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해동검도는 그 동안 많은 내부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으면서 현재까지 존재해 오고 있다.
현재 해동검도는 아메바처럼 사분오열되어 수십개의 단체로 분열되어 있으며, 지금도 계속 분열되는 중이다.
그 동안 본회는 각 언론사를 비롯해 체육관계자들, 그리고 문화관광부에 해동검도를 비롯해 유사검도단체들의 난립에 따른 문제점과 부당함을 수차례에 걸쳐 통보하였으나 본회의 의견이 정책에 크게 반영되지는 못했다.
최근 무술잡지「마르스(mars)」(2001.5/6월호)가 공개한 해동검도의 문제점 및 법원판결문을 통해 우리는 다시한번 검도 유사단체들의 문제점들을 알리고자 한다.
[해동검도의 역사]
해동검도의 역사에 대하여 세계해동검도연맹(www.haidonggumdo.org)의 공식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세계해동검도연맹에서 말하는 해동검도의 역사
"한반도 역사상 최강의 국력과 광활한 영토를 자랑했던 고구려는 고대국가중 백제의 무사도, 신라의 화랑도보다 먼저 '사무랑 제도'를 만들어 수많은 우수한 인재를 양성, 배출하여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
해동검도는 검법(검형), 베기(자르기), 찌르기, 격검(겨루기), 기법(호흡법) 등으로 구성되어 고구려 사무랑의 바탕을 이루는 중요한 역할을 한 고구려 최강의 무도로써 유구한 역사를 거쳐 선조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전통무예로 우리의 자랑스런 문화유산중 하나이다.
근세에는 장백산 스승으로부터 김정호 총재에게 계승 발전되어 무도와 사회체육으로 크게 각광을 받으며 현재 국내에 300여개의 체육도장과 대학, 직장 동아리 초, 중, 고교의 체육교실 등 수 천여개의 크고 작은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중국, 동남아 등지의 30여 개국에 특허등록을 마치고 협회를 구성하여 활발한 해외활동도하고 있다."
1961년에 경기도 관악산에서 장백산 스승으로부터 김정호 총재가 해동검도를 전수받았다고 세계해동검도연맹의 사이트에서는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김정호 총재는 이 사이트의 '총재 메시지'에서 행동검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김정호씨의 인삿말
"해동검도는 새벽아침 동해 바다위로 떠오르는 장엄하고도 찬란한 태양의 빛을 검에 담은 '검의 검광(檢光)'으로 정의를 실천하는 진리를 뜻합니다.
해동검도는 한국(KOREA)의 고대국가인 고구려의 무도로서 검결의 진리를 터득하신 '설봉선인'께서 창시하여 백두산에 수련도장을 설립. 제자들에게 불의를 물리치고 정의를 실천할 수 있도록 해동검도를 전수 하였습니다.
수련장에서 수련한 무사들을 '사무랑(SAMURANG)'이라고 칭하였고 이들 사무랑은 '충. 효. 예. 의. 신. 지. 덕. 체'를 이념으로 삼아 수련하였고 이들 사무랑들은 광개토대왕을 도와 뛰어난 해동검도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침략을 일삼는 주변국가를 징벌하여 고구려가 광활한 국토를 가진 최강의 국가가 되는데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또한 고구려의 명장인 을지문덕대장군과 함께 침략국인 200만 수나라대군(정병 100만명, 예비수송군 100만명)을 물리쳐 전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과를 올렸으며, 당나라의 침략때는 안시성에서 양만춘 장군을 도와 당나라대군 60만명을 물리치며 정의를 수호하고 일당백이라는 불굴의 투혼의 정신을 발휘하여 후손들에게 값진 정신문화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 후 일부 사무랑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무라이'로 변칭되었는데 이것은 마치 한국의 '김치'가 일본으로 건너가 '기무치'로 세계에 잘못 알려지듯이 한국의 전통무사인 사무랑이 일본의 사무라이로 잘못 알려진 것입니다.
근세에서는 관악산에서 장백산 스승님으로부터 제가(총재 김정호)전수받아 대한민국을 비롯하여, 미국, 유럽등 전세계 주요국가에 보급하여 세계문화발전에 이바지하고 있습니다. (생략)
이번에는 한국해동검도연맹(www.haidong.com)측의 역사기술을 보자.
한국해동검도연맹에서 말하는 해동검도의 역사
"본 해동검도는 고대 고구려 15대 미천왕 13년에 부족국가의 사회정책(관습) 중 제가승 제도라는 교육방법에서부터 비롯하여 궁술, 권술, 검술, 마술등으로 신체를 단련하고 국력을 배양하기 위한 전통무예로 시작되어 신라의 화랑제도, 백제의무사도 등 과도 일맥 상통되는 무예로 발전되어왔다.
고구려 16대 고국원왕 2년에 백두간에서 설봉선인께서 휘하에 찾아드는 청장년들에게 무예를 가르친 것이 시조가 되어 전해 내려오게 되었으며 이중 공을세운 무사들을 사무랑이라 칭송하고 존경하여 대접 하였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사무랑중에 해동무사가 있어 장백산에 수련장을 설치하고 수 많은 사무랑의 제자들을 양성하여 나라가 위태로울때 마다 많은 무사들이 혁혁한 공을세워 국가에서도 이들을 크게 장려하고 포상하여 충, 효, 예, 의, 신, 지, 의 이념을 사문의 정도로삼아 심신수련의 정도로삼아 심신수련의 정도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고려시조 왕건을 도와 크게 공헌한 김정기 검사도 해동무도장의 수련 사무랑 이었다.
우리 선조들은 육쪽으로 만들어진 죽도로 검술경기를 하였으나 왜소한 왜인들은 자기들의 작은 체구에 맞추어 네쪽의 죽도를 사용하였으며 일본 남부 지역에서 검술보다는 죽도술을 더욱 발전시키니 검도술을 제대로 모르는 왜인들이 오늘날 죽도를 주축으로 그것이 마치 검의 모든것인양 착각하게 만들고 있으나,
검도라함은 글자 그대로 진검(진짜검) 을 사용하는 것을 말하며 해동검도에서는 옛부터 전래해온 외.내공과, 검법, 단전호흡, 격검술을 일체시켜 진검을 사용하는 우리고유의 무도로써 타 검도와는 근본적으로 개념을 달리하고 있다."
세계해동검도연맹측의 기록에는 '김정호총재가 장백산스승에게서 해동검도를 전수받았다'는 기록이 추가되어 있을 뿐, 다른 해동검도 단체들의 역사와 모두 똑같다.
이 역사들을 보면 참 흥미로운 것이 여러 가지 있는데, 고구려 미천왕때의 재가승제도, 고국원왕대의 설봉선인이 만든 수련장에서 무술을 수련한 사무랑들, 육쪽죽도 등의 개념은 한국사공부를 아무리 많이 한 학자들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학설이 아닐 수 없다.
(중간 생략)
해동검도가 최근에 창시되었다면, 도대체 김정호총재는 누구에게서 해동검도를 배웠을까? 장백산스승은 누구일까? 해동검도의 원로들은 원래 어떤 무술 출신이고, 무엇을 얼마나 배웠던 것일까?
무술계에서 알면서도 쉬쉬하고 밝히지 못했던 이 사실들을 흥미있게도 얼마전에 법원이 밝혔으니 희대의 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법정에서 밝혀진 해동검도의 역사와 진실]
1990년대 들어서부터 해동검도의 창시자인 김정호씨와 나한일씨, 심검도의 김창식씨는 끝이 보이지 않는 법정 소송과 비방전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베일에 가려져 있던 해동검도의 역사와 진실이 하나 둘씩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결국 대한민국의 법원이 해동검도의 역사를 쓴 셈이 되었다. 법원에서 드러난 해동검도의 역사를 하나씩 조목조목 살펴보도록 하자.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의 제5회 공판조서의 일부인 증인신문조서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사건번호 99고단 1738 명예훼손 증인신문조서)
답 : 증인(나한일)은 쌍수검법, 심상검법, 예도검법, 본국검법, 쌍검법은 알고 있고, 장백검법, 음양검법, 태극검법, 해동검법은 모릅니다.
문 : 증인(나한일)은 누구로부터 위와 같은 검법을 배웠는가요?
답 : 증인(나한일)과 피고인 김정호는 공소외 김창식으로부터 심검도를 처음으로 하였고, 그 다음으로 기천문을 했는데 심검도와 기천문은 검의 기본이 되며, 쌍수검범은 증인(나한일)이 만들었고, 심상검법, 예도검법은 증인(나한일)과 피고인 김정호가 만들었고, 본국검법은 증인(나한일)과 피고인 김정호가 무예도보통지를 보고 현실에 맞게 정립시킨 것이고, 해동검도는 배운 것이 아니라 심검도, 기천문 기타 다른 모든 운동이 혼합되어 현실에 맞게 정립하여 탄생된 것입니다.
문 : 위 김창식의 심검도 속에 쌍수검법, 심상검법, 예도검법, 본국검법이 있나요?
답 : 없습니다. 그러나 검의 기본은 심검도와 기천문입니다.
문 : 증인(나한일)은 '해동검도'라는 말이 1982년경에 처음으로 사용된 사실을 알고 있지요. 답 : 예
문 : 이 용어는 누가 만든 것인가요. 답 : 공소외 최태민 목사가 만들었습니다.
문 : 증인은 1983경 피고인 김정호와 함께 심검도체육관을 운영하다가 문을 닫은 사실이 있지요. 답 : 간판만 바꾼 것으로, 운동은 계속했습니다.
문 : 증인은 심검도와 해동검도는 서로 다른 내용의 검도인 사실을 알고 있지요. 답 : 다른 것이 아니고, 연관성이 있습니다.
위의 증인신문조서를 검토해보면 몇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해동검도는 김정호씨와 나한일씨가 함께 만든것이라는 시실이며,
[둘째] 해동검도의 명칭은 최태민목사가 지었다는 것이고,
[셋째] 초기에 김정호, 나한일씨는 심검도 도장을 하다가 간판을 바꾸었다는 것이며,
[넷째] 해동검도는 심검도와 기천문에서 파생된 검도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고구려 사무랑이 수련했다고 선전해왔던 해동검도 창시자들의 행태를 미루어볼 때, 법정에서의 증언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어쨌든 증인선서까지 하고 증언한 것이니, 우리도 사실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나한일씨의 증언에 의하면 "심상검법, 본국검법은 함께 만든 것이고, 쌍수검법은 자신이 만들었다"고 한다. 해동검도 창시자로써는 처음으로 고구려 무술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낸 검술임을 증언했던 의미 있는 법정증언이 아닐 수 없다.
해동검도가 고구려부터 전래된 전통무예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었던 일부 수련생들에게는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이하 생략)
[해동검도와 심검도와 기천문과의 관계는?]
해동검도가 20여년전에 골방에서 만들어진 검술이라면, 장백산 스승은 누구이며, 심검도, 기천문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도 역시 법정에서 가려질 수 있었다.
김창식씨가 나한일씨를 서울지방검찰청에 고발했던 고소장에 보면, '『해동검도교본』(강영욱 저) 제75쪽부터 제76쪽인 역사편에 보면 고소인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해동검도를 마치 본고소인이 계승한 것인 양 전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기술하면서 고소인이 창시한 위 심검도(선방검법 및 선공검법)는 해동검도와 전혀 무관한 것인데도 해동검도의 일부인 것으로 본 고소인의 허락도 없이 무단으로 게재함으로서...'라고 되어 있다.
심검도의 창시자인 김창식씨도 심검도는 해동검도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김창식씨가 '도서 등 제작발매 배포금지 가처분' 신청서에서 신청취지로 밝힌 부분에 보면, '심검도는 한손으로 사용하는 특징이 있고, 다른 검도는 양손을 사용한다'고 적고 있다.
현재 해동검도는 심검도와 달리 양손을 사용하는 쌍수검술이 주종이다. 김창식씨는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나한일, 김정호씨를 직접 가르쳤다고 분명히 밝혔는데, 왜 심검도와 해동검도는 다를까? 그리고 해동검도의 초기 창시자들도 기천문을 수련하던 당시에 기천문에서 검술을 배운 적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진실은 간단하다. 심검도와 기천문을 배우 김정호씨와 나한일씨는 한 손을 사용하던 심검술의 검결에다가 기천문의 신법과 단련방법을 혼합하여 쌍수검술로 창작한 것이다. 본인들이 밝힌 바와 같이 검의 기본은 심검도와 기천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해동검도는 지금도 내가신장과 소도세, 복호세, 대도세 및 개운기공같은 기천문 특유의 수련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70, 80년대 당시의 김정호, 나한일씨를 아는 사람들은, 그들 둘이 만나서 며칠동안 함께 각종 무술책을 펴놓고 궁리를 하고 나면, 검법이 하나씩 탄생되었다고 술회한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의 증인신문조서에서 나한일씨가 밝힌것과 일치하는 증언이다.
서울고등법원 제4민사부의 결정문(사건번호 97라91, 부정행위중지가처분)에 보면, 그동안 법정소송을 하면서 정리된 해동검도의 역사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법원이 무림의 분쟁을 중재하고 역사기록을 남기게 되었다는 데에서 우리 모든 무술인들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이제 서울고법의 판결문에 기록된 '인정사실'을 단 한글자의 첨삭도 없이 공개한다.
이 기록들은 해동검도의 역사를 공부하려는 무술인이나 학자들에게도 가장 신뢰성있고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다.
서울고등법원의 결정문(사건번호 97라91, 부정해위중지가처분)
나. 인정사실 그러므로 살피건대 기록에 의하면 아래와 같은 사실이 인정된다.
⑴ 피신청인과 신청인의 대표자인 김정호는 서라벌고등학교 동기동창으로 고등학교 재학시절인 1970년경 서울 신당동에 있던 심검도 호법총관에 입관하여 소외 김창식 관장 지도하에 심검도를 배우는 등 함께 무술을 연마하며 절친하게 지내왔다.
⑵ 1975년경 위 김창식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되자 피신청인은 위 무술관을 인수하여(그 무렵 위 김정호와는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운영하다가 1977년경 운영부진으로 이를 폐관한후 다시 신청외 박대양으로부터 '기천문'을 사사받았고, 1980년초 현진영화사 김두원 회장의 후원으로 서울 서초동 63의 6 신영빌딩 301호에서 '기천문'이라는 명칭의 검도장을 개관, 운영하였으며(그 후 '심검도 체육관'이리고 개칭하고, '협찬 영화사 무술스튜디오'라고 병기된 간판을 사용하였다), 위 김정호는 1982년경 위 서초동 도장에서 다시 원고와 함께 일하게 되었다(신청인은 당시 김정호가 위 도장의 관장으로 있었다고 주장하고, 피신청인은 피신청인의 권유로 김정호가 사범으로 일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주장하나, 기록에 나타난 당시의 위 체육관의 규모 및 운영형편등에 비추어 이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⑶ 한편 피신청인은 위 도장을 운영하던 중인 1984년경 위 도장에서 운동을 배우던 소외 亡 최태민의 제안에 따라 당시 위 도장에서 사용하던 '기천문'이라는 명칭 대신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신청인은 위 김정호가 1961년경 소외 장백산으로부터 우리 전래의 검법을 전수받고, 위 전수당시 위 검법의 이름을 통칭하여 해동검도라고 칭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위 장백산의 가르침을 받들어 1983. 4월경 이를 널리 전수시키고자 서울 강남구 서초동 63의 6에 도장을 개관하고, 그 명칭을 '해동검도'라고 처음 사용하였다고 주장하나, 위 전수 당시의 김정호의 나이,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경위와 위 명칭 사용에 관한 신청인의 주장이 신청인측 증인인 김정승의 증언, 즉 신청외 김정호가 1982년경 안양에서 해동검도체육관을 개관하여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처음사용하였다(곧이어 해동검도는 1984. 4월경 김정호가 서울 서초동 63의 6 신영빌딩 3층에서 해동검도도장을 개관하면서 공식 상호로 사용한 명칭이라고 진술하고 있다는 부분과도 일치하지 아니하는 점 등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어려운 점이 있다). 1984. 5월경에는 '해동검법개론'이라는 제하의 피신청인이 편저자로 된 해동검도에 관한 소개서를 발행하기도 하였으며, 또 극영화 무술연구회원선발대회에 '해동검도협회'라는 이름으로 위 도장을 그 선발장소로 제공하는 등 후원한 바도 있으나, 정식으로 협회가 결성될 만큼 그 가입자의 수나 조직이 갖추어졌던 것은 아니었고, 위 도장 이외에 해동검도를 가르치는 다른 도장이 존재하였던 것도 아니었다.
⑸ 그런데 1985년 초 경, 위 검도관의 후원자이던 현진영화사가 부도에 직면하자 피신청인은 위 검도관의 운영을 중단하게 되었고(피신청인은 아예 위 검도관의 문을 닫았고, 피신청인과 김정호 모두 다른 일을 하였던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피신청인이 운영을 중단한 이후에도 위 도장은 위 김정호에 의하여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김정호는 소외 나종균의 도움으로 1986. 6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사용한 검도도장을 개관하였으며, 피신청인은 해동검도연구소장이라는 직함으로 위 검도도장의 총관장이던 위 김정호와 함께 '해동검도'의 보급에 힘쓰게 되었다.
⑹ 위 삼성동 도장은 1987. 2. 3. 설립자를 김형진, 정원을 150명으로 하여 서울시 강남교육구청에 '해동검도체육도장'이라는 명칭으로 정식등록되었고, 같은 해 4월6일에는 상호를 '해동검도체육도장', 대표자를 김형진(같은 해 9. 21 나종균을 대표자로 추가하였다)으로 하여 사업자등록을 마쳤으며, 한편 1989. 5. 10 대표자를 김형진으로 한 '대한해동검도협회'가 조직되어, 같은 달 25일 전북교육위원회에 사회단체로 정식등록되었고, 같은해 12. 29에는 서울특별시로부터 업종은 체육시설업, 영업소의 명칭을 해동검도체육도장, 대표자를 김형진, 주소를 위 삼성동 도장으로 한 체육시설업신고필증을 교부받았다(이 일련의 과정에서 김정호가 대표자로 등록된 바는 없다)
⑺ 해동검도는 1989. 초까지만 하더라도 일반인에게 생소하였을 뿐 아니라 검도계에서도 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1989. 6월경 피신청인이 주인공 유지광역으로 출연한 TV극 무풍지대가 시청자들로부터 인기를 얻게되고 거기에서 방영된 체력단련과정 및 검도장면이 해동검도이며, 피 신청인이 해동검도의 유단자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일반에 널리 알려지고, 해동검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었으며, 이를 전후하여 앞서와 같은 협회의 조직 및 결성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⑻ 위 대한해동검도협회가 조직되면서 위 김정호는 위 협회의 전무이사 직책을, 피신청인은 종전과 마찬가지로 해동검도연구소장의 직책을 맡았고, 소외 김형진이 위 협회의 대표를 맡게 되었다.
⑼ 한편 무풍지대가 시청자들로부터 인기를 끄는 도중에 피신청인은 방송 등에 출연하여 자신을 검도7단의 유단자라고 소개하고, 이에 대하여 1989. 6. 30 대한검도협회가 피신청인을 사이비검도교습소운영 및 검도 7단 사칭으로 고소하여 오자, 자신은 해동검도협회 소속이고, 해동검도 7단의 유단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대한검도협회의 자격증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면서 위 대한겸도협회를 무고등 혐의로 맞고소하였고, 그 후 피신청인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김형진이 대표자로 된 해동검도체육도장과 대한해동검도협회에서 발급한 유단증을 제출하므로써 혐의 없음 의견으로 수사가 종결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격었으나 이일로 인하여 오히려 세간에는 피신청인과 해동검도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⑽ 한편 위와 같이 해동검도가 일반에 널리 알려지고 이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전국의 많은 도장이 해동검도도장으로 위 대한해동검도협회에 가입하게 되자 가입비용의 수령 및 사용 등 협회의 운영과 관련하여 그 구성원들 사이에 차츰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하여 마침내 1991. 11월경에는 대한해동검도협회가 분열되기에 이르렀으며, 피신청인은 위 분열 후 '해동심검도협회'를 만들어 그 대표자직을 맡으면서 1991. 11. 13자 서울특별시에 사회단체등록을 마쳤다.
⑾ 피신청인은 1992. 1. 27 위 '해동심검도협회'를 자진해산하면서 다시 위 대한해동검도협회에 복귀한 바 있으나(위 '해동심검도협회'는 그 후 '심검도협회'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유지되어 오고 있다), 그 후에도 위 김정호와 소속관장들 사이에 금전문제와 관련한 소송이 야기되고, 일부도장들이 이탈되는 등 분열이 계속되어 1992. 말 경 위 분열되어 나간 도장의 관장들로 '한국해동검도협회'가 결성되자 피신청인은 위 한국해동검도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한 후, 1993. 1. 25 사회단체등록을 마치고 현재에 이르고 있다.
⑿ 피신청인이 회장으로 있는 위 한국해동검도협회는 위 대한해동검도협회가 가르치는 검법의 내용(위 해동검법개론에 기술된 심상검법, 쌍수도, 예도, 본국검법, 장백검법, 쌍검, 격검)외에 쌍수검법, 외수검법, 좌방검법, 우방검법, 와우검법, 와좌검법, 몽복검법, 비연검법 등(주로 심검도의 내용을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의 검법을 함께 가르치고 있으며, 한편 현재 국내에는 신청인측의 대한해동검도협회와 피신청인측의 한국해동검도협회 외의 '국제해동검도연맹', '도법해동검도회', '한국전통해동검도협회', '해동심검도협회'등의 단체들이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이용하여 각 그 산하에 수십개에서 백여개에 이르는 체육도장을 소속시켜 활동하고 있으며, 신청인은 국내에 160여개(200개 이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피신청인 역시 국내외를 통틀어 그에 상당한 수의 체육도장을 그 소속 도장으로 하여 운영되고 있다.
[그러면 장백산 스승은 누구?] 이제 해동검도 창설당시의 역사와 누가 어떤 검법을 만들어 냈는지가 명확해졌다. 어차피 고구려와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몇 명의 사람에 의해서 최근에 만들어진 무술인 것이다. 그렇다면 김정호씨 자신이 무술을 배웠다고 줄기차게 주장하는 장백산 스승은 과연 누구일까? 초기에 해동검도를 배웠던 사람들은 김정호 총재가 가끔 '장백산의 천선녀 이야기'를 했다고 회상한다. 달마대사가 백두산에 와서 천선녀에게 자신의 팔을 잘라 바치고 무술을 전해 받았다는 것이다. 물론 달마대가사 한쪽팔이 없다는 것은 불교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거짓이다.
(중간 생략)
김정호 총재는 기천을 배웠었으니, 기천의 설화를 해동검도의 설화로 둔갑시켜서 말했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기천을 수련하던 일부 사람들이 관악산의 암자에 모여 수련했던 시절도 있었으니, 장백산 스승이 관악산에서 자신에게 해동검도를 가르쳤다는 김정호씨의 주장의 근거가 명확해진다. 결국 장백산 스승이란 기천의 박대양씨 였던 것이다. 또한 심검도 창시자 김창식 총재의 증언에 의하면, 자신이 심검도를 가르친 송 모씨가 나중에 관악산에서 100일기도에 정진하면서, 풍차검법이라는 것을 창안했는데, 현 해동검도의 창시자들이 거기서 그 검술도 배웠다고 말한다. 관악산에서 해동검도를 가르친 장백산 스승이라는 허구의 인물은 이런 여러 가지 사실에 기초해서 형상화 된 것이었다. 하지만 박대양씨와 송 모씨를 장백산 스승으로 격상시킨 공로는 김정호 총재의 아이디어 였던 듯 하다
첫댓글 알고 있던 내용인데 다시 보니 새롭네요^^역사 왜곡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꼭 해야 하는거 아닌가 생각되네요..해동검도 파이팅!!그런데 검도로 돈벌이 하려는 생각은 사람이기에 욕심부릴 수 있단 생각도 드네요..
모든게 다 그놈의 돈이 문제겠지요...참 씁쓸하네요...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