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낮에 코발트빛으로 반짝이던 산중호수는 저녁 무렵이 되자 짙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파란 하늘의 뭉게구름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저녁 노을에 붉게 물들면서 화려한 변신을 꾀하더니 어느 한순간 어둠 속으로 묻혀 버리고 곧이어 밤하늘에는 별이 하나 하나 반짝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별빛도 서쪽 산등성이 위로 둥근 보름달이 떠오르는 순간 희부옇게 퇴색되거나 아예 자취를 감추었다. 보름달은 밤의 황제인 양 밤하늘을 점령했다. 산들바람이 불어대는 산중에서 맞이하는 보름달은 말 그대로 청풍명월이었다.
한여름 산릉에서 보름달 맞이하며 무아지경
한여름의 뙤약볕을 고스란히 받으며 청풍호 주변을 답사한 취재팀이 오후 5시경 능강계곡으로 들어설 즈음 정방사 진입로는 교행이 어려울 만큼 피서 차량으로 혼잡스런 상황이었다. 발바닥 담글 물만 흘러도 한여름 피서지라는 우리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싶어 마음이 답답해졌다.
“이건 동국제일이 아니라 천하제일이야. 정말 대단한 조망이야.”
-
- ▲ 오색 빛 저녁 노을을 아래 담소를 나누는 취채팀 조가리봉 동쪽 암부.
-
늦은 시각에 올라선 정방사(淨芳寺)는 스님들이 플라스틱 차양을 기와지붕과 잇느라 두드려대는 망치질 소리가 오히려 산사의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는 가운데 ‘동국제일’이란 명성에 걸맞게 멋진 조망이 펼쳐져 있었다. 맨 우측으로 월악산이 기이한 형상으로 치솟고, 그 뒤로 조령산에서 대야산을 거쳐 황장산을 향해 뻗어나간 백두대간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장엄한 조망을 지닌 산사였다. 강줄기처럼 느껴지는 코발트빛 청풍호는 월악산을 비롯해 해발 1,000m급 산봉이 10여 개 치솟은 월악산국립공원이 감싸고 있는 산중호수였다.
해발 400m 높이의 산자락에 자리 잡은 정방사는 10여 년 전 찾았을 때에 비해 사찰의 규모도 거의 변함이 없었다. 662년(신라 문무왕 2년) 산방사로 창건했다는 정방사에는 의상과 연관된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의상이 도를 얻은 후 절을 짓기 위해 지팡이를 던지자 이곳에 날아가 꽂혀서 절을 세웠다는 얘기. 그러고 보면 의상도 좋은 절터를 고르는 데 최우선 요건을 조망으로 삼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1인당 2리터들이 생수 두 통씩으로도 만족 못한 일행은 정방사 석간수를 한 통씩 더 담은 뒤 청풍호를 바라보며 보름달을 맞을 만한 장소를 찾아 조가리봉(582m)으로 향했지만 20분 뒤 올라선 조가리봉은 소나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뤄 조망이 시원찮았다. 해서 미인봉으로 향하다 작성산~동산 능선이 마주보이는 안부에서 짐을 풀었다.
-
- ▲ 정방사에서 바라본 청풍호 일원. 월악산 일원이 한눈에 보인다.
-
- ▲ 청풍명월의 호사란 바로 이런 분위기를 말하는 것일 게다. 조가리봉 동릉 야영지.
-
가까운 바위 지대에서 청풍호 조망을 즐긴 뒤 비박장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사이 하늘빛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청풍호 물빛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맑고 투명한 빛깔의 하늘은 도술을 부리는 듯 저녁 노을에 갖가지 색깔로 변신하더니 어느샌가 어린아이 눈동자처럼 새카맣게 변했고, 곧이어 별이 반짝이는 듯하더니 서쪽 산등성이 위로 떠오른 둥근 달이 온 세상을 환하게 밝혀준다. 달빛 교교히 비치는 밤이 샘 났는지 서쪽 하늘에서 뭉게구름이 몰려들지만 그 구름에 올라앉아 유유히 흘러가는 둥근 달은 마치 창호지에 스며드는 달빛처럼 아름답고 정겨웠다.
“야영산행이 바로 이 맛인데. 이 맛 참 오랜만이네요.”
오늘 산행을 위해 연구실에서 밤샘을 한 후 합류한 이영석(청운대 교수)씨는 대학 후배인 김창호(몽벨 자문위원)씨와 장단이 맞았다. “하늘 빛깔 좋다”로 시작해 “노을 좋다” “와~, 저 별 봐라”로 이어지더니 “달도 좋네” “풀벌레 소리도 좋고” “산아래 민가에서 새나오는 불빛을 보니 꼭 고향에 온 것 같다”는 둥 온갖 핑계거리를 찾아내 그 때마다 술 한 잔씩 입에 털어 넣었다. 달 보며 별 보며 한여름답지 않게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무아지경에 빠져 눈이 스르르 감길 즈음 평택에서부터 밤길을 달려온 장익진(평택 맥산악회 고문) 선배가 도착, 바닥난 술이 채워지고 새로운 안주가 더해지자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
- ▲ 조가리봉에서 바라본 금수산 일원. 왼쪽 맨 뒤 암봉이 학봉이며, 가운데 솟은 봉이 망덕봉, 그 왼쪽 뒤편에 솟은 봉이 금수산이다.
-
“와~, 저 달 봐라. 그러고 보니 오늘이 유월 보름 아냐? 복도 많지. 이런 날 산에서 자다니 말야. 늦더라도 오길 잘 한 것 같아. 아니 그런데 영석이 네가 무슨 이태백이냐. 그렇게 달 좋아하고 술 좋아하다 호수에 빠질라. 조심혀~.”
새벽 2시가 넘어설 때까지 노닥거리다 보니 이른 새벽 산행이 이루어질 리 만무. 산아래 피서지에서 이른 아침 산책 나온 이들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벌떡 일어난 다음 침낭을 거두어 배낭에 집어넣고, 엊저녁 남은 밥을 물에 말아 후루룩 마신 뒤 오전 9시가 다 된 시각에 산행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