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요즘 일이 몰려 있어서 좀 바쁩니다. 이번 수능문제도 보기는 했지만 글을 쓰고 하나하나 따지고 논증하는 게 번거로워서 그냥 지나갔습니다.
오늘 중등 임용시험이 있었는데, 저는 이제 여기에는 관심이 잘 가지 않고 또 이번 주말에 끝내야 할 일이 있어서 평가원 사이트에는 접속도 안 했습니다.(기출파일 올라오는 페이지에 들어가보지도 않았다는 말.) 그런데 시험 친 후배가 문항을 찍어 보내주어서, 그거 하나만 잠깐 살펴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하필이면 또 출제를 잘못 한 문항이더군요.
저는 기출 파일을 안 봤기 때문에 이게 A교시인지 B교시인지도 모릅니다. 그냥 제가 받은 사진만 가지고 올려보겠습니다.
여기서 빈칸 ㉡에 들어갈 말로 출제진이 의도한 용어는 아마 '심재(心齋)'일 겁니다. 그렇다면 제시문 ㈐의 ㉡에 해당하는 원문 자리에 '心齋'라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이번 출제진이 본 번역서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동안 기출에서 종종 사용되었던 안동림 번역서로 일단 사진을 찍었습니다.
첫번째 사진에 나오는 원문이 바로 문항 제시문의 ㉡이 들어 있는 원문입니다. 빨간 네모 표시한 부분에서 볼 수 있듯, 한문 원문상에서 저 자리에 해당하는 원어는 '使'라는 사실이 확인됩니다. 단지 번역자가 그걸 '심재'로 해석했을 뿐입니다. (아래에서 다시 말하겠지만 여기서 '使'는 주석가에 따라 심재의 가르침이 아닌 다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원어입니다.)
즉 이 문항의 빈칸 ㉡에 들어갈 말은 원문에 근거하자면 '심재'가 아니라 '사(使)'입니다. 그렇다면 이 문항은 출제 오류가 되겠죠. 빈칸에 들어갈 말을 '심재'로 의도해 출제했지만 정작 해당 원문에 '심재'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니까요. (그리고 ㈎에서 무슨 명상 교육, 자연과의 일체감,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게 '심재' 개념의 맥락에 맞는지도 문제입니다. 글이 길어질 테니 여기서 이것까지 논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지적을 하면, 이제 출제진은 ㉡에 들어갈 말을 '심재'가 아닌 '使'로 의도했다(?)고 주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게 우기면 이제 새로운 문제들이 생깁니다. 당장 떠오르는 몇 가지만 말해보자면:
1) 답안 작성 조건에서 ㉡에 들어갈 '용어'를 요구했는데, '使'는 '용어'가 아닙니다. 조건상에서 ㉡과 엮여 있는 ㉢에 들어갈 용어가 '일기(一氣)'라는 사실로 보면 ㉡에 들어갈 용어도 그 정도 되는 철학적 개념어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키다(使)'는 무슨 용어라 할 것이 아니죠. '시키다', '가르치다'는 말 자체는 장자뿐 아니라 심지어 장자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의 글에도 숱하게 나오는 말이고, 그 전에 애초에 뭔 전문 용어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일상어에 불과하니까요. 영어로 생각해보면 더 이해가 빠를 겁니다. 'teaching of the 心齋'라는 말이 있다고 할 때 여기서 'teaching'을 '용어'라고 할 수는 없죠. teaching의 내용이 心齋더라도 '용어'를 쓰라는 요구에 'teaching'을 적어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使'는 그 내용이 무엇이 되든 간에 답안 작성 조건에 맞지 않으므로 빈칸에 들어갈 용어가 되지 못합니다. 내용 이전에 형식이 문제가 된다는 말입니다.
2) ㉡이 '시키다(가르침)'라면 개념 특정이 안 되어서 열린 답이 되어버릴 수 있다는 문제도 생깁니다. 장자의 '가르침'이라면 수십 수백 가지도 끌어올 수 있을 테니까요.
3) '시키다' 자체만으로는 수양법이라고 할 수 없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제시문 ㈎의 문장을 잘 살펴보면, ㉡에 들어갈 용어는 가르침 중에서도 '수양법'의 범주로, 정확히는 자기 자신이 수양하는 방법의 범주로 좁혀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시키다' 자체가 자기 수양의 방법인 건 아니죠. 시키는 일의 주체는 자신이 아니라 스승이라는 타인일 텐데, 그럼 타인이 시킨 것을 '숙지'한다든가 '반복'한다든가 하는 추가적인 요소가 덧붙여져야 자신의 수양법이 되지, 그냥 '시키다'만 가지고는 자신의 수양법이 될 수가 없으니까요.
4) ㉡에 '가르침'이 들어가면 중의성이 생긴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의 문장대로라면 '가르침에 이르지 못했을 때는 …'이 될 텐데, 이는 선생님이 가르쳐준 것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일 수도 있고, 자기가 누군가를 가르쳐보지 못했다는 말일 수도 있게 되죠. 국어적으로 문장 자체만 놓고 보면 말입니다.
5) 그리고 여기의 '使'를 '심재의 가르침'으로 보지 않는 다른 독법들도 있습니다.(심재와 무관하다는 게 아니라 관련은 있되 使 자체가 심재의 가르침을 직접 가리키는 어휘는 아닐 수 있다는 것.) 위의 사진들만 대충 보면 '使'가 곧 심재의 가르침 아니냐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는데, 그것도 알고보면 해석이 갈리는 대목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구구절절한 설명을 할 필요 없이, 애초에 ㉡에 들어갈 용어를 '使'로 출제할 수는 없다는 건 누구나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냥 문항과 원문 사진만 보아도 이게 무슨 사태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출제진은 한문 원문을 대조해보지 않고 그냥 어떤 국내 자료의 번역문에 '심재'라 되어 있으니까 그걸 원문상의 용어라고 믿고 빈칸을 출제한 것일 겁니다. (이런 유의 출제 오류는 제가 학부생일 때 학원강사 모의고사에서나 봤던 건데, 대학 교수가 낸다는 시험이 이렇다는 건 참 신박한 일이네요.)
희랍어나 라틴어 같은 경우는 원어 대조가 어렵겠지만, 적어도 한국어에 밀착된 한문 같은 언어로 된 고전은 번역서와 원문을 비교해보면서 어떤 용어가 실제로 있는지는 확인을 하고 출제해야 합니다. 특히 한문은 함축적인 언어라 번역자가 원문에 없는 말을 임의로 덧붙였을 확률이 높아서 빈칸 같은 것 낼 때 주의할 필요가 있죠. 한문을 잘 읽지 못하더라도, 어떤 단락에서 '심재'를 빈칸으로 낸다면 그 단락의 원문에서 한자로 '心齋'라고 써있는 부분이 있는지 없는지는 단순히 찾아보기만 하면 알 수 있는 것이죠.
작년에는 빈칸 ㉠과 ㉡의 위치가 뒤바뀐 문항이 나오더니만 올해는 원문에 있지도 않은 용어를 적으라는 문항이 나오니 참.. 처음에는 글을 안 쓰려다가 워낙 황당한 오류이다 보니 기록이라도 남겨야 할 듯해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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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일단 출제 오류로 보이네요.
뿐만 아니라 ㄱ에 들어갈 용어도 딱 떨어지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고....
'심재'를 명상교육과 연결한 것은 문제 없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을 '심미적 경험'이라고 하거나 '자연과의 혼연일체'라고 한 것은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은 또 뭘 뜻할까요?
너무 못 내네요.
수능 생윤, 윤사도 그냥 다 교육과정 이탈 선지로 변별하고 있는 판이니...윤리교육과 출제진이라고 해봐야 다 거기서 거기인 사람들이라 이건 그냥 불가항력으로 보입니다.
임용시험도 객관식이 되어야 오류 소송이 가능할 텐데...
쓰신 글을 읽어보니 제가 보기에도 오류가 맞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심재를 명상이라고 퉁쳐서 말하는 것까지도 유심히 살폈어야 되는 것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기억이나 상상이나 비판이나 다 생각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것을 퉁쳐서 생각이라고 하지요.
선가의 참선이나 도가의 심재나 인도의 명상을 다 같이 명상이라는 이름으로 퉁칩니다.
이런 건 출제할 때 세심함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심재를 '혼연일체'나 '심미적 경험'이라는 단어로 미화시킬 일이 아니다 싶습니다.
한삶님과 codeone님 덕분에 오늘도 배우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