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문학의 위상과 나아갈 방향
李正林
1. 수필계의 현황
① 수필 인구의 증가
프랑스의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수필이 어느 날엔가는 온 문예를 흡수해 버릴 것이다. 오늘이 그 현실의 초기 단계다"라고 일찍이 예언한 바 있다. 이 예언은 오늘날 점차 적중해 가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오늘'이라는 시점이 바로 이 시간적인 공간일 것 같은 개연성을 갖는다. 지금같이 속도를 중요시하는 인터넷 시대에서는 분량이 많은 장편소설을 읽기에는 인내가 필요하고 서정시를 음미하기에는 너무 현실적이 되었다. 좀더 빨리 좀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네티즌들은 문법까지 파괴할 정도로 짧은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수필적 산문의 성향을 띠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수필이 요즘 1970년대 이후로 황금기를 맞고 있다는 것은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은 밖으로는 문단의 권위적인 편견과 안으로는 자인할 수밖에 없는 여러 문제점들 속에서 끊임없이 개선책을 강구해야 하는 모순을 아울러 지니고 있다. 어느 때보다도 황금기를 맞고 있다는 수필이면서, 수필가들은 여전히 '수필문학의 위상'을 제고해야 하는 과제와 그 '나아갈 방향'에 대해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현실은 매우 아이러니컬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수필 인구가 타장르에 비해 숫자가 적을 때는 적은 대로, 많을 때는 또 많은 대로 그 문제점을 생각해야 하는 수필가들은 자기 정체성(identity)을 확립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숫자의 열세가 장르적인 존립 기반에 위협을 주었다면 이제 수필문학은 더 이상 열세한 장르가 아니다. 1985년도 문인협회에 등록된 수필분과 회원수는 불과 25명이었다. 이 숫자는 시 287명, 소설 118명에 비해 너무도 열세한 수치였다. 그러나 2002년 4월 현재 문인협회에 소속된 수필분과 회원수는 1,288명이다. 이는 1985년도에 비해 시가 9.1배, 소설이 5배 증가한 데 반해 수필이 무려 51.5배나 증가한 숫자이다. 그리고 이런 회원수는 6,048명이라는 전체 문협회원 가운데에서 시(43.6%), 소설(9.8%)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21,3%)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밖에도 한국펜클럽에 가입된 수필분과 회원수는 2002년 4월 현재 173명으로 이는 전체 회원수(1,477명)의 11.7%를 차지하는 비율로서 소설(15.5%) 다음으로 많은 숫자이며, 그 외에도 단체에 가입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는 수필가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숫자는 여기에서 더 증폭될 것임에 틀림없다.
② 수필 인구의 증가 요인
수필 인구가 1985년도에 비해 무려 51.5배나 증가한 이유를 분석해 본다면,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첫째로는 제도적인 측면이요 둘째로는 삶의 여유에서 오는 문화적인 자기 성취욕의 분출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90년대 전후로 중앙 일간지에서는 신춘문예에 수필 부문을 제외시켰다. 이는 수필문학 장르에 대한 권위적인 편견의 표징과도 같은 단안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수필문학은 스스로 살아남기 위한 자구책을 모색해야만 했는데, 그것이 곧 수필전문지들의 창간이었다.
현재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수필전문지들의 발행 연도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한국수필≫(1974, 격월간), ≪에세이문학≫(1982. "수필공원" 개제, 계간), ≪수필문학≫(1988, 월간), ≪창작수필≫(1991, 계간), ≪현대수필≫(1992,계간), ≪수필과 비평≫(1992, 격월간), ≪수필≫(1995, 계간), ≪수필춘추≫(1998, 계간).
이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거의가 1990년대 전후로 등록된 잡지임을 알 수가 있다. 이런 잡지계의 호황은 1972년도에 창간되었다가 1982년 3월호로 종간된 월간 ≪수필문학≫ 이래로 최대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셈이나 같다.
이들 잡지에서 우선적으로 내건 기치는 수필문학의 '저변 확대'였다. 그래서 저마다 등용문을 만들었고, 신인을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8종의 잡지가 일회에 평균 3명의 신인을 배출한다 해도 일년이면 132명이 된다. 그밖에도 수필 추천 제도가 있는 ≪월간문학≫, ≪자유문학≫, ≪책과 인생≫과 같은 종합지까지 합친다면 그 숫자는 더욱 증가될 것이다.
수필 인구의 증가 요인으로서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것은, '삶의 여유에서 오는 문화적인 자기 성취욕의 분출'일 것이다. 1980년대부터 신문사나 백화점에서는 문화센터가 생기기 시작했고, 여기에는 반드시 수필 강좌가 포함되어 있었다. 문화센터의 수강생들은 대체로 중산층 주부였는데, 이들은 생활에 여유가 생기자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되었고, 또 그것을 글로 써보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었다. 허구가 아닌 자신의 실제 삶,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해내는 수단으로서 수필만큼 적절한 장르는 없었을 것이다.
처음의 그들은 수필을 통하여 자신을 카타르시스하는 기쁨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였다. 그러다가 등단 제도라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글쓰는 이들을 특별한 사람인 양 생각하던 고전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나도 작가가 될 수 있다"는 사고의 전환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문화적 욕구를 수용하고 충족시켜 줄 수 있는 곳은 바로 수필전문지밖에 없었다. 따라서 문학을 공부하는 주부들의 새로운 정체성 찾기는 곧 수필 인구의 증가 요인에 커다란 기여를 하게 되었음은 물론이다.
③ 수필 인구의 증가에 따른 문제점
수필전문지와 작가 지망생 사이에는 이제 수요와 공급의 밀월 관계가 탄탄하게 성립되어 있다. 잡지는 이들의 왕성한 욕구를 기반으로 세(勢)를 불려나가는 경영 전략을 세웠기에 부침(浮沈)이 심한 출판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노하우를 갖게 되었다. 따라서 경영이 우선되는 현 제도하에서는 함량 미달의 작가들은 앞으로도 대거 양산될 수밖에 없고, 그런 누적된 현상은 수필의 위상을 위협하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잡지는 경영의 주주(株主)나 다름없는 이들 출신작가들을 묶어두기 위해 섹트를 구성했고, 이는 섹트주의(主義)로까지 발전하여 타지 출신 작가들에게는 문호가 개방되지 않는 자기들만의 철저한 아성을 쌓기에 이르렀다.
이제 수필의 '저변 확대'라는 일차적인 목표는 달성되었다. 그리고 수필전문지들은 살아남을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인제 수필잡지들이 해야 할 사명은 '사업적인 마케팅 전략'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수필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방향으로 그 사업 방침을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필의 질적 향상이 없는 수적 증가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오히려 수필을 고립시켜 문단의 영원한 아웃사이더에 머무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 발전적 모색
① 아마추어리즘의 극복
"우리 나라에서 수필문학을 표방하고 창작 수필을 의도적으로 시도한"(尹五榮) 작가였다고 평가되는 김진섭(金晉燮)(1903∼1950. 7. 월북)은 수필의 특징을 "숨김없이 자기를 말한다는 것과 인생 사상에 대한 방관적 태도"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수필 정의와는 다르게 김진섭의 수필에는 작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또한 누구보다도 "생활에 대하여 한없는 애착과 존경을 갖는 자(者)"라고 자신을 말했지만, 그의 수필에는 살아 숨쉬는 생활인의 모습이 들어 있지 않다. 그는 "원시(元是) 철학의 도(徒)가 아니오 또 철학자로서 자임하는 바도 아니"(≪생활인의 철학≫ '自序')라고 했지만, 그의 수필은 작가의 생활이 배제된 관념철학으로써만 일관했을 뿐이다.
그의 이런 모순된 수필관에서 또한 크게 오해의 소지를 남긴 문구는 "인생 사상에 대한 방관자적 태도"라는 바로 그 구절이었다. 윤오영은 또 수필은 "진한(眞閒)의 경지"에서 빚어진 "정근(情根)의 구현물"이라고 했다. "방관자적 태도"라든지 "진한의 경지"라는 말들은 수필이란 삶의 치열성이 배제된, 이른바 '중산층 문학'이라는 해석을 유도해 내고 말았다.
중산층의 특징은 안정과 자족이다. 삶의 치열성보다는 현재의 여유를 즐기는 데 더욱 주안점을 두는 중산층의 문학이 자칫 소부르주아적인 감상의 유희(遊戱)로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수필이 "진한(眞閒)의 경지"에서 씌어지는 문학이라는 것은 삶의 도피나 방관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삶과 인생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냉철한 인식의 경지를 뜻하며, 그것은 오히려 작가가 자신을 진지하게 성찰할 수 있는 정연(靜淵)의 경지를 뜻하는 것이다. 수필은 적당한 감성에 적당한 문장력만 있으면 아무나 쓸 수 있는 그런 만만한 글이 아니다. 진정한 수필은 결코 아무나 쓸 수가 없다. 아무나 쓸 수 있는 문학이라는 잘못된 인식 때문에 수필은 더욱 그 치열성이 요구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수필문학이 아마추어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수필가 자신이 치열한 프로 의식을 갖는 일이다. 수필가들이 치열한 프로 의식을 갖지 않는 한, 수필의 발전은 더 이상 기대할 수가 없다. 수필이 문단의 주변문학쯤으로 인식되지 않으려면, 또한 수필이 한유(閑裕)한 계층의 장신구쯤으로 치부되지 않으려면, 수필가들도 작가로서의 프로 정신을 지녀야 할 것이다.
② 소재의 확대를 통한 참여의식의 제고(提高)
수필가들은 이제 끝없이 탐닉하여 안주해 왔던 자기애(自己愛)의 껍질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 언제까지 회고조의 자전적(自傳的)인 이야기에만 맴돌 것이며, 언제까지 풍류를 내세워 화조풍월(花鳥風月)만 읊조리고 있을 것인가.
이제 수필가는 자신의 울타리에서 과감히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애정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던 타인의 삶이 실은 자기 자신의 삶이기도 하다는 인식 속에서 수필은 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나'에게서 출발하여 '우리'의 삶으로 확대되는 작가의식은 첫째로는 작품의 세계를 심층적으로 확대시켜 줄 것이며,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애정의 관심을 고양시켜 주게 될 것이다.
수필문학도 이제는 타인의 삶은 곧 자신의 삶의 연장이라는 참여 의식을 지녀야 한다. 참여냐 순수냐의 문학적 논쟁은 해답이 나올 수 없는 영원한 논제였다. 김동석(金東錫: 1913∼1950, 월북)은 <순수의 정체-金東里論>이라는 논문에서 "우리 문단이 이미 춘원(春園) 등의 재사(才士)를 일제에 빼앗긴 것도 원통한데 김동리를 이제 '순수'라는 허무한 귀신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고 신랄하게 공격했지만, 김동석의 이 비판적 배경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색채가 다분히 함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문학에서 참여냐 순수냐 하는 것은 그런 이데올로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동시대인으로서 마땅히 지녀야 할 도덕적인 관심일 뿐이다. 따라서 작가는 이 사회에 끊임없이 문제의식을 지니고 참여해야 하며, 그 문제의식은 작가정신의 본질을 이루면서 문학의 기초 토양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 수필이라고 해서 예외될 수가 있겠는가. 소설이 인제는 사회의 어두운 면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서 해방되어야 할 때가 온 것처럼, 수필은 인제 지극히 개인적인 여유나 행복만을 구가하는 소부르주아 문학에서 해방되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이 인식의 전환만이 수필이 노변담화(爐邊談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며, 수필이 한인(閒人)의 문학이라는 고질적인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다.
3. 나아갈 방향
수필문학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으로 본인은 사회수필과 철학수필을 제시하고자 한다.
①사회수필
서양에서 수필의 시조격인 프랑스의 몽테뉴는 "내 책의 소재는 바로 나 자신이다"라고 ≪에세(Les Essais)≫의 서문에서 밝힌 바 있다. 수필은 자신의 이야기를 주관적인 관점으로 펼쳐 보임으로써 공감성을 획득하는 체험의 문학이다. 수필의 본질에 대한 이 고전적인 정의는 절대 불변의 진리나 같다.
우리 수필가들은 이 정의에 충실하듯 지금껏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글을 써 왔다. 그것을 서정적인 정조(情調)에 실어 형상화했기에, 오늘의 한국 수필은 서정수필이 그 주종을 이루게 되었다. 그렇게 된 또 하나의 원인으로는 서정수필이어야만 문학성을 얻을 수 있다는 작가들의 편견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정수필만이 문학성을 획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견(短見)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성은 소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 형상화에 좌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수필가들이 서정수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좀더 솔직한 이유는 작가의식의 결핍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모든 문학 작품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그 속에 사회의 모습이 담기게 마련이다. 작가도 그 사회 속의 일원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소극적인 사회수필이 아니라 적극적인 사회수필도 나와야만 한다. 작가의 사회의식은 곧 작가의 문학정신의 근간을 이루게 될 뿐만 아니라 나아가 수필의 편협성을 타기할 수 있는 중요한 모티브를 제공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문①>
조와(弔蛙)
金敎臣
작년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가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天成)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潭) 속에서 암색(岩色)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山中)에 대변사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客)에 접근하는 친구 와(蛙) 군(君)들, 때로는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潭上)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 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하기 무릇 수개월여!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 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浮遊)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酷寒)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凍死)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全滅)은 면했나 보다! (1942)
사회수필의 대표적인 글로 꼽히는 이 <조와(弔蛙)>는 1942년 ≪聖書朝鮮≫158호에 실렸던 권두언으로서, 이 짧은 글 속에는 매우 깊은 주제가 담겨 있다. 아무리 겨울의 혹한과도 같은 수난, 즉 일제의 탄압이 있어도 우리 민족은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징적인 수법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 글로 인해 작가인 김교신(1901∼1945)은 투옥되었고, 잡지는 페간되었다. 이른바 《聖書朝鮮》필화 사건을 불러오게 한 문제의 사회수필이었다. 검열이 심했던 그 시대에는 그렇게밖에 쓸 수 없었겠지만, 이같이 현실 사회를 상징적인 수법으로 형상화했기에 이 수필은 문학성까지 획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문②>
로버트 김의 외로움
李正林
96년 12월, 광화문 조선일보 미술관 앞에는 눈발이 날리는데도 사람들이 길게 줄을 지어 서 있었다. 50∼60년대의 못살았던 시절을 인형과 소품으로 꼼꼼하게 재현해 놓은 이승은·허헌선 부부의 인형전 '엄마 어렸을 적엔…'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성공회 앞길까지 늘어서 있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그 인형들 가운데에서 '어머니 방'이라는 작품이 기억에 남는데, 그것은 늦은 시각 어머니의 방에 모여 앉아 아이들이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전구(電球)를 넣어 양말을 꿰매고 있는 어머니 옆에는 수저가 하나 내보이는 밥상이 상보에 덮여 있고, 무쇠 화로에는 된장 뚝배기가 부젓가락 위에 놓여 있다. 두 사내아이와 고명딸은 나란히 앉아 군용 담요 속에 발을 들이밀고 만화책을 보는데, 아이들이 꼼지락거려서일까 그 밑에 넣어 둔 밥 주발이 뚜껑이 열린 채 모로 쓰러져, 밥풀이 담요 안자락에 몇 개 붙어 있는 모습이 퍽 재미있었다.
5남매와 어머니가 자지 않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모습은 매우 평온해 보였다. 아이들은 어쩌면 아버지가 사 들고 오실 막과자를 기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령 빈손으로 돌아오신다 해도 아이들은 아버지의 옷자락에 매달리며 서로 안기려 들 것이다. 아버지는 그 존재만으로도 의미요 힘이지 않은가.
국가는 국민의 아버지다.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절대적인 의미요 힘이듯이, 국민에게 국가는 절대적인 의지처요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96년에 한국 정부에 미(美) 국방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현재 복역중인 로버트 김(한국명·金采坤)이 우리 정부에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 "제가 대한민국의 스파이였습니까, 아니었습니까?"
조국이 얼마나 자기 일에 침묵하고 있었으면 이런 질의서를 보냈을까. 그리고 그는 그 침묵에 얼마나 원망하는 마음이 들었을까.
정부측 입장은 이 사건을 "법적으로 볼 때 미국에서 발생한 미국 시민권자의 개인적 행위에 대해 미 사법부가 실형을 선고한 사안"이라고 규정을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미국 시민권을 가졌다 해도 그는 한국인이다. 또 그의 '개인적 행위'는 그가 한국인임을 부정할 수 없는 애국심의 발로였지 않은가.
우리의 냉정하고 무관심한 태도와는 다르게, 명백한 스파이 혐의로 체포되었던 유태계 미국 시민 조너선 폴라드를 위해 이스라엘 정부가 보여준 태도는 매우 감동적이었다. 구속되자마자 국적과 시민권을 부여했는가 하면, 당시 총리 네타냐후는 다음과 같은 친필 서한을 그에게 보냈다. "당신은 외롭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당신이 집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에겐 왜 그런 지도자가 없는 것일까. 로버트 김의 외로움이 겨울 추위처럼 옷섶으로 파고든다. (1999)
이 수필은 신문에 연재되었던 것으로, 지면의 특성상 실명이 거론되었다. 미국의 국방 기밀을 누설했다는 혐의로 복역중인 로버트 김이라는 한국인에 대하여 국가는 아무 구명 운동을 벌이지 않았다. 국가는 자국민을 보호해 주어야 하는 것이 제일의적 사명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공분(公憤)해야 할 이런 사회문제에 대하여 작가들이 침묵하고 있다는 것은 비겁한 일이라 생각하였다. 작가는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 대하여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지녀야 한다. 그런 사회의식은 사회수필을 낳게 하고, 따라서 수필의 세계를 다양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중요한 관건이 되는 것이다.
②철학수필
수필은 우리의 삶을 생각하는 문학이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라서, 생각의 그물을 치지 않는 한 조금도 특별할 것이 없다. 그 생각의 그물은 대상에서 철학을 길어 올리고, 그 철학은 소재에 주제를 부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수필은 매우 철학적인 글이다. 난초의 이파리 하나를 닦아도 거기에는 인생에 대한 사색이 깃들고, 산책길에서 우연히 줄을 치고 있는 거미만 보아도 그 모습에서 생존의 철학을 읽어내는 것이 수필이다. 수필은 서정수필이든 해학수필이든 하나의 주제를 품고 있어야 한다. 그 주제가 없으면 글은 신변잡기로 떨어지고 만다.
그러나 수필과 철학은 같지 않다. 철학을 수필이라는 거푸집에 부어 녹여내어야만 비로소 문학이 된다. 철학은 하나의 명제(命題)를 객관적인 논리로 풀어내지만, 수필은 그 철학을 구체적인 예시로 풀어낸다. 철학은 관념적인 언어로 명쾌하게 결론을 내리지만, 수필은 감성적인 언어로 길게 여운을 남긴다.
"수필 속에서 작가는 가르치려고도 논증하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한 R. M.마이어의 말처럼, 수필의 결론은 어디까지나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 그러나 작가가 암시하는 주제의 여운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글에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철학과 만남으로써 지적인 깊이를 갖지만, 정적인 유연성도 잃지 않아야 한다. 수필은 철학성을 지니나, 철학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예문①>
꽃
金東錫
내가 17년 동안이나 살던 집은 안마당이 어찌 좁은지 하늘을 쳐다보면 꼭 우물 속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이 안마당마저 장독과 고추장 항아리가 점령하고 있었으니 꽃이라곤 분(盆)에 심어둘 꽃도 없었다.
"꽃? 장동이에다 심을까."
이러한 말로써 가벼이 화초를 물리치는 수밖에 도리(道理)가 없는 것이 도회인이다.
그런데 작년 이맘때 사들인 집은 안마당이 대여섯 평 남짓이 있다. 이제 보니 넓은 마당이 아닌데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어찌 넓어 보이는지 꼭 항 속에 갇혔다가 연못에 놓여진 붕어와 같은 느낌이었다. 인제야 사람 사는 것 같다는 말이 우리 집 다섯 식구 입에서 거의 동시에 나왔다. 그것은 언어라기보다 심호흡에 가까웠다.
내 생각 같아서는 안마당 전체를 꽃밭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언제고 현실적 문제가 앞선다. 결국 장독대가 두어 평이나 차지하고 말았고, 수도가 우리 오기 전부터 한 평 점령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또 문자 그대로의 안마당이 없을 수는 없었다. 이리하여 남은 두 평 땅에 나는 은행나무 두 그루를 사서 옮겨다 심었다.
그리고 철이 늦어서 꽃씨를 뿌리지 못함을 한없이 아깝게 여기면서 생화점(生花店)에서 화분을 분주히 사들였다. 처음에는 산보 끝에 잠시 들러서 한두 분 사들고 오다가 나중에는 리어카로 배달을 시켰다. 장미, 백합, 제라늄, 푸림로즈, 베고니아 등 50여 분이 모두 만개(滿開)였다.
"꽃을 사다니, 꽃이란 땅에서 스스로 나는 것이지."
부친은 이렇게 나를 꾸짖으셨다.
나는 부친, 아니 노인들의 생활 태도를 비웃었다. 돈은 어디까지나 수단이다. 생을 즐기기 위해서는 몇 원(圓) 돈이 문제가 아니다. 나는 새로 사온 등의자에 걸터앉아서 화분의 꽃들을 바라보았다. 장미 꽃잎의 고운 빛깔이 나의 가슴 한구석을 간지러울 듯 애무하였고, 푸림로즈의 아기자기하게 어여쁜 꽃들이 오순도순 정다웠다.
가끔 일어서서 코를 꽃 위에 갖다 대보기도 했다. 백합은 그 청초한 자태보다도 향기가 더한층 아름다웠다. 나는 ≪신약≫의 시를 몸소 체험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아라….
실로 오늘에야 '삶'과 '시(詩)'를 체득한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날 저녁에 놀러 온 K군을 붙들고 이렇게 나의 인생관을 토로했다.
"미래를 위하여 현재를 희생하는 것은 생의 낭비다. 생의 진실은 현각(現刻)에 있다. 인생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찰나다. 꽃은 폈다가 지면 그만이 아니냐고? 그렇다. 그러나 그 꽃된 순간이 의의 있는 것이다. 꽃! 아아, 꽃…."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 나는 매일 화분에 물을 주고 완상하였다. 그러나 열흘이 못 가서 꽃들은 거의 다 져버리고 말았다. 장미는 체격이 보잘것없는 미인 같아서 꽃 없는 가장귀는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백합은 꽃 떨어진 후에 잎마저 누렇게 뜨기 시작하는 분도 있었다. 푸림로즈도 호박잎 같은 거칠고 검푸른 잎사귀를 남길 뿐. 제라늄은 아직도 꽃송이가 달렸건만 그 냄새가 고약했고, 어떤 것이 잎인지 꽃인지를 분간할 수 없도록 울긋불긋한 베고니아는 야하게 화장한 계집 같았다.
나는 이렇게 쉽사리 환멸을 맛보았다. 그러곤 또다시 화분들을 돌보지 않았다. 그것은 흡사 미를 보고 사랑했다가 여자는 스물이 한때라 미가 스러지매 아내를 헌신짝같이 버리는 자의 심리였다. 찌는 여름이 되어 대낮에는 뙤약볕에 헐떡이는 화초들의 숨소리를 들을 듯하건만 나는 본 척도 안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친께서 화분을 돌보기 시작하셨다. 발을 쳐서 반응달을 만들어주기도 하시고, 물을 햇빛에 쪼여서 화초 체온에 맞게 하여 주시기도 하였다. 화초들은 병든 잎 하나 없이 잘 자랐다.
겨울이 되자 부친은 구근을 파 말리시며 일방 화분에 담긴 것은 방에다 들여놓으셨다.
올해도 장미, 백합, 제라늄, 푸림로즈, 베고니아 등이 만발했다. 그것은 전혀 부친의 덕택이다. 그러나 그 꽃을 즐기는 것은 여전히 나다. 나는 시방 꽃 앞에 황홀타.
하나 이러한 생의 기쁨이란 결국 단순함이 아닐까. 그것이 아름다운 향락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생의 창조는 꽃을 북돋우신 부친과 같은 노력과 인내만이 가져올 것이다. 꽃을 좋아하는 마음보다도 꽃을 낳으려는 희생적 정신이 귀한 것이다. 이것이 아버지께서 무언중에 나에게 일러주신 교훈이다.
김동석은 문학평론가이자 수필가이다. 그의 필봉은 평론에서는 날카롭기 비수 같았으나 수필에서는 '산보적'이고 유유자적하였다. 그는 수필을 가리켜 "생활과 예술의 샛길"이라고 정의했을 만큼 그의 수필에는 생활이 들어 있으며, 그 생활(소재)에는 주제가 부여되었다.
이 수필은 모든 것은 노력과 인내와 희생이 수반되어야만 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 추상적인 주제를 그는 구체적인 꽃으로 형상화했고, 그 안에 씨방처럼 자신의 철학을 심었다.
<예문②>
정적
李正林
매주 화요일 아침이면 나는 동교동 로터리에서 합정동 쪽을 향해 걸어간다. 삼거리에서 길모퉁이를 돌면, 아침을 활발하게 시작하는 나이든 여인들의 인사 소리가 요란하게 밖으로 새어 나온다. 생명보험 건물인 것이다. 그 아래로는 일주일치 편지를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가서 붙이곤 하는 작은 우체국이 있고, 그 우체국 바로 옆으로 외줄기 기찻길이 나 있다.
내가 그 기찻길에 닿는 시각은 아홉 시 사십 분쯤, 그 시간이면 어김없이 기차가 지나간다. 손님을 태운 객차가 아니라, 둔중해 보이는 화물차다. 차량은 모두 해야 서넛밖에 안 되지만, 그래도 기차는 기차라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서 있어야 한다.
일이 분을 다투는 출근 시간에, 땡땡 치는 종소리와 함께 느릿하게 들어오는 기차를 기다리고 서 있노라면, 처음에는 마음이 급해 조바심이 났었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도 자동차도 그 허술해 보이는 차단기 앞에서 얌전히 멈추어 서 있지 않는가.
성미 급한 운전사도 차단기 앞에서는 꼼짝없이 서 있어야 하는 순종과 평등의 시간. 소리만 들리지 모습은 보이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갑갑하여 차단기 밑으로 지나가려는 이도 있을 법하건만,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라도 기다리듯 공손히 두 발 모으고 서 있다.
어느 날, 그 느릿느릿 지나가는 기차의 운전석에서 기관사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보자 나까지 덩달아 하품이 나올 것 같아지면서 갑자기 부글거리던 조급증이 거품처럼 가라앉는 것이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편안함이 내 전신을 휘감았다.
나는 이제 그 건널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있는 그 짧은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분주한 동(動)의 세계에서 내밀한 정(靜)의 세계로 들어가는 시간, 온갖 잡음이 소멸된 그 정적(靜寂) 한가운데에서 나는 마음을 비우는 연습을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도심 속에서 만나는 정적, 일주일에 한번 무심(無心)을 배울 수 있는 화요일의 아침을 그래서 나는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흔히 마음의 평온을 얻으려면 그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말한다. 어떻게 해야 마음을 비울 수 있는 것일까. 기차 건널목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나는 그것을 생각해 보았다. 내 수필에는 크든 작든 주제가 들어 있다. 그 주제에 설득력이 없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량 부족일 뿐, 주제를 부여했기 때문에 수필이 되지 못한 것은 아닐 것이다. 수필은 평범한 일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삶이 문학으로 거듭나게 하는, 매우 철학성이 짙은 글이라 아니할 수 없다.
(2003. 8. 8∼9. LA 한국문인협회 문학 캠프 주제 발표 원고)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