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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운전카페] 밤이슬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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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게실 스크랩 58년 개띠와 46년 개띠
그 사람 추천 0 조회 380 13.10.21 04:34 댓글 14
게시글 본문내용

시인이자 농부이신 서정홍님께서 흙 묻은 손으로 써내려 간 시 몇편 올립니다

 

 

 

58년개띠와 46년 개띠

 

산골 마을 인심이 좋아 산골 마을에 와서

이십년 넘도록 밥장사 술장사 하는 띠동갑 진주식당 아주머니는,

손님이 오면 밥통 안에 든 밥으로 밥상을 차리지 않고

기름기 찰찰 흐르고 따끈따끈한 밥을 갓 지어 밥상을 차리신다.

 

그러나 세월 앞에는 아무리 좋다는 보약도 아무짝에 쓸데없어

날이 갈수록 허리가 자꾸 아파

가까운 마을에서 농사 지으며 요가 가르치는 착한 오열씨한테 지압을 받는다.

 

어느 날 지압 받은 대가를 돈으로 주지 않고

마을 젊은 농부 몇몇 불러 밥상 술상 차려주신다기에,

나는 그냥 덤으로 얹혀 띠동갑 진주식당 아주머니와 처음으로 술 한잔 나누었다.

 

“ 하루는 가을걷이 마치고 산골 영감이 찾아와

천원짜리 한장을 술상에 탁 내놓으며 술 한잔 따라보라고 해.

그래도 지조가 있지 어찌? 기가 차서 눈을 흘기며 서 있었더니,

만원짜리 한장을 술상에 탁 내놓으며 술 한잔 따라보라고 해.

그래도 지조가 있지 어찌? 내가 아무리 술장사를 하지만

돈을 받고 술을 따라주는 돼먹지 못한 년은 아니지.

그래서 고함을 질렀어. 이 영감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 모두 지난 일이지만 가끔 이런 생각이 들어. 그날 그때 술 한잔 공손하게 따라 드릴걸...

세월이 지나 하는 말이지만 그 영감 아직 살아 있으면 그냥 술 한잔 공손하게 따라드리고 싶네.

한평생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오신 분한테 술 한잔 따라 올리는 게

무어 그리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여태 잘 살았든 잘못 살았든 지난 일이야. 그리고 다 내 팔잔데, 누굴 원망해서 무엇하겠냐고.”

 

58년 개띠나 46년 개띠나 개띠 팔자가 다 이 꼴이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배울 것도 많고 깨달을 것도 많아. 그 말이 딱 맞아!

세월 앞에는 아무리 좋다는 보약도 아무짝에 쓸데없어.

제아무리 잘나고 똑똑하고 돈이 많아도 세월 앞에 어찌….

 

 

그 힘은 어디서

 

덕산 할아버지

나이는 일흔다섯

몸무게는 50킬로그램

키는 162센티미터

농사 경력은 60년

주량은 빈속에 소주 한 병

 

덕산 할아버지

40킬로그램 나락 가마니

이른 아침부터 해 질 녘까지

혼자서 번쩍번쩍 들어서

단숨에 경운기에 싣는다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

둘이 함께 들어도 쩔쩔매는

40킬로그램 나락 가마니를

식은 죽 먹듯 다 싣고 말씀하신다

 

"이눔들아. 농사는

힘으로 짓는 게 아니여."

 

 

그리운 사람

 

몇 해 전이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힌 동무를 면회 가기 위해 진주 대곡 교도소로 갔다.

정문 경비가 주민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아무리 찾아도 주민증이 없었다.

아무래도 집에 두고 온 것 같다고 말했다.

먼 곳에서 겨우 틈을 내어 왔으니

면회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했다.

 

그랬더니 젊은 경비가

주민증 말고 증명할 수 있는게 없느냐고 물었다.

가방을 뒤적거려 보았다.

아, 마침 내가 펴낸 <58년 개띠> 시집이 한 권 있었다.

시집 안쪽 표지에는 내 사진과 함께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1958년 마산에서 태어나……, 1992년 제4회 '전태일

문학상'을 받았으며……."

 

그걸 쭉 읽던 경비가

시집을 주민증 대신 맡겨 두고 들어가라 했다.

그날,

시집을 주민증 대신 경비실에 맡겨 놓고 동무를 면회하고 돌아왔다.

나는 가끔

가난한 시인의 시집을 주민증 대신 쓰게 해 준 그 사람이 그립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갈 곳이 없다더니

 

전라도 경상도 가리지 않고

공사장 일거리 찾아 돌아다닌지

이십년째라던 김씨

간암진단 받자마자 다른 병까지 겹쳐 

비싼 치료비로 집안살림 거덜나고

시내에서 산동네로 전세방에서 사글세방으로

사글세방에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더니

 

못 배우고 가난한 사람들은

아플 짬도 없이 바쁘게 살다가

아무도 모르게 죽어야 한다더니

 

죽는다는게, 말 처럼

그리 쉬운일이 아니라고

사는 것 만큼 어려운 일이라고

눈물 쏟아내던 김씨,

하늘로 갔다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더니...

 

 

외식하던 날

 

한달에 한번 우리 식구들 외식하는 날이었다.

아내는 아이들에게 미리 저녁밥을 먹이고 통닭집으로 데려갔다.

한달에 한번 고기 맛을 볼 수 있는 날,

한창 자랄 나이에

닭 한 마리씩 거뜬하게 먹어 치우는 모습이

보기만 해도 흐뭇할텐데

왜 저녁밥을 먹이고 데려갔을까?

 

아이들이 다 자란 이제야 알았다.

닭 한 마리 값이라도 아껴서, 가난한 셋방살이 퍼뜩 벗어나려고

저녁밥을 먹이고 외식했다는 것을...

그런데 스무 살이 지난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빈속에 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밥을 먹고 나서 고기를 먹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다.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먹을 수 있는 세상인데,

왜 문득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일까...

 

 

 

그리움 다 남겨두고

 

 

남편 일찍 여의고,

 

사십년 남짓 혼자서 농사짓고 살던 생비량할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둡도록 방에 불빛이 없어 들여다 보니 앉은채로 눈을 감으셨습니다.

마을 이장님과 할머니 수첩속에 적힌 자식들 전화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습니다.

 


서울사는 큰아들은 "차가 꽉막혀 조금 늦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대전 사는 둘째아들은 "맞벌이하는 마누라 돌아오면 함께가겠습니다."

부산에서 이혼하고 혼자산다는 큰딸은 술에 취해

" 정말 돌아가셨습니까? 유언 같은 거 안했습니까? 논밭들이많은데....."

마산역 앞에서 채소장사를 하는 막내딸만은 울면서, 소리내어 막 울면서

"예에, 지금 당장 가겠십니더. 고맙십니더..."

 


생비량 할머니는

 

제 뱃속에서 나온 자식들 얼굴 한번 못보고 돌아 가셨습니다.

죽는것도 어렵다고,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 귀찮게 한다고,

그래서 낮에 죽더라도 자식들 퇴근하고 돌아올 무렵에 알려달라더니,

마지막 소원대로 그 무렵에 돌아가셨습니다.

낡은 벽지만큼이나 오래된 그리움 다 남겨두고.....

 

 

나를 두고 온 자리

 

찬바람 불고 어둠이 내리는데

열서너 살쯤 되는 아이가

낡은 책가방 부둥켜안고

가회 우체국 모퉁이에 앉아 있습니다

 

어깨는 땅에 닿을 듯이

축 처져 있고

눈은 세상의 절망을

이미 다 보았다는 듯이 흐릿합니다

 

문득 그 아이한테 다가가

아무 말이든 해 보고 싶었습니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끝내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와 자리에 누웠습니다

 

아무리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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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10.21 04:36

    첫댓글 빠.

  • 작성자 13.10.22 19:51

    .

  • 삭제된 댓글 입니다.

  • 작성자 13.10.22 19:50

    아숩다...

  • 13.10.21 04:48

    에세이에 가까운 삶의 향연네요, 안량한 자존심, 좋은것은 자기 것 불편한 것은 남이 것,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고 후에는 껄껄하며 후회하는 인생 누구라고 부끄러워 말 못할 그 누구를 닮았네요, 마치...

  • 작성자 13.10.22 19:53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욕은 안먹고 살아야 되는데...
    그게 잘 사는 거겠죠

  • 13.10.21 05:38

    세상살이 이렇게 얼키고 설키고 사는것을 가는 날은 그언제인가
    몰라도 준비한 말들은 가슴에만 품고
    끝내 한마디도 전하지도 못하고
    가는것을 .....
    그래도 사는 날까지는 열심히 살아보렵니다

  • 작성자 13.10.22 19:59

    마지막 가는 길까지 자식들 생각하는 마음..
    그게 부모님 마음인가 봅니다
    사는 동안 마음을 서로 표현하고 나누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13.10.21 08:06

    ♥♥♥♥♥♥♥♥♥♥♥♥♥♥♥♥♥♥♥♥
    어릴적 우리 이웃에 평범한 모습들
    언제 부턴가 사라저 버린거 ...?

  • 작성자 13.10.22 20:01

    요즘은 삶이 각박해서 그런지
    예전의 정서들이 많이 사라지는 듯합니다.

  • 13.10.21 09:55

    저도 사는 날까지는 열심히 살아보겠습니다

  • 작성자 13.10.22 20:04

    네..매일이 겨울이기야 하겠습니까
    꽃 피고 새 우는 봄은 또 찾아 옵니다
    열심히 살다보면 좋은 날 오겠지요

  • 13.10.21 21:08

    잘보앗습니다 서정홍님시는언제봐도정이느껴지네요

  • 작성자 13.10.22 20:08

    시라는게 꼭 어려워야 시가 아니라고 하시는 분이 쓰신 시라 그런거 같네요
    읽다보면 맘에 와 닿는 글들이 많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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