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회가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로 흘러가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차단되는 장소는 공적인 삶이 영위되는 곳들이다. 사람들은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길거리에 모일 수 없다. 공적인 시위는 불법으로 선언되고 강제로 종식된다.
영혼의 공동체가 있다. 거기에 속하라. 기쁨을 느껴라. 시끄러운 길을 걷는 소음 속에 있는 기쁨을..루미 <영혼의 공동체>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난폭하게 운전하는 택시운전사 사례-낯선 자들과 함께하는 삶이 민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계발하고 연습하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생생한 사례. 그는 낯선 사람들을 자기 택시 안으로 기꺼이 맞아들여 그에게 자신을 생각을 말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 그는 다양성과 불일치의 긴장을 사용하여 새로운 가능성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젖힌다. 그렇게 하면서 스스로를 교육하고 이것이 그를 즐겁게 한다. 그 택시기사가 공적인 삶에 대해 지니고 있는 열성을 국가의 원류에 공급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 미래는 확실할 것이다. 그는 낯선 사람들에게 환대를 베풀면서 다양성의 긴장에 점점 친숙해지고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배움과 삷의 한가지 통로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미국에서 공공의 삶은 쇠퇴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일찍일 토크빌이 경고했던 사적 영역에 갇힌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 너무 몰두하면서 동료 시민인 낯선 이들과는 거리를 두고 때로는 지레 겁을 먹기도 한다. 세계가 몇 명의 친척으로 축소될 때 우리는 조국을 잃어버리고 만다.
낯선 사람은 사절
어떤 사회구조든 내포하고 있는 세가지 핵심 층위를 보면 그 역할이 분명해진다. 사적인 층위, 공적인 층위 그리고 정치적인 층위가 그것이다. 그 세 층위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보면 공적인 삶의 쇠퇴가 정치적 삶과 사적인 삶의 안녕과 행복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알 수 있다.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에 대한 권리를 모든 시민에게 약속하는 국가를 건설했던 미국의 건국자들은 사적인 삶에 엄청난 가치를 부여함. 많은 미국인은 국가의 존재 이유가 오로지 자족적인 사적 영역을 지켜주는 것에만 있다고 믿는 듯함. (공교육 재정에 대한 책임 분담 vs. 공격용 무기소지 금지)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데 필요한 권력을 얻으려면 서로가 낯선 자들로 뭉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외치는 공적인 이익을 공유해야만 함. 거대 자본은 정치권력을 비호할 수 있고 정치권력은 거대 자본을 비호할 수 있다. 그 결과 탄생하는 폐쇄 시스템은 우리 국민이 충분히 일관성 있게 권력에 대한 견제를 행사할 때만 책임 있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대신 그것은 우리가 건강한 공적인 삶에 접근하여 시간과 에너지를 기꺼이 투입할 때만 가능하다.(금융 위기 이후 월스트리트 시위)
공적인 삶의 의미
민주주의 사회의 뚜렷한 특징은 사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 사이의 완충지대로 작용하는 공적인 삶의 튼튼한 층위이다. 현대사회에서 public의 본래 의미를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는 단어는 ‘펍pup’이다. 영국의 펍은 언제든 완벽한 공동체의 단면을 보여준다. 다양한 사람이 뒤섞이는 가운데 여러 뉴스와 가십이 오가고 지역의 현안이 토론된다. 펍은 민주주의에 꼭 필요한 종류의 “멋지고 좋은 장소”다. 거기에 오는 모든 사람을 환대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낯선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소우주다.
공적인 삶의 장소와 목적
자유로운 공간은 공동체 안에 있는 특별한 종류의 공적인 장소로서 사람들이 새로운 자존감, 더 깊고 자신 있는 집단 정체성, 공적인 기술, 협동의 가치 그리고 시민적 덕성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다. (교육가이자 사회운동가 사라에번스와 해리 보이트) 거기에서 우리는 사생활과 정치적인 삶의 비좁은 범위를 넘어서 시민 공동체를 체험할 수 있다. 대화 속에서 우리는 다양성 안에 있는 공공선을 발견할 수도 있다. 이런 종류의 기회를 제공하는 장소가 사회속에 풍부할 때 우리 국민은 철학적인 관념이 아니라 생동하는 실체가 될 수 있다.
길거리는 잠재적으로만이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민주주의를 뒷받침한다. 1960년대의 민권운동이 그것을 증언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인종적 불의에 저항하기 위해 길거리를 택했고 거리를 메운 군중은 평화 시위로 민주적인 권리를 요구했다.
민주주의에서의 공적인 권력
한 사회가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로 흘러가기 시작할 때 가장 먼저 차단되는 장소는 공적인 삶이 영위되는 곳들이다. 정치와 사생활이 상대적인 질서의 영역인데 비해 공적 영역은 예측과 통제가 불가능한 무질서로 가득차 있다. 우리는 사생활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공공성의 위축에 대해 거의 망각하고 있다. 공적인 삶의 쇠퇴에 대해 계속 무관심하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사생활도 결국 무너질 것이다.
공적인 삶을 위한 공간의 회복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할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일상적으로 참여할 공적인 삶의 장소와 활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공적인 삶을 갱신하는 한 가지 열쇠는 그것이 요구하는 환대의 공간을 물리적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도시 디자인 분야 전문가들에 따르면 낯선 사람들이 어울릴 수 있는 장소의 창조를 한결같이 강조함. 도시의 근린 지역 내에 집, 상가, 공원, 공립학교, 직장, 예배장소, 영화관, 커피숍, 바 같은 것이 있다면 공적인 삶이 생동할 것.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도시수리 프로젝트) 교차로 주변 모퉁이마다 구조물 설치. 벤치, 대출 도서관, 24시간 찻집, 아이들의 놀이방, 지역의 정보를 제공하는 키오스크. 주민들이 교차로에 모이는 장소를 만들수 있는 조례를 시의회에서 통과. 이후에 200개 이상의 주요 현장과 300개의 작은 프로젝트 추진
이웃의 약속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낯선 이들은 대개 이웃. 이웃과의 유대 강화를 위한 창조적 행동들 - 범죄 예방을 위한 동네 감시프로그램, 커뮤니티 정원, 동네의 자원 목록, 지역 변화 대응을 위한 거실세미나
동네의 자원 목록 : 자발적인 서비스 목록 제출(애완동물돌봄 환자방문 집수리등), 서비스 시간 제한(집수리는 일주일에 3시간), 목록의 수명은 3개월, 지역 모임 연합체가 기재사항들을 점검 출판 모니터링
공공의 삶을 상상하기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형성하고 배양할 때 낯선 이들의 대면적 경험이 중요. 경험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꿀 수 있지만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보는 눈이 경험의 의미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길에서 노숙인이 다가와 돈을 달라고 할때 “타자성”과의 이러한 대면의 질은 내가 어떤 상상력을 결부시키는가에 좌우된다.
두려운 상상력의 렌즈를 낀다면 나는 이 사람을 위협으로 바라본다. 더욱 도전적인 것은 그는 나로 하여금 빈곤과 노숙을 똑바로 쳐다보도록 강요했다. 내가 애써 외면하고 싶은 현실. 그래서 이 낯선 사람이 나의 학습된 무관심 지대를 침입하여 마음을 심란하게 한 것에 대해 짜증이나 분노를 느낀다. 사회학자 밀스가 말한 “사회학적 상상력”이란 렌즈로 바라보면 노숙인은 미국 사회의 흠을 볼수 있는 자료가 됨.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에서 사회적 안정망이 없다는 것. 성인 노숙인의 1/4 정도가 참전 용사라는 사실들을 상기시킴. 또 다른 렌즈는 연민의 상상력. 낯선 사람들과 함께하는 경험이 시민 공동체 의식을 심화하고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를 배양하도록 하려 한다면 연민적인 상상력의 렌즈가 필수적이다.
6장. 교실과 종교 공동체
인문학은 불가피하게 정치적이다. 우리의 비전을 복잡하게 만들고 소중하게 간직해온 생각들을 뿌리째 뽑아버리며 독실한 믿음을 깎아내리기 때문이다. 즉 불확실성이 자라나게 하기 때문이다. 관용의 경계를 긋고 다시 긋도록 강요하면서까지 우리의 이해와 연민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오늘날 고부담 시험high stake testing은 많은 공립학교를 좋은 시민을 길어내는 역사적인 기능으로부터 빗나게함. 고등교육이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길러내기보다는 직업 훈련에 더욱 집중하고 있음.
맏을 만한 평가에 따르면 대체로 3명중 1명이 한달에 적어도 한두번 정도 어떤 형태로든 예배에 참석함. 종교적 확신이 우리를 이따금 갈라놓는 것은 분명하다. 토크빌은 교실과 종교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미국 민주주의의 미래에 결정적일 것으로 보았지만 종교 공동체가 미국의 민주주의에 기여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었던 많은 사람 가운데 한명이다.(가톨릭의 형식성 vs. 미국의 복음주의 기독교)
교실과 종교 공동체의 공통점
(철학자 제이콥 니들먼) 미국이라는 국가의 가장 위대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모든 남녀가 내면의 탐구에 필요한 조건과 동료를 찾을 권리를 보호하고 지키는 것이다. 인간됨의 핵심에 있는 내면 탐구에 긍정적인 역할을 공교육이 떠맡을 수 있었는데도 국교를 금하는 수정헌법 제1조의 지나친 확대 해석 때문에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는 것이 개탄스럽고 비극적이기까지 하다.
정교분리의 위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좋은 삶”이 무엇이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등 비교리적인 내면의 쟁점을 학생들이 다룰 수 있도록 돕는 학교의 역할에 우리는 불필요한 제한을 가해왔다. 교사가 내면에 관련된 여러 질문과 씨름하도록 학생들을 초대할 때 마치 살얼음을 걷는 듯 느낀다면 민주주의는 위축된다. 나는 퀘이커교도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 신앙 때문에 영국의 기성종교 재판관들에 의해 박해받고 투옥되고 때로는 처형되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의문에 대해 인내하라. 질문 그 자체를 사랑하라. 답을 구하지 말라. 그것을 살지 못하기 때문에 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핵심은 모든 것을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질문들을 살아라. 그러면 서서히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먼 훗날 그 답을 살고 있을 것이다.
공교육과 내면 탐구
내면의 삶에 관련된 질문은 우리가 가르치는 모든 과목에 연관되어 있다. 단 우리가 그것을 단지 사실과 개념들의 집적이 아니라 의미의 장으로도 가르친다면 말이다. 자기의 자아보다 커다란 실재에 대해 성찰하도록 그리고 죽음이 아닌 생명을 가져다주는 실재들과의 연결을 통해 의미와 목적을 찾는 법을 배우도록 학생들을 이끄는 것보다 중요한 교육 과제는 없다.
어떻게 하면 전통적인 과목을 가르치면서 학생들이 결정적인 선택을 성찰하도록 이끌 수 있을까?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 하나는 그 과목에 담겨 있는 “큰 이야기”를 학생의 삶에 있는 “작은 이야기”와 분명하게 연켤시키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역사)
학교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기
교실에서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을 가르치고 싶다면 학생들이 자신의 내적인 잠재력을 탐구하도록 도와야 한다. 동시에 학교 공동체에서 더 커다란 시민 공동체에서 그들의 외적인 잠재력을 탐구하도록 돕고 행동 속에서 민주주의를 대면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학교는 커뮤니티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보다 평등하고 정직하며 보다 유의미하며 사람들을 환대하고 실제 생각이 일어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능력은 사회 변화의 핵심 장소인 학교에 뿌리를 두고 있고 학교의 모습과 교실벽 한팎에서 이뤄지는 배움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근본으로 한다.
버지니아주 햄프턴의 ‘청소년 시민 참여’ 프로그램 : 1990년 공립학교와 연계하여 수립. 청소년에게 지역사회 거버넌스에 참여시킴. 지역 서비스 프로젝트, 시위원회에도 참여시킴. 20년된 햄프턴 프로그램은 장기적인 결실을 냄. 그 도시의 대학생들은 시민 담론에 참여하는 능력, 지역사회에 대한 열정, 리더십 기술 세가지 척도에서 또래 집단을 능가함. 지자체 선거의 투표율이 다른 비슷한 도시에 비해 20% 높음. 이와 더불어 지역사회 참여 프로그램이 학생들의 학업 성취도도 향상시킴
감춰진 커리큘럼
학생들은 배우는 무엇에서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배우는가에 대해서도 학습한다. 교실 안에 있는 관계의 역동이 주는 영향은 학생들이 시험공부를 위해 암기한 정보보다 오랫동안 지속됨. 애매함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긴장을 창조적으로 끌어안는 방법를 결코 배우지 못함. 전문지식의 숭배 속에서 확실성에 대한 주장만이 있을 뿐이다. 전문가 숭배는 교육의 임무를 왜곡하고 민주주의를 쇠퇴시킨다.
아이러니한 점은 과학의 발생이 새로운 사제 계급과 권력자들을 출현시켰다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주관적인 진리의 미개한 문화를 초월하도록 하면서 민주주의에 기여했던 바로 그 과학이 독재의 발생을 지지하는 대중적인 심성을 창출하기도 했다. “나는 이 문제에 관한 문외한이다. 그 방면에 전문가가 있다고 들었다. 그러니 그 권위에 의사결정을 맡긴다.” 이렇듯 과학의 축복이 이면에 어둠을 지니고 있음을 감안할 때 학교가 과학교육으로 치닫도록 압박을 받으면서 비관습적인 각도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질문을 파고들도록 요구하는 인문학을 희생시킨다면 민주주의는 위험에 빠진다.
(작가 마크 슬루카) 인문학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될 것인가를 점진적으로 끊임없이 가르친다. 그 방법은 직면하게 하는 것이고 이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이성적으로 탐구하는 것이다. 질문을 통해 형성되고 곧바로 굴복하지 않는 개인, 강제에 저항하고 모든 형태의 조작과 선동에 맞서는 개인의 출현..간단히 말해서 인문학은 우리가 민주적 가치라고 부르는 것을 전달하는 최고의 메커니즘이다. 내가 아는 한 그보다 훌륭한 것은 없다
종교 공동체와 마음의 습관
연민의 원리는 모든 종교적, 윤리적, 영적 전통의 핵심에 놓여 있다. 자신이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들을 대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말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의 역동..관계의 역동이 교리의 설교나 가르침보다 신도들에게 더 많은 영향을 끼침. “우리는 자신의 필요와 걱정을 서로에게 알릴 수 있을 만큼 충분하게 구성원의 선의를 신뢰하는가?”(고대사회 낯선 사람들이 초기 기독교회에 가입해야 했던 이유)
성서와 교리에 있는 말씀에도 불구하고 연민이 제대로 발휘되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 잡히게 된다. “동질적인 백인 신도 집단 같은 것을 없습니다. 실제 자기의 삶을 서로에게 보여주면 공동체가 흔들릴까 무서워서 자신 안에 중대한 차이가 없는 척하는 백인 집단이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신도들이 자기 안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향해서 마음을 연다면 민주주의의 다양성을 향해서도 마음을 열 것이다.
권력과 저녁식사 파티
워싱턴 D.C 가난에 찌들고 범죄에 멍든 동네에서 지역 복리에 크게 기여한 어느 대형 흑인 침례교회의 저녁식사 파티 : 깊은 환대 속에서 이뤄지는 정직하고 열린 대화가 교회의 지속적인 프로그램으로 이뤄지면서 논쟁적이고 고통스러운 시사 쟁점을 둘러싼 치유와 시민 연합의 씨앗이 뿌려질 수 있다.
의사결정과 상담
민주적인 마음의 습관이 자라나도록 종교 집단이 수행할 수 있는 기능이 두 가지 더 있음. 공동체적인 의사를 결정하는 것과 개인적인 상담을 제공하는 것.
집단의 의사결정에는 두 가지 방법. 다수결과 합의.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면 승패가 있는 경기를 벌이게 된다. 그 결과가 내게 중요하다면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내 편인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같은 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잘못 짚거나 빗나갔다고 여겨지는 것만 챙겨 듣고 내가 동의할 수도 있는 부분들은 애써 무시해버린다. 이 경기의 규칙은 우리가 적대적으로 듣고 말하도록 강요하면서 양쪽 사이의 긴장을 상승시켜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바로 그 때문에 쟁점이 충분하게 논의되기 훨씬 이전에 어떤 사람이 “투표를 제안”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합의로 의사결정을 할 때 상대방이 말해야 하는 것을 더욱 열린 마음으로 듣게 된다. 상대방과 합류할 수 있는 지점과 둘 사이의 차이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을 찾으면서 경청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인내를 요구하지만 애당초 생각지도 못했던 훌륭한 해결책이 나올 수 있을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만족하는 승자와 언짢은 패자의 두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대신 공동체 의식이 깊어질 수 있다.
‘명료화 모임’이라는 퀘어커교의 절차 : 5~6명의 참석자가 중심인물과 함께 둘러앉는다. 그가 씨름하고 있는 문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에 관해 스스로 명료해질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 모임 참가자는 중심인물을 교정하거나 충고하거나 구제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참가자들은 정직하고 열린 질문으로만 중심인물에게 말을 건네야 한다.
환대의 신학
결국 모든 신앙이나 이성의 전통을 추종하는 자들인 직면해온 도전은 우리가 공적인 삶에서 직면하는 것과 똑같다. 낯선 사람 그리고 낯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자기 안에서 그리고 주변에서 발견되는 성가시면서도 생기가 넘치는 신비에 우리 자신을 열어야 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묘사했던 용기 있는 환대를 신자들이 키워갈 수 있도록 종교 공동체가 도울 수 있다면 그들 자신과 전통 그리고 민주주의의 책무에도 보탬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