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名門家)는 시간과 인간학의 축적인 '문화'로 이루어진다.그 기준은 '어떻게 살았느냐(How to live)',즉 '지조'로 귀결된다.지조란 상류층의 사회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얼마나 실천했느냐로 가늠된다.
서양사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후원자인 메디치가(家),근세유럽 최고의 명문가로 알려진 합스부르크왕가,미국의 케네디,부시가 등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명문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그렇다면 한국의 명문가는?
원광대 조용헌 교수(41·동양학 대학원)는 최근 펴낸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에서 금력으로 세운 '신흥 명문'이라는 가식적 신분을 엄정히 부정한다.강남 졸부들은 '명문'의 대상에서조차 제외된다.벼슬의 높음과 경제력은 그저 참고사항일 뿐.명사(名士)를 많이 배출했다고 명문가가 되는 것도 아니다.
조씨는 한국 명문가의 기준을 "집안 대대로 진선미(眞善美)에 부합하는 삶을 이어왔는가"로 잡았다.예부터 '정승 셋보다 대제학 한 명이 더 귀하고,대제학 셋보다 처사 한 명이 더 귀하다'는 말이 전해내려 왔음이니 그가 전국 구석구석을 쏘다니며 선정한 '한국 15대 명문가'에는 솔선수범의 가훈이 내려온다.
그는 여기에 바람과 물의 원리에 부합한 집터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점도 들었다.이 책에는 이같은 조건을 갖춘 명문가로
경북 영양의 시인 조지훈 종택,
경주최부잣집,
전남 광주 기세훈 고택,
경남 거창 동계고택,
서울 안국동 윤보선 고택,
안동 의성 김씨 내앞종택,
죽산 박씨의 남원 몽심재,
대구 남평 문씨 세거지,
전남 해남 윤선도 고택,
충남 아산 외암마을 예안 이씨 종가,
전남 진도 양천 허씨 운림산방,
충남 예산 추사 김정희 고택,
전북 익산 표옹 송영구 고택,
경북 안동 학봉종택,
강릉 선교장 등 모두 15곳이 소개돼 있다.각 가문의 역사와 자녀 교육법,치부법도 소개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가난한 사람의 논을 사지 않는다'는 가훈을 400년 동안 이어온 것은 경주 최부잣집이었다.시인 조지훈가는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않는다는 '삼불차(三不借)'의 가훈을 지켜왔다.안동의 학봉 김성일가는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지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강직한 신념을 지켜왔다.진도의 양천 허씨가는 '우물을 파려거든 하나만 파라'는 신념으로 5대째 예술가를 배출했다.
조씨의 한국의 명가 분류법은 모두 세 가지.적어도 400∼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선비정신에 해당하는 도덕성을 갖춰야 하고 현재에도 사회 곳곳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인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명문이란 솔선수범을 행하는 집안이었습니다.로마의 귀족은 전쟁이 일어나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최전선에 나가 피를 흘렸지요.귀족은 사회적인 책임을 져야한다는 생각이 강한 반면 노예나 평민은 책임이 없거나 약했어요.책임지는 것이 귀족이고 여기서 로마의 리더십이 나왔습니다"
사회적 책임을 지기보다 떠넘기기에 급급한 요즘 정치판의 오리발 세태와 한국 명가에서 면면히 이어져온 신념은 얼마나 대조적인가.지조를 지키며 살아가기에 우리 근대사가 너무도 험난한 가시밭길이었음을 인정하더라도 오늘 당장,양심과 지조를 지킨 인간을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