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수원한민교회 서재경 목사님의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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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선과 우상숭배와 장사꾼의 마당이 되어버린 교회로부터 우리 자신을 스스로 해방하기
김선주, 『기독교인은 왜 악을 선택하는가』(삼인, 2023)
바깥으로 나가서 보기
가장 가까이 있지만, 아무리 눈이 밝은 사람도 직접 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게 무엇일까? 바로 자기 얼굴이다. 나는 내 얼굴을 직면할 수 없다. 밖을 향하여 있는 내 눈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얼굴을 본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티끌은 밝히 보지만, 내 눈에 있는 들보는 도무지 보지 못한다.
내 얼굴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내 얼굴을 직면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내 얼굴을 바깥에 있는 거울에 비추어 보거나 다른 사람들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를 제대로 직시하기 위해서는 교회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 바깥에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떠나오니 더 잘 보인다.”(209쪽) 저자의 고백이다. 김선주 목사는 바깥으로 나간 목사다. 그는 마흔을 넘긴 늦은 나이에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다. 그가 목사가 된 것은 집안의 첫 열매라 하나님께 드렸으니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기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세상의 변혁에 대한 기대가 꺾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와 절망에 부닥쳤을 때 아렌트를 만나고, 인간을 바꾸는 길은 종교에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목사가 된 그는 구도자의 종교가 아니라 제도화된 상업 종교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교단의 부조리와 교회의 비본질적인 모습, 독선과 탐욕에 찌든 목사들, 좀비처럼 맹종하는 교인들을 보며 그는 주저앉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바깥으로 나가기로 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교단을 스스로 탈출했다. 그는 이 ‘탈출’을 ‘해방’이라고 말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떠난 것처럼, 세례자 요한이 광야로 떠난 것처럼 말이다. 그는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서 스스로 자신을 해방했다. 그의 해방은 진짜 목사를 향한 탈출이며 예수의 교회를 향한 해방이다. 이 책에 실린 60꼭지의 글들은 바로 그 탈출/해방의 여정과 바깥에서 성찰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바깥으로 나가서 본 교회의 모습은 어떠할까?
아집과 독선을 떠나서
일찍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약속의 땅을 향하여 떠났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며 그의 땅과 고향과 아버지의 집에서 떠나라고 말씀하셨다. 내 땅과 내 고향과 내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나의 출신과 나의 혈통에 주저앉지 말라는 말 아닌가? 내 생각과 내 이념과 내 교리를 버리라는 말 아닌가? 그렇다. 아브라함의 소명은 아집과 독선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을 만들려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목표는 더없이 분명했다.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려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그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지금 어떠한가? 불행하게도 아브라함이 버리고 떠났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 버리지 않았는가? 자기들의 땅만이 거룩하고 자기들의 혈통만이 선택받은 거룩한 민족이라는 지독한 아집과 독선에 빠지고 만 것이다.
유대인들만이 아니라 기독교인들도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 바울이 말한 대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것은 ‘육신의 자녀’가 아니라 ‘약속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하나님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의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기독교인들 역시 지독히 폐쇄적인 집단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인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과 세계를 율법적으로 판단한다. 내 신앙만이 정당하고 올바르다는 독선에 빠진 것이다.
저자는 자기들만 진리를 알고 있다는 “자기만의 인식체계에 갇힐 때 인간은 악마가 되고 만다.”(62쪽)고 경고한다. 독선에 빠진 종교적 신념은 다른 사람들과 다른 종교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고 폭력을 선동하기에 이르고 만다. 기독교가 지배했던 중세에 기독교의 이름으로 벌어진 마녀사냥과 학살과 전쟁은 얼마나 끔찍했는가.
아집과 독선으로부터 탈출했던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부르는 기독교인들이, 유대 종교의 배타적 혐오로 박해와 차별을 받았던 기독교인들이, 또다시 더 지독한 아집과 독선에 빠진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기독교인들이 생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는 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생각하고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으로 용서받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는 대속론과 칭의론은 기독교인들에게 ‘손쉬운 구원의식’을 주었다. 쉽고 분명한 정답에 ‘아멘’으로 대답했는데, 무엇을 더 묻고 따진다는 말인가? 아멘만을 강요하는 손쉬운 구원의 확신은 질문과 성찰을 빼앗아 버렸다.
따라서 아집과 독선으로부터 탈출하려면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자신과 세상을 깊이 성찰하고 사유할 수 있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유하지 않는 믿음은 죄악이다. 다른 사람들과 공감하는 능력도 되찾아야 한다. 무엇보다 성서 해석의 독점을 경계하고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종교 권력이 해석을 독점하려 할 때는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할 때이기 때문이다.
권력을 우상화하는 종교
출애굽은 구약성서의 중심이 되는 사건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노예로 살았던 히브리 사람들은 모세를 따라 광야로 탈출했다. 히브리 사람들이 탈출한 이집트는 어떤 나라인가? 종교적으로 보면, 이집트는 권력을 우상화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집트의 종교는 파라오의 권력을 신성한 권력으로 만들었다. 성대한 제의를 통해 이집트의 수많은 신 중 가장 으뜸이 되는 태양신의 대리자로 등극한 파라오는 신의 반열에 올라섰다. 파라오의 권력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이 되었다. 그리고 이집트 종교는 파라오의 권력을 지지하고 강화하는 이집트의 충견 역할을 하게 되었다. 파라오의 종교는 권력을 신화화하여 우상화하는 종교였다. 출애굽은 파라오의 우상 종교를 부정하고 탈출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기독교인들, 특히 보수적인 교인들은 정치와 종교가 무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교회에 다니는 정치인을 뽑는 것이 사회를 복음화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선거 때마다 종교 문제를 전략적으로 이용한다. 목사들은 노골적으로 기독교인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에겐 적지 않은 기독교인 대통령이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과연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그들의 정치에는 복음도, 기독교적 가치도 없었다. 특히 20대 대선에서는 보수적인 기독교와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던 사이비 이단들에다가 난데없는 법사들까지 끼어들어 야합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가짜 뉴스와 확증편향의 선동이 난무했다. 다른 종교에 대해 극히 배타적이던 보수계 목사들이 어떻게 한심한 주술과 풍수가 횡행하는 데도 그토록 잠잠할 수 있었을까? 어쩌면 이미 이들에게 신앙이란 이기적 탐욕을 이루어 주는 주술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에서 저자는 “검사와 목사와 법사가 벌이는 마법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115쪽)고 개탄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정치와 종교가 야합해서 벌이는 원시적 주술과 마법에 넘어가는 것일까? 교회 안에서 부자(父子) 세습, 공금 유용, 성 추문 같은 일들이 일어나도 그 교회에 사람이 끊이지 않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저자는 그 원인을 교회의 무속화 경향에서 찾는다. 합리적 사유보다 감각적 초월성에 경도된 것이 무속화의 특징이다. 무당은 작두만 잘 타면 되는 것이다. 결국, 합리적 사유를 가로막을 때 종교는 마약이 되고 만다.
장사꾼의 마당이 된 성전
복음서들은 모두 예수의 성전 숙청 사건을 이야기한다. 공관복음서는 예수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성전을 숙청한 사건을 복음서 후반부에 둔 반면, 요한복음서는 초반에 이 사건을 보도한다. 그런데 예수가 성전을 숙청한 이유는 무엇일까? 성전이 그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성전이 그 순수함을 잃고 더러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본질을 잃어버린 성전은 무엇이 되었을까?
예수는 성전을 숙청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요한복음서) “너희는 그곳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다.”(공관복음서) 무슨 말인가? 예루살렘 성전이 장사꾼의 마당이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 뜰은 속죄 제물을 사고팔며 돈을 바꾸어주는 완벽한 시장 마당이 되어 있었다. 성전의 종교 상품을 독점한 성전 지도자들은 장사꾼을 넘어서 가난한 사람들을 약탈하는 강도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회는 어떠한가? 오늘 교회는 저 예루살렘 성전의 상술을 계승하여 한층 더 세련되게 발전시켰다. 대부분의 대형 교회는 주일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을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부른다. 예수는 성전을 허물고 교회를 세웠는데, 기독교는 다시 스스로 성전이 되었다. 성전에서는 모든 것이 상품화되었다. 기도를 특화해서 종교 상품으로 팔고(147쪽), 전도는 자본주의 시장 쟁탈전이 되어버렸다(153쪽). 칭의론과 구원론이 시장 패러다임과 함께 교회 안에 안착하면서, 교회가 시장 고객들로 채워지게 되었다.(154쪽) 교인들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소비하는 고객이 되어버렸다. 백화점에서 왕 같은 대접을 받는 VIP 소비자가 있듯이, 교회에도 왕처럼 대접받는 소비자가 있다. 거액을 투자한 대주주도 있다. 목사는 스스로 CEO라고 당당히 말하며 효율적인 교회 운영과 부가가치 창출에 몰두한다. 결국, 교회는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 지배하는 곳이 되었다. 교인들은 하나님 자녀들이 모이는 공동체가 아니라 교회 마트에 간다.(152쪽)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이렇게 독선과 우상숭배와 장사꾼의 마당이 되어버린 교회에서 스스로 자신을 해방했다. 바깥으로 나갔다. 부조리한 모습이 보일 때 떠나기도 하지만 떠나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는 떠났더니 더 잘 보인다고 말한다. 그런데 교회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교회를 버리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 밖에서 교회를 사유하는 것이다. 본질을 벗어난 교회와 본질적인 교회를 바깥에서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예수 없는 교회로부터 예수의 교회로의 탈출이요 해방이다. 저자는 우리에게도 이 탈출과 해방의 길벗이 되기를 요청한다.
저자는 무엇보다 문자를 읽는 행위로서의 독서가 아니라 해석학적 성서 읽기를 주목한다. 교회에서 해석학적 성서 읽기가 안 되기 때문에 교인들이 거짓과 선동에 놀아나고 세상의 폭력에 동조하여 진실을 압제하는 데 앞장서게 된다. 교회가 성서를 해석하지 않고 신봉하기 때문에 제국의 폭력과 예수의 가르침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다.(229쪽)
저자는 교단을 떠나고 교회 바깥으로 나갔지만, 지금도 여전히 목사로 목회하고 있다. 그의 교회는 어떤 모습일까?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종교 이벤트에 교인들을 내몰지 않고도 내적으로 깊어지고 성숙하며 인간과 세계를 통찰할 수 있는 인격적이고 지성적인 신앙인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가를, 그렇게 해도 교회가 망하지 않고 존립할 수 있는가를 나는 시험 중이다.”(164쪽) 그렇다. 그는 교회 바깥으로 나가 무당이 아닌 목사로서 그가 꿈꾸는 진짜 교회, 예수의 교회를 시험하고 있다.
서재경|한신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신약성서신학을 전공하였다. 한국신학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일했으며, 강남대학교와 기장 여신도교육원 등에서 성서를 가르쳤다. 저서로 『말씀이 우리를 읽을 때까지』, 『슬픔이 슬픔에게』 등이 있다. 현재 수원 한민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