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十四 章
悲香, 女人의 壁
중자정 부락의 경관이란 그리 썩 훌륭한 수가 없다. 사위는 그저 평원이었고, 오랜 역사의 향기나 특색이 없는 이 지역의 정취란 그저 뿌우연 황사와 바람 뿐이었다.
한데.. 이 야산 안의 풍경은 달랐다. 다르다는 점에서 이곳은 마치 다른 세상의 한 부분을 옮겨다 놓은 것 같았다. 야산 중턱 위로는 수없이 많은 전각들이 서 있었다.
고색창연한 기왕의 유연한 선(線)의 흐름은 수많은 곡선들을 그리고 있으며, 전각들은 온갖 값비싼 자세로 매우 훌륭하게 지어진 것들이었다.
전각들 주위로는 수목들의 연록빛 무르름이 알맞게 어우러져 보기 좋은 경관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어느 면으로 보나 그저 하나의 정자를 보호하기 위한 보조적인 위치에 지나지 않았다.
눈여겨 보면, 많은 전각들은 정자를 에워싸다시피 하고 있으며, 잘 치장된 화원과 가산들도 그 정자를 중심으로 화려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차차차차__ 창__!
번.. 쩍! 번쩍__!
도합 이백여 명은 될 것이다. 일제히 창검과 묵도(墨刀)를 뽑아든 무사들은 백헌비와 기화를 겹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설사 하늘을 날고 기는 절세고인이라 해ㄷ 저토록 빽빽이 겨누어진 병장기를 물리치고, 어찌 해 본다는 것은 꽤 어려우리라.
그러나, 이 순간 백헌비와 기화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저 약간 따분한 빛이 기화의 입술 언저리에 나른하게 맺혀 있을 뿐이었다.
백헌비의 기색이란 시원한 나무 숲에라도 들어선 듯 담담하고 여유로왔다. 그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무사들을 힐끗 쳐다봤다.
하나같이 태양혈이 불룩하고 눈빛이 칼날처럼 닦여진 것으로 보아 황금산의 고수들 중에 뽑혀 나온 자들 같았다. 이들 정도라면 무림에서도 한 가닥 하는 축으로 거들먹거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일곱 번째의 성곽을 넘어 서자, 이들 무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두 사람의 앞을 가로막았다. 백헌비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망설였다.
이들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한 마디로 시간 낭비이며 무수한 인명살상만 불러 일으키게 될 뿐이다. 한데, 이때다.
ꡔ물러서라! 그를 막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ꡕ
한 소리 차가운 대갈과 함께 한 명의 인물이 천천히 이쪽으로 모습을 나타냈다. 합파소였다. 그의 뒤에는 타루미가 총총히 뒤따르고 있었다.
그들이 나타나자, 백헌비를 에워쌌던 무사들이 물결 갈라지듯 좌우로 길게 갈라섰다. 합파소는 백헌비와 기화를 힐끗 보더니 자못 엄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ꡔ여기까지 온 것을 환영하오. 노부는 합파소.. 황금산의 외북산주(外北山主)요.ꡕ
그러자 타루미가 매력적이면서도 당당한 태도로 말했다.
ꡔ부산주(副山主) 타루미예요.ꡕ
순간, 백헌비가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ꡔ황금산의 외북산주라.. 그대들은 무엇이 두려워 사밀궤의 제자라고 솔직하지 않는 것인가?ꡕ
그러자, 합파소의 얇은 입술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ꡔ후후.. 중원의 금보성이 태양십방가의 제자가 아니듯이 우리 황금산은 결코 사밀궤의 하수인이 아니다. 단지 혈맹(血盟)의 친구일 뿐..ꡕ
아! 황금산이 사밀궤의 혈맹지기라니.. 이로써 황금산의 한 자락 막이 벗겨지는 것인가? 이것은 또한 벗겨지는 최초의 막이 아닌가? 말에 이어, 합파소는 백헌비를 향해 반문했다.
ꡔ귀하는..?ꡕ
ꡔ백헌비.. 태양십방가의 지존이라 부르지.ꡕ
ꡔ...!ꡕ
합파소는 물론 타루미까지도 흠칫한 기색이 숨길 수 없이 드러났다. 설사 철딱서니 없는 어린 아이라도 태양십방가의 이름 앞에선 감히 태연할 수가 없다. 하물며 천하의 움직임을 손바닥 손금 들여다 보듯 하는 그들임에야..
자고로, 여인은 먼저 여인을 본다. 타루미는 백헌비를 보고 야릇한 눈빛을 발하더니, 기화를 쳐다보면서 은근한 질투의 빛이 어쩔 수 없이 스쳤다.
ꡔ당신은..?ꡕ
기화는 그녀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먼 하늘 한 곳에 시선을 준 채 그녀는 혼잣말처럼 도도히 말했다.
ꡔ나 기화.. 칠령(七靈)의 오대조(五代祖) 정도로 알아 두면 될 거야.ꡕ
그녀야말로 거만하게 큰소리 칠만 하지 않은가? 칠백 년 전 백위 안의 고수들로 이루어졌던 백기혈(百奇穴)!
그 중엔 물론 칠령의 선조도 끼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 기예를 물려 받은 기화야말로 당연히 그만한 위치를 차지할만 하지 않은가?
그 말을 들은 순간, 타루미는 흠칫하며 반문했다.
ꡔ그럼.. 당신이 조금 전 칠령멸절진(七靈滅絶陣)을 격파했나요?ꡕ
기화는 백사같이 흰 팔을 뻗어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살풋 잔 미소를 머금었다.
ꡔ무엇이든 약점을 알고 나면 쉬운 법이지. 별로 큰 힘은 들지 않았다.ꡕ
그녀의 음성은 여전히 도도했다. 말과 함께 그녀의 시선을 스치듯 타루미의 얼굴을 향했다. 두 여이의 시선이 잠시 한데 부딪쳤다.
(이국적인 야성미는 제법 있군.)
(흥.. 아름답긴 한데 발정난 암코양이 같네.)
하여튼.. 여인들이란 늘 이런 식이다. 어찌 됐든, 이때 백헌비는 마상에 앉은 채 합파소를 내려다 보며 말했다.
ꡔ세 번째 벽이란.. 바로 그대들인가?ꡕ
ꡔ흐흐.. 귀하의 그 그림자 친구가 그것까진 알아 내지 못한 모양이군.ꡕ
환보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이 말은 곧 자신들이 세 번째 벽이 아님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합파소는 이어 싸늘한 눈빛을 발하며 물었다.
ꡔ내가 알기로 본 산은 귀하나 귀하의 태양십방가와 아무런 채무관계가 없소. 그러므로 이곳 비향정까지 찾아들 이유는 더 더욱 없다고 보는데..ꡕ
ꡔ...ꡕ
ꡔ귀하는 무슨 명목으로 이곳을 찾아든 것이오?ꡕ
백헌비는 그를 한참 뚫어져라 응시하더니 이윽고 잔잔한 음성으로 말했다.
ꡔ나 백헌비는 금보성과 친구다. 그대들 황금산이 사밀궤의 친구이듯이..ꡕ
합파소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파릇한 빛을 뿜었다.
ꡔ마교와는..?ꡕ
ꡔ마교 역시 내 친구 나 백헌비는 친구가 많다. 원한다면 황금산도 내 친구가 될 수 있지.ꡕ
줄잡아 몇 천 년의 역사를 지닌 거대한 세력들을 거침없이 자신의 친구라고 말하고 있는 이 사람.. 광오한 듯하나 설사 그의 하늘을 자신의 친구라고 말한다 해도 믿을 수밖에 없을 것 같은 기분을 합파소는 느끼고 있었다. 그는 내심 기가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서운 자다..!)
그 자신 황금산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인물로서 이미 무공 뿐만 아니라 두뇌의 뛰어남까지 인정 받은 처지가 아니던가?
한데, 이 순간 그는 그 자신 뿐만 아니라 황금산의 존재조차 이 약관의 청년 앞에 말할 수 없이 나약하게 느껴졌다.
(이 자 앞에선 설사 하늘의 벽이라 해도 그의 발길을 막지 못할 것이다.)
어쩐지 그는 은근한 불안감이 심장 속으로 스물거리며 파고 드는 것을 느꼈다.
ꡔ경고하겠소. 그대들이 벽이 아니거든 물러 서시오!ꡕ
백헌비는 더 지체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단호하게 내뱉았다.
ꡔ...!ꡕ
합파소는 주춤했다. 이어,
ꡔ노부 합파소.. 불가항력이라 판단되어 물러서긴 하오. 그러나 귀하가 아무리 묘기백출의 몸이라 해도 마지막 세 번째 벽은 결코 넘지 못할 것이오.ꡕ
그 말은 곧, 세 번째 벽을 믿기에 자신이 죽음을 불사하지 않고 물러 선다는 뜻이기도 했다. 합파소가 눈짓을 하자 타루미는 그를 따라 옆으로 순순히 물러섰다.
백헌비는 합파소가 가로 막아 섰던 전면으로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정자.. 설사 황궁의 정자라 해도 저토록 화려하진 못할 것이다.
계단 하나, 난간의 손잡이, 좌측으로 길게 나 있는 낭하.. 그 어느 한 부분도 값지지 않은 자재로 만들어진 것이 없었다. 정자 아래 찰랑이며 고여 있는 물은 무지개 빛살이 번져 오를 듯한 깨끗한 벽수(碧水)..
그 물 위엔 연꽃 몇 잎이 그림처럼 떠 있었다. 반월형으로 휘어진 대리석 교각을 지나면 눈처럼 희고 빛나는 신강 특산의 돌로 섬세히 다듬어진 층계가 나타난다.
층계 좌우에 호신상(護神像)처럼 엎드려 있는 것은 전설 속의 영수(靈獸) 두 마리다. 그리고, 주렴의 모든 문과 창은 주렴으로 가려져 있었고..
합파소조차도 단 한 번 저 정자 안에 들어서 본 적이 없었고 문과 창 역시 단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층계 위로는 실로 화려할 정도로 섬세한 조각들로 연이어져 있는 난간과 기둥..
ꡔ...ꡕ
백헌비의 시선은 이 아름답고도 화려한 정자의 처마 아래에 고정된 채 잠시 잔 파문을 일으켰다. 그곳엔 이런 편액이 내걸려 있었던 것이다.
비향정(悲香亭).
편액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백헌비는 담담히 물었다.
ꡔ가화, 잠시 쉬고 싶지 않소?ꡕ
기화는 그의 말 뜻을 알아 차리고 금방 고개를 끄덕였다.
ꡔ알겠어요.ꡕ
백헌비는 용각마에서 내려 천천히 연못 위로 휘어져 있는 교각 위로 걸어갔다. 과연, 정자 안에서 백헌비를 기다리고 있는 제 삼의 벽은 무엇인가?
(벽이다! 실로 무서운 벽이다..!)
하마터면 백헌비는 신음이라도 내 지를 뻔했다. 전신혈맥을 치달리는 그의 젊은 피가 충격을 만난 듯 요동쳤다. 백헌비.. 이제 겨우 세 번째 벽의 겉모습만 보았을 뿐인데도 그는 거의 냉정을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정자 안의 전경은 극히 단조로왔다. 동쪽으로 난 창(窓)의 절반은 한 쪽 벽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다 시피 하고 있으며, 한 쪽에는 연 하늘빛 휘장이 은은히 내려쳐서 있었다.
열려진 창으로는 청명한 하늘과 구름이 손에 만져질 듯 그대로 들어왔다. 바닥에 깔린 것은 감빛의 보드라운 융단, 실내 중앙에는 검은 자단목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순은(純銀)의 찻잔 두 개가 마주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의자 두 개.. 백헌비는 정자 문가에 굳어진 듯 서 있었다. 경직되다시피한 그의 시선 속으로.. 탁자 앞에 앉아 있는 한 여인의 모습이 흡사 환상처럼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여인은 날씬한 허리를 살짝 접고 앉아 홀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얼굴은 약간 갸름하고 살빛은 벚꽃 색.. 가볍게 숙여진 이마는 먼 능선처럼 유연하면서도 태양처럼 빛이 났다.
여름 날 구름처럼 풍요로운 머리는 궁형으로 틀어 올렸고, 찻잔을 응시하는 두 눈을 가을 호수처럼 깊으면서도 잔잔한 기품이 서려 있다.
푸른 깃과 같은 눈썹은 섬세하고 부드럽다. 옆 모습으로 슬쩍 보여지는 콧날을 고른 가운데 높고 낮음이 지극히 알맞으며.. 소라 고동처럼 날씬하고 섬세한 턱 위로 거문고의 현처럼 우미로운 곡선을 그리고 있는 입술..
그녀의 두 볼은 곱고 유연하며 밝은 빛으로 황색의 연꽃처러 우아하니.. 여인의 모습이 시선 속으로 확연히 들어박힐수록 백헌비의 몸은 오한에라도 걸린 듯 경련을 일으켰다.
(인간.. 아니, 천(天)이 보여 줄 수 있는 미의 극치다!)
백헌비는 숨막힘과 함께 아득한 절망감을 느끼고 말았다. 대략 스물 중반으로 보이는 이 여인은 일신에 장신구라곤 단 한 점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치장이라면 섬세한 교구를 날아갈 듯 감싸고 있는 연보라빛 궁장의가 전부인 이 여인은 그래서 더욱 청조하고 고고한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발산시키고 잇는 것이다.
(고홍미가 인간에 의해 다듬어진 미인이라면 이 여인은 조물주가 탄생시킨 자연적인 미인이다!)
아름다움으로 비교하자면 두 여인의 미색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그러나, 고홍미가 발랄하고 생동감에 찬 미인이라면 이 여인은 신비와 우수에 감싸여 사정없이 사내의 뜨거운 심장을 끌어 당기는 정적인 미인..
세상에 이런 미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불가사의로 여겨질 지경이었다.
(마교.. 이천 년의 마교가 이 여인에게 모든 운명을 걸만도 하다.)
그렇다면.. 이 여인, 바로.. 비향(悲香)이란 말인가? 오오.. 이 여인이 바로 파황노조와 고노단, 황금산이 뒤얽혀 파란의 비사를 엮어 가게 만든 전설적인 미인이란 말인가? 또한, 황금산이 마련한 세 번째 벽이 바로 비향, 그 자체였던 것인가?
ꡔ...ꡕ
백헌비는 얼어 붙어 선 채 한 걸음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비향이 앉아 있는 탁자와의 거리가 몇 십 리나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옷을 벗는 고홍미의 완벽지신 앞에서도 눈빛 한 점 흔들리지 않았던 백헌비였다. 한데, 그는 지금 호흡조차 곤란을 느낄 정도였다. 합파소가 그에게 장담했던 것이 결코 허언이 아닌 것이다.
이때, 음성.. 아아.. 백헌비는 본능적인 위기감마저 느꼈다.
ꡔ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건가요? 그대는 나를 만나러 오지 않았나요?ꡕ
외모가 아름다우면 목소리는 대개가 투박하거나 경박스럽거나 하기 마련이다. 그게 조화인 것이다. 한데 이 여인, 비향의 음성은 그 모든 순리와 논리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는 긴 호흡과 함께 천천히 심기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탁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늪 속을 헤쳐가는 듯한 현기증은 그의 심기가 안정되어 감에 따라 서서히 가셔졌다. 그는 비향 앞에 이르자 포권으로써 가벼운 예를 취했다.
ꡔ본인 백헌비.. 노선배께 인사 드리오.ꡕ
ꡔ...!ꡕ
비향의 표정이 멈칫한 기색을 보였다. 노선배란 호칭이 의외로왔는지도 모른다. 백헌비는 그녀의 맞은 편 자리에 앉았다. 바치 비 온 뒤의 화원 속으로 들어선 듯한 착각을 일으킬만큼 그녀에게서 그윽한 화향(花香)이 전해져 왔다.
파황노조와 뜨거운 사랑에 빠졌던 것이 이미 오십 년 전.. 최소한 예순을 넘었을 나이다. 그러나 그녀에게선 전혀 나이를 느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움은 너무나 당당해서 노선배란 호칭조차도 그 미(美)에 흠을 주지 않을 정도였다.
ꡔ차.. 들어요.ꡕ
잔잔히 내리 깔리는 음성이 청각을 마비시킨다. 백헌비는 말없이 차를 마셨다. 차를 마시는 동안 그는 비향의 얼굴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 빠르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
ꡔ파황노조.. 그 분은 본인의 구명은공이오. 그 분이 내게 말씀하셨소. 노선배를 만나거든 이렇게 물어보라고..ꡕ
ꡔ...ꡕ
ꡔ아직도 청춘(靑春)의 향기가 남아 있느냐고..ꡕ
ꡔ...!ꡕ
비향의 얼굴이 반쯤 쳐들려졌다. 흡사 투명한 옥을 깎아 빚어 놓은 듯한 아름다운 옥용이 창백하게 굳어졌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그 뿐.. 순간적으로 윤기를 잃어 가는 그녀의 입술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그러나 백헌비는 대답을 강요하지않았다.
ꡔ만금황 고노단.. 그는 이 한 마디를 대신 전해 달라고 했소.ꡕ
ꡔ...ꡕ
ꡔ그대.. 비향(悲香)을 잊는다. 그러나 잃어 버린 금보성의 명예와 고노단의 자존심은 잊지 않는다.ꡕ
ꡔ...!ꡕ
이번에도 역시 비향의 낯빛은 파리하게 굳었다. 그윽한 자태가 가엾으리만큼 미미한 떨림에 휩싸이고 있었다. 백헌비는 자신의 말을 계속했다.
ꡔ나는 물어보았소. 대체 잃어 버린 금보성의 명예는 무엇이며 그 분의 자존심은 무엇이냐고..ꡕ
ꡔ...ꡕ
ꡔ그는 대답하지 않았소.ꡕ
ꡔ그래서 묻는 것이오. 노선배께선 내게 말씀해 주실 수 있소?ꡕ
ꡔ...ꡕ
비향은 첫 잔을 쥔 자세 그대로 움직이지도, 입을 열지도 않았다. 그녀의 침묵은 꽤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이윽고, 붉은 장미 잎처럼 선명한 그녀의 입술이 느리게 열렸다.
ꡔ노단.. 그는 아들을 잃었어요. 그는 아들을 자신과 금보성의 자존심이라 여기고 있어요.ꡕ
쿠웅..!
백헌비는 뭔가 둔탁한 둔음이 자신의 뇌리 한 구석에서 울리는 것을 느겼다. 만금황 고노단에게아들이 있었다니! 이 사실은 백헌비로서도 처음 듣는 말이 아닌가?
ꡔ더는 묻지 말아요. 그가 공자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나 비향도 이야기할 필요를 느끼지 않아요.ꡕ
ꡔ...!ꡕ
백헌비는 은은히 잠광(潛光)이 일렁이는 눈으로 비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에서 발해지는 신광에 비해 그의 음성은 놀라울 정도로 담담했다.
ꡔ기왕에 왔으니 목적한 바는 이루고 가야겠소. 나 백헌비는 이 말을 노선배께 하기 위해서 왔소.ꡕ
ꡔ...!ꡕ
ꡔ나 백헌비.. 만금왕 고노단의 친구로서 반드시 그의 잃어 버린 자존심을 되찾아 줄 것이오.ꡕ
말과 함께 그는 자신의 볼 일이 끝났다는 듯이 몸을 일으켰다. 비향 같은 천하절색의 미인 앞에서 자신의 할 말을 부지런히 내뱉고는 미련없이 일어설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그 외엔 없을 것이다.
백헌비가 문가에 다다랐을 때였다.
ꡔ공자..ꡕ
비향의 가랑앉은 음성이 그의 걸음을 우뚝 멈춰 서게 했다. 그러나 백헌비는 등을 돌리진 않았다.
ꡔ부탁이 있어요.ꡕ
비향은 백옥 같은 손으로 찻잔을 꼬옥 쥐었다. 섬세한 조각품 같은 흰 손등으로 파르라지 힘줄이 돋아 났다. 이것이 그녀가 얼마나 내심으로 고통스러워 하고 있는가를 엿보여 주는 것이다.
ꡔ파황노조와 노단.. 두 사람을 이 비향정에 모아 줘요. 공자라면.. 그 일을 할 수 있을 거예요.ꡕ
ꡔ...!ꡕ
ꡔ그들도 그것을 원할 거예요. 아니.. 그러기 위해 노단은 공자를 친구를 삼았을 거예요.ꡕ
백헌비는 흐느낌을 감추고 있는 이 아름다운 가녀의 음성을 등 뒤로부터 들었다. 그는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느꼈다. 그는 말했다.
ꡔ약속하겠소.ꡕ
ꡔ...ꡕ
기화는 정자 밖으로 나오는 백헌비의 얼굴을 말없이 응시했다. 그의 얼굴이 필요 이상으로 굳어 있는 것을 보고 기화는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몰아 쉬었다.
백헌비가 말에 오르자 두 사람은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비향정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이때, 그들의 전면에 서 있던 합파소와 타루미는 놀라움으로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결단코 장담했던 제 삼의 벽..! 그러나 백헌비는 그 벽마저 간단히 넘어 자신의 볼 일을 보고는 유유히 돌아서고 있는 것이다. 백헌비는 그들을 힐끗 보더니 웃음기 없는 담담한 음성으로 말했다.
ꡔ황금산.. 고노단이 나 백헌비를 친구로 삼은 것은 귀산에 제법 큰 부담이 될 것이오.ꡕ
ꡔ으.. 으..ꡕ
합파소의 얼굴은 푸른 빛과 은빛으로 얼룩진 채 형편없이 일그러졌다.
ꡔ하하하하..!ꡕ
백헌비는 한 차례 대소를 터뜨리고 유유히 그들 앞을 지나쳐 갔다.
(보.. 보인다! 우리.. 황금산의 최후가..)
합파소는 부르르 몸을 떨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백헌비와 기화는 거의 사망침하를 다 건너고 있었다.
ꡔ아름.. 답던가요?ꡕ
ꡔ무서울 정도였소. 솔직이.. 나 역시 그녀의 미색에 눈이 멀어 버릴 뻔했소.ꡕ
ꡔ결국 눈 멀진 않았단 얘기군요.ꡕ
ꡔ만금황 고노단.. 그는 진정 감탄할만한 장사꾼이요. 만일 내가 고홍미의 미색에 단련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팽개치고 그녀의 신발 한 켤레를 지키는 무사가 되고 말았을 것이오.ꡕ
그 말에 기화는 해연히 놀란 눈으로 백헌비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란 말인가?)
놀라움과 함께 그녀 역시 고노단의 기막힌 상술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는 이런 일을 대비해 고홍미를 탄생시켰다. 백헌비로 하여금 비향의 미색에 함락되지 않도록 미리 대비책을 세워 놓은 것이다.
(모르긴 해도.. 황금산.. 확실히 상대를 잘못 만났어. 만금황 고노단을 섣불리 건드리는 게 아닌데..)
하지만 왜..? 왜 하필 황금산은 천하가 다 아는 상술의 귀재 고노단을 적으로 삼아야만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직 모른다. 고노단의 아들은 누구이며, 그는 또 비향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황금산과 비향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풀어가야 할 일은 너무나 많았다. 문득, 기화는 백헌비를 향해 묻고 싶었다.
(비향과 고홍미.. 그 중 누가 더 아름다운가요?)
그러나.. 그녀는 혼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젓고 말았다. 그처럼 어리석은 질문을 하려는 자신이 금방 우스워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백헌비는 이미 저만큼 앞서 가고 있었다.
비향정을 나선 이후, 그의 얼굴은 유난히 굳어 있었다. 뒷 등마저 완강한 고독한 기운을 그림자처럼 안고 있다. 대체 무엇이었을가? 저토록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즐독하고 갑니다.
잘보고갑니다
무서운 벽을 넘었군요...
잘 보았습니다.
잘 보았읍니다 감사
즐독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감사합니다.
여자는 누구나 같아
여자가 아무리 이쁜들~100일만 같이 살아보라..지나가는 추녀가 더 이뻐보이기 시작할지니 ㅋㅋ
항상 재미나게 보고갑니다.감사합니다.좋은 하루되세요 ~~
여자의얼굴은 잠간이고 마음은 평생~~
줄겁게 열독하고 갑니다.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보앗습니다.
그 눌림이 무엇일까요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