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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7.30. 오순절 후 아홉 번째 주일
예배로 부름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 11:6)
예배기원
믿는 자들의 피난처가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지난 한 주간도 크신 능력으로 저희들을 붙들어 주시고, 진리 가운데 인도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던 저희들이 오늘은 거룩한 주일을 맞이하여 성전에 모였습니다. 넓고 안전한 날개를 펴 주셔서 오늘 주님 안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안식과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옵소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 심령이 기름진 골수를 먹음과 같이 참된 만족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주 믿는 형제들(221장)/ 나 행한 것 죄뿐이니(274장)/ 나그네와 같은 내가(376장)/ 전능하신 주 하나님(377장)/자비하신 예수여(395장)/ 이 죄인을 완전케 하시옵고(426장)
고백의기도
죄인을 향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저희들을 의롭다 여기시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이 세상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의 삶의 모습에는 의로움이 나타나지 않았으며, 저희들의 언행심사는 하나님의 자녀답지 못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에 세월이 흐를수록 저희들의 마음은 완고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이 만든 유전과 전통을 따라 살고자 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새롭게 하여 성령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내 경험을 앞세워 잘못된 관행을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는 열정이 식어지고, 베푸신 은총에 대해서는 감사가 줄어들었습니다. 하나님, 저희들 심령이 점점 완악해져 감을 용서해 주옵소서. 회개하는 저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다시 한 번 저희들의 영혼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고백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
사함의확신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제목: 가난 앞에 두신 희망
본문: 잠언 29:7, 13-14
☞ 마음 문을 열며
가난은 어디서 시작됐을까요? 가난이 오늘날만의 사회 문제는 아닙니다. 역사적으로도 끊임없이 가난에 대한 연구가 진행돼 왔고, 성경에도 가난에 관한 이야기는 지속적으로 제기돼 왔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땅에 가난이 생긴 것일까요? 가난의 원인은 무엇일까요?
1961년, 가난이 어디서부터 출발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연구가 시작됐습니다. 오스카 루이스라는 인류학자가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물로 나온 책이 《산체스네 아이들》입니다.
이 책은 오스카 루이스 부부가 멕시코시티의 빈민가 베씬다드 까사그란데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4년에 걸쳐 지켜보며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빈곤 문화’라는 개념을 주장합니다. 빈곤한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연구해 보니 ‘빈곤할 수밖에 없는 문화’가 있더라는 주장입니다.
저자는 빈곤 문화의 속성을 여러 면으로 소개합니다. 먼저, 빈곤하게 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니 거기에는 항상 ‘폭력’이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역사의식’도 결여돼 있었습니다.
‘미래에 대한 계획’도 부족해서 어떻게 미래를 준비해야 할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고 합니다. ‘낮은 동기 부여’로 인해 무엇을 하려는 의지도 찾기 힘들고, 취직은 했지만 ‘낮은 직업윤리 의식’으로 인해 일을 제대로 수행 하지 못하고 그만 두는 악순환도 계속됐다고 언급합니다.
게다가 빈민가의 대다수가 약물이나 알코올에 중독된 경우가 많았고, 혼전 동거를 하는 등 인생 여정이 순탄치 않고 수없이 얽히고설킨 경우가 많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해, 가난은 부정적인 삶의 습관이 수없이 반복되고 지속되면서 나타난 결과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되는 연구가 한국에서 진행된 적이 있습니다. 동국대학교사회학과에 재직 중이던 조은 교수가 1986년에 유니세프의 후원을 받아, 재개발이 예정된 철거촌 주민들을 약 2년에 걸쳐 연구한 후 발표한 보고서입니다.
조은 교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해당 지역 주민들을 따라다니며 장장 25년 동안이나 가난에 대해 연구했고, 《사당동 더하기 25》라는 책으로 그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33년이 지난 2020년에는 〈사당동 더하기 33〉이라는 다큐가 새롭게 발표되기도 했습니다.
이 책은 앞서 말씀드린 《산체스네 아이들》과는 다른 입장을 취합니다. 가난은 가난하게 된 사람들의 부정적인 문화나 습관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가난으로부터 탈출하고자 노력하려는 의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난 자체가 그들을 계속 묶고 있더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즉 가난은 ‘구조’가 만들어 낸 결과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인 희생자’라는 내용입니다. 알코올중독이나 낮은 동기 부여와 같이 빈민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도 빈곤 문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상황을 견디다 못해 나타나게 된 현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두 입장 중 무엇이 옳은 주장일까요? 아마 사람마다 다른 입장과 생각이 있을 것입니다. 가난은 잘못 살아온 습관과 문화로 인해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테고, 아무리 노력하고 똑똑한 사람이라도 가난이라는 구조적인 문제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먼저 어린 시절부터 가난하게 함께 살았던 기억이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주변에는 삶의 어두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청년 시절에 잘 살려고 다짐하며 노력도 해 보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가난이란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가난의 문제를 마침내 극복하고, 원하는 곳에서 성공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친구들도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상황을 지켜보면서 어떤 주장이 맞는지 판단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이 두 요소가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연결돼 있다는 해석이 적절한 주장이 아닐지 생각해 봅니다.
1.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할 때 가난이 사라질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을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하나님께서는 왜 이 땅에 가난을 허락하셨을까요? 과연 가난도 하나님의 뜻일까요?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로 부자가 되게 하고, 이 땅에서 창대케 하며, 민족을 이끄는 자로 세워 가는 일이 그를 부르신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노예 생활하던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 내실 때도 하나님은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시고, 그 사이에 생명의 강들이 흘러가게 하셨으며, 실과들이 열리는 나무들을 세우신 뒤에 그곳에 아담을 두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딱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제외하고 모든 열매를 먹고 누리게 하시며 온전한 자유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와까지 창조해 곁에 두시며 돕는 배필로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고 안전하며 부족함 없는 상태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인간이 가난하지 않은 상태로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가난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창세기에 따르면, 가난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뒤 척박한 땅에서 일하면서부터 출발했으리라고 추정됩니다. 신명기 15장에는 가난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구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 15:4-5).
이 말씀 가운데 가난해지지 않는 방법이 나타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준행하면 가난한 자가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곳에 가난이 없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언입니다.
나아가 이런 말씀도 등장합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 15:11).
앞서 이 땅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해 주겠다고 하셨는데, 11절에 와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땅에서 그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내 말을 청종하는 자가 없을 것이다. 내 명령을 따라 온전하게 사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엄중한 진단이자 안타까운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때 하나님께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가난을 이야기하신 게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하나님과 멀어지고 죄를 짓는 사람이고, 부자는 하나님과 연합하고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공동체적인 차원’의 말씀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살아간다면 그 공동체 안에 가난한 자가 없게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가난한 자가 있다는 것은 한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죄악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2. 하나님은 가난을 해결하기 위해 ‘희년’과 ‘안식년’ 제도를 제정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관점으로 하나님께서는 가난을 다루시는 동시에 해결하는 방식을 취하십니다. 먼저, 가난을 ‘구조적인 문제’로 다루십니다. 그 첫 번째 단서로 말씀 속에 ‘희년’ 제도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희년을 계획하시며 가난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바라보고 다루십니다. 50년 동안 어떤 사람은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은 가난해집니다. 어떤 이는 빚쟁이가 되고, 어떤 이는 더 많은 재산을 축적합니다.
그러나 50년이 지나면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본래 주어진 분깃으로 돌아가며,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행할 때에야 비로소 이 땅에 가난한 자가 없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사실 이 명령은 매우 개혁적인 명령이자 가난한 이들이 없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극단적인 처방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잘 지켜졌습니까? 유대 역사를 보면, 희년 제도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구도 50년이 지났을 때 자신의 재산을 내어놓으며 원점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죄성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또 다른 방법을 취하셔서 가난을 구조적인 차원에서 해결하고자 하셨습니다. 매 일곱 번째 해를 ‘안식년’으로 제정하시고, 그때 행할 일을 말씀하십니다.
“일곱째 해에는 갈지 말고 묵혀두어서 네 백성의 가난한 자들이 먹게 하라 그 남은 것은 들짐승이 먹으리라 네 포도원과 감람원도 그리할지니라”(출 23:11).
하나님께서는 안식년을 정하시며 가난한 사람이 땅에서 나는 식량을 먹을 수 있도록 명령하셨습니다. 또한 레위기 23장에서는 매년 추수 때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모퉁이까지 다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말고 그것을 가난한 자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23:22).
매년 추수 때 밭모퉁이에 있는 곡물을 베지 말라고 명령하시며, 혹시나 떨어진 곡물이 있거든 줍지 말라고 명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남겨 놓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고 하시며 이와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욕심과 욕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기에, 희년과 안식년을 제정하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3. 하나님은 구조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믿음’의 차원에서도 가난의 문제를 다루십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신명기 15장의 말씀처럼 모두가 복을 받고, 그 가운데 가난한 자가 없게 되리라는 말씀이 성취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말씀을 준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항상 인간적인 욕망과 욕구가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가난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겠습니까?
구조적인 차원에서 가난에 접근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지만,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서인지 하나님께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돌아보라.” 구조적인 접근뿐만 아니라 ‘개개인 스스로가’ 가난한 자들을 돌볼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신 것입니다. 잠언을 읽어보면 ‘가난한 자’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을 확인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깊이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중 중요한 몇 구절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먼저 잠언 14:31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비슷한 말씀이 17:5에도 나옵니다.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하지 못할 자니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사람을 향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라고 엄히 말씀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궁핍한 사람을 불쌍하게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려운 사람을 돌아보는 사람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을 학대하거나 조롱하지 않고 도와야 하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말씀에 담겨 있습니다.“가난한 자와 포학한 자가 섞여 살거니와 여호와께서는 그 모두의 눈에 빛을 주시느니라 왕이 가난한 자를 성실히 신원하면 그의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잠 29:13-14).
성경에는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자, 가난한 자들을 신원하는 자들이 복을 받는다는 약속이 여러 번 나옵니다. 본문도 같은 맥락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신원하면 왕위가 영원하고 견고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지도력을 지속시켜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시편 112:1-3에도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시 112:1-3).
공의를 행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사람의 집에 부와 재물이 있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십니다. 이어지는 시편 112:9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나눠 준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음은 잠언 19:17입니다.“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
4.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합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면 하나님께 꾸어 드리는 것이요, 그분 나라의 영원히 썩지 않는 바구니에 담아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 받게 되는 복을 쌓는 것이요, 더불어 이 땅에서도 받게 되는 복을 쌓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선행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가난한 자들, 그들을 돌보는 일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들을 돕는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복을 주시기로 약속하셨다”라고 말입니다.
또한 시편 35편에서 다윗은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과 같은 분이 누굽니까? 주님은 약한 사람을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며, 가난한 사람과 억압을 받는 사람을 약탈하는 자들에게서 건지십니다. 이것은 나의 뼈 속에서 나오는 고백입니다”(시35:10,새번역).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바라보았더니 약한 자를 강한 자에게서 건지시며, 가난하고 억압받는 자를 약탈하는 자에게서 건지시는 분이라고 노래합니다. 즉 우리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의 편이라는 증언입니다.
다윗은 이 고백이 뼛속 깊이에서 나온 자신의 고백이라고 노래합니다. 한편 마태복음에서 한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영생 얻는 방법을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2007년에 출판돼 아직도 스테디셀러로 남아 있는 장 지글러의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이 있습니다. UN 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이었던 장 지글러는 이 책에서 기아의 실태와 원인을 대화 형식으로 풀어갑니다.
전 세계 인구가 먹고도 남을 만큼의 풍족한 식량이 생산되는데도 여전히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불합리한 현실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도, 저자는 끝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태도를 일관합니다. 인류가 연대와 협력을 통해 이 불합리한 현실과 가난의 문제를 타개하고 해결해 나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는 ‘인간’만이 타인의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임을 역설하면서, 바로 그것이 희망의 불씨임을 우리에게 전해 줍니다. 로마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강조한 바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롬 12:15-16).
이 시대에 우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이 시대에 낮은 데 처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물질의 가난뿐만 아니라 영혼의 가난, 마음의 결핍을 호소하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그들 곁으로 찾아가 함께 울고, 함께 낮은 데 처하며, 위로를 빌라는 주님의 음성입니다.
인간만이 다른 이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인 까닭입니다. 이미 우리 주위에 가난한 사람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돌아봄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부족함 없이 함께 잘 살기 위해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나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신 게 아니라, 내 옆의 사람도, 나와는 거리가 먼 그 사람도, 또 부자도, 가난한 자도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가난한 자들을 도와하늘의 복을 쌓는 충실한 청지기를 하나님께서 찾고 계십니다.
바로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요, 그분의 마음에 공명된 자일 것입니다. 나아가 가난한 이를 돕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가난 앞에 두신 ‘희망’일 것입니다. 바로 그 사람이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그렇게 하나님의 크고 영화로운 일을 감당하는 자들이 늘어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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