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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昭顯世子, 1612년~1645년)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2살이 되던 해 아버지의 반정이 성공함으로서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보통 아버지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장남을 바로 형식상 원자로 삼았다가 세자로 봉하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한참 동안 세자에 봉해지지 못하다가 그 후 1625년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그 후 불과 2년 만에 정묘호란이 발발한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막아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인조는, 자신은 강화도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전란이 끝난 그해 말 강석기의 차녀와 가례를 올리게 된다. 1636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의 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병자호란 후, 포로 시기
청나라 고관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
또 인질로 있으면서도 죽쳐 있지 않고, 아내 강빈의 권유로 묵던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었고 이런 능력만으로도 보건대 소현세자의 상업적 능력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나라 측에선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등에 대한 걸 따져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또한 횡의 사건 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 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인조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가장 큰 원인은 세자를 청나라에서 인조를 길들이는 수단으로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짐을 잊었는가? 짐은 네가 나한테 무릎 꿇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장들이 날아오곤 했으며,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소현을 세웠으면 나았을 거"란 말을 하기도 했으며, 항복구절에 "유고시 세자가 대신한다"는 문구를 넣었다.
소현세자는 과연 살아남을 것인가?
흔히 인조와 소현세자의 관계를 유능한 아들에 대한 못난 아버지의 시기심으로 여기는 풍조가 강하지만, 이들 부자의 불화는 아버지의 인격이나 아들의 자질과는 상관없는 문제였다. 인터넷에 흔히 퍼져있는 "청나라의 강함을 인정하고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더 큰 세상에 나아가 교류해야 한다고 주장한 소현세자가, 수구적인 인조와 사대부들의 미움을 샀다"는 건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의 주장을 끝도 없이 부풀려 나온 뇌내망상이고, 진짜 원인은 정묘호란&병자호란&삼전도의 굴욕으로 인조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진 상황에서 세자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정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조-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여러모로 유사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이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하는, 다른 때 같으면 상상도 못할, 상황에 처했다. 이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대체자로 낙점한 게 세자 광해군이었다. 게다가 임란 이후 집권여당이 광해군 과잉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자연히 선조는 왕 노릇 계속하기 위해 광해군을 견제할 필요성이 생겼고 그래서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을 이용했다.
인조는 그보다 더 심각했다. 파천했지만 잡히진 않은 선조와 달리, 외적에게 붙잡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려 권위가 바닥을 쳤다. 선조를 위협한 건 그래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내부의 정치권력이었는데, 인조는 조선을 침략해 짓밟은 거대한 외세가 세자를 영향력 아래 두고 압박해오고 있었다. 왕조국가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이런식으로 정적이 되는 사례는 고대부터 무척 흔하고 초성왕의 예처럼 둘 중 한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예도 적지않다.
게다가 소현세자의 경우에는 인조 자신의 왕권도 왕권이지만 청나라의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으로 얻어 즉위하는 조선 왕의 출현을 경계해야 했다. 고려 무신정권 때 명종은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기에 집권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 경대승이 사망하자 스스로 무신 이의민을 정계에 끌어들였다. 원 간섭기 고려왕들은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라는데 집권정당성을 얻었기에 원이 약해지기 전까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원 간섭기 고려가 타국 역사학계에선 원의 속국으로 간주되는 이유는 왕조 국가에서 왕이 원의 의중에 따라 갈아치워지고 원에게서 집권정당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청이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킨다면, 실질적 영향력이 없는 사후승인에 머물렀던 명의 책봉과는 차원이 다른 압력이 조선왕실에 가해진다.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에게서 집권정당성을 얻는 조선왕이 탄생하는 것이며 이는 그의 가계를 따라 이어질 것이니 청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것은 당연했다. 이는 고려의 원종과 비슷한데, 실제로 원의 입김에 따라 폐위가 되었다가 다시 복귀한 것만봐도 그렇다. 공통점도 많았다. 고려의 원종도 본시 왕자 시절에 원나라에 대한 관계가 좋았는데, 이후 반원파였던 무신정권에 의거해 폐위가 되었다가 유천우, 김방경 등과 더불어서 복귀했는데, 결국 아들이 충자 돌림을 먹었다. 내정의 능력도 원종과 더불어 문제를 드러낸 것도 사실이다. 원종이나 소현세자의 경우는 애초에 원나라나 청나라와 관계에 치중하느라 내정에 시간을 돌릴 틈이 별로 없었다는 점과 여러 권신들을 제거하지 못했던 것이 문제였다. 무엇보다 원종의 경우는 소현세자의 아버지 인조와 달리 아버지 고종과 관계가 매우 좋았는데 오히려 이것이 역으로 적용하여 안경공의 반발을 사기 충분했다. 그로 인해 안경공이 권신이자 간신배였던 임연과 손을 잡아 원종을 폐위시켜 마침내 안경공이 폐위되고 다시 원종으로 올라서는 상황과 비슷했다. 소현세자가 왕에 오를 경우 후일 효종이 될 봉림대군이 왕에 오른 소현세자를 쫓아내었다가 다시 봉림대군이 쫓겨나 소현세자가 왕이 되어 청종이 되는 상황이 된다(...) 이 상황이 될 경우 조선은 생각지도 못한 역모와 반란이 터질 것은 자명했고, 청나라의 개입이 허용되게 된다. 이는 조선이 청나라와 관계가 회복된 시점에서 벌어진 향전과 이후 세도정치가 시행되었다는 점을 볼때 향전과 세도정치가 더 앞당겨질 가능성도 컸다. 즉 조선의 멸망은 생각보다 더 앞당겨졌고 조선과 달리 당시 외몽골과 내몽골로 찢어진 몽골처럼 조선 역시 몽골과 같은 나라로 추락할 수도 있었다. 청나라의 경우는 조선이 여진정벌때 했던 잔혹한 보복을 비롯해 앞전 고려 또한 앞전에 숙종 시절 여진정벌때 여진족들에 대한 잔혹한 보복도 병자호란의 원인이 되었고, 몽골 역시도 과거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여진족에 대한 학살과 탄압을 병행하여 청나라가 몽골을 냅두지 않았다. 고려가 아니라 조선 자체적으로 조선 중종과 그 아들과 관계가 좋았던 것처럼 인조와 소현세자 역시 그 전례를 따르는게 좋았을지도 몰랐으나 알다시피 중종 시절에는 전쟁이라는 변수가 없었고, 중종의 경우도 부자간의 관계를 돈독히하는데 성공했으나 김안로와 같은 권신들이 농락했고, 후일 인종과 명종 시기는 윤원형 형제가 권신이 되어 왕을 농락하기도 했다. 소현세자의 생사나 왕에 오르고 안오르고의 결과는 이래나 저래나 좋은 결과는 없을 것이다. 즉 소현세자가 왕에 오를 경우 명종과 현종과 비슷한 길을 걸을 가능성이 컸다.
한간에는 소현세자가 왕에 오를 경우 나선정벌이 아니라 이후 일본 대마도에 대한 정벌전을 감행할 가능성도 점쳐질 것이다. 실제로 병자호란 당시 일본은 오히려 조선을 도우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에서 소현세자가 왕이 될 경우 본토는 아니더라도 대마도 정벌을 할 가능성도 일각에 제기되기도 한다. 실제로 청나라의 경우도 일본에 대한 견제도 어느 정도 필요했고, 실제로 청일전쟁이 벌어졌다는 것을 볼때 오히려 청나라가 조선과 같이 합심해 일본을 먼저 쳤을 추측이 있으나 알다시피 청나라 입장에서 일본을 정벌해본들 별다른 실효성도 없었고, 앞전 원나라가 일본을 무리하게 정벌해버린 통에 많은 인력과 시간과 비용을 낭비했다는 점에선 생각만큼 높진 않다. 더욱이 일본이 임진왜란으로 막대한 피해를 줬던 점에서 보면 세력도 생각만큼 커져있었다.
소현세자의 경우는 말 그대로 조선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었던 셈이다(...) 흡사 고려로치면 원종이 된 태자 왕정이 양날의 검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소현세자가 살아남아 왕이 될 방법은 내정에도 가담하는 것이었다. 우선은 김자점을 비롯해 소용 조씨와 그 잔당들을 일찍이 제거하는 계획부터 들어갔어야 했다.
조선 태종의 경우는 왕자 시절 외정에서 각별히 신경을 썼지만 더욱이 개국된지 얼마 안되어 내정이 매우 어수선해 머리를 쓸 여유가 많지 않았으나 결국 내정에서도 손을 놓지 않았고, 마침내 내정을 정리해 왕위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조선 초에 왕이었던 조선 태종과 비교해보면 부족한 점이 생각보다 많았다. 내정 문제에서 일찍히 뒷정리를 할 경우 청나라가 개입할 가능성이 현격히 떨어졌을 것이다. 대신에 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는 점에서 보면 소현세자는 이점에서 조선 태종과는 달랐다. 소현세자가 조선 태종처럼 나갈 경우 못해도 조선 영조 정도는 될수 있던 왕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외치에서 좋은 평을 받고 내정에서도 좋은 평을 받았던 조선 태종처럼 되기란 소현세자와 달리 조선 태종은 관직의 경험도 있고, 과거의 급제로 관리를 역임한바 있어서 이건 조선 태종이 꽤 대단한거지. 소현세자를 탓하기란 어렵다.
만약 소현세자가 외아들이었다면 좋든 싫든 어쩔수 없이 데려가야 했겠지만 인조에겐 신체 건강한 차자 봉림대군이 있었다.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서 대안이 없어 견제만 할뿐 광해군의 세자지위를 흔들진 않았던 선조와의 결정적 차이점이었다.
귀국 준비, 그리고 기구한 운명을 향해
인조는 자연스럽게 세자를 꺼리기 시작했다. 세자가 영구귀국 전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삼전도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는데, 청에 보낸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했고 청이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의 손아귀에 집어넣게 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낸다. 그리고 환영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귀국 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다.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한번 보내주겠다"며 일시귀국 시킨것을 영구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 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 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한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 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친정아버지, 그러니까 인조의 사돈이자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죽자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빈소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당황해서 "빈궁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 세자가 청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진다. 반정공신 심기원이 인조를 상왕에 앉히고 세자를 왕위에 앉혀 반정을 일으킬 음모를 꾸몄는데 세자가 귀국한 걸 보고 왕이 될 재목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회은군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인데 이로 인해 세자에 대한 경계심은 더욱 강해진다.
귀국과 의문의 죽음(독살설)
청나라가 명을 완전히 접수한 뒤인 1645년, 청 황제는 소현세자의 영구 귀국을 허락했고 소현세자는 강빈과 함께 귀국했다.
이후의 행적을 보면 인조는 이미 후계자 교체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년 만에 귀국한 세자에게 어떠한 위로의 말도, 귀국 축하 연회도, 치하도 하지 않았다. 죽기 전 3달 동안 세자에 대한 기사라곤 당대의 대 문장가 이식이 세자의 귀환을 축하하는 교서를 발표했다는 것뿐이다. 노골적인 박대의 분위기 속에 소현세자는 병을 얻었고, 결국 귀국한 지 3달도 못 되어 그 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소현세자의 죽음은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는데, 이 때문에 소현세자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국가의 공적 역사 기록이라 할수 있는 실록에서까지도 소현세자의 시체가 매우 심하게 검게 변해 있었더라는 이야기를 적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적자면 온몸이 전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멱목으로 그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 빛을 분변할 수가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고 쓰여 있다.(독살설을 긍정하는 쪽에서는 이 죽음에는 인조가 직접 개입했으리란 말도 있고, 방조했다는 해석도 있다.)
소현세자의 처남들인 강문명 등이 소현세자의 장례 일정이 원손에게 불리한 날이니 바꿔달라고 하자 "그렇게 잘 안다면 어디 네놈이 한번 날을 잡아라!"라고 소리지르기도 했고, 지관들이 정한 장지를 불편하다는 이유로 다른 곳으로 바꿨는데, 지관들이 거긴 흉지라고 수군거리다가 곤장을 맞고 국문당하기도 했다. 장례조차도 "사대부의 예면 족하다"는 이유로 너무나도 초라하게 치러져서, 신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독살이 있고 없고 떠나서, 세자에게 애정이 없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하지만 볼모로 잡혀갈 때는 세자가 추위에 약하니 온돌방에 재워달라 부탁할 정도였다.
이덕일이 제시한 그 많은 독살설 중에 유일하게 실록 등 사료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고, 무엇보다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그 가능성에 동의하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게 사실인 걸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은데, 실제로는 글자 그대로 '설'일 뿐이니 섣불리 사실로 기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최근에는 의학적 근거를 통해 독살이 아닐 수도 있다는 주장도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소현세자가 묵던 곳에서 쓴 편지를 보면 세자는 원래 귀국 직전부터 몸이 안 좋았고, 정치적 관점을 배제하고 완전히 한의학적 관점에서만 보자면 단순한 의료사고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는 소리. 또한 간이 안 좋아 사망한 경우에도 얼굴이 검게 물들고 선혈이 흘러나오는 증세를 보인다고 한다. 또 최근 소현세자의 일기가 번역되면서, 독살설보다는 처방을 잘못 해서 죽었다는 견해가 많은 편이다.
정치적 관점과 인조의 전후 행보를 보자면 인조가 세자를 제거했거나 세자의 죽음과 어떤 형태로든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있어보이지만, 순수하게 의학적 관점에서도 볼땐 그냥 건강이 안 좋던 사람이 실력 없는 의사를 만나 병이 도져 사망했고, 인조는 그저 그 상황을 이용했을 뿐일 수 있는 것이다.
2017년 8월 28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칼럼에서, 이상곤 한의사는 세자빈의 성욕때문에 소현세자가 죽었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현종 즉위년 9월 5일의 실록을 보면, “아버지(인조)가 애통해하면서 세자의 죽음에 대해 강빈(세자빈)을 책망하기를 ‘이는 밤에 잠자리를 삼가지 않은 소치’라 하셨다.”고 돼있다는 것이다. 귀국 후 의관들이 세자에게 처방한 청폐탕, 이모영수탕, 시호지모탕 등을 처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고 한다. 이 탕약들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지모는 스태미나가 고갈돼 허열(虛熱)이 올라오는 ‘음허화동(陰虛火動)’ 증상을 치료하는 대표적 약재이기 때문.
야사에서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가져온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말이 있는데, 여느 야사가 그렇듯이 웃고 넘어가자.
사후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같이 청에 볼모로 갔지만 차자라서 청의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던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운다. 이는 종법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논란이 생길수 밖에 없었고 인조는 왕의 권위와 모략으로 반발을 찍어 눌렀다. 송준길 등이 소현세자의 아들을 왕세손으로 삼을 것을 청하자 "소인배놈들의 행태를 차마 볼수가 없다!!"고 길길이 날뛰며 욕을 퍼붓더니, 이시백, 이시방 형제, 김육 등의 반대를 모두 무시하고 둘째 봉림대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이때 인조의 주장에 영합한 것이 김류와 김자점이었는데, 김류는 인조가 "원손은 영 못 써먹겠다!!"고 하자 "혹시 양녕대군 같으면 쫓아내야겠죠?"라고 한마디 거들었다가 원손을 가르쳤던 김육에게 "어린 원손이 무슨 죄를 저질렀습니까?"하고 극딜을 당했다. 인조가 "원손이 멍청해서 안 되겠다!!"고 하자 "재강할 때 원손의 재능이 드러났거든요?"라고 다시 김육의 반발을 산다. 그러자 인조는 "한갓 총명함이 문제가 아니라 나이가 문제다. 내가 나이가 많아 어린 원손이 성장함을 지켜볼 수가 없다"고 억지를 부려서 원손의 승계를 뒤틀었고, 김자점이 신나서 왕에게 아부하여 조정의 논의를 결정지어 효종을 후계로 삼는다.
그렇게 효종-현종의 승계라인을 결정지은 인조는 맏며느리 민회빈 강씨에게 화살을 돌렸다. 소현세자의 자식들, 특히 맏이 석철은 살아있으면 효종의 정통성을 위협하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어려서 꼬투리 잡을게 없으니 며느리를 모함했다. 의도적으로 강빈을 박대하다 전복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그녀의 궁녀들을 무고하고, 강빈이 그 일로 항의하자 건방지다는 둥 청나라에 있을 때 홍금적의를 지어 입고 난을 모의했다는 둥 각종 누명을 덮어 씌워 사사했다. 그리고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은 죄인의 아들이 되어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에 처해진다. 섬 생활을 이겨내지 못한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어린 나이에 연이어 병사한다. 이들이 죽기 직전 소현세자 부부의 죽음을 전해들은 청은 용골대를 보내서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도로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는데, 이들을 이용해 인조를 압박하려는 속셈이 빤히 보이는지라 조선은 당연히 거절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 현재 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아침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부대에서 정훈교육 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도 돌아볼 수 있다.
참고로 인조는 소현세자 장례 이후 사망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소경원을 방문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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