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내가 읽은 책

[이영숙[초비-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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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작가

김여환

출판

청림출판

발매

2012.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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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일찍 이 책을 만났더라면…

말기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님의 생각이 절실하다.

모든 관점을 환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아야 하는데,

정작 나는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만 듣고,

내 짧은 경험속에서 나의 관점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던가?

 

목차

프롤로그: 지금이 어려우면 마지막부터 시작하세요

1장 긍정할 때 삶은 더 아름다워져요

1. 내 인생과 친해지세요 / 2. 지는 꽃도 아름다워라 / 3. 해피엔딩을 원한다면 ‘불편한 진실’도 마주 보세요 / 4. ‘지나간 삶’보다 ‘남은 삶’을 놓치지 마세요 / 5. 세상의 모든 것을 긍정하세요, 죽음조차도

2장 감정에 휘둘리지 마세요

1. 미안해요 회진법 / 2. 서로에게 서로가 스승이 되어야 합니다 / 3. ‘병든 삶’이 ‘병든 죽음’을 만들어요 / 4. ‘죽이는 의사’로 살아가는 그 이유 / 5. 어쩔 수 없다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세요

3장 때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1. 혼자 가는 길, 함께해요 / 2. 눈부신 마지막을 지금 준비하세요 / 3. 죽음보다 힘든 삶을 견뎌야 하는 그들 / 4.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여행 다니면서 / 5. 이길 수 없는 싸움을 이제는 멈추세요

4장 웃으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1. 살리는 의사, 죽이는 의사 / 2. 모르핀,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 / 3. 행복 배달꾼 ‘양 회장과 그 일당들’ / 4. 그대 걱정 말고 울어요 / 5.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주세요

5장 이제는 그만 내려 놓으세요

1. 서둘러요, 내일이 완벽하게 보장된 사람은 없으니까 / 2. 여기서부터는 ‘혼자 가야 해’ / 3. 인생이라는 가방에 채워야 할 것들 / 4. 우리에게 ‘죽음과 죽어감’이란 무엇일까? / 5.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쌓는 법, 메멘토 모리

에필로그_마지막이 인생의 정답을 알려줍니다

부록_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추천하는 웰다잉 10계명

참고문헌

프롤로그: 지금이 어려우면 마지막부터 시작하세요

“죽음의 신이 온다는 사실보다 확실한 것은 없고, 

 죽음의 신이 언제 오는가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

 - 독일 격언 (p.7)

     죽음을 배우면 죽음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삶이 달라진다. 자신의 마지막을 정면으로 응시하면 들쭉날쭉하던 삶에 일관성이 생기고 시련을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긴다.

     이 책은 ‘암에 걸려서 호스피스 병동에 왔다가 삶의 갈등을 정리하고 행복하게 죽었다’는 죽음에 관한 동화가 아니다.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과 죽음의 5단계를 극복해나가는 우리의 이야기이자 죽어가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영혼의 속삭임이다. 내가 이 원고와 함께 했던 시간은 글을 ‘써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환자들의 이야기를 ‘읽어가는’ 과정이었다. 나는 우리의 마지막을 읽어가면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게 아니라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수동적으로 ‘살아내는’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우리도 그들처럼 어떤 마지막이 기다리든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하며, 죽음이 우리를 찾아오기 전에 우리가 죽음을 먼저 찾아가서는 안된다고 용기를 주고 싶었다. 또 의료의 도움을 받으면 죽기 직전까지 고통스럽지 않게 살 수 있다는 의학적인 상식도 알려주고 싶었고, 사회봉사의 거대한 치유력만이 갑자기 들이닥치는 죽음의 폭력에서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도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나는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자 삶에 관한 이야기를 당신과 나누고 싶다.

     나의 호스피스 경험을 통해 당신이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찾아내기를, 평범한 사람들의 마지막 이야기가 당신의 죽음과 소통하는 길잡이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p.11)

1장 긍정할 때 삶은 더 아름다워져요

     내 인생은 ‘죽 쑤는 인생’이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와 정신분열증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란 나는 결핍과 상처투성이였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기 위해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했고 의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의사가 되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 행복해질 줄 알았다. 경제적 여유가 생기고 큰 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나는 미루어둔 의사 수련 과정을 시작했다. 내일을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지적으로 우월해야 할 것 같았다. 내 나이 마흔 무렵의 일이다.

     늦은 수련 생활은 매일 눈물을 짜야 할 만큼 서러웠다. 의대 동기들은 이미 의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었고, 열 살이 적은 선배는 팔짱을 끼고 놀면서 라면 박스를 들고 오라거나 퇴근 후 기차표를 사오라는 등 잡다하고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켰다. 과장으로 근무하는 친구에게 부족한 의학 지식 때문에 멸시를 당하기도 했다.

     전공의 시절에는 하룻밤에 사망 선언을 세 명이나 하고 혼자 당직실에서 자다가 가위에 눌려 깬 뒤, 울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연일 당직을 서던 어느 날은 밀린 차트를 정리하다 깜빡 조는 바람에 시아버지 제사에 못 간 적도 있었다. 일어나 보니 남편에게서 이혼하자는 문자가 열 통 넘게 와 있었다.

     일은 일대로 힘들고 가정은 가정대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스트레스가 쌓일 대로 쌓여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면서도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다는 생각에 새벽 네 시에 일어나 건강식을 만들고 줄넘기 천 번을 한 뒤 출근했다. 아이들 등교와 남편 출근 준비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반납한 결과, 나는 의과 대학에 입학한 지 23년 만에 서툰 호스피스 의사가 되었다. 당시 내가 고달픈 수련의 시절을 견딜 수 있었던 건 오늘을 보상할 미래가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그 과정을 거치는 동안 정말 불행했다. 내가 믿었던 미래가 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어리석게 살다가 떠날 뻔했다.(p.20)

     5년 동안 800명이 넘는 환자들을 떠나보내며, 나는 나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이제까지의 삶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내 불행의 근원은 내게 주어진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가졌던 수많은 목표-경제적 풍요, 지적 우월, 공부 잘하는 아이, 자상한 남편과 부모-는 내 욕심이 만들어낸 허상이 아니었을까.

     나도 언젠가는 나의 환자처럼 임종실의 주인공이 될 것이다.

     인생이라는 웅장한 공연의 커튼이 내려가는 순간 나는 무엇을 뜨겁게 느끼면서 육체와 이별해야 할까. 오늘을 살아가는 데 급급하며 죽쑤는 인생을 살았던 나는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과 죽어감을 지켜보며, 갖지 못한 것을 가지려고 고군분투하던 삶에서 벗어났다.

     삶은 신생아실에서가 아니라 호스피스 병동을 아는 데에서 시작된다.(p24)

“우리 모두가 가야 할 끝은 같다고,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그때까지 살면 된다고,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았어요.”(p.29)

     용기를 내어 가족들과 마지막 여행을 다녀온 연숙 씨는 벚꽃이 질 무렵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아름답게 지는 꽃은 없어도 깨끗하게 지는 꽃은 있네요.” 젊은 날, 만개한 꽃처럼 아름다웠던 연숙 씨를 사랑했을 그녀의 남편은 아내의 아름다움이 지고 난 뒤 그때와는 또 다른 애틋함으로 그녀를 보듬었을 것이다.(p.31)

     피고 지는 꽃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사람도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다.

     말기 암 환자의 외향이 아무리 추하게 변해가더라도 묵묵히 자연의 섭리를 따르는 그 모습을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스러져가는 존재를 아름답게 여기는 미향 씨의 마음이 아닐까.(p.34)

     나는 이곳에 와서 편안하게 삶을 끝내는 환자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두 가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한 가지는 ‘나쁜 소식’이다. 그들은 자신이 암에 걸렸고 더 이상의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또 한 가지는 ‘긍정적인 죽음관’이다. 죽음은 인생의 실패가 아니가 누구나 거쳐 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p.37)

     나쁜 소식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 머릿속이 하얗게 화하는 것 같은 슬픔이 지나가면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가 되면 우리는 떠날 사람과 함께 죽음의 문턱에 서서, 못다 한 이야기를 나누고 응어리진 일에 관해 화해하며 서로의 슬픔을 애도하고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 진짜 해피엔딩이다.(p.42)

     '나쁜 소식을 알면 빨리 죽는다‘는 근거 없는 상식은 환자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악영향을 끼친다. 가족들은 자신의 병명을 모른채 고통스럽게 떠나는 환자를 통해 죽음은 힘들고 무서운 것이라 인식하게 되고, 환자는 자신의 마지막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할 기회마저 놓쳐버린다.

     나쁜 소식을 알릴 때, 나는 환자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날마다 조금씩 알린다. 죽음의 5단계 가운데 첫 단계가 ‘부정’이라고 하지만, 이런 경우 환자는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온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긍정적인 죽음관’과 맞닿아 있는 ‘수용’으로 나아간다. ‘부정’은 단지 나쁜 소식을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단계가 아닌가 싶다.(p.45)

     ‘이제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은 인생의 큰 사건이다. 환자가 이겨내지 못할 것이라는 섣부른 예단으로 숨기기만 하면 환자는 비현실적인 희망 뒤에 드러난 절망을 감내하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현실을 부정해버린다. 그렇게 환자는 남겨진 삶을 여행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린다. 나쁜 소식을 알고 난 뒤의 부정은 참된 긍정으로 가기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 그 과정은 반드시 지나간다.

     죽음을 외면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등 뒤로 다가온 나쁜 소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쁜 소식 그 자체가 불행은 아니다. 나쁜 소식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 않기 위해선 떠나는 자에게나 남는 자에게나 슬픔을 견딜 용기가 필요하다.(p.49)

     호스피스를 ‘죽음에 관한 동화’쯤으로 여기는 사람들을 종종 만난다. ‘통증에 몸부림치던 암 환자가 호스피스에 와서 통증을 조절하고 삶을 잘 정리한 뒤 편안하게 죽었다’라는 이야기에서 사람들은 ‘죽었다’는 말만 기억한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기억해야 하는 것은 죽기 직전까지 그가 어떻게 살았고 얼마나 행복했는지가 아닐까.

     모든 죽음은 슬프다. 비록 슬픔 속에서 떠나더라도 우리는 죽음 직전까지 행복해야 한다. 생명을 연장시키고 죽음을 중지시키려는 열망 때문에 마지막 여행을 즐기지 못한다면 슬픔은 불행으로 변질되어 남은 삶에 시커먼 먹구름을 드리울지도 모른다.

     우리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할 기억은, 이혼으로 종결된 결말이 아니라 뜨겁게 사랑해서 결혼한 과정, 죽음이라는 끝맺음이 아니라 죽기 전까지 행복하게 살았던 시간일 것이다.(p.57)

     모처럼 서점에 나갔다가 <죽음의 중지>라는 책을 보고 망설임 없이 사버렸다. <눈먼 자들의 도시>를 쓴 주제 사라마구의 신작 장편소설이었다. 일흔여덟 살의 나이로 2010년에 별세한 이 포르투갈 할아버지는 환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상상력으로 인간에 대한 성찰과 고민을 담은 작품들을 썼다. 하지만 묵직한 주제 때문일까, 내게 그의 소설은 늘 어려웠다. 그래도 매번 두말없이 사게 되는 걸 보면 그의 작품에는 정독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p.60)

‘생명이란 별이 쇠약해질 때처럼 갑자기 그 빛을 잃는 경우도 있고

 또 서서히 빛이 꺼져가는 경우도 있다.’(p.64)

     죽음과 죽어감의 진실은 의학적인 설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 해답을 찾은 것은 일곱 살짜리 소아암 환자가 쓴, <건전지가 다하는 날까지>라는 동시에서였다. 자신이 여행한 너무나도 짧은 생을 ‘생명의 건전지가 다할 때까지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한 이 용기 있는 아이처럼, 우리도 생명의 건전지가 다하는 날까지 생을 살아가야 한다. 진정한 해탈이란 죽음에 의연해지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도와주고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인간답게 살아가는 것이다. 죽음은 중지되지 않았어도 수명은 고무줄처럼 늘어난 시대, 우리가 용기를 가지고 긴긴 생에 인간의 색채를 입힐 때, 비로소 장수는 축복이 되지 않을까.(p.65)

2.감정에 휘둘리지 마세요

     초짜 의사 시절, 나는 예민하거나 쉽게 화를 내는 환자나 보호자를 대하는데 서툴렀다. 그래서 그들과의 관계에서 번번이 실패했다. 누군가를 미워함으로써 감정을 해결하는 분노는 인간관계의 가장 큰 적이다.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는 것보다 성난 아이에게 다가가기가 훨씬 어려운 이유는 감정이 전염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환자의 병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의 인생에 관해 더 많이 알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누군가를 붙잡고 하소연하는 것이 우울증 약을 먹는 것보다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이유 없는 분노는 없다. 진료실에서, 병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인생을 꺼내놓는데, 그때가 바로 영혼의 가방이 열리는 순간이다. 분노가 사그라져야 삶도 보이고 죽음도 보인다. 그때 비로소 암성 통증도, 삶의 통증도 치유된다. 그래도 그에게 다가온 죽음을 내쫓아줄 수 없으니, 의사로서 나는 늘 미안할 뿐이다.(p.75)

     환자는 미안해하는 의사를 도로 위로한다. 그들의 분노는 의료진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갑자기 찾아온 죽음을 향한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이 찾아오면 육신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이 멀어버리기 때문이다.

     “미안해요”

     그 한마디에 분노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통찰력이 생기고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오늘도 나는 나의 환자들에게 미안하다.(p.76)

     내가 카프카의 <변신>을 읽은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변신>은 내가 그 책을 처음 읽은 30여 년 전뿐 아니라 지금의 내 아이도 읽어야 하는 필독서지만, 70페이지 남짓한 이 짧은 소설은 난해하고 어렵다. “그레고리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가족을 위해 성실하게 일하던 그레고리 잠자가 거대한 벌레로 변신한 뒤 모든 인간관계와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배제된 채 비참하게 죽음에 이르는 몇 달 간을 묘사하고 있다. 흔히 <변신>은 가정에서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한 가장들을 가족들이 핍박하면서 간접적으로 죽인다는 내용으로 요약되지만, 읽을 때마다 그 의미가 다르게 다가오는 것을 보면 삶과 인간에 대한 진실이란 한두 마디 문장으로 간단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p.77)

     상상할 수 없는 통증 때문에 힘들어하면서도 자식에게 상처를 줄까봐 자살할 수 없다는 어느 가장을 보면서 나는 진심으로 존경심을 느꼈다.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의무를 내려놓지 않는 그 환자야말로 우리 시대의 그레고리 잠자가 아닐까.(p.80)

     세 명 중 한 명이 암에 걸리는 현실에서 암 환자의 현재는 우리의 미래일 수도 있다.

우리는 타인의 현재를 위해, 우리의 미래를 위해 서로를 도와야 한다. 사회봉사의 거대한 치유력만이 카프카가 경고한 인간 소외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마지막에 몬스터로 변할지 모르는 우리를 구원해준다.(p.84)

좋은 사람들이 주변에 있으면 죽음과 죽어감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안식이 되지만

갈등이 있는 가족은 죽음을 비극으로 만든다. 안타깝지만 그 또한 인생인 것이다.(p.89)

     인과응보로 암이 걸리는 게 아닌데도,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몹쓸 병에 걸린 것처럼 죄인 취급을 당하던 목사님이 내 마음에 오래 남았다. 가정의학과 전문의가 된 후 암성 통증의 97퍼센트를 현대 의학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목사님처럼 고통 받는 암 환자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을 찾아주는 일이 무엇보다 가치 있게 느껴졌던 것이다.(p.102)

     삶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했던 나는 호스피스 생활을 하면서 달라졌다. 여유가 생겼고 넉넉해졌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았고,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시키지 않았다. 달라진 아내와 엄마를 보고 가족들도 호스피스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p.103)

     삶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려고 죽음을 어두운 자루 속에 우겨넣어도 죽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죽음을 없애지 못할 바에는 밝은 곳으로 끌어내는 게 좋지 않을까. 태양 빛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죽음의 맨얼굴을 마주볼 때 우리는 죽음이 막연히 생각했던 것처럼 끔찍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어느 순간 죽음이 우리 삶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늘 죽음이 함께했다는 것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죽음과의 싸움을 멈추면 비로소 죽음도 보이고 삶도 보인다.(p.105)

3.때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하지만 이제는 떠나야 하는 사람의 운명을 되돌리고 싶다. 그럴 때 사람들은 불가피한 현실을 모면하기 위해 타협을 한다. 신을 향해 헌신을 맹세하기도 하고, 이타적인 삶을 다짐하기도 한다. 그 대가로 바라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을 두고 시작한 헛된 협상은 우리를 또 다른 절망으로 몰아넣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꺼져가는 생명에게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 주는 것뿐이다. 죽음은 혼자 가는 길이고,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이 낯설고 외로운 길 어딘가에서 내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깨우쳐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다.(p.114)

     그가 누구든 어떤 삶을 살았든, 인생의 마지막은 석양처럼 눈부셔야 한다. 우리가 서로의 어둠에 물감이 될 때 마지막 남은 인생에 황금빛 석양이 비춰진다. 그때 컬러풀 호스피스가 완성될 것이다. 죽음을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완성을 위해서,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한다.(p.129)

     임종실의 주인공이 된 내 모습을 떠올렸다. 훗날 그 상상이 실재가 되리라는 불편한 진실을 나는 내 환자의 죽음을 통해, 공포와 두려움을 겪고 난 뒤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누군가 영혼이 떠난 내 육신을 무서워한다고 생각하니 서글펐다. 심장이 멎은 환자들과 나를 동일시하자 언제부터인가 환자의 주검이 무섭지 않았다. 이제 나는 삶의 짐을 내려놓은 평화로운 얼굴을 바라보며 사망 선언을 한다. 그의 뺨에 내 뺨을 부비고 여전히 따뜻한 손을 잡아준다. 내 앞에 있는 주검은 미래의 나이기도 한다.(p.133)

     나는 글을 쓸 때 첫 문장보다 마지막 문장을 먼저 생각한다. 마지막 문장을 생각한 뒤 글을 써나가면 흐름에 일관성이 생기고, 글 전체가 한 호흡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생도 글쓰기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마지막을 응시하는 것은 삶에 일관성을 부여하는 일이다. 자기 생의 흐름을 보면 힘든 일을 극복할 용기 또한 생길 것이다.(p.138)

     우리는 어두운 터널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순간에도 인생의 비밀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오랜 시간을 살아도 그 속에 숨은 비밀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삶은 허망하고 무미건조한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마음속의 비밀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그 비밀이야말로 마지막까지 간직해야 할 우리의 꿈일지 모르기 때문이다.

     취재팀을 배웅하며 나는 그들이 삶과 죽음의 비밀을 간직한 호스피스 병동에서 파랑새를 찾았기를 바랐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파랑새가 결국 그들 가까이 있었던 것처럼.(p.141)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자가 해주는 첫 목욕은 큰 의미가 있다. 환자는 목욕을 하면서 움직일 수 없는 자신을 어루만져주는 타인의 손길에 인간의 따뜻함을 느낀다. 그리고 환자는 이제 자기 몸을 스스로 씻을 수조차 없다는 사실에 서글픔을 느낀다.(p.156)

     싸우는 동안 우리는 지치고 상처투성이가 되겠지만, 싸움을 멈추면 삶이 보인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p.157)

4. 웃으면 세상이 달라집니다.

     보통 사람들은 말기 암 환자들이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쁜 소식을 정확하게 알고 있는 말기 암 환자들은 죽음이 다가왔다고 해서 우울감에만 휩싸여 지내지 않는다. 죽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통증이다. 아프면 누구나 우울해진다. 환자가 우울해하거나 불면증에 시달릴 때 호스피스 병동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우울증 치료가 아니라 통증 치료다. 의학으로 대부분의 통증을 조절할 수 있게 된 요즘에도 여러 가지 이유로 통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환자들을 만난다. 가장 큰 이유는 암성 통증과 마약성 진통제에 관한 오해와 선입견이다. 그 때문에 무의미한 통증을 겪는 환자를 볼 때마다 참으로 안타깝다. 통증이 없어져야 환자는 원래의 성격을 되찾는다. 본래 성품으로 돌아가면 곧 다가올 이별의 예감 때문에 슬퍼서 운다. 그리고 그 슬픔조차 지나가면 비로소 웃는다.(p.158)

     경희씨는 말기 암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의 항암 치료는 남은 삶의 질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호스피스로 왔다. 가장 힘들어 했던 증상인 변비와 통증이 조절되자 경희 씨는 가족 여행을 계획했다.

     어느 토요일 그녀는 가족들과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 그 일은 경희 씨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잔잔한 기쁨을 주었다. 가족들은 죽어가는 아내에게, 그리고 엄마에게, 마지막으로 따뜻한 기억을 남겨줌으로써 못 다해준 일에 대한 후회와 미련을 떨쳐냈다. 경희 씨 또한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면서 혼자 가야 하는 길에 대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냈다. 네 가족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여행 사진을 보자 내 목구멍에서도 뜨거운 무언가가 치받쳤다. 짠하면서도 기쁘고, 슬프면서 행복한 그런 기분이었다.(p.166)

     미국, 캐나다, 프랑스, 독일, 영국, 호주 6개국은 전 세계 모르핀의 79퍼센트를 소비하지만, 세계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는 중하위권 국가의 모르핀 소비량은 6퍼센트에 불과하다(2005년).

     같은 해 한국의 인구당 모르핀 사용량은 호주의 152분의 1, 일본의 11분의 1 정도였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호주나 일본 사람들보다 통증을 더 잘 참는 건 아닐 것이다. 단지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부족해서 고통스럽게 죽는 것이다.(p.171)

     암성 통증과 마약성 진통제에 대한 잘못된 상식 때문에 의미 없는 통증을 껴안고 지내는 환자들이 가진 흔한 오해 중 하나는 ‘마약성 진통제를 자꾸 쓰면 중독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틀린 말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약제의 중독은 1만명 가운데 두 명으로 초보 골프가 홀인원할 확률과 같고, 교통사고를 당할 확률보다는 훨씬 적다. 또 많은 사람들은 나중에 통증이 더 심해지면 어떡하나, 그때 쓸 약이 없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다. 그러나 신은 모르핀이라는 선물에 희망을 잔뜩 넣어 주었다. 대부분의 약은 쓸수록 부작용이 늘어나기 때문에 용량을 제한하는데, ‘모르핀은 아무리 써도 통증에 대한 내성이 없다’는 것이다.(p.172)

     시몬느 드 보부아르는 1964년에 발표한 <죽음의 춤>이라는 책에서 암과 싸우는 어머니의 고통을 차분하게 묘사했다. 마약성 진통제가 제한적으로 사용되던 시대였기 때문에 보부아르의 어머니는 죽음을 앞두고 엄청난 통증과 맞서 싸워야 했다. 보부아르는 그런 어머니를 지켜보며 “사람이 죽음을 인식하고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이다”라고 썼다. 톱니바퀴로 배를 자르는 듯한 통증을 느끼면서 죽어가는 것은 보부아르의 말처럼 ‘무엇으로도 정당화할 수 없는 폭력’일 것이다.

     나는 호스피스 의사로서 당부하고 싶다. 언젠가 당신에게 그때가 오면 신이 내린 최고의 선물 모르핀을 거절하지 말고 받아들이라고. 나는 신이 우리가 아프지 않게 죽어가기를, 그리하여 죽음의 맨얼굴을 응시하기를 바랐을 거라고 감히 생각한다. 죽음의 맨얼굴은 평화롭다. 다만 통증 때문에 죽음이 어둡고 무서운 것으로 왜곡되었을 뿐이다. 고통 없는 죽음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다.(p.173)

     오늘도, 이 순간도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죽음 중 단 하나의 죽음도 함께하지 못했던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죽음이 다가왔을 때 자신에게만 불행이 닥친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죽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고 난 뒤, 죽음을 미워하고 삶을 회의할 수 있다. 어차피 죽을 거라는 생각에 염세주의의 덫에 빠질지도 모르겠다. 죽음에 익숙해지면 죽음을 긍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서야 삶을 낙관할 수 있다. 호스피스 환자들은 봉사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지만 또한 그들은 인생의 대선배로서 우리에게 삶과 죽음을 가르치는,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p.183)

     과일에 씨가 들어 있듯 우리 안에는 죽음이 내재되어 있다. 죽음은 나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 함께 잉태된다. 그러나 철학적인 죽음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도 의학적인 죽음이 다가오면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에 맥없이 휘말리고 만다. 흔적조차 없이 소멸될 육신, 혼자 내던져진 듯한 외로움, 암성 통증의 공포, 돌아갈 수 없는 세월에 대한 향수…….

삶은 힘들고 암과 함께 가는 삶은 더 힘들다. 그러나 진심에서 우러난 말 한마디, 따뜻한 스킨십이 환자의 절망감과 외로움을 달래준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스스로의 외로움을 치유해야 한다.(p.189)

5. 이제는 그만 내려놓으세요.

     내려놓음과 죽음은 배우는 것이다. 어려운 과목이지만 한 번은 가야 하는 길이기에 배워야 한다. 하지만 호스피스 의사라고 해서 이 과목을 완벽하게 마스터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다 배우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어찌 죽음뿐이겠는가. 살아오는 동안 세상의 불공평함에 화가 나고 서러웠다면 죽음이 공평하다는데 위로받기 바란다. 장애인이나, 자식을 앞세운 부모처럼 죽음에 가까이 갔던 사람, 혹은 삶이 힘들었던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죽음이 쉽다. 죽음 교육은 죽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의 깊이에서 나온다. 내려놓는다는 것, 수용한다는 것, 그리하여 편안하게 죽는다는 것, 그것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용기에서 비롯된다.(p.198)

     돌이켜보면 참 극성스럽게 살았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선 공부를 잘해야 한다고 아이들을 다그쳤다. 살다 보면 도움이 되려니 싶어 아이들이 싫어하는 것도 이것저것 배우게 했다.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여가며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끌고 다녔고, 애들이 피자나 햄버그를 먹고 있으면 당장 큰 병에라도 걸릴 것처럼 야단을 치며 현미 채식을 하게 했다. 내일 편하기 위해 오늘을 피곤하게 보내라고 강요했고, 내일 건강하기 위해 오늘 맛있는 음식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어리석은 엄마에게 모든 것의 초점은 내일이었다. 어쩌면 없을지 모르는 내일을 위해 지금 있는 오늘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제 나는 집 안을 덜 쓸고 덜 닦는 대신 그 시간에 읽고 싶은 책을 읽는다. 설거지거리가 쌓여 있어도 영화를 보러 나간다. 아이들에게 성적표에 적힌 숫자에 대해 잔소리하지 않고 공부하는 동기에 대해 묻는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데 시간을 할애하고 일을 줄인다.

호스피스 병동에 근무하면서 나는 내일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내일을 포기하면 뜨거운 오늘이 있다. 나중에 행복한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한 게 아닐까.

     오늘을 즐기는 사람은 마지막이 다가왔을 때 얼마 남지 않은 삶도 즐길 수 있다. 이 순간에 감사하는 것, 그것이 진짜 행복이다.(p.206)

     <혼자 가야 해>를 읽어줄 때 나는 두 가지 소망을 담았다. 하나는 남은 사람들이 떠나는 사람과 있었던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며 그의 길을 배웅해주기 바라는 마음이었다. 작은 강아지처럼 우리도 언젠가 저마다의 쪽배에 몸을 싣고 혼자 강을 건널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옆에서 지켜봐준다면 혼자 가는 길도 외롭고 두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또 하나는 가족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통해 자신들의 죽음을 배웠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언젠가는 내가 탈 쪽배도 다가올 것이다. 내 몸 하나 겨우 실을 수 있는 그 쪽배에는 돈도, 권력도, 사랑하는 사람도 태울 수 없다. 실을 수 없는 것들을 가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간직한 채 배를 타면 좋지 않을까.(p.213)

     <임종실 생활 안내문>

     우리는 언젠가 죽습니다. 그 순간이 이제 다가왔습니다.

     다음은 <술 취한 코끼리 길들이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아잔 브라흐만은 임종의 순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훌륭한 콘서트가 막을 내려도 나는 결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나의 감정이 정확히 그것과 같았다.

     아버지의 죽음은 마치 멋진 콘서트가 마지막 막을 내린 것과 같았다.

     너무도 훌륭한 연주였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가 ‘악기를 챙겨 집으로 돌아갈’ 순간이 왔다.

     아버지가 영원히 내 삶을 떠났음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슬퍼하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얼마나 훌륭한 아버지인가! 아버지의 삶은 내게 얼마나 강한 영감을 주었는가! 내가 아버지 옆에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행운인가! 아버지 아들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운이 좋은가! 고마워요 아버지.

     이제 사랑하는 분은 떠나실 준비를 합니다. 수포음이라는 가래가 많은 호흡소리가 들리기도 하고, 몸과 얼굴은 불수의 수축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소변이 나오지 않고, 검은 눈동자가 점점 커집니다. 근육이 이완되고 호흡이 멈추고 심장이 멈추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이러한 임종의 단계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므로 보호자 분께서는 안심하셔도 됩니다. 임종의 단계에서 임종까지의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므로 초조해하시지 마시고, 그 순간을 기다려주십시오. 산소포화도나 혈압 등의 모니터를 보는 것보다 환자의 손을 잡아드리고,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는 얼굴을 보시는 것이 현명합니다.

     평온실 안에서 식사를 하시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가끔 있습니다.

자료에 따르면 가장 늦게까지 남아 있는 감각이 청각입니다. 이제 곧 떠나시는 분 앞에서 좋은 말씀만 남기셨으면 합니다. 식사는 평온관 내의 가족실이나 식당을 이용하셔서 음식 냄새와 함께 떠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누구나 죽음은 한 번만 오는 첫 경험이자, 마지막 경험입니다. 마음과 몸이 힘드시더라도 저희 평온관 식구가 같이 위로하고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협조 바랍니다.(p.214)

     마지막 순간 내 영혼의 가방에서 반짝 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려면 나는 오늘 무엇을 담아야 할까. 내가 집착하는 것이 영혼의 가방 속에서 아무 빛도 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 포기도 쉬워질 것이다.(p.221)

     태어남은 모두 다르다. 순조로운 자연분만으로 태어나는 사람도 있고 제왕절개술로 세상에 나오는 사람도 있다. 일찍 태어나서 인큐베이터 생활을 하는 아이, 엄마에게 며칠에 걸친 산통을 주는 아이……. 우리는 모두 다른 상황,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다.

     죽어감도 마찬가지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모습으로 죽을지 알 수 없지만, 나의 환자들은 대부분 스스로의 삶을 잘 정리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쌓는 웰다잉은 남은 사람의 역할이 더 큰 것 같다.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처럼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잘 쌓으면 그 인생은 좋은 것이 된다. 호스피스는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 상자다. 진정한 메멘토 모리는 자신의 마지막 상자를 준비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상자를 쌓아주는 일에서 시작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죽음을 기억할 수 있게 될 것이다.(p.237)

에필로그: 마지막이 인생의 정답을 알려줍니다.

     옛날 사람들은 누군가 죽으면 별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아름다운 상상일 뿐 과학을 신봉하는 우리는 별이 빛을 발하는 천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세상을 떠난 누군가의 영혼이 저 멀리서 깜빡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 희미한 별빛이라도 남아 있다고 생각하면 위로가 되기 때문이다. 때로는 환상이 사실의 빈자리를 메우기도 하는 게 아닐까.

     사는 데 서투른 나는 죽음을 돌보는 데도 여전히 서투르다. 그래도 나는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이곳, 인생의 마지막 병동을 사랑한다. 강요하지 않아도 용서와 화해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곳, 이기심과 욕망과 집착을 내려놓고 정말 소중한 것들로 삶을 채워나가는 곳, 내게 호스피스 병동은 성지聖地와 다르지 않다. 가끔은 안타깝게 꼬인 채 마무리되는 삶을 보기도 하지만, 그조차 삶의 한 단면이려니 받아들이면 엉킨 실타래 같은 인생도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인생의 모든 굽이굽이가 그렇듯 호스피스에서 어떻게 행복한 순간만 있을까. 한밤중에 병동에서 걸려온 응급 전화를 받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때, 병원 시스템과 내가 생각하는 호스피스의 요건이 맞지 않아 투쟁 아닌 투쟁을 해야 할 때…… 그럴때면 “나는 엄마가 평범한 의사였으면 좋겠어”라는 딸아이의 투덜거림이 솔직히 내 속을 꽉 채운다고 해야겠다.

     재작년 호스피스 이야기를 담은 또 하나의 책 <행복을 요리하는 의사>의 출판을 결심했던 이유 중에는, 나 자신이 호스피스를 그만두게 하지 못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사람들에게 내가 이러저러한 일을 한다고 알리고 나면 부끄러워서라도 그만두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스스로에게 그만한 책임감을 부여하면서까지 호스피스에 매달리는 이유는 뭘까. 아마 인생의 중년을 넘어오면서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말보다 해야 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 더 마음에 와 닿기 때문이리라.

     세상의 자투리로 남은 한 구석이나마 내가 밝게 빛낼 수 있으면 좋겠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이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고 느끼게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언젠가 나도 내 환자처럼 작은 쪽배를 타고 망각의 강을 건널 때 설레는 마음으로 싣고 갈 보따리 하나를 장만해둔다는 욕심도 부려본다. 어쩌면 나는 환자를 돌보는 게 아니라 나의 미래를 돌보고 있는지 모른다.

     가끔은 내가 말기 암에 걸려 병동에 누워 있는 꿈을 꾼다. 엄청난 고통과 슬픔 속에서 나는 비명을 지를 수도 울음을 터뜨릴 수도 없다. 가위에 눌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을 때, 이 악몽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리라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힐 때, 그런 순간조차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내가 없는 세상에 남겨질 아이들이다.

     악몽을 꾸고 난 다음날 아침이면, 나는 내가 환자들을 더 많이 사랑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환자들이 편안히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고귀한 일을 한다고 추켜세우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죽이는 의사라고 무시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나는 호스피스를 해야 할 일이라고 여기고 묵묵히 할 뿐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서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그런 것이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은 절망에 맞닥뜨렸을 때, 아무리 애를 써도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을 때,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극단적인 바람이 들 때, 그럴 때 나는 당신이 호스피스 병동을 찾았으면 한다.

     죽음은 그 모든 문제들에 정답을 가지고 있다. 좋은 환자는 좋은 환자대로, 힘든 환자는 힘든 환자대로, 내게 인생의 비밀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것을 들리는 대로, 보이는 대로 이곳에 옮겼다. 작가도 아니고 문학 수업을 받은 적도 없는 내가 이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내 환자들의 힘이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나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는 따뜻한 의사이고 싶다.(p.238)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추천하는 웰다잉 10계명>

1. 내일을 위해 오늘의 행복을 양보하지 마세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바로 이 순간 행복해야 합니다. 내일의 행복을 위해서 오늘을 포기하지 마세요. 순간의 행복은 젊어서 흥청망청 즐기라는 말도, 금방 사그라질 쾌락에 스스로를 내던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일입니다.

2. 건강할 때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세요.

건강할 때 단 한 번이라도 시간을 내서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하세요. 죽음을 배우는 지름길입니다. 죽어가는 노인은 곧 사라질 도서관과 같습니다. 그들을 도우면 그들은 작은 목소리로 삶의 비밀을 속삭여줄 것입니다. 그 목소리에 귀 기울이세요. 죽음이 우리에게 삶을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3. 나쁜 소식도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무슨 병에 걸렸는지, 얼마나 진행되었는지, 치료 목표는 무엇인지, 진실을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진실을 알고 싶다면 급하고 거칠고 불같은 성격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이 병에 걸렸을 때 보호자들은 환자의 평소 성격이 병세에 악영향을 미칠까봐 사실을 숨깁니다. 성격은 인생의 과정 뿐 아니라 마지막도 결정합니다.

4. 마지막에 할 말을 지금 하세요.

칸트는 “새는 죽기 직전에 슬픈 노래를 지저귀지만 인간은 떠날 때 좋은 말을 남긴다”고 했습니다. 9.11 테러 당시 인질로 잡혀 있던 사람들이 마지막 순간 가족들에게 전화를 걸어 했던 말은 “I love you”였습니다. 임종 순간 “사랑합니다”, “고맙습니다”, “행복합니다”라고 말하면 남은 이들은 당신을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할 거예요. 그런데 그 말을 마지막까지 아껴 두지 말고 지금 하면 어떨까요? 이 세 마디 말이면 삶의 모든 갈등이 사라진답니다.

5.죽음이 불행인 것처럼 대하지 마세요.

병에 걸리는 것도, 주식이 폭락하는 것도,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나는 것도 모두 견디기 힘든 슬픔입니다. 죽음은 그중에서도 가장 슬픈 일이지만 그것을 불행으로 연결시키지는 마세요. 슬픔으로 눈이 멀지 않으면 내 슬픔을 통해 다른 사람의 슬픔을 볼 수 있는 포용력이 생깁니다. 슬픔이 찾아왔다고 해서 인생이 온통 먹구름으로 뒤덮이지는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자연과 하나 되는 것으로 여기는 일은 어려운 경지일 것입니다. 하지만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죽음 앞에서 제대로 슬퍼하는 방법이 아닐까요.

6.통증 조절을 잘하는 주치의를 알아두세요.

병도 고통도 없는 죽음이 우리의 마지막이라면 좋겠지만, 누구나 그렇게 삶을 마무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때 찾아갈 수 있는 의사를 알아두세요. 육체적 통증과 마음의 고통을 이해하는 의사를 친구로 만드는 것은 인생의 보험을 드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7.건강할 때 자신의 마지막을 상상해 보세요.

타인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그전에 우리는 자기 자신과 먼저 소통해야 합니다. 특히 자신의 마지막과 소통하면 인생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의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암이나 치매에 걸리지 않겠다는 바람도, 잠들 듯이 편안하게 죽고 싶다는 소망도,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습니다. 죽음의 상황을 바라기보다는 마지막 순간 가슴에 무엇을 담고 떠날지를 상상하세요. 그리고 바로 지금, 그 일을 하세요.

8.마지막 순간까지 즐길 수 있는 취미를 만드세요.

죽어갈 때 나를 즐겁게 할 수 있는 취미를 가지세요. 영화를 보는 것도, 음악을 듣는 것도 좋습니다. 나 자신을 위해 또 가족을 위해 절대자에게 기도를 하면서 보내는 시간도 의미가 있습니다.

9. 당신은 가도 당신의 재산은 남습니다.

한 환자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딸은 그 다음부터 병원에 발길을 끊었습니다. 자주 들러서 아버지를 돌봐주던 착한 딸이었는데, 병원에 오지 않는 오빠에 비해 자신의 몫이 초라하자 마음이 변한 것입니다.

남은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마음을 담아 유언을 남기세요. 죽는 것도 힘들고 억울한데 떠나는 사람이 남는 사람을 배려하는 일까지 해야 되냐고 되물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인생의 선배가 아니라 먼저 떠나는 사람이 인생의 선배입니다. 후배를 배려하는 여유를 가질 줄 아는 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상자를 잘 쌓아올리는 방법입니다.

10.마지막을 같이하는 웰다잉 보호자를 만드세요.

아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마지막이 외롭지 않은 건 아닙니다. 헛된 만남보다는 단 한 사람의 진심과 만나야 죽음이 쓸쓸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웰빙, 웰다잉 보호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떠날 때 손을 잡아줄 사람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출처] 죽기 전에 더 늦기 전에|작성자 여연

[김은주(충주)]

아... 다시 읽어 봐야 되겠어요... ㅠ.ㅠ. 집중력이 엄청나게 저하 되어있네요..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