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통로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사람은
성경의 복음에 깨어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은혜와 진리에 깨어 있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라는 말을 듣는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끼칠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에 깨어 있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가 아주 낯설기만 할 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복음적인 시선을 가진 사람은
축복의 통로에 대한 즉각적인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킬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에 대한 복음적인 성찰은
축복의 통로와 저주거리의 환치 현상에 대해 주목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축복의 통로 현상은 구원의 복에 대한 유희요, 무속 신앙의 결실이며,
소위 말하는 중보기도가 낳은 축복의 실상이요, 인본주의 실존 신앙의 신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단과 사이비이 온상이 된 한국 교회는
인본주의 무속 신앙의 결실로 축복의 통로를 소위 말하는 의의 열매로 맺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 심은대로 거두는 결실의 법칙은
무속 신앙의 현세적 복으로 축복의 통로를 결실하였습니다.
성경에 대한 상식이 있는 사람은
축복의 통로에 대한 낯선 느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축복의 통로는
어느덧 하나님의 은혜와 복으로 편만한 은혜를 나누는 통로로 소위 복음의 결실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비유풀이에 농락당하면......
자연스럽게 교주를 보혜사와 이기는 자와 백마탄자와 동방의 사자로 인식하고 이해합니다.
축복의 통로에 대한 거부 반응이 없는 것은
영적 브레인워싱으로 범신론적 무속 신앙의 주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중보 기도 운동의 무속화는
축복의 통로라는 자아 주체적 실존 신앙의 실현인 샤먼, 무당을 만들었습니다.
무속 신앙의 결실로 맺은 축복의 통로는
오늘날 소위 말씀의 비전이 낳은 복덩이가 되었습니다.
바알을 여호와로 섬겼던 혼합한 신앙은 다산과 풍요의 실상인 말초적 제의식을 통해 타락하였듯
무속 신앙의 현주소는 다산과 풍요의 실상인 축복의 통로라는 성공과 번영의 매개를 만들었습니다.
축복의 통로는 중보 기도의 실상이요,
실존적 자아실현을 위한 영성의 영매, 주체가 되었습니다.
영성 문화의 꽃이 된 축복의 통로는
주체적 평화를 신봉하는 것과 같은 자아 실현의 충만한 은혜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축복의 통로라는 인식은
성공과 번영의 좀비적 광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현세적 복의 마스타 키가 된 축복의 통로는
은혜와 복을 받은 실존적 자아 인식의 주체 신앙을 더욱 활성화하였습니다.
성령의 임파테이션, 그 전이 운동의 결실인 축복의 통로는
성경의 복음적인 구원의 개념이 아니라 복의 유희, 그 이데올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축복의 통로에 대한 종교 심리학적 성찰은
사회적 구조악에 대한 정의와 자유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체적 정의의 실현, 그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축복의 통로는
인식의 천국, 그 허상의 극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영적 서밋의 실현인 축복의 통로는
종교심리적 자아실현의 주체적 편안과 천국을 누리는 소위 " 영적 부자 방망이"가 아닐 수 없습니다.
모든 저주에 대한 축복의 최면 현상으로서의 축복의 통로는
무속 신앙의 실존적 자아실현의 종교적 비전으로 추구하는 이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은혜의 주체가 된 축복의 통로는
강단의 오염된 정보로 말미암은 쓰레기요 오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축복의 통로에 환장하는 한국 교회는
선지자와 사도의 터 위에 세워진 교회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상실하였습니다.
축복의 통로는 은혜와 구원의 개념이 아니라
범신론적 인본주의 무속 신앙의 무당 개념입니다.
축복의 통로로 전교인의 무당화를 이룬 한국 교회의 무속 신앙은
바알을 여호와로 섬겼던 이스라엘, 그 심판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축복의 통로라는 평화의 축제는
포스트 모던의 좌파적 헤게모니에 장악된 통일선교의 이상이 되었습니다.
한국 교회에 침투한 좌파 신앙은
개혁주의 신학의 주체화를 통한 인본주의 신앙으로 타락시켰습니다.
이단과 사이비 종교 놀음의 온상의 한국 교회는
광화문 광장의 촛불의 실상으로 주체횃불을 받드는 좌파 신앙에 농락되었습니다.
축복의 통로로 이루고자 하는 통일 선교는
적화 통일의 종교 심리적 전략 전술입니다.
작금의 한국 교회는 복음의 난파선이 되어
세월호의 침몰에 투영되었습니다.
노란 리본의 부활 의식은
감성팔이의 신앙으로 전락하여 참된 예수의 부활을 농단하였습니다.
축복에 대한 오염된 현상은
성경의 복음적인 언어로 한번도 사용되지 않은 통로의 개념으로 희화되었습니다.
교회가 고유한 복음적인 언어를 버리고 유행에 민감한 언어를 수용하다보면
어느덧 혼합종교, 혼잡한 설교의 이상을 이루게 됩니다.
세상과의 소통으로 세상을 공유하면
그것이 곧 타락입니다.
은혜의 구원과 축복의 통로의 환치 현상은
개혁주의 신앙의 타락으로 말미암은 인본주의 무속 신앙의 나쁜 열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성경의 축복은 복의 전이 개념이 아니며
축복하고 축복받는 은혜의 개념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요. 축복의 통로가 아니며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복을 축복하였습니다.
☞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창14:18-20)
이삭은 야곱을 축복하였고
야곱은 요셉을 비롯한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축복하였습니다.
모세와 아론은 제사장을 축복하였고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였습니다.
☞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6:24-27)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으로
사도적 축복을 하였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
축복의 통로를 강조할려면 예수님의 중보 지위와 아론과 모세의 축복권과
바울의 사도적 축복으로 말미암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공예배 후 사도 바울의 축복을 축도하는 것은 사도적 권위를 위임받은 축도요,
공적 예배의 대상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축도는 사도적 권위의 편취요,
수요예배나 심방 예배나 하관예배 등에서도 축도하는 것은 축도에 대한 종교적 사욕일 것입니다.
때로는 대제사장의 축도를 하고 때로는 사도적 축도를 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이현령비현령의 아전인수일 것입니다.
성경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남용은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에 대한 메시야적 직분의 오용이 아닌가 깊이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의 축복은 곧 권위의 실상이요,
성경의 모든 축복을 이루는 것은 영원한 대제사장인 메시야의 직분입니다.
메시야적 은혜의 구원을 농단하는 축복의 통로만 강조하지 말고.......
공적 예배의 축도권도 누구든 축복의 통로라면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것이 아닌가?
더욱 축복의 통로는 인격 개념이 아닌 사물 개념이며
사물 인터넷 시대를 준비하는 영성의 영매로 시대를 앞서 타락한 개념입니다.
축복의 통로, 그 복의 유희라는 복음적 성찰의 카페 글은
여수룬언약문화공동체가 지향하는 복음적인 성찰의 유일무이한 글입니다.
카페의 글은 남의 글에 숟가락 얹지 않으며
일체의 표절이 없는 창의적 말씀 묵상의 글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