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은 다시 혜춘에게 주장자를 내리쳤다. 혜춘 역시 매를 피하지 않았다.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래도 성철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일찍이 이렇듯 가혹한 경책은 선종사에서도 흔치 않았다. 성철은 몽둥이로 말하고 있었다.”
도인으로 소문이 나자, 전국에서 스님과 신도들이 천제굴을 찾아왔다. 어느 날 여섯 보살이 토굴을 찾아왔다. 안정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천제굴로 올라왔다. 혜춘도 그중 하나였다. 혜춘은 4남매를 둔 세칭 ‘높은 집 마나님’이었다. 성철이 돌아가며 이것저것을 물었다. 맨 마지막에 혜춘을 보며 말했다.
“왜 불교를 믿으려 하는가?”
“성불하려고 믿습니다.”
답을 듣고 성철이 무심히 말했다.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가려고 하는구나.”
그러자 혜춘은 의문이 들었다. 바다를 배가 아닌 송장을 타고 가야 하는 비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다음 날 함께 온 보살들이 떠났지만 혼자 남아 성철에게 답을 달라 졸랐다. 그래도 눈길 한번 주지 않자, 단식에 돌입했다.
“송장을 타고 바다를 건너는 그 이유를 알기 전에는 집에 못 갑니다.”
성철이 마지못해 달랬지만 혜춘은 막무가내였다.
“우리더러 송장을 치우라고 할 작정이냐. 밥이나 먹고 내려가라.”
“굶어 죽어도 먹지 않고, 또 내려가지 않을 것입니다.”
천제굴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혜춘을 성철이 불렀다. 혜춘이 큰절을 올리고 앞에 앉았다.
“인간이 희구하는 게 무엇인가.”
“행복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향유할 수 있는 행복은 유한이냐, 무한이냐?”
“무한한 행복을 바라지만, 죽으니까 유한한 것 아닙니까.”
“그럼 무한한 행복이 있다고 하면 공부를 해보겠느냐.”
“믿어지면, 한번 해보겠습니다.”
성철은 우선 절 만 배를 하라 일렀다. 만 배를 끝내니 2만 배를 하라고 했다. 2만 배를 끝내니 다시 3만 배를 하라 했다. 그리고 다시 4만 배를 시켰다. 그렇게 합쳐서 10만 배를 마치자, 성철은 미리 써둔 법문을 내밀었다.
1. 생사윤회의 근본인 부모, 형제, 부부, 자녀 간의 애정을 영단(永斷)해서 돌아보지 말고 생사윤회의 근본을 끊을 것.
2. 선악 시비 어디에도 절대 관여치 말고 수행만 할 것.
3. 하루 20시간 이상 용맹정진 할 것.
4. 남녀노유 하인(何人)을 막론하고 부처님과 같이 공경할 것.
5. 여하한 일이든 내가 옳다는 아심(我心)을 내지 말고 생사의 전쟁을 끊을 것.
법문을 보는 순간 혜춘은 형용할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고 있던 고급 시계를 성철에게 드렸다. 그때까지는 성철을 제대로 알지 못할 때이니 혜춘이 그럴 만도 했다. 성철이 그걸 받아서 던져버렸다. 그리고 흡사 오물 덩어리를 만진 듯 손을 털었다.
“그때 저는 다이아몬드 1캐럿하고 같은 가격의 시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래 이것 다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어 큰스님께 드렸습니다. 그렇게 드리니까 큰스님은 고만 손으로 '탁' 치더니 멀리 던져버리셨어요.” (혜춘 스님)
성철은 혜춘을 인홍이 있는 성주사로 보냈다. 그러면서 사람을 시켜 단단히 일렀다.
“사람을 하나 보내니 도량으로는 들이되 선방에는 들이지 마시게.”
인홍은 성철이 일러준 대로 혜춘을 내쳤다. 법당에도 선방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하지만 혜춘도 보통이 넘었다. 유발한 채 법당 추녀 밑에 거적을 깔고 앉아 화두를 들었다. 대중은 그런 혜춘을 모른척했다. 부유한 집에서 자랐고, 시아버지가 도지사였지만 혜춘은 대중의 발밑에 엎드렸다.
‘부엌에 앉아 꽁보리밥에 소금에 절인 김치 조각 하나 놓고 밥을 먹었다. 몸집이 좋고 다식(多食)했던 혜춘 스님은 채공 소임자에게 부탁하곤 했다. “이 거지에게 밥을 좀 더 주시오.” 그러나 성주사 후원의 책임자는 결코 그녀에게 밥을 더 주는 일은 없었다. 인홍 스님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렇게 혹독하게 두어 달을 보내고 나자 성철 스님은 혜춘 스님의 출가를 허락했고, 비로소 해인사 약수암에서 창호 스님을 은사로 삭발했다.’ (인홍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1951년 여름, 경남 창원 성주사에 비구니스님이 모여들었다. 오대산 월정사, 사불산 대승사 등에서 정진하던 스님들이 전쟁을 피해 삼삼오오 산문을 넘어왔다. 이들은 모여서 치열하게 정진했다. 이른바 ‘성주사 결사’였다. 봉암사 결사를 이어받아 그때 마련한 ‘공주규약’을 실천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장삼을 벗지 않았고, 백장청규 사상을 실천했다. 나무하고 밭농사를 지으면서도 눕지 않고 정진했다. 비구에게 봉암사 결사가 있었다면 비구니에게는 성주사 결사가 있었다. 그 중심에 인홍이 있었고, 그 뒤에는 성철이 있었다.
성주사 결사에 참여한 대중은 안거가 끝나면 천제굴에 가서 성철의 법문을 들었다. 성철은 해제 때에 천제굴 출입을 허락했다. 해제 전날이면 성주사 대중은 물론이요 신도들도 천제굴로 몰려갔다. 그 맨 앞에 역시 인홍이 있었다. 천제굴에 도착하면 간단히 요기하고 곧바로 참선에 들었고, 밤새 정진하고 나서 아침에 법문을 들었다.
그날도 새벽 예불을 마치고 법당에서 성철을 기다렸다. 비좁은 법당은 대중으로 꽉 찼다. 산새 소리만 들릴 뿐 법당 안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이윽고 성철이 들어왔다. 주장자를 들어 법상을 내리쳤다.
“쿵!”
새벽이 찢어졌다. 성철은 시퍼런 눈길로 대중을 바라봤다. 성철의 안광이 대중의 마음을 꿰뚫었다. 눈길이 법전과 혜춘을 향했다.
“한 마디 일러보라!”
지금까지 공부한 경지를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묵묵부답이었다. 다시 법당 안은 깊은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은 예리했다.
“모두 마당으로 나가라.”
대중을 경책하기에는 법당이 좁았다. 대중이 모두 마당으로 나와 앉았다. 성철은 제자 법전을 향해 주장자를 내리쳤다. 제자는 스승의 매를 미동도 하지 않고 맞았다. 어깨와 등짝으로 주장자는 매섭게 떨어졌다. 법전 대신 대중이 신음을 토했다.
‘스승과 제자란 저런 것이구나.’
‘깨달음을 향한 정진은 멀고도 숭고하구나.’
성철은 다시 혜춘에게 주장자를 내리쳤다. 혜춘 역시 매를 피하지 않았다.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래도 성철은 매질을 멈추지 않았다.
“자식까지 두고 온 수행자가 그렇게 정진해서야 되겠는가.”
성철이 법전과 혜춘을 택해 매질함은 결국 공부의 싹수가 있음이었다. 상근기를 지녔으면서도 스스로가 그걸 모르고 있으니 그 사실을 깨쳐줌이었다. 일찍이 이렇듯 가혹한 경책은 선종사에서도 흔치 않았다. 성철은 몽둥이로 말하고 있었다.
‘내가 너를 보고 있다.’
법석(法席)이 거둬진 후에도 혜춘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손등의 피를 닦아주며 인홍이 혜춘을 일으켜 세웠다. 인홍은 새삼 묘관음사에서 성철이 자신을 연못 속에 빠뜨렸을 때를 기억했다. 그때의 분심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인홍은 또 다른 감동이 밀려왔다. 성철이 진정 고마웠다.
‘후학들에게 내리쳤던 주장자는 분한 마음을 내서 공부하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요, 후학에 대한 무한한 관심과 격려였다. 하화중생에의 뜨거운 원력이기도 했다. 출가 수행자가 목숨을 내놓고 공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인홍 일대기 ‘길 찾아 길 떠나다’)
혜춘에 대한 경책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성주사에 머물 때 혜춘이 문밖에서 인사를 드리자 성철은 벌건 화로를 던졌다. 불은 피했지만 재를 뒤집어썼다.
“분한 생각에 잠이 안 왔습니다. 그 후, 눈 시퍼렇게 뜨고 공부를 했는데요, 자꾸 고맙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 분해서 분심이 나서 진짜 눈 뜨고 잠 안 자고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스님 고맙단 생각이 샘솟아서 용기가 더 났지요.” (혜춘 스님)
전쟁으로 산하가 핏빛으로 물들었지만 천제굴에서는 선승들이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땅에 살기(殺氣)가 가득했지만 천제굴에는 바다에서 맑은 바람이 올라왔다. 혜춘은 성철의 바람대로 바른길을 걸었다. 자운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고, 윤필암과 석남사 등에서 36안거를 성만 했다. 해인사에 보현암을 세워 비구니 선원을 개설했다. 후학을 길러내며 비구니계의 거목으로 우뚝 섰으니 진정 영원한 행복을 찾음이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15호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