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화 천리길’을 다녀오다
2018년 10월 7일 오전 7시-9일 오후 7시
참석자; 고전연구원의 박남일, 유미정, 박전일, 조세경,
서정휴, 지정순, 김용범, 김정희, 정수연, 황광우.
안내자; 김태완 선생(지혜 철학연구소 소장)
허경도 선생(문화재 관리사)
여정; 광주-안동-봉화-영주-풍기
새벽에 잠이 깨었다. <운사유고>를 교정하다 보니 아침 7시가 되었다. 캐리어에 몇 가지 넣으려다 그만 양말 두 켤레만 챙겼다. 아파트 앞에 나와 한 바퀴를 돌고 있으니 약속한 대로 박남일 회장이 차를 몰고 왔다.
박남일 회장이 1호 차를 몰았고, 서정휴 대원이 2호 차를 몰았으며, 조세경 대원이 3호 차를 몰았다. 대열을 위한 헌신은 드러나지 않는다. 인생은 늘 불공평하다.
1호 차가 생룡 마을을 빠져나가는데, 김용범 대원으로부터 타전이 왔다. 방금 연구원 앞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유미정 대원은 급하게 3호 차 조세경을 호출했다. 조세경은 김용범 대원을 태우러 돌아갔다.
나는 비몽사몽이었다. 뒤에서 김태완 선생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용하게 하지만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유미정 대원은 옆에서 박자를 잘 맞추어주었고, 어디서 떠오르는 기억인지 몰라도 김태완 선생의 이야기는 샘물처럼 솟아 나왔다.
거창 휴게소에 잠시 머물렀던 것 같은데 나는 더 길게 누웠다. 대원들은 차 한 잔씩 마시면서 2박 3일의 답사여행 여정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다시 출발하는 차의 뒤에선 유종원의 강설이 암송되고 있었다.
千山鳥飛絶 천(千) 산에 새 날지 않고,
萬徑人蹤滅 길에 사람의 발자취도 끊겼건만,
孤舟蓑笠翁 외로운 배엔 도롱이에 삿갓 쓴 늙은이,
獨釣寒江雪 홀로 눈 내리는 차가운 강에 낚시질한다.
차는 마침내 안동의 남쪽을 지나고 있었다. 가도 가도 목적지가 나오지 않으니 우리는 ‘광주 네이버의 버벅거림’을 탓하였다. 길을 잘못 들어선 것임에 틀림없었다. 조금 후 안동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높은 산마루에 서니 안동 시내가 아스라이 보였다. 장관이었다. 실수가 새 역사를 창조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1호차는 이 고갯마루에서 안동 입성 첫 사진을 찍었다.
역시 ‘광주 네이버'는 버벅거렸다. 부용대의 뒷길로 진입하였다. 얼마 후 1호 차는 화천서원 앞에 멈췄고, 허경도가 그의 딸 보리와 함께 먼저 와 있었다. 화천서원은 유성룡의 형, 류운룡(1539∼1601)의 서원이었다. 고풍스러워야할 서원이 찻집으로 변해 있는 것은 좀 서운하였다.
부용대가 뭔 지도 모르면서 나는 숲길을 걸었다. 보리는 아빠와 재잘대며 따라 올랐다. ‘아빠, 나무줄기가 땅속에 있네’ 땅 속을 기는 나무 뿌리가 보리의 눈에는 나무 줄기로 보였다. 부용대에 올라서니 거짓말처럼 하회마을의 전경이 나타났다. 저 멀리서 고옥들이 숨을 죽이고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예전 하회마을 여행 땐, 저 고옥 사이의 골목길을 걸었다. 그때 쳐다본 강 건너 산꼭대기에 지금 우리는 서 있는 것이다. 하회 마을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물위에 떠있는 연꽃과 같다 하여 이곳을 부용대(芙蓉臺)라 부른다.
예전엔 빈 집이 많았으나, 요즘엔 빈 집이 거의 없단다. 도시에 나간 풍산 유씨들이 고향으로 귀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빈 집이 없어진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누군가가 하회 마을에 살 수는 없냐 물으니, 살 수는 있으나 집성촌이라 살기가 불편하다며 해설을 맡은 허경도는 잘라 말했다. “못살아 예”
허경도는 대구에서 진보정당 운동을 한 나의 후배이다. 2004년 내가 광주 남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했을 때, 허경도는 젊은 나이에 대구 달서구에서 출마를 했다. 8%가 넘는 표를 얻었다. 대구와 광주는, 진보정당의 길을 걷는 사람에겐 절망의 두 도시였다. 살아서 뜻을 펴기 힘든 곳이었기에 이곳에서 진보정당의 깃발을 들고 가는 이들은 도리어 강단지다.
허경도는 2006년 경 대패질을 시작했다. 명지대에서 유홍준 밑에서 공부도 했다. 문화재 관리사 시험을 통과했다. 지금은 허경도의 도장이 찍히지 않으면 문화재 고옥을 수리할 수 없다고 한다.
“모든 집성촌에 들어선 집들은 집터의 방향이 동일한데, 하회 마을의 집터는 모두 제각각임을 알 수 있어요. 저기 보이는 북촌댁은 하룻밤 숙식에 백 만원하는데요, 한번쯤 묵고 갈만한 할 낍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대사급 인물들이 하회마을에 오면 묵고 가는 집이라예”
여행하다 맞이하는 식사는 늘 즐겁다. 그만큼 발품을 팔았고, 배는 출출해졌다. 가는 길에 나는 밤을 샀다. 토종밤이었다. 하회종택이라고 이름 한 간고등어 음식점은 밥을 파는 고택(고택은 하회마을 안에 있음)이었다. 여자 대원들은 안채에 자리를 잡았고, 남자 대원들은 주방 입구에 자리를 잡았다. 음식이 나오지 않아 나는 마련한 밤을 돌렸다. 음식은 나오지 않았다. 기다리던 손님들이 불평을 하며 일어서 나갔다. 음식은 나오지 않았다. 주방 안에서 일하는 분들의 다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하는 젊은이를 혼내는 주인 아주머니의 짜증이었다.
보아하니 기다리는 손님은 스무 테이블인데, 고등어를 굽고 된장국을 끓이고 밥을 하는 사람은 한 명이었다. 두 명의 젊은이들이 부지런히 음식을 나르며 계산을 하며 손님을 받았으나, 사람도 부족하고 일의 질서도 없고, 기다리던 손님들은 투덜거리며 일어서고...우리의 마음이 가파르기 시작했다. 이때 우리를 안내하는 김태완 선생은 몹시 불편했을 것이다. 안동을 구경시켜 준다고 데려 왔는데 이 꼴이 뭐람?
시장이 반찬이었다. 고등어는 맛있었다. 된장국도 맛있었다. 밥도 맛있었다. 물도 맛있었다. 우리는 새로운 테제를 선언하였다.
“이후 먹은 모든 경상도 음식에 대해 감사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은 하회종택의 학습효과였다.”
다음 행선지는 병산서원이었다. 가는 길이 비포장 시골길이어서 요동이 좀 있었다. 대원들은 병산서원으로 들어갔으나, 나는 차 안에서 쉬기로 마음을 먹었다. 예전에 병산서원을 충분히 관람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오르내리는 계단이 부담스러웠다.
다음 행선지는 가일마을이었다. 차는 풍산들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번 안동 여행의 안내를 자임한 김태완 선생은 “이 풍산들은 조선 팔도에서 가장 넓은 들입니다. 이 넓은 들의 생산력에 의지하여 안동의 양반 문화가 이루어졌습니다.”라는 멘트를 붙였다. 저 들이 가장 넓은 들이라고? 나는 순간 김태완 선생의 멘트를 의심했다. 이내 선생의 멘트가 반어법임을 알아차렸다.
김태완 선생은 봉화 산골 출신이다. 가난을 숙명처럼 타고 자란 빈농의 아들이다. 여행 내내 산골 농촌의 비좁은 전답 규모를 반복하며 말하였다.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돌아오는 차에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가일마을은 권오설의 고향이다. 동네 입구에 제법 넓은 저수지가 있었고, 저수지 입구엔 아름드리 나무가 500년 수령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그 나무 아래 권오설 선생의 비가 저 멀리 풍산들을 호령하면서 서 있었다. 비석엔 권오설 선생이 광주에서 3.1 운동에 가담한 것을 적고 있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은 천도교의 조직과 조선공산당이 연대하여 주도한 독립운동인데, 이 운동의 한 중심에 권오설이 있었다.
견디기 힘든 것이 고문인데, 이 고문을 이겨낸 독립투사가 둘 있었다. 한 분은 이재유였다. 이재유는 60여일의 고문을 견디고, 구치소를 탈출하여 미야께 교수 집 지하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한 분이 권오설이었다. 박종철처럼, 권오설은 고문 앞에 목숨을 내어주었다.
가일 마을은 권씨 집성촌이다. 퇴계는 이곳 출신인 선비 권질로부터 딸을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두 번째 부인 권씨 말이다. 손이 없이 죽은 권오설의 제사를 위해 들어온 양자가 있었다. 권대용씨다. 지금은 대구의 아파트 경비를 맡고 있다. 한국전쟁의 상처를 가장 아프게 안고 사는 분이다. 그에게 “빨갱이”는 주홍글씨였다. 독립 운동가의 9할이 사회주의자였는데, 아직도 사회주의 운동가를 배척하고 있으니, 일제하 독립운동의 역사를 무엇으로 쓸 것인가? 권오설을 독립 유공자로 인정한 것은 일제 치하에서 죽었기 때문이라는 허경도의 해설 앞에서 나의 마음은 썩 편치 않았다.
다음 행선지는 봉정사였다. 대한민국에 수 만 개의 절이 있는데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일곱 사찰의 하나란다.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양산 통도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 영주 부석사 는 들어본 이름인데, 안동의 봉정사는 낯설었다.
봉정사는 의상대사가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려 고른 가람이란다. 1972년 극락전을 보수하던 중 상량문의 기록을 살피니, 극락전이 부석사의 무량수전보다 먼저 지어진 목조 건축물임이 밝혀졌다. 우리에게 최고(最古)의 목조 건축은 무조건 무량수전이었다. 그것은 우리에게 진리였다. 순간 진리가 바뀌었다. 나는 바보처럼 살아왔음을 이번에 확인했다.
나는 혼자 먼저 걸어 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내려가는 길에 한 떼의 인도 아가씨들을 보았다. 명찰을 보니 스리랑카에서 수학여행을 온 여학생들이었다. 발랄했다.
그때 대원들은 영산암을 둘러보고 있었다 한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을 느낄 수 있는 암자였다. ‘비움을 통해 채움의 미학’을 얻을 수 있는 곳, 영산암을 보며 박남일 대원은 눈물이 쏟아졌다고 한다. 무엇이었을까? 대원들 말을 들으니 영산암에 들어서니 정겨웠다고 하였다. 여염집 아낙이 정성을 들여 가꾼 듯이 꽃들과 나무들이 아기자기 했다는 것이다. 정갈한 기단위에 법당이 세워져 있어 여느 전각보다 반듯하고 기품이 있었나 보다.
저만치 들 건너에 자리한 나즈마한 고택이 나를 불렀다. 죽헌고택이었다. 마당 안을 훑어보니 이곳에도 엘리자베쓰가 왕림한 흔적이 있었다. 대원들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리플렛 몇장을 챙겨 돌아왔다. 대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리랑카 아가씨들이 연출하는 노상 즉석 춤 공연은 고혹적이었다.
해는 저물고, 차는 또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었다. 제비원 마애석불이었다. 안동 시가를 좀 벗어나 태화산 기슭에 연미사라는 절이 있다. 큰 바위에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제비원은 연비원(燕飛院)으로 여행길에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으로 옛날에는 영남에서 충청도나 서울, 경기도를 갈 때는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다. 그 길목에 있던 것이 이 제비원이었다.
길 가에 공원이 있었고, 우뚝 솟은 바위에 불상이 새겨져 있었다. 대원들은 불상을 감상하였고, 나는 공원에서 돌 던지기를 하였다. 보리가 심심했나 보다. 아이 때문에 돌아가 보아야겠다고 허경도는 인사를 하였다. 우리는 말없이 헤어졌다.
하회종택 음식점의 카오스를 복수할 수 있는 식당을 찾았다. 안동 시장의 찜닭 집을 찾았다. 나는 닭고기를 좋아한다. 돼지고기를 좋아한다. 그런데 오랫동안 닭과 돼지를 피해 살았다. 먹은 대로 배로 가기 때문이다. 찜닭이 나왔다. 감자와 잡채가 섞여 나왔다. 이럴 땐 나는 닭고기를 먹는 척하면서 감자만 골라 먹는다. 오 마이. 나도 몰래 젓가락이 닭고기에 가고 있었다. 김태완 선생은 좀 마음이 편해졌을까? 집안싸움은 남에게 보이지 않는 것인데...아뿔사, 이곳에서도 또 손님은 주인에게 삿대질을 하고 나갔다.
와인 한 잔, 안동 소주 한잔, 모두들 배가 행복하였을 것이다. 여성 대원들도 안동 소주를 잘 먹었다. 아니, 저 독한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다니...
하루가 길었다. 여정도 길었다. 농암종택 가는 길도 멀었다.(안동시내에서 약 50분) 안동 바깥에 농암종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해는 지고 사위는 어두운데, 차는 고택 앞에 섰다. 쥔 아주머니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수건을 들고 나왔다. 김태완 선생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머가 심상치 않았다. 예약이 늦어 숙소가 여기저기에 분산된 것이다. ‘여기저기’의 공간적 거리는 예상 밖이었다. 나는 ‘애일당’에 배속되었는데, 차로 이동하는 거리였다.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외딴 고택이었다.
코딱지만 한 방 두 개 사이에 대청마루가 있었다. 대원 모두가 여기에서 향연을 갖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조금 있다가 분강서원 쪽에서 연락이 왔다. 빈 방이 나왔으니 이곳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종들이 머물던 행랑채였다. 나는 하룻밤 농암 이현보(1407-1555)의 종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포도와 자두가 나왔고, 과자 나부랭이가 놓였다. 김용범 대원은 가져온 적주(赤酒)를 깠다. 김태완 선생의 노래 솜씨는 예사롭지 않았다. 뽕짝이 그의 영혼에 오롯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목에선 건드리기만 하면 가요가 톡 튀어나왔다. 나도 저처럼 노랠 불렀던 시절이 있었는데...어쩌다 악독한 시대를 만나 그 좋아하던 노래를 다 잃어버렸을까.
남일은 먼저 누웠다. 정휴와 용범도 애일당으로 갔다. 현주도 갔다. 태완도 고개를 저울질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나도 누웠다.
아침은 두런두런 부석거리는 소리와 함께 왔다. 아홉시에 출발하려면 여덟시에 조반을 들어야한다는 소리였다. 나는 공복을 좋아하기에 한 숨 더 잘 권리가 있다. 밥을 맛있게 지으려면 뜸을 들여야 하듯, 하루를 잘 보내기 위해 깨어 일어나기 전 잠시 명상을 하는 것이다. 아테나 여신의 계시를 받는 때이다.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올라오는 그 사이, 비몽사몽의 그 사이 인간의 창조적 상상력은 극대화된다. 물론 개꿈으로 끝나는 생각도 오지만, 창작의 줄기가 되는 계시도 온다. 그래서 나는 이 사이를 ‘잠의 뜸들이기’라 부른다.
이 시기 대원들은 농암고택의 정수, 조반 십찬을 즐기고 있었다. 아주 품위가 있는 식사였다고 한다. 양반 문화의 진미를 맛보고 있었다. 이제 김태완 선생은 안심했을 것이다. 그럼 그렇지.
고택을 휘감아 도는 낙동강의 강물은 급하게 흘렀다. 이틀 전 한반도 남부를 휩쓴 태풍 콩레이의 영향 탓이기도 하였다. 새벽강의 신비로움은 어찌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건너 바위엔 붉은 이끼가 점점이 붙어 있었다. 이런 평화로움은 영국에서나 목격할 수 있는 낯선 평화이리라. 중세의 유적에서 느끼는 아득함 말이다. 유럽은 이런 곳에 성(Castle)이 있었다. 안동의 끝자락 농암종택엔 애일당이며 분강서원이며 한옥고택이 있었다. 농암종택은 조선의 캐슬이었다.
아침에 박전일 대원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지난 밤 고속버스를 타고 대구에 도착한 전일 대원이 아침에 안동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회장이 나서기로 했다. 박남일 회장은 농암종택의 조반을 포기하였다.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박전일 대원의 미친 열정과 박남일 회장의 보이지 않는 헌신 속에서 우리의 ‘봉화 천리길’은 진행되고 있었다.
우리는 도산서원과 이육사 문학관과 청량사 산행 세 곳을 놓고 각자 원하는 곳을 가기로 하였다. 2년 전에 도산서원을 방문한 대원들도 있었고, 이번이 처음인 대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세 팀이 각자의 취향대로 선택하기로 하였는데, 결국에 ‘다함께’ 세 곳을 돌기로 하였다. 잘한 선택이었다.
나는 여러 번 도산서원을 갔지만 갈 때마다 배우는 것이 새로웠다. 한참 가는데 김태완 선생이 전서체로 쓰인 ‘추로지향’(鄒魯之鄕)을 해설하고 있었다. 공자의 70대 후손이 이곳 도산서원에 와 남긴 오언절구를 비(碑)로 세워놓은 것이다. 한시에 밝은 김태완 선생은 이곳에서 실력을 유감없이 과시하고 있었다.
도산서당은 허경도가 해체 복구했다고 한다. 퇴계가 거처한 완락재 옆 부엌에 0.3평 규모의 골방이 있었다. 저것이 무엇이냐? 골방의 용도를 놓고 갑론과 을박을 주고받았다. 저렇게 조그만 공간이 종의 처소였다니, 퇴계여, 퇴계여, 종은 사람이 아니더란 말인가? 숨을 쉴 창은 있어야 하지 않으냐? 허경도는 ‘제발 함께 살자’고 주장하였다. 들여다보니 그것은 사람이 누울 공간이 아니었다. 부엌에서 쓸 살림살이를 두는 창고였다. 조세경은 ‘살강’이라 하였다. 나는 세경의 견해를 지지했다.
나는 서정휴 부부에게 퇴계의 성학십도를 풀이하여 주었다. 선조가 왕위에 오르고, 퇴계를 불렀다. 안동에서 단양까지 나귀를 타고, 단양에서 마포나루까지 배를 타고, 다시 마포에서 경복궁까지 말을 타고 입성한 퇴계였다. 품엔 <성학십도> 한 편이 있었다. 성리학의 정수를 그림으로 요해한, 이 세상에서 가장 간략한 성리학 참고서였다. 주희의 스승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며 장재가 만든 서명도 등, 송대 철인들의 사상을 집대성한 주자, 그의 성리학을 퇴계는 다시 10폭의 병풍으로 압축하였다.
간략할수록 난해한 법이다. 압축할수록 오해의 여지가 많은 법이다. 선조는 성리학을 쉽게 배우고자 퇴계에게 과외를 청하였으나, 사상은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6세 청소년 선조는 선생 앞에서 졸았다. 노구를 이끌고 왔건만, 선조는 노학자의 경연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퇴계는 하직인사를 하였고 경복궁을 나섰다. 선조를 입시하던 경복궁의 선비들은 모두 퇴계의 뒤를 따랐다. 마포나루까지 전송을 하였다. 배 안에까지 올라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이도 있었다. 조선의 임금은 선조였으나, 사상의 임금은 퇴계였다. 후일 퇴계의 제자들, 퇴계 라인의 영남 선비들은 조선 왕조 내내 재야 신세를 면치 못했다며 투덜거렸으나, 바로 이 시기 조선은 퇴계와 그 제자들 동인의 세상, 그들의 전성기였다.
빨리 오라는 전갈이 왔다. 서정휴 부부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쳤다. 퇴계 보다 더 명쾌한 <성학십도> 요해를 앞으로 어디서 들을 것인가? 재촉하여 갔는데, 육사문학관은 휴관이었다. 월요일이 육사의 만남을 방해하였다.
이제부터 봉화 천리길의 비경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청량사 가는 길이다. 낙동강이 급하게 흐르고 있었고, 강 건너 산은 모두 기암절벽이었다. 강은 섬진강이었고, 절벽은 화순 적벽이었다.
나는 전에 퇴계를 공부하면서, 청량산과 퇴계의 관계가 꽤 묵중한 사이임을 보았다. 무등산은 좌절한 이들이 찾아와 위로를 받고 가는 어머니 같은 산이다. 청량산은 무등산과 달리 훨씬 차가웠고, 깊었다. 무등산은 광주를 품고 서 있는 슬픈 산인데, 청량산은 세속과 관계를 끊어버린, 냉기를 뿜는 산이었다.
대원들은 청량산 등정을 환호하였다. 그렇다. 청량산을 모르고선 퇴계를 알 수 없다. 퇴계는 1513년 13살의 나이에 숙부 이우의 손을 잡고 청량산에 들어와 공부를 하였다. 이후 나이 60이 되도록 퇴계는 청량산에서 공부를 하고 마음을 닦았다. 남명 조식이 명종에게 상소를 올렸을 때, 명종의 어머니를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은 여인이라 직설했던 그 유명한 상소를 올렸을 때, 퇴계가 그 소식을 들은 것도 이 청량산에서였다.
그런데 청량산 가는 길이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며 김태완 선생은 차를 타고 청량사에 가 있으라는 것이었다. 김용범 대원이 나와 함께 잔류하기로 하였다. 다들 청량산에 입산하고 있었다. 에라. 갈 때까지 가 보자. 가다가 못가면 쉬어가고, 가다가 오를 수 없으면 내려오면 되지. 나는 용범 대원의 보조를 받아 한발 한발 걸음을 옮겼다.
초입엔 손잡이가 있어 걸을만했다. 중반부턴 손잡이는 없고, 산길 옆은 그대로 낭떠러지였다. 가다간 미끄러운 바위 위로 물이 흐르는 곳도 있었다. 위험한 순간이 연이었다. 우리는 쉬지 않고 잡담을 나누었다. 문월식씨를 운림동의 음악 카페에서 만났다는 둥, 김영 학원장이 음악 카페를 운영한다는 둥, 김영은 열정적이면서 재주가 좋다는 둥, 지금은 학원 경기가 추락하였다는 둥, 뜨는 인터넷 강사는 스카웃 비용이 얼마라는 둥, 김용범 대원의 세상살이는 파란만장하였다.
김용범 대원은 나의 몸을 안아 옮겨주었다. 저만치 청량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제야 나는 노회찬 이야기, 황지우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도착하고 숨을 고르기도 전에 우리 대원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반가웠다. 하지만 대원들은 나의 긴장과 이완을 알지 못하고 날더러 오던 길을 되돌아가라고 하였다. 경사가 심하지만, 나는 밑으로 내려가는 길을 고집하였다. 이 길에선 넘어져도 몸을 구르면 되지만, 오던 길에서 몸이 넘어지면 그대로 선종하는 것임을 대원들은 몰랐다.
그때 용감한 대원이 나왔다. 청량사 스님에게 차량 도움을 요청하러 나선 것이다. 역시 매사에 용감한 용범 대원이었다. 나는 용범 대원의 협상과 관계없이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워낙 시멘트 포장길이 거칠어서 미끌어 넘어질 까닭이 없었다. 비탈길을 다 내려오니, 봉고 차 한 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님이 타라고 하였다. 나는 이 봉고차를 타고 나머지 산길을 수월하게 내려왔다. 500년 전 퇴계가 오르던 그 산길이었다.
천 길 낭떠러지 위험했던 청량산 등정을 뒤로 하고, 점심을 먹으러 이동하는 길은 사뭇 가벼웠다. 다시 낙동강과 기암절벽이 창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저 위 높은 곳에 고릴라 한 마리가 남쪽 강남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흑산도에서 잠자리 머리 모양의 바위를 보는 기분이었다.
봉화 시내였다. 구운 돼지고기를 먹으러 우리는 이곳에 왔다. 그런데 식당 옆에 정자와 비석이 서 있었다. 김태완 선생의 해설에 따르면 홍건적의 침략을 피해 피난을 내려온 공민왕이 남긴 정자란다. 정자의 이름은 봉서루(鳳棲樓)였다. 봉이 깃든 곳이니 세경씨여 어서 오르소서.
역시 배는 중요했다. 쥔 할머니는 부지런히 찬을 깔았고, 구운 돼지고기가 놓였다. 나는 무장 해제되었다. 적주(赤酒)가 있고, 벗들이 있고, 안주까지 있는데, 만일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니라면 어디가 파라다이스란 말인가. 우리는 이곳에서 안동소주를 특별 구입하였다. 이 소주는, 자료집을 기획하고, 자료를 편집하고, 복사를 하고, 손수 제본까지 한 박전일 대원의 노고에 답하는 술이었다.
굽이굽이 길을 돌 때마다 1호차에선 김태완의 옛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 이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다는 이야기, 학교 가는 것을 땡땡이치고 산에 올라 하루를 놀았다는 이야기, 담임선생은 우리를 잡으로 산을 헤집었다는 이야기, 겨울이면 몰아치는 북풍을 맞으며 십리 길을 오고갔다는 이야기를 하다 보니 김태완 선생의 생가 마을을 지나게 되었다. 다시 태완 방송은 계속되었다. 봉화 산골엔 논밭이 다 주먹만하였다. 그러니 빈곤은 그들의 숙명이었다. 김태완 선생의 의식 저 밑엔 숙명처럼 물려받은 빈곤이 깔려 있었다.
우리는 지금 ‘닭실마을’을 찾아가는 중이다. 닭실마을은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손꼽은 조선 4대 길지의 한 곳이었다. 알을 품은 암탉과 날개짓하는 수탉이 포개지는 형국이어 ‘금계포란’이라 한다. 닭실마을은 한자어로 바꾸면 유곡리(酉谷里)이다.
그런데 김태완 선생은 우리를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였다. 냇가를 따라 골짜기 깊은 곳으로 걸었다. 만일 복숭아꽃이 이 냇물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면, 이 길은 영락없이 무릉도원으로 가는 길이었을 것이다. 가다보니 붉은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나왔다. 청하동천(靑霞洞天) 네 글자 뱀처럼 휘감으며 새겨 있었다. 동천(洞天)은 신선이 사는 곳이렷다. 청하(靑霞), 푸른 안개는 뭘까?
이윽고 별천지가 나왔다. 석천정사, 권벌의 아들 권동보가 지은 냇가 바위 앞에 올린 누정이었다. 나는 그만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이런 풍광은 좀체 만나기 힘든 승지(勝地)였다. 현주 대원이 부지런히 본인의 소임을 다했다.
냇물을 건너니 솔숲이 우리는 맞이하였다. 아름드리 소나무 가지가 휘어져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마침내 저 멀리 닭실마을의 전경이 확 들어왔다. 가을 들판엔 황금빛 벼가 오후의 햇살에 불타고 있었다. 들판과 야산 사이엔 고옥들이 한가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본디 이곳은 속세의 번뇌를 끊어버린 곳이었다. 왜 이곳이 4대 길지인가, 그 까닭을 우리는 몸으로 느꼈다. 나는 한옥의 담벼락에서 포즈를 잡자고 제안했다. 볼만한 그림이 나올 것이다.
이곳엔 청암고택이 있었다. 기묘사화 때 중종에게 직언을 하고, 파직당한 권벌이 숨어산 곳이다. 김태완 선생은 권벌의 종손 권용철씨에게 미리 연락을 취했단다. 권용철씨는 우리를 맞이하여 주었고 대문을 열어주었다. 특별한 대접을 받는 것은 이성적으로는 피해야할 일이지만 감성적으로는 포근하니 좋다. 대문을 들어서니 세칸 짜리 집이 서 있는데, 이곳이 충재(忠齋)이다. 충재 맞은편에 연못을 파고 정자를 세웠으니 이 정자가 청암정(淸巖亭)이다.
청암정으로 건너가는 석재 돌단은 비좁았다. 대대로 선비들은 이 다리를 건너 정자 위에 올라 선비 권벌의 절개와 의리를 회고하면서 마음을 치유했다고 한다.
종손의 음성은 고요하였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조상의 내력을 전해주었다. 봉화에서 한양 가는 길이 모두 권씨 땅이었단다. 그런데 권벌이 그러했듯이 그들의 조상들은 대대로 재야의 선비로 살았다. 노론이 나라를 망쳤으나, 남인의 후예들은 또 항일독립투쟁의 앞장을 섰다. 그 많던 재산이 일제 시대에 들어와 다 없어졌다. 집도 허물어지고, 휑한 터만 남았단다. 독립 운동가들이 죄다 사회주의자였는데, 평등하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게 뭐가 잘못인지, 아직도 선조들은 ‘빨갱이’의 죄목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단다.
나는 오래 전부터 선비의 자손을 만나보고 싶었다. 그 선비의 종손이 내 앞에 서 있었다. 권용철씨는 권벌과 퇴계의 관계에 대한 일화를 들려주었다. 자부심이 묻어나는 설명이었다. 퇴계가 회재 이언적에 대해선 선생이라 부르면서도, 권벌에 대해선 선생이라 부르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권벌과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이란다. 퇴계의 두 번째 부인도 권질의 딸이자, 권벌과 가까운 일가였단다.
권벌은 주자의 <근사록>을 애독하였고, 중종에게 <근사록>을 가르쳤다. 미수 허목의 단정한 글씨가 현판에 걸려 있었다. 송시열이 노론의 영수였다면 미수 허목은 남인의 영수였다. 따라서 청암정 들보에 허목의 글씨가 걸려 있는 것을 노론의 인사들은 반가워하지 않았겠으나, 굳이 허목의 글씨를 권씨 조상들이 고집한 것은 ‘이곳은 남인의 거처’임을 당당하게 선포하는 뜻을 품고 있었단다. 권용철에게 남인은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선비를 의미하고 있었다. 권용철은 선조의 꿋꿋한 기상을 매우 자부하고 있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소망하였던 꿈을 마침내 이루었다.
늘 부지런한 서정휴 대원이 어느 사이, 석천정사 입구에 새워둔 차를 청암정 앞으로 이동하였다. 돌아가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었다. 해는 지고 있었다. 흑석사에서 돌부처를 보았다. 보물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동네 아이들이 올라가 놀던 버려진 석상에 지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차는 축서사(鷲棲寺)로 향하였다. ‘鷲’은 ‘취’로 읽는 것으로 나는 알고 있었다. 김태완 선생에게 물으니 ‘독수리 축’으로도 읽는다고 했다. 해는 서산에 넘어갔고, 붉은 여운만 남기고 있었다. 축서사에 온 것은 해질녘 저 산맥의 노을을 구경하는 것이란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나는 차 밖을 나가지 않기로 하였다.
이제 또 반가운 시간이다. 저녁을 먹으러 우리는 봉화읍내로 되돌아갔다.
능이버섯전골을 12인분 시켰다. 그때 이견을 제시한 이가 있었다. 능이탕은 9인분 시키고 만두를 3인분 시켜 먹자는 이견이었다. 경제학적으로 풀이하면 한계효용의 극대화를 위한 합리적인 안이었다. 역시 똑똑한 정수연 대원의 견해였다. 동일한 것을 계속 먹는 것보다 여러 가지를 먹는 것이 한계효용을 높이는 것임을 정수연 대원은 직감하였던 것이다.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었다. 적주가 있고 벗들이 있고 가효(佳酵)가 있으니 이런 파라다이스가 어디에 있겠는가 홀로 생각하며 술을 마셨다. “인생은 하루다”.
숙소는 영주 읍내 코리아나 모텔이었다. 부석사 입구에 있는 허름한 여관이었다. 코를 심하게 고는 용범 대원은 별도의 방을 구했다. 5인의 남성 대원들이 한 방을 사용했다. 문어를 잡으러 나간 김태완 선생이 이윽고 돌아왔다. 손엔 문어만이 아니라 송이버섯까지 있었다. 문어는 구렁이 같았는데, 수고한 김태완 선생을 위해 말은 하지 않고 웃기만 하였다. 비례물언이라. 이 문어를 먹어 보아야 봉화를 안다는 심정에서였는지 문어에 대한 김태완 선생의 태도는 사뭇 결사적이었다. 봉화의 마음을 알려주고 싶은 진심이 풋풋하게 전해져 왔다. 이 시대에 만나기 힘든 은자임에 틀림없다.
말로만 들어오던 송이도 보았다. 광주에서 삽결살에 곁들여 먹던 ‘그 송이’는 가짜 송이였다. 진짜 송이는 먼저 껍질을 벗겨내고, 나오는 순백의 속살을 결대로 찢어내는 것이었다. 몹시 부드러운 솜씨를 요구하였다. 예전에 내가 서울 손님들을 위해 참고막을 까주었듯이, 김태완 선생은 문어를 썰고, 송이를 벗겨주었다.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다.
이 밤이 두 번째 밤인데, 또 마지막 밤이니 우리에겐 일촌광음이 아까운 소중한 밤이었다. 김태완 선생이 김용범 대원과 동갑이라며 말을 주고받았다. 김태완 선생의 축음기도 한번 틀면 멈추지 않는 축음기인데, 김용범 대원의 축음기도 그치지 않는 축음기이다. 나는, 가만히 두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옛 노래를 듣는 감상하는 것으로 족하였다. 끝없이 터져 나오는 김태완 선생의 흘러간 옛노래, 언제 저 많은 노랫말을 외웠으며, 어찌하여 아직도 생생하게 다 기억하는가? 나는 내친김에 한국의 대중가요를 시경을 비롯한 한시에 빗대어 풀이를 해주는 책을 쓰면 좋겠다고 귀뜸하였다. 사실이지 식자들은 대중가요를 저급한 통속 음악이라 하대하지만, 내가 아는 대중가요의 가사는 한편 한편이 모두 훌륭한 시이다.
어제처럼 남일도 가고, 정휴도 갔다. 용범과 현주가 남아 마지막 밤의 끝을 함께 했다.
둘째 아침도 두런거리는 소란과 함께 왔다. 아홉시에 부석사에 오를 예정이니 여덟시까지 식사를 마쳐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일어나 밖에 나갔다.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식당에 들어가는데 뻘쭘하니 나만 밖에 서 있을 수 없었다. 쥔 아줌마는 혼자 우리의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된장국도 나오고 고등어도 나오고 달걀후라이까지 나오니 집밥에 다름없었다. 선지국까지 시켜놓으니 볼만하였다. 나는 어제 챙긴 죽암고택 리플렛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사진이 훌륭하여 책갈피로 사용하면 좋은데, 설명하는 것이 구차하여 그냥 나누어주었다.
역시 허경도가 먼저 와 우리를 맞이하였다. 부석사는 오르기가 좀 힘든 절이다. 하지만 올라오면 장관이 펼쳐져 있어 우리의 기운을 장쾌하게 한다. 허경도가 무량수전의 건축적 특징을 다 설명한 후, 무량수전 앞뜰의 석등을 설명하고 있었다. 비바람에 떨어져나가는 석등을 그대로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박물관에 존치할 것인지 논란이 있는데, 부석사의 스님들은 박물관에 주는 것을 반대한단다.
지나가는 분이 물었다. “대웅전의 부처가 왜 옆으로 앉아 있는가요?” 바로 허경도는 풀이하였다. “아미타불은 미래불이어서 동쪽 해뜨는 곳을 바라보는 위치에 존치합니다.” 나도 새롭게 배웠다. 위로 올라가 삼층석탑에 한참 설명하는데, 내가 물었다. “무엇을 삼층석탑이라 하고 무엇을 오층석탑하는가?” 전문가의 입장에선 한심스런 질문이었을 게다. 하지만 모르면 물어보야지. “지붕이 있는 몸체를 기준으로 삼층 석탑과 오층석탑을 나누어 부릅니다.” 또 배웠다. 나는 물었다. “숭례문을 국보 1호로 할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이나 훈민정음 해제를 국보 1호로 해야 하지 않을까요?” 허경도는 답했다. 국보의 번호는 아무 의미가 없는 기호입니다.“ 허, 이 무지여!
허경도는 조사당 앞에서 계속 해설을 하였다. “조사전 뒤 숲을 20미터의 폭으로 나무를 제거한 것은 잘 한 일입니다. 여름이면 무성한 수풀에 쌓여 있으면 습기에 약한 목조는 쉽게 부후화합니다. 노후한 문화재를 수리하다 보면 처치하기 곤란한 낡은 목재들이 나오는데, 인부들은 그냥 장작으로 패서 불태웁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의 문화재 관리의 실정입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허경도의 안내에 의해 무량수전의 실내에 들어가 보았다. 허경도는 들보와 서까래를 보라면서, “이렇게 목조 건축물의 상부를 은폐하지 않고 그대로 노출한 것은 고려 건축의 자부심입니다.” 나는 여차로 물어 보았다. “경도는 무량수전을 복재할 수 있는가?” 좋은 질문이었나 보다. “문화재 관리사 자격 시험을 통과하려면 무량수전을 비롯한 중요한 사찰 건축 20여개의 도면을 수치까지 머리에 집어넣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건축 양식의 특성에 대해 에이포 4-5쪽을 작성해야 합니다.” 내가 몰랐던 허경도의 진면목을 뒤늦게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금성단에 갔다. 세종대왕의 여섯 번째 아들이 금성군이었다. 단종의 복위 운동을 펼치다 세조에게 적발되어 이곳 영주에 위리안치되어 있다가 죽었다. 금성군은 이후 숙종 때 복위되는데, 이곳에 그를 위한 사당이 건립되었다. 이 사당을 해체, 수리한 이가 허경도였다. 집의 지붕에서 무려 꿀 여섯통을 채취할 수 있었단다. 위트와 함께 허경도의 실력이 서서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소수서원과 금성단은 지근 거리였다. 금방 바로 소수서원 입구에 왔다. 입구를 지나면 소나무 숲이 울창하였는데, 여기저기에 토막난 소나무들이 즐비하였다. 이번 태풍으로 휘어져있던 소나무들이 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졌다고 한다.
우리는 경렴정(景濂亭) 앞에 섰다. 허경도는 지붕의 구조에 대해, 팔작지붕과 맞배지붕과 우진각 지붕에 대해 설명을 하였다. 나는 뭐가 뭔지 몰라 멍하였다. 다만 이 경렴정의 복구 공사를 허경도 자신이 맡아 했다는 대목에선 귀가 번득였다. 그때 드라마 추노를 이곳에서 촬영하고 있었단다. 감독이 경렴정 보수공사 현장이 촬영되지 않도록 해달라고 부당한 요구를 해오기에 일언지하 거절하였단다.
학구재와 지락재와 직방재를 데리고 다니면서 허경도는 주춧돌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였다. 둥그런 원형의 주춧돌은 이전에 있었던 절의 주춧돌을 재활용한 것임을 힘주어 강조하였다. 영정각에 갔는데 미수 허목의 초상이 있었다. 청암정엔 허목의 글씨가 있었고, 영정각엔 허목의 초상이 걸려 있었다.
서서히 ‘봉화 천리길’ 여정이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허경도는 지방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위해 풍기 인삼과 인견을 사주는 것도 좋다며 우리를 가게로 안내하였다. 이어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다. 순 메밀로 만든 면발이 부드럽기는 하였으나, 나의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김용범 대원이 성혈사의 민화가 있는 창살을 보러가자고 제안하였다. 허경도는 말했다. “영허사 문살은 한번 볼만한 가치가 있지요. 가장 아름다운 문살입니다.” 영허사 문살 관광은 우리에게 계획에 없던 덤이었다.
남도에는 내소사 꽃창살이 아름답기로 이름났는데 이곳 성혈사의 민화가 베인 꽃살문도 곱고 독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문짝 하나하나에 새긴 조각 솜씨가 정교하였다. 소담스런 연꽃과 연잎 아래로 물고기가 보이고, 고개를 숙인 한 마리 학이 보이는가 싶으면 연잎 위에 개구리가 앙증맞게 올라서 있다. 연잎 아래로 게가 새겨있고 연잎의 가지를 쥔 동자는 귀엽기 그지없다. 마치 한 폭의 그림이 꽃살문을 수놓고 있는데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니 오른쪽 문에 모란이 한 아름 조각되어 탐스런 꽃으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김정희 대원은 부지런히 문살의 문양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허경도는 문살의 문양에 대해 떡 주무르듯, 청산유수로 풀이하였다. 영허사 문살 건축물도 허경도가 해체 복구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를 나는 마지막 헤어지면서 들었다. 머시여?
나는 허경도에게 “작업자의 이름을 남겨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허경도는 해체하면서 모든 부품들의 사진을 찍었고, 복구 작업을 끝낸 후, 보고서를 작성하였다고 답했다. 보고서 예산이 6천만 원이었다한다. 머시여? 도산서원과 금성단, 소수서원의 경렴정과 영허사의 사당, 이 대단한 문화재의 보수를 떠맡은 허경도의 진면목을 나는 마지막 헤어지면서 알게 되었다.
과유불급이라. 너무 겸손한 것은 너무 과시하는 것만큼 좋지 않다는 것을 허경도는 가르쳐주었다. 마지막 귀향길의 안전운행이 박남일 회장과 서정휴 대원, 조세경 대원 그들의 두 어깨에 걸려 있었다.
2018년 10월 11일 오전 5시에서 오후 2시까지 작성함.
황 광우.
첫댓글 3일간의 일정이 파노라마처럼 자나갑니다...
해찰하다 듣지 못한 부분을 알게 되어 잃어버린
물건 찾은 기분입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느낄수 있는 생생한 기행문 이네요..^^
백독이 불여일견이지라우......
백견이 불여일독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붙이는 찬사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