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의 생애와 문학세계
김종성(소설가, 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1. 정철의 생애
조선 전기의 정치가이자 문인인 정철(鄭澈, 1536년~1593년)의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이다.
한성부(漢城府) 장의동(藏義洞)에 살고 있던 정유침(鄭惟沈)은 돈녕부 판관(敦寧府判官) 벼슬을 하고 있었다. 그는 슬하에 자(滋)⸱소(沼)⸱황(滉)⸱철(澈) 사형제와 세 딸을 두었다. 1536년(중종 31년) 12월 정철(鄭澈)은 그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정철의 맏누나는 인종의 후궁(後宮) 가운데 한 사람인 귀인(貴人)이 되었고, 둘째 누나는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최홍도의 부인이 되었으며, 막내 누나는 왕족인 계림군(桂林君) 유(瑠)의 부인이 되었다. 뒤에 정철이 고위직에 올라 세상에 이름을 떨치자, 그의 아버지는 영의정에, 할아버지는 좌찬성에, 증조할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추증(追贈)되었다.
소윤(小尹) 세력이 반대파인 대윤(大尹) 세력을 몰아낸 사건인 을사사화(乙巳士禍)는 정철의 삶을 파란 속으로 몰고 갔다. 사온서(司醞署)의 책임자였던 정유침도 같은 패거리라는 구실로 붙잡혀 국경 지대인 함경도 정평으로 귀양을 갔다. 그의 일가는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때 열 살이던 정철은 어머니를 따라 정평으로 가게 되었다. 정절이 열두 살 되던 1547년(명종 2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터지면서 다시 을사사화의 여파로 정유침은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다. 이 시기 정철은 아버지를 따라 영일에서 생활했다. 죄인 곁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고 어머니는 남편과 막내아들을 남겨둔 채 둘째 아들 정소와 함께 전라도 순천으로 옮겨갔다.
명종이 왕실의 대를 이어갈 왕자(훗날의 선조)를 낳자, 그것을 축하하여 조정에서 죄인들을 풀어주었다. 이때 정유침도 풀려나왔다. 1551년(명종 6년) 정철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었다. 7년 만에 정유침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한양으로 돌아오자, 살림을 정리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부친의 묘소가 있는 전라도 창평의 당지산 기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1562년(명종 17년) 문과에 장원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기 전까지 10년간 정철은 당지산 기슭에서 살았던 것이다.
정철은 17세가 되던 1552년 김윤제(金允悌, 1501년~1572년)의 사위인 류강항의 딸과 혼인을 했다. 이 무렵 정철은 성산(星山)에 있는 환벽당(環碧堂) 근처에 있는 김윤제의 문하생이 되면서부터 본격적인 배움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김윤제는 정철을 그의 종질(從姪)인 김성원(金成遠, 1525년~1597년)과 동문수학의 인연을 맺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김윤제는 자신의 재산 일부를 정철에게 나누어 주어 경제적인 어려움에서 벗어나 학문에 힘쓸 수 있게 했다.
정철은 이이(李珥, 1536년〜1584년)⸱성혼(成渾, 1535년~1598년) 등과도 친교를 맺었다. 특히 그는 이(理)를 중심으로 하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의 견해를 취했던 성리학자인 김인후(金麟厚, 1510년〜1560년)에게 배운 『대학(大學)』을, 일생을 살아가는 동안 거울로 삼았다. 정철은 김윤제의 후원으로 기대승(奇大升, 1527년~1572년)의 문하에 들어가 『근사록(近思錄)』을 배웠고, 선비가 지녀야 할 심성과 도리를 익혔다.
1561년(명종 16년) 정철은 진사시(進士試)에 1등으로 합격했고, 이듬해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그 후 정철은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다. 명종(明宗, 재위 1545년∼1567년)의 배려로 정철은 관직이 올랐으나, 이것이 도리어 화근(禍根)이 되었다. 명종의 사촌 형이 되는 경양군이 그의 처가의 재산을 약탈하고자 그의 처조카를 죽인 죄로 아들과 함께 끌려왔다. 명종은 정철에게 그들을 관대하게 처분해 주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성격이 청렴하고 강직한 정철은 법에 규정된 대로 경양군 부자를 처형하였다. 이 옥사(獄事)의 판결로 명종의 눈 밖에 난 정철은 오랫동안 관직을 옮겨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정철은 형조좌랑(刑曹佐郞), 예조좌랑의 관직을 차례로 거친 뒤, 1566년(명종 21년) 북관(北關)의 암행어사로 임명되었다. 함경도 암행어사에서 돌아온 정철은 수찬(修撰)에 임명되고, 32세 때 이이와 함께 학문하는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이어 1568년(선조 1년) 정철은 이조좌랑에 임명되었고, 원접사(遠接使) 박순의 종사관을 지냈다. 다음 해에 홍문관 수찬, 교리를 거쳐 지평에 제수되었다. 1575년(선조 8년), 다시 환로(宦路)에 나서 홍문관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 등을 역임했다. 이 무렵 동인과 서인의 분당(分黨)으로 조정이 시끄러워졌다. 정철은 서인의 주요 인물로 동인과 대립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 관직을 버리고 담양 창평으로 돌아갔다. 1578년(선조 11년) 통정대부 승정원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으로 승진하여 다시 환로에 나아갔다. 그해 11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나, 진도군수 이수(李銖)의 뇌물 사건 옥사(獄事) 처리 문제로 반대파인 동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버리고 다시 창평으로 돌아갔다.
1580년(선조 13년) 45세 때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가 되어 원주에 부임했다. 그 뒤 정철은 전라도관찰사·도승지·예조참판·함경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1583년(선조 16년)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아 1585년(선조 18년)에 사직하고, 고향인 창평으로 돌아갔다.
정철이 54세 때인 1589년(선조 22년)인 기축년(己丑年) 정여립(鄭汝立, 1546년∼1589년)과 그의 대동계(大同契)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한 인물들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동시에 한양으로 쳐들어가 대장 신립(申砬)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兵權)을 장악하기로 하였다는 역모 사건이 일어났다.
정여립의 역모(逆謀)가 사실로 굳어지자, 서인인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조사를 맡았다. 정철 등 서인 세력은 정여립모반사건(鄭汝立謀叛事件)을 정권 장악의 기회로 삼아 동인을 제거하고자 옥사를 확대하였다. 정철 등 서인 세력이 이 모반 사건을 처리하면서 숙청된 사람은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 1544년~1589년)을 비롯하여 정언신, 정개청, 이길, 백유양, 최영경(崔永慶, 1529년~1590년) 등 1천여 명에 달했다. 이것이 기축년(己丑年)에 일어났기 때문에 기축옥사(己丑獄死)라고도 한다. 정철은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서인의 영수로서 최영경 등을 다스리고 철저히 동인 세력을 추방했다. 다음 해 정여립 모반 사건을 가혹하게 진압한 정철은 좌의정에 올랐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동인의 영수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1539년~1609년)가 인빈 김씨의 오빠 김공량과 친교하고 있었다. 동인은 서인의 영수인 정철에게 원한을 품고 복수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 무렵 인빈 김씨가 신성군(信城君)을 낳자 선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1591년(선조 24년) 영의정 이산해는 우의정 유성룡(柳成龍, 1542년~1607년), 좌의정 정철과 함께 세자 책봉을 논의했다. 그러나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 정철이 혼자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년~1623년)을 왕세자로 정할 것을 주청(奏請)하자 동인과 서인 사이에 정쟁(政爭)이 일어났다. 이것은 신성군 이후(李珝)를 책봉하려던 선조의 노여움을 불러왔다. 정철은 논척(論斥)을 받고 파직되어 명천에 유배되었다. 다시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려진 지 사흘 만에 또다시 강계로 이배(移配)되어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 정쟁으로 동인이 다시 세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왕위를 계승할 왕세자를 정하는 건저(建儲) 문제를 둘러싸고 동인과 서인 사이에 일어난 정쟁을 건저의 사건(建儲議事件)이라 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피난지인 개성의 백성들이 정철을 조정으로 불러들여야 한다고 선조에게 건의했다. 귀양에서 풀려난 그는 평양에서 선조를 맞이하고 호종(扈從)했다. 많은 대신이 세자를 따라 함흥으로 갔다. 그러나 그는 홀로 선조를 모시고 가산으로 갔다. 일본군이 아직 평양 이남을 점령하고 있을 때 정철은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체찰사(體察使)를 지내고, 다음 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러나 동인의 모함으로 사직하고 강화도의 송정촌에 우거하다가 1593년(선조 26년) 아들 종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때 그의 나이 58세였다.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21일 경오 인성 부원군 정철의 졸기」에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였다(澈, 褊性妄言, 輕踈浮躁, 喜調好謔, 自招怨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선조실록』은 동인과 서인의 화합에 힘썼던 이이마저도 심하게 매도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편향되게 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선조수정실록』 27권, 「선조 26년 12월 1일 경술 전 인성 부원군 정철의 졸기」에 “만일 그를 강호 산림의 사이에 두었더라면 잘 처신했을 것인데, 지위가 삼사의 끝까지 오르고 몸이 장수와 재상을 겸하였으니, 그에 맞는 관직이 아니었다. 정철은 중년 이후로 술과 여자에 빠져 자신을 충분히 단속하지 못한 데다가 탐욕스럽고 사악한 사람을 미워하여 술에 취하면 곧 면전에서 꾸짖으면서 권세가 있고 지위가 높음을 가리지 않았다. 편벽된 의논을 극력 고집하면서 믿는 것은 척리의 진부한 사람이었고, 왕명을 받아 반역죄를 다스릴 때 당색(黨色)의 원수를 많이 체포하였다. 그가 한세상의 공격 대상이 된 것은 족히 괴이할 게 없다. 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지 못했다 하겠다(若置之江湖林野之間, 是其所宜處, 而位極三司, 身都將相, 非其器也, 澈中年以後, 病于酒色, 自檢己不足, 而又憤嫉貪邪之人, 醉輒面叱, 不避權貴, 力持偏論, 而所挾者, 戚里陳人, 受命治逆, 而所逮者, 多黨色仇怨, 其爲一世射的, 無足怪者, 其處身, 誠無智矣)”라고 정철을 평가하고 있다.
『선조실록』과 『선조수정실록』의 정철에 대한 기록을 요약하면, 『선조실록』은 정철을 정치적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로 기록하고 있고, 『선조수정실록』은 정철을 결벽증에 가까운 곧은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2. 정철의 문학세계
정철의 작품으로는 「관동별곡(關東別曲)」·「성산별곡(星山別曲)」·「사미인곡(思美人曲)」·「속미인곡(續美人曲)」 등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시조는 『송강별집추록유사(松江別集追錄遺詞)』 권2에 「주문답(酒問答)」 3수, 「훈민가(訓民歌)」 16수, 「단가잡편(短歌雜篇)」 32수, 「성은가(聖恩歌)」 2수, 「속전지연가(俗傳紙鳶歌)」 1수, 「서하당벽오가(棲霞堂碧梧歌)」 1수, 「장진주사(將進酒辭)」 등이 실려 있다. 문집으로는 시문집인 『송강집(松江集)』과 시가 작품집인 『송강가사(松江歌辭)』가 있다. 『송강가사』의 목판본으로 황주본(黃州本)·의성본(義城本)·관북본(關北本)·성주본(星州本)·관서본(關西本) 등 다섯 종이 있었다 하나, 이 가운데 의성본·관북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특히 황주본은 이선(李選)의 발문이 실려 있어 이선본(李選本)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필사본으로는 『송강별집추록유사』와 『문청공유사(文淸公遺詞)』가 있다(이상보, 『한국가사문학의 연구』, 형설출판사, 1969, pp. 236〜240 참조).
1) 가사문학의 세계
1580년(선조 13년)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의 직함을 받고 원주에 부임하여, 봄 3월 내금강·외금강·해금강을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을 두루 유람하여 관동지방의 경치⸱ 고사(古事) ⸱풍속 등을 노래한 가사체의 기행장가(紀行長歌)인 「관동별곡」을 지었다. 「관동별곡」의 무대가 되는 관동팔경(關東八景)은 강원도 동해안의 여덟 군데의 명승지로 간성의 청간정(淸澗亭), 강릉의 경포대(鏡浦臺), 고성의 삼일포(三日浦), 삼척의 죽서루(竹西樓), 양양의 낙산사(洛山寺), 울진의 망양정(望洋亭), 통천의 총석정(叢石亭), 평해의 월송정(越松亭)을 이르며 평해의 월송정 대신 흡곡의 시중대(侍中臺)를 치기도 한다. 연군지정(戀君之情)과 애민사상(愛民思想)을 토로한 「관동별곡」의 서사(序詞)는 ‘강원도(江原道) 부임(赴任)’을 그리고 있다. 본사(本詞)는 ‘내금강(內金剛) 유람(遊覽)’과 ‘외(外)· 해(海) 금강(金剛과 동해안(東海岸) 유람(遊覽)’을 그리고 있고, 결사(結詞)는 ‘작자의 풍류’를 그리고 있다.
小쇼香향爐노 大대香향爐 눈 아래 구버보며
正졍陽양寺 眞진歇헐臺 고텨 올나 안말이
廬녀山산 眞진面면目목이 여긔야 다 뵈다
어와 造조化화翁옹이 헌토 헌샤
거든 디 마나 셧거든 솟디 마나
芙부蓉용을 고잣 白玉옥을 믓것
東동溟명을 박 北북極극을 괴왓
놉흘시고 望망高고臺 외로올샤 穴혈望망峰봉이
하의 추미러 므 일을 로리라
千쳔萬만劫겁 디나록 구필 줄 모다
어와 너여이고 너 니 잇가
- 정철, 『송강가사』(성주본)
높이 솟은 바위 모습의 묘사를 통해 높은 것을 지향하는 작가 자신의 주장을 드러내고 있다. 이것은 정철을 포함한 당시 양반 사대부들이 지니고 있던 의식 세계에 부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홍만종(洪萬宗, 1642년~1725년)은 『동국악보(東國樂譜)』에서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은 관동 지방 산수(山水)의 아름다움을 두루 들어 그윽하고 괴이한 경관을 모두 말했다. 경물 묘사의 교묘함과 조사의 기발함은 참으로 악보의 절창이다(關東別曲, 松江鄭澈所製, 而亦擧關東山水之美, 說盡幽遐詭怪之觀, 狀物之妙, 造語之奇, 信樂譜之色調也)”라고 말하면서 「관동별곡」의 미적 특질을 묘사와 조사법(措辭法)에서 찾고 있다.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에는 지명을 비롯한 산과 하천의 이름이 작품 곳곳에 점철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잘 읽히는 것은 경물(景物) 묘사의 교묘함과 조사(措辭)의 기발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관동별곡」의 표현상 특징을 살펴보면 3·4조의 4음보로 모두 295구로 되어 있고, 감탄사와 생략법, 대구법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우리말을 시적으로 사용하는 작가의 문장력이 잘 나타나 있다. 조동일은 「관동별곡」의 묘사에 대해 “능란한 수법의 진경산수화라는 점에서는 커다란 의의를 가진다”면서 “국문 시가의 표현 능력이 한시를 오히려 능가한다는 것을 입증한 성과 또한 대단하기에 뒤의 사람들이 두고두고 감탄하며 칭송했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지식산업사, 2000, p.330.)라고 말했다.
관동지방의 절경과 풍류를 노래하고 있는 「관동별곡」은 새로운 시의 경지와 시적인 상념을 창조한 대표적 가사 문학작품이다. 또한 기개가 장하여 작은 일에 거리낌이 없는 시풍(詩風)과 뛰어난 언어 기교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정철은 49세 때 동인의 탄핵을 받아 다음 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전라도 창평으로 돌아가 4년 동안 은거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이때 정철은 자기가 품고 있는 선조(宣祖, 재위 1567년∼1608년)에 대한 마음을 우리 말로 나타내어 보리라 생각하고, 1588년(선조 21년)에 「사미인곡」을 지었을 뿐만 아니라 「속미인곡」 등의 가사와 시조·한시 등 많은 작품을 지었다. 여기에서 미인(美人)이란 물론 정철이 섬기는 선조를 가리키는 것이다.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여인이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는 심정에 의탁하여 부른 노래인 「사미인곡」의 제목인 사미인(思美人)은 중국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 BC 343?∼BC 278?) 장편 서정시 「이소(離騷)」에 나오는 제목이다.
사람의 마음이 입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이라 하며, 말에 가락을 붙인 것을 시가(詩歌)와 문부(文賦)라 한다. 여러 나라의 말이 비록 같지는 않더라도 그 나라 말을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말에 따라서 가락을 붙인다면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을 통할 수 있는 것은 유독 중국말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시문(詩文)은 제 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배워서 표현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아주 비슷하다 하더라도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마을의 나무꾼 아이와 물 긷는 아낙네들이 지껄이며 서로 주고받는 것들이 비록 비속하다고 하나 참됨과 거짓됨을 논한다면, 진실로 사대부들의 시부 따위와는 결코 같이 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송강의 「관동별곡」과 「전후 미인곡」은 우리 동방의 이소다. 그러나 그것을 중국어로 쓸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만 음악가들에 의해 입에서 입으로 전수되거나 한글로 기록되어 전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관동별곡을 칠언시(七言詩)로 번역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그 칠언시는 택당 이식이 젊었을 때 지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틀린 말이다.
“인디아에서는 대개 사화(辭華)를 대단히 숭상하여, 부처를 찬양하기 위해 지은 인디아의 노래는 무척 아름답다. 그런데 이제 그것을 중국어로 번역하게 되면 다만 그 뜻만 전할 뿐이지 그 사화는 전하기 힘들다.”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말했다.
이것은 당연한 이치다. 사람의 마음을 입을 통해 나타낸 것이 말이며, 말에다 운율을 가미한 것이 노래요, 시요, 문장이요, 부(賦)이다. 사람의 언어가 비록 같지 않으나, 말을 잘하는 사람이 있어서 각각 고유한 언어를 가지고 운율을 잘 맞추기만 한다면, 충분히 천지를 움직이고, 귀신에게까지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시와 문장은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 말을 흉내 내 쓴 것이다. 설령 그것이 아주 비슷하게 표현한다 해도 그것은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흉내 내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거리의 나무하는 아이들이며, 물긷는 아낙네들이 흥얼거리며 서로 주고받는 것, 즉 민요가 비록 비슷하다고는 하지만, 그 참된 가치를 따진다면 사대부들의 한시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 별곡에는 하늘이 준 영성(靈性)이 자연스럽게 드러나 있고, 미개한 사회에 흔하게 있는 낮고 속된 성질은 없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한구석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가 진정한 글이란 이 3편뿐이다. 그런데 또 이 3편을 두고 논하자면, 「속미인곡」이 더욱 높다.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오히려 한문을 빌려서, 글을 꾸몄기 때문이다.
人心之發於口者, 爲言, 言之有節奏者, 爲歌詩文賦, 四方之言雖不同, 苟有能言者, 各因基言而節奏之, 則皆足以動天地通鬼神, 不獨中華也, 今我國詩文, 捨其言而學他國之言, 設令十分相似, 只是鸚鵡之人言, 而閭巷間樵童汲婦咿啞而相和者, 雖曰鄙俚, 若論眞贋, 則固不可與學士大夫所謂詩賦者, 同日而論, 松江關東別曲, 前後思美人歌, 乃我東之離騷, 而其以不可以文字寫之, 故惟樂人輩, 口相授受, 或傳以國書而已, 人有以七言詩飜關東曲, 而不能佳, 或謂澤堂少時作, 非也, 鳩摩羅什有言曰, 天竺俗最尙文, 其讚佛之詞, 極其華美, 今以譯秦語, 只得其意, 不得其辭理. 固然矣, 況此三別曲者, 有天機之自發, 而無夷俗之鄙俚, 自古左海眞文章, 只此三篇, 然又就三篇而論之, 則後美人尤高, 關東前美人, 猶借文字語, 以飾其色耳.
- 김만중, 『서포만필(西浦漫筆)』
김만중(金萬重, 1637년∼1692년)은 『서포만필』에 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한문을 다른 나라의 언어로 보았던 그는 『서포만필』에서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을 가리켜 “동방의 「이소(離騷)」이다.”라 말하고, “우리나라의 참된 문장은 오직 이 3편뿐이다.”라고 하였다. 굴원이 반대 세력의 참소로 유배를 당한 상황에서 자신의 결백을 토로한 서정시인 「이소」는 『초사(楚辭)』의 한 편 명으로 장편 서사시이자 낭만주의 문학의 원류로 평가받고 있는 시이다. 김만중은 정철이 지은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이 굴원이 지은 「이소」에 필적하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이 우리나라의 진문장(眞文章)이라고 높게 평가한 김만중은 「관동별곡」과 「사미인곡」은 한자를 많이 빌어 그 빛을 꾸미었으나, 「속미인곡」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뛰어나다고 평하였다. 한편 홍만종은 『순오지(旬五志)』에서 “ ‘속미인곡’ 또한 송강 정철이 지은 것이다. ‘사미인곡’에서 다 말하지 못한 것을 다시 서술해 놓은 것으로서 말이 더욱 묘하고 뜻이 더욱 절실하여 가히 공명의 출사표와 더불어 백중할 만하다(續美人曲, 亦松江所製, 復申前詞未盡之辭, 語 益工而益切, 可與孔明出師表, 爲伯仲也)”라고 「속미인곡」을 높이 평가했다.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 계열의 가사인 「사미인곡」의 구조는 ‘서사(序詞)―춘원(春怨)―하원(夏怨)―추원(秋怨)―동원(冬怨)―결사(結詞)’로 되어 있다. 서사에서는 임과의 인연과 임에 대한 그리움과 세월의 무상함을 노래하고, 본사(本詞)에서는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 원망을 노래하고, 결사에서는 임을 향한 변함없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사미인곡」에서 작가는 시적 화자를 여성으로 설정하여 선조를 그리는 안타까운 심정을 절절하게 묘사해 구체성 획득에 성공하고 있다.
“고신연주(孤臣戀主)의 갸륵한 충정(忠情)이 유려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는”(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편, 『국어국문학사전』, 1974.) 「사미인곡」과 더불어 가사 문학의 극치라는 찬사를 받는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속편 가사이다.
[제1화자 갑녀] 뎨 가ᄂᆞᆫ 뎌 각시 본 듯도 ᄒᆞᆫ뎌이고. 天텬上샹 白ᄇᆡᆨ玉옥京경을 엇디ᄒᆞ야 離니別별ᄒᆞ고, ᄒᆡ 다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ᄂᆞᆫ고.
[제2화자 을녀] 어와 네여이고, 내 ᄉᆞ셜 드러 보오. 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ᄒᆞᆫ가마ᄂᆞᆫ 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ᄉᆡ, 나도 님을 미더 군ᄠᅳ디 전혀 업서, 이ᄅᆡ야 교ᄐᆡ야 어ᄌᆞ러이 구돗ᄯᅥᆫ디, 반기시ᄂᆞᆫ ᄂᆞᆺ비치 녜와 엇디 다ᄅᆞ신고. 누어 ᄉᆡᆼ각ᄒᆞ고 니러 안자 혜여 ᄒᆞ니, 내 몸의 지은 죄 뫼ᄀᆞ티 ᄡᅡ혀시니 하ᄂᆞᆯ히라 원망ᄒᆞ며 사ᄅᆞᆷ이라 허믈ᄒᆞ랴. 셜워 플텨 혜니 造조物믈의 타시로다.
[제1화자 갑녀] 글란 ᄉᆡᆼ각 마오.
[제2화자 을녀] ᄆᆡ친 일이 이셔이다. 님을 뫼셔 이셔 님의 일을 내 알거니, 믈 ᄀᆞᄐᆞᆫ 얼굴이 편ᄒᆞ실 적 몃 날일고. 春춘寒한 苦고熱열은 엇디ᄒᆞ야 디내시며, 秋츄日일 冬동天텬은 뉘라셔 뫼셧ᄂᆞᆫ고. 粥쥭早조飯반朝죠夕셕 뫼 녜와 ᄀᆞᆺ티 셰시ᄂᆞᆫ가. 기나긴 밤의 ᄌᆞᆷ은 엇디 자시ᄂᆞᆫ고.
님 다히 消쇼息식을 아므려나 아쟈 ᄒᆞ니, 오ᄂᆞᆯ도 거의로다. 내일이나 사ᄅᆞᆷ 올가. 내 ᄆᆞᄋᆞᆷ 둘 ᄃᆡ 업다. 어드러로 가쟛 말고. 잡거니 밀거니 놉픈 뫼ᄒᆡ 올라가니, 구롬은ᄏᆞ니와 안개ᄂᆞᆫ 므ᄉᆞ일고. 山산川쳔이 어둡거니 日일月월을 엇디 보며, 咫지尺쳑을 모ᄅᆞ거든 千쳔里리ᄅᆞᆯ ᄇᆞ라보랴. ᄎᆞᆯ하리 물ᄀᆞ의 가 ᄇᆡ길히나 보쟈 ᄒᆞ니, ᄇᆞ람이야 믈결리야 어둥졍 된뎌이고. 샤공은 어ᄃᆡ 가고 븬 ᄇᆡ만 걸렷ᄂᆞ니. 江강川텬의 혼쟈 셔셔 디ᄂᆞᆫ ᄒᆡᄅᆞᆯ 구버보니, 님 다히 消쇼息식이 더옥 아득ᄒᆞᆫ뎌이고.
[제2화자 을녀] 茅모詹쳠 ᄎᆞᆫ 자리의 밤듕만 도라오니, 半반壁벽靑쳥燈등은 눌 위ᄒᆞ야 ᄇᆞᆯ갓ᄂᆞᆫ고. 오ᄅᆞ며 ᄂᆞ리며 헤ᄯᅳ며 바니니, 져근덧 力역盡진ᄒᆞ야 픗ᄌᆞᆷ을 잠간 드니 精졍誠셩이 지극ᄒᆞ야 ᄭᅮᆷ의 님을 보니, 玉옥 ᄀᆞᄐᆞᆫ 얼굴이 半반이나마 늘거셰라. ᄆᆞᄋᆞᆷ의 머근 말ᄉᆞᆷ 슬ᄏᆞ장 ᄉᆞᆲ쟈 ᄒᆞ니, 눈믈이 바라 나니 말인들 어이ᄒᆞ며, 情졍을 못다ᄒᆞ야 목이조차 몌여ᄒᆞ니 오뎐된 鷄계聲셩의 ᄌᆞᆷ은 엇디 ᄭᆡ돗던고.
[제2화자 을녀] 어와, 虛허事ᄉᆞ로다. 이 님이 어ᄃᆡ 간고. 결의 니러 안자. 窓창을 열고 ᄇᆞ라보니 어엿븐 그림재 날 조ᄎᆞᆯ ᄲᅮᆫ이로다. ᄎᆞᆯ하리 싀여디여 落낙月월이나 되야이셔 님 겨신 窓창 안ᄒᆡ 번드시 비최리라.
[제1화자 갑녀] 각시님 ᄃᆞᆯ이야ᄏᆞ니와 구ᄌᆞᆫ 비나 되쇼셔.
- 『송강가사』(이선본)
화자가 모두 천상의 백옥경(白玉京)에서 지상에 내려온 여성인 것이 특징인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이 평서체로 노래하고 있는데 비하여 「속미인곡」은 제1화자인 갑녀(甲女)와 제2화자 을녀(乙女)인 두 선녀가 대화하는 형식인 대화체로 남편과 이별하고 지상으로 내려와서 남편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노래하고 있다. 5단으로 나뉠 수 있는 「속미인곡」은 ‘⓵ 제1화자인 갑녀가 제2화자인 을녀를 만나 님과 이별하게 된 사연을 묻는다. ② 을녀가 사정을 답한다. ③ 갑녀가 위로의 말을 한다. ④ 을녀가 님에 대한 애달픈 사모의 정을 토로한다. ⑤ 갑녀가 위로의 말을 한다.’로 구성되어 있다.
정철이 창평에 물러가 살 때 선조를 그리워하는 내용인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로 두 여인이 대화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속미인곡」은 세련된 표현미, 깨끗하고 절개가 곧은 주제적 깊이, 그리고 탁월한 예술성으로 「사미인곡」과 더불어 가사 문학의 극치를 이룬 작품으로 “한문 투로 엮지 않고서는 수식을 할 수 없던 사대부의 국민 시가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331.)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속미인곡」에 구사된 구름⸱안개⸱바람⸱물결⸱낙월⸱궂은 비의 해석 가운데 ‘궂은 비’의 해석에 대해 정재호는 그 의미를 더욱 분명히 알려면 달빛과의 대조에서 비롯되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첫째, 궂은 비는 달빛보다 더 침울한 분위기를 구성한다. 태양보다는 달빛이 음성적이라면, 비는 더욱 더 음성적이며 어두운 분위기를 나타낸다. 님에게 버림받은 여인의 심정은 누구보다 더 침울할 수 있다. 그러한 심정을 달빛에 비유하는 것보다 비에 비유하는 것이 낫다.
둘째, 달빛이 시각(視覺)을 자극함에 비하여 궂은 비는 청각(聽覺)을 자극한다. 밤에 불을 켜지 않았을 때, 달빛에 대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나 불을 켠다든가 눈을 감고 잠을 청할 때 달빛의 자극은 무력하다. 그러나 궂은 비가 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낙월(落月)이 서창(西窓)을 비칠 수 있는 그 시각에 눈을 뜨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셋째, 달빛이 광대한 공간을 비추어 준다면 밤에 듣는 빗소리는 님이 자는 국한된 공간에서 자극하여 더욱 주의의 집중이 가능하고 절실할 수 있다.
넷째, 박성의 선생이 지적한 바와 같이 낙월의 짧은 시간보다 궂은 비는 긴 시간을 임에게 자극할 수 있다.
다섯째, 비는 눈물로 흔히 비유된다. 님을 그리다가 상사(相思)에 지친 나머지 흐르는 눈물은 비로 전환되어 임의 창(窓)을 두드릴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달빛이 비추어 주는 자극보다는 밤에 내리는 비가 더욱 침울하고 청각적이며 제한적이며 긴 시간을 눈물로 님을 자극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갑녀(甲女)가 을녀(乙女)에게 궂은 비가 되라 한 것은 을녀의 간절한 심정을 보다 잘 나타내 준 것이라 할 수 있다.
- 정재호, 『한국가사문학론』. 집문당. 1984. pp.79〜80.
한편 총 169구로 된 「성산별곡」은 창평 지곡리(현재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지곡리)의 성산(星山)의 풍경과 식영정과 서하당을 중심으로 읊은 것으로 조선조 사대부들의 전형적인 삶의 한 단면을 보여 준 작품이다. 성산 기슭의 송강(松江)가에서 10년간을 보낸 정철은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 사람으로 창평에서 은거하면서 후진을 가르치던 임억령(林億齡, 1496년~1568년)에게 시를 배우고, 김인후(金麟厚, 1510년~1560년)·송순(宋純, 1493년~1583년)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정철은 25세 되던 해, 그의 처의 외재당숙인 김성원이 세운 서하당(棲霞堂)·식영정(息影亭)을 중심으로 성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사계(四季)로 나누어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 생활을 예찬한 「성산별곡」을 지었다. 면앙정가단(俛仰亭歌壇)의 창설자이며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서 호남 시단의 큰 맥을 이룬 문인인 송순으로부터 시를 배운 정철은 「성산별곡」의 탁월한 우리말 구사력과 시적 형상성이 송순의 「면암정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⓵ 서사(序詞) ② 춘사(春詞) ③ 하사(夏詞) ④ 추사(秋詞) ⑤ 동사(冬詞) ⑥ 결사(結詞)로 구성된 「성산별곡」은 서하당의 주인인 김성원의 멋과 풍류를 노래하고 있지만, 사실은 정철 자신의 풍류를 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한자어의 사용이 빈번하고 일개인의 칭송에 치우친 감이 있으나, 체험에서 우러난 전원생활의 흥취와 시인의 개성이 잘 드러난 가작이라 하겠다.
김사엽은 「성산별곡」이 식영정에 모인 4선(四仙)인 김성원⸱임억령⸱고경명⸱정철이 지은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20수를 대본으로 해서 그것을 부연(敷衍) 혹은 탈태(奪胎)하여 창작한 작품이므로 엄밀히 말해서 정철의 창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의 시인으로서의 순수한 생활면과 그의 개성이 비교적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는 점 등으로 볼 때 별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김사엽, 『이조시대의 가요연구』, 학원사, 1962, pp.529〜530 참조).
2) 시조문학의 세계
가사문학의 독보적인 존재인 정철은 성주본 『송강가사』에 79수의 시조를 남긴 것을 비롯해 관서본 『송강가사』와 이선본 『송강가사』에만 수록된 시조 작품도 있어 적지 않은 시조 작품을 남겼다. 그러나 여러 판본의 『송강가사』에 실려 있는 작품 가운데 정철이 지은 것이 아닌 다른 작가가 지은 시조도 실려 있을 개연성이 커 앞으로 정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교술(敎述)⸱우시(憂時)⸱연군(戀君)⸱풍류(風流)⸱풍자(諷刺)⸱취락(醉樂)⸱원유(遠游)⸱자연(自然) 등을 주제로 삼고 있는 정철의 시조의 특색은 무엇보다도 우리말 구사력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애송되었던 「장진주사」는 “그 율조의 도도한 흐름과 비정한 시상의 공감에서 오는 결과”에서 뿐만 아니라, “시상을 조성시킨 우리말의 공교한 배열과 그 음영의 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정익섭, 「정철」, 황패강 외 공편, 『한국문학작가론』 2, 집문당, 2000, p.249)는 평가를 받았다. 「장진주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로 이백(李白, 701년∼762년)의 「장진주(將進酒)」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잔(盞) 먹새근여 잔(盞) 먹새근여
곳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새근여
이 몸 죽은 후(後)면 지게 우 거적 더퍼 주리혀 여 가나, 뉴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 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모 양(白楊) 속에 가기곳 가면 누른 흰 비 굴근 눈 쇼쇼리람불 제 뉘 잔(盞) 먹쟈 고
믈며 무덤 우 나비 람 불 제야 뉘우 엇디리
- 『송강가사』(성주본)
「장진주사」의 초장에서는 꽃을 꺾어서 술잔 수를 셈하면서 취흥을 즐기는 낭만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중장과 종장에서는 무덤 주변의 삭막한 분위기의 묘사를 통해 죽음과 삶의 무상감을 강조하여 술을 마시는 행위를 합리화하고 있다. 이처럼 대조적인 작가의 허무적인 태도와 술과 풍류를 즐기는 삶의 태도가 투영된 작품이 「장진주사」이다.
정철은 서인(西人)의 영수(領袖)로 정치적 부침(浮沈)이 심한 정치 활동을 했다. 술을 소재로 하여 삶의 흥취와 여유를 노래한 작품은 대체로 정철이 임금과 좋은 관계를 맺고 관직에 있을 때 썼고, 당쟁(黨爭)에 휩싸이거나 해서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를 당했을 때는 술을 소재로 하여 현실에서 겪는 고뇌를 노래한 작품을 쓰기도 했다.
강원도 관찰사로 재직하였던 정철은 관동지방 순례를 끝내고 돌아와, 1580년(선조 13년) 봄 정월부터 이듬해 봄 3월 사이에 백성들을 계몽하고 교화하기 위해 일명 ‘경민가(警民歌)’ 또는 ‘권민가(勸民歌)’라고도 하는 「훈민가」를 지었다.
아바님 날 나흐시고 어마님 날 기시니
두 분 곳 아니시면 이 몸이 사라실가
하늘 업 은덕(恩德)을 어 다혀 갑오리
- 『송강가사』(성주본)
『경민편(警民編)』에 ‘부의모자(父義母慈)’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훈민가」는 연시조로 평시조가 여러 개 붙어 있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평시조는 3장 6구 45자 내외, 종장 첫 음보는 3음절이다. 「훈민가」는 각 수가 초장, 중장, 종장 3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종장은 ‘마쇼를’, ‘향음쥬’, ‘올길에’ 등 3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삼강오륜(三綱五倫)의 유교적 윤리관을 주제로 하는 「훈민가」는 16수로 되어 있다. 또한 백성들을 계몽하기 위하여 쓰인 「훈민가」는 교술가요(敎術歌謠)로 교훈적 특성을 보이고 있고, 도덕적 규범을 전달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한자어를 구사하는데 매몰되어 있지 않고, 토속어도 적절하게 구사하고 있어 인정의 기미를 느끼게 하는 특징이 있다.
1658년(효종 9년)경에 이후원이 백성들이 지켜야 할 도덕·윤리에 대해 김정국(金正國, 1485년~1541년)이 편찬한 책인 『경민편』의 중간본(重刊本)을 간행했다. 한문본에 구결(口訣)을 붙여서 간행한 『경민편』의 중간본은 부록으로 북송(北宋)의 학자 진양(陳襄, 1017년~1080년)이 지은 「선거권유문(仙居勸諭文)」, 남송(南宋)의 학자 진덕수(眞德秀, 1170년∼1235년)가 지은 「담주유속문(潭州諭俗文)」·「천주권유문(泉州勸諭文)」, 정철이 지은 「훈민가」 등이 붙어 있다. 정철은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모범으로 삼고자, 진양이 지은 「선거권유문(仙居勸諭文)」을 바탕으로 하여 「훈민가」를 지었다. 이와 관련하여 정철이 지은 「유읍재문(諭邑宰文)」 가운데 다음 구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옛적에 밀학 진공양이 선거(仙居) 고을의 재(宰)가 되어 아버지는 의롭고, 어머니는 자애롭고, 형은 우애하고, 아우는 공손하라는 것으로 백성을 가르쳤다, 백성들이 그의 교화에 기쁜 마음으로 따랐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의 천성(天性)은 매한가지인데 어찌 과거에는 행하여지고 지금은 행하여지지 않는가? 생각건대, 그 백성을 박대하지 않으면 백성도 차마 스스로 박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내가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바루는 도(道)가 지극하지 않고 사람을 사랑하는 성의가 미덥지 않으면 아무리 가르치는 유고(諭告)의 글이 있을지라도 백성들이 반드시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각자가 네 가지 일에 스스로 힘쓰고, 그 열 가지 해(害)를 없애버릴 것을 원한다.
昔密學陳公襄爲仙居宰, 敎民以父義母慈兄友弟恭, 而人化服焉, 古今之民, 同一天性, 豈有可行於昔, 而不可行於今, 惟毋以薄待其民, 民亦將不忍以薄自待矣, 此某之所望也, 然而正己之道未至, 愛人之意不孚, 則雖有敎告, 而民未必從, 故某願各以四事自勉, 而去其十害.
- 『송강가사 별집』, 권1
한편, 김춘택(金春澤, 1670년~1717년)은 정철의 「장진주사」를 「번정송강장진주사(飜鄭松江將進酒辭)」라는 제목을 붙여 한문으로 번역한 것을 『북헌집(北軒集)』에 실었다.
귀 느여 뎌 소곰 실나 갈쟉신
필연 千里馬(쳔리마) 몰라야 보랴마
엇더타 이제 분네 진 줄만 아니
- 『송강가사』(성주본)
정철의 시조 「귀 느여 뎌 소곰 실나 갈쟉신」는 가의(賈誼)가 쓴 「굴원을 조의하다(吊屈原賦)」의 “천리마가 두 귀를 늘어뜨리고 소금 수레를 끌도다(驥垂兩耳服鹽車兮)”를 읽고 인유(引喩)하여 쓴 작품이다. 높은 재주, 큰 인물이 때를 만나지 못하여 천한 역(役)에 종사한다는 뜻인 ‘염거곤(鹽車困)’이란 말이 「굴원을 조의하다(吊屈原賦)」에서 유래했다. 문제(文帝)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20세에 박사(博士)가 되었으나 간신들의 참소(讒訴)를 받아 장사왕(長沙王) 태부(太傅)로 좌천된 인물인 가의(賈誼 BC200년〜BC168년)가 장사(長沙)로 가는 도중에 굴원(屈原)이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두 번이나 유배되어 울분을 견디지 못하고 상강(湘江)의 지류인 멱라수(汨羅水)에 몸이 빠져 죽은 것을 떠올리고 「굴원을 조의하다(吊屈原賦)」를 지은 것으로 전해 온다. 굴원의 투신→가의의 「굴원을 조의하다(吊屈原賦)」→ 정철의 「귀 느여 뎌 소곰 실나 갈쟉신」로 연결된다. 정철 자신이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고 조정의 중신에서 밀려난 심적 갈등을 「굴원을 조의하다(吊屈原賦)」의 ‘염거곤(鹽車困)’의 서사를 끌어다 비유한 시조이다.
흥망이 수 업니 방셩의 츄최로다
나 모론 디난 일란 목뎍의 븟텨 두고
이 됴흔 태평연화의 잔 호 엇더리
- 『송강가사』(이선본)
대방성(帶方城)은 “대방(帶方)은 지금 남원 등지를 이름인데, 당(唐), 고종(高宗) 때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유인궤(劉仁軌)가 대방주자사(帶方州刺史)가 된 곳”이라는 견해( 박성의, 『증보 송강가사』, 정음사, 1961, pp.134〜135.)가 있다. 『삼국사기』 권 37, 「지리지」 4, ‘고구려⸱ 백제’ 조에 “대방주는 본시 죽군성 7현이다(帶方洲本竹城七縣)”라는 기록이 보인다. 죽군성의 치소(治所)는 지금의 전라북도 고흥군 두원면으로 비정되고 있다.
새원 원 되어 녈 손님 디내옵
가거니 오거니 인도 하도 할샤
안자셔 보노라 니 슈고로와 노라
- 『송강가사』(이선본)
새원(新院)은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신원 일대이다. 정철이 1570년(선조 3년) 35세 때 부친상을, 1573년(선조 6년) 38세 때 모친상을 당하여 새원에서 각각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했다. 정철의 별서(別墅)가 있던 곳인 새원은 한양에서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이어지는 관서대로(關西大路)가 지나는 길목에 그 길을 오가는 사람들을 위해 새롭게 설치한 원(院)이다. ‘원주(院主)’는 숙직하면서 역원(驛院)을 관리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아치로 실제로 정철이 원주가 되었다고 보는 견해(박성의, 『증보 송강가사』, 정음사, 1961, p.140.)가 있다. 그러나 정철이 새원[新院]의 원주가 되었던 것이 아니라 ‘새원’이라는 마을 이름을 단서로 자신을 원주에 가탁(假託)을 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하다는 견해(박영민, 『정철 시조의 담화 특성과 전승의식』,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0, p.132.)가 있다.
風霜(풍샹) 섯거틴 날의 잇ᄀᆡᆺ 픤 黃菊花(황국화)
銀盤(은반)의 것거 다마 玉堂(옥당)으로 보내실샤,
桃李(도리)야 곳이론 양 마라 님의 들 알괘라.
- 『송강가사』(성주본)
『송강가사』(하)에 실려 있는 「風霜(풍샹) 섯거틴 날의」는 「자상특사황국옥당가(自上特賜黃菊玉堂歌)」 또는 「옥당가(玉堂歌)」로도 불려지고 있다. 송순(宋純)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작품과 관련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명종(明宗)이 어원(御苑)의 황국화를 꺾어 옥당관(玉堂) 관원들에게 내리며, 가사(歌詞)를 지어 바치라고 했다. 그러나 옥당관원들은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곧 가사를 지어내지를 못하였다. 이때 바로 참찬(參贊) 벼슬자리에 있던 송순(宋純)이 당직으로 의정부에 나와 있다가 대신 가사를 지어 올렸다. 명종이 기뻐하는 한편 너무 잘 지은 가사에 놀라 누가 지었는지 물었다. 옥당관이 감히 숨기지를 못하고 사실대로 아뢰었다. 명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송순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그 가사가 지금 악부에 전한다.
明廟朝折御苑黃菊, 賜玉堂官, 命撰進歌詞, 玉堂官倉卒不能就, 時宋純以宰樞直摠府, 乃借製以進, 上覽之, 驚喜問誰作此者, 玉堂官不敢隱, 以實對, 乃大加賞賜, 其詞至今傳于樂府.
- 이수광(李睟光), 『지봉유설(芝峯類說)』
3) 한시의 세계
“시조나 가사뿐만 아니라 한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415.) 정철은 많은 양의 한시를 남겼다. 한시 창작에 있어서 다양한 경향을 보인 그는 가사문학 작품인 「사미인곡」처럼 연군지정(戀君之情)을 그린 한시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지만, 연군지정에서 벗어나 「시월 함흥에서 국화를 보며(咸興客館對菊)」이나 「가을밤(秋夜)」처럼 높은 시적 상상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한시도 썼다.
함흥객관대국(咸興客館對菊)
- 함흥객관에 핀 국화를 마주하고
秋盡關河候雁哀 가을이 다 지나간 관하에는 기러기 소리 슬픈데
思歸且上望鄕臺 고향 생각에 다시금 망향대에 오른다.
慇勤十月咸山菊 은근히 시월에 핀 함산의 국화가
不爲重陽爲客開 중양절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그네를 위해 피었네.
- 『송강원집』, 『대동시선』
「함흥객관에 핀 국화를 마주하고(咸興客館對菊)」는 어사(御使)로 함흥 지방에 가서 10월의 국화를 보고 지은 것이다. 이 시는 허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시월 함흥에서 국화를 보며(咸興十月看菊)」의 시제(詩題)로 수록되어 있다. 허균은 「함흥객관에 핀 국화를 마주하고(咸興客館對菊)」를 “격조가 초매(超邁)하고 사의(思意)가 깊다(格超思淵)”라고 평했다. 어사의 임무를 띠고 민정을 시찰하는 과정에서 을씨년스러운 초겨울의 슬픈 기러기 울음소리는 시인으로 하여금 고독과 향수의 감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그러나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 지역인 관하(關河)에서 철 늦게 핀 국화는 시인에게 새로운 정감에 젖어 들게 한다. 망향대(望鄕臺)는 고향을 떠나 수자리를 나가거나 유랑하던 사람들이 고향을 조금이라도 가까이 보기 위해서 높게 쌓은 대에 올라가 고향 쪽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래던 곳을 뜻한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고향인 성도(成都)에 있던 망향대는 많은 시인의 시에 등장한다. 당나라 시인 왕발(王勃, 647년~674년)은 「중양절에 촉 땅에서(蜀中九日)」에서 “구월 구 일 중양절 망향대에 올라(九月九日望鄕臺)/낯선 타향에서 이별의 잔 나누네(他席他鄕送客杯)./이제 촉 땅에 머물기도 괴로운데(人情已厭南中苦)/기러기는 어찌 북쪽에서 또 오나(鴻雁那從北地來).”라고 망향대를 읊었다.
「함흥객관에 핀 국화를 마주하고(咸興客館對菊)」에서 함흥의 별칭인 ‘함산(咸山)’과 「중양절에 촉 땅에서(蜀中九日)」에서 촉(蜀)나라 땅을 가리키는 ‘남중(南中)’은 서로 대비된다. 이러한 탁월한 정경의 교융(交融)은 정철의 높은 시적 상상력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어 정철이 칠언절구에서 시적 재능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추일작(秋日作)
- 가을날에 짓다
山雨夜鳴竹 산속의 비는 밤에 대숲을 울리고
草虫秋近床 풀벌레는 가을 침상 가까이 다가오네.
流年那可駐 흐르는 세월 어찌 멈출 수 있으랴
白髮不禁長 흰 머리 늘어나는 걸 막을 수 없네.
- 『송강집』, 『대동시선』
홍만종의 『시평보유(詩評補遺)』에 “정철이 「가을날에 짓다(秋日作)」를 중국 종이에 써서 성혼에게 보이면서 ‘오래된 벽에 발려있던 것인데 작자를 알 수 없다’라고 말하니. 성혼이 여러 번 읽고 나서 만당(晩唐)의 시라고 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가을밤 대숲에 떨어지는 산속의 빗소리와 침상 가까이 다가오는 풀벌레 소리 등 자연의 소리 묘사를 통해 해를 재촉하는 가을 앞에서 인생무상을 자탄(自歎)하고 있는 「가을날에 짓다(秋日作)」라는 오언절구이다. 이 시는 “안짝(제1⸱2구)만 보면, 시작(詩作)의 모든 것은 신외(身外)의 경물(景物)에 맡기는 만당풍(晩唐風)으로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깥짝(제3⸱4구)은 범상(凡常)한 의상(意象)에도 불구하고 호탕한 기상(氣象)은 감추지 못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민병수, 『한국한시대강』 2, 2013, 태학사, p.659)는 평을 받았다. 처서가 지나 내리는 밤비가 대나무숲을 울리고 있고, 풀벌레가 침상을 가까이 찾아 와, 흐르는 세월을 머물게 할 수 없고, 늘어나는 백발도 막을 수는 없다고 노래하고 있다.
추야(秋夜)
- 가을밤
蕭蕭落葉聲 우수수 낙엽 지는 소리
錯認爲疏雨 성긴 빗소리로 잘못 들어
呼童出門看 아이 불러 문밖에 나가 보랬더니
月掛溪南樹 시냇가 남쪽 나무에 달이 걸려 있다 하네.
- 『대동시선(大東詩選)』
이 시는 속세를 떠나 자연 속에서 아무 속박 없이 자기 마음대로 자유롭고 마음 편히 사는 초탈한 마음을 그린 작품이다. 오언절구로 『송강집속집(松江集續集)』 권1에 「산사에서 밤에 읊조리다(山寺夜吟)」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시는 송나라 시인 구양수(歐陽脩, 1007년~1072년)가 「추성부(秋聲賦)」에서 “구양수가 밤에 책을 읽는데 서남쪽으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아이에게 ‘이게 무슨 소리냐, 밖에 나가서 살펴보고 와라’ 했더니, 아이가 말하길 ‘별과 달은 희고 맑게 빛나며, 은하수가 하늘에 드리웠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인적이 없고, 그 소리는 나뭇가지 사이에서 난다.’ 하였다(歐陽子方夜讀書, 聞有聲自西南來者…予謂童子, 此何聲也, 汝出視之, 童子曰, 星月皎潔, 明河在天, 四無人聲, 聲在樹間)”라는 구절에서 빌려 온 것이다.
조동일은 「가을밤(秋夜)」에 대해 “단순하고도 쉬운 시이지만 아주 산뜻하다”라고 말하면서 “시조를 통해서 더 잘 나타나는 바이지만, 정철은 예민한 감각을 생동하게 나타내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415.)라고 평했다.
단교귀승(斷橋歸僧)
- 끊어진 다리 위로 돌아가는 스님
翳翳林鴉集 어둑어둑한 숲으로 갈까마귀 모이고
亭亭峽日曛 고즈넉한 골짜기에 어스름이 깔리는데
歸僧九節杖 구절장 짚고 돌아오는 저 스님
遙帶萬山雲 만산의 구름을 아득히 둘렀네.
- 『송강원집(松江原集)』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 1496년∼1568년), 서하(棲霞) 김성원(金成遠, 1525년∼1597년) 등이 주고받은 ‘식영정잡영(息影亭雜詠)’ 중의 하나인 「끊어진 다리 위로 돌아가는 스님(斷橋歸僧)」은 시각적 심상의 묘사를 통해 세상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그려 보이고 있다. ‘예예(翳翳)’는 환하지 아니한 모양. 해가 질 무렵의 어스레한 모양이고, ‘정정(亭亭)’은 아름다운 모양. 예쁜 모양, 혹은 우뚝 솟은 모양을 나타내고, ‘구절장(九節杖)’은 아홉 마디의 대나무 지팡이를 말한다.
야좌문견(夜坐聞鵑)
- 밤에 앉아 두견새 소리를 듣다
掖垣南畔樹蒼蒼 대궐의 남쪽 동산에 나무가 울창한데
魂夢迢迢上玉堂 꿈속에서 멀리멀리 옥당에 올라가네.
杜宇一聲山竹裂 두견새 우는 소리는 산죽이 쪼개지는 듯
孤臣白髮此時長 외로운 신하의 백발도 이때에 길어지네.
- 『송강원집(松江原集)』
‘액원(掖垣)’은 대궐의 정전(正殿) 곁 담장을 말한다. 두보(杜甫, 712년~770년)의 시 「좌성에서 봄에 숙직하다(春宿左省)」에 “대궐 담장에 어둠이 내리자 꽃이 숨어들고(花隱掖垣暮), 새도 찍찍 지줘기며 잘 곳으로 날아가네(啾啾棲鳥過)”라는 구절이 있다. ‘초초(迢迢)’는 ‘멀리멀리’, ‘멀고 아득한 모습’을 뜻한다. 이백(李白, 701년~762년)의 시 「오래 서로 그리워함(長相思)」에 “푸른 하늘 바깥 멀리 있는 그대여(憶君迢迢隔靑天)”라는 구절이 있다. ‘옥당(玉堂)’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두우(杜宇)’는 춘추시대 촉(蜀)나라 왕인 망제(望帝)의 이름이다. 촉나라와 왕위를 한꺼번에 잃은 두우는 원통함을 못 이겨 죽어서 두견새가 되었다. 두견새는 밤마다 촉나라를 못 잊어 “돌아감만 못하다(不如歸)”를 외치며 울었다. 이후 소쩍새를 불여귀, 귀촉도(歸蜀途), 망제혼(望帝魂)이라는 달리 부르는 이름이 생겼다. 망제(望帝) 두우(杜宇)가 죽어서 두견새로 변했다는 슬픈 전설 때문에 두견새의 다른 이름이 되었던 것이다.
정철이 지은 칠언절구 「밤에 앉아 두견새 소리를 듣다(夜坐聞鵑)」는 『대동시선』과 『국조시산』에는 시제가 「서회(書悔)」로 되어 있다. 임금이 있는 대궐에서 머나먼 곳에 있는 시적 화자가 꿈속에서 혼이 되어 임금을 찾아 대궐로 올라가고, 두견새가 되어 산죽이 쪼개지는 듯이 울음을 터뜨린다. 결구의 “외로운 신하의 백발도 이때에 길어지네(孤臣白髮此時長)”에서 시적 화자의 임금에 대한 충절을 읽을 수 있다.
금사사(金沙寺)
十日金沙寺 열흘을 금사사에 머무르고 있노라니
三秋故國心 고향 그리는 마음에 일각이 삼 년만 같네.
夜湖噴爽氣 밤 조수 소리는 삽상한 기운 풍겨오고,
歸雁送哀音 돌아가는 기러기는 슬픈 울음소리 보내네.
虜在頻看劒 오랑캐 남아 있어 자주 칼을 바라보고
人亡欲斷琴 그 사람 죽어 거문고 줄 끊으려네.
平生出師表 평소에 품어 온 출사표를
臨難更長吟 전란에 부닥쳐 다시 길게 읊조리네.
- 『송강원집(松江原集)』
오언율시인 「금사사(金沙寺)」는 『기아(箕雅)』⸱『대동시선(大東詩選)』에는 시제가 「금사사유감(金沙寺有感)」으로 되어 있다. 금사사는 황해도 장연군에 있는 절 이름이다. 정철은 평안도 강계에 유배 도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명을 받들어 남행(南行)하는 도중에 풍랑으로 황해도 장연(長淵)의 금사사에 열흘간 머무르는 동안에 고경명(髙敬命, 1533년~1592년)과 조헌(趙憲, 1544년~1592년)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금사사」를 지었다. “고향 그리는 마음에 일각이 삼 년만 같네(三秋故國心)”에서 ‘삼추(三秋)’는 ⓵ 가을의 석 달. ⓶ 긴 세월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⓷ 세 해의 가을이라는 뜻으로, 삼 년의 세월을 이르는 말이다. 「금사사」에서는 세 해의 가을이라는 뜻으로, 삼 년의 세월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국(故國)’은 ‘⓵ 조상 적부터 살아온 자기 나라. ⓶ 이미 망해 버린 옛 나라. ⓷ 고향.’으로 풀이된다. 「금사사」에서는 ‘고향’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나라 시인인 두보(杜甫, 712년~770년)는 「상백제성(上白帝城)」에서 “객지를 떠돌며 술 마시고 취해버린 나그네가(取醉他鄕客), 고향에서 온 사람을 만났네(相逢故國人)”라고 노래하면서 ‘고국(故國)’을 ‘고향’이라는 뜻으로 구사했다. “그 사람 죽어 거문고 줄 끊으려네(人亡欲斷琴)”에서 ‘인망(人亡)’은 고이순(高而順), 즉 고경명이 의병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우다가 죽은 사실을 가리키고, 『열자(列子) 』 「탕문(湯問)」에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백아가 거문고를 타는 것을 잘 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때 그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는 ‘훌륭하다. 우뚝 솟은 그 느낌이 태산 같구나.’라고 말했고, 그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는 ‘멋있다. 넘실넘실 흘러가는 그 느낌은 마치 강물과 같군.’이라고 말했다. 백아가 뜻하는 바를 종자기가 다 이해했다.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더 이상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고 한평생을 마치도록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伯牙善鼓琴, 鍾子期善聽. 伯牙鼓琴, 志在高山, 鍾子期曰, 善哉. 峨峨兮若泰山. 志在流水. 鍾子期曰, 善哉. 洋洋兮若江河. 伯牙所念, 鍾子期必得之. 子期死, 伯牙謂世再無知音, 乃破琴絶絃, 終身不復鼓)”에 나오는 ‘단금(斷琴)’은 거미줄을 끊는다는 뜻으로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거문고를 부수고 줄을 끊고(破琴絶絃)”, 다시는 거문고를 타지 않았다는 것이다. ‘군대를 일으키며 임금에게 올리는 글’이라는 뜻을 가진 「출사표(出師表)」는 중국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재상(宰相)인 제갈량(諸葛亮, 181년~234년)이 선주(先主) 유비(劉備, 161년~223년)가 죽은 후에 위나라를 토벌하러 떠나며 후주(後主), 유선(劉禪, 207년~271년)에게 바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