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마태복음 26:36-46
제목 :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39 - - - - -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
주님의 은혜가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희들에게 또 귀한 날 복된 날 허락하셔서
주의 전에 나와 호산나!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며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제 우리가 또 아버지의 말씀 듣습니다.
성령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들어가는 말 : 종려주일이자 고난 주일
오늘은 사순절의 마지막 주일로서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길에 펴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오늘 우리 찬양대의 찬양처럼,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지요.
이렇게 구약성경에 예언된 대로 아주 구체적으로, 특별히 스가랴 9장 9절에 예언되어 있는 대로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베풀 왕으로 겸손하게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환영을 할 것이다라고 한 그대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래서 흔히 이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지요.
또 동시에,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시고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신 고난 주간의 시작이기도 해서
고난주일, 혹은 수난주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렇게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날 밤, 예수님은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라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유대인들은 기도하는 모습이 흔히 서서 두 손을 들고 하늘을 우러러 기도했습니다.
이게 보통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평소 기도하실 때에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셨다"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날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그랬어요.
누가는 "예수님께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같은 장면을 기록합니다.
이런 기록을 종합해 보면, 예수님은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세로 얼굴을 땅에 대고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겁니다.
예수께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누가는 기록하기를
누가복음 22장 44절에 "땅에 떨어지는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땀이 핏방울처럼 되었다는 것은 피가 땀방울에 스며 나왔다는 말인데, 그러니까 이것은 의학적으로도 입증이 된 겁니다.
그래서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제가 우리 교회 이운기 의사 장로님한테 전화를 했어요.
이게 의학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여쭤 봤더니, 의학적으로 입증된 자료를 보내 주셨어요.
사람에게 엄청난 긴장이 주어질 때 모세혈관이 파괴되어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데,
예수님께서 그만큼 간절히, 그리고 고통과 고민 가운데 아주 처절하게 기도하셨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태는 표현하기를,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사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 26:37-38)
또 마가는,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셨다,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다"(막 14:33-34)
누가는, "예수님께서 힘쓰고 애써"(being in an agony) (눅 22:44) 간절히 기도하셨다 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힘써(에고니) : 고통, 고난이라는 단어가 왔어요.
정말 심한 고통 가운데 예수님께서 힘써 이렇게 기도하다 보니까, 땀이 핏방울로 변해서 땅에 떨어졌다라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것은, [왜 예수님께서 이렇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슬퍼하며 고민하며 기도하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면서 고난 주간에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 왜 그렇게 슬퍼하며 고민하며 기도하셨는가?
공관복음 기자들 -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공관복음인데, (공관 = 보는 관점이 같다, 공통적이다는 거예요.)
요한은 다르지요. 제 사복음 가운데 공관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입니다.
이 공관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네 가지 단어를 사용해서 표현했는데,
처음에, 예수님은 [슬퍼하셨다](아데모네오)고 그랬어요. → 매우 슬퍼하며 근심하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다음에 슬픔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고민하고 낙심하게 만들었다] 그랬어요.
"고민하셨다"(뤼페이스다이) [고민하다]라는 말은 →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이 괴롭게 된 상태를 말이에요.
그러자 예수님은 이제 크게 [놀라셨습니다](에크담베오)고 그랬어요.
'놀랐다'는 말은, → '말문이 막힐 만큼 매우 놀라며 공포에 떠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신 것은, 십자가의 자리가,
예수님이 온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으로 서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게 될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그 고통스러운 자리,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와 완전히 단절되는 그 십자가 앞에
이제 곧 서게 될 것을 바라보게 되자, 예수님은 심히 놀라고 고민하게 되었다라는 겁니다.
예수님은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내 마음이 매우 고민되여 죽게 되었다"라고 토로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8절에, 이 '죽게 되었다' - '디나토스'란 말인데, 말 그대로 "육체와 영혼의 분리로서의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죽게 되었다는 이 헬라어의 정확한 번역은 '죽음에 이르기까지'란 뜻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목전에 둔 예수님의 심적인 갈등과 고통의 정도가 죽음에 이를 정도가 되었다 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면, 예수님은 처음에는 슬픔으로 가득 찼지만,
그 다음에 낙담하고 고민하셨고, 더 나아가 크게 놀라셨어요. 그리고 마침내 죽을 지경까지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이렇게까지 슬퍼하고, 낙심하고,
고민하시며, 심지어는 놀라서 죽을 지경이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왜 이렇게 고민하고 슬퍼하고 놀라신 겁니까?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어요.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어요.
그 사명을 완성하기 위한 십자가 고난을 지금 앞에 두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잖아요. 다 알고 계셨다고요.
제자들에게 당신이 고난 당하시고 죽으실 것을 여러 번에 걸쳐서 친히 말씀하셨어요.
누가복음 9장 22절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주님이 말씀하셨어요.
누가복음 18장 33절에도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마태복음 12장 40절에서도 예수님 친히 말씀하시기를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예수님이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과 자신의 죽음을 앞두고 지금 이렇게 처절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이제야 제가 하나님께서 주신 인류 구원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까지 제가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힘과 능력을 주십시오.
하나님, 담대한 마음 주시고 승리케 하옵소서"라고 담대하게 기도하셔야 되지 않나요?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너무나 연약한 모습으로 두려워하며 기도하고 있어요. 의외지요.
우리가 일반 역사를 보면, 담대한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예를 들어,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 그는 죄 없이 억울하게 모함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때 제자들이 탈옥할 것을 제안을 했지만,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독배를 마셨어요.
또, 교회사를 통해 수많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요.
소아시아 지역의 초대 일곱교회들 가운데 서머나교회의 목사님이었던 폴리캅은,
그 당시 로마의 총독에 끌려갔고 화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그때, 총독이 80세가 넘은 할아버지였던 폴리캅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회를 주겠소. 기독교를 버리면 화형 집행을 취소하겠습니다'라고 했지만,
폴리캅은 대답하기를, "당신이 붙인 이 불은 기껏해야 한 시간 정도 타다가 꺼질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영원토록 타오를 다가올 심판의 불은 모르고 있군요. 무엇을 망설입니까? 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리고는 의연하게 화형을 당해 순교했습니다.
이 외에도 교회 역사에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며 담대하게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너무나 두렵고 떨리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순교자들보다 담대함이 부족해서 그러실까요?
정말 예수님께서 단지 육체적인 고통과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시면서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분명히 예수님의 그 깊은 슬픔과 비통함이 단지 앞으로 당하게 될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압니다.
또, 예수님의 고민이 다가오는 멸시와 천대를 두려워하거나 십자가의 끔찍함 때문이 아니라는 것도 압니다.
또, 예수님께서 그가 곧 맞이하게 될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그렇게도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 하나님의 진노의 잔
그렇다면, 도대체 예수님의 슬픔과 고민은 진정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그 대답을 오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6장 39절,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잔"이 키워드입니다.
이 잔은 - 몇 시간 전에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그 잔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잔은, 얼마 전에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좌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0장 22절에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던 바로 그 잔을 의미합니다.
이 잔은 예언자들이 말했던 그 잔, 바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의미합니다.
에스겔 선자가 말했던 "깊고 크고 가득히 담긴 잔, 놀람과 패망의 잔"(겔 23:32-34)
이사야 선자가 말했던 "나의 분노의 큰 잔"(사 51:22)
하박국 선지자가 말했던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합 2:16)
예레미야 선지자가 말했던 "진노의 잔"(렘 25:15)을 말합니다.
이렇게 구약성경 곳곳에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진노, 저주, 심판을 말씀하실 때 "잔"이라는 단어로 상징적으로 표현하셨어요.
그러므로, 성경에서 등장하는 잔은, 죄악과 불의를 향해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실 때 말씀하신
"이 잔"은 단지 육체적 죽음이나 고통과 고난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처절한 모습으로 기도하시면서 피하고 싶어 하시는 이 잔은
바로 우리의 죄악을 향하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진노의 잔이 당신에게 주어질 것을 생각할 때, 그 마음이 슬프고 고통과 번민 가운데 놓이게 된 겁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정의로우시고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악과 불의를 싫어하십니다. 아니,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악과 불의를 보시면 진노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합니다.
나훔 1장 2절에서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라고 말씀하세요.
신명기 6장 15절은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로마서 2장 5절에서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이 외에도 수많은 말씀들이 하나님은 죄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말씀하세요.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마셔야 할 이 잔은,
죄를 너무나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다 모여 쏟아부어진 무서운 심판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죄를 모르시는 분이었어요. 예수님은 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신 분이세요.
그런데, 죄를 알지 못했던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님에게 전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죄인으로 삼으셨어요. 그것을 바울이 분명하게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21절,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하여 죄(인)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되었어요.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대로 말이지요.
이사야 53장 6절,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래서, 완벽하게 거룩하시고, 죄를 지을 수도 없으셨고, 흠도 없고 점도 없이 순결하신 예수님은
그 어깨에 우리 모든 인류의 죄악을 지시고는 희생양처럼 취해져서 속죄 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거예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을 보라", "보라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진노의 불로 예수님은 완전히 태워져야만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말씀하신 "잔", "하나님의 진노의 잔"이었던 것입니다.
19세기 위대한 설교가 스펄전 목사님은 이 잔에 대해서 이렇게 설교한 적이 있어요.
"모든 지옥이 증류되어 그 잔으로 흘러 들어갔고 우리의 하나님이시자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잔을 마셨습니다."
- 찰스 스펄전 -
모든 인류의 죄가, 과거에 지은 죄, 현재에 짓는 죄, 미래에 짓게 될 모든 죄악이
우리 모든 인류의 죄가 그 지옥의 뜨거운 불길에 다 타 가지고 증류가 돼 가지고 그 증류가 그 잔으로 흘러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이시자 구세주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잔을 마셨습니다.
▣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고통과 번민
그런데 여러분,
모든 지옥이 증류되어 들어간 그 잔,
온 인류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지옥 불로 태워져서 증류되어 들어간 잔,
바로 그 잔을 마시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서 예수께서 슬퍼하시고, 크게 고민하시고, 심히 놀라시고,
마침내 죽을 지경까지 된 가장 큰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그 진노의 잔을 마신다는 것은
곧 죄를 너무나도 미워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고민과 슬픔 속에서 죽기까지 처절하게 기도하신 것은 십자가가 무서워서가 아니었습니다.
육체의 고통이 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발가벗긴 채 십자가에 달려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 받음이 창피해서가 아니었어요.
심지어, 죽음이 두려워서도 아니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와의 단절이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죄인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겁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나님의 모든 진노가 다 부어실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버림 받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두려웠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크게 크게 고민하실 수밖에 없었고,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십자가에서는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의 위로가 완전히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무릎을 꿇고 땅에 그 얼굴을 대고 기도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하나님의 위로가 없어진 것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순간
영원 전부터 지금까지 연결되어 왔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가 단절되는 것을 알았습니다.
성경 주석가 윌리엄 레인은 마가복음 주석에서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잔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실 수 밖에 없었던 그 처절한 슬픔과 불안은
그분이 만나게 될 암담한 운명이 두려워서가 아니었고 임박한 육체적 고난과 죽음에 위축되어서도 아니었다.
그보다 이는 온전히 아버지 만을 위해 사시던 자신이 곧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될 것에 대한 공포였다."
- 윌리엄 레인, 마가복음 주석 p.516 -
이렇게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단절되는 엄청난 고통이 예수님께 시작된 것이고,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렇게도 슬퍼하셨고, 고통스러워 하셨고, 고민 가운데 놓였고, 죽을 지경에까지 놓이게 된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의 단절됨의 그 고통이 십자가 위에서 최고조에 달했을 때,
예수님은 마침내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 십자가의 사랑과 순종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로 여기에 우리 모두를 향하신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말로 다할 수 없는 사랑,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아멘!
예수님은 땀이 피가 되도록 고민하며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마가복음 14:36)라고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결국은 이렇게 고백하셨지요.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 앞에 자신의 소원을 내려 놓으셨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뜻 앞에 온전히 순종하셨어요.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기까지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우리에게는 지옥의 문이 닫히고 구원의 길이, 영생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 겁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그리고 우리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기에, 말할 수 없는 고난의 한복판에서도 순종하신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는 말하기를, "예수님은 버림받는 중에도 순종하셨다" 그랬어요.
- 팀 켈러 『인생질문』 p.214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받고 죽어가실 때에도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아버지께 순종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지요. 사랑의 순종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그 십자가의 사랑과 죽기까지의 순종이 있었기에 우리가 구원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어요.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피하셨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이 없었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만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를 향한 그 바다 같은 사랑이 있었기에,
그리고 인류 역사상, 아니 우주 역사상 가장 최악의 형벌을 십자가에서 당하시면서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그 사랑이 요지부동으로 변함이 없었기에 우리가 죄 용서함을 받고 천국을 소유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그 무서운 진노의 잔을 마시면서까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가 지금 이 복된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 사랑을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로마서 8:38-39)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아멘!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깨달은 팀 켈러 목사는 이렇게 표현했어요.
"가족의 사랑, 친구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 배우자의 사랑, 애인의 사랑, 그 어떤 사랑도 이와 비교할 수 없다.
다른 모든 사랑은 끝내 우리를 실망시키지만, 이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
- 팀 켈러, 『왕의 십자가』 p.269 -
▣ 나가는 말 : 겟세마네의 결단으로 나아가자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사랑이 이렇게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십자가에서 버림 당하기까지 하셨지만,
우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그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겁니다.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시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자 하면 얼마든지 우리를 포기하고 버릴 수 있었지만,
우리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고 떠나지 않은 그 사랑이 우리를 오늘 이 자리에 앉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놀라운 사랑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우리가 이 사랑을 어떻게 갚을 겁니까? 우리도 당연히 예수님의 이 사랑 본받아
아직도 죄와 사망 가운데 방황하고 있는 우리 사랑하는 부모, 형제, 자녀들,
친구와 이웃들 그들에게 이 사랑, 이 은혜 전해야 되지 않나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 본을 따라 우리도 아버지의 뜻에 순종해야 되지 않나요?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제가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너무나 분명하신 뜻을 말씀드릴까요?
요한복음 6장 40절에 있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예수님)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니"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모든 인생들이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게 되는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가장 소중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결단하셨던 겁니다.
오늘, 예수사랑 큰잔치 VIP 전도 대상자를 작정주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VIP 전도 대상자를 작정하는 것은, 예수님처럼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일입니다.
윌리엄 바클레이는 말하기를, "성도라면 누구라도 겟세마네의 결단을 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오직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기로 결단하셨어요.
그러므로, 이 시간 우리도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겟세마네의 결단을 해야 됩니다.
"이번에 반드시 내가 주님께 한 영혼 인도하리라!"
여러분, 예수님의 고민과 슬픔과 눈물의 기도가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도 있어야 됩니다.
내 사랑하는 남편, 내 아내, 내 자녀들, 부모님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그들의 구원을 사모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나 말고, 다른 사람이 대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해야 되는 겁니다.
바로 내가, 아내와 남편과 내 자녀, 부모, 친구와 이웃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 누구를 위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도 고민하며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는지......
누구를 위해서요? - 지금 저와 여러분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그 한 영혼을 위해서입니다. VIP를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다 겟세마네 기도의 결단을 하는 귀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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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예수님께서 죄와 사망 가운데 있던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겟세마네 결단을 하시고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마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 은혜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아버지, 간절히 기도하기는, 우리도 예수님처럼 한 영혼을 위해서 겟세마네의 기도를 결단하게 하시고
그 한 영혼 주님 앞으로 인도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우리 모두가 함께 기뻐하는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