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2월 7일
말씀: 엡 4:12-13
제목: 직분을 통한 장성한 충만
교회 직분에 대해 너무 오랫동안 설교하는 것이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들지만, 이왕 설교하는 김에 구체적으로 교회 직분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만 명 나오는 대형교회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는 일꾼이 없어서 큰일이야’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 같은 교회는 오죽하겠습니까?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교회직분 그러면 ‘교회에서 일하라고 하는 모양이다, 일꾼을 세우기 위해 그 전초전으로 말씀을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눈치가 빠른 성도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마는 이 직분이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역할만 하더라도 얼마나 신학적이고 교리적인 깊이가 있는 부분인지, 또한 이 직분을 통해 얼마나 깊은 영성으로 가는 길이요 계기가 될 수 있는지, 이 직분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유익인지, 이 직분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하는지 하는 신비함과 거대함과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직분’입니다. 어떻게 보면 그래서 두 달이 넘도록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교회는 외부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즉 사회문제, 정치, 경제 문화적인 문제를 다루는 곳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교회는 일차적으로 외부로 무엇인가 하기위해 모이는 곳도 아닙니다. 선교, 구제, 봉사 이런 것을 교회가 하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이런 것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일차적인 목적이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교회라면 적어도 이런 일은 해야 하고, 저런 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 에베소에서 나타난 교회론은 오히려 모인 그 자체에 숙제가 있고, 어떻게 우리가 주님과 하나인가? 어떻게 우리가 성도와 하나인가? 우리가 어떻게 한마음을 품고 충만한데까지 이르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교회의 일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결론을 내는 곳이 아니라, 그 결론을 내는 과정이 더 요구되고 있고, 더 필요한 훈련의 장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교회를 자랑할 때, 우리 교회 목사님은 얼마나 똑똑하고 유명한가? 우리 교회는 재정이 얼마나 되는가? 우리 교회는 교수나 의사나 박사가 몇 분이 되는가? 우리 교회는 기업을 운영하고 정치인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이 관심사도 아니고 관심을 두어서도 안 되고, 여기에 교회의 가치를 부각 시켜도 안 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교회는 선교사를 얼마나 돕고 있고 얼마나 지원하고 있고 우리 교회는 사회에 얼마나 환원하고 있고, 얼마나 봉사하고 있고 지역과 사회를 위해 얼마나 후원하고 있는가? 하는 것도 교회가 세워진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그러면 교회를 세운 목적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에베소서에서 하는 일차적인 교회 목적은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게 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을 봅시다. 가정이 세워진 목적은 가족을 위해서입니다. 가족들이 힘을 모아 친척들이나 이웃을 돕는 일도 중요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가족이 건강하고 자녀들이 지혜롭게 크고 인격적으로 성장하고 화목한 것이 일차적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무엇인가 결론을 내려서 무엇을 하자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결론을 이루기까지 상의하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하는 과정에서 훈련이 요구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소모품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소모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우선이고 우리가 먼저요, 우리를 위해 교회가 세워진 것입니다.
우리는 직분을 맡아 봉사의 일을 합니다. 선교도 하고 구제도하고 전도도하고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도구로서 역할을 감당하는 차원에서 이 직분을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봐야 합니다. 우리가 맡은 직분을 수행하면서 내가 보는 시선, 내가 맡은 직분에 있어서 남이 하는 말, 갈등, 힘겨움, 이런 그것으로 인해 우리가 성장해야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교회 청소하러 오라고 했는데, 한 사람도 안 나타나서 이 큰 교회를 나 혼자 청소하면서 무슨 생각이 들까요?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나만 생고생이야!’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 저번 주에는 내가 빠졌는데 집사님이 혼자 고생을 많이 했겠구나, 하는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하는 계기도 되는 것입니다. 교사 저까짓 것 못 해서 뭔 그리 불만이 많아, 식사 당번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저렇게 아우성을 치나, 이런 생각을 했다가 막상 해보니까 힘들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직분으로 인해 이해력이 향상되고 마음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저번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일하다가 제일 속상한 것은, 나는 하느라고 했는데 빈정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고 열심히 했는데 너무 설친다는 핀잔을 받았을 때, ‘야 내가 월급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그래 내가 당장 때려치운다.’ 뭐 이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야 저것 하나 제대로 못하냐?’답답하게 생각했는데 막상 본인이 해보니까 안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직분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연단하고 훈련 시키기 위해 그 직분을 주셨다고 생각하십시오. 우리는 직분을 받아 일하면서 겸손해지고, 일의 깊이를 깨달으며, 회개하게 되고, 하나님께 매달려지는 일이 일어납니다.
아픈 마음과 부족한 마음을 통해서 그 직분을 맡지 않았다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지 않았을, 자기 자신도 몰랐을 부족함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리고 매달리는 그 은혜의 기회를 얻으십시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 교회 다니는 것은 좋지만 깊이 빠지지 마라, 이런 조언을 하는 경우를 들은 적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깊이 들어갔다가 상처받은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 상처가 진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느 학생이 하버드대학을 들어갔습니다. 하버드대학의 그 웅장함과 경관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거기서 쉴 새 없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오면 하버드대학 나온 것입니까? 아니죠, 밤낮 가리지 않고 눈에 피눈물 나듯 공부해서 학위를 받아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이 어울리고 섞이고 얽혀들어 가야 합니다. 칡뿌리가 얽히듯이 얽혀야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별별 희한한 꼴을 다 당하시고 사회 같으면 상대도 하지 않고, 당하지도 않을 일들을 교회에서 고스란히 당합니다. 교회이기 때문에 당할 수 있는 일들을 당해보십시오. 그래서 직분으로 일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속속들이 배우고 자신의 수준과 자신의 알지 못했던 내면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됩니다.
우리는 사회의 질서와 교회의 질서는 분명히 다르다고 했습니다. 사회는 상, 하의 계급적 위치에서 만남이 많습니다. 대등한 관계가 별로 없고 한쪽은 양보해야 하고 한쪽은 뽐내는 자리에서 만남이 많습니다. 교회는 반면에 남에게 지고 양보하고 낮아지는 사람들이 센 사람들입니다. 이런 상반된 구조 속에서 교회에 와서 내가 얼마나 대접받는 데 익숙해 있었는가? 내가 얼마나 거만했는가, 내가 얼마나 있는 것으로 자랑했는가 하는 것과 비로서 부딪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찌 보면 사회질서 속에서 교회 생활 하려면 못하는 곳이 교회이며, 자존심과 고집으로 살아왔던 여러분 뼛속 깊은 데까지 들여다보고 본심을 파헤쳐 나의 수준과 존재와 허망함과 옹졸함과 더러움과 교만을 보며 애통해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으로 자신을 날마다 비추는 일들이 직분을 통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배나 드리고 헌금이나 하고 돌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설악산 꼭대기에 교회를 짓고 골프장에 교회를 지어서 등산오거나 운동 오는 사람들을 위해 교회를 짓자 하는 이야기는 예배나 드리고 헌금이나 하면 된다는 곳으로 교회를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발상을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갖는 특권과 비밀은 대충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 가는 곳으로 여기면 안 되는 곳입니다. 학생들이 학교에서 대충 출석이나 하고 도시락이나 까먹고 졸업하면 되는 곳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온전한 자로 만들어지기를 원하시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과 이끄심과 그 나라를 소망하며 가는 그 과정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아실 것입니다. 그냥 출석하고 헌금 내고 돌아가기에는 너무 충만한 곳이며, 축복 된 자리입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무엇을 자꾸 확인해야 하느냐 하면 말씀에 비춰서 나를 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저번 주에도 잠깐 언급했지만, 울화통이 터지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동학대, 정치적 다툼, 코로나 상황, 내로남불, 입시 비리, 논리적 편향성, 성추행, 뭐 이로 말할 수 없는 사건들이 우리 주위에 그렇게 많습니다. 이 나라가 이렇게 된 것은 저 사람 때문에, 코로나가 종식되지 못한 것은 저런 단체 때문에, 이런 것을 지나서 ‘우리가 참지 못하는 족속이요, 나약한 존재요, 더러운 사람들이구나’ 것으로 늘 초점을 성경으로 옮기는 일이 교회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이게 세상과 다른 것입니다. 가치와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결국 우리를 망하게 하거나, 좌절하게 하거나 실패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곳입니다. 눈물이 쏙 나올 것 같은 문제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손해 보는 것 같지만 그 문제를 통해서 내 안에 있는 어떤 티를 제거하시며 부족한 어느 면을 세우고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시각을 열어내는 은혜와 사랑의 간섭임을 아는 것이 교회에서 나타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 내가 당하는 어떤 일도 그것으로 인해 내 영혼을 살찌게 할 것이며, 나를 키울 것이며, 비밀을 아는 자로 세울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왜 어려운 문제가, 왜 눈물이 나는 문제가, 왜 고통의 문제가 ‘우리에게 유익이 되느냐 설명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것을 알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습니다. 학교 가면 삼삼은 구, 이삼은 육, 구팔 칠십이 이런 구구단을 외웁니다. 왜요? 그 원리를 알 때까지 시간이 걸리니까 일단 외우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몰라도 됩니다.
이것이 성경이 요구하는 약속이요, 우리가 성경이 약속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또 다른 약속들을 맛보지 못한 엄청난 약속들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도, 직분 맡은 모든 성도에게 허락된 것입니다. 이것을 온전해지는 것에 성도들이 가지는 필수적인 과정이며, 그것을 위해 교회가 있고 교회 안에서 봉사하는 일들이 주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말을 걸러내고 말씀을 입력시키는 곳입니다. 세상의 말 중에 대부분은 우리의 영혼을 더럽히고 영혼을 손상 시킵니다. 말은 몸을 쏘는 것 이상의 해를 끼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말에서 우리의 삶을 더럽힐 수 있다면 ‘이미지’는 우리를 더럽히고 타락시키는 데 있어서 훨씬 더 큰 영향력을 가집니다. 왜냐하면, 정신은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형성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은 모두가 꿉니다. 나는 꿈을 안 꾼다고 하는 분이 계시는데,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할 뿐이라고 심리학자들이 말합니다. 그러면 꿈은 말입니까? 이미지입니까? 인류 최초 기록언어는 상형문자입니다. 이것은 이미지와 은유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미지는 우리 가까이에 있다는 말입니다.
인지과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은 하루에 최소한 6만건 이상의 생각을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1.44초마다 하나의 생각을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진실하거나 거짓일 수 있고, 고상하거나 저질일 수 있으며, 정당하거나 부당할 수도 있습니다. 순수하거나 불순할 수 있고, 사랑스러울 수도 있고, 부끄러울 수도 있습니다. 칭찬할 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수치스러운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생각은 몸 전체에 생화학적 반응을 일으키고 상상을 통해 영혼을 형성합니다. 그래서 빌4:8절에서는 ‘참되며, 경건하며, 옳으며, 정결하며, 사랑할만하며, 칭찬할 만하며, 덕이 있든지,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그리스도께 복종하지 않으면 우리의 생각은 세속에 종속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얼마나 위기인지 모릅니다. 10대들이 즐거보는 영화가 폭력영화라고 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영화나 보드게임, 컴퓨터 게임, 스마트폰에서 게임 등에서 수많은 폭력게임이나 음란물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미암아 청소년들이 폭력은 살인과 피 흘림이 얼마나 잔인한 것인지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지털상의 살인은 실질적인 살인이 아님에도 이것으로 인해 살인의 생각으로 스며들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 곳곳에서 행동으로 옮겨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문제는 이미지입니다. 이미지는 인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세계공용어가 될 것입니다. 즉 이미지를 보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이미지, 사람들의 관계 속으로 끌어드리는 이미지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골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나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예수님께서는 스스로에 대하여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요14:7,9) 그러니까 예수님의 이미지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지금 예수그리스도의 이미지가 아니라 교회의 이미지입니다. 교회의 이미지가 바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의 이미지가 되기 때문에 심각합니다.
신천지의 코로나 확산으로 신천지의 이미지가 완전히 이단임을 공개적으로 알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사랑제일교회발 코로나, 인터콥의 코로나 발생 I.M 교육선교센타의 집단 감염 등으로 교회가 어떤 이미지화 되고 있느냐 하면 코로나가 진화되어 가면 꼭 교회 쪽에서 집단 감염을 일으키는 집단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는 이웃과 더불어 가는 교회, 이웃을 변화시키고 이웃의 필요를 채워주는 교회로서의 이미지는 단숨에 사라지고 교회의 이미지는 혐오 시설, 지역에서 없어져야 할 집단으로 이미지화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철벽과 같은 이미지가 은유화 된 세상에서 복음을 들고 저들의 이미지를 속에 복음의 꽃을 피울 수 있겠느냐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지금 교회가 성령께서 우리의 생각이 극단으로 흐르지 않게 감찰하고 계십니까?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런 상황에서 교회가 세상의 이미지와 은유적 언어에 굴복하지 않고 담대히 서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노래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서로 원망하지 않으며 서로 용납하며 서로 이해하며 믿음을 다시 정립시키며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찾으며 서로 협력하며 하나 되는 것을 지킬 수 있는 직분자의 역할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삶을 살펴봅시다. 사람들은 관계에서 삶을 영위해나갑니다. 동호회, 동창회, 축구, 골프, 테니스, 당구, 탁구 등의 운동동호회, 낚시, 등산, 화초, 여행 등의 동호회 등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관계를 맺고 생활하고 있습니다. 미래세대는 마우스로, 스마트폰으로 관계를 맺거나 게임으로 관계를 맺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의 한 정신과 의사는 우리가 ‘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살기 위해서는 열두 가지의 관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적 관계는 잘해나가지만, 교회 관계를 등한시하는 경향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적 관계는 중요하게 여기지만 교회의 관계는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관계를 어떻게 맺어나가느냐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히13:5 ‘내가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이 말씀의 응답이 바로 교회를 통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연합되어 있는 것으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함께하심의 증거입니다. 마28:20절에서도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이 말씀에 교회를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 됨의 증거요, 하나 됨의 완성입니다. 이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합되어 있고 그 연합 가운데 교통하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의 위치에 있는 우리를 다시 한번 깨달으시고 이 직분, 지체로서의 직분을 온전히 감당함으로 인해 교회의 관계, 하나님과의 관계, 주님과의 관계가 얼마나 복되게 연합되어 누리고 있는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직분을 받았다는 것은 지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근거를 확보한 것이며, 그 직분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될 것인데 그것은 우리가 받은 직분을 통해 성취하시는 그 계획에 우리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대단한 축복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귀하게 연합되어 있고 교회로서의 공동체의 연합이 우리에게 어떤 비밀과 축복의 은혜가 있는지를 직분을 맡아 수고하심으로 날마다 확인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직분을 통해 관계를 지키는 수고와 그 아름다운 관계를 드러내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기도로 연합을 지키며, 교제로, 예배로 연합을 지키셔야 합니다. 이 연합은 결국 그 나라의 목적을 두고 연합하는 삶입니다. 그 나라의 목적, 우리는 그 나라에 집중되어 그 나라를 위한 삶을 직분을 통해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