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퇴
강희정
드르륵 교실문 열리는 소리
슨상님 야가 아침만 되믄
밥상머리에서 빗질을 했산단 말이요
긴 머리카락 짜르라 해도 안 짜르고
구신이 밥 달라 한 것도 아니고
참말로 아침마다 뭔 짓인지 모르것어라
킥킥 입을 가리고 웃어 대는 책상들
아버지는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고
낮술이 뺀질뺀질 빨갛게 웃고 있는
4교시 수업 시간
덩달아 붉어진 내 얼굴은 밖으로만
내달리고 싶어
아버님 살펴가세요 어서가세요
얘들아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일찍 점심 먹고 운동장 나가 놀아라
나보다 먼저 교실 밖으로 나가버린 선생님
달걀 프라이가 들국화처럼 피어 있는
생일 도시락이
아버지 손을 잡고 산들산들 집으로 걸어간다
202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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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미
검은색 정장을 입고 말이야
넥타이를 매고
말하자면 검은색은 당신이 달려가려는 터널
주머니의 손을 빼고 도망치면 어느새 끝없이 이어진 고속도로는 내가 건설했지
당신 옆구리에 손을 넣었을 때 확 끌려 들어가는 어두컴컴한 맨홀 축축한 신발 닿지 않는 천장 어쩌나 뻥 뚫린 하늘에 술술술 떠다니는 말말말
그렇게 날마다 밤
그렇게 날마다 꿈
등을 돌려 내 쪽을 돌아볼 때 약간 기울어진 모양, 난 그게 열쇠 구멍이었어 그것은 입구도 없어 출구도 없지 바짝 마른 검은색 꽃 같기도
당신 그곳에서 걸어 나온 거 맞아?
난쟁이처럼 걸어볼까 껑충껑충 의자를 밟고
모든 걸 던져볼까
비틀비틀 골목 유리창 횡단보도
페인트를 칠해볼까
저기 빨간색이, 쪼그리고 앉은 빨간색이
빨갛게 울고 있어
무릎 차가운 바닥 공터 여기가 어디였더라 불빛이 증발하고 각목과 철근 무수히 짓다 만 건물, 검은 창고, 느낌이 어때? 당신이 물었을 때 재빨리 차갑게 잊어버리는 기쁨
아무렴 어때 당신 목소리 내가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갈 때 왼쪽 귀를 붙잡고 돌돌돌 매달리는 뾰족한 구멍 뜨거운 물 온몸에 끼얹은 화상 내 발목을 걸고 넘어뜨리는데 가끔 생각이 나 혹시 알까? 신음소리로 창문을 긁고 있는 흰 손톱
동전을 던지면 양면의 얼굴이 다르고 당신은 무표정으로 한 바퀴 두 바퀴 공중을 돈다 내 손바닥으로 딱 납작하게 엎드릴 때 자동차 헤드라이트 까맣게 멍든 내 눈도 감겨
나는 아직도 모르고
모르고
모르고
가만가만 허공을 더듬고 일어서는데
공사장 전봇대 안전표지
기둥마다 그려진 검은 무늬 푯말
하나하나 떼어 당신 문 앞에 걸어놓고
못을 박으면
당신이 목구멍을 열고 뛰어나오려나 뛰어나오려나
들여다보는데
2022 시와반시 신인상 당선작
꿈
맞은편 상가건물의 옥상에 작은 웅덩이는 일 년 내내 마르지 않았지. 손차양도 펼치지 않고 선글라스도 쓰지 않고 사계절 내내 빛났지.
담배를 피우려고 하루에 열 번쯤 창가에 서서 그걸 내려다봤단다.
바다는 충분히 구겨진 채로 명성을 유지하고 찌개는 새카맣게 탔지만, 저 물웅덩이만큼은 절대로 줄어들지 않더군.
돌처럼
채석장과 포석공이 있는 도시 계획처럼
작은 웅덩이 옆에 큰 웅덩이 상상할 수도 있었지만
옥상은 비어있었어. 꽃과 나무에 물을 주기 위해 양동이를 흔들거리며 오르는 사람은 보지 못했어. 목을 축이거나 몸을 적시러 찾아오는 새들도 보지 못했지.
이거 하나 알겠더군.
비가 갠 날엔 물웅덩이가 자연스러워 보이더니 몇 달 거푸 가무는 뙤약볕에도 물웅덩이는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걸
(웅덩이란 어느 정도 초현실적인 면이 있기 마련이지)
어디서나 저 물웅덩이를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숲을 산책할 때면 내가 나뭇잎 한 장인 것처럼 걸었어. 창가에서 물웅덩이를 내려다보고 있을 땐 누드 모델처럼 서게 됐지.
밤에는 검게 낮에는 투명하게 푸른 페인트 자국의 요철을 다 보여주면서
웅덩이만큼만 물웅덩이가
저기가 조금 더 움푹한가 봐, 생각하게 하더군.
저 옥상보다 높은
내가 사는 집 옥상 생각하게 하더군.
바깥을 밀며 차오르는 물
인간의 너무 인간적인 생각처럼
오래 널어놓은 티셔츠 한 장이
경직된 어깨를 쭈뼛거리며 빨랫줄을 벗어나는데
처음 추는 춤
옥상이 부르는 것 같았어.
양안다 - 잔디와 청보리의 세계
1.
폐가 앞에서 춤을 추는 일. 한낮을 다 소모할 때까지 우리는 빛 속에서.
나는 굶주릴 계획이야.
생각하고 있다. 지난 휴가 때 빛나던 그의 손가락을 떠올리며.
바닷물이 닿으면 살갗이 저렸지.
반투명한 손톱. 내가 이렇게도 많은 주름을 가졌구나. 흰옷이 검게 변할 때까지.
종소리가 들린다. 놀란 새들의 날갯짓.
2.
보리밭이 녹색으로 흔들린다. 이곳은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인가 봐요.
개를 조심하라는 표지판이 그를 겁먹게 만든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니까. 나는 다른 망상 속에서 겁을 먹는다.
폐가의 문이 삐걱거리는데. 바람은 어디까지 무서워지려고.
누가 이곳에 종을 달아놓은 걸까.
손길 닿지 않은 보리들이
물결친다.
우리에겐 삐걱거리지 않는 창 하나가 필요했지.
3.
그의 발을 움켜쥐고 나면 손가락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가 춤추는 모습을 사랑했다.
광장 정중앙에 놓인 무용수 조형물이 광장을 더 아름답게 만들었지. 위대한 토슈즈—마을 사람들은 무용수를 그렇게 불렀다.
낭만과 존경, 사랑을 투명하게 보여주려는 것처럼.
광장 외곽에는 외곽의 풍경이 있어. 아이들은 침을 길게 늘어뜨리며.
입가에 거품이 묻는 줄도 모르지.
그는 잔디밭에 서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을 것이다. 하지만 알아야 해. 나는 종종 딴생각에 빠지곤 하니까. 나는 그가 부탁한 길고양이 밥을 잊은 적 있고
그의 영혼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잊기도 했으니까.
사람들은 내가 춤을 추면 나무토막처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누군가는 시체 같지 않아서 보기 좋다고 했다.
그게 싫었던 거야.
나는 춤을 싫어하는데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 그게 나의 전부라는 듯이 말을 하는 게.
그러나 그와 함께 느린 속도로 발을 움직이며.
심박수는 심장의 춤. 산책자들은 광장의 혈액처럼. 그는 푸른 핏줄이 불거진 내 손목을 붙잡았지.
발목에 닿는 잔디가 간지러워 웃음이 조금 새어 나와 버렸다.
왜 웃느냐고 그가 물었을 때.
웃긴 일이 생각나서요.
무슨 일이 그렇게 웃긴데요?
개들이요. 이 드넓은 광장에 개를 끌고 오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누구는 목줄을 묶지도 않고요. 배변을 치우지 않는 사람도 있어 요.
그러다 털만 날리고 가는 거죠.
모두가 그렇진 않아요.
지금 우린 그곳에서 춤을 추는 거예요.
그는 어땠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언제까지나 굶주리고 싶었다.
그의 발을 움켜쥐면 버터 녹는 냄새가 났고 졸렸다.
잠기운에 혼곤한 내게 그가 말했다. “사람이 꿈이라는 걸 꾼다는 게 하나의 신비로 느껴져요. 나는 꿈을 꾸지 않는 물체 같아요.” 그것은 그날의 마지막 목소리.
육체가 지쳐 잠들면 영혼은 피크닉을 떠난다.
개들은 잔디밭에 뛰어들고 싶다. 목줄에서 벗어나려고.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한다.
우리는 어느 액자 속 초식 동물 같다. 그가 원해서 손을 잡았고
목줄을 쥔 이들이 원해서 춤을 추었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증오.
그러니까 조화이자 자살이고
어느 무용수가 남기고 간 유산은 성공적이었으나 정작 무용수의 인생은 실패적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은 꿈이자 영혼이자 피크닉.
스텝에 밟힌 잔디가 다시 일어난다. 광장 바닥으로부터. 느린 속도로. 나는 잔디와 같은 마음이 없어서
무기력하게 쓰러지고 춤도 아닌 몸부림을 사랑했다.
철창 속 기린은 무슨 기분일까.
4.
나는 전보다 더 큰 허기를 느끼며. 푸른 보리밭을 통째로 뽑아 끓인다면.
질주하는 개가 있었다. 입가에는 거품.
언젠가 이곳에서 잠든 적이 있었는지 견딜 수 없었다.
개 조심 표지판이 휘어져 있었다. 그는 지금과 같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지난 휴가에서 개에게 물려 죽는 아이가 나였다니 그걸 늦게 알아 버려서.
체리 사러 다녀왔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구경했지
티셔츠가 달라붙은 등을 타고 긴 긴 밤이
지나갔지
체리
조금 이지러진 것 선한 것
나를 착하게 만드는
외국에서 온
알알이 알알이
체리 사러 간 사람을
기다렸지
착한 사람들이 나를 자꾸 슬프게 하지
착하게 기다려
정신없이 죽어간 한 주
한 그루
한 포대였지
그중에서도
한 주먹 체리
꿈속의 절망 같았지
깨끗이 먹어 치웠지
그 색깔과
그 향기와
그 모양까지 먹을 수 있었어
씨앗을 입속에서 굴리며
이 체리가 네가 먹은 체리냐
물어보곤 했지
등에 업혀 체리를 먹는 동안
이 잠이 내 잠이냐
이 꿈이 내 꿈이냐
네 꿈에서 내 꿈을 구경했지
네가 넘어지면
내가 체리를 주워왔지
너를 주워 와서 내가 다 먹었지
턴테이블 연대기
중심으로 가고 싶어요
(마흔일곱 살에는 마흔일곱 개의 귀가 생겨요)
누구에게나 자신만이 닿고 싶은 중심이란 것이 있을 테니까
(모든 노래가 다 나의 이야기 같아요)
한 번 발 디디면 빠져나올 수 없는 숨 막히는 어둠 속에서
(서른일곱 살에는 서른일곱 번의 모험을 떠나요)
어떤 힘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어요
(우리의 모험은 언제나 막다른 골목을 만나요)
곳곳에 앞서간 이들의 흔적이 가득해요
(스물일곱 살에는 스물일곱 명과 사랑을 해요)
소용돌이 속에서 몇몇은 사라지고 몇몇은 돌아왔을 테지만
(사랑은 모든 것과 이별하는 연습이에요)
툭, 툭, 끊어지는 바닥으로 추락하지 않고 우리가 이곳까지 온 것은
(열일곱 살에는 열일곱 개의 세계를 가져요)
어떤 예언을 실현하기 위해서인지도 몰라요
(세상의 모든 입구와 출구는 하나예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밖이 가까워져요
(일곱 살에는 일곱 살만 들어갈 수 있는 상상의 문이 생겨요)
아직 몇 곡을 더 넘어야 중심에 닿을 수 있어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없을 것들에 대해서요)
바늘은 언제부터인가 곡과 한 몸이 돼 마지막 노래로 넘어가고 있어요
(내가 태어나기 전에는요)
그러고 보니 우리는 누군가 켜 놓은 음악이 아니었을까요
(내가 죽는 날을 눈치 챘을 지도 몰라요)
아직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기에, 누군가는 온전히 들어야만 하는 그런 음악이 아니었을까요
(B면 계속)
여름의 일
책장 안쪽에서 우글우글 기어나오는 송충이 떼
헛것이라는 걸 알면서,
살충제를 찾아 온 서랍을 뒤진다 허둥지둥 집 안을 오간다
이럴 때 나는 진짜인가
의심하면서
이럴 때만 잠시 진짜인가
우거진 바깥
초록은 오래된 빌라를 휘감고 순식간에 창 틈을 비집고
내 목을 조르겠지
낫을 쥐고서
더 꽉 쥐고서, 이럴 때 나는 붉어진다
흐르는 피처럼 선명해진다
모두 꿈이라는 걸 알면서
눈을 뜨고 기어코
책상에 엎드려 끙끙거리던 몸을 일으키고
곁에 놓인 자두 한 알이 툭 떨어진다 거실 바닥을 구른다
주워 자세히 들여다보면
핏줄이 선명한 알맹이
한입 베어 물면
아 너무 셔, 미간을 잔뜩 찌푸린다 이를 악문다
물을 따른다
물 잔에 어린 얼굴은 울었다 웃었다 자꾸만 출렁이고
꼭 진짜 같고
눈가에 스멀거리는 송충이 같고
나를 덮친다
고요한 책장을 부순다
우글우글 알을 까는 초록
우글우글 죽는다
썩는다,
가짜는 썩지 않는다
반복과 번식
차현주
반복과 번식
깨진 왜가리를 보았지
장미축제가 시작되기 전이었어
도자기로 만든 왜가리
목과 날개가 떨어져 물에 뜨지 못했을 거야
온전한 모양이었다면 지금쯤 연못에 떠 있겠지
저기 작고 귀여운 강아지가 지나간다
작고 귀여운 강아지는 10살인데도 아주 작고 귀엽다
도자기는 쉽게 깨지고
왜가리는 도자기로 만들어졌고
그럼 물에 뜨지 못하는 건 왜가리의 탓은 아니겠지
작고 귀여운 강아지가 공장에서 태어난다 귀엽지 않거나 병든 건 부서진 왜가리고 사람은 도자기로 왜가리를 만들고 작고 귀여운 강아지도 만들고
부서진 왜가리
버리는 중이다
저것 봐, 진짜 왜가리 같다!
온전한 왜가리가 떠 있는 연못에서
사람들이 장미축제를 즐기고 있어
폼이 좀 나는 연못을 위해
도자기로 왜가리를 만들고
왜가리의 목과 날개가 깨지고
그건 매년 봄 반복된다
귀여운 왜가리를 쳐다보고
지나가는 귀여운 강아지를 본다
츠키에게는
고선경
츠키에게는
누워서 산책하는 법을 알려 주고 싶었다.
츠키와는 22세기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곳에선 짓밟힌 꽃다발과 장우산이 다르지 않아 영원한 비가 내리고, 밤은 결코 셔터를 내리지 않을 것이었는데. 모든 것이 팔팔 끓겠지. 몽상가의 심장에서 꺾은 고드름은 극지에 닿으려 하지만……
죽은 새가 식지를 않는다. 츠키가 오는 길에는 깃털이 눈발처럼 나부꼈으면 좋겠어. 츠키가 오는 길에는 그림자놀이 하는 유령들이 서성거리고. 츠키를 물끄러미 쳐다보지. 넘어지면 어쩌려고 신발을 구겨 신었대? 츠키에게는
유령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츠키는 돌멩이를 발로 차겠지만. 츠키를 위해 나는 가시를 삼킨 목구멍처럼 웃어 볼 수도 있을 텐데. 우거진 수풀 속 엉겅퀴처럼. 츠키가 츠키이기만 하다면.
꽃집 옆에 세워진 민트색 스쿠터를 훔쳐 달아나겠지. 그리고 다시는 그 꽃집에 방문하지 않을 거야.
무릎이 깨지고 허벅지가 터진 츠키. 흰 원피스 자락으로 대충 피를 닦으며 웃는 츠키. 방파제는 거품을 흘리며 녹는다. 바닷물 끓는다. 아름다운 부식의 순간들. 시끄러운, 너무도 시끄러운
몽상을 마시지. 시선은 풍경 속으로 던져둔 채.
바게트빵을 먹다가 입술을 다치는 머저리들.
누워서 산책하기엔 오늘 같은 날이 딱인데. 안 그래? 잠시 들어갈 만한 실내를 찾다 보면……
츠키에게는 츠키가 있고
츠키가 오는 길에는 츠키가 없다.
츠키는 악착같이 나를 불러 세우지. 어떻게 하면 너를 상상할 수 있는 것이냐며 울고.
세계의 끝에 매달린 모든 고드름을 단숨에 부러트린다.
아스키 연애
최필립
누나 우리 같이 러브라이브 보기로 한 거 아니에요?
우리의 사랑이 춤을 춰
살아서 숨을 쉬어
코끼리가 야구모자를 눌러 쓴다
방망이를 세게 그러쥔다
귀가 짓눌려서 아파 보여요
“쇼윈도를 깨부수겠어…….”
다짐하는 그
전주에 갔고
우린 동물원에 있었지
풍선이 터질 것처럼 맑았어
공주님 놀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지
빈티지 주크박스에서
시인 남친
시신 시절에 부른 노래 나온다
무당이 유골함을 탈탈 턴다
시킨 대로 물푸레나무 두드렸다
두 발의 총알이 관통했다
바이킹 휘둘리는 마음대로
도끼가 파도를 갈랐다
부실 공사 인간 휘말렸다
미쳤나 봐 사랑한다는 생각에
내 몸에 666을 새긴다니
누나는 일확천금을 노린단다
한편에서 마작판이 벌어졌고
여기는 아케이드로 읽혔는데
불확실한 구도 속에서
코끼리의 무대는
가학적인 끝맺음
핑크 벨벳 떨리며 흐른다
땀방울처럼 눅진하게
나는야 동경 샌드블라스터!
(라고 거리에서 외치고 싶다…….)
유리 공예를 하듯
널 섬세하게 깎아줄게
누나가 한때는 톱질 좀 했단다
원 데이 클래스가 투데이도 됐단다
아가야, 한 바퀴로 충분하지 않아
믿어봐, 무지개에도 끝이 있다고
달리는 차를 멈추지 말아 봐
맞은편에 오는 트럭은 멈춰봐
네일을 하고 싶었어
물든 손톱으로 친구를 할퀴고
상처가 예쁘니까 괜찮다고 하고 싶었어
우리의 영혼을 망친 죄로
더는 시를 쓰지 않는다고 거짓말했는데
이제 나는 춤추는 소녀
삐리링 변신하는 요술공주
비눗방울 나풀나풀
풀피리 필릴리립
교환원이 바삐 손가락을 놀린다
장전한 물총처럼 탄력 있게
연인들의 대화가 한데 혼선된다
그렇지만 미묘한 이데올로기
목걸이와 야생이 없는 길섶에서
선택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세상에는 어떤 차라리가 있어 누나?
그러니까 음
내가 그날 클럽에 가도 돼?
그니까 흠
내가 그날 엉아들이랑 술 마셔도 돼?
누나랑 친구야
누나랑 같은 사람이야
누나처럼 질투도 해
누나처럼 사랑도 해
사장인데 모래사장이야
서커스에서
코끼리가 한 바퀴만 돌지 않는 것처럼
삐에로 엉아가 갈고리로 거시기를 만졌던 것처럼
마미가 죽은 내 불알 만지는 기분을 알아?
시간은 고간 사이로 흐를 거야
모션 아이는 생체를 스캔하겠지
어떤 장기가 값어치 있는지
하지만 나중에 우리 늙으면 누나
강변에 집 짓고 같이 살자
해일에 휩쓸리면 어쩔 수 없는 거지
트럭을 손수건으로 막아서 뭐 해
그니까
마작판은 언제 끝나냐고
동물원은 언제 폭발하냐고
누나 셀카는 언제 보내주냐고
아 그니까 다 됐고 우리
빠삐코 하나씩 들고
러브라이브 마지막 회 언제 보냐고
횡단보도 앞에서
문보영
애인과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나 방금 영감이 떠올랐어.” 나는 옆에 있는 안경점을 보며 말했다. “뭔데?” 애인이 물었다. “세상의 모든 가방이 트렁크인 거야. 다른 형태는 없어. 지난번에 여기 같이 서 있을 때, 저 안경원에 들어가던 사람 있잖아. 안경점 밖에 캐리어를 덩그러니 두고 들어갔던 거 기억나? 갑자기 그게 떠올랐어.” “그 트렁크가 우리 것도 아닌데 괜히 우리가 불안했잖아.” 애인은 웃으며 화답했다. “방금 머릿속에서 쓴 시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트렁크를 들고 다녀. 출퇴근길에도 트렁크를 들고 다니고, 등산을 갈 때도, 수영장에 갈 때도,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도 트렁크를 들고 다녀. 그 세계에는 주머니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짐을 들더라도 트렁크가 필요해.” “오…….” 신호등 불빛은 여전히 빨간 불이었다. 우리가 헤어지는 곳은 늘 이 앞이다. 나는 애인을 이곳까지 바래다주며, 그가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손을 흔든다. 헤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관찰할 거리가 많았고, 그 덕에 나는 기괴한 시도 쓸 수 있었다. “아, 결혼식 갈 때랑 장례식장 갈 때도 트렁크를 들고 가야 돼. 검은색이어야 하고. 그건 기본이지.” 신호등 불빛이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왜 만드는 거야?” 애인이 물었다. “뭐긴 뭐야,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지.” 나는 말하며 신호등을 가리켰다. 애인은 다음 데이트도 기대된다고 말하며 미소 짓고는 꼬리 달린 동물처럼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오늘도 애인을 보내주었다.
―《문장 웹진》 202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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