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여행에 대한 소고(小考)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경주가 어떤 곳인지 물으면 정확히 대답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왜, 경주에 가느냐고 물으면 봄에는 보문단지의 벚꽃 구경, 가을에도 보문단지의 단풍 구경을 하거나 보문단지에서 자전거, 산악오토바이를 타면서 놀기 위해서라도 대답한다.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국사교육에 의문이간다.
우리들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불국사 단풍, 석굴암, 신라밀레니움파크, 보문단지 벚꽃과 단풍 등을 주로 즐길 것이다.
이러한 경주 관광의 성향은 경주에 어떤 것이 있으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 모르고 막연히 '놀러 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경주는 분명히 신라 1000년의 고도이자 아시아 3대 유적(1979, 유네스코) 중의 하나인데도 말이다.
보문단지는 외국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명활산 옛 성터 아래 만들어진 50만평 규모의 인공호수인 보문호(普門湖)를 중심으로 주위에는 국제적 규모의 호텔과 경주월드 등을 각종 위락시설과 공원시설이 갖추고 있는 국제관광지원시설지역이다. 세계은행의 2500만 달러 차관을 포함한 총 600억 원을 투입하여 1974년부터 개발에 착수, 1979년 4월에 1단계 공사를 마치고 개장되었다. 따라서 신라 유적을 국제적으로 알리기 위한 지원시설로서 보문단지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또 경주에 갈 것이다. 경주에 있는 유적중에서 한번쯤 눈여겨 보아야 할 곳 몇몇을 아래 지도에 표시해 두었다. 경주여행을 하는 동안 이들 유적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한다. 자전거나 산악오토바이를 타면서 야단스러운 젊은 이들에게 보문단지를 양보하고.... 여행을 마친후 휴식을 보문단지에서 즐기고....
보문단지
보문호의 서쪽 호반. 보이는 건물은 레스토랑, 로미오엔줄리엣.
이곳에서 보문호를 바라 보면서 차나 식사(양식)를 즐기면서 휴식하는 것도 좋다.
보문호 선착장 휴식공간
현대호텔(이 호텔 라운지의 벽에는 복구되기 전의 불국사 모습을 비롯해서 멋진 사진들이 걸려 있다)
콩코드호텔(이 호텔의 정원이 잘 만들어져 있다.)
건물모양이 멋진 호반정
경주와 그 주변의 관광지
확대한 지도
신라유적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두 곳이 있다.
하나는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월성'이고 다른 하나는 '황성공원'으로 경주에서 매우 의미 깊은 곳이다. 특히, 신라의 왕궁이 어디 있었는 지 모르고 경주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신라왕궁인 월성에 올라 주변을 내려다 보면 잘 알려진 안압지, 대릉원, 첨성대, 요석궁 등이 왜, 거기에 있으며, 불국사, 석굴암을 비롯한 다른 유적의 위치를 이해 하기 쉬울 것이다.
관심을 갖지 않으면 국립경주박물관과 안압지 사이에 길쭉하게 솟아오른 언덕을 산책하고 놀기 좋은 풀밭 유원지로 생각하기 쉽다. 바로 신라의 왕궁이 있었던 경주 월성임에도 불구하고....
경주 월성(月城 반월성)은 사적 제16호로 재성(在城) 혹은 반월성(半月城)이라 부른다. 경북 경주시 인왕동(仁旺洞)에 있는 101년(파사왕 22)에 축조한 신라 때의 성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보면 월성터(月城址)는 원래 충신인 호공(瓠公)의 거주지였는데, BC 19년(박혁거세 39년) 석탈해(昔脫解)가 금성(金城)의 지리를 살펴본 뒤에 가장 좋은 길지(吉地)로 호공의 집터를 지목하여 거짓 꾀를 부려 호공의 집을 빼앗아 월성을 쌓았다. 이 공으로 석탈해는 남해왕(南解王)의 맏사위가 되었고, 그 후에 신라 제4대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위가 1,023보(步)이며, 자연적인 언덕 위에 반월형으로 흙과 돌을 혼용하여 쌓았고, 여기에 신라 역대 왕들의 궁성이 있다고 기록되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는 290년(유례왕 7) 큰 홍수로 월성이 무너져 이듬해 보수하였으며, 487년(소지왕 9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고 적혀 있다.
기록에 따르면 월성을 중심으로 한 궁성의 문은 남문(南門), 귀정문(歸正門), 북문(北門), 인화문(仁化門), 현덕문(玄德門), 무평문(武平門), 준례문(遵禮門), 임해문(臨海門) 등이 있었고, 누각으로는 월산루(月山樓), 망덕루(望德樓), 명학루(鳴鶴樓), 고루(鼓樓) 등이 있었다. 또 관청으로는 남당(南堂), 조원전(朝元殿), 숭례전(崇禮殿), 평의전(平議殿), 좌사록관(左司祿館), 우사록관(右司祿館), 영각성(玲閣省), 월정당(月正堂) 등이 있었다.
왕궁으로는 내성(內省), 임해전(臨海殿), 안압지(雁鴨池), 동궁(東宮), 동궁만수방(東宮萬壽房), 영창궁(永昌宮), 영명궁(永明宮), 월지궁(月池宮), 내황전(內黃殿), 내전(內殿), 내정(內庭) 등이 있었다. 영명궁은 태후의 궁이었고, 월지궁은 왕태자의 궁이었다. 천존고(天存庫)에는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文武王)의 전설과 관계가 있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있었다.
신라가 망한 뒤 궁을 보호하지 않아 자연적으로 파괴되고 소실된 것을 수리하거나 보존하지 않아 지금의 경주 월성에는 아무런 건물도 남아 있지 않고 숲만 우거져 있고 텅 빈 뜰에 잔디만 무성할 뿐이다. 백제의 옛 도읍지인 부여에는 왕궁이 복원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모여드는데....
과거 금성이나 만월성이 어디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길 하나를 두고 갈라져 있는 안압지와 더불어 월성 일대는 신라의 궁궐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 되고 있다. 성문터와 성벽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인공 방어 시설인 해자가 있었음이 밝혀졌으며, 조선 영조(1738)때 만든 석빙고 시설이 남아 있다. 월성 북쪽 자락에는 벚나무, 월성과 첨성대 사이에는 유채꽃밭이 조성되어, 제철이 되면 장관을 이룰 뿐이다. 천마총 주차장으로 부터 첨성대, 대릉, 괘릉 등을 거쳐 월성으로 가는 길은 주변경치도 좋아서 걷는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현재 반월성의 복구를 위해 발굴이 진행중이다. 지하에 묻혀있는 유물,유적이 여러 층을 이루고 있어 오래 걸릴 것이라고 한다.
반월성 입구에 있는 영상관.
여기서 옛 서라벌의 재현모습을 담은 영화를 상영한다.
반월성 길 건너편에 있는 동궁과 월지
동궁과 월지 모습의 재현
황성공원(皇城公園)은 경주시 황성동에 위치한 숲으로 조성된 공원미며 신라시대 화랑들의 훈련장이었다.
공원 안에는 경주실내체육관, 시립도서관, 공설운동장, 충혼탑, 박목월 시비, 국궁(國弓) 궁도장 호림정 등이 있다. 경주 출신인 시인 박목월의 시비(詩碑)가 있고 뒤로 솟아 있는 동산 위에는 높이 16m의 김유신 장군 동상이 서 있다.
호림정 주위에는 수령 수백년에 이르는 느티나무를 비롯하여 이팝나무·회나무·떡갈나무·살구나무·향나무·소나무·상수리나무가 우거져 있다. 봄에는 벚꽃, 어름에는 신록, 가을에는 단풍 등을 즐기면서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2년에 한 번씩 짝수 해의 10월 초순에 이곳에서 신라문화제가 열리며, 공설운동장에서는 매년 동아마라톤대회가 열린다. 곳곳에 체력단련시설이 있고, 산책로를 따라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고 돌 수 있다.
주변에 백률사·굴불사지·탈해왕릉·사면석불상·분황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경주의 주요 유적
불국사는 경주시 진현동 토함산 기슭에 있는 신라시대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11교구본사(敎區本寺)의 하나로 그 경내(境內)는 2009년 12월 21일에 사적 제502호로 지정되었으며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 중 하나는 《불국사고금창기(佛國寺古今創記)》로, 여기에 보면 528년(신라 법흥왕 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迎帝夫人)의 발원(發願)으로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大城)에 의하여 크게 개수되면서 탑과 석교 등도 만들었다고 하였다.
한편, 《불국사 사적(事蹟)》에서는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였고 경덕왕 때 재상(宰相) 김대성에 의하여 크게 3창(?)되었다고 하였다. 이상으로 미루어 처음에는 소규모로 창립되었던 불국사가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5 <대성효 2세부모(大城孝二世父母)>조에는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당시의 건물들은 대웅전 25칸,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靑雲橋) ·백운교(白雲橋), 극락전 12칸, 무설전(無說殿) 32칸, 비로전(毘盧殿) 18칸 등을 비롯하여 무려 80여 종의 건물(약 2,000칸)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불국사고금창기》에 있는 이 기록을 보면,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되었다고는 보기 힘들며 오히려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함이 옳을 것 같다. 1593년 5월 임진왜란의 병화로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조선 후기 국운(國運)의 쇠퇴와 더불어 사운(寺運)도 쇠퇴하여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經樓) ·회랑(廻廊) 등이 복원되었고, 대웅전 ·극락전 ·범영루(泛影樓) ·자하문(紫霞門) 등이 새롭게 단장되었다.
모든 사찰이 그러하듯이 여기에 다듬어진 돌들, 나무들, 그리고 적절히 꾸며진 공간(空間)들은 모두 사람의 정성이 깃든 곳이며, 그 정성은 우선 연약한 인간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다. 자신의 구원(救援), 부모의 명복(冥福), 국가와 민족의 안녕, 부처의 가호(加護), 그 모든 것을 비는 절실한 염원(念願)이 이곳 돌 하나하나에 담겨 있다 하겠으며 이러한 정성으로 이룩된 불국사는 신라인이 그린 불국(佛國), 즉 이상적 피안(彼岸)의 세계 그 자체라 하겠다.
이 불국을 향한 염원은 대개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으니, 하나는 《법화경(法華經)》에 근거한 석가여래의 사바세계(娑婆世界) 불국이요, 다른 하나는 《무량수경》 또는 《아미타경》에 근거한 아마타불의 극락세계 불국이요, 또 하나는 《화엄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 불국이다. 이 셋은 각각 대웅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一廓)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하는 일곽, 비로전으로 종합되는 전체의 구성을 통하여 그 특징적인 표현을 이루어 놓았다.
이곳에 정성을 바친 승려와 선현(先賢)들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나 주요한 인물만을 열거하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는 영제부인(법명 法流), 절을 중건한 지소부인, 헌강왕비(憲康王妃) 권씨(법명 秀圓), 의상의 제자 표훈(表訓), 불국사의 개조로 불리는 김대성, 탑을 조성한 백제의 예술가 아사달(阿斯達), 그에 대한 애정을 자비(慈悲)로 승화시킨 아내 아사녀(阿斯女), 지금은 불타 없어졌지만 광학장강실(光學藏講室) 벽에 석가상을 수놓았던 경문왕(景文王)의 공주로서 비구니가 되었던 원해(圓海) 등은 모두 이 절에 염원을 건 사람들이다.
고려시대에는 지율(持律)이 엄하기로 이름난 유가학승(瑜伽學僧) 해원(海圓)이 이곳에 살았으며, 조선시대에는 효령(孝寧)·안평(安平)·영응(永膺) 등의 대군(大君)과 세종·노산군(魯山君), 왕실의 대비(大妃)·상궁(尙宮) 등의 지성(至誠)이 끊임없이 불국사로 쏠렸다.
불국사 경내에는 다보탑(多寶塔, 국보 20), 3층석탑(국보 21), 연화교·칠보교(蓮華橋·七寶橋, 국보 22), 청운교·백운교(靑雲橋·白雲橋, 국보 23), 금동비로자나불좌상(金銅毘盧遮那佛坐像, 국보 26), 금동아미타여래좌상(金銅阿彌陀如來坐像, 국보 27), 사리탑(舍利塔, 보물 61) 기타 많은 문화재가 잔존한다.
보수 중인 석가탑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에 경주 토함산(吐含山)에 세워진 한국의 대표적인 석굴사찰이다.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주는 역사 유적으로 국보 제24호로 지정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었다.
문화재청에 등록된 정식명칭은 석굴암석굴이며, 《삼국유사》에 나오는 원래 이름은 석불사이다.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예속되었고, 191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석불사 대신 현재의 석굴암(石窟庵)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석굴암은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 751년(경덕왕 10)에 대상(大相) 김대성(金大城)이 불국사(佛國寺)를 중창할 때, 왕명에 따라 착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즉, 그는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는 한편, 전세(前世)의 부모를 위해서는 석굴암을 세웠다는 것이다.
따라서 김대성은 왕명을 받들어 토함산의 정상을 사이에 두고 동서로 전개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김씨 왕족(金氏王族)을 위한 2대 사찰의 건립에 마지막 생애를 다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석굴암은 김대성 생전에 완공을 보지 못하여 그 조영사업은 국가가 마침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점은 분명히 석굴암의 창건이 김대성이라는 개인의 원력(願力)으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왕실을 비롯한 당시 신라인 모두가 염원한 거족적인 일대 불사(佛事)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석굴암의 방위(方位)가 김씨 왕족의 공동묘역(共同墓域)인 신라의 동해구(東海口)와 일치하고 있음을 보아도 더욱 뚜렷해진다. 동해구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인 문무왕(文武王)의 해중릉(海中陵), 즉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는 곳을 말한다.
문무왕은 욕진왜병(欲鎭倭兵)하고자 동해의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저승에서까지 국가수호의 집념을 잃지 않겠다는 군왕이었다. 이 같은 호국사상은 동해구의 유적인 해중릉을 비롯하여 감은사(感恩寺)나 이견대(利見臺), 그리고 석굴암과 동해구와의 관계 등에서 같은 맥락으로 파악될 수 있다. 이 점은 석굴암의 창건주인 경덕왕의 선왕(先王), 즉 효성왕(孝成王) 역시 화장 후 산골(散骨)된 곳이 이 동해구여서, 석굴암 대불의 시각(視角)이 동남동 방향으로 동해구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과 연관성이 있다.
그것은 곧 신라인의 믿음과 호국정신의 요람으로서 국찰(國刹)도 같았던 석굴암의 존재를 뚜렷이 부각시켜 주는 예라고 하겠다. 이로써 석굴암이 지니고 있는 신앙적인 측면은 물론, 조형적인 면까지 신라미술의 최고 절정을 이룬 민족 최대의 석조미술품으로 꼽아 결코 손색이 없는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1995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였다.
석굴암의 구조적 특색은 무엇보다 화강암의 자연석을 다듬어 인공적으로 축조한 석굴사찰이라는 점이다. 즉, 인도·중국 등의 경우와 같이 천연의 암벽을 뚫고 조성한 천연석굴이 아니다.
이 같은 토목기술을 바탕으로 이룩된 석굴의 기본적인 평면구조는 전방후원(前方後圓)의 형태를 취하면서 네모진 공간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나뉘어져 있다. 주실에는 단독의 원각(圓刻) 본존상(本尊像)을 비롯하여 보살과 제자상 등이 있으며, 전실에는 인왕상(仁王像)과 사천왕상(四天王像) 등을 부조(浮彫)하여 배치하였다. 이 전실의 기능은 곧 예배와 공양을 위한 장소이다.
천장은 궁륭형의 둥근 양식이며, 그 위에 연화문(蓮花紋)의 원판을 두어 천개(天蓋)로 삼고 있다. 조각상의 배치는 전실부터 시작하여 팔부신중(八部神衆) 8구, 인왕(仁王) 2구, 사천왕 4구, 천부(天部) 2구, 보살(菩薩) 3구, 나한(羅漢) 10구, 감불(龕佛) 8구와 본존여래좌상 1구가 있다. 이들 불상의 배치에 있어 두드러진 특징은 무엇보다 좌우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고대 조형미술의 기본원칙과 같은 것이기도 하여서 석굴의 안정감을 한층 강조하는 구실도 하고 있다.
조각상 가운데 가장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본존여래좌상이다. 이 석굴 자체가 본존상을 봉안하기 위하여 조영되었던 만큼 그 의미가 매우 큰 불상이다. 예배의 주대상이 곧 이 본존상임은 물론, 중앙에 자리잡아 석굴의 내부공간을 구획한 신라 조각미술의 결정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뛰어난 작품이다. 본존상은 연화문이 새겨진 대좌(臺座)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광배(光背)는 석굴 후벽의 천장 밑에 둥근 연화판석(蓮花瓣石) 1매로 조성하였다. 이는 전실의 법당에서 본존상에 예배할 때, 동일시각 위에 놓여지는 치밀한 계산에 따라 처음부터 마련된 것이다.
본존상의 양식적 특징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7세기 후반부터 유행하여 고려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여래좌상의 기본양식이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벗고 왼쪽 어깨에 가사(袈裟)를 걸친 우견편단(右肩遍袒) 양식을 보이고 있다. 또한 수인(手印)은 악마의 유혹을 물리친다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결(結)하고 있다. 머리 위에는 육계(肉? )를 표시했으며 머리는 나발(螺髮)이다. 상호(相好)는 원만한 모습에 자비(慈悲)를 지니고 있다.
신부(身部)는 매우 당당할 정도의 거구로서 장부의 상을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있으며 오른손은 무릎에 올려놓고 두 번째 손가락을 다음 손가락 위에 겹쳐 운동감을 주고 있다. 왼손은 두 발 위에 놓아 편안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어떻든 본존상의 신앙적인 의미와 조형적인 가치가 훌륭히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 부드러운 자태와 인자한 표정에서 고도의 조각술을 살필 수 있는데, 이는 궁극적으로 불교의 구원상(久遠像)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석굴암 본존상에서 중요한 부분은 명호이다. 지금까지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그것은 석가여래로 통칭되어 왔으나 이는 뚜렷한 오류임이 구명되었다. 즉, 19세기 말엽 중수 당시의 현판(懸板)에 미타굴(彌陀窟)이라는 기록이 있었다는 점과, 오늘날까지 전래되고 있는 편액(扁額)에도 수광전(壽光殿)이라는 표기를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히 '무량수(無量壽)·무량광(無量光)'을 뜻하는 수광(壽光)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자료는 본존상의 명호가 석가여래 아닌 아미타불(阿彌陀佛)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또한 신라시대에 보편적이던 우견편단과 항마촉지인은 곧 아미타불이었다는 점도, 본존상의 명호를 밝히는 데 중요한 뒷받침이 된다. 이는 영주(榮州) 부석사(浮石寺)의 무량수전(無量壽殿)에 안치된 본존상이나 군위(軍威) 팔공산(八公山)의 석존 본존상 등 같은 양식의 불상에서도 분명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양식계보로 비추어 볼 때 석굴암 본존불상의 명호는 7∼8세기 신라에서 유행했던 아미타불임이 분명한 것이다. 또한 김대성이 현세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세 부모를 위해 석굴암을 세웠다는 창건 유래 역시 미타정토(彌陀淨土)를 표현한 것으로, 동해구의 유적과도 연관되고 있다.
이상의 여러 관점에서 석굴암 본존상의 명호는 마땅히 신라인의 정토신앙을 기반으로 한 아미타불이며, 왕족의 발원에 의해 이루어진 거국적인 불사(佛事)이었음을 확인케 한다.
이 암자내에 유리관속에 불상이 있으며,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포석정은 신라 경애왕이 이곳에서 연회 중에 후백제 견훤 군대의 습격을 받아 최후를 마친 곳이다. 신라의 비극이 스려 있는 이곳에 올해도 가을이 내리고 있다.
경애왕은 이곳에 술을 부어 잔을 띄우면서 연회(유상곡수연 流觴曲水宴)를 즐겼다고한다. 토탄에 빠진 백성들의 삶은 돌보지 않고....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 부패하면 백성들이 힘들고 나라가 기울어진다.
유상곡수연 流觴曲水宴이란......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71033&cid=43667&categoryId=43667
포석정 담벼락에 걸려 있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사진
포석정에 신라 왕경도가 있다.
월정교(月淨橋)는 통일신라시대에 문천(蚊川) 위에 놓여 졌던 다리로 궁궐과 외부를 연결하는 통로였다, 궁궐 안에 큰 연못을 파고 궁궐 남쪽 문천 위에 월정교와 춘양교 두 개의 다리를 놓았다한다.
원효대사가 요석공주를 만나기 위해 이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한다.
2008년에 착공하여 거위 완공단계에 와 있다. 현재 다리를 건너 볼 수는 없지만 그 자태를 감상할 수 있고, 야간에는 조명이 되고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요석궁, 최부자 고택, 경주교동법주가가 있다.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8404&cid=49235&categoryId=49235
http://blog.daum.net/kelim/15714974
신라시대의 월정교 주변(재현)
경주 최부자 고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랫 동안 부를 지켜온 ‘최부자 집’이다. 최부자 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졌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당대에 부를 일구었다가 당대에 망했거나 길어야 3대도 지속하지 못했다 한다.
최부자 가문에서는 어떻게 300년 동안 부를 지켜 왔을까?
경주 최부자는 경주최씨 17세손인 최진립(1568-1636)과 그의 아들 최동량이 터전을 이루었고, 손자인 최국선(1631-1682)으로 부터 28세손 최준(1884-1970)까지 약 300년 동안 부를 누린 일가를 지칭한다. 즉, 1대 최진립(1568-1636)부터 가문의 모든 재산을 영남대학교의 설립에 기부한 12대 최준(1884-1970)까지를 말한다.
최부자 집안은 전라도수군절도사 등을 지내다가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순절한 최진립의 공신 토지를 기반으로 만석의 재산을 이루었다.
부자이면서도 철저하게 가문의 6연과 6훈을 통하여 근검절약을 실천했고, 투철한 사회봉사 정신으로 나라와 이웃을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아낌없이 썼다.
최부자 가문의 육연(자신을 지키는 교훈)
자처초연(自處超然) :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대인애연(大人靄然) :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무사징연(無事澄然) : 일이 없을 때 마음을 맑게 가지고
유사감연(有事敢然) : 성공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고
실의태연(失意泰然) : 실패했을 때는 태연히 행동한다
최부자 가문의 육훈(집안을 다스리는 교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들은 3년간 무명옷을 입게 하라
경주이씨 이회영, 이시영 일가와 함께 지도층이면서 사회적 책임도 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명문가로 꼽히고 있다. 나라와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친 경주 최 부잣집의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부자의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한다.
현재 경주시 교동에 있는 최씨 고택은 경주최씨 7대인 최언경(崔彦璥 1743-1804)이 최부자집의 파시조(派始祖)인 최진립(崔震立)부터 약 200년 동안 거주하던 경주시 내남면 이조리 속칭 ‘게무덤(물이 모이는 기름진 땅)’에서 이곳으로 이사하여 거주한 곳이다. 방이 99개나 되었다 한다. 중요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경주 최부자 고택(오른 쪽)과 교동 법주(왼 쪽)
최부자고택을 지키고 있는 경주 토견 '동경이'
요석궁은 신라 29대 무열왕의 첫째 딸이자 원효대사와 사랑에 빠져 설총을 낳은 요석공주가 살았던 곳으로 최부자고택 옆에 있다.
조선 말엽에 경주 최씨 가문이 옛 요석궁 자리에 저택을 지었고,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유람과 나라 잃은 울분을 달래며 이 곳을 찾았고, 이들이 맛 본 최씨 집의 전통 한국요리가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현재는 고급 전통한정식 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한국 전통가옥에 꾸며진 조경과 고가구들이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교동법주가
경북 경주시 양북면에 있는 신라 문무대왕릉과 감은사지는 서로 밀접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감은사지로 가는 길
문무대왕릉이 있는 해변에는 횟집을 비롯하여 식당이 많이 있다. 이곳 횟집의 물회가 맛있다.
문무대왕릉 (慶州 文武大王陵)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대왕암에 있는 신라 30대 문무왕(661-681년)의 바다 속 왕릉이다.
문무왕은 그의 부친인 무열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며 중앙관청의 창설과 지방통치를 위한 군사제도의 기틀 마련을 통하여 국가 체제를 완성하였다.
문무왕릉은 자연적인 바위(대와암)를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그 안에 사방으로 향하는 인공수로가 있어 바닷물이 동쪽에서 유입하여 서쪽으로 유출하게 만들었다. 수면 아래에는 길이 3.7m, 폭 2.06m의 남북방향으로 길게 놓인 넓적한 거북모양의 돌이 덮혀 있고 이 안에 문무왕의 유골이 매장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문무왕이 승하하면서 '불교식 장례에 따라 화장하고,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동해 근처에 감은사를 세워 법당 아래 동해를 향하는 배수로를 만들어 용이 된 문무왕이 왕래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한다.(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감은사지(感恩寺址)는 경북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는 신라시대(682년, 신문왕 2년)에 신문왕이 부왕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한 감은사 절터이다. 감은사지 근처 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海中陵)인 대왕암(大王巖)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교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하였으나, 절이 완공되기 전에 병이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智義)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다.
그 때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을 파서 용이 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문무왕릉과 감은사간을 왕래할 수 있도록 하였다. 682년 신문왕은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과 삼십삼천(三十三天)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金庾信)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보물인 신비스러운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이 절은 황룡사(皇龍寺), 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삼층석탑 2기가 있다.
이 석탑들은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를 합하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탑 중에서 가장 큰 것이다. 이 탑은 고선사(高仙寺)의 삼층석탑, 나원리의 오층석탑 등과 함께 신라통일기의 전형적인 탑파양식을 따르고 있다. 1966년에 동서로 나란히 있는 쌍탑 중 서쪽 삼층석탑에서 임금이 타는 수레의 형태인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는데, 보물 제366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1996년 동쪽 삼층석탑이 해체 수리되면서 서쪽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것과 형태가 유사한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사리 10여과가 나왔다.
동쪽 탑의 사리함은 지붕인 천개(天蓋)의 양식이 서역의 영향을 받았음을 6세기에 조영된 중국 당대(唐代)의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 벽화 및 구조 등과 비교하여 알 수 있었으며, 1966년 서탑에서 발견된 사리가 진신사리(眞身舍利)임에 비해 동탑에서 나온 사리는 문무왕의 사리가 아닌가 추정하기도 한다.
금당터는 비교적 잘 보존되어, 지표(地表)에는 원형 주좌(柱座)가 각출(刻出)된 1개의 초석이 있고, 곳곳에 사각형 초석(楚石)과 대석(臺石)이 있으며, 금당 마루를 이루었던 장대석 등이 있다. 중문터와 회랑터의 남쪽 절반 및 금당터의 대부분이 밭이 되었고, 회랑터 북쪽 절반과 강당터에는 민가가 들어 서 있다.(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양동(慶州 良洞)마을은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있는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종가가 약 500년 동안 전통을 이어온 유서 깊은 동족마을이다. 1984년에 국가지정문화제(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에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양동마을 전경(출처: 양동마을 홈페이지 http://yangdong.invil.org)
양동마을은 넓은 안강평야에 풍수지리상 재물복이 많은 지형구조를 지니고 있다. 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와가(古瓦家)와 이를 에워싸고 있는 110여 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양반가옥은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낮은 지대에는 하인들의 주택이 양반가옥을 에워싸고 있다. 양반 가옥들은 종가일수록 높고 넓은 터에 양반들의 법도에 따라 집을 배열하고 있는데 잘 보존되어 있다.
집들의 기본구조는 대개 ㅁ자형이거나 튼ㅁ자형을 이루고 있고, 간혹 대문 앞에 행랑채를 둔 예도 있다. 혼합배치 양식으로 ㄱ자형이나 一자형도 있지만 대체로 집의 배치나 구성 따위가 영남지방 가옥이 지니는 특색을 띠고 있다.
마을의 규모, 보존상태, 문화재의 수와 전통성,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성 등에서 어느 곳보다 훌륭하고 볼거리가 많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이곳을 방문했다.
통감속편(국보 283호), 무첨당(보물 411호), 향단(보물, 412호), 관가정(보물 442호), 손소영정(보물 1216호)을 비롯하여 서백당(중요민속자료 23호) 등 중요민속자료 12점과, 손소선생 분재기(경북유형문화재 14호) 등 도지정문화재 7점이 있다.
경주를 여행해 보면 몇 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음식이 좋지 않고 숙박이 불편하다. 관광지역이기 때문에 비싸고 질은 낮다.
경주의 음식은 비싸고 부실하다.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가능한 점심은 간단한 도시락을 준비하여 유적을 돌아보다가 경치 좋은 곳을 찾아서 먹는 것이 좋다. 숙박을 할 경우, 아침과 저녁은 경주시내 천마총 뒷쪽 거리에 있는 해장국 거리,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 식당, 보문단지내의 경주교육문화회관의 한식당(혹은 뷔페)을 이용하면 좋다(지도에 표시되어 있음). 아니면 특별하게 연인(아내 혹은 남편 포함)과 함께 보문호 산책길을 동쪽부터 걷다가 서쪽 끝에 있는 '로미오엔쥴리엣'이라는 레스토랑(지도에 표시되어 있음)에서 보문호를 감상하면서 점심 혹은 저녁을 하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레스토랑은 가격도 적당하고 음식과 분위기도 좋다.
보문단지내의 호텔들은 숙박시설이 양호하지만 나머지 모텔이나 여관은 타 지역에 비해 시설이 열악하다. 마치 수학여행단체학생들을 위한 시설로 착각할 정도이다. '호텔조인' 등의 숙박 알선 전문사이트를 통해 보문단지의 호텔을 예약하면 그런대로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다.
이들 3대 유명음식을 후회없이 맛 볼 수 있는 곳은.....
순두부, 경주 도처에 있지만...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h1016sh&logNo=2019186585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vampy&logNo=140190735066
참가자미회, 경주 한전근처에 집중되어 있다. 아니면 감포로 가서 ...
참가지미회의 원조, 대풍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eejsp2y&logNo=140112671296
그외
해남 http://cafe.daum.net/khant/SSf/982?q=%B0%E6%C1%D6%20%C2%FC%B0%A1%C0%DA%B9%CC%C8%B8&re=1
풍년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ktcu_attic&logNo=60098956253
한우. 봉계한우불고기 단지로. 가는 것이 정석이지만, 경주시내에서 저렴한게 먹을 수 있는 곳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lhn3862&logNo=120199187984
쌈밥은 대릉원-첨성대 근처에 집중해 있다.
참고로,,,,,엄청나게 비싸고 실속없는 집, 요석궁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cwwkk518&logNo=140201588277
첫댓글 자주 접하는 경주 이지만 여정님이 올려주신 좋은 정보를 통하여 한층 더 배우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민수님의 경주여행때 재미가 많이 담기길 기대해 봅니다. 경주여행에 제일 문제가 음식과 숙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