겪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고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주시고 풍요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임을 말씀하신다. 사49:13에서 하늘과 땅도 인간의 기쁜 잔치에 초대되어 기쁨을 나눈다니 이 어찌 큰 기쁨이 아닌가!
* 시님(Sinim )땅 이집트 남쪽 경계에 인접한 수에네(Syene)성이며
현재는 아스완(Aswan)에 위치한다(사49:12).
당시로써는 아주 먼 곳이 된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예루살렘의 회복 2](사49:14-21)
하나님은 결코 이스라엘을 잊어버리지 않으시고 기억하고 보호하시며 황폐했던 땅을 회복시켜 번성하게 하실 것이라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을 낳으신 이가 그들을 구원하시고 회복시키실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의 기치(旗幟)] (사49:22, 23)
시온의 회복과 번영은 하나님께서 그곳에 기치를 세우시기 때문이다. 기치를 세움은 그리로 모이라는 뜻이다. 그 결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알고 그에게 의지하는 자는 세상에서 높임을 받고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바빌로니아 함락에 대한 예언](사49:24-26)
바빌로니아 포로에서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시는 예언이다. 이사야 시대는 아직 바빌로니아가 융성하기 전이다. 지금은 아시리아의 전성기인데 바빌로니아의 포로나 압제를 논하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 예언은 바빌로니아의 멸망과 유다 백성의 구원을 예언한다. “여호와만이 네 구원자이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