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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를 위해서는 실체나 본질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중요한 관건이다.
실체나 본질 같은 개념이 어느 정도 머리에 들어오게 되면 철학은 갑자기 쉬워진다.
특히 서양 근대철학을 보면 가히 ‘실체를 둘러싼 전쟁터’라고 일컬을 정도로 실체를 둘러싼 치열한 논쟁이 중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실체라는 맥락을 놓치면 철학사상 중요한 흐름을 통째로 놓치게 된다.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원리를 초월적이고 계시적인 진리에서 찾기 보다는 나 자신, 즉 자아에서 찾음으로써 명실상부하게 근대철학의 아버지가 되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된 대륙이성론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로 이어진다.
이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들을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단위로 표현해 세계에 대한 상을 그렸는데,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아로서의 정신적 실체와 연장을 지닌 육체적 실체의 이원론을 제시했다. 스피노자는 ‘자연’이라는 단일한 실체 안에서 다양한 사물이 존재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설명했고, 라이프니츠는 이 세계를 ‘단자’라는 독특한 형이상학적 단위의 실체로 표현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한 명제, 즉 모든 철학의 원초적인 명제인 동시에 토대가 되는 것을 제1원리라 부른다. 이 제1원리를 찾기 위해 그는 방법적 회의를 제시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자는 것이 데카르트의 의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조금이라도 확실치 않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서 철학을 출발하고자 하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현대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오히려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고 철학에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이 명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울러 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철학할 당시까지 ‘신 중심’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1장. 대륙의 합리론
1) 인간을 철학의 주체로 세운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새로운 원리 위에서 학문을 통일적으로 재건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엄밀한 논증적인 지식인 수학에 근거하여 형이상학, 의학, 역학, 도덕 등을 포함하는 학문 전체를 ’보편학‘으로 정립코자 하였다. 그가 보편학을 학문연구의 이념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은 수학적 방법을 모든 학문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것을 이념으로 한다는 말이다.
데카르트는 진리를 확실하게 인식하기 위하여 인간에게 허용된 길은 명증적 직관과 필연적 연역 외에는 없다고 하여 모든 명제를 자명한 공리로부터 연역해내는 기하학적 방법을 철학에 도입, 이 방법을 통하여 데카르트는 중세철학에서 탈피하여 근대철학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다른 명제로부터 논증되지 않고 스스로 명확한 명제, 즉 모든 철학의 원초적인 명제인 동시에 토대가 되는 것을 제1원리라 부른다. 이 제1원리를 찾기 위해 그는 방법적 회의를 제시하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모조리 의심하여 더 이상 의심할래야 의심할 수 없는 명백한 진리에 도달하자는 것이 데카르트의 의도였다. 그리하여 그는 조금이라도 확실치 않은 모든 것을 의심하는 데서 철학을 출발하고자 하였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현대 우리의 관점에서 봤을 때는 오히려 언뜻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게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고 철학에서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이 명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아울러 그를 ‘근대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철학할 당시까지 ‘신 중심’의 인간관과 세계관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사회에서 자아인 나는 가족, 사회, 또는 국가와 구별되는 독립된 인격체로 여겨진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철학할 당시만 해도 교회의 권위와 계시의 진리에 의존하던 중세 스콜라철학의 분위기가 크게 바뀌지 않은 상태였다. 자아라는 독립된 인격체를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철학자들이 세속적인 인간을 부각했지만, 그들은 세계와 진리를 탐구할 독립적인 주체로서의 자아를 철학적으로 세우지는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데카르트는 이성을 올바르게 사용한다면 계시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또한 인간 안에 생각하는 자아라는 원리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이자 새로운 시대를 여는 획기적인 전환점이라고 확신했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고대, 중세시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가치란 무엇인가?’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 등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한 대답을 인간은 철저하게 신과 종교에 의존해왔다.
신의 말씀이라고 여겨진 성서나 코람 등의 권위에 의존하여 그 해답을 얻어왔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존재의 생명의 유한성을 염두에 뒀을 때, 그 의식이 절실해질수록 ‘과연 신을 배제한 채 철학의 중심주제인 인간관,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제대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인가?’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남아있을 듯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철학에서 최초로 신이 아닌 인간을 철학의 주체로 세웠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그만큼 획기적인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더 이상 신의 권위에 휘둘리지 않고 인간이 마침내 자신의 존재와 가치와 세계의 진리에 대해 묻고 스스로 그것에 대한 대답을 구하고자 하는 이른 바 ‘이성의 시대’에 접어든 것이다.
데카르트의 철학사상 독특한 지위
그렇다면 그가 어떻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에 도달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사실 데카르트의 철학사상 독특한 지위는 다음에서 비롯된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교회나 전통의 권위에 의존하여 신을 비롯한 어떤 실체나 초월적인 원리를 전제하고 ‘일반성에 의해 특수성을 결정하는 방식으로’ 인간과 세계를 독단적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데카르트는 먼저 어떤 초월적인 원리를 도입하여 대상 혹은 세계를 섣불리 재단하려 하지 않고 ‘특수성에 의해 일반성에 접근하는 방식’을 통해 마침내 ‘생각하는 자아’에 도달하여 이를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철학자이다.
즉 합리론 또한 어떤 실체에서 출발하여 그 실체를 통해서 합리적으로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성중시의 철학체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특이하게도 데카르트는 먼저 어떤 실체를 앞세우지 않고, 끝없는 회의를 통해 명석 판명한 확실한 진리를 추구한 끝에 ‘생각하는 자아’라는 실체에 도달한 뒤, 이 ‘생각하는 자아’라는 실체에서 출발하여 다시 세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하려 한 철학자였던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만큼 철학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것도 드물 것이다. 로크에 의해서 바로 공격을 받은 바와 같이, 문제의 핵심은 과연 그 명제가 데카르트의 주장대로 ‘자명하고 명석 판명한 본유관념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처음부터 명석 판명한 본유관념으로서 ‘생각하는 자아’를 독단적으로 전제하고 이를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정신현상을 의심해보고 치밀하게 되돌아본 뒤 그 모든 정신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라는 실체를 명석 판명한 것으로 확신하게 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회의의 과정을 거쳤는지를 소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뒤, 내가 그처럼 모든 것을 그릇된 것으로 생각하려는 동안의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는 너무나 확실하고 보증된 것이어서 앞서 회의론자들이 제기했던 극단적으로 과장된 모든 가정도 이 진리를 흔들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주저없이 이 진리를 내가 찾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였다.
그 다음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했다. 내가 어떠한 신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내가 존재하는 어떠한 세계 또는 장소도 없다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물들의 진리를 의심하는 바로 그 사실에 비추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로부터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 즉 온전한 본질이거나 또는 생각하는 것이 본성임을 알았다.”
(연효숙, <서양철학이야기 3>)
첫댓글 그러나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만큼 철학에서 논란의 대상이 된 것도 드물 것이다. 로크에 의해서 바로 공격을 받은 바와 같이, 문제의 핵심은 과연 그 명제가 데카르트의 주장대로 ‘자명하고 명석 판명한 본유관념이냐?’는 것이다.
그러나 데카르트가 처음부터 명석 판명한 본유관념으로서 ‘생각하는 자아’를 독단적으로 전제하고 이를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정신현상을 의심해보고 치밀하게 되돌아본 뒤 그 모든 정신현상을 가능케 하는 원인이자 기체로서의 ‘생각하는 것이 본성인 자아’에 도달하게 되었다는 것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바로 그 뒤, 내가 그처럼 모든 것을 그릇된 것으로 생각하려는 동안의 ‘나’라는 존재가 반드시 어떤 무엇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주목하게 되었다.그리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진리는 너무나 확실하고 보증된 것이어서 앞서 회의론자들이 제기했던 극단적으로 과장된 모든 가정도 이 진리를 흔들어놓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결론적으로 주저없이 이 진리를 내가 찾던 철학의 제1원리로 받아들였다.
그 다음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주의 깊게 검토하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점을 확인했다. 내가 어떠한 신체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내가 존재하는 어떠한 세계 또는 장소도 없다고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것에 대해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다른 사물들의 진리를 의심하는 바로 그 사실에 비추어서 내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고 확실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로부터 나는 내가 하나의 실체라는 것, 즉 온전한 본질이거나 또는 생각하는 것이 본성임을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