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예절의 방위
일반적으로 제주가 제상을 바라보아 오른쪽을 동(東), 왼쪽을 서(西)라 하고, 제사상 앞은 남(南), 지방 붙이는 쪽을 북(北)으로 삼습니다.
상을 놓는 순서는 맨 앞줄에 과일, 둘째 줄에 포와 나물, 셋째 줄에 탕(湯), 넷째 줄에 적과 전, 다섯째 줄에 메(밥)와 갱(국)입니다.
전통예절에서의 동서남북은 웃어른이 계신 곳을 상석으로 보고 북쪽으로 친다. 혼례에서는 주례가 서있는 곳이, 교실에서는 선생님이 게신 곳이, 직장에서는 상사의 자리가, 행사장에는 단상이, 제사에서는 신위를 모신 곳이, 건물이나 사당, 묘지는 실제 방위와 상관없이 북쪽에서 남향한 것으로 간주한다.
웃어른의 위치가 북쪽이므로 어른의 위치에서 보아 그 왼쪽을 동쪽, 오른쪽을 서쪽, 그 앞을 남쪽으로 보았다. 실제 방위에 관계없이 어르신이 앉는 자리가 북쪽이고 남향해 있는 것으로 친 것이다. 그리고 동쪽은 해뜨는 곳이므로 음양으로 따지면 양이어서 남자의 방위이고, 서쪽은 해지는 곳이므로 음이어서 여자의 방위가 된다.
남자는 동쪽, 여자는 서쪽이란 의미로 남동여서(男東女西)이다. 그러나 어른의 위치에서 볼 때 남자의 방위는 동쪽인 왼쪽에 있고, 여자의 방위는 서쪽인 오른쪽에 있어서 남좌여우(男左女右)가 되는 것이다. 두 손을 마주잡는 공수를 할 때도 이 원리로 하기 때문에 남자는 동쪽이며 양을 상징하는 왼손을 위로 올리고, 여자는 서쪽이며 음을 상징하는 오른손을 위로 올린다.
남좌여우, 남동여서이기 때문에 어른과 남녀가 함께 있을 때는 북쪽에 어른이, 서쪽에 여자가, 동쪽에 남자가 앉는다. 혼례 때는 주례가 북쪽에서 남향해 서면 신랑은 동쪽에서 북향해 서고 신부는 동쪽에서 북향해 선다.
제례를 올릴 때도 북쪽의 신위를 향해 동쪽에는 남자 자손이, 서쪽에는 여자 자손이 선다. 제상 가까운 곳부터 항렬이 높은 사람 순으로 선다.
일렬로 자리 배치를 할 때는, 동쪽은 해다 뜨고 밝은 곳이어서 동쪽이 상석이다. 단상의 중앙을 중심으로 좌우로 좌석을 배치할 때는 중앙이 1순위자가 앉는 상석이 되고, 2순위자는 1순위자의 서쪽에 자리배치를 한다. 짝수일 때는 동쪽을 상석으로 하여 일렬로 배치하면 된다.
높은 곳과 낮은 곳에서는 높은 곳이 상석이다. 그러므로 행사를 할 때는 단상을 만들어 어른을 높은 곳에 모신다.
앞쪽과 뒤쪽은 앞쪽이 상석이다.
어른의 앞에 가리는 것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편리한 곳이, 안전한 곳이, 상석과 가까운 곳이, 전망이 좋은 곳이, 들락날락하는 문과 먼 곳이, 겨울에는 따뜻한 곳이, 여름에는 시원한 곳이, 어른이 앉아 있는 곳이 바로 상석이다.
어른을 안내할거나 수행할 때는 어른의 3보 앞이나 3보 뒤에서 인도하거나 수행한다. 수행자나 인도자는 어른의 서쪽에 위치해야 한다. 여럿이 수행할 때는 좌우로 서서 수행한다. 제1수행자가 오른쪽에, 제2수행자가 왼쪽에 서야 한다.
국기 게양할 때도 마찬가지의 방위를 적용하면 된다. 우리나라 국기를 상석에 놓는데, 기타 다른 나라의 국기는 나라에 상하가 있을 수 없으므로 알파벳 순으로 게양한다. 그러나 국제연합기와 함께 게양할 때는 국제 연합기가 우리나라 국기보다 우선한다.
손님을 맞이할 때는 주인이 서향립(西向立)해야 한다. 주인의 자리는 동쪽이고 손님의 위치는 서쪽이다. 이때 주인은 동쪽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고 있으므로 서향립이다. 손님은 서쪽에 서서 동향을 바라본다.
전통예법은 동쪽 계단은 주인이 사용하고, 서쪽 계단은 손님이 사용한다.
이상의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예법에 해당한다. 생사유별, 즉 산 자오 죽은 자와는 다름이 있다. 죽은 사람은 어두운 세상인 음부로 갔으니까 이제는 서쪽이 상석이 된다. 그러므로 두 분 신주를 모실 때나 시신을 안장할 때에는 서쪽을 상석으로 해서 웃어른을 모신다. 또 합설할 때 서쪽에 남자 신위를, 동쪽에 여자 신위를 모신다.
저승에서는 남녀의 방위가 바뀌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사대 조상 신위를 모실 때도 서쪽부터 고조, 증조, 그 다음에 조부 신위, 아버님 신위를 차례로 모신다.
그러나 웃대 시조를 중앙에 모시고 아랫대 조상을 좌우로 모실 때는 시조를 중앙 북쪽에 모시고 그 앞에 제상을 차리고, 그 동쪽에 고조 신위와 제상을, 그 서쪽에 증조 신위와 제상을 차리고, 중앙과 떨어진 동쪽에 조부 신위와 제상을, 중앙과 떨어진 서쪽에 부친 신위와 제상을 차리면 된다. 고조를 시조의 동쪽에 모셔야만이 시조가 상석이 되고 또 좌우로 채워졌으므로 중앙이 상석이 된다.
살아있는 자손들은 동쪽에 남자 자손들이, 서쪽에 여자 자손들이, 연장자는 앞쪽에, 연하자는 뒤쪽에 서면 된다. 같은 항렬이라도 가운데 절하는 자리 가까운 곳에 서열이 높은 사람이 서고, 먼 곳에는 낮은 사람이 선다.
차례
차례는 조상숭배 의례의 한 종류로 시제, 묘제, 기제와 달리 약식 제사다. 차례는 다른 제사와 달리 아침에 지내 촛불을 켜지 않고 축문이 없다. 술도 한 번만 올린다. 약식제사이기 때문이다.
제사나 차례 때마다 듣는 말이 있다. 조율이시(棗栗梨枾), 홍동백서(紅東白西), 어동육서(魚東肉西) 등 제사상 차림을 표현한 말이다. 많이 듣기는 했는데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어떻게 나온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이는 상차림의 유래를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선 차례상은 5열로 진설한다. 제일 앞줄에는 과일을, 둘째줄은 나물과 채소를, 셋째줄에는 전과 적을, 넷째줄에는 탕, 다섯째 줄에는 메(밥), 갱(국) 등이 올려진다. 각 열은 조상이 먹던 음식을 순서대로 표현한 것이다.
즉 앞의 과일은 수렵-채집 시대에 먹던 음식을 의미한다. 제수상차림은 일반적으로 우주와 인간 사회의 모든 현상과 생성-소멸을 설명하는 음양오행설을 따른다. 음양오행설이 과학적이 아니라는 이론도 있지만 우리 조상들은 차례상에도 그들이 생각한 일정한 규칙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차례상에 '붉은 과일은 동쪽, 흰 과일은 서쪽'하는 식으로 방위를 맞추려 한 것이다. 땅에 뿌리를 둔 음식은 음(陰)을 상징한다고 생각해 그 종류의 수를 짝수로 맞추려 했고 그 외의 음식은 하늘에서 얻어진 것이라 해서 양(陽)의 수인 홀수로 맞췄다.
차례나 제사 때 향을 피우는 것은 부정을 깨끗이 하는 정화 기능과 신성을 상징한다. 향을 피우는 것은 인간 삶의 더러움을 털어내고 조상신이 와서 앉을 수 있는 순수한 공간을 만들기 위함이다. 신화를 보면 용궁에 다녀온 수로부인의 몸에서 향내가 났다는 기록이 있다. 신선계를 그린 그림에는 향연이 자욱한 것을 볼 수도 있다. 향이 신계(神界)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향은 신과 인간의 교통매개체이기도 하다.
술잔을 올릴 때는 모사 그릇에 술을 나누어 붓는다. 모사 그릇에는 모래가 담겨 있는데 이는 땅을 상징한다. 땅 속에 있는 조상을 부르는 의식인 셈이다. 이 의식은 향을 사르며 하늘에 있는 조상을 부르는 행위와 대응된다.
첫째 줄의 과일을 놓을 때는 동조서율(東棗西栗), 조율이시(棗栗梨枾) 순이다. 동조서율의 의미는 〈가례집람〉에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원리로 설명돼 있다. 대추의 붉은 색은 해를 상징해 동쪽에 두고 밤은 한자에서 보듯 서쪽에 심은 나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어 서쪽에 놓는다는 것이다.
조율이시는 대추는 동쪽에 밤은 서쪽에, 대추-밤-배-감의 순으로 놓는다는 것이다. 밀양박씨 문중에서는 이를 대추는 씨가 하나니 왕을 뜻하고 밤은 한 아람에 세 톨이니 3정승을, 배는 씨가 6개니 6판서를, 감은 씨가 8개이니 팔방백 즉 팔도관찰사를 뜻한다. 하지만 문중에 따라서는 '조율시이'로 대추, 밤, 감, 배의 순으로 놓기도 한다. 최근에는 조율시이 순서로 놓는 집안이 더 많다고 한다.
과일의 종류는 원래 짝수로 맞추도록 돼 있다.
이는 땅에 뿌리를 둔 지산(地産) 즉 음산(陰産)이기 때문에 음수인 짝수로 놓는 것이다. 그런데 조선시대 이후로는 홀수로 놓는다. 이유는 명확지 않다.
과일 숫자는 귀함을 뜻하는 양(陽)의 수인 홀수로 놓는다. 이때 과일의 위아래를 깎아 놓는데 잘 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조상이 드실 수 있도록 정성으로 다듬는다는 의미가 있다.
둘째 줄은 삼색나물과 식혜, 김치, 포 등이 올라간다. 삼색 나물은 역시 귀함을 뜻하는 양의 수인 홀수로 놓는다. 김치도 희게 담근 나박김치만 올리는데 이는 깨끗하고 순수한 음식만을 올리는 것이 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에는 양념이 발달하기 전부터 굳어진 상차림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셋째 줄에는 전과 적을 놓는다. 생선 중에 장어는 올릴 수 없다. 이유는 장어가 용을 상징해 왕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머리와 꼬리가 분명한 제수는 머리는 동쪽, 꼬리는 서쪽으로 향하는 두동미서(頭東尾西)에 따른다. 음양오행설에 따라 동쪽은 남쪽과 더불어 양의 방향이다. 동쪽은 해가 솟듯 소생과 부흥을 뜻하고, 암흑과 소멸을 상징하는 꼬리는 서쪽을 향하도록 했다.
넷째 줄은 탕의 자리다. 어탕-육탕-계탕. 이렇게 3가지를 올린다. 땅에 뿌리를 박지 않은 고기나 생선은 하늘에서 얻어진 천산(天産)이기 때문에 양의 숫자인 홀수로 놓는다. 탕에 건더기만 떠서 놓는 것은 조상이 먹기 편하게 한다는 의미가 있다.
다섯째 줄에는 메(밥)와 갱(국)을 신의 수대로 놓는다. 그런데 평상시 밥과 국 놓는 위치와 정반대다. 즉 밥이 서쪽, 국이 동쪽이다. 이를 반서갱동(飯西羹東)이라 한다. 이는 산 자의 세계와 죽은 자의 세계가 다름을 의미한다. 추석에는 메와 갱 대신 송편을 올린다. 제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떡이다. 곡식으로 만든 가장 정결한 먹을거리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특히 송편은 둥근 달과 알곡을 의미한다.
제사를 지내는 날자와 시각
기일제의 제삿날은 조상이 돌아가신 당일이다.
제사는 이날 첫새벽[질명(質明):바야흐로 날이 새려는 시각] 닭이 울기 전에 행하는데, 보통 밤 0시가 지나 새날이 시작되면 행한다.
조선시대의 모든 왕실 제사는 축시(丑時)1각(刻)에 시작하였는데, 이는 지금의 1시 15분에 해당한다.
제사를 한밤중에 행하는 것은 귀신이 음도를 따르므로 고요하고 그윽한 시간에 거동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며 또 제사를 그 날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것에 우선해서 행한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 전날은 입제일(入祭日)이라 하여 제사에 들어가는 날로 제구와 제기를 정비하고 제찬을 준비하는 날이다. 제사를 지낸 당일은 파제일(罷祭日)이라고도 부르는데, 흔히 친지와 이웃을 초대하여 제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가정의례준칙」에는 제사를 사망한 날 해진 뒤에 지내도록 하였으나 이는 잘못이다. 제사를 사망 당일 첫새벽 그윽한 시간에 지내는 것은 그 날이 되자마자 맨 먼저 신을 영접하여 제향하려는 뜻이며, 동시에 날이 밝아 세상이 혼탁해지기 전에 신을 불러 정성을 바치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가 다 지난 초저녁에 제사를 지낸다면, 이는 산사람들이 종일 온갖 볼일을 다보고 하루세끼를 다 먹은 후에 귀신을 맨 나중에 대접하는 격이니 성실한 도리가 아니다.
게다가 초저녁은 시끄럽고 번잡해서 귀신을 영접할 시간이 되지 못하고 사람들의 정신도 혼탁하고 피로한 때이므로 생각을 경건하게 통일하기도 어렵다.
그런데 공경과 정성을 제일로 여기는 제사를 어떻게 이러한 시간에 거행할 수 있겠는가? 어떤 집에서는 하루 전날 즉 입제일 초저녁에 제사를 지내기도 하는데, 이는 원래 제사의 날짜가 아니다.
입제일이란 제사를 준비하는 날이지 제사를 거행하는 날은 아닌 것이다.
초저녁에 제사를 지내게 된 데는 옛날 통행금지가 있던 시절에 제사에 참여한 친지들이 각자가 집으로 귀가하기 편하게 하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산사람이 편하자고 귀신을 불편하게 하거나 굶길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통행금지도 없어졌으니 초저녁에 제사를 지내는 잘못은 마땅히 시정되어야 할 것이다.
제사는 모름지기 주위가 고요한 한밤중에 경건한 마음으로 올려야 그 신성함을 느낄수 있는 것이다.
현대에는 잘 지내지 않는 제사들, 즉 매년 일정한 계절에 행하는 합동 제사인 사시제(四時祭)는 일정한 날짜가 정해져 있지 않고 제사지내기 전달 하순에 점을 쳐서 택일을 한다.
점은 사당에서 행하는데 두 개의 윷짝과 같은 점괘를 던져 두 개가 각기 다른 면이 나오는 것을 길하게 여긴다.
먼저 상순 중에 하루를 잡아 점을 치고, 불길하면 다시 점을 치지 않고 하순 가운데서 적당한 날을 잡는다.
이러한 제사들도 그 시각은 역시 첫새벽이 된다.
명절의 차례는 속절제(俗節祭) 혹은 절사(節祀)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사당을 모시고 있던 집에서 설(음력 정월 1일), 청명, 한식, 단오(음력 5월 5일), 칠석(음력 7월 7일), 추석(음력 8월 15일), 중양(음력 9월 9일)에 그 계절에 나는 음식을 올리던 관습에서 유래했다.
지금은 설과 추석의 차례만 남게 되었다.
차례는 정식 제사가 아니라 인정에서 우러나서 올리는 약식 의례이므로 그 시각은 고정되어 있지 않으나 보통은 이른 아침에 행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날에는 제사를 묘소에서 행하는 집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묘소까지의 거리나 여러 가지 준비를 감안하여 적당한 시각에 행하는 것도 무방하다.
음식의종류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을 제수(祭需)라 하고 제수를 제상 위에 놓는 것을 진설(陳設)이라고 한다. 한분을 모시면 단설, 두 분을 함께 모시면 합설이라고 한다. 합설 때는 메(밥) 잔, 갱(국), 수저만 두 개씩 차린다. 제수에는 향신료나 진한 양념인 고춧가루와 마늘 파를 쓰지 않고 간장과 소금으로 간을 한다. 제수를 장만할 때에는 정성을 다한다. 준비된 음식을 자손이 먼저 먹으면 안 된다. 덜어놓고 먹어야 한다. 밤은 껍질을 벗긴다. 과일은 괴기 좋게 위 아래를 도려내고 꼭지부위가 위로 가게 한다. 고인이 특별히 싫어했던 음식이나 복숭아, 잉어, 치자 생선(갈치, 꽁치, 넙치)은 놓지 않는다. 머리카락이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제수 음식은 조상들에게 올리는 음식이므로 명칭도 다르게 한다.
메(반) 밥. 밥을 수북히 담고 뚜껑을 덮는다.
갱 국
면 국수. 건더기만 담고 뚜껑을 덮는다. 계란 흰자로 지단을 부쳐 장식한다.
편 떡. 정사각형의 접시 위에 담는다. 고물은 껍질을 벗겨 흰 빛깔이 되게 한다.
편청 꿀이나 조청을 작은 그릇에 담는다.
전 부침개. 육전과 어전 두 가지를 부친다.
김치 고춧가루를 넣지 않은 물김치
숙채 익힌 나물. 시금치, 고사리, 도라지, 배추나물 등 세 가지를 올린다.
초첩 식초 종지
청장 간장. 종지에 담는다.
혜 식혜 건더기를 둥근 접시에 담고 잣을 박는다. 기제사에는 올리지 않는다.
포 북어포, 건대구, 건문어, 건전복, 육포 등의 말린 것
제주 술. 맑은 술을 사용한다. 청주
숙수 숭늉. 물에 밥알을 약간 풀어 넣는다.
탕 홀수로 준비한다. 재료를 끓여 건더기만 담고 뚜껑을 덮는다.
소고기로 끓인 육탕, 채소나 두부로 끊인 소탕, 생선을 재료로 쓴 어탕이 3탕이다.
적 구이. 3적 즉 3가지를 준비한다.
육적(소고기구이), 소적(두부구이), 어적(조기구이), 계적(닭구이)
과실 나무에 달린 생과일과 곡식으로 만든 과자를 말한다. 전체의 접시수를 짝수로 한다.
생과일로는 대추, 밤, 배, 감(곶감), 사과가 있고,
유과류로는 약과, 산자(흰색), 강정(검은 깨, 땅콩) 등이 있다.
축문쓰는법
제례에는 축문을 읽는다.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을 나타내고 넋이라도 오셔서 준비한 제수를 드시라고 권하는 내용이 축문에 담겨 있다. 축문은 가로 36센티 세로 24센티의 백지에 붓글씨로 쓴다. 전통식 축문은 한문으로 되어 있어 난해하므로 한글로 번역하여 사용한다. 요사이 축문 읽는 의식을 생략하는 집안도 많으나 축문을 읽음으로써 후손들이 제사의 의미도 깨우치게 되고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도 애틋해진다고 하겠다.
백지에 정성스레 쓴 축문은 축판 위에 얹어서 향안 서쪽 위에 둔다. 그러나 붓글씨에 자신이 없는 사람은 컴퓨터의 한글 궁서체를 출력해서 쓰는 방법도 잇다.
◆ 부모(조부모) 기제사 축문
×년×월×일 아버님 어머님 (할아버님 할머님) 신위 전에 삼가 고합니다. 아버님 어머님(또는 할아버님 할머님)께서 별세하시던 날을 다시 당하오니 사모의 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간소한 제수를 드리오니 강림하시어 흠향하소서 |
◆ 남편(아내) 기제사 축문
×년×월×일 남편(아내) ○○○는 당신의 신위 앞에 고합니다. 당신이 별세하던 날을 당하니 슬픔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에 간소한 제수를 드리오 흠향하소서 |
◆ 추석 묘제 축문
이제 2003년 한가위 날에 큰아들 철학박사 ○○는 아버님과 어머님 산소 앞에 감히 고합니다. 계절이 바뀌어 이미 찬이슬이 내렸으니 세월이 흐를수록 추모의 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맑은 술과 갖은 음식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공경을 다해 받들어 올리오니 어여삐 여기사 흠향하시옵소서 |
◆ 묘제 축문
아뢰옵건대 오늘은 2003년 음력 ×월×일입니다. 큰아들 ○○는 감히 아버님의 무덤에 소상히 아뢰옵니다. 어느덧 계절이 바뀌어 봄이 돌아왔습니다. 무덤을 우러러 어루만져보고 쓸고 다듬어본들 하늘보다 더 높고 넓은 끝없는 은혜 그 어디에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술과 음식을 만들어 해마다 정성껏 받들어 드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
◆ 친진묘제
아뢰옵건대 오늘이 2003년 음력 ×월×일입니다. ○○대손 문학박사 ○○(초헌관 이름)가 감히 아뢰옵니다. 시조할아버님 할머님. 이제 풀과 나무의 기운이 줄기에서 뿌리로 내려가는 시기입니다. 이렇듯 풀과 나무도 근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알리는데 에절인들 어찌 조상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봉분을 우러러 바라보니 문득 추모하는 마음 이길수 없어 삼가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정성껏 받들어 제사드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
◆ 세일사 축문
이제 2003년 시월 초하루날에 ○○대손 문학박사 ○○(초헌관 이름)는 ○대조 할아버님과○대조 할머님 산소에 감히 밝혀 아뢰옵니다. 비록 세대는 머나 끼치신 은덕은 더욱 새롭사옵니다. 삼가 해마다 한 번 제사드리는 것은 예절에는 중용의 법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리와 이슬을 밟으니 문득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해집니다. 삼가 맑은 술과 여러 음식으로 정성껏 받들어 올리오니 두루 흠향하시옵소서 |
☆ 한글 축문의 예
모년 모월 모일 효자 아무개는 감히 고하나이다.
아버님 어머님, 해가 바뀌어서 아버님의 돌아가신 날이 다시오니 영원토록 사모하는 마음과 하늘같이 크고
넓은 은혜를 잊지 못하여 삼가 맑은 술과 여러가지 음식으로 공손히 전을 드리오니 흠향하시옵소서.
*한문 축문의 예(부친제사) 초록색 부분은 고쳐 쓰도록 한다
*축문은 神 앞에 고하는 글이며, 그 내용은 제위분께 간소하나마 제수를 차렸으니 흠향하시라는 뜻을 담습니다.
그러므로 요즘에는 한문의 뜻을 풀이하여 알기쉽게 한글로 쓰기도 합니다.
축문의 규격은 가로 24cm, 세로 36cm 의 깨끗한 백지에 씁니다.
벼슬이 있을 때의 호칭은 지방을 쓸 때와 같습니다. 學生대신에 관직명으로,
그 부인은 孺人(유인)대신에 貞敬夫人(정경부인)등을 씁니다.
명절에 지내는 차례에는 축문을 쓰지 않습니다.
☆ 축문 쓸때 알아두어야 할 점
◑ 維(유) ; 이어서 내려오다.
◑ 歲次(세차) ; 해의 차례.
◑ 干支(간지) ; 간지는 천간지지 육십갑자의 그해의 태세를 쓴 것이며 그 예로 금년이 丁丑 (정축)년이면
丁丑 (정축)이라고 씁니다.
◑ 某月(모월) ; 제사날을 따라 쓰며 제사달이 정월이면 正月 8월이면 八月(팔월)이라 씁니다.
◑ 干支朔(간지삭) ; 제사달의 초하루라는 뜻으로 제사달 초하루의 일진을 씁니다.
예를 들면 초하루 일진이 丁亥 (정해)이면 丁亥朔 (정해삭)이라 씁니다.
◑ 某日(모일) ; 제사날을 쓴것이며 제사날이 15일이면 그대로 十五日(십오일)로 씁니다.
◑ 干支(간지) ; 그 제사날의 일진을 씁니다. 예를 들면 15일이 제사날이고, 15일의 일진이 甲子(갑자)이면
甲子(갑자)라고 씁니다.
◑ 敢昭告于(감소고우) ; 삼가 밝게 고한다는 뜻으로 妻喪 (처상)에는 敢(감)자를 버리고 昭告于(소고우)만 쓰며,
아우 이하는 다만 告于(고우)만 씁니다.
◑ 예제 축문은 양친이 별세한 경우 부친 제사의 축문이며, 모친제사의 경우에는,
청색 글의 顯考(현고)를 顯비(현비,비:죽은어미비字)로 고쳐 씁니다.
◑ 부부중 한쪽이 살아 계신 때에는 顯考學生府君 (현고학생부군) 혹은 顯비孺人ooo氏 (현비유인ooo씨)중
한쪽을 쓰지 않습니다.
◑ 조부모 제사의 경우는 顯考(현고)를 顯祖考(현조고), 顯비(현비)를 顯祖비(현조비)로 고쳐씁니다.
◑ 증조부모 제사의 경우는 顯考(현고)를 顯曾祖考(현증조고), 顯비 (현비)를 顯曾祖비(현증조비)로 고쳐 씁니다.
◑ 고조부모 제사의 경우 顯考(현고)를 顯高祖考(현고조고), 顯비(현비)를 顯高祖비(현고조비)로 고쳐 씁니다.
◑ 孝子이름은 겸양의 표현으로 조금 작게 씁니다
고사이야기
고사유래
민간신앙에 뿌리박고 발전해 온 고사의 유래는 아직까지 더 밝혀져야 하겠지만, 고래의 "상달고사"라는 의례가 현재의 고사제/기원제의 원형으로 추측된다.
상달 고사란 음력 10월에 집안의 안녕을 위하여 가신(家神)들에게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세시풍속 상에서는 고사라는 말 이외에도 안택(安宅)이라는 말이 고사와 비슷한 의미로 쓰였다. 그러나 고사는 주로 상달고사를 말하며 추수에 대한 감사의 의미가 강하고, 안택 은 주로 정월에 행해지며 연초의 액막이 및 행운 기원의 의미가 강하다는 점에서 양자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고사 혹은 안택이라는 이름은 중부를 포함한 중부 이북지방에 분포되어 있고, 영호남 지방에서는 도신(禱神) 또는 도신제라 부른다. 최남선은《조선상식(朝鮮常識)》에서 '고시레·고사·굿'을 같은 어원으로 보고 있다. 더불어 그 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의례를 '고시레' 라 하고, '고사'는 굿의 규모는 아닌 중간 정도의 의례를 말하며, 장구를 울리고 무악(巫樂)을 갖추어 춤을 추는 등 규모가 가장 큰 의례를 '굿'이라고 하였다.
상달고사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세히 전하는 바가 없으며 다만 옛 기록을 통하여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이다. 최남선은《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상달" 은 10월을 말하며, 이 시기는 일 년 내 농사가 마무리되고 신곡신과(新穀新果)를 수확하여 하늘과 조상께 감사의 예를 올리는 기간이다. 따라서 10월은 풍성한 수확과 더불어 신과 인간이 함께 즐기게 되는 달로서 열두달 가운데 으뜸 가는 달로 생각하여 상달이라 하였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상달에는 예로부터 무수한 종교적 행사가 전승되어 왔다. 고대에는 고구려의 동맹(東 盟), 예의 무천(舞天), 부여의 영고(迎鼓) 등 추수감사의 의미를 내포하는 제천의식이 있었다. 고려 때에는 팔관회(八關會)가 그 맥을 이은 것으로 보이며, 조선시대에는 민가에서 고사 혹은 안택으로 전승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게 볼 때 상달고사의 유래는 고대 국가 행사인 제천의식에서 민간신앙이 합쳐 저서 가정의례로 변모하여 전승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고사음식
고사음식의 특징은 청주대신 막걸리와 팥 시루떡, 돼지머리와 북어, 실 타래, 소금 등이 일반적인 약식 고사음식의 특징이고 제사음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으나 그 예법은 흡사하여 우리의 전통 문화의 하나로 지금도 상당히 치르는 곳이 많으며 주로 안녕과 번영을 위한 의례라고 할 수 있다.
술 술은 穀酒(곡주)로서 즉 쌀로 만든 막걸리를 사용한다. 술은 원래 神들의 음료로서 즐겨 먹던 것이었으나 지금에 와서는 인간들이 마신다고 한다.
돼지머리 땅에 사는 짐승 중 돼지는 다산 다복을 의미하므로 고사에 돼지머리를 사용하며 귀를 세우고 이마나 얼굴에 상처나 흉터가 없어야 좋은 돼지머리 이다.
떡 고사에는 일반적으로 팥 시루떡이 사용되나, 다만 산신제용으로는 백설기가 사용된다.
고사를 마칠 때까지 칼을 사용하지 않으므로 떡을 썰지 않는다.
과일 가능한 한 햇과일이나 새로 나온 과일을 사용하며 형편에 따라 성의껏 준비한다. 씨 없는 과일은 준비하지 않는다. 陰陽五行에서 陽을 대표하는 대추, 陰을 대표하는 밤, 감(곶감), 배, 사과 등은 깨끗이 씻어서 홀수로 놓는다. 이 때 과일의 종류도 홀수여야 하며 각 과일의 개수도 홀수여야 한다.
포 포는 북어로 하되 통 북어로 한다. 경우에 따라서 문어 포를 쓰던지 생 문어를 간혹 사용하기도 한다.
이 때는 말린 것이나 생 문어 또는 다리만 준비해도 된다.
전 전은 과거에는 고사장소에서 직접 만들어 사용했는데, 요즘은 미리 적당량을 준비하면 된다. 동태전, 육원전, 고기산적, 꼬치전, 두부적 등 일반적으로 제사상에 오르는 전을 사용한다.
나물 나물은 三色으로 하되 시금치, 도라지, 고사리, 콩나물 등을 준비한다.
생선 조기를 놓는다. 조기는 서쪽에 놓는다.
정화수 물은 정화수로(한 그릇) 사용할 것. 물은 모든 생명의 근원이라는 뜻이 있음.
쌀 쌀은 될 수 있으면 햅쌀로 하는 것이 좋고 한 그릇을 준비한다.
북어와 실 타래 실은 굵은 실 타래로 준비하며 이는 길게 뻗어 나간다는 영속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북어는 실 타래로 감아서(묶지 말고) 시루떡 중앙에 꼬리부분이 약간 묻히게 하고 머리는 북쪽 으로 눕게 한다.
약식고사
축(祝: 사회자)이 고사의 시작을 선언한다.
1. 강 신 초헌관 (회사의 대표나 고사의 주인)이 1.향을 피운다 2.술잔을 올린다
2. 독 축 행사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축문을 낭독한다.
3. 초헌관은 신위 앞에 두 번 절한다.
4. 고전(돼지머리에 돈 꽂음)을 한다.
5. 아 현 기타 참가자나 임원들도 같은 순서로 한다.(단 술잔만 올리거나 향만 피워올려도 무방함)
6. 종 헌 사회자나 마지막 참가자가 술잔을 올리고 고사의 종료를 알린다.
7. 사 신 모든 참가자들이 다같이 두 번 절한다.
8. 철 상 소지종이를 사르고 음복 후 철상 한다.
고사순서
축(祝: 사회자)이 다음과 같은 순서로 호령하면서 전례를 진행한다.
개회 선언 축이 고사의 시작을 선언한다.
1. 강 신 초헌 관이 신위 앞에서 두 번 절하고 꿇어 앉아 향을 피우면, 집사가 초헌 관에게 잔을 건네주고 술을 따른다. 그 술잔을 향로 연기에 한번 돌리고 모사 그릇이나 땅에 붓고 일어나 두 번 절한다.
2. 참 신 고사에 참가한 모든 사람들이 축의 구령에 따라 두 번 절한다.
3. 초 헌 초헌 관이 신위 앞에 두 번 절하고 집사에 도움을 받아 첫 잔을 올리고 꿇어앉아축문 읽기를 기다린다.
4. 독 축 독축관이 초헌 관의 오른편에 꿇어앉아 축문을 읽는다. 독축이 끝나면 초헌 관이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5. 아 헌 아헌관이 두 번 절하고 집사의 도움을 받아 술잔을 올리고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6. 삼 헌 삼헌관이 아헌과 같이 술잔을 올린다.
7. 첨 작 집사가 신위의 잔에 첨작하고 두 번 절한다. 이후 모든 사람이 꿇어앉아 신의 흠 향을 기다린다.(9식경 동안)
8. 헌 다 차(혹은 정화수)를 올린다.
9. 사 신 모든 참가자들이 축의 구령에 따라 두 번 절한다.
10. 음 복 집사가 초헌관에게 술잔과 안주를 조금 드려서 대표로 음복하게 한다.
폐회 선언 축이 고사의 폐회를 선언한다.
이 후 새해의 시무식은 통상적인 절차에 따라 국민의례와 기관장 신년사, 내빈 축사 등의 순서로 진행한다.
고사축문
고사의 축문은 고사를 받드는 이가 고사를 받는 신에게 고사의 연유와 지난감회 앞으로의 염원 그리고 액운을 막고 건강과 번영을 비는 마음으로 간략하나마 마련한 제수를 흠향 하시라고 권하는 글이다. 고사축문의 내용은 그 고사를 지내게 된 연유를 "언제"-"누가"-"누구에게"-"무슨 일로"-"무엇을" 의 형식으로 고하고 고사를 받으시라는 줄거리로 이루어진다.
일반 제사가 아닌 여러 제를 올릴 때 쓰는 축문들을 소개합니다. 다음 축문들은 '제문,축문,고유문(여영택 著)'이라는 서적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개통축
어허 굽어 살피소서 천지 신명이시여 ○○의 대표(○○○장관)은 ○○선 ○○도로(철로) 개통에 즈음하여 삼사 잔을 올리오니 만인이 안전쾌적 유익하게 이용되도록 한결같이 보살펴 주소서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제막축
어허 굽어 살피소서 천지 신명이시여 여기 ○○○ 시비를 건립 제막하고자 건립 대표 ○○○는 잔을 올리오니 이 시비를 오래오래 보살펴 주소서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해신제(진수식,풍어제) 축
어허 굽어 살피소서 영특하신 해신이시여 연락선(어선) ○○호의 선주 ○○○는 진수(운항,출어)함에 있어 온 정성 모아 잔을 올리오니 안전 번영(풍어)을 한결같이 보살펴 주소서 (여러번 되풀이 할 수도 있다.)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안전고유문
어허 굽어 살피소서 천지 신명이시여 주식회사 대표 ○○○는 중장비 ○○○를 운용하고자 잔을 올리오니 안전과 번영을 한결같이 보살펴 주소서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집들이 고유문
어허 굽어 살피소서 천지 신명이시여 ○○○ 한 가족은 여기를 보금자리로 삼고자 잔을 올리오니 안전 건강 쾌적 다복을 두루 보살펴 주소서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준공 고유문
어허 굽어 살피소서 건축주 ○○○는 ○○빌딩을 준공하매 잔을 올리오니 안전 번영 쾌적을 한결같이 보살펴 주소서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기공 고유문
어허 굽어 살피소서 천지 신명이시여 주식회사 대표 ○○○는 여기 ○○공사를 기공하고자 잔을 올리오니 안전과 성취를 두루 살펴 주소서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동물위령제 축문
어허 굽어 살피소서 연구를 위하여 희생 당한 뭇짐승 혼령들이여 ○○의과 ○○대학 ○○○는 삼가 잔을 올리나니 저승에서 한결 안령할지며 이승에서 인류를 비롯 만물이 공존 안녕 번영하도록 더한층 돌볼지어다.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 분묘산불고유문
굽어 살피소서 ○○대조 ○자 ○자 할아버지 ○○대조모 ○○○씨 할머니 ○○손 ○○는 무덤을 잘 지키지 못하여 산에 불이 나 놀라시게 하와 삼가 잔을 올리며 용서를 비나이다. 공원 一九九○년 ○○월 ○○일 |
제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행위의 기본이 되는 생각, 즉 우리나라 사람이 갖고 있는 조상관을 이해해야 한다.
조상은 죽은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조상의 죽음은 자손들과의 단절이 아니라 관계의 변형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조상의례를 매개로 사망한 부모는 자식들과 의존성을 유지하고 자식들은 제사를 통하여 효의 의무를 다한다. 조상은 자손의 기억에서 점차로 사라져가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코 잊혀지는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다.
특히 조상에 대한 제사는 효를 기초로 한 것으로 유교문화권에서는 효가 최고의 기본윤리가 된다. 따라서 왕은 버릴 수 있어도 어버이는 버릴 수 없다는 말이 생겼으며 효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때문에 제사는 근본으로 돌아가서 은혜를 갚는다는 보본(報本)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가족과 인류를 유지하는 기본 틀이 어버이 그리고 할아버지로 올라가는 조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효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물질생활에 불편이 없도록 해드리는 것이며 또 하나는 어버이의 뜻을 잘 받드는 것이다. 이것이 그대로 제사로 이어진다. 제사라는 의미가 반드시 부모가 사망했기 때문에 지내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살아 있을 때도 같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조상, 즉 부모들은 크게 4단계로 나뉘어 후손들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첫째는 '산 조상' 단계. 과거에는 환갑까지 사는 예가 드물어 환갑 이후는 현실 생활에서 떠나 죽음을 준비하는 비활동 단계로 여겼다. 환갑 때부터 사망까지는 살아 있지만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공경받는 '산 조상'으로 대접받았던 것이다.
둘째는 사망에서 탈상까지의 단계. 부모가 사망한 후에는 3년 동안 장남의 집에 상청을 마련해놓고 상식(上食)도 올리고 생신도 지냈다. 집에 찾아온 손님은 제일 먼저 상청에 인사를 드린 다음에 다른 사람들에게 인사했다. 마치 집안에 살아 계신 어른처럼 대접받았던 것이다.
셋째는 사당에 모셔진 기간 동안의 단계. 사당에 모셔진 기간 동안 1년에 4번 이상 자손으로부터 대접을 받았다. 곧 본인의 기제삿날과 배우자의 기제삿날, 설날과 추석이다. 설날과 추석날 대이동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조상이 사당에서 제삿밥을 얻어먹은 기간은 보통 4대, 약 100년 동안 계속된다.
마지막 단계는 1년에 한 번씩 묘를 자손들이 찾아가는 시제이다. 종손으로부터 4대조 이상이 되는 사당의 신주는 묘 옆에 묻히면서 먼 조상이 된다. 이때부터 시제의 대상이 되는데 시제 대상이 된 조상은 1년에 한 번씩, 문중의 자손들이 묘에서 올려주는 제례를 받게 된다. 이 시제는 영원히 계속된다.
■ 4대봉사
제사는 주로 네 가지로 나뉘어 치러진다. 조상의 사당을 집안에 모시고 지내는 사당제, 조상에게 철따라 지내는 사시제, 묘에서 지내는 묘제, 사망한 날에 지내는 기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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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제종손을 중심으로 5대조 이상을 받드는 것으로 높은 조상의 묘부터 순서대로 내려오면서 지낸다. (경북 안동군 문화유씨 문중) |
사당은 가묘(家廟)라고도 불린다. 이곳에서 지내는 사당제는 벼슬아치나 선비 등 특별히 뼈대있는 집안에서 3, 4대의 조상 위패를 모시고 지내는 것으로 사당이 없는 일반인들은 사당제를 지낼 수 없었다. 사시제는 일반적으로 시제라고도 하는데 계절에 따라 네 번, 즉 설날 한식 추석 동지에 지낸다. 계절에 따라 새로운 음식을 올린다는 뜻도 있어 그 의식이 간단하며 차례(茶禮)라고도 한다.
묘제는 날을 잡아 조상의 묘에서 지내는 제사로, 보통 음력 10월에 지냈다. 시조에서 어버이까지 지내기 때문에 해당되는 직계자손들이 전부 참석했는데 자손이 많은 집은 묘제가 아주 거창했다.
기제는 4대조까지만 지내는 것이 원칙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삼대 봉사(三代奉祀) 또는 4대 봉사는 일찍이 선조 가운데 높은 벼슬을 한 인물이 있으면, 후대에 큰 인물이 없더라도 습성화된 의식이 지속된 결과라 할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국가적 규례를 넘는 과도한 숭조(崇祖)사상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재 모든 가정에서 4대 봉사를 지내는 것은 자신들이 선비의 지위에 있었음을 내보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대 봉사의 의미는 조상신이 존재하는 기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4대 봉사가 지났다고 하여 선조와의 연을 끊는 것은 아니다. 시조나 조상 중에서 공을 세운 분의 제사는 시제를 통해 계속하여 이어나갔고 그들에 미치지 못하는 분은 4대 봉사 전에 한꺼번에 제사를 지내는 묘안도 지켜졌다. 어떤 식으로든 조상과의 연을 계속 맺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의례 책임과 재산 상속
제사를 치르려면 많은 자금이 든다. 제사에 들어가는 자금을 어떻게 확보하느냐가 바로 제사를 잘 치르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요인인데 선조들은 바로 이 문제를 재산 상속으로 해결했다. 즉 조상의 유산으로 가족의 정통성을 이어주는 제사를 지낼 수 있는 방법을 강구했다. 바로 종손을 통해서, 즉 종통(宗統)의 자리를 고수하는 제도를 만들어 종족을 거느리거나 이끌어가면서 제사를 지내도록 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자 상속의 근본이다.
따라서 종통을 이어받는 장자는 다른 자손보다 재산을 많이 확보하도록 했다. 만일 장자의 후손이 없으면 그 종통이 차순위의 형제들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후손 중에서 뽑아 종손의 양자를 삼았다. 종통이 이와 같이 엄격하게 대를 이었으므로 아무리 종손이 어리더라도 제주는 종손이 되었다.
제주의 일차적인 책임은 장남이 졌고, 차남 이하는 이차적이고 보충적인 책임을 졌다. 이차적인 책임이란 장남과 같은 정도의 책임은 아니지만 조상 제례의 책임을 부분적으로 분담한다는 의미이다. 보충적인 책임이란 장남이 죽었을 때 차남이 장남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뜻이다. 장남이 자손 없이 죽었으면 장남의 역할을 하며 장남이 어린 아들을 낳고 죽었을 경우에는 조카가 성장할 때까지 장남의 제사를 지낸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재산 상속이 이루도록 한 것은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종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는 선조의 뜻을 받아 사망한 사람이 원하는 것, 바로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에 충실하게 된다. 두번째로는 종통에게 재산을 몰아줌으로써 재산이 분산되는 것을 막아 제사와 같이 예산이 많이 드는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만들었다.
현대인들은 이럴 경우 당연히 장남, 즉 종통을 잇지 못한 차순위 형제들로부터 불만의 요인이 되겠지만 선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차순위 형제들도 자신이 성공하여 일가를 얻는다면 자식들이 자신을 따로 제사지내 줄 것으로 생각했다. 시쳇말로 해서 제삿밥을 얻어먹는 것은 장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죽을 때 후손들로부터 어떻게 평가받는가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한국인들이 악착같이 자식들을 교육시키려고 노력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자신이 살아서 자식들을 위해서 희생하더라도 자식들이 성공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들이 죽어서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요건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부터 1600년대 중엽까지는 우리나라에서도 철저하게 아들·딸 구별이 없이 균등하게 재산이 상속되었다. 그러나 1600년대 중엽 이후부터 이러한 균분 상속 형태의 비율이 줄어들었으며 자녀의 성별과 출생 순위에 따른 차등상속이 급격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장례제도의 변동과 제사 방식의 변경에도 기인한다.
고려시대의 상제(喪祭)는 불가의 법을 숭상했기 때문에 매장이 아닌 화장에 의해 유골을 절에 안치하고 불교식 제사의식인 제(齊)를 거행했다. 제사의식도 절에서 대행했기 때문에 제사 목적으로 재산을 아들과 딸, 장남과 차남간의 차등으로 구분할 이유가 많지 않았다. 제사 상속에 있어서도 적자주의에 따른 장자 봉사가 행해지지 않았다. 부모의 재산을 균분 상속했으므로 부모에 대한 제사도 자녀간의 분할이나 윤회봉사가 일반화되어 있었다.
조선 초기 때만 해도 상제는 유교식의 상제법을 따르면서도 장남만이 제사를 상속하거나 상례를 주관하지 않고 아들과 딸 혹은 외손 등이 모두 상례절차를 주관했다. 제사를 상속하거나 시행하는 경우에도 아들과 딸이 분할하여 각기 담당한 제사를 봉사하게 하거나 그들 사이에 윤회하며 봉사하는 형태를 취했다. 문제는 부모의 생각이다. 부모 측면으로 볼 때 자신의 직계 자손들이야 제사를 잘 지내겠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도 후대의 자손들이 자신을 기리며 제사를 지낼 것이라는 확신을 할 수 없었다.
이때 도입된 성리학은 이런 모순점을 해결하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를 장자 단독 봉사로 굳힌다면 과거의 조상들에 대한 제사도 일괄적으로 책임을 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파악한 것이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확실하게 제사지내줄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일단 사망하면 모든 인연이 사라진다는 불유쾌한 상황을 제사를 통해 영원히 후손들과 인연을 맺고 싶어하는 염원이야말로 인간의 소박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소망이 부모의 재산을 적장자가 단독으로 상속하거나 차남 이하에 비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상속 지분을 갖는 적장자 우대의 상속제도로 변한 것이다.
■ 정성이 담긴 제사
조상의 이미지에 대한 남녀간의 차이는 여자들의 결혼과 무관하지 않다. 결혼한 후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복리는 시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결정되었다. 특히 자식들이 태어나면 바로 그 순간부터 남편 가문의 조상이 되었고, 남계에 의한 제례가 충실히 지켜지는 한 시집에서 다시 조상으로 태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여자들은 친정집 부모보다 시부모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다. 바로 이 점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조상에 대한 개념이 다소 자유로웠다. 하지만 아들을 낳아야만 그 집안의 조상이 되어 자신의 생명을 이어간다고 믿었다.
그 점에서 아들이 지는 짐은 제법 무거웠다. 딸은 출가하면 남의 집 식구가 되어 그곳에서 조상이 되지만 아들은 자신의 조상을 모시며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 제삿밥을 얻어먹을 수 있다는 생각이 뿌리깊게 박혀 있었다. 바로 이 점이 후손이 끊어지는 것, 즉 아들이 없는 것을 크게 걱정하는 이유이다. 자손이 없을 경우 혈족에게서 양자를 들여오는 풍습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기인한다.
일반적으로 조상은 무덤에 머물며 제사와 차례 때 종손의 집으로 온다고 믿고 있다. 그러므로 제례를 지낼 때에는 방문을 열어 영혼이 쉽게 들어올 수 있도록 배려한다. 또한 자정을 전후하여 제사를 올리는 것은 첫닭이 울기 전이어야 영혼들이 비교적 쉽게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제사를 치를 때는 반드시 예물을 올리게 되는데, 조상에 대한 공경심이 깊은 만큼이나 최고의 것을 사용하려 한다. 사실 제사를 지낼 때 가장 예민한 부분이고 또 경제적으로 상당한 부담을 준다. 그러나 예의는 물질적인 것 이전에 마음의 세계가 중요하다는 참뜻을 잃지 않는다면 형편에 알맞은 검소한 태도가 더욱 값어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술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널리 습성화된 음식물 중에 하나이지만 크고 작은 의식을 거행할 때 필수적인 예물로 제사에서 특히 중요시된다. 술을 이와 같이 중요시 여기는 것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다'에서 지성을 나타낼 정도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과거에 술을 만드는 데 지극히 정성을 쏟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이 제사에서 술이 갖는 비중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제사용 술로는 화학주가 아닌 곡주를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술이 '지성'의 상징물이었으므로 제사할 때 필수 물품이긴 하지만 미처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는 물도 대신한다. 그 대신 '맑은 물'을 올릴 때에는 '물'이라 하지 않고 '무술' 또는 '현주(玄酒)'라고 부른다. 현주는 알코올 성분이 없는 의미상의 술일 뿐이다.
한편 오늘날 예물로 흔히 꽃이 사용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사실 우리 동양의 전통적인 모습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동양인의 의식 속에는 사람의 기호(嗜好)를 위해 꽃의 생명이 꺾일 수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