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에 대해 스스로 던지는 질문들, 그리고 답변 / 정목일
이 글은 [한국수필]125호에 실린 것을 옮겨왔습니다. 수필문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 운영자 -
제22회 한국수필가협회 국내심포지엄 <인터넷시대의 수필문학> 발제논문
수필에 대해 스스로 던지는 질문들, 그리고 답변
鄭木日
한국수필가협회 주최의 수필세미나(2003. 9. 27 통영문화회관)에서 처음으로 문학 담당 기자가 주제 발표자로 나서서 무수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15개 큰 문항에 전체 질문 수는 무려 59 개에 이른다. 그는 발표보다도 질문을 통해 수필문단 스스로가 이에 대한 답을 얻길 원한다. 문학 담당 기자로서 수필에 대한 인식과 의문들을 쏟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꺼번에 그가 제시하고 의문을 표시한 질문들에 대해 답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질문 하나 하나가 간단명료한 것이 아니다. 어떤 질문들은 아직 진전되는 과정에 있거나, 아직 정립 상태가 아닌 것도 있고, 시비나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문제들도 있다. 또 대단히 인생론적인 것과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것들도 있어서 제한된 시간에 답변하기란 실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현역 언론인이 세미나의 주제발표자로 나와서 수필에 대한 광범위하고 심도 있는 질문공세를 편 것에 대해 고무적으로 받아들인다. 수필에 대한 애정 있는 시각과 관심을 보여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를 표명한다. 김광일씨의 질문은 대중성 보편성 획득으로 급속도로 증가되는 수필인구와 수필작품에 대한 성찰과 점검을 요구하는 동시에, 정보화 시대에 수필의 좌표와 방향에 대한 질문을 통해 수필의 갈 길을 찾아보라는 주문이 깔려있다.
1) 정보화 시대의 수필은 어떻게 쓰는가? 종전의 방식대로 손으로 쓰는 방법을 고수할 것인가, 문자판을 치면서 쓸 것인가. 발표매체를 인쇄매체로만 할 것인가, 인터넷을 이용한 사이버 매체를 이용할 것인가, 주제, 소재, 구성 등에 있어서 정보시대와 사회성을 반영하며 쓸 것인가, 종전대로 시대를 의식하지 않고 쓸 것인가에 대한 복합적인 문제들이 물음 속에 내재돼 있다.
대개 60대 이상은 익숙해진 글쓰기 방식을 고수하는 쪽이 많을 것이지만, 60대 미만은 시대의 추세에 따라 문자판을 치면서 쓰는 사람이 많은 현실이다. 앞으로는 수필뿐만 아니라 모든 문학작품은 ‘쓰는’ 작업에서 ‘치는’ 작업에 의해서 창작될 것으로 본다. 발표 매체에 대해선 인쇄 매체와 사이버 매체를 겸용하게 될 것이고, 매체마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아무리 영상매체 시대라고 하더러도, 인쇄매체가 자취를 감추진 않을 것이다. 종래 원고지에 쓸 때와는 다른 속도감과 시대적 변화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특히 젊은 네티즌들의 구미에 맞는 수필에 대해 고심하여야 한다. 주제, 소재, 구성 등도 종래의 진부하고 일상적인 것에서 벗어나 참신성, 개성, 창의성, 독창성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 정보화 시대의 삶과 인생을 담아야 한다는 것이 정보화 시대의 수필의 요구이자 역할이 아닐 수 없다.
정보화 시대의 수필은 누굴 위해 쓰는가? 정보화 시대라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정보체제에 의존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다. 독자층을 어떤 대상으로 정하느냐에 따라 글의 방향이 달라진다. 분명한 것은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고, 영향을 주는 쪽으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사이버로 읽는 젊은 네티즌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선호하는 관심과 삶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검증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사이버문학이 대중성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지닌 영원성, 심오성, 본질성, 본격성, 치열성 등의 결함이 드러나고 있다. 그래서 사이버를 통한 발표를 아예 외면하는 작가가 생겨나며, 정보시대라고 해도 인쇄매체를 통한 종전 글쓰기 방법을 택하고, 독자층을 의식하지 않더라도 생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작가들도 있다.
정보화 시대의 수필은 누가 쓰는가? 왜 쓰는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수필은 자의식의 소산이다. 질문자는 수필가만 수필을 쓰는가 하고 묻는다. 수필을 쓰는 사람은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일 수 있다. 수필은 이미 수필가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공유물이 되었다. 현대는 사진작가만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며, 가수만 노래를 부르는 시대가 아니다. 디지털시대인 만큼 쌍방시대이다. 작가가 독자가 되고 독자가 작가가 되기도 한다. 종전처럼 생산자인 작가와 소비자인 독자로 엄연히 구분되던 한계가 허물어져 버렸다.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누구나 수필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사진작가와 수필가의 희소성이 떨어지고 권위마저 퇴색된 것은 사실이다. 유수한 일간지들의 신춘문예공모에서 수필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고 만 것도 대중화에 있다. 신춘문예에서 축출되었다고 해서 수필이 고사하느냐 하면 전연 그렇지 않다. 수필전문지만도 10여 종에 이르고, 한국문인협회의 장르별 문인증가 추세 면에서 단연 수위를 차지하고 있다. 전국 각지에서 연례적으로 실시되는 백일장의 대상은 시와 수필이며, 각종 문예공모전에도 수필이 중심부분을 차지한다. 응모자가 많고 저변이 확대돼 있기 때문이다. 아웃사이드 문학, 비전문 문학, 주변 문학으로 취급받던 수필은 삶의 중심문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요청과 변화를 일간지들은 포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수필을 쓸 수 있는 정보화시대에 수필가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전문성과 개성과 창의성으로 각자의 독자적인 영역확보와 세계를 마련하여야 한다. 일반인들이 쓰는 수필과는 작품성에 있어서 변별력을 가져야만 존재를 인정받을 수 있다.
왜 쓰는가? 이 물음은 인간은 무엇인가? 왜 사는가? 라는 존재론적 물음과 닿아있다. 인간은 일회성적 일과성적 존재이다. 인간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시간의 침식에 못이겨 망각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한시적인 삶을 사는 인간은 영원을 열망하는 존재이고, 이 열망에 부응하는 방법의 모색으로써 예술과 종교가 제시된다. 인간은 오랜 문화축적을 통해 제한된 삶 속에 영원을 수용하는 방법으로 ‘기록’을 얻게 되었다. 모든 것이 시간의 침식에 곰팡이가 슬고 마침내 소멸의 길로 가지만, 기록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퇴색되지 않음으로 영원을 만드는 유일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삶의 기록, 인생을 기록하는 문학은 인간이 발견한 가장 완벽한 영원을 만드는 장치이다. 인간은 영원을 열망하는 존재이기에 문학을 통해 영원을 수용하기 원하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신춘문예에서 사라진 수필에 대해서 신문사 문학 담당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접근해야 할 것인가? 어떤 수필이 뉴스가 될 것인가?
70년대에 한국일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수필이 신설되었다가 사라졌다. 중앙지에서 신춘문예가 사라졌을 뿐 경남신문, 전북신문 등 지방지에선 꾸준하게 수필공모를 해오고 있으며 금년에 부산일보 신춘문예에 수필이 신설되어 호평을 받았다. 부산일보 신춘문예 신설에 앞서 필자는 담당기자에게 의견을 제시했다. 문학이 삶과 동떨어지면 곤란하다. 삶 속의 문학으로 삶의 질을 향상시키기 위해 이바지해야 하며, 개개인의 삶을 보다 의미 있게 가치롭게 꽃피우는데 기여해야 한다. 그런 관점이라면, 오히려 픽션 문학보다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삶과 인생을 담는 논픽션문학인 수필이 중심이 돼야 한다. 수필은 이미 대중화가 이뤄진 장르이고, 많은 독자를 가진 ‘수필’이 신춘문예에 신설 혹은 부활됨은 시대적 대중적인 요청이 아닐 수 없다. 간혹 작품의 변별력을 가리기 어렵다느니, 너무 평범하다느니,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시각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전문성, 창의성, 개성성, 참신성이 높은 작품들이 나오고 있어서 그러한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 중앙지가 많은 독자들의 관심과 실제적인 삶의 질 향상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면, 신춘문예에 수필 장르의 신설이 필요하다.
문학뉴스에 언제나 시․소설이 관심의 대상이며 수필은 관심 밖으로 소외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뉴스는 화제성을 요구하며 기상천외를 선호한다. 평범과 수수함은 눈길을 끌 수 없다. 픽션의 경우는 시대적인 삶의 문제와 현상들에 대하여 문제제기, 비판, 방향 제시 등을 통해 뉴스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그러나, 논픽션인 수필의 경우는 진실을 바탕으로 삶의 성찰과 의미부여에 치중하는 까닭으로 개인사(個人事)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문학담당 기자들이 수필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와 질에 대한 고뇌와 노력은 외면하고, 선정성, 토픽성, 화제성 만을 뉴스원으로 삼는 태도와 시각은 과연 옳은 일인가. 스타들의 일거수일투족은 뉴스거리가 되지만, 보통시민의 생사는 관심 밖의 일이다. 그러나, 수필이 오늘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실한 삶과 인생의 반영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오늘의 우리 삶의 모습, 내면의 진실을 보는 가장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신문의 문학기자들은 우수한 시인과 소설가는 알고 교류하고 있지만, 우수한 수필가들의 동태와 작품은 알지도 읽지도 않는다. 우선 우수한 수필가들의 작품을 알고 관심을 표명해 달라는 주문을 하고 싶다. 문화면에 시 게재뿐만 아니라, 짧은 수필의 게재도 기획에 따라 독자들의 눈길과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다.
2) 사이버 수필이라는 말이 가능할 것인가? 이것을 웹 공간에 띄우고, 독자들과 공유한다는 의미에서의 사이버 수필이 가능할 것인가?
‘사이버 수필’이란 말이 아직 대중에게 친숙하지 않은 상태이고, 또 개념 정리도 안 된 상태이다. 지금은 시도 단계이며 앞으로 사이버 수필의 전개가 확대될 것이다. 이미 e-book과 오디오book이 출판되고 있다. 종이책 출판만이 아닌 듣는 책, 영상으로 보는 책의 등장으로 ‘사이버 수필’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시각만을 이용한 정보전달체제에서 시, 청각에 의한 복합적이고 상호 보완적인 매체의 등장으로 산문 중에서 가장 분량이 적은 수필은 대중에게 가장 사랑 받는 장르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 정보 테크놀로지 시대에 수필이 가장 유리한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는 것은, 시와 소설의 중간 거리에 있는 장르로써 시의 장점과 소설의 장점을 취하면서 논픽션으로써 독자성을 지니고 어떤 장르와도 융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음악+ 수필=음악수필, 영화+수필=영화수필, 미술+ 수필=미술수필 등 어떤 대상이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장르상의 속성으로 말미암아 21세기 문학의 총아로 지목되고 있기도 하다.
3) 정보화 시대의 사이버 수필은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상상력을 대변하고 있는가? 이러한 사이버 수필이 전위적, 실험적, 유동적, 다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고 누군가가 말한다면 우리는 동의할 수 있겠는가?
앞서 수필은 삶과 인생을 반영한다고 했다. 정보화 시대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의 의식과 삶이 정보화 체제 속에서 영위된다고 볼 수 있겠는가. 시대의 변화에 재빨리 부응하는 쪽이 있을 것이고, 뒤따라가지 못하는 쪽이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아직 농경시대의 삶을 고수하는 쪽도 있을 것이다. 생활 방편상 인터넷 등 정보 테크놀로지의 편리성을 취한다고 할 지라도 의식과 삶은 전통 방식을 버리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정보화 시대라고 해서 삶과 인생이 단번에 정보화 체제로 전환되는 것이 아닌 만큼 사이버 수필이 전혀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상상력을 대변한다고 할 순 없다. 다만 정보화 시대에 걸맞는 사고와 삶이 요청되고 진행될 것임으로 자연스레 수필도 새로운 가치관과 상상력을 수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수필에 있어서 전위적, 실험적, 유동적, 다원적 성격의 내포는 비단 사이버수필에만 적용될 문제가 아니다. 수필의 다양성과 개척을 위해 전개해야 할 방향이다. 특히 사이버 수필에서는 정보테크놀로지에 의한 새롭고 다원적인 실험과 모색이 시도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아직 사이버 수필이 전위적, 실험적, 유동적, 다원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진 않다. 앞으로 이런 방향의 수용을 위해 수필은 수구적이고 고정적이고, 보수적이며, 단선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과감한 변신과 노력이 필요하다.
4) 정보화 시대의 수필은 사이버 수필이 될 수밖에 없고, 그것은 또한 전통적 에피소드에 반하는 디지털 에피소드, 그리고 디지털 리얼리티에 근거해야만 하는 형태로 발전할 것인가?
‘정보화 시대의 수필’이라 했을 때, 인터넷을 이용하여 글을 쓰고, 유포하며 독자들과 공유하는 수필을 말한다. 그러나 아직도 원고지를 사용하여 글을 쓰는 60대 이상의 수필가들은 정보화 시대의 수필가라 할 수 없을 것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후자의 경우엔 정보화 시대에 예속돼 있으면서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그들의 수필을 정보화 시대의 수필이 아닌 것으로 간주할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때문에 정보화 시대의 수필은 사이버 수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는 일방통행처럼 들린다.
사이버 수필은 전통적인 에피소드에 반하는 디지털 에피소드, 그리고 디지털 리얼리티에 근거해야만 하는 형태로 발전할 것인가?
디지털시대는 쌍방시대를 말한다. 작가만의 독자적인 세계가 아니고, 수많은 독자와 사이버 공간에서 의사소통을 가지며 이를 작품에 반영한다. 예컨대 사이버소설과 TV드라마의 경우, 원래의 구성대로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다수 독자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진전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엔 작가의 창의성보다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수용하게 됨으로써 대중심리와 흥미에 더 치중하게 되는 공동제작의 양식을 띄게 된다. 소설이나 드라마는 픽션이기에 그런 수용방법이 가능하지만, 논픽션인 수필의 경우엔 독자들의 의견을 부분적으로 받아들일 순 있지만, 전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허구를 수용하는 것이 되어 장르상의 특질이 훼손된다. 그러나 디지털에 알맞은 리얼리티의 구사, 상상력을 통한 표현력의 계발은 필요하다.
5) 사이버 수필은 필연적으로 영상과 동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인가? 컴퓨터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필에 걸맞는 영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며, 이 때 그러한 영상물을 채집, 디자인, 모자이크, 편집, 게재하는 일련의 작업이 수필의 영상미를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일이 될 것인가?
사이버 수필은 영상과 동행해야 한다. 인쇄매체의 경우엔 글이 절대적인 전달요소이지만, 영상매체에서 글 못지 않게 영상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다라서 작가만의 작업 형태에서 벗어나, 영상디자이너, 편집자․수집자 등이 분담하는 작업형태가 된다. 앞으로 수필을 영상으로 전달하는 데 가장 적절하고 효과적인 작업시스템과 방법이 나올 것이며 수필의 영상미를 어떻게 완성시키느냐에 따른 역할이 분담될 것이다. 종합문학작업 형태가 되지 않을까 싶다. 영화로 말하자면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 감독에 의한 역할분담처럼 말이다. 수필을 육성으로 낭독해서 CD-ROM에 담는 행위도 정보화에 발맞추는 문학 행위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이버 문학은 이제 시도되어 전개되고 있을 뿐 아직 검증되지 않았다. 인간이 만든 것 중 영원한 것이 없듯이 사이버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처음엔 모든 것이 세상을 지배하듯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퇴색되고 붕괴될 수도 있는 것이다. 시대적 추세를 따라갈 수밖에 없으나, 사이버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내긴 아직 이르다.
6) 다가올 시대에 쓰는 수필에는 무엇을 담을 것인가? 수필은 그릇인가? 수필은 어떻게 무엇을 쓸 것인가?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소재라도 갖고 있단 말인가?
수필은 인생을 담는 그릇이다. 수필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주제와 소재는 ‘인생’인 것이다. 이는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수필은 자신이 쓰고 자신이 주인공이므로 자신의 삶과 인생을 거울에 비춰보이 듯 드러낸다. 어떻게 무엇을 쓸 것인가? 이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떤 인생이 가치로운가?’ 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모든 문학적 주제와 소재는 결국 인생에 관한 것이며, 인생의 의미 부여와 가치 창출에 두고 있다.
7) 영상 수필에 더 매혹을 느끼는 세대들이 자라게 되면, 활자화된 수필은 물러나고 말 것인가? 책 무용론은 정당한 것인가?
영상수필이 정착단계에 들어선다고 해서 활자화 된 수필이 물러나고 책은 사라지고 말 것인가? 단연코 그렇지 않다. TV가 대중화되었다고 해서 신문이 사라지지 않듯이 영상수필이 자리 잡는다고 해서 활자화 된 수필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역할 분담이 다르기 때문이다. 상호 보완적인 관계 속에 존속이 가능할 것이다. 책은 영상매체에서 얻을 수 없는 휴대성, 접촉성, 단독성 등으로 입지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인터넷이 생기고 나서 종이 소비량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정작 종이의 소비량이 늘어나고 있다. 인쇄매체와 영상매체는 각각의 특성과 장단점을 보유하고 있어서 어느 한 가지만에 의존할 수는 없을 것이다.
8) 이제 문학이 활자로만 구현되던 시기를 서서히 벗어나 오디오․비디오에 의한 문학의 시대로 변해가는 시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아닌가? 수필 문학의 쇠퇴가 아니라, 수필의 집필 수단, 전달 수단, 소통 방식 수단이 변하고 있을 뿐인 아닌가?
앞에서도 활자매체시대에서 영상매체시대로 진입함에 따라 인터넷에 의한 집필, 전달, 유통에 의한 문학행위가 이뤄짐을 말했다. 여기서 ‘수필 문학의 쇠퇴’라고 했는데 오늘의 수필 문학 실태를 모른 데서 나온 말이다. 현재 수필전문지만도 10 여종이 나오고 있으며 수필인구의 증가와 발표 등을 보면 수필의 전성기라는 평가를 하고 있을 정도이다.
9) 수필의 길이가 짧아져야 한다는 일단의 주장은 일리가 있는가? 모든 것이 순식간에 변화하고 즉자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때에 보통 수필은 도대체 어느 정도 길이가 적당하단 말인가?
‘속도’를 가치화하는 현대인들의 삶에 맞추기 위해 짧은 수필의 효용성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대표에세이는 작년에 ‘5매수필의 전개와 방향’이란 주제로 수필세미나를 열고, 그 방법의 시도로 5매수필집을 출간한 데 이어, 금년에도 5매수필집을 내게 되었다. ‘5매수필’은 ‘짧은 수필’이란 개념으로 분량을 5매 내외로 구체화시킨 것이다. 현대는 스피드시대이기 때문에 짧은 시간 중에 많은 정보와 깊은 내용을 얻으려 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신문에서 시도하고 있는 ‘천자 수필’이 여기에 해당되며, 전철에서 한 정거장을 가면서 읽을 수 있는 적당량이다.
‘5매 수필’의 효용성이 높아져 감에 따라 짧은 수필의 전개가 필요할 것으로 보지만, 전적으로 수필의 분량이 짧아져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수필은 다양하고 자유스런 문학이므로 분량 또한 신축성과 자유성이 보장된다. 전문성을 요하는 테마수필의 경우는 단편소설보다는 분량이 많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편(長篇) 수필의 개척도 이뤄져야 한다. 보통수필의 분량은 대개 15매 정도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다.
10) 정보화 시대에 수필가들은 독자들에게 어떻게 아부해야만 할 것인가? 어떻게 봉사해야만 할 것인가? 재미와 감동은 어떻게 전달해야 할 것인가?
독자들에게 아부한다기보다는 독자의 편에서 배려하고 무엇을 줄 것인가를 고뇌해야 한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는 글이기 때문에 개인사에 치우친 글들이 많은 편이며, 자기 만족이나 도취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수필가들은 자기 만족이 아닌, 독자 만족의 길을 택해야 한다. 개인사적인 기록에 불과할 경우엔 독자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될 수 없다. 개인적 차원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에게 인생적인 의미와 가치를 줄 수 있어야만 수필이 될 수 있다. 집필하기 전에 먼저 독자들이 읽고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를 자문자답해 보아야 한다. 자기 도취나 만족이 아닌, 독자들의 만족과 인생에 그 무엇인가를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독자에게 유익한 그 무엇이 바로 주제의식이고 글을 쓰는 이유가 돼야 한다. 수필의 재미와 감동은 먼저 진실과 순수에 있으며, 여기에 유머와 풍자와 비판과 인간애가 있다면 더 진해질 것이고, 깊이에의 천착과 깨달음의 경지와 인격의 향기가 있다면 다시금 읽고 싶어할 것이다. 수필은 픽션과는 달리 논픽션인 까닭으로 인생경지가 수필경지가 되는 특성이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11) 수필은 돈과 무관한 것인가? 수필은 고결한 것인가? 전업 수필가란 말은 불경스러운 일인가? 수필은 밥이 되어선 안 되는가?
현실적인 물음에 대해 피할 순 없는 노릇이다. 수필을 쓰면 돈이 생기면 좋겠다. 수필만 쓰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수필전성기라 할 오늘날에도 수필은 밥이 된다고 할 수 없다. 수필가와 수필이 쏟아져 나오는데도 수필이 양식이 되고 직업이 되지는 않는다. 전문가나 스타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70년대 중반부터 수필데뷔 관문을 거친 본격적인 수필가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전업 수필작가는 찾아볼 수 없는 실정이다.
앞으로 수필은 밥이 되고 돈이 돼야 한다. 신변잡사를 통한 천편일률적인 소재에서 벗어나, 독자성과 전문성를 확보하고 개성, 창의성, 참신성으로 흥미와 감동을 불어넣는다면 시나 소설에도 뒤지지 않는 경쟁력이 생성되리라 생각한다.
12) 퓨전과 혼용의 시대를 맞이해서 이제 수필은 시이자 소설이자 콩트일 수는 없는가? 해외에서는 수필을 어떻게 쓰는가?
수필 작법의 기법 중엔 시적 수필. 소설 적 수필, 희곡적 수필, 동화적 수필 등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시의 장점인 함축, 상징, 비유, 압축, 리듬을 살릴 수 있고, 소설의 장점인 서사, 묘사, 구성 등을 차용할 수 있다. 퓨전과 혼용의 시대에 가장 효율적인 문학 장르가 수필인 셈이다. 문학 장르만이 아니고, 어떤 예술 장르와도 혼합할 수 있다. 이는 수필이 다른 문학 장르와는 달리 형식과 방법에 있어서 자유로운 데다가 다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혼용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면, 허구와 사실이다. 시, 소설, 희곡, 동화의 장점을 취할 순 있어도, 허구를 수용하여 혼합시킬 순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퓨전에도 한계를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소설인가 수필인가 하는 경계는 허구인가 사실인가 하는 데 있는 것이다. 타 장르와의 혼합을 주도하되 수필의 생명선인 진실을 상실한 채 혼합의 형태로 간다면 이미 수필이 아니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13) 정보화 시대의 수필은 더 이상 미문(美文) 지향일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발빠른 문장과 속도감 있는 문체가 이 시대의 산문정신인가?
문학은 언어를 통한 예술이기 때문에 문장에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미문이라 했을 때, 수식어 남발과 비유법 사용 등을 연상할지 모르지만, 진정한 미문은 간결과 순수와 함축에서 온다. 맑음과 깨달음의 경지에서 느껴진다. 독자들이 미문이라 느낄 때는 이미 미문이 아니다. 진정한 미문은 어느 시대나 필요하며 독자들에게 공감과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그러나, 지나친 미문의 추구는 본질을 흐리거나 은폐하려 든다. 그것은 허식에 불과할 뿐이다.
미문과 속도와의 상관관계는 별도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속도에 맞는 문체의 구사는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속도에 맞는 문체가 이 시대의 산문정신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속도는 예측하기도 어렵고 시행착오도 있을 것이다. 속도를 따르다 보면 정확성을 꾀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14) 다원화 사회의 특수성에서 나온 고유 경험의 정리와 기록은 그 자체가 호기심을 자극시킬 뿐 아니라 상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며, 산업화에 난폭해져 가는 사회를 정화시키는 역할을 수필이 수행해야 한다. 이는 수필의 중요한 역할이 아닐 수 없다. 개개인의 다양하고도 특수한 체험과 느낌의 기록, 삶의 발견과 깨달음을 공유하고 비정, 난폭, 생명 경시의 풍조와 세태에 상처받은 사람들을 위무하고 계도하며 인간다운 삶으로 복원시켜주는 일이 수필문학의 책무일 것이다.
15) 다른 장르에서 문명을 얻은 기성문인들이 자기 고백적으로 펴내는 산문은 수필이 아닌가? 그들은 왜 그러한 책을 펴낼 때 한사코 수필집이란 말을 붙이기를 꺼려하는가?
자기 고백적 산문, 논픽션은 포괄적인 의미에서 수필집이라고 할 수 있다. ‘산문집’이라 했을 때는 논픽션만이 아닌 글이 포함될 수도 있을 것이다. 수상록, 에세이 등의 말을 붙이기도 하는데, ‘수상록’의 경우엔 명상, 아포리즘 유(類)의 글, ‘에세이’의 경우는 우리가 말하는 수필과는 구별이 된다. ‘수필’이 감성을 위주로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주관적인 글이라고 하면, ‘에세이’는 논리를 위주로 사회적인 관심과 문제를 객관적으로 쓴 글이다. 우리나라에 통용되는 수필과는 개념적으로 딱 들어맞지 않을 경우도 있고, 수필을 전문적으로 써오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산문집’을 붙인 경우, 또 수필집이라 했을 때 독자들에게 신선감을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지도 모른다. 수필의 경시 심리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정확한 것은 그들을 대상으로 물어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광일 조선일보 문화부 차장의 질문에 간단히 응답해 보았다. 김광일씨가 주제발표자이고, 필자는 지정 토론자인데, 역할이 뒤바뀐 셈이다. 현역 언론인의 수필에 던지는 진지하고 정곡을 찌르는 질문들은 수필계가 간직하고 있는 고민과 과제들이다. 필자는 김광일씨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수필에, 수필가들에게, 수필문단에 던지는 자문자답인 것이며, ‘IT시대’라는 격변기를 맞아 수필의 발전과 활로를 어떻게 열어갈 것인가의 논의를 시작하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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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목일>
* 한국문협수필분과 회장, 창신대 문창과 겸임교수. 대표에세이 초대 회장 역임
* 수상: 현대수필문학상, 수필문학대상
* 수필집: [대금산조] [가을금관] [마음꽃 피우기] [별이 되어 꽃이 되어] [만나면서 떠나면서] [별보며 쓰는 편지] [깨어있는 자만이 숲을 볼 수 있다] [심금] [나의 해외문학 기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