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 요한복음 13:1-15
제목 :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고난주일 셋째날 저희들을 또 주의 전으로 함께 불러 모아 주시고
말씀 묵상하며 함께 기도하게 하시니 주님 감사합니다.
또, 우리의 기도의 간절한 제목과 함께 귀한 예물도 아버지께 올려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모든 기도의 제목과 이 예물을 기뻐 받아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가 또 말씀을 듣습니다.
성령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씀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들어가는 말 : 서로 사랑하라
어제 우리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에 약속된 그 목자이시며, 양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십자가 사건은 선한 목자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건이었지요.
목자가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 이유는, 양들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양을 그저 본인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삯꾼은 결코 양을 위해 죽지 않습니다.
우리의 목자 예수님은 당신의 생명처럼 양을 사랑하셨기에,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신 겁니다.
사랑의 주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제자들에게 유언처럼 부탁하신 말씀이 있지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 요한복음 13장 34-3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유명한 말씀이지요..
사랑의 목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바라시는 것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역시 서로 사랑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 즉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우리가 예수의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만약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예수의 제자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뭐 여러 가지 변명을 대도, 결국은 원인이 거기에 있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이 유언과 같은 말씀인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3장은 그 사랑이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유월절 바로 전날인 목요일 저녁에 일어난 일을 기록하고 있지요.
유월절은 이스라엘의 최대의 절기입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하기 전날 밤 하나님의 천사가 애굽 전역을 다니면서
문설주에 어린 양의 피가 발라져 있는 집들은 넘어가고 패스오버(Passover) 유월했다는(넘어갔다는) 것이지요.
그 외에 집들에는 장자의 죽음의 재앙이 임합니다. 이 재앙으로 인해서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살이에서 430년 만에 극적으로 해방되었지요.
이 역사적인 해방의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가 바로 유월절입니다.
유월절 안에 담긴 이 역사적인 의미가 워낙 크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지금도 유월절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유월절에 담겨있는 해방의 기쁨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로마로부터의 해방을 열망하게 했지요.
그래서 1년 중 이 유월절 시즌이 되면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모여들어서
유월절의 해방이 현실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염원했습니다.
특별히 경건한 유대인들은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가 나타나서 로마를 전복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얼마나 그 열망이 컸던지, 공생애 기간에 예수님께는 물론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에게까지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이때입니까?"라고 계속해서 질문합니다.
사도행전 1장 6절 "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이렇듯 유대인들의 뇌리 속에는 어떻게든 나라가 회복돼야 한다는 사고가 깊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들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가득 채웠으니, 자칫하면 각종 치안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특히 유월절 때에는 자칭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당시 치안을 담당했던 로마 당국과 이스라엘 집권층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지요.
학자들에 따르면, 당시 예루살렘에는 평소에는 약 5만 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 유월절이 되면 무려 20만 명이 넘는 인파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전부 예루살렘으로 몰려 들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불과 4일 전에,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대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사람들로부터 메시아라 칭송받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적 등장과 유월절의 뜨거운 분위기는 군중들이 동요하기에 충분한 여건을 갖추게 된 것이었지요.
산회드린의 집권층들과 빌라도가 예수님을 가르키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표현에
왜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했는지가 이해가 되지요.
그들은 유월절 시즌에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한 예수님을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로 받아들였던 겁니다.
▣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
이런 상황에서 본문 1절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때가 이르렀다 하는 것을 아셨다고 증언합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여기서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란 십자가에 달리시는 때를 의미합니다.
실제로 당시에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 70명이 모인 그 산헤드린 공회는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죽일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어요.
(마태복음 26:3-4)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관정에 모여 예수를 흉계로 잡아 죽이려고 의논하되"
'안되겠다. 저거 죽여야겠다' 의논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아신 예수님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이 땅에서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셔야 됐나?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어요.
보통 사람들은, 자기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면, 자기 자신이나 혹은 남은 가족 정도에 신경을 써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제 내일이면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알면서도
자신이 아니라 제자들을 비롯한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라고 말씀합니다.
▣ 유다의 마음에 죄의 씨를 뿌린 사탄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은 다소 느닷없이 가롯 유다의 마음 상태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롯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이 말씀에서 "넣었다"라고 하는 단어는 '뿌렸다', '심었다' 그런 뜻입니다.
밭에 씨를 뿌리듯, 마귀는 유다의 마음 밭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뿌렸다 심었다 그 말이지요.
씨앗이 땅이 뿌려졌다고 해서, 무조건 자라나지 않습니다.
땅이 씨앗의 성장에 적합해야 씨앗에서 움이 트고 줄기가 나오고 자라게 되지요.
가릇 유다의 마음 밭이 사탄의 씨앗이 자라기에 적합했기 때문에
유다는 사탄의 의도대로 예수님을 팔려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받아들인 것이지요.
이후 유다는 예수님을 잡는 현장에까지 직접 동행해서 예수님을 원수들에게 넘깁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밭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유다의 마음은 세상적이고 물질적이고 탐욕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4-6절에 보면,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줄 가롯 요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마리아가 예수님 앞에 나와 300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를 부었을 때, 유다가 한 말이지요.
(6절)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그는 세상과 물질에 눈이 어두워져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3년 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웠으면서도 가룟 유다는 여전히 세속적인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세상적인 가치관과 탐욕으로 가득 찬 유다의 마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지요.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긴 했지만, 불만이 가득한 상태로 따라다녔던 겁니다.
이런 자세는 결코 선한 열매를 맺지 못하지요. 급기야 유다는 예수님을 악한 자들에게 팔아 넘기고야 말았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우리의 마음)에 불평과 불만과 부정적인 생각과 늘 비판하는 마음이 쌓이게 되면,
사탄은 그런 마음 밭을 좋아하기 때문에 거기에 죄의 씨앗을 뿌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죄의 씨앗은 그런 불평과 부정적인 마음의 밭에서 죄악의 자양분을 공급받아서 무럭무럭 자라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바라기는, 우리 주안의 성도님들의 마음밭이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싫어하는 마음밭이 되기를 원합니다.
항상 긍정적인 생각과 남을 칭찬하는 마음과 다른 이를 너그럽게 대하는
그런 선한 마음 밭에 성령님이 역사하셔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복된 삶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런데, 오늘 본문 4절에서 예수님은
식사 도중에 갑자기 일어나 겉옷을 벗으시고 허리에 수건을 동이신 다음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합니다.
이 장면은 매우 이례적이고 독특한 장면이 아닐 수 없지요.
왜냐하면, 당시 정결 의례상 손과 발을 씻는 일은 당연히 식사 전에 반드시 했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유대인들이 식사할 때, 서로 상대방을 향해 발을 뻗고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식사를 했다 그래요.
사진 볼까요.. 저게 유대인들의 식사하는 자세입니다.
따라서, 발을 씻지 않으면 발 냄새로 인해서 상대방에게 불쾌감을 유발할 수 있어서 반드시 식사 전에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발을 씻는 것은 이스라엘의 정결 예법에 의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지요.
그런데, 식사가 이미 진행 중인 상황에서 갑자기 예수님이 일어나서 제자들의 발을 씻었다는 거예요. 이건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제자들이 식사 전에 정결 의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하지요.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은 반드시 식사 전에 손발을 씻는 정결례를 행하는 것이 상식이고 전통인데, 정결례를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건 무슨 이야기일까요?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는 거죠. 어떤 문제가 있었을까?
정통 유대인들인 제자들이 정결의례를 지키지 않을 정도로 지금 그들 사이에 뭔가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라고 하는 거예요.
도대체 제자들 가운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여기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 이전에 제자들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하는 것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공관복음에 보면, 마지막 식사가 있기 전 제자들은 예수님 앞에서
'누가 더 큰 사람이냐, 누가 더 크냐'라고 하는 문제를 가지고 심한 논쟁을 합니다.
게다가 마가복음 10장 37절과 41절을 보면,
"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좌.우편 자리를 요청합니다. 청탁을 합니다.
그때 그 얘기를 들은 나머지 제자들이 화를 내지요. (41절)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화를 내거늘"
예루살렘을 향해서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길을 올라가고 있는데,
그 예수님의 일행들 가운데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의 보좌의 좌우 자리를 요구하는 사건이 벌어진 거예요.
그리고 그 얘기를 듣고 나머지 모든 제자들이 화를 냅니다. 무슨 얘기예요? - 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먼저 선수를 치니까, 화가 난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후반으로 갈수록 제자들 사이의 갈등과 분열이 점점 심해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에서부터 비롯된 것이었지요.
그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이 로마를 전복하고, 정치적으로 이스라엘을 회복할 줄로 알고, 그렇게 기대하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제자들은 하나같이 새로운 나라에서 자기들이 개국공신이 되어서 받게 될 상급에 관심이 많았어요.
더군다나 이제 예수님께서 "내 때가 이르렀다", "예수의 때가 이르렀다"라고 말씀하시니까,
제자들 사이에서는 이제 긴장감이 더 극대화되고 서로 더 예민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보좌에 앉는데,
그때 내가 어떤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 서로 긴장하기 시작하는 거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기대하던 그런 나라가 아니었잖아요.
조만간 이제 스승 예수님은 십자가를 져야 하는 상황인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세상적인 권력을 향한 헛된 꿈을 꾸면서 서로 간에 갈등하고 있었던 거예요.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거냐..' 가룟 유다가 제일 문제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제자들 모두가 다 스승의 가르침과는 동떨어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유월절 만찬을 하기 전까지도 제자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 긴장된 관계에 있었던 겁니다.
그들은 서로 으뜸이 되려고만 했지, 낮아지고 누구도 먼저 서로 섬기려고 하지 않았어요.
가룟 유다는 뒤에서 돈을 빼돌리며 스승을 팔아먹을 생각까지 하고 있었고,
야고보와 요한은 있지도 않은 보좌의 양 옆을 노리고 있었고,
베드로는 의욕만 앞서서 다음날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도 모른 채 지키지도 못할 말들을 내뱉고 있었습니다.
즉, 유월절을 맞이한 제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수선한 상태로 서로 갈등하며 분열되어 있는 상태에 놓여 있었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식사의 자리에 그들을 초청한 겁니다.
"최후의 만찬" - 그들이 식사 자리에 들어올 때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을지 상상이 어느 정도 되지요..
서로 화기애애한 상태로 들어왔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식사 자리에 들어오면서 정결예식도 생략해 버렸어요.
서로 씻을 물을 떠주기도 싫었고, 서로의 손과 발을 씻어주는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더러운 손과 발로 음식을 먹는데 집중하고 있었지요.
마침내 이를 보다 못한 예수님께서 식사 도중에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조용히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으시지요. 그리고 그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지요..
다름 아니라, 지금 제자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려고 작정한 가룟 유다도 함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탄은 이미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님을 팔려는 생각을 씨 뿌리듯 뿌려 놓았고, 유다는 그 씨앗을 기꺼이 받아들였어요.
그 마음 상태로 유다는 뻔뻔하게 예수님께 발을 내밀고 있었던 거지요.
하지만,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악한 제자마저도 씻어 주셨습니다. 초대교회 교부였던 크리소스톰의 증언에 의하면,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을 배반한 원수라고 할 수 있는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어 주었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가 배신할 것을 아셨으면서도, 그의 더러운 발을 제일 먼저 씻어 주셨다라는 겁니다.
유다는 그 씻음받은 발로 악한 자들에게 달려가 예수님을 팔아넘겨 버린 겁니다.
▣ 세족식의 진정한 의미 →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심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어주신 후에 예수님은 다시 옷을 갖춰 입으시고
자리에 가셔서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십니다.
(12절)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이 말씀은 주님이 왜 그들의 발을 씻으셨는지 제자들이 여전히 모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자들은, 밥 먹다 말고 스승이 발을 씻어주시니 씻음을 받기는 했지만,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어리둥절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13절에서 그 의미를 차근차근 설명하십니다.
(13-15절)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아멘!
예수님은 제자들이 서로의 발을 씻어주도록 본을 보이셨다고 마침내 속내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식사 도중에 돌발적으로 세족식을 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최근 상황을 살피시면서
제자들이 어떻게든 서로를 감싸주고,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는 관계가 되도록 본을 보이셨다는 말이지요.
그건 지금 예수님이 다 알고 계셨다는 거예요.
그들 사이에 서로 긴장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자리다툼하고 있는 모습을 예수님은 다 보고 계셨고 알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게 안타까우셨어요. 그래서 본을 보이셨다, 너희들이 행하도록 본을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본? - 방금 말씀드린 대로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본],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본]을 보셨다는 말씀입니다..
4절을 보면, "예수께서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그랬어요.
[예수님께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셨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그 당시에 전형적인 발 씻기는 종의 모습입니다.
로마에 수많은 종이 있었는데, 로마 인구의 3분의 2가 종이었는데, 다양한 종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이들 가르치는 종, 밥하는 종, 밭에서 일하는 종.. 여러 가지 종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천한 종, 가장 밑바닥에 있는 종이 뭐였냐 하면, 발 씻기는 종이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발 씻기는 종이의 모습이 뭐냐 하면, 항상 허리에 수건을 두르고 서 있는 거예요. 기다리는 거예요.
주인이나 손님이 오면 발 씻어드리는 거예요. 그게 그의 job(일)이예요.
그 발 씻기는 종, 그 당시에 노예들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으로 취급 받았던 발 씻기는 종의 모습이 되어서
그들의 발을 씻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 그건 발 씻기는 종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끝까지 사랑으로 섬기는 본입니다.
그리고 사랑으로 섬김,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을 오신 사명 가운데 하나였어요.
(마가복음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가? - 그것은 바로 죽기까지 사랑으로 섬기기 위하여 오셨다고 그랬어요.
"나는 섬기기 위해서 왔다, 내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
"사랑하니까, 죽기까지 사랑으로 섬기기 위함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씻음의 사건을 똑같이 기록하고 있는 누가는 22장 27절에서 추가합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말씀해요.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추가했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셨어요. 만물을 지으신 분이세요. 그분이 없이는 하나도 된 것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장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그랬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 되신 분, 곧 성 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분이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들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놀라운 겸손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예수님의 이 겸손, 이 사랑, 이 섬김이 있었기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구원 받아 지금 이 복된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원 받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됩니까? 이미 그 대답은 나왔어요.
우리 주님께서 끝까지 우리를 사랑으로 섬겨주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되는 것이지요.
무엇보다 우리가 사랑으로 섬김의 삶을 살려면, 주님처럼 겸손하게 나 자신을 내려놔야 됩니다. 그게 먼저입니다.
내 권리, 내 생각, 내 주장, 내 소원을 먼저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어요. 예수님은 모든 권세와 위엄과 존귀와 영광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그 비천한 제자들, 마지막 순간까지 스승의 아픔은 마다한 채
자리 다툼하고 시기하고 갈등하고 있던 제자들, 섬김과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어 보이는 자들을 위해서
자신의 그 모든 권세, 영광, 당신의 생각, 방법, 자존심, 다 내려놓으시고
그들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어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으셨지요.
그러므로,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 주님의 본을 따라 온전히 사랑으로 섬기려면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내 생각과 내 방법, 내 뜻과 목소리, 내 고집과 자존심을
다 수건에 고이 싸서 허리에 두른 후, 누군가 앞에 겸손하게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사랑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내 체면, 내 생각, 내 자존심을 내려놓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남을 사랑할 수도 섬길 수도 없습니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 무릎 꿇고 그의 종 되어 발을 씻어주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 내게 상처를 준 사람,
나와 갈등관계에 놓여있는 그런 사람 앞에 수건을 두르고 무릎을 꿇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는 했다고, 하나님인 나는 했노라고...
우리가 진정 주님처럼 사랑으로 섬김의 본을 따르려면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의 종이 될 뿐만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위해서도 사랑으로 섬기는 종이 되어야 된다 말씀하신 거예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사랑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사랑하고 섬겨야 된다고...
주님은 섬김 받을 만한 자격이 없던 제자들과
심지어는 자신을 배반할 원수라고 할 수 있는 가룟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어 주셨다 그랬어요.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으로 섬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냥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이지만, [겸손한 마음입니다.]
겸손한 마음이 없으면, 우리는 결코 나 자신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참 힘들더라고요.. 내 자존심 꺾는 것, 내려놓는 게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주님이 우리에게 권면하십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립보서 2:3-5)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 뭘까요?
그건 한마디로 철저하게 자기를 비우는 겸손한 마음이지요.
제가 언젠가 기도하는데, 기도가 안되고 한참 울었던 적이 있어요.
그래서 기도하면서 기랬거든요. "주님, 제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게 해 달라"고...
어떤 분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참 기도가 안되는 거예요. 너무너무 어렵고 힘든 거예요.
제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께 해 달라고 했더니, 그런데 주님께서 저한테 뭐라 그러셨냐 하면,
"ㅇㅇ야, 정말 내 마음을 네가 품을 수 있겠니?" "네가 내 마음을 억만분의 일이라도 알 수 있겠니?"
그 다음에 기도를 못하겠더라고요... 내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 내가 감히...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당신의 제자 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마음을 품어!"
"예수의 마음, 겸손한 마음을 품어!"
"이것을 위해서 내가 먼저 본을 보인 거야."
▣ 나가는 말 : 순종하는 자에게 예수님의 복이 임함
사랑하는 주안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사랑으로 섬기고 나를 낮추고 다른 이의 발을 씻어주고자 하는 겸손한 섬김을 살려고 정말 노력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복이 있습니다.
(16-17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주인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아멘!
"네가 순종하고 행하면 내가 그에 합당한 복을 반드시 줄 거야."라고 약속하십니다.
여러분, 엉뚱한 데서 복을 구하지 맙시다. 정말 복 받기를 원한다면, 서로의 발을 씻어야 됩니다.
주님의 복은 사랑의 관계 안에서 부어집니다.
주님의 복은 우리가 낮아짐의 자세로 겸손히 낮추고 상대방을 섬길 때 주님의 복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혹시, 이 시간 부부간에 어려움 가운데 있는 분들이 있나요? 배우자의 발을 씻어주십시오.
하나님의 복이 여러분의 가정에, 여러분의 부부 사이에 임할 겁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서 혹시 서로 간의 껄끄러운 관계에 놓인 분들이 있나요?
미워하지 마시고, 그 사람의 발을 씻어 주세요. 주님의 복이 임할 겁니다.
어떤 복일까요? - 그 복은 치유와 회복의 복이 임할 겁니다. 회복의 복이 임할 거예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심으로 그들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치유해 주셨어요.
그 복이 우리가 서로의 발을 씻어줄 때 그대로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의 공동체 가운데 임할 겁니다.
우리가 미움과 시기와 갈등으로 얼룩진 더러운 발을 서로 씻어주려고 할 때에,
예수님의 치유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반드시 임할 것이고,
우리는 우리 가정에서, 우리 공동체 속에서 천국을 경험하게 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이 복이 우리 주안의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우리 안에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