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중학교 졸업반 때 담임이셨던 정윤진 선생님을 회고하기 위해서 관련 사진자료나 회상기(回想記) 같은걸 모아 선생님을 추모하는 문집을 만든다는 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을까 하고 서울 동기대표들의 문의가 있었습니다. 이럴 때 "고(故) 김진복 형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졸업 후 사회에 나와서도 필명을 날린 서정돈 총장, 김대환 변호사도 있고. . .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의 유교사상을 실생활에서도 약간 이나마 감지(感知)할 수 있었던 마지막 세대였던 내가 어릴 적 코흘리개 시절부터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을 기억함에 있어서 모든 선생님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담임을 맡아서 가르쳐주셨던 선생님들의 존함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한 분도 빠짐없이 지금까지 기억을 하고 있답니다 지금은 평준화니 뭐니 해서 없어진 중학교 때 담임을 맡으셨던 세분 선생님 장재택, 김옥진, 정윤진선생님들의 존함들도 물론 말할 필요도 없고요.
이왕 말이 났으니 하는 얘기입니다. 교육자도 아닌 자들이 학교 평준화가 어떻고 하며 명문학교를 죄다 없앴는데 이제 몇십 년 지나고 보니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요즘 아이들처럼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학교에서 시간을 다 보내지는 않았지요. 그리고 국가 간의 경쟁에 이기려면 어느 나라 건 엘리트를 양성해야하기 때문에 명문학교의 필요성을 느껴서 발버둥을 치고 있는 판국인데. . . 또한 기억력은 머리가 좋고 나쁜 것하고는 상관없는 게 아닐까 하는 게 저의 지론임입니다. 적어도 지능지수와 비례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름은 평생 단 한번이나 서너 번만 만나고 들었던 기억이 영원히 기억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름은 불과 몇 년 전에 꽤나 오랫동안 같은 생활권에 살았으면서도 기억나지 않는 게 있을뿐더러 그 명확한 증거로는 내 집안의 형 한 분도 우리 동문인데(35회) 어릴 때부터도 공부를 잘 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날 정도였지요. 저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공부를 잘 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1983년에 독일에서 형님과 십 수년만에 만났을때 40여 년 전 옛날 어릴 때 살던 동네 이야기를 하면서 동네의 형님 친구들 이름들을 제가 늘어놓았더니 "나는 들으니까 기억은 나는데 하나도 기억에 없다."고 하시더군요. 얼마나 충격을 받았으면 그 후 내가 한국에 들렸을 때 제 형수가 하시던 말씀이 기억에 남습니다. "도련님, 형님이 그러시던데 어찌 그 오래된 일들을 모두 기억을 다 하고 있는지 기가 막힐 정도였다고 하시던데요"
3학년 때 담임 이셨던 정윤진 선생님을 회고할까 합니다.
회상기는 정확하게 선생님의 참 모습을 있는 그대로 옮길 수 있어야 할텐데 솔직히 말씀드려 어떤 일련의 얘기를 할 자신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한편 한편의 순간들이 끊어진 활동사진의 필름처럼 희미하게 생각이 날 뿐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그대로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아시다 시피 우리 동기들은(42회) 수성 천변 가 교사에서 입학한 마지막 기수이었답니다. 그러니 가 교사와 대봉동 본 교사 두 곳에서 공부를 해본 기수는 40, 41, 42 회뿐이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1학년 때 본교로 이사를 해 들어간 것이지요. 그러니 43회는 본 교사에서 시험보고 입학식을 했었고요.
제가 3학년이 될 때는 은근히 속으로 이길우 선생님 반에 배정이 되길 바랬는데(1학년 때도 2학년 때도 그 바램은 이루어지지 않아서) 학년주임 이셨던 이길우 선생님은 1반 담임이셨고 나는 9반으로 배정이 되어서 약간 실망을 했던 건 사실입니다. 제가 이길우 선생님 반에 가고싶었던 이유는 언젠가 사랑방에 입학시험 수험번호를 받던 날 이야기를 올린 게 있으니 왜 그랬던지 잘 아실 테지요?(이길우 선생님 회상기가 이곳 어디에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9반으로 갔던 것 또한 커다란 행운이었다는 걸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삼 학년이 되고 나서도 공부하는데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놀기에만 열심이었답니다. 지금 가슴에다 손을 얹고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실컷 놀면서 건성으로 학교엘 다니다가 3학년 2학기가 되어서야 몇 달간 열심히 공부하여 상급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자랑스러운 건 평생 단 한번도 낙방하거나 2차 시험을 칠 필요가 없었으니 상당한 행운도 따랐던 모양입니다
정윤진 선생님은 원체 원만하신 분이라 특별히 기억에 두드러게 남는 게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친구들도 모범생보다야 악동(惡童)들이 기억에 더 선명하게 남듯이. . .선생님에 대한 추억이라야 편편히 떠오르는 몇 몇 장면 들 일뿐입니다. 한마디로 엄하고 무서우신 선생님이 아니라 온화하고 자상하신 어버이 같은 선생님이었습니다. 언제나 조용하게 싱긋이 웃으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때야 전쟁이 끝난지도 몇 년 안되고 어렵던 시절이라 선생님들이 대부분 다 그러셨지만 우리 담임선생님은 거의 언제나 고동 색갈의 두터운 양복을 입고 다니신 기억이 아직도 선명합니다. 참 검소하신 분이셨지요. 그 당시 우리학교 선생님들 가운데도 멋진 양복을 자주 갈아입으시던 멋을 부리는 선생님들이 꽤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선 지금 기억으론 단 한번도 당시 유행했던 '포마드' 머릿기름을 바르신 걸 본 기억조차도 없었답니다.
선생님은 유별난 특징이 하나 있으셨는데 아마 결벽성이 무척 강하셨던지 수업시간에 칠판에다 분필로 글을 쓰시고는 언제나 입으로 손에 묻은 분필가루를 후후 부시던 습관이 특이했었지요. 아마 선생님께 수업을 받아본 벗들은 지금도 모두 다 틀림없이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옛날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슴아픈 일이 한가지가 있는데 우리 학우들 가운데도 그런 벗들도 있었고 선생님께서도 영양 상태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마른버짐이 얼굴에 나타나신 것이 또 기억에 남아 있답니다.
선생님이 우리 반에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건 세 장면이 연상되는데 첫 번째는 우리가 3학년이 되고 아마 첫 홈룸시간 이었습니다. 급훈을 정하자고 하여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우리끼리 의논을 하다가 결론을 얻지 못하고 선생님께 여쭤 보는 게 어떠냐고 중론이 모아졌는데 선생님께서 시종일관 옆에 계시면서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우리들의 토의과정을 쭉 경청하시다가 우리의 중론이 모아지자 비로소 한 말씀하시고 이것이면 어떻겠느냐고 물으신 것 같았는데 "모두 좋습니다" 고 동의를 하여 급훈으로 채택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급훈은 나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안동에서 개최한 우리동기 교수들 모임인 경연 포럼에서 안동병원 강보영 이사장이 하던 얘기를 강수균 교수가 옮긴걸 보고 다시 기억이 나더군요. "남을 믿고 남으로부터 믿음을 받는 사람이 되자." 얘 바로 그것입니다. 정 선생님다운 말씀이지요. 그러고 보니 우리 반 급훈이 곧 선생님의 말씀이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습니다
두 번째 선생님에 대한 기억. 나는 3 학년때 학교 밴드부에서 활동을 했는데 월요일아침 조회를 할 때는 언제나 교가를 연주했지요. 그 날도 아침 조회를 하고 수업 첫 시간이 국어 시간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수업을 하러 우리 반에 오셨는데 아침조회시간에 떠들었다고 전교생이 운동장에서 체육선생님(이준상 선생님)으로부터 엎드려뻗쳐 기합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교실에는 당번 한 명과 숙직실 창고에 악기를 넣어 놓는답시고 뺑소니쳐서 교실로 들어온 나와 두 명만이 교실에 있었답니다. 사실 나는 숙직실에서 전교생 기합이 끝날 때까지 어정거리다가 교실로 왔어야 했는데 너무 성급하게 교실로 돌아와서 혹시나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지나 않을까 마음을 조리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싱긋이 웃으시더니 "그 넘들 아직도 벌받고 있나?" 하시더니 더 이상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칠판에다 그 날 수업 준비를 하시는 것이었지요.
세 번째 기억은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인데 그 날도 <홈룸>시간이었답니다 졸업도 얼마 남지 않아 다른 반 선생님들은 대부분 교무실에 계시고 학생들끼리 쑥덕거리고 놀다시피 했는데 우리 반에서는 그 날도 선생님께서 학급에 오셔서 참관을 하셨답니다. 그 날 우리 "졸업기념 문집을 발간하면 어떻겠느냐"는 발의는 실장이었던 김진복형이 하고 의논 끝에 편집위원을 선발하고 문집을 내기로 가결이 되었지요. 그 날 우리가 토의를 하고 있는 동안 선생님께서는 무슨 책이었던 지는 모르겠으나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책을 읽으시고 계셨던걸 기억합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우리끼리 그냥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셨다면 과연 우리끼리도 그런 의사진행을 하고 그런 결의(문집발간)를 했을지 의문입니다. 감히 저의 소견으로는 어림도 없었다는 얘기를 하고 싶네요.
이제 돌이켜 회고컨대 우리 동기생들 아홉 학급 중에 졸업기념 문집을 발간한 학급은 우리 반이 유일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구송 발간을 축하함" 이라고 선생님께서 쓰신 축하의 말씀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그냥 건성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고 진정 우리에게 일러 보내고 싶어하신 게 보인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보이지만 이제 세월이 흐르고 보니 얼마나 중요하고 요긴한 것이었던지 알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십대 중반에 외국으로 나와서 오늘날까지 외국에서 살고있기 때문에 한국의 사정은 전혀 모르고 살고있으며 선생님께서는 자제 분들도 잘 키우신 걸로 들어서 압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우리동기생들도 누구 못지 않게 사회의 동량(棟樑)들로서 일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란 걸 알겠습니다
본인은 不德하여 졸업 이후에 한번도 선생님을 찾아뵙지도 못하고 이제야 선생님이 오래 전에 소천(所天)하셨다는 얘기만 전해 들었습니다
선생님의 은혜에 감읍(憾泣)하오며,. 삼가 선생님의 명복을 빌면서 졸필을 마칠까 합니다
첫댓글읽고 또 읽고...가슴속에서 뭉글한 그리움이 솟아 나는군요. 형이 말씀하시니 아 그랬셨지 맞어 하는 소리가 연방 나오는군요. 옛 기억을 되살려 준신 형에게 감사드리며 동문들께서도 선생님이 남겨주신 조금만한 기억의 파편이라도 있으면 여기에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읽고 또 읽고...가슴속에서 뭉글한 그리움이 솟아 나는군요. 형이 말씀하시니 아 그랬셨지 맞어 하는 소리가 연방 나오는군요. 옛 기억을 되살려 준신 형에게 감사드리며 동문들께서도 선생님이 남겨주신 조금만한 기억의 파편이라도 있으면 여기에 남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