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요한복음 10:7-15
제목 : 나는 선한 목자라
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
아버지,
저희들에게 고난주일, 또 고난구간 월요일을 맞이해서 새벽을 깨우게 하시고
주의 전에 나와 함께 말씀 듣고, 또 기도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령님, 이 자리가 마가의 다락방 되게 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의 불이 임하는 귀한 시간 되게 하시고,
아버지의 말씀 듣는 시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부터 5일 동안 우리는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로
"십자가, 우리를 향한 사랑의 걸음"이라는 주제로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마지막 발걸음들을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은, 한 질문을 통해서 말씀을 시작하고자 하는데, 그 질문은,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내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라고 하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마음속에 떠오르십니까?
어떤 분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왕의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요.
또 어떤 분은, 착하고 순전한 어린 양을 떠올리겠지요.
또 어떤 분들은 사탄마귀의 권세를 물리친 승리자 예수님을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 사랑의 목자이십니다.
요한은 그 예수님을 표현할 때,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이다."라고 하는 표현이지요.
헬라어로 "에고 에이 미" 유명한 표현입니다. 영어로 번역하면 I Am
이 표현은 출애굽 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출애굽기 3장 14절을 보면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 -"I Am that (Who) I Am"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표현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표현을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겁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출애굽의 하나님,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신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님이시다라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의 정체성을 나타내주는 '에고 에이미' -
'나는 무엇 무엇이다'라고 하는 이 표현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성경의 장이 바로 요한복음 10장입니다.
오늘 읽은 말씀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에고 에이미'는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하는 표현이지요.(11절에 나와 있는)
예수님은 선한 목자로서 양들인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시다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목자와 양에 대한 이야기가 참 많이 나오지요.
목동 출신이었던 다윗은 그 유명한 시편 23편에서 하나님을 목자로, 그리고 자신을 양으로 표현하지요.
또 예언서 곳곳에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유리하고 방황하는 양들로 표현하고, 제사장들과 관리들은 악한 목자들로 비유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이고, 모든 듣는 이들을 양으로 비유하십니다.
* 본문의 배경
요한복음 10장의 청중들, 예수님께서 지금 말씀을 전할 때에
요한복음 10장의 말씀을 들은 청중들은 주로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호의적인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심지어 10장 후반부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까지 합니다.(31절)
예수님은 그런 적대적인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을 향해서 목자와 양에 대한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얼핏 보면,
요한복음 10장은 목자와 양들이 등장하는 아주 목가적인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 같은 그런 말씀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하지만 사실은 삯꾼, 이리, 도둑과 같은 무거운 단어들이 비중 있게 다루어지고 있는, 사실 매우 긴장된 그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로마 제국은 총독과 분봉왕이라는 두 지도자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스렸습니다.
로마가 직접 파견한 빌라도와 같은 인물이 바로 총독이었지요.
총독은 그 당시 주로 군사적 권한과 사법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분봉왕은 이스라엘 본토 출신의 유력자로서 로마로부터 해당 지역에 관할권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헤롯이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대표적인 분봉왕이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가 요세프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 총독과 분봉왕은 온갖 악랄한 수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수탈했고, 그 행위가 사악하기 이를 데 없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치하에서 살아야만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고 고달팠는가 하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지요.
유대인들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를 유대인들이 왜 그토록 기다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적과 기사를 행하는 예수님을 수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따라오고,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이유도 이해가 되지요.
사람들은 로마와 분봉왕의 압제로부터 간절히 해방되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치적 상황 뿐만이 아니고, 당시의 종교적 상황도 암울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칭 백성들의 선생으로 자부했던 바리새인과 사기관들, 종교 지도자들은
겉으로는 거룩한 척 했지만, 사실은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던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지적하셨지요. 마태복음 23장 27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겉으로는 거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그랬어요.
이렇게 정치, 종교 할 것 없이 나라의 리더들이 썩고 부패한 상황에서 서민들의 삶은 힘들고 피폐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리 떼와 도둑들이 양들을 수탈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맥락에서 정확한 지적이었던 것이지요.
앞서 요한복음 10장의 청중들은 유대인들이라고 그랬어요.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잔뜩 경계하는 지도층 인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구약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죠.
따라서 예수님은 지금 구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목자와 양에 대한 말씀을 하신 겁니다.
이게 왜 중요하냐 하면, 오늘 요한복음 10장은 반드시 함께 읽어야 될 성경이 있는데, 에스겔서 34장입니다.
에스겔 34장이 요한복음 10장의 배경이에요. 마치 에스겔 34장의 예언이
요한복음 10장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예수님이 그 이야기를 진행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성경을 아는 특별히 구약을 알고 있는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굉장히 긴장된 모습으로 이 말씀을 들었을 거예요.
에스겔 34장은 이스라엘의 지배층을 향해 '양들을 절망과 죽음으로 내모는 악한 목자들이다'라고 일갈하면서
"그 불쌍한 양들에게 참 목자가 필요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목자를 반드시 보내실 것이고, 그를 통해 흩어진 모든 양들을 되찾을 것이라"고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이 예언의 말씀을 하세요.
그런데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목자, 목숨을 버리시면서까지
양들을 구해낼 그 목자가 바로 예수님 당신 자신이라고 지금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구약을 잘 아는 유대인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상황인 것이지요.
그리고 마침내 예수님이 30절에서 "나와 아버지 이제는 하나이시다"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합니다.
그래서 31절 보면,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하지요. 다행히 큰 불상사는 이때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일로 인해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가만둬서는 안 되겠다고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겁니다.
▣ 양들을 잘 아는 목자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목축은 대규모가 아니라 많아 봤자 200 마리 정도의 양들을 돌보는 소규모의 목축이었어요.
그래서 목자는 양들 개개의 특징들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 각각에게 이름까지 붙여서 부를 수 있었습니다.
목자는 양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지요.
왜냐하면, 우리가 지난번에 시편 23편 묵상할 때 봤듯이 양들처럼 공격이든 방어든 무능한 존재가 없었어요.
시력도 나쁘지요. 앞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늘 보면, 양들은 앞에 걸어가고 있는 양의 뒤, 꼬리를 바라보면서 따라가는 그런 것이 양의 모습이에요.
다만 한 가지 양이 좋은 게 있었는데, 청력은 좋다 그래요. 그래서 목자의 소리를 잘 분별할 수 있다고 하지요.
믿을 건 귀 밖에 없기 때문에, 그래서 목자에게 순종을 잘 할 수 밖에 없지요.
그러니까 양은 오로지 목자를 의지함으로써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그런 연약한 존재이다라는 겁니다.
이런 양의 특징을 잘 알고 있는 유능한 목자는 부드럽게 양들의 이름을 불러가며 그들이 목자를 의지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물과 풀을 쉽게 찾을 수 있는 땅이 아니지요.
우리가 작년에 시편 23편을 묵상할 때 알았던 것처럼,
지리를 잘 아는 선한 목자, 유능한 목자가 양들을 시내와 풀밭으로 잘 이끌어야 양들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10장 초반에서 예수님은 '문이 아니라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라'고 선언하시고
당신 자신이야말로 참 목자이시고,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게 돼 있다고 설명을 하십니다.
하지만 6절에 보면, 유대인들은 이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합니다.
'도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라는 반응이지요. 그럴 만도 하지요.
지금 예수님께서 에스겔 34장에 약속된 목자가 자신이라고 하는 그 배경에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7절에서 다시 분명히 말씀하세요.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다."
예수님 여기서 '에고 에이미' 이 화법을 쓰시면서 "나는 양의 문이라"고 자신을 더 분명하게 이제 드러내기 시작해요.
그리고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넘나드는 자는 절도고 강도다라고 말씀하세요.(8절)
즉, 예수님은 지금 자신을 통하지 않는 자들은 다 이리 떼요 도둑떼라고 엄히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반대로, 양들은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언제든지 안전한 우리와 초원을 드나들 수 있다고 말씀하세요.
(9절)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자 보세요. 여기서 예수님은 벌써 이제 구원이라는 직접적인 표현을 쓰기 시작하면서
양들의 문인 예수를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건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내가 구원자야 내가 지금 에스겔 34장에 예언되어 있는 그 목자, 그 선한 목자 구원자야"라고 하는
[구약이 약속한 그 목자야]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이어서 11절과 14절에 예수님은 연거푸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에스겔 34장에 예언된 바로 그 선한 목자다"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러니까, 에스겔 34장을 잘 알고 있던 유대인들,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은
이제 예수님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닫기 시작하면서 아연실색했을 겁니다.
* 에스겔 34장이 예언한 그 목자이신 예수님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떤 의미로, 또 어떤 맥락에서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말씀한 겁니까?
우리가 이걸 이해하려면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에스겔 34장을 좀 읽어볼 필요가 있어요.
(에스겔 34:1-5)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자기만 먹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 떼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 주지 아니하며 쫓기는 자를 돌아오게 하지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포악으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에스겔 당시의 목자들, 즉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양들을 돌보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잡아먹고, 그들의 가죽과 털을 취하는 데만 열중했다는 거예요.
목자의 본분이 양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인데, 그들은 다치고 병든 양들을 전혀 싸매 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5절 보면, 아예 "목자가 없으므로"라고 표현해서 이스라엘의 현실이 목자가 없는 상황과 같다라고 말씀했지요.
예수님은 지금 이 에스겔의 말씀을 요한복음 10장에서 그대로 옮겨와서
현재의 상황이 그때와 전혀 다를 바가 없다고 지금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칭 목사라고 떠드는 바리새인들과 사기관들은 삯꾼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현실은 목자가 없어서 양들이 이리떼의 밥이 되었다고 한탄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절대로 이런 현실을 방관치 않으실 거다,
"하나님은 유리하고 방황하는 양들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말씀하십니다.
왜? -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니까,,,,
에스겔 34장 11절 12절 계속 말씀합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에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낼지라"
하나님께서 친히 양을 찾으시고 건져낼 것이다 약속하십니다.
23절 보면, 더 분명하게 말씀하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의 말씀입니다.
"내가 한 목자를 그들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그들의 목자가 될지라"
메시아에 대한 유명한 예언의 말씀 가운데 하나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목자 곧 예수님을 예표하는 다윗을 세워서 양들을 먹이시겠다고 약속하셨고,
예수님은 요한복음 10장에서 바로 에스겔서의 그 약속이 당신을 통해 지금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목자이시라는 것이지요.
▣ 도둑, 이리, 삯꾼인 집권층들
그런데, 목자가 있다고 해서 양들이 마냥 기뻐할 수 만 없는 것이 양들을 노리는 악한 세력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요한복음 10장 10-12절을 다시 보면,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예수님은 에스겔서에서 이루어졌던 그 모습이 지금 오늘 이스라엘에도 이루어지고 있다,
삯꾼 목자들이 양을 잡아먹던 모습이 지금 오늘도 이루어지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말씀에서 지금 도둑은 누구를 가리키는 겁니까? - 양을 물어 헤치는 이리는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양들을 잡아가는 도둑과 이리는 그 당시 백성들을 압제하던 집권자들과 관료들을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로마의 총독이고, 분봉왕이고, 관리들이고, 군인들이지요.
삯꾼은 누굽니까? - 바리새인과 사기관들로 대표되는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지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들 중에 상당수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말씀을 듣고 있는 이들을 가리켜서 "너희가 삯꾼들이다" 하셨어요.
이 말씀이 그들의 가슴을 비수처럼 찔렀겠지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삯끈이라는 말을 듣고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겠지요.
예수님은 지금 마치 불구덩이에 자신의 몸을 던지듯, 위험을 자초하고 계신 것처럼 보입니다.
십자가를 향해, 십자가를 향해 스스로 발걸음을 재촉하고 계시는 모습을 봅니다.
양들을 구하시려고, 이리떼와 삯꾼들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목자의 모습입니다.
(17-18절)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십자가의 길로 간다" 주님이 말씀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예수님은 이리떼의 공격과 삯꾼들의 포악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던지심으로 양들을 지키려고 합니다.
선전포고와 같은 이 목자 예수님의 이 공격적인 말씀을 들으며 이리떼와 삯꾼들 역시 목자에게 달려들지요.
'안되겠다. 죽여야겠다.'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 나는 선한 목자라
결국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내가 바로 성경에 예언된 그 목자라는 것입니다.
1) 양을 "위하는" 목자
나 외에는 다 삯꾼들이고 도둑들이라는 말씀이지요. 예수님 만이 유일하고 진정한 목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선한 목자는 어떤 분이신가? 이 새벽에 두 가지만 제가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선한 목자는 먼저, "양들을 위하는 목자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정의하신 뒤에
(11절)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5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이 "위하여"라는 말은, 위하는 대상을 목적으로 삼을 때 쓰는 표현입니다.
즉, 선한 목자는 양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깁니다.
예수님은 양들인 우리를 예수님의 이익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기십니다.
반대로, 삯꾼은 양들을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여기지요.
그래서 목사와는 전혀 다른 자세로 양들을 대합니다. 이리가 공격해 오면, 양을 버리고 도망가지요.
그들에게 있어 양은 그저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에, 위기가 닥쳐오면 주저 없이 양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양들은 그 자체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에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뭐냐? - "양들을 위해서 오셨다"
그러기에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린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누가복음 15장 보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아 온 산을 헤매는 목자의 비유가 나오지요.
우리가 에스겔 34장과 요한복음 10장과 함께 생각해 보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이 목자가 이해가 됩니다.
거기 눅 15:4-6절 보면,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
이 말씀은, 에스겔 34장과 요한복음 10장을 함께 봐야만 이 목자의 행동이 이해가 되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 상식적으로 보면 잘 이해가 되지 않잖아요.
도대체 백 마리의 양들 중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고 해서
그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99마리를 들에 버려두는 목자가 이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나요?
양 우리에 99마리를 가둬두고 한 마리를 찾아갔다면 이해가 돼요.
그런데 성경은 분명히 뭐라 그랬냐 하면, "들에 두고" 찾으러 갔다고 말씀합니다.
양 99마리는 그러면 뭐 상관없는 거예요?
그리고 행여 한 마리를 찾았다고 해서, 이웃을 불러 잔치까지 하는 목자가 이게 과연 상식적인가?
잔치 비용이 더 들 거 아닙니까? 하지만, 양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여기는 목자라면, 그렇게 합니다.
선한 목자는 이해 타산의 관점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그냥 손실로 처리하지 않아요.
양을 목적으로 여기는 선한 목자는 어떤 수고와 비용을 들여서라도 그 한 마리의 양을 찾아내고야 맙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떤 부모님에게 자녀가 10명이 있는데, 여행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어요.
그러면 '9명 남아 있으니까 아쉽지만 잃어버린 아이는 이제 없는 셈 치자' 그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나요?
- 있다면, 정신 나간 부모지요..
예수님께는 모든 양들이 다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에,
하나도 잃어버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온 산과 들판으로 찾아다니는 것이고,
그것마저 안 되면 당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버리시는 분, 그분이 바로 선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선한 목자이신 주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세요. 결코 우리를 사탄에게 빼앗기지 않으세요.
우리가 아무리 길을 잃고 헤맬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찾아내십니다.
주님께서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셨지요. 같이 읽어볼까요?
"그러나 나의 종 너 이스라엘아 내가 택한 야곱아 나의 벗 아브라함의 자손아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 땅 모퉁이에서부터 너를 부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나의 종이라 내가 너를 택하고 싫어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하였노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사야 41:8-10) 아멘!
참 목자이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2) "내 양"
그 다음에, 선한 목자는 어떤 분인가?
오늘 본문 14절과 15절에 보면, [내 양], 그리고 [안다]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등장해요.
(요 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목자와 양의 관계를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비유하십니다.
얼마나 놀라운 말씀인지!
성부께서 성자를 아시고, 성자께서 성부를 아시는 관계는 삼위일체의 신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그 신비한 성부 성자의 관계에 목자와 양의 관계를 연결하는 거예요. 목자와 양의 관계가 그렇다는 거예요.
또 이 두 구절 속에 "알다"라는 단어를 네 번이나 사용했어요.
여기, "알다" - '기노스코'라는 말은, 관계적으로 경험적으로 '깊이 안다', '속속들이 안다' 그 단어입니다.
그냥 피상적으로 안다는 것이 아니예요.
삯꾼은 양들을 그저 돈벌이 수단으로 알고 대합니다. 그래서 잃어버려도 별 미련을 갖지 않아요.
하지만, 목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목자가 양을 아는 정도는 성부와 성자께서 서로를 아시는 정도만큼 깊이 안다는 거예요.
그 앎을 기초로 해서 나온 표현이 바로 [내 양]이란 말이에요. "내 양" - 예수님은 양들을 완전히 아시기에 "내 양"이라고 부르세요.
예수님은 저와 여러분을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알고 계시기에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내 양"이라고 부르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부께서 성자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르신 거하고 똑같아요.
양들 역시 목자를 알기 때문에, "나의 목자", "나의 목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관계인지!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 그랬어요. 나의 목자! 나의 목자!
다윗은 자신이 양인 것과, 하나님의 목자인 것을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지요.
여러분, 만약 우리들도 "내가 예수님 압니다"라고 진정으로 안다면, 예수님을 어떻게 막 불러야 될까요?
"나의 목자, 나의 주님!" 그렇게 부를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되는 거예요.
내 양과 나의 목자라는 표현이 참 감동적인 것은 이 말들이 2인칭이기 때문인데,
마틴 부버라는 독일의 유명한 신학자가 있었어요. 그분이 『나와 너』 - '이히 운투 두'라는 책을 썼는데,
『나와 너』 참 좋은 책입니다. 그 책에 보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있고, 나와 너의 관계가 있다.
나와 그것의 관계, 3인칭의 관계는 피상적인 관계이다.(나하곤 별 상관없는, 객관적인)
그렇지만, 진정한 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가 돼야 된다."
여러분, 어떤 분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를 때, 마치 굉장히 거리감이 있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인 것처럼 하나님을 부를 때가 있어요. 3인칭으로 하나님을 그렇게 부르고 거지요.
(아버지의 하나님, 어머니의 하나님, 할아버지의 하나님....) - 3인칭예요.
내 하나님이 돼야 되는데, 나의 주님이 돼야 되는데, 나의 목자가 돼야 되는데... 참 안타까운 모습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나의 주님으로 부르고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우리가 주님을 나의 주님으로 부를 때, 기도하는 사람은 주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관계에서 기도하는 이지요.
예수님께서 우리를 그냥 양이라고 아니하시고, 우리를 "내 양"이라고 불러주듯이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그랬어요.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
지금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내 양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어요. [나는 내 양을 알고, 그 양도 나를 안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도 예수님은 항상 나의 목자이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돼요.
오늘 새벽에 우리가 기도할 때,
여러분,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 주님 부르고 기도합시다."
주님이라고 부르고 기도하자는 얘기는,
"나를 너무너무 잘 알고 계시고 내 형편과 내 모든 것 알고 계시는 주님 아시지요? 나의 주님!" 그 마음으로 고백하라는 거예요.
우리가 그 마음으로 고백할 때, 나를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께서 내 양 그렇게 말씀하시고, 응답해 주신다는 말씀이지요.
그 주님이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아버지를 사랑하시니까 그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를 원했고,
아버지의 뜻은 저와 여러분이 예수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니까,
그리고 당신의 양이 된 우리가 구원받는 것을 너무나도 원하시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처절하게 결단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끝까지, 버림받는 그 순간까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고백하셨어요.
여러분, 이 새벽 이 시간에 우리 고난주간 첫날을 맞이하는 오늘,
나의 주님, 나의 목자 되신 주님 앞에 내 모든 것 다시 한번 간절히 내어놓고 우리 믿음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목숨까지 내어주신 그 주님,
(요 15:13-14)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주님은 우리를 가리켜서 친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내가 너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라고 말씀하셨어요.
큰 사랑을 받은 우리,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자기 희생을 통한 참 사랑을 깊이 묵상하고 선한 목자 되신 그 주님 앞에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다시 한번 부르짖어 고백하는 이 시간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