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2월 21일
말씀: 시 51:1-7
제목: 인간의 본성
요즘 사회적으로 참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아낼 정도의 잔인함과 뻔뻔함 등을 쉽게 뉴스를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 3살 된 아이를 혼자 두고 이사를 하여서 이 아이가 홀로 버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그 아랫집에는 할머니가 계셨는데도 몰랐다고 합니다. 이모와 이모부가 10살 된 아이를 욕조에 물을 담아 아이를 집어넣었다, 뺏다, 해서 죽게 되었습니다. 몇 개월 되지 않은 아이가 우유를 먹고 토하고 말씀이라고 때려서 죽게 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아동학대와 방치로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유치원에서는 장애가 있는 아이들을 모질게 때려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쌍둥이 배구선수가 중학교 때 학폭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건 사고를 보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해답을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사’입니다. 출애굽기나 레위기를 보면 제사장을 뽑는 방법을 비롯한 그들이 연례행사로 드려야 할 제사들, 매일 제사를 지내는데, 아침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전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일 년에 한 번 드리는 제사, 조그만 실수라고 해도 제사를 드려야 하고, 결례를 행해야 하고, 제사로 모든 일이 시작되고 제사로 말미암아 끝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윗은 ‘제사’는 별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제사를 즐겨 받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다윗이 무슨 배짱으로, 무슨 근거로 이런 말을 한 것입니까?
삼상5:1-3 말씀을 배경적으로 설명하겠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도 왕위에 올라오지 못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금 사울이 살아있고 왕권을 쥐고 있는 가운데 오랫동안 사울에게 쫓겨 다녔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다윗에게는 고통의 세월이 길었습니다. 사울이 죽고 나서야 다윗이 드디어 왕이 됩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사울이 죽을 때까지 몇 가지 사건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물 맷돌 다섯 개로 골리앗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다음에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추적하고 있을 때, 다윗은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사무엘하5장부터 시작해서 다윗이 이스라엘 영토을 어떻게 넓히고 어떻게 강한 나라로 만들어가는가 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6장, 7장 8장을 보면 인근에 있는 나라들을 점령하면서 항복도 받아내고 조공도 받고 이스라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어 갑니다.
6장에서는 궤를 옮기는 사건이 나오지요. 궤를 갖고 오다가 소가 뛰는 바람에 궤가 떨어질 것 같으니까 웃사가 궤를 붙잡다가 죽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두려움 때문에 오벳에돔 집에 임시로 둡니다. 그랬더니 오벳에돔집이 복을 받으니까 다윗이 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고 그것으로 인해 기뻐서 춤을 추는데 미갈이라는 아내가 보고 힐난하게 비판했습니다. 그 때 다윗의 반응입니다. 삼하6: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미갈이 아니라 다윗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로 어떤 판결을 내렸느냐하면 23절 ‘그르므로 사울을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궤가 들어오는 것으로 기뻐한 다윗의 행위가 하나님 보시기에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7장에 가서 성전을 짓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네 그 의도는 좋지만 너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짓지 못한다.’고 해서 다음 누군가 성전을 지을 때 불편함이 없도록 금, 은을 비롯해서 철저하게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9장에 가면 사울 집에서 후손이 살아있었습니다. 옛날에는 반대편 왕족은 다 죽입니다. 그런데 그를 왕과 함께 식탁에서 식사를 하게 했습니다. 선대했지요, 그의 이름은 므비보셋인데 그의 아버지가 요나단이요, 다윗과의 우정은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대접을 했습니다.
이쯤 해서 보면 다윗은 신앙도 뛰어나고 인간미로도 뛰어났고 용맹으로도 이미 증명되었고, 정치가로도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이렇게 다윗을 지켜세운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11장입니다. 이 장에서 밧세바사건이 터집니다. 이 사건은 남의 유부녀와 동침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남편인 우리야도 죽입니다. ‘살인과 간음’이 두 가지를 한 인물입니다. 우리아는 충직한 부하였습니다. 30인 용사에도 들어간 인물입니다. 충신입니다. 그런데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아이를 갖자 남편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집으로 불러 밧세바와 동침을 하게 해서 임신 날짜를 어떻게 조작해 보려고 했는데 우리아가 집으로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동료들은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내가 아내를 품을 수 있느냐는 말이지요. 큰일 났습니다. 남편 없이 아내가 애를 낳게 생겼습니다. 할 수 없이 우리야의 상관인 요압에게 연락해서 우리야를 죽이라고 합니다. 가장 싸움이 심한 최전방에 세워놓고 그만 만기고 후퇴를 해서 죽게 됩니다.
이 사건과 메시지는 우리에게 좋은 샘플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이 소중합니다. 다윗에게는 이 사건으로 인해 그의 전 생애가 무너지고 그의 위엄과 명예와 자랑과 쌓아온 모든 경력들이 다 무너지고 진토가 되는 순간입니다.
사실 그 당시는 왕정 시대입니다. 왕이면 이 정도는 할 수 있고 큰소리치고 얼버무릴 수 있는 사건입니다. 무슨 말이냐하면 시편 51편에서 다윗은 이 문제에 있어서 치명적으로 고통스러워하고 놀란 이유는 이런 큰 죄를 지어서가 아닙니다. 다윗은 골리앗 사건만 하더라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신자이고 완벽한 신앙의 거인입니다. 5장, 6장, 7장, 8장에 이르기까지 다윗의 행적을 보면 잘 아시는 그것처럼 얼마나 다윗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헌신 그리고 하나님을 높이며 영광을 돌렸는지, 또한 하나님이 다윗을 얼마나 높여 놓았습니까? 그런데 이 사건으로 한 순간에 무너진 것입니다.
시40:6절 ‘주께서 내 귀를 통하여 내게 들려주시기를 제사와 예물을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번제와 속죄제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하신지라.’여기서 ‘나’는 다윗입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뵙고 구원을 얻는 길은 제사였습니다. 그런데 제사를 요구하지 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시겠다는 의미입니까? 이 말씀을 어떻게 풀어야 하느냐 하면 시편40:7절 ‘그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그다음에 신약에서 히10:5-7‘그러므로 주께서 세상에 임하실 때에 이르시되 하나님이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번제와 속죄제는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이에 내가 말하기를 하나님이여 보시옵소서 두루마리 책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 말씀을 요약해서 말씀드리면, 구약의 제사법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상징’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실질적으로 완전한 죄사함은 이때부터 시작됩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제사로는 완전히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전한 죄 씻음과 구원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데 성경에서는 이 사실을 다윗이 알았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알게 되었느냐 하면 밧세바 사건 때문에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에게 있어서 밧세바사건만큼 중요한 사건이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구원의 한 조건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예배를 드려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예배 한 번 빼먹어서 찜찜하면 그다음 주에 와서 헌금을 두 배로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좀 개운해집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려야 구원받은 사람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마는 중요한 것은 구원은 예배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믿음의 사람들이 드리느냐,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사를 드렸으니까’라고 생각했지 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잘 이해를 못합니다.
다윗은 행위로는 최고 으뜸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두 번 있었는데 죽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운 왕을 내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고백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늘 하나님을 만족시키고 칭찬받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밧세바 사건이 터진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아를 죽이고 난 다음에 그는 아무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왕으로 이정도는 적당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나단 선지자가 와서 다윗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양때가 많고 좋은 포도원도 많는 부자가 있었습니다. 옆집에는 어린 양 하나 데리고 그 양을 자기 새끼같이 돌보며 사는 사람이있었는데 부자가 자기 집에 손님이 오자 자기 양 중에서 하나를 잡아 가지고 손님을 대접하지 않고 이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습니다. 왕이여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라고 비유로 다윗에게 말을 한 것입니다. 이 때 다윗이 엄청나게 대노하면서 ‘죽여라, 이 땅에 아직도 그런 사람이 있단 말이냐?’ 그때 나단이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이요’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엄청난 죄를 범해놓고도 왕이니까 몰랐다는 말입니다. 죄인지 모르고 했다는 말이지요, 이것이 핵심입니다.
지금 세상은 이런 싸움을 벌이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자는 그것과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그것과 싸움입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동성애, 와 낙태’입니다. 애를 낳고 싶은 것과는 상관없이 재미있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편리하게 살고 싶고,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싶은 것 때문에 사회나 다른 사람들이 고통받은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의 속성을 가지고 자기가 주인 된 삶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죄의 모습들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롬1: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다윗이 인간이 누구냐 하는데 대하여 드디어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인간에게서는 선이 나올 수 없고 그가 가장 선한 차원에서 만드는 것 마저도 죄라는 사실을 압니다. 시편51:5절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이태하였나이다.’
다윗에게 가장 중요한 사실은 그가 가지고 있는 죄는 지금 실수가 아니라 그가 ‘죄밖에 지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 부분을 죄인이라고 그럽니다. ‘인간이 누구나 죄인이다’라는 것을 이런 개념에서 합니다.
여러분 인간이 누구냐, 내가 누구냐? 여기에 대해서 풀 수 없는 좌절과 몸부림에 들어간 자들이야말로 이들이 드디어 구세주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나의 인생에 주인 되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기도가 그렇습니다. 기도가 알라딘의 램프처럼 문지르기면 하면 검은 연기와 함께 마왕이 나타나서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하며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는 것처럼 기도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아닙니다. 법정 대리인 정도, 변호사 정도로, 아니면 우리의 ‘봉’정도로 여긴다는 말입니다.
기도란 한 마디로 ‘도와주십시오’입니다. 이 속에 ‘하나님 내가 할 수 없습니다.’ 하는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권위적인 측면에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는 뜻이며, 나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최종적인 결정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결재해 주십시오, 결재해 주신대로 제가 시행하겠습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우리가 누군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신령한 문제와 우리의 모든 생활에 대하여 우리의 손톱만큼도 능력도 근거도 없기 때문에 모든 일에 기도와 금식으로 갈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확인하는 자세도 없을 것입니다.
시편110:1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희는 내 오른쪽에 앉아 있으라 하셨도다’이 말씀은 예수님이 잡하시기 바로 전에 유대인과 최후의 논쟁중에 이 본문이 인용된 것입니다. 마22:41-45 ‘바리새인들이 모였을 때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시되 너희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 누구의 자손이냐 대답하되 다윗의 자손이니이다 이르시되 그러면 다윗이 성령에 감동되어 어찌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여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때까지 내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다윗이 그리스도를 주라 칭하였은즉 어찌 그의 자손이 되겠느냐 하시니’다윗이 그리스도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다윗이 밧세바사건으로 알게 된 것입니다. 시편40편, 시편51편이 그 증거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힘과 열심히 노력해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안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의 죄를 짊어질 이가 소나 양이나 염소가 아닌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로 오실 것을 그는 압니다. 왜요? 그가 제사를 얼마나 열심히 드렸습니까? 그런데도 안되더라는 것을 피부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윗을 통해서 분명히 알아야 될 부분은, 우리가 열심을 내고 헌신하고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그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것 때문에 죄가 사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이 사건으로 인해 오늘날 복음이 무엇이며, 인간이 무엇이며, 그 본질을 알아 인간은 예수 님을 붙들어야 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받지 않으면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예수님을 믿는 종교 행위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님을 우리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한 사람의 힘으로 성전을 건축했다 할지라도 어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부흥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우리의 죄가 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하고 그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의로운 자로 부르시고 세워주신 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정인이 사건을 보더라도 그들은 기독인이었고, 정인이 양부모 쪽 다 목사님 가족이었습니다. 기독교 관련 학교를 나오고 기독교방송에서 근무하는 것이 도대체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입니다.
엡2:1-5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이 풍성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죄를 지을 기회가 없어서 짓지 못하는 연약한 자들입니다. 여기에 누구는 의인이라고 큰소리치며 나올 수 없는 우리라는 사실을 인정하셔야 합니다. 누가 누구를 죄인이라고 진노하며 돌을 던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게 됩니다.
배구선수 이다영, 이재영자매를 잘 아시지요. 국가대표선수이고 어머니도 배구국가대표며, 아버지는 육상감독으로 있다고 합니다. 중학교 때 학폭 논란에 휩싸여 곤욕을 치르고 있는데요, 지금 비난 여론이 굉장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밝힌 사실 중에 아버지께 카톡으로 문자가 온 것을 공개했는데 거기에 보면 ‘지금 우리의 잘못으로 죄 값을 치르고 있는 것같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마음을 가지겠다’뭐 이런 내용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아버지는 이런 내용을 밝히면서 ‘애들이 혹시 나쁜 생각을 할까봐 걱정했는데 그래도 반성하고 있으니 다행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차 가해를 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아무리 잘못을 해도 자식들 편입니다. 여기에 시비 걸 사람 없을 것입니다. 행여 자식들이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하며 같은 마음으로 죄 값을 치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피해자 학생들의 부모들도 그 당시 보모가 모르는 상황에서 혼자 얼마니 애타하며 화장실에서 자살까지 생각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찢어졌을까요?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인데요, 하나님은 가해자나 피해자 모두의 하나님 되십니다. 가해자들에게는 용서의 하나님, 피해자에게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수준을 알고 이런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가를 알면 그 엄청난 사랑, 그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를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내용일 수 있는데요, 70이 넘어 보이는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장가간 아들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아버지 전화 왜 하셨어요, 무슨 일있으세요’‘아니야 무슨일이 있기는, 그런데 왜 전화하셨어요’ ‘아니야 다른게 아니고 말이야 사실은 있잖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뭐라고요 아버지 지금 뭐라고 그러셨어요’‘내가 너를 사랑하는데 말이야’, 그랬더니 아들이 아무 대답이 없더래요 ‘미안하다 미안한게 많아’ 그러고 전화를 끊었습니다. 3시간이 지난 후에 며느리가 전화가 왔대요 ‘아버님 남편에게 뭐라고 하셨어요? 뭐라고 하셨길래 저렇게 방에 들어가서 한 시간을 울고 있어요, 뭐라고 했셨길래’ 여러분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갈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위에 범죄 한 사람이 있으면 온유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또한 그들과 같이 죄에 거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사건들의 교훈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인간이란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명심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