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실록 60권, 선조 28년 2월 10일 계축 6번째기사 1595년 명 만력(萬曆) 23년
접반사 이시발이 서계로 진 유격과 소서행장의 접촉에 대하여 아뢰다
진 유격(陳遊擊)의 접반사 이시발(李時發)이 서계(書啓)하였다.
"정월 12일에 일찌감치 진 유격을 따라 유천(楡川)에서 출발하여 밀양(密陽)을 지나 김해(金海)에 정박하였는데, 죽도(竹島)의 진영에 있는 소장(小將)이 배 위에 와서 보고 식사를 청하여 그대로 그곳에서 잤습니다. 그 진영의 기지는 넓이가 평양 정도나 되었는데, 3면이 강에 임해 있으며목성(木城)으로 둘러쌓고 토성(土城)으로 거듭 쌓은 다음 안에는 석성(石城)을 쌓았으며, 높고 웅장한 누각은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고 크고 작은 토우(土宇)가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한 조각 공지도 없는 것 같았으며, 규모가 만여 명의 군사를 수용할 만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선박들은 성 밑에 줄지어 매어 있었는데, 그 수를 기억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에게 붙어있는 우리 백성들은 성밖에 막을 치고 곳곳에서 둔전(屯田)을 짓고 고기를 잡아 생활을 하였습니다.
임 통사(林通事)라고 일컫는 사람이 행장(行長)의 명으로 와서 진 유격을 시봉하였는데, 그는 바로 절강(浙江) 온주(溫州) 사람으로서 13세에 일본에 포로가 되었고 처자들이 그곳에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13일 조반 후에 배를 출발하였는데, 지나면서 바라보니 감동포(甘同浦)·천성포(天城浦)·안골포(安骨浦) 등처에 모두 왜적의 진영을 설치하였습니다. 크고 작은 것은 같지 않았으나 성지(城池)의 견고함과 옥우(屋宇)의 주밀함은 대부분 서로 같았습니다. 작은 배 한척이 쑥대로 가리고 나는듯이 외양(外洋)을 향해 가는 것을 바라보고 물었더니 ‘일본에 들어가는 배인데 보고할 일이 있으면 이처럼 연달아 간다.’ 하였습니다. ‘진 노야(陳老爺)가 들어온 일도 벌써 보고하러 갔느냐?’고 물었더니 ‘일찍이 급보를 했다.’ 하였습니다.
행장이 보낸 소장(小將)【바로 행장의 친동생이다. 행장은 원래 4형제였는데, 하나는 평양에서 죽었다고 한다. 】 이 쾌속선(快速船)을 타고 와서 중로에서 문안하고 먼저 배를 돌려 돌아갔는데, 빠르기가 나는 새와 같아서 순식간에 멀리 사라졌습니다. 좌우에서 노를 젓는 자가 각각 18명씩이었습니다. 행장이 또 소장을 보내서 문안하였는데, 선후의 배는 4척이었고, 4척의 배는 좌우로 끼고 전진하였습니다.
미시(未時)에 행장의 진영 아래에 이르러 정박하였습니다. 진영은 해안에 있는 한산에 설치하였는데 산세가 매우 험준하였고, 석성(石城)을 둘러 쌓고 위에 목책(木柵)을 첨가하였는데 주위가 6∼7리나 되었고 산을 깎아서 못을 만들고 차례로 잇대어 집을 지었으며, 바다를 메워서 성을 쌓고 벌여 있는 별처럼 문을 냈는데 그 문은 바로 선박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진 유격이 관대(冠帶)에 망룡의(蟒龍衣)를 입고 배에서 내려 진영에 들어가니, 구경하는 남녀가 거리를 메웠습니다. 장랑(長廊)의 양면에는 가게를 열어서 물건을 사고 팔았는데, 물건은 대부분 해산물이었습니다. 진 유격이 여관에 드니, 행장이 소장을 보내 말하기를 ‘마땅히 20리 밖에 나가서 영접했어야 하는데 마침 신병을 앓고 있어서 그렇게 못하였으므로 죄송하다.’ 하자, 진 유격은 매우 불쾌한 사색으로 답하기를 ‘주인이 손님에 대하여 영접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황조(皇朝)에서 은혜를 베풀어 봉왕을 허락했고 나는 명지(明旨)를 받들고 와서 선유하는 사람이니, 더욱 영접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실제로 신병이 있다면 별수 있겠느냐.’ 하였습니다.
담 도사(譚都司)가 와서 절하고 말하기를 ‘갈망하는 심정이 매우 괴로왔는데 노야가 지금 왔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하니, 진 유격이 말하기를 ‘석 노야(石老爺)가 양국의 생령을 위하여 시비의 논의도 불고하고 이 일을 주관하여 나를 보내 선유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매우 바쁘게 나왔다. 이 일은 앞서 과도(科道)056) 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음으로 인하여 오래도록 합의를 보지 못하였는데, 석 노야가 혼자 담당하고 나서서 여러번 제청(題請)하기에 이르렀고, 또 조선 국왕이 이를 위하여 올린 주본(奏本)에 힘입어 비로소 준허가 내려짐을 얻게 되었으니, 이는 어찌 양국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담 도사가 말하기를 ‘왜인도 4년 동안이나 이역에 머물렀으니 형편상 반드시 철수해 돌아가고 싶어할 것이나 다만 사체에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해서 그러고 있을 뿐이데, 저들의 머무는 기일이 도로 멀어질까 염려된다. 행장이 전년부터 소식을 기대하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여 장관(將官) 같은 높은 사행은 감히 바라지도 않고 비록 두세 명의 군병이 들어온다 하더라도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한번 표문(表文)을 올린 뒤로 오랫동안 소식이 끊어졌다. 간혹 군문(軍門) 등에서 야불수(夜不收)를 보내기도 하였으나 어떻게 그 속사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겠는가. 행장이 망루(望樓)를 지었을 때 나와 함께 포대에 올라갔었는데, 해양을 오가는 배 위에 혹시 모자를 쓴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의심하기를 「저 사람은 바로 천조의 사신이 아닌가?」 하였다. 그는 이처럼 고대하였는데, 그쪽에서는 별로 이렇다 저렇다하는 소식이 없었다. 나도 사람을 시켜 품첩(稟帖)을 군문(軍門)과 병부(兵部) 등 여러 아문에 보냈으나 첫 번째도 돌아오지 않고 두 번째도 돌아오지 않고 세 번째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렇게 시일이 미루어지니 그가 어찌 마음이 초조하지 않겠는가. 이제 노야가 명지를 받들고 여기에 왔으니, 흠차관(欽差官)057) 으로서 여기에 들어온 사람은 노야 한 분뿐이다. 내일 노야가 그에게 두세 마디만 설명해 주어도 그는 반드시 명령에 복종할 것이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곳에는 근래에 한 낭설이 떠돌고 있다. 이 때문에 행장은 의혹을 갖는다. 그것은 바로 「조정이 비록 소서비(小西飛)를 경사에 들어가게 했으나 관문을 맡은 장관(將官)이 막았기 때문에 관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길을 따라서 모처로 갔다. 」는 말이다. 행장이 이 말을 듣고 괴상하게 여겨 나에게 묻기를 「그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기에, 나는 답하기를 「필시 그럴 리가 없다. 그 관문을 경유하지 않고서는 달리 들어가는 길이 없다. 말이 너무도 근거가 없으니 어찌 의심할 것 있겠는가. 」 하였으나, 행장은 오히려 의혹을 풀지 않는데, 이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하니, 진 유격이 말하기를 ‘내가 요양(遼陽)에 있을 때 소서비를 보내 관문에 들어가게 하였는데, 요 유격(姚遊擊)이 왕지(王旨)를 받들고 그를 인솔해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 흠차관이 앞에 서서 가는데 누가 감히 막겠는가. 이는 필시 심가왕(沈嘉旺) 등의 그릇된 말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담 도사가 또 ‘심유경(沈惟敬)이 나를 속여 일을 그르쳐서 나로 하여금 곤란을 받게 했다.’는 등의 말을 하였는데, 말에는 매우 분한이 많았습니다. 담 도사가 또 ‘도원수는 어느 곳에 있느냐?’고 물으니, 진 유격은 답하기를 ‘내가 볼 때는 남원(南原)에 있었고 병마 장령(兵馬將領)의 경우는 좌·우도에 포진해 있는 자들이 역시 많았다.’ 하였습니다. 담 도사가 말하기를 ‘조선 사람도 서로 왕래하고 있다.’ 하니, 진 유격이 말하기를 ‘매우 좋은 현상이다. 일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담 도사가 떠난 뒤에 진 유격은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임 통사를 불러서 말하기를 ‘행장이 보러 오면 그를 만나보고 오지 않으면 관대를 벗어야겠으니, 속히 말을 전하라.’ 하였더니, 임 통사가 조금 후에 돌아와서 말하기를 ‘노야가 식사를 한 뒤에 와서 뵙겠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식사 후에 행장이 찾아오니, 진 유격이 의자 위에 앉아 병부의 패(牌)를 가져다 북쪽 벽에 세워 놓고 말하기를 ‘이 패 속에 황상의 성지가 들어 있으니 행장은 먼저 이 패에 참배하라.’ 하니, 행장은 몸을 굽혀 합장하고 【이것이 바로 왜의 예법이라고 한다. 】진 유격의 앞에 와서도 또한 그와 같이 하였습니다. 현소(玄蘇)와 죽계(竹溪)가 차례로 앉았습니다. 【진 유격은 의자에 앉고 행장 등은 모두 평좌하였습니다. 】행장은 황의(黃衣)를 입고 과두(裹頭)를 하였으며, 현소와 죽계는 당건(唐巾)을 쓰고 흑삼(黑衫)을 입었습니다. 행장이 말하기를 ‘날은 차고 길은 먼데 노야는 고생이 많았다.’ 하니, 진 유격이 말하기를 ‘내가 중화에 있을 때 행장은 바로 일본의 어진 장수요, 현소와 죽계 등은 모두 고승(高僧)이란 말을 익히 듣고 한번 만나보고 싶었으나 만날 길이 없었다. 마침 황상이 너희의 봉왕을 준허하셔서 내가 명지를 받들고 나와 오늘의 상봉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천재 일우의 행운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행장이 말하기를 ‘노야가 배로 멀리 오느라 노고가 심할 것이므로 감히 오래 모실 수 없으니, 내일 나의 집으로 와서 이야기하기를 청한다.’ 하니, 진 유격이 말하기를 ‘병부 석 노야가 너희의 이 일을 위하여 남의 꾸지람을 얼마나 받았는지 모르며 남의 논박을 얼마나 입었는지 모른다. 그러면서도 오히려 단독으로 담당하여 이 일을 끝내 주관하였다. 그래서 나를 급히 파견하여 이 뜻을 먼저 유시하게 하였으니, 너희들은 나를 보는 것이 곧 석 노야의 면목을 직접 보는 것이나 다름없다.’ 하였는데, 행장은 답하지 않고 물러갔습니다.
신이 이해룡(李海龍)과 함께 진 유격에게 말하기를 ‘행장의 얼굴에 희색이 없고 말에 있어서는 대답하지 않는 점이 많으며, 그의 사색에는 의심할 만한 것이 많이 있었다.’ 하니, 유대무(兪大武)가 말하기를 ‘내가 전일 볼 때도 이와 같은 모양이었으니 본시 성품과 태도가 이와 같을 뿐이다.’ 하였습니다. 진 유격이 통사에게 묻기를 ‘행장이 낙 수비(駱守備)에게 가서 기(旗)에 참배하였는가, 하지 않았는가?’ 하니, 하지 않았다고 통사가 말하자, 진 유격은 말하기를 ‘낙야(駱爺)는 바로 경략이 차임해 보낸 사람이며, 그가 가진 조정의 기는 바로 황제의 영(令)이니, 가서 참배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통사는 급히 가서 행장에게 알리라.’ 하였습니다. 조금 후에 진 유격이 신을 불러서 웃으며 말하기를 ‘행장이 낙야의 처소에 가서 기에 참배했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진 유격이 처음에는 행장의 사색에 의심을 가지다가 곧 가서 기에 참배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가 명령에 순종함을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저녁에는 진 유격이 유 대무를 시켜 담 도사를 만나본 뒤에 그 길로 가서 행장을 만나보게 하였는데, 별로 긴요한 얘기는 없었다고 합니다.
14일 아침에는 진 유격이 가정(家丁)들에게 주의시키기를 ‘내가 행장을 만나 볼 때에 호령을 엄숙히 하고 진영을 정제할 것이며, 심상치 않은 무리를 너희는 십분 근신하여 혹시라도 사단을 일으켜 천조의 체면을 손상치 않게 하라. 어길 것 같으면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소서비(小西飛)의 아들이 찾아와 보았는데, 나이는 17, 18세쯤 되고 용모는 영특하게 생겼습니다. 진 유격이 말하기를 ‘내가 요양(遼陽)에 있을 때 너의 아비를 보고 사랑하여 은패(銀牌)를 상으로 주었다. 요 유격(姚遊擊)이 나와 함께 나가 호송하여 경사에 들어갔더니, 조정에서 상연(賞宴)을 베풀어 주었다. 또 지시할 말이 있어 뒤에 곧 나올 터이니, 너는 오래지 않아서 아비를 보게 될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아비와 아들을 사랑해 주니 감격을 이기지 못하겠다.’ 하였습니다.
식후에 진 유격이 담 도사를 찾아가 배알하고 한담을 나누다가 조금 후에 좌우에 있는 사람을 물리치고 한참 동안 밀담을 하였는데,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올 때에 진 유격이 신과 이해룡으로 하여금 머리를 조아리고 담 도사를 보게 하였는데, 담 도사가 ‘이 사람들은 누군인가?’ 하니, 진 유격이 말하기를 ‘내가 말한 두 사람이다.’ 하였습니다. 【밀담할 때에 진 유격이 담 도사에게 말하기를 ‘조선이 여기 사정을 믿지 않기 때문에 내가 낭중 배신(郞中陪臣) 한 사람과 대통사(大通事) 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그들로 하여금 직접 참관하게 하였으므로, 곧 두 사람이 위장하여 따라왔다.’ 하니, 담 도사가 말하기를 ‘데려오기를 참 잘했다.’ 하였습니다. 】
오후에 행장이 진 유격 및 담 도사·낙 수비·유 대무를 자기 집으로 청하였습니다. 진 유격이 가니, 행장은 중관(中關)에서 나와 방안으로 맞아들였으며, 현소·죽계·평조신(平調信)이 와서 앉았습니다. 네 벽에 금병(金屛)이 쳐 있는 등 거처가 극히 호사스러웠습니다. 문을 닫고 대화를 하였습니다. 밖에서는 큰 집을 짓고 있어 이미 들보와 서까래를 올렸는데, 나무를 베는 소리가 산을 진동하였습니다. 진 유격이 웃으며 행장에게 말하기를 ‘많은 군사를 노역시켜 저런 큰 집을 짓고 있는데, 여기서 며칠을 머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많아도 3개월에 불과할 터인데 여러 사람을 고생시키지 말고 좀 쉬게 하라.’ 하니, 행장이 답하기를 ‘천사 아문을 만들려고 하니 짓지 않을 수 없다. 천사가 나온다면 철수해 돌아가는 날에 불태우고 갈 터인데 무슨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밥과 술을 들기를 청하였는데, 술상은 간결하였고 색다른 음식이 교대로 나왔습니다.
진 유격이 행장에게 말하기를 ‘이는 천재 일우의 좋은 모임이니 세 나라의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습니다. 자리에 있던 유 대무가 말하기를 ‘전일에 떠나올 때 노상에서 병을 앓았었다.’ 하니, 담 도사가 말하기를 ‘집 생각하는 병이 아닌가?’ 하자, 유 대무가 웃으며 ‘정말 그렇다.’고 말하였습니다. 담 도사가 희롱조로 말하기를 ‘공은 겨우 이르자마자 집 생각에 병이 났는가. 나는 이역에 있은지 4년이나 되는데 어떻게 지냈겠는가. 나도 그렇다.’ 하고, 시험삼아 행장에게 묻기를 ‘당신도 몇 년이나 되는가?’ 하니, 행장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에 있은 지 4년이다.’ 하였습니다. 유 대무가 웃으며 말하기를 ‘사람의 마음을 가진 자는 집을 생각할 것이고 사람의 마음을 가지지 않은 자는 집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하니, 행장은 듣고 크게 웃었으며, 좌중이 온통 박장 대소하였습니다.
유 대무가 붓을 잡고 시를 지으니, 현소가 화답하였습니다. 주령(酒令)을 마련해 내기를 ‘술 한 방울 떨어뜨린 자는 벌을 준다.’고 하였는데, 조금 후에 행장이 술을 두 방울 떨어뜨리자 술 두잔으로 벌을 주었습니다. 진 유격이 유쾌하게 마시자, 행장이 말하기를 ‘소장에게 들으니, 노야는 도중에서 절대 술을 들지 않더라고 하기에 나는 매우 무료하게 여겼는데, 이제 모시는 자리에서 다행히 몇 잔을 다 드니 매우 감사하다.’ 하였습니다. 진 유격은 혹 의자에 앉기도 하고 혹은 의자에서 내려 앉기도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평좌하였습니다. 술이 취하자 진 유격은 담 도사·낙 수비 등과 욕실(浴室)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고 나서 다시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행장 등은 그들 방으로 갔다가 얼마 후에 나와서 또 한담을 나누었습니다.
파할 임시에 진 유격이 분부하기를 ‘조정이 관백을 봉하기 전에는 일본은 일본대로 한 나라, 조선은 조선대로 한 나라, 천조는 천조대로 한 나라였었는데, 이제 관백이 천조에 봉군(封君)을 받으니 곧 조선도 속국이고 일본도 속국이다. 천조는 부모의 나라요 일본과 조선은 형제의 나라이니 바로 한 집안이 된 것이다. 지금부터는 두 집이란 말을 할 필요가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너의 서신을 보니, 유 찬획(兪贊畫)이 떠난 뒤에 곧 군사를 철수해 귀국하겠다 하였는데 이미 얼마나 보냈는지 모르겠다.’ 하니, 답하기를 ‘이미 보낸 자는 5천 명이고 단지 궁한 백성만 여기에서 장사를 하고 있을 뿐인데, 그 수가 얼마 안 된다.’ 하고, 담 도사도 ‘이미 떠난 자가 5천여 명이다.’ 하였습니다. 진 유격이 행장에게 분부하기를 ‘석 노야가 너희를 위하여 이 한 가지 일에 힘을 다 쏟고 남들의 꾸지람을 들을 대로 들어가면서 종시 주장하여 오늘날에 성사할 수 있게 하였으니, 그의 노고가 지극하고 은혜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너희들은 무엇으로 보답하겠느냐?’ 하였습니다. 행장이 현소로 하여금 쓰게 하기를 ‘오늘은 주객이 다 취했으니, 다시 내일 대화하자.’ 하였습니다. 파하고 돌아오니, 행장이 중합(中閤) 밖에까지 나와서 전송하였습니다.
행장의 아우인 소장이 왜통사(倭通事) 이언서(李彦瑞)를 불러서 말하기를 ‘들으니, 너희 나라에서 항왜(降倭)를 후대하기 때문에 앞을 다투어 서로 투항하여 들어간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현재 있는 수가 얼마인가?’ 하므로, 이언서가 답하기를 ‘나는 알지 못한다.’ 하니, 행장의 아우가 말하기를 ‘나는 자세히 들었다. 가사 난처한 일이 있으면 우리들도 투항해 가려 하는데 너의 나라에서 또한 후대해 줄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15일은 바로 상원절(上元節)이었는데 【왜국은 보름날 그 다음 날을 15일이라고 한다. 】안팎의 가정(家丁)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예를 행하였습니다.
식후에 담 도사와 낙 수비가 찾아와서 술 마시기를 청하였습니다. 오후에 행장·현소·죽계·평조신(平調信) 등이 찾아와서 문을 닫고 막 강화하려 하는데, 행장은 인사하고 떠났습니다. 진 유격이 행장에게 대홍단(大紅緞) 1필, 화릉(花綾) 2필, 흉배(胸背) 1대(對)를 보냈더니, 행장은 감사하다고 하고 술 1통, 물고기 2마리, 귤 1포를 보내왔습니다.
진 유격이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이미 여기에 이르러 선물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모모의 물품을 보내고 보니, 도합 15∼16냥의 은자(銀子)가 들었다. 이는 모두 집에서 사사로이 가져 온 것인데 이번 길에 쓴 것이 얼마인지 모르겠다.’ 하였습니다.
저녁에 진 유격이 유 대무로 하여금 행장을 찾아가 보고 ‘일찍 철수해 돌아가서 일이 잘 마무리되게 하면 우리들도 흔쾌히 거창(居昌)·남원(南原) 등지에 가서 천사를 영접할 계획이다…….’고 타이르게 하였더니, 행장이 답하기를 ‘이쪽 사정은 관백도 명백히 모르니, 내가 마땅히 3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곧장 관백에게 가서 면대하여 보고한 뒤에 곧바로 나와서 천사를 영접하고 각 진영의 군사를 일제히 철수해 돌아갈 계획이다. 또 노야는 남원 등지에 나아가 머무르려 하나 그곳 역시 천조의 지방이 아니니, 차라리 우리 진영에 머물러 있다가 내가 나온 뒤에 돌아가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습니다.
16일 아침에 진 유격이 임 통사를 불러서 행장에게 말을 전하게 하기를 ‘너희들이 당초에 부산으로 물러가 머물러 있으면서 책봉을 요구하고 조공을 요구하였으니, 천조에서 어떻게 믿을 수 있었겠는가. 또 봉공(封貢) 문제를 놓고 6과(科) 13도(道)에서 시비 장단에 대한 논의가 고조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복건(福建)에서 왜선(倭船)을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왔고 영파(寧波)에서도 왜선을 잡음으로 해서 조정에서는 더욱 왜국을 믿지 않았는데, 오직 석 노야만이 너희의 거짓이 없는 심정을 통찰하였다. 또 왜선을 조사한 결과 풍랑에 표류된 것이지 도적질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이 분명하였다. 그래서 석 노야는 혼자 힘으로 그 일을 담당하여 책봉을 허락해 줄 것을 제청(題請)한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고, 또 조선에서 한 주본을 올려서 너희들이 분수를 지키고 군사를 철수한다는 등의 사정을 칭술하였으므로 성지(聖旨)가 내려져서 책봉의 일이 이미 정해졌다. 다만, 너희들이 실제 소식을 기다리다 못해서 애가 탈까 염려한 때문에 특별히 두 유격(遊擊)을 차송하였으니, 하나는 소서비(小西飛)를 데리고 경사에 들어가고, 하나는 부산에 머물러 선유하여 철수해 돌아가는 일을 독촉하게 하였다. 너희들은 장차 무엇으로 이 은혜를 보답하겠느냐? 반드시 패(牌)의 뜻에 의거하여 진영의 군중을 철수해 돌아감으로써 석 노야가 듣고 기뻐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돌아가서 어떻게 말하겠느냐. 만일 다 철수하기 어려우면 진영 중의 초방(草房)을 불태우고 헐어서 철수해 돌아가리라는 상황만이라도 보이는 것이 가하다. 누가 와서 일일이 조사하며 점검하겠느냐. 나는 단지 목격한 것만으로 회보하면 조정에서는 더욱 너희의 공순함을 가상히 여길 것이고 천사도 속히 도착할 것이다.’ 하였더니, 조금 후에 통사가 돌아와서 말하기를 ‘행장이 말하기를 「종전에 왕래한 차관(差官)들의 많고 적은 말들은 모두 무익한 데로 돌아가고 지금 노야의 명백한 지시를 받으니 기쁨을 견디지 못하겠다. 다만 처음에는 내가 돌아가서 관백을 보고 오는 동안에 노야가 여기에 잠간 머물러서 천사를 기다리게 하려고 하였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바닷길 풍랑 속에 왕복 일자를 예기하기 어렵고 만일 천사가 갑자기 당도하면 누가 장차 영접하겠으며, 또 노야가 여기에 머무르면 조정에서 반드시 의아심을 가질 것이니, 보고 듣기에 좋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노야는 나가서 천사를 영접하고 나도 여기에서 대기하는 편이 아예 나을 것이다. 각 진영에 따라 군사가 5천 명이면 먼저 2천 5백 명을 철수하고 1만 명이면 먼저 5천 명을 철수하여 절반씩 덜어서 보내되, 노야와 낙야가 각각 한 척의 배를 타고 외양(外洋)에까지 나가 확인하여 보내고 돌아와, 이것을 돌아가 보고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했다.’ 하였습니다. 진 유격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행장의 계책이 매우 묘하다. 곧 각 진영의 철수할 수를 명백히 적어 오라.’ 하였습니다.
이날 진 유격이 이해룡으로 하여금 유 대무의 서신을 가지고 가서 현소에게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내 해달피(海獺皮) 파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이해룡이 이언서와 함께 현소·죽계·평의지(平義智)·평조신(平調信)이 함께 쓰는 진영으로 갔는데 그 진영은 서쪽 변두리 8리쯤의 해안에 있는 높은 산에 위치해 있으며 행장의 진영에 비하여 조금 작다고 하였습니다. 평의지는 사냥하러 나갔고 현소 등은 진영에 있었는데, 현소가 이해룡에게 묻기를 ‘천사는 어느 때에 이르는가?’ 하자, 답하기를 ‘2월 초에 마땅히 이를 것인데, 다만 조선의 인마(人馬)가 고르지 못하여 중도에서 필시 지연될까 그것이 염려될 뿐이다. 그러나 2월을 넘기지 않고 나올 것이다.’ 하였습니다. 현소가 말하기를 ‘우리들은 조속히 대마도(對馬島)로 돌아가서 천사를 기다리고 싶은데, 단 종전에 공갈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반드시 여기에서 기다렸다가 천사가 오면 마땅히 귀국할 것이다.’ 하자, 이해룡이 말하기를 ‘이는 우리 천조가 너희 외이(外夷)에게 공갈한 것이 아니라 길이 멀다 보니 오가는 말들의 허실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희가 즉시 돌아가서 청을 올렸다면 조정에서 너희의 성실함을 보아서 조기에 이미 일을 완결하였을 것인데, 너희가 조선에 둔을 치고는 병력을 가지고 요구하니, 조선이 너희를 의심하고 조정에서도 너희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대소 관원들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오래도록 타협을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석 노야가 세 나라의 생령을 위하여 십분 생각해서 제청(題請)해 가지고 성지를 받든 다음 우리 진 노야를 먼저 차견하여 선유해서 돌아가기를 독촉케 하였으니, 이는 한 점도 허사가 아니다. 너희들이 오래지 않아서 고국으로 돌아가게 되면 곧 석 노야의 은혜를 알 것이다.’ 하니, 현소가 공수(拱手)하고 감사하다고 하였습니다. 현소가 이언서에게 묻기를 ‘천사가 나오면 수행 인원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니, 답하기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나 들으니 두 천사의 수행 인원은 반드시 수백여 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 하였습니다. 평조신이 말하기를 ‘우리들 생각에는 2∼3천명이 아니면 반드시 천 명은 될 것이라 여겼는데, 어찌 수백 명이란 초라한 소수를 말하는가. 천사를 모시고 본국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땅히 국민들로 하여금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려고 하니, 많을 수록 좋겠다.’ 하고, 또 이언서에게 묻기를 ‘우리들은 일찍이 철수해 돌아가야 하겠는데 너희 나라가 책봉하는 일을 억제한다고 하니, 이는 무슨 심사인가?’ 하자, 이언서가 답하기를 ‘책봉을 허락하는 여부는 천조의 소관인데 우리 나라가 어찌 감히 간여할 일인가.’ 하니, 평조신이 말하기를 ‘행장이 바야흐로 천조와 약조를 강정할 때 너희 나라의 전선(戰船)이 거제(臣濟)에 와서 정박하여 서로 싸울 계획을 하였으니, 조선이 책봉의 일을 억제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들이 여기에 있음으로 해서 너희 나라가 3년이나 농사를 짓지 못하여 백성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었는데, 너희 나라는 왜 우리들을 속히 돌아가지 못하게 하느냐?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은 단지 소나 말을 사려고 할 뿐이지, 우리들이 속히 돌아가는 일은 주선하지 않고 있다. 우리들이 속히 돌아간다면 너희에게 좋지 않겠는가. 또 너희 나라의 양반 승려가 두 번째 청정(淸正)의 진영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무슨 할 말이 있기에 그처럼 왕래하느냐? 두 왕자가 붙잡혔을 당시 행장이 관백에게 극진히 말해서 내보내게 되었는데, 너희 나라는 이런 공을 모르느냐……?’ 하였습니다.
이해룡이 돌아오자 진 유격이 ‘무슨 대화가 있었느냐?’ 물으니, 이해룡이 말하기를 ‘저들이 여차여차 묻기에 내가 여차여차 답하였다.’ 하자, 진 유격이 말하기를 ‘응답이 매우 좋았다. 나로 하여금 응답하게 했더라도 그에 불과하였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담 도사와 낙 수비가 찾아와서 밤새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17일 아침에 진 유격이 신들을 불러서 ‘즉일로 먼저 나가 인부와 말 등 여장을 준비하라. 나는 21일에 출발할 것이다.’ 하니, 유 대무가 말하기를 ‘일이 완결되지 않았으므로 먼저 보내는 것은 좋지 못하니, 결말을 보게 하라…….’ 하였기 때문에 정지하였습니다.
낙 수비가 찾아왔습니다. 진 유격이 유 대무와 담 도사의 비리에 대해 밀담하며 분노를 이기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대개 담 도사가 행장과 모의하여 진 유격을 더 머물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라 합니다. 그래서 진 유격은 그 소식을 듣고 그가 자기를 속인 것을 화낸 것이었습니다. 이윽고 담 도사와 둘 사이에는 사색이 매우 불쾌하였습니다.
오후에 진 유격은 담 도사·낙 수비와 함께 앉아서 술을 마셨습니다. 행장 등을 초청하니 행장은 모처로 술 마시러 나간다고 핑계했고, 현소·죽계·평조신만이 왔습니다. 진 유격이 분부하기를 ‘내가 여기에 온 지 이미 4∼5일이 되었는데 너희는 아직까지 분명한 의사가 없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너희들은 일찍 결정하라.’ 하니, 현소 등이 말하기를 ‘우리들인들 어찌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겠는가. 단 큰일이 완성되지 못해서 가벼이 물러갈 수 없다. 비록 천사가 가까운 시일에 나온다고 하나 종전에 천조가 우리를 너무 많이 속여서 우리들은 역시 믿을 수 없다. 만일 천사가 경성이나 남원 등처에 당도한다면 관백에게 보고할 필요없이 다 철수해 돌아갈 것이다.’ 하니, 진 유격이 말하기를 ‘이는 천조가 너희 나라를 속인 것이 아니라, 단 중화의 체면이 매우 크므로 모든 일을 가볍게 할 수 없어서였다. 하물며 이 일은 그 얼마나 큰일인가. 과도(科道)의 제신(諸臣)들의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1∼2년을 지체했으므로 사세가 그렇게 된 것이다. 지금은 석 노야가 너희를 위하여 많은 힘을 써서 주본을 올려 허락이 내려졌으니, 일이 매우 명백하여 전일의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단지 너희들을 선유하는 일만 담당했을 뿐이다. 철수하고 안 하고는 너희에게 달린 것이니, 나는 억지로 권하고 싶지 않다. 나는 단지 너희들이 명령을 듣지 않는 상황만을 파악해 돌아가서 병부에 보고할 뿐이니, 석 노야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른다. 너희들의 일이 완성되지 못할까 염려된다.’ 하니, 현소 등이 답하기를 ‘노야의 분부는 비록 이와 같지만 우리들이 평양에 있을 때 우리는 물러났는데 천조는 우리를 속였고, 용산에 있을 때도 우리들은 물러났는데 천조는 또한 우리를 속였다. 우리들은 한결같이 퇴축(退縮)하여 오래도록 해안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지방을 해치는 일이 없었고 또 관백에게 간절히 말하여 조선의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냈으니, 우리들의 공이 아닌 게 없다. 이것으로 말하면, 우리들은 한번도 천조에 실신한 적이 없는데 천조가 우리를 속인 적은 많다. 지금 비록 천사가 나온다 하나 또한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만일 가까운 곳에 당도한다면 관백에게 보고할 필요없이 일시에 철수해 돌아가겠다.’ 하자, 진 유격이 ‘천사가 아마 벌써 출발하였을 것이니, 믿지 못할 리가 만무하다. 너희가 두 소장(小將)을 차출하여 나를 따라 같이 가게 하면 그렇게 멀리 안 가서 마땅히 곧 돌아오게 될 것이다.’ 하고, 또 전후에 있었던 성지(聖旨)를 뽑아 기록한 것을 내주면서 말하기를 ‘준허한 성지가 해와 같이 밝으니 너희는 보면 알 것이다.’ 하니, 현소가 꿇어앉아서 다 보고는 ‘돌아가 행장과 상의해서 처리하겠다.’ 하고, 떠나갔습니다.
이날 진영 아래의 해문(海門)을 바라보니, 벌여 있는 크고 작은 배 50여 척에 각각 기호(旗號)를 꽂고 또 휘장을 벌려 쳤기에 물어본바 모두 말하기를 ‘철수해 돌아가는 일본배다.’고 했습니다. 임 통사가 신에게 말하기를 ‘철수해 돌아갈 병선(兵船)은 모두 줄지어 놓았으나 오늘은 동남풍이 있어서 발송할 수 없으니, 내일 출송시킬 것이다.’ 하였습니다.
저녁에 담 도사가 술 한통과 염육(鹽肉)을 신에게 보냈기에, 18일 아침에 신이 진 유격에게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담야가 술과 고기를 보내주었으니, 신들이 찾아가서 사례하기를 청한다.’ 하였더니, 진 유격은 단지 이해룡만을 시켜 담 도사에게 가서 사례하게 하였습니다. 인하여 담 도사에게 ‘배신(陪臣)이 몸소 사례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였으나 출입이 불편하여 감히 와서 사례하지 못하고 다만 소인으로 하여금 성대한 하사에 사례하도록 한다. 또 배신이 나올 때 과군(寡君)이 전교하기를 「네가 담야를 보거든 나의 의사를 담야에게 전달하되 『대인이 소국을 위하여 오래도록 호표(虎豹)의 굴에 머물며 많은 괴로움을 받은 지 지금 이미 3년이다. 수시로 서신을 하여 안부를 묻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나 사신의 출입이 편의치 못하다. 비록 뜻과 같지는 못하나 어찌 일각인들 생각에 잊겠는가. 』라고 하고, 또 네가 싸 가지고 간 반전(盤纏)058) 10냥을 기회를 보아 그에게 바쳐서 가인(家人)들의 의복과 버선을 마련하는 데 보태 쓰게 하여 다소 나의 정의를 표하라……. 」 하였다. 그런 때문에 감히 안부를 묻고 또 이것을 바치니, 노야는 거두어 주기를 청한다.’ 하니, 담 도사는 사양하고 감히 받지 않았습니다. 재삼 청하고 또 말하기를 ‘노야가 받지 않으면 배신이 어떻게 돌아가서 말하겠는가.’ 하였습니다.
담 도사가 말하기를 ‘행장이 진야(陳爺)에게 청하여 여기에 잠간 머물러 있게 하고059) 자신은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본국에 들어가서 관백에게 면대하여 보고한 다음 청정의 군사를 먼저 철수시키고, 그가 거느리고 간 군사는 거기에 놓아두고서 단신으로 나와서 천사를 영접하고 크고 작은 각 진영을 동시에 철수해 돌아갈 계획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한다면 한 달 사이에 일은 빨리 완결될 수 있는데, 다만 진야가 못마땅해 하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기에, 대답하기를 ‘노야가 진야를 권하라.’ 하니 ‘진야는 이미 내가 행장에게 사정을 두는가 의심하고 있는 터인데, 내가 어떻게 권하겠는가. 지난 12월에 관백이 소장(小將)을 보내와서 행장에게 분부하기를 「천조가 누차 우리를 속이니, 군사를 철수하는 일은 가볍게 해서는 안 된다. 비록 천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가볍게 믿지 말라. 천사가 남원이나 경성 등지에 당도하였더라도 가볍게 철수해서는 안 된다. 다만 천사가 직접 너의 진영에 당도함을 기다려서 네가 직접 본 연후에는 나에게 알릴 필요 없이 곧 모조리 철수해라. 」 하였다는데, 그 소장도 나를 찾아와 보았다. 관백의 분부가 이러하니, 그들은 반드시 가볍게 철수해 돌아갈 리가 없다. 그러나 천사가 나온다면 조만간에 필시 철수해 돌아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전에 말하기를 「유 찬획이 떠난 뒤에 이미 5천 명을 철수했다. 」 하였는데, 사실인가?’ 하고 물었더니 ‘그것도 허위로 꾸며서 진야로 하여금 보고 가도록 하려는 데에 불과한 짓이니, 몰래 되돌아오지 않았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나는 오랫동안 여기에 머물러 그들의 정상을 살폈는데 그들의 교사(狡詐)함은 헤아릴 수 없으니, 믿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있으면서 방문을 나가 본 적이 없고 다만 책이나 보면서 무료함을 달랬을 뿐, 저들과 상종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였습니다. ‘이미 봉왕을 허락하였으니, 저들이 다시 공시(貢市)를 요구하지 않겠는가?’ 하니 ‘이미 강정(講定)되었으니, 단지 봉왕만 하면 저들은 마땅히 물러갈 것이다. 내가 당초에 행장과 말하기를 「봉왕을 허락하면, 조공은 요구할 필요도 없다. 서서히 요청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다. 이미 봉왕한 뒤에 너희 나라는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토산물을 바쳐 사례해야 할 것이니, 그 기회를 인하여 공손히 요청한다면 천조가 허락하지 않을 리 없는데, 어찌 바쁘게 서둘러 일시에 요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 하니, 행장이 옳게 여겼다.’ 하였습니다. 그는 또 말하기를 ‘행장이 11월 사이에 선봉(選鋒) 및 소장(小將) 등을 거느리고 우도에 나가서 이틀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기에 나는 몹시 의구하였는데, 강화에 대한 회담을 하겠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내 마음이 퍽 기뻤었다.’ 하고 또 행장이 써 보낸 종이 쪽지를 내보였는데, 거기에는 ‘진야가 잠깐 여기에 머물러 있기를 약속하였다.’고 하고 또 ‘속히 돌아가서 보고하겠다.’ ‘남원 등처에 이르러 천사를 기다리겠다.’ ‘내가 돌아가 보고함과 동시에 천사가 빨리 나와야 할 것이다.’는 등의 말이 있는데, 어찌나 앞뒤의 말이 어긋나는지 아마도 믿을 수 없을 듯싶다고 하였습니다.
이해룡이 사례하고 돌아왔습니다. 식후에 진 유격이 신과 이해룡으로 하여금 여장을 챙겨 가지고 나가도록 하면서 말하기를 ‘왜적의 사정은 네가 대략 본 바다. 밀양(密陽) 등처의 인부와 말이 가장 시급하니, 미리 정비해서 대기하라.’ 하였고, 담 도사는 그 표제(表弟)로 하여금 은(銀) 1냥 3전을 싸가지고 오게 해서 신들을 전송하면서 말하기를 ‘별로 정의를 표할 만한 물건이 없어서 이처럼 사소한 것을 선물하니, 성의로 받아주기 바란다.’ 하기에 신이 재삼 사양했으나 결국은 되지 않았습니다. 또 밀첩(密帖)을 보내면서 말하기를 ‘왜적의 심정은 다른 게 아니라 다만 천사를 기다려서 다 철수해 돌아가려고 할 뿐이니, 돌아가 전하에게 보고하여 마음을 놓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나에게 서신을 보내어 행장에게 간접적으로 말하게 하고 그들이 돌아간 다음에는 남은 양식을 거두어 가지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가장 좋겠고, 혹은 통사들로 하여금 위장하여 서신을 가지고 들어오게 한다면 나는 마땅히 힘써서 도울 것이다.’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왜인은 이곳에 있어서 군사는 많고 식량은 적으므로 그들도 또한 쌀을 운반하는 일로 고생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들은 여기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느라 의복이 다 해지곤 하여 어려움을 견딜 수 없다. 전하는 멀리 있는데 어떻게 이런 실정을 알겠는가. 오로지 배신이 조정에 돌아가 아뢰어 알려서 곤궁한 사람을 구제해 주도록 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였습니다.
오후에 신은 이해룡과 함께 진 유격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나온 뒤에 담 도사에게 들러서 작별 인사를 한 다음 바다로 내려와 배에 올랐으며, 밤에 죽도의 진영에서 자고 그 이튿날 출발해서 삼랑강(三郞江)에 이르렀습니다.
다음은 홍 통사(洪通事)와의 문답 내용입니다.
‘관백이 새 관백에게 전위(傳位)하였는데, 새 관백은 과연 어떤 사람인가?’ 하고 물었더니, 답하기를 ‘전위한 것이 아니라, 관백은 아들이 없으므로 그 형의 손자인 중납언(中納言)을 길러서 자기의 후사로 삼았는데, 금년 나이 28세다. 수길이 그를 총애하여 당관백(當關白)【비유하면 중조(中朝)의 저군(儲君)과 같다. 】을 삼고 모든 일을 다 총괄하도록 하니, 그의 권한은 일국을 뒤흔들고 세력은 수길과 동일하다. 관백이 당초에 조선을 빼앗아서 중납언을 봉해 주든가, 아니면 자기가 차지하고 일본을 중납언에게 양보하든가 하려고 했다. 관백은 금년 나이 56세다.’ 하였습니다.
‘임진년에 관백이 천정 황제(天正皇帝)를 죽이고 문록 황제(文錄皇帝)를 세웠는데 지금 문록 4년이다. 천조가 이미 관백을 봉하여 일본 국왕(日本國王)을 삼았으니, 문록과 함께 설 수 없다. 관백이 장차 여주(與州) 지방으로 옮겨 거처하려 하는데 여주는 영파(寧波)060) 를 왕래하기에 편리하고 가까운 지방이다.’ 하였습니다.
‘행장은 관백이 사랑하는 장수인데, 조선을 침략한 일은 행장이 처음부터 주장했기 때문에 벼슬은 높지 않으나 호령이 모두 행장에게서 나온다. 행장의 벼슬은 총병(總兵)과 동일하다. 일본에는 풍신(豊臣)·조신(朝臣) 등의 직호(職號)가 있는데 풍신의 경우는 왕에게 품의하거나 보고하는 일을 직접할 수 있으나 조신은 감히 하지 못한다 한다. 행장이 일본에 있을 때 구주(九州) 지방을 관리하였으므로 쌀 4만 담(擔)을 받았고 봉왕의 일을 주장한 뒤로는 관백이 상미(賞米) 5백 담을 더 준다. 만일 봉왕의 일이 완결된다면 행장은 으뜸 공을 차지하여 마땅히 큰 벼슬에 오를 것이다. 행장이 나올 때 스스로 1만여 군사를 거느렸는데 평양에서 3∼4백여 명을 잃었다.【필시 그렇게까지 많지는 않고 3백여 명이었다고 했는데 이처럼 거짓말을 하니 믿기 어렵다. 】행장이 지금은 12진영을 총괄한다.’ 하였습니다. 행장의 금년 나이는 38세입니다.
‘청정이 처음에는 가장 친절하게 대해 주니, 행장에게 비하여 더욱 친밀하였다. 그의 관직 및 관할한 주(州)와 받는 쌀은 행장과 더불어 일반이라 한다. 청정이 당초에 거느린 군사는 1만 3천∼4천이었다. 북도에 있을 때 행장이 패배하여 평양으로 달아났다는 소식을 들은 청정은 곧 패배하여 군사를 잃은 상황을 관백에게 급보하자 행장은 청정을 원망하여 드디어 틈이 생기게 되었다. 그뒤에 행장이 봉공(封貢)을 청하려고 하자 청정이 이를 논쟁하였으나 결국은 행장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두 적의 틈은 더욱 벌어졌다. 지금은 관백도 행장을 신임하고 청정을 소원히 한다.’ 하였습니다.
‘부산에 주둔한 왜장(倭將)의 이름은 한음(漢音)으로 부르면 안국사(安國寺)인데, 나이는 18세로 글을 잘하고 나이는 어리지만 벼슬은 여러 장수에 비해 가장 높으며, 일본에 있을 때 관할한 주는 30주, 받는 쌀은 9만 담이었다.’ 하였습니다.
‘어찌해서 나이는 어린데 벼슬이 높은가?’ 물었더니 ‘일본 규정은 본래 이와 같다. 비록 5∼6세일지라도 큰 벼슬을 하는 자가 있으니 습작(襲爵)이기 때문이다.’ 하였고, ‘안국사는 벼슬이 높은데 호령과 절제를 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더니 ‘벼슬은 높으나 일을 관리하지 않으므로 행장이 지시하는 대로 그도 따르고 있다. 안국사가 현재 관할하는 군사는 2만여 명이다 ’ 하였습니다.
‘왜적이 당초 나올 때에는 도합 35만 명이었다. 35만 명을 여덟 갈래로 나누어 가지고 들어와서 각각 한 도씩을 점령하였다. 지금 남아 있는 숫자도 25만 명인데 좌·우도에 25진영을 설치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현소와 평의지 등은 대마도의 왜인을 관할하며 모든 문자와 논의에 관한 것은 현소와 죽계가 전담하고 있다.’ 하였습니다.
‘관백의 위인은 어떻던가?’ 하고 물었더니 ‘영웅의 인물은 못 되니, 어떻게 천하를 모두 두렵게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기에 ‘그게 무슨 말인가? 천하가 어찌 한 왜추(倭酋)를 두려워하지 않는가?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해서 봉왕을 허락하겠는가?’ 하였더니, 그는 말하기를 ‘천조가 어찌 그를 두려워서 봉하겠는가. 다만, 3년 동안의 전쟁통에 조선 지방이 다 피폐되었기 때문에 조금 쉴 수 있게 하기 위함이요, 또 행장이 애타게 애걸하기 때문에 특별히 은전을 가하여 포황(包荒)의 도량을 넓히려는 것뿐이다. 어찌 두려워할 리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고 당당한 천조의 위세로써 수·육군을 대거 동원하여 초멸한다면 무엇이 어려울 게 있겠는가. 천사가 일찍 나온다면 그만이거니와 만일 지연한다면 관백이 다시 어떤 일을 꾸밀지 모르겠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저들의 하는 짓을 보라.’ 하였습니다. 그의 말이 의심이 가기에 재차 물어보았으나 답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에서의 예년의 수세법(收稅法)은 1묘(畝)에서 쌀 두 말을 거두었는데, 군사를 일으킨 뒤로는 1묘에서 네 말을 더 수세하므로 인민 중에 수길을 원망하는 자가 많다.’ 하였습니다.
‘산동(山東) 지방은 관백에게 복종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고 물었더니 ‘복종하지 않는 지방이 없다.’ 하였고 ‘관백이 유구국(琉球國)을 복종시켰다고 하는데 사실인가?’ 하고 물었더니 ‘유구국은 천조에 조공하고, 물화(物貨)는 일본에 교역한다.’ 하였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포로로 잡은 조선의 남녀를 일본에 전매하는데 미녀일 경우는 30여 냥까지 받는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일본의 풍토가 절강(浙江)에 비해 어떻던가?’ 하고 물었더니 ‘절강에 비해 좋은 편이고 여염집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으며 밤에도 문을 닫지 않는다.’ 하였습니다.
이상은 홍 통사(洪通事)와의 문답입니다. 【홍 통사는 절강 사람으로서 만력(萬曆)061)을해년062) 에 포로가 되었다. 】
각 진영의 왜장 성명을 알리기 위해 모두 그 나라의 향담(鄕談)에 따라 글자를 맞추어 적겠습니다. 죽도(竹島)에는 강강노가미(江江老加未), 감동포(甘同浦)에는 야랑가와(也郞加臥), 가덕(加德)에는 지범지(之凡之), 안골포(安骨浦)에는 달삼부로(達三部老), 웅포(熊浦)에는 행장(行長), 제포(薺浦)에는 평의지(平義智), 거제(巨濟)에는 아원로가미(阿元老可未), 또 거제에는 표간곤로가미(豹干昆老加未), 영등포(永登浦)에는 사야모은로다유우(沙也毛隱老多有雨), 기장(機張)에는 가인로가미(可仁老加未), 동래(東萊)에는 공가와마다시지(共加臥馬多時之), 임랑포(林郞浦)에는 다가화시구로(多加和時舊老), 서생포(西生浦)에는 청정(淸正), 부산(釜山)에는 아긴노산소우(阿緊奴山小于), 울산(蔚山)에는 모리유긴로가미(毛里有緊老加未)입니다.
진 유격이 나올 때 선주(船主)인 왜인 한 사람이 통사(通事) 장춘열(張春悅)에게 간청하기를 ‘내가 데리고 온 한 여자는 경성 사람이다. 나는 마땅히 귀국해야 하겠는데 그녀가 매우 고향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돌아갈 때 데리고 가기를 바란다.’ 하므로, 장춘열은 말하기를 ‘노야가 모르는 일이라 내가 감히 너를 데리고 갈 수 없으니 품청하여 허락을 받으면 내가 마땅히 데리고 돌아갈 것이다.’ 하자, 그 왜인이 곧 꿇어앉아 진 유격에게 하소연하니, 진 유격은 허락하였다. 또 한 왜인이 와서 청하기를 ‘나도 한 여자를 데리고 있으니 함께 보내주기를 청한다.’ 하자, 진 유격이 허락했다 하므로 장춘열이 두 여인을 데리고 나왔습니다.
삼숙 : 3일간을 묵는 것.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에 의하면, 도를 닦는 중은 하루 한 끼니씩 먹고 뽕나무 즉 나무 밑에서 한 번씩만 자며 도에 정진하도록 경계하였다. 즉 뽕나무 밑에서 3일 밤을 계속 자면 그곳을 잊지 못하여 그리워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말. 여기서는 웅천에서 여러날 묵고 화친까지 이루었으므로 잊을 수 없다는 뜻.
◆세종실록 19권, 세종 5년 1월 1일 癸未 3번째기사 1423년 명 영락(永樂) 21년
구주 총관 원의준이 서신을 보내고 토산물을 바치다
구주 총관(九州摠管) 원의준(源義俊)이 사람을 시켜 토산물을 바치니, 그를 접대하기를 명하였다. 의준이 예조에 글을 올렸는데, 그 글에,
"이에 전 대왕(前大王)이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놀라 애통(哀慟)의 극함을 견디지 못하였사오니, 창천(蒼天), 창천(蒼天)이여, 다른 이보다 만배나 〈슬픔이〉 더했습니다. 도리로서는 마땅히 소위(素緯)001) 에 배례(拜禮)하여야 될 것이오나, 험한 물결이 아득하여 빨리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니, 이런 까닭으로 삼가 행인(行人) 성은(性恩)을 보내어 글을 올립니다. 상상하건대, 성려(聖慮)의 슬퍼하심이나, 경상(卿相)과 각로(閣老)들의 사모하며 고민함이 쉽사리 가실 수 없으리니, 답답히 앉아서 홀로 애만 탈 뿐이오며, 삼가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나의 변변치 못한 정성을 미루어 성총(聖聰)께 아뢰옵기를 끝까지 비옵고 조그만 예물로 토산물을 별지(別紙)에 기록하오니, 수납(收納)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또 조그만 예물은 뒤에 적사오니, 비록 변변하지는 못한 물건이지마는 전 대왕(前王)께 올리는 제공(祭供)에 바치려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진실로 밝고 참다운 마음이라면 시내와 늪에 있는 풀이나 빈번(蘋蘩)·온조(蘊藻)와 같은 채소라도 귀신께 드릴 수도 있고, 왕공(王公)께 바칠 수도 있는 것이옵기, 이로써 잠깐 신의(信義)만 표합니다. 조그만 예물은 소목(蘇木) 1천 근(斤), 서각(犀角) 3개(介), 곽향(藿香) 40근, 정향피(丁香皮) 20근, 유황(硫黃) 5천 근, 명반(明礬) 4백 근, 절부(折敷) 20매(枚), 소향유(蘇香油) 2근, 금란(金欄) 1단(段), 감초(甘草) 20근, 주분(朱盆) 2개, 당주(唐朱) 1근이고, 제공(祭供)의 조그만 예물은 소면(素麪) 30근, 갈분(葛粉) 15근, 침향(沈香) 2근, 납거(蠟炬) 50개, 온주귤(溫州橘) 1천 개입니다."
하였다. 원의준이 또 예조에 글을 올려 사로잡혀 온 대마도 사람을 돌려보내기를 청하고, 인하여 토산물을 바쳤으니, 유황 2천 5백 근, 소목 2천 근, 곽향 10근, 서각 2본(本), 백단(白檀) 30근, 향(香) 8근, 동(銅) 2백 근, 천궁(川芎) 30근, 파두(巴豆) 30근, 육두구(肉豆寇) 20근이다. 성은(性恩) 등이 친히 드리기를 청하니, 정부(政府)에 의논하기를 명하였다. 영의정 유정현이 아뢰기를,
"다른 나라의 사람이 성심으로 올리니, 마땅히 객인(客人)으로 하여금 광효전(廣孝殿)의 뜰에 차례대로 서서 배례(拜禮)를 행하게 하고, 향을 피우고 술잔을 드리는 일은 집례관(執禮官)으로서 하게 할 것입니다."
첫댓글 잘 봤어요 고맙습니다
노력 덕분에 귀한 글 잘 보고 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