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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곰들의 대화 스크랩 슬포..훌쩍~ T.T 잊혀진 천재,OB 손경수
독불장군(윤대준) 추천 0 조회 398 08.04.24 16:46 댓글 13
게시글 본문내용

(1993년 OB 입단 당시의 손경수. 손경수는 야구가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이다. 그는 지금도 야구를 생각하고 있을까)

 

 

    

1899년 설립돼 109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고는 자타가 공인하는 명문고다. 수많은 졸업생이 한국사회의 핵심 멤버로 성장했고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야구부는 예외였다. 이상하리만치 경기고 야구부는 전국대회는 고사하고 지역대회에서도 빛을 내지 못했다. 1989년 손경수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분명히 그랬다.  

손경수는 휘문의 임선동, 신일의 조성민과 함께 '수도권 3대 투수'로 불렸던 전도유망한 선수였다. 시속 150km가 넘는 강속구와 횡으로 꺾이는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던 손경수를 모르는 또래 선수가 없었다. 당연한 이유로 손경수는 고교 졸업과 함께 대학과 프로의 치열한 스카우트전에 휘말렸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대학이 홍익대, 프로구단은 OB 베어스(두산의 전신)였다. 임선동을 차지한 연세대, 조성민을 영입한 고려대, 박찬호를 스카우트한 한양대와는 달리 홍익대는 그때만 해도 고교야구선수들이 선호하는 대학은 아니었다. 왜냐? 일단 홍대의 전력이 약했고 홍대출신 선배들이 프로에 많이 입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대부분의 관측은 OB 입단이었다. OB가 2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계약금을 제시했고 손경수의 집안형편이 썩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손경수의 진로는 OB가 아니라 홍대였다.

 손경수는 OB가 제시한 계약금이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의 진가를 제대로 평가한 금액이 아니라고 여겼다. 마침 홍대에서 적지 않은 장학금을 제시했다. 대학 졸업 뒤 프로에 입단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 손경수는 미련 없이 홍대에 입학했고 제 2의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손경수의 다짐은 빛을 잃고 있었다. 당시 홍익대 감독이었던 박종회 한성디지털대 감독은 "1년 가운데 (손경수가)숙소에 있는 날이 100일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경수는 학교 측으로부터 '문제 선수'로 통했고 동료들과도 조금씩 소원해졌다.  

물론 손경수에게는 고민도 있었다. 홍대 입학과 함께 가정사에 밝히기 어려운 문제가 발생했다. 1993년에는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장기치료를 받아야할 처지에 놓였다. 가족의 생계는 대학생 손경수의 몫이었다.  

손경수는 "생계 곤란"을 사유로 홍대 측에 자퇴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홍대 측은 손경수가 평소 선수생활을 성실히 하지 않고 사생활이 문란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퇴서를 받아주지 않았다.  

주변 환경도 손경수에게 불리했다. 1993년 초 신일고 출신 강혁이 OB와 한양대에서 동시에 선수등록이 돼 물의를 빚은 것이다. 이른 바 '이중등록 파문'이었다. 강혁은 이로 인해 야구계에서 영구추방 당했고 프로와 아마추어 야구계는 신사협정을 맺어 재발방지에 힘쓰기로 약속했다.  

자퇴를 둘러싸고 손경수와 홍대 측이 감정싸움을 벌일 즈음. OB는 그해 12월 27일 '불미스러운 일로 대학을 중퇴한 선수는 2년간 프로에 등록할 수 없다'는 규정을 무시한 채 계약금 7천8백만 원, 연봉 1천2백만 원으로 손경수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곧바로 한국야구위원회(KBO)에 선수등록을 강행했다.

 당시 OB는 손경수의 자퇴가 인정되면 1년 뒤인 1995시즌부터 기용하고 인정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졸업한 것과 같은 1996시즌부터 쓰면 된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손경수는 군 신체검사에서 면제판정을 받아 다른 선수들에 비해 월등히 좋은 조건이었다.  

KBO도 두산의 계산에 적극 동조했다. 계약 체결 바로 다음날인 12월 28일자로 손경수를 신인으로 선수등록이 완료됐음을 공시한 것이다.

거칠 것이 없어 보이던 손경수. 그러나 그를 기다린 건 장밋빛 미래가 아니라 지하보다 깜깜한 고난의 연속이었다.  

홍대 측에서도 눈치를 챘지만 손경수는 자퇴 전부터 간염이라는 병마가 싹트고 있었다. 홍대 측에서 손경수를 가리켜 "평소 선수생활을 성실히 하지 않았다"고 비난한 배경에도 간염이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이후 손경수는 훈련을 뒤로 한 채 술을 찾았고 음주폭행으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홍익대 시절 팀 동료였던 권혁돈 세계사이버대학 감독은 "(손)경수가 매일 술을 마시며 신세 한탄을 했다"고 회상했다.  

결국 손경수는 간염이 악화돼 1군 마운드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한 채 1995년 11월 임의탈퇴 선수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그로부터 3년 뒤 1998년 어느 날. 행색이 초라한 한 사내가 예고도 없이 두산 사무실을 찾았다. 그는 뜬금없이 "다시 야구를 하겠다"며 테스트를 요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쓸쓸히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두산 관계자들은 인생무상을 느꼈다. 그 사내가 바로 손경수였다.

그 뒤 손경수를 봤다는 두산 관계자는 아무도 없다. 92학번 동기 선수들 역시 손경수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는 어디에 있을까. 지금도 야구를 꿈꾸고 있을까. 두산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어머니 고향인 해남에서 어선을 타며 힘들게 살고 있다는 소식만 들었다"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에는 서울에서 운수업에 종사한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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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04.24 16:55

    첫댓글 조성민-임선동-손경수(이호준or오희주?) .. 최강학번이였죠 .. 이상하게 오비시절에는 .. 잘나가는 아마선수가 오면 망가지고(박형렬-이진-손경수-이상현-황일권-강혁-추성건-류택현-송재용 등등) 무명아마는 무조건 뜬다는(김상진-구동우-김동현-임형석-심정수 등등) 전설이 있었죠 .. 아~ 손경수 .. 정말 좋아하던 선수인데 .. 빛도 못보고 .. 음~ 오랜만에 좋은정보 감사 ^^

  • 작성자 08.04.24 22:16

    저도 님의 글 잘보고 있답니다.혹시 내일 대전 오시는지요.

  • 오희주는 김기태 선수와 동년배입니다. 당시 해태가 김기태와 오희주를 놓고 저울질하다가 1차 지명으로 오희주를 찍었고, 쌍방울이 2차지명에서 김기태를 데려왔죠. 아마도 해태 구단사상 최악의 드래프트가 아닐까 합니다.

  • 작성자 08.04.24 22:16

    그런거 같죠.ㅋㅋㅋ

  • 08.04.24 18:22

    그때당시의 상황은 잘 모르지만...자세히 올려주신글로 조금이나마 내용 파악을 하고있습니다... 야구선수로 돌아오기엔 너무 먼 길을 돌아간듯해보입니다.... 어디에서 어떤모습으로 살아가도...항상 잊지않는 누군가가 있다는걸 기억하며 건강히 지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 작성자 08.04.24 22:18

    잘 읽어 주셨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 가슴뭉클..... .........................

  • 작성자 08.04.24 22:18

    이하동문

  • 08.04.24 22:12

    흐음...93년이면..나 중학교 땐데..나두 그때 가끔식 스포츠 신문도 보고 그랬는데..첨보는...ㅡㅡ 근데..참 안됐네..몸이 건강해야 뭐든 한다...쩌업...ㅜㅜ

  • 작성자 08.04.24 22:19

    이하동문

  • 08.04.25 01:10

    정말 박찬호선수는 라소다에 의해서 미국땅을 밝지 못했다면 .... 임선동 , 조성민 , 손경수 ... 축구도 아주오래전 스카우트 파동에 휘싸여서 한때 천재스트라이커 라는 김종부선수도 그렇고 한일전 골을 넣었던 김병수 선수도 그렇고 참 얄구진 운명의 선수들 ㅠ,ㅠ

  • 으~흐 손경수 가장 아까운선수... 글쓰신분의 정확한 정보.. 감사드리며... 베어스가 잘되는길은 김선우의 부활입니다..

  • 오늘 신문보니 김진우도 손경수의 전철을 밟고 있네요..... 결국 선수 개인이 잘못한게 크지만, 그래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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