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철은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치라고 했다.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른바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또 한 번의 출가였다. 비구와 대처승의 절 뺏기 싸움이 한창일 때 성철은 불교의 내적 정화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성철은 천제굴에서 가족과 화해했다. 딸에게는 출가를 권유했고, 딸은 영원한 행복을 찾아가겠다고 다짐했다. 또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갔고, 결국 아들을 대장부로 인정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다시 속연을 끊음이었다. 통영은 산청 속가와도 가까웠다. 성철에게 가깝고 먼 것은 거리가 아니었다. 인연 있는 이들이 너무 많이 찾아왔다. 그들로부터 다시 떠나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이미 성철이란 법명은 누리에 널리 퍼져 있었다. 종단은 성철의 생각과 말 한마디를 귀하게 생각했다. 조계종은 1955년 9월 성철을 해인사 주지에 임명했다. 종단의 일방적인 조치였다. 성철은 곧바로 사직원을 종정에게 보냈다. 결국 해인사 주지에 도반인 자운이 취임했다. 자운은 성철의 임명장을 지니고 가서 해인사 주지직을 인수했다.
성철은 그러나 마땅히 갈 곳이 없었다. 마침 팔공산 파계사의 한송 스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파계사 산내 암자인 성전암이 비록 낡았지만, 기세와 인연이 범상치 않으니 다시 일으켜 세워보라는 것이었다. 팔공산 자락에 위치한 파계사는 아홉 갈래로 흩어진 물길을 붙잡아 모은다는 뜻으로 파계사(把溪寺)라 했다고 한다. 804년(신라 애장왕 5) 심지 스님이 창건한 고찰로 그 이후 조선시대 개관 스님이, 다시 현응 스님이 새로 지었다. 현응은 숙종의 부탁으로 세자의 잉태를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렸는데 백일기도가 끝나는 날 숙빈 최 씨가 현몽하고 세자를 낳았다고 한다. 바로 영조였다.
성전암은 창건연대는 알 수 없지만 현응이 영조 탄생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린 곳으로 알려졌다. 경북의 3대 참선도량 중 하나로 꼽는다. 성전암은 파계사에서 1킬로미터 남짓 산길을 올라야 나타난다. 한송은 성철과 금강산 마하연 선방에서 함께 정진했다. 선승으로서 성철의 면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송은 파계사를 수행 제일 도량으로 조성하겠다는 원을 세우고 불사하고 있었다. 성철이 자신이 구상하는 가람의 구심점이 되었으면 하기는 바람이 있었을 것이다.
성철은 1955년 가을 통영 안정사 천제 토굴을 빠져나왔다. 오나가나 불서가 문제였다. 트럭에 실린 불서는 벽방산 산 밑에서 팔공산 산 밑으로 옮겨졌다. 성전암은 벼랑에 붙어 있어 흡사 제비집 모양이었다. 막상 도착해 보니 경내에는 변변한 건물 한 채 없었다. 그래도 눈을 들어보니 단풍이 고왔다. 늦가을이었다. 뜰이 넓지 않아서 건물을 줄이고 마당을 넓히기로 했다. 쉽지 않은 공사였다. 법전이 팔을 걷어붙였다. 독성각은 법당으로 쓰고 나한전에 불서를 모셨다. 벼랑의 제비집(성전암)에 책이 들어가 가득 찼다.
성철은 암자 둘레에 철조망을 치라고 했다. 스스로 외부와 단절시켰다. 이른바 ‘10년 동구불출(洞口不出)’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또 한 번의 출가였다. 비구와 대처승의 절 뺏기 싸움이 한창일 때 성철은 불교의 내적 정화를 위해 치열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성철은 더 철저히 수행하는 전범을 보였다. 출가-제방 편력-오도-대중 결사를 마치고 독거 수행에 들었다. 그것은 전형적인 수행납자의 길이었다. 천제, 성일, 만수 세 행자가 성철을 시봉했다. 모두 10년 만에 제자가 된 이들이었다. 집을 다 고친 후 떠나갔다.
1956년 봄 성전암에 딸 수경이 찾아왔다. 수경은 친구 옥자와 함께 팔공산에 올라왔다. 두 사람은 사범학교를 막 졸업한 갓 스무 살 처녀였다. 수경은 파계사를 지나 성전암이 가까워지자 묵곡리 속가의 식구들이 떠올랐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삼촌, 숙모…. 성전암에 오르면 찾아가 볼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교사 발령을 받았지만, 수경은 학교가 아닌 산으로 들어갈 채비를 했다. 삼촌은 중이 되더라도 교편을 1년만 잡고 가라 했다. 또 어머니는 다시 대학에 들어가 더 공부하라 했다. 고집불통 수경의 마음을 돌려보려는 호소이자 애원이었다. 하지만 수경은 성철 스님의 얘기만을 머릿속에 넣고 살았다. 학교에 가지 않고 참선 공부만 하며 살겠다는 수경에게 성철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매듭을 못 지으면 큰일도 성공할 수 없다. 졸업하고 오거라.”
이제 때가 된 것이다. 삼촌은 마지막으로 가족회의를 열어 설득해 보기로 했다. 막상 가족들이 둘러앉았지만, 누구도 먼저 입을 열 수 없었다. 서로의 얼굴만 보고 있는데 수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릅니다. 누구든 제 죽음을 대신해 줄 수 있다면 절에 가지 않겠습니다.”
그 말로 끝이었다. 누가 수경을 대신하여 죽을 것인가. 할아버지 이상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들이 집 나갈 때도 울지 않던 이상언이 손녀가 출가한다니 눈물을 보인 것이다. 그 눈물 앞에 수경은 물론 가족들이 고개를 숙였다. 긴 침묵이 흘렀다. 이른 봄밤이 아팠다. 멀리서 새 울음이 그 정적 속을 파고들었다.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부처님은 6년 만에 도를 깨치셨지만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3년 만에 도를 깨치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 말을 새겨듣지 않았다. 부처님이 도를 깨쳤지만 어디 속세로 돌아왔는가. 식구들은 다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수경은 할아버지에게 하직 인사를 드렸다. 할아버지 당부가 각별했다.
“절에 가면 버섯은 송이버섯 외에는 절대로 먹지 말거라. 산에는 독버섯이 많다. 그리고 이걸 가져가거라.”
이상언은 한약 봉지를 내밀었다. 언제든지 중탕(重湯)을 해서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일종의 보약이었다. 약을 받으며 수경은 문득 할아버지 얼굴을 쳐다봤다. 유독 주름살이 눈에 띄었다.
‘많이 늙으셨구나.’
더욱 기가 막힌 사람은 어머니 이덕명이었다. 일찍 남편이 집을 나가고, 큰딸은 죽고, 이제 남은 둘째 딸이 어미 가슴에 못을 박고 있었다. 시부모가 있어서 제대로 큰소리도 내지 못하고 서러움은 안으로만 삼켰다. 수경은 그렇게 집을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할아버지 이상언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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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돌계단을 올라 성전암 경내에 들어섰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의 신분을 박차고 다시 배움의 길에 들어섰다. 성전암에는 천제, 만수, 성일 세 행자가 있었다. 선방에는 법전, 혜암, 일타 등이 정진하고 있었다. 수경과 옥자는 성철에게 3배를 올렸다.
“참선 공부를 하기 위해 집을 나왔습니다.”
수경은 졸업하고 왔으니 참선 공부 법을 가르쳐 달라는 것이었다. 성철은 아직 도시의 물이 빠지지 않은 수경과 옥자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았다. 출가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말했다.
“수행자는 가난부터 배우고 하심(下心)해야 한다. 저 마을로 내려가 탁발부터 해보라.”
둘은 마을로 내려가 제법 번듯한 집에 들어갔다.
“밥 좀 주세요.”
도회지 신여성 둘이서 밥을 달라 하자 정작 놀란 것은 그 집 식구들이었다. 며느리가 상을 푸짐하게 차려 내놓았다. 아마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이라며 밥을 먹는 두 처녀를 흘끔거렸다. 밥을 잘 얻어먹고 성전암에 올라와 성철에게 자초지종을 고했다. 성철은 혀를 찼다.
“아직 멀었구나.”
수경과 옥자는 뭔가 배우고 싶었다. 하루빨리 화두를 들고 공부하고 싶었다. 수험 공부를 하듯, 영어 단어와 수학 공식을 외우듯 얼른 해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영원한 길을 찾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성철은 두 사람의 마음을 꿰뚫고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야 한다.”
당시에는 그 말이 마음에 닿지 않았다. 먼 훗날에야 알아차렸다. 성전암에서 하룻밤을 보낸 두 사람은 팔공산을 내려와야 했다. 당시에는 비구니 사찰이 흔치 않았다. 해인사 말사인 청량사를 찾아가기로 했다. 성철은 직접 작성한 법문 노트를 내밀었다. 친필은 단정했다. 머리말부터 수경의 가슴을 덥혔다.
“호화코 부귀코야 맹산군만 하련마는/ 백년이 못하여서 무덤 위에 밭을 가니/ 하물며 여남은 장부야 일러 무삼하리오
과연 그렇다. 생자필멸은 우주의 철칙이라. 대해거산(大海巨山)도 필경은 파멸하거든 하물며 그 사이에 끼어 사는 구구한 미물들이랴! 천하에 없는 부귀영화를 누리는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죽음을 못 면해서 소나무 밑에서 티끌이 되나니, 모든 부귀영화는 일장춘몽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낙양성 십 리 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에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몇몇이냐?’라고 노래함도 이 소식을 전하여 주는 것이다.
초로인생(草露人生), 초로인생, 풀잎의 이슬 같은 인생.”
수경에게 법문 노트는 생명수 같은 것이었다. 왜 대자유인이 되어야 하며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불교의 기초를 가르치고 신심을 키워주기 위해 한자 한자 적은 것들이었다. 수경과 옥자는 법문 노트 앞에 ‘백비(百非)’라 썼다. 감히 그 어떤 이름도 붙일 수 없이 귀한 것이라는 뜻이었다.
김택근 언론인·시인 wtk222@hanmail.net
[1319호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