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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스크랩 그대는 진실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는가?
정영기(초당) 추천 0 조회 562 18.10.30 21: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그대는 진실한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는가?

                                         


  정영기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진정한 친구에 대한 고사를 들자면 관포지교(管鮑之交)를 흔히 말한다. 과연 그대는 관포지교와 같은 참다운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는가? 
 관중(管仲)과 포숙(鮑叔)은 춘추시대 제(齊)나라 사람이다. 젊었을 때부터 둘도 없는 친구였다. 관중이 가난했을 때 포숙과 함께 장사를 했다. 관중은 언제나 포숙보다 이득을 많이 취했으나 포숙은 그가 가난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관중은 몇 번 벼슬에 나갔으나 그때마다 쫓겨났다. 벼슬을 하고 있는 포숙은 관중을 천거하여 제나라 재상까지 만들었다. 포숙은 늘 관중의 아랫자리에 들어가서 일을 했다. 관중이 말하기를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진정으로 알아준 사람은 포숙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 오히려 포숙이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을 더 칭찬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기를 “이로운 친구는 꺼리지 않고, 언행에 거짓이 없으며, 지식을 앞세우지 않는 벗이니라. 해로운 친구는 허식이 많고, 속이 비었으며, 외모치레만 하고, 마음이 컴컴하며, 말이 많은 자이니라.”  
 성경에 나오는 경탄할 만한 우정은 다윗과 요나단이다.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아들 요나단에게 명령하였으나 요나단은 다윗을 살려서 멀리 도망가게 하였다. 요나단은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다윗을 왕으로 만들었다. 참다운 우정이 아닐 수 없다.


 나이 팔십 중반이 되면서부터 친구가 몹시 그립고 옛날이 많이 생각난다. 나의 친구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어 보면서 진정한 친구가 누구일까 생각해 보았다.


 첫째, 유년시절의 친구는 이병렬(李炳烈)이다
 이병렬은 1936년생이다. 같은 마을에서 나보다 하루 전날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가 하동정씨라며 형이라 불러주기를 원했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까지 가장 절친한 죽마고우였다. 매일 그의 집에서 함께 먹으며 놀았다. 그의 부모님도 나를 아들처럼 사랑하여 주셨다.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서로 다른 지역에서 다녔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소원(疏遠)하게 되었다. 2018년 9월 6일 팔십 년 만에 내가 보고 싶다며 전화가 왔다. 공덕역 메트로디오빌에 있는 그의 사무실까지 찾아가는 동안 많은 생각에 잠겼다. 우리는 절친한 친구라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만났는가?  오늘 만남이 부끄럽게도 직장인이 된 후 일곱 번째가 아닌가.



구의정수장 이병렬소장(右1) 통수버튼을 누르다


 친구는 몹시 반가워하며 점심식사도 잊은 채 내가 모르는 지나간 일들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서울시청에 취직을 하였더니 전남대 공대를 졸업했다고 서울의 하수도 시설을 연구하여 설계토록 하였단다. 영어로 된 자료들과 씨름하느라 이가 모두 빠지고 몸은 쇠약해졌으나 현대식 하수처리 시설을 최초로 완공시켰을 때의 보람! 표창장도 받고 승진도 하고 미국연수까지 다녀왔단다. 구의정수장 건설을 마지막으로 하고 수원지소장직에서 물러나 지금의 三說엔지니어링(주)를 경영하고 있다 한다. 몹시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팔십 중반 나이에 매일 회사에 출근하여 일을 하고 있는 친구는 아마 이병렬 뿐일 것이다.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도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내가 선물로 가지고 간 1937년과 1942년 유년시절 사진 2매를 받아 들고 뛸 듯이 기뻐하였다. 사진 속의 80년 전 가족과 친척의 얼굴들을 들여다보면서 가족사를 들려주었다.



前列 左1 나와 아버지. 左4 누나와 할아버지. 左5 정순금 아버지
       前列 右2 이동희 어른과 이문규. 右4 이병렬 아버지


 큰 아버지 이동희(李東熙) 어른은 일제강점기 때 이 사진에 안고 있는 아들 이문규와 셋째 아들과 딸 하나를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이문규는  행정.사법고시 양과를 합격하여 32세 때 영광군수에 임명되고 부장판사까지 하였는데 6․25사변 때 납북을 당했다. 셋째 아들은 심계원 고위간부가 되고, 딸은 여성경찰관으로 목포경찰서장까지 하였다. 친구의 집안은 신학문을 공부시켜서 모두 성공시켰다. 무남독녀인 친구의 딸과 집안 조카들 모두 미국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고 좋은 직장에 다닌다고 자랑을 하였다.     
 안타까운 것은 사진 속의 인물들이 대부분 유명을 달리하고 있었다. 특히 이동희 어른 장손녀 이숙자가 죽었다는 말에 씁씁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비밀을 친구에게 털어 놓았다.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모르는 내 또래의 여인이 불쑥 나를 찾아왔다. 강남역 부근 고급일식집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동희 어른의 장손녀 이숙자(이도춘)라고 하였다. 여학교를 졸업하고 할아버지집에서 살고 있을 때 할아버지의 권유로 나를 흠모하게 되었다고 고백을 하였다.



대학시절 이동희 어른이 나에게 써주신 친필     


 할아버지는 손자들에게 ‘영기를 닮아라“ 하시면서 공부 열심히 할 것을 강조하셨고, 손녀사위를 삼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한다. 그러나 과수원집과 친하다는 것을 알고 단념을 하면서도 몰래 숨어서 바라보기만 하였다고 했다. 순천고등학교 교사와 결혼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으며, 라이온즈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하였다. 심야고속버스를 타고 헤어지면서 순천에 꼭 한 번 찾아와 달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도춘이 죽었다니 몹시 씁쓸했다.


 둘째, 초등학교 시절의 친구는 박해룡(朴海龍)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와 박해룡


 박해룡은 나보다 한 살 아래다. 몸은 작고 약했으나 공부는 언제나 전교에서 일 이등을 다투었다. 반장, 부반장도 번갈아 하면서 서로 경쟁을 하였다.
 나는 아버지를 세 살 때 여의어서 가세가 기울었으나, 친구는 양친부모가 계시고 부자였다(아버지가 면장). 어머니는 나를 극진히 사랑하여 주셨다. 아들과 “친하게 지내라” 하시면서 학교를 다녀오면 매일 진수성찬으로 밥상을 차려주셨다. 나는 많은 어머니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자랐다. 그 중에서 누가 제일이냐 물으면 단연코 박해룡의 어머니다.
 친구의 어머니는 현모양처셨다. 그 사람을 평가하려면 결혼식과 장례식을 보고 말하라 했다. 5남 1녀를 잘 기르고 가르쳐서 성공시켰다.(장남 박해룡은 제일은행 전무이사, 5남 박해선은 KBS 부사장)  다복하게 오래 살으시다 운명하셨다는 전화를 받고 삼성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더니 조문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어머니의 사랑을 못 잊어 발인하는 날도 찾아가 리무진 영구차 앞에서 “어머니! 평안하게 잘 가십시오”하고 마지막 인사를 올렸다.     



 대학시절 나와 박해룡


 그 후 친구는 자주 나를 찾아왔다. 중학교 때 헤어진 후 별로 친하게 지내거나 만나지 않았는데 마음이 변했나보다. 서울대학 상대를 졸업하고 제일은행에 입사하여 퇴직할 때까지 근무하였으니 살아오는 길이 서로 달랐다. 서울에서 제일 값비싼 도곡동 타워펠리스에서 살면서 형제자매 모두 교회에 열심히 다닌다 하였다. 아들만 3형제 두었는데 장남은 강남에서 정형외과외원을 하고 아들 둘은 미국에서 잘 살고 있다고 자랑을 하였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정다운 친구가 되었다. 서울의 명소를 찾아 산책도 하고 유명한 맛집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고 즐겁게 지냈다. 그런데 슬픈 비보가 날아왔다. 친구가 암으로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떠나셨던 삼성병원 장례식장으로 달려갔다. 조문객이 어머니 때 보다 많지 않았다. 친구에게 줄 것은 없고 명색이 시인이라 만장 대신 시 한 수를 지어 영전 앞에서 음독(音讀)하였다. 그리고 시를 쓴 종이를 접어 관속에 넣어 달라 부탁하였다. 공부는 나보다 잘 하였으나 몸이 약해서 겨우 평균수명(한국인 평균수명 81세)을 채우고 먼저 하늘나라로 가버린 친구가 못내 아쉽다.   



대학시절 친구들(後列 좌1 이종구 左2 나, 左3 박해룡, 前列 中央 김복중)


     與朴兄海龍       박형 해룡에게 주다


   惠承書翰見華名   혜승서한에 빛나는 이름을 보니
   已近桑柳日益榮   이미 늙었어도 날로 더욱 영화롭도다
   廣施慧悲芳月曙   자비를 널리 펴는 것은 아름다운 새벽달이오
   互歌極樂彩雲生   천당을 노래하는 것도 채색 구름이 나온다
   起然那得全富貴   초연히 어찌 부귀만을 얻을고
   成者皆由盡泰平   성공자는 다 태평을 다하는 데서 연유한다
   吉地先山餘蔭厚   길지선산은 남은 음덕이 후하고
   固宜壽福降斯兄   진실로 수복이 형에게 내린것은 참으로 마땅하다 


 셋째, 중학교 친구는 최일순(崔日淳)이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後列 左3 나. 左4 최일순)


 최일순과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냈다.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여 무엇을 하던지 짝궁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사변이 일어나고 곧 수복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연극에 소질이 많은지 반공극을 만들어 학예회 때 발표를 하였다. 보성군수는 너무나 잘 된 반공극이라며 보성극장에서까지 공연을 하게 하였다.
 나는 주인공 ‘할아버지’ 역이었고 최일순은 내 둘째 아들 공무원 역이었다. 첫째 아들은 직업군인, 딸은 말괄량이었다. “인생은 연극이다.”와 같이 우리들 인생도 연극처럼 되고 말았다. 나는 선비가 되었고, 첫째 아들 문금성은 직업군인이 되었다. 둘째 아들 최일순은 공무원으로 정년퇴직을 하고, 딸은 말괄량이 삶을 살다가 일찍 자살을 하였다.



1950년 보성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기념사진
    (後列 좌1 문금성. 中央 나. 二列 左2 최일순. 前列 中央 말괄량이)

 
 최일순과 나는 중학시절 더욱 더 친한 사이가 되었다. 그의 누나는 보성읍에서 제일가는 음식점을 경영하고, 아이스케키 만드는 공장까지 겸하였다. 그래서 맛있는 것을 많이 얻어먹을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고향을 떠난 후 친구와의 우정은 차츰 멀어졌다.
 친구는 전남대학교에서 배구선수가 되었다. 졸업을 하고 고향 지킴이가 되었다. 참으로 장한 친구가 아닐 수 없다. 공무원으로 임용되어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보성군청에서만 봉사하였다. 모처럼 고향을 찾아가면 친구가 반갑게 맞아주었다.
 1963년 대학 3학년을 마치고 가정형편상 휴학을 하였다. 돈 한 푼도 없이 무작정 지리산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 친구는 누나에게 7만원을 빌려서 나에게 주었다.
 그 후 빨리 돈을 갚아야지 하면서도 오랜 세월이 지나갔다. 항상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었으나 미안한 마음 때문에 고향을 방문해도 최일순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친구는 내가 보성에 왔다는 소식만 들으면 근무 중에도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 돈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니 잊어버리고 친구의 우정을 잊지 말라 하였다.
 2003년 『해공 신익희』 전기문을 탈고하였을 때 원고료 중에서 40년간 환율을 계산하여 빌린 돈을 송금하였다. 그랬더니 친구는 왜 돈을 보냈느냐면서 돈을 받지 않겠다 하였다. 돈을 빌려준 누나는 벌써 저승으로 갔다는 말을 하였다. 미안한 마음이 솟구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최일순은 정년퇴직을 하고 광주에서 산다는 전화가 왔다. 자주 카톡으로 좋은 글과 그림을 나에게 보내주었다. 나도 즐거운 마음으로 답신을 보내고 내 시와 저서를 보내주었다. 그런데 갑자기 소식이 끊어졌다. 아무리 편지와 책을 보내주어도 감감 무소식이다.
 2018년 9월 5일 친구가 몸이 아파서 요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었다. 장문의 편지를 써서 친구의 집으로 등기우편을 발송하였다. 친구에게 편지를 전해 주고 요양원 주소를 알려 달라 부탁을 하였다.


  넷째, 고등학교 친구는 김복중(金卜中)과 이화형(李華珩)이다.



김복중과 차정남과 나


 고등학교 시절 김복중과 차정남과 나는 광주에서 함께 자취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들이라 주일날이면 억지로 나를 데리고 교회에 나갔다. 내가 기독교 신자가 된 것은 김복중 때문이다.
 차정남은 전남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여 영문학 교수가 되었다. 군산대학에서 여러 요직을 맡아 학교를 발전시킨 후 정년퇴직을 하였다. 퇴직 후 오랜만에 내 집으로 찾아와서 유창한 영어로 엘리엇과 위즈위스 시를 낭송하여 감탄을 했다.    .
 김복중은 한양대 공대를 졸업하고 발명에만 몰두하여 발명왕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의 우정을 잊지 못 해 김복중은 자주 나를 찾아왔다. 키가 2m 가까운 장신이어서 나와 나란히 거리를 활보하면 사람들은 “꺼꾸리와 장다리”라고 놀래댔다. 그러나 나는 친구와 나란히 걷는 시간이 항상 즐거웠다. 지금은 친구가 먼저 하늘나라로 올라가 버렸으니 친구가 몹시 그립다.



 이화형과 나


 이화형(李華珩)은 특별한 친구다. 나의 동창생들은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이화형을 잊어버려도, 정영기 너는 이화형을 잊어서는 안 돼.” 이 말 때문에 쓰고 싶지 않는 이야기를 책으로 남기면서 눈물을 금치 못한다.


 이화형은 할아버지 때부터 예수를 믿는 기독교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같은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우정이 깊어졌다. 서로 다른 대학을 다니면서부터 만날 수 없었다.
 등록금이 없어서 휴학을 하고 자진입대를 신청한다는 내 말을 듣고, 이화형은 나와 함께 군대를 가겠다 하였다. 잘 다니고 있는 전남대 물리학과를 휴학계도 내지 않는 채 급히 나를 따라 나섰다. 훈련소에 입소하는 첫날 지능검사와 적성검사를 하였는데 우리는 함께 ‘부관병과’를 받아 기뻐하였다. 그러나 훈련을 마치고 부관학교 입교할 때 친구는 탈락이 되었다. 헤어짐이 아쉬워 슬픈 눈물을 펑펑 쏟았다.
 나는 1군사령부에서 군복무를 하고 이화형은 예하부대인 3사단 인사처에서 복무를 하였다. 지휘관선이나 작전선으로 이화형에게 전화를 자주 하였다. 그때마다 기뻐하며 매일 전화해 주기를 원했다. 그 시절의 통신 수단은 아주 열악했다. 무선으로 전화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하는 시기였다.
 제대를 한 후 부모님을 설득하여 대가족을 이끌고 내가 살고 있는 신림동으로 이사를 왔다. 내 곁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다. 친구는 공무원이 되어 관악구청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대중가요를 좋아하였는데, 배호 노래를 수준 높게 잘 불렀다.
 내가 1965년 교사가 되어 강동구로 이사를 하였다. 강동구와 관악구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으나 바빠서 자주 만날 수 없었다. 떨어져 산지 십 수 년이 흘렀다. 조간신문과 TV에서 끔찍한 살인사건 기사가 실렸다. 이화형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술과 담배도 하지 않은 착하고 선량한 이화형이 사람을 죽이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너무나 충격이 컸다. 급히 달려가 만나보려는데 집에서 한사코 말렸다.
 친구는 사형언도를 받았다.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잠시도 친구를 잊지 못해 서실에 나오는 어느 교도관에게 친구가 수감되어 있는 곳이 어디인가 알아봐 달라 하였다. 진주교도소에 있다는 것을 알고
오랜만에 편지를 보냈다. 친구는 반가와 하며 속마음을 세세하게 적어 보냈다. 두어번 편지가 오갔는데 소식이 뚝 끊겼다. 혹시 내가 쓴 글에서 친구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았는가? 내가 보내준 헌책과 세면도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사형집행을 하지 않는데 친구의 몸에 무슨 이상이 생겼을까? 그립구나 친구여!  



연세대학교 1학년 시절(前列 左3 유준웅. 後列 左3 정영기


 다섯째, 대학친구는 유준웅(劉俊雄이다. 한국전쟁 때 어머니가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데리고 사리원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오셨다.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아들 하나를 대학 공부시켰다. 대학을 졸업하자 아들의 희망대로 성안에 있는 집을 팔아서 서울의 변두리인 천호동 산10번지 적산땅을 구입하였다. 유준웅은 허허벌판 언덕에 ‘천호고등공민학교’를 설립하였다. 현재는 성덕고등학교임)
 1965년 유준웅을 만났더니 반가와 하면서 둘이 함께 학교를 발전시켜 보자고 제안하였다. 친구는 주간을 나는 야간을 맡아 운영하기로 하였다. 유준웅은 교장이 되고 나는 처음부터 교감 역할을 하였다. 내 임의대로 교사를 채용할 수 있었고, 교사 봉급도 임의대로 책정하여 지불하도록 하였으니 진정한 친구가 아니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디.
 학교 주변에는 띄엄띄엄 농사를 짓는 빈농들과 생활용품 토기를 만들어 팔아서 생활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인근에 중학교가 없기 때문인지 교육열 때문인지 학생들이 많이 모여 들었다.



유준웅 교장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고 2차산업으로 전환하는 시기가 되자 학교 주변에 공장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지방에서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온 학생들이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를 계속하려는 청소년이 많아졌다. 그들을 위해 고등학교 과정인 전수학교를 설립할 필요가 있었다. 현대식 5층짜리 학교 건물을 신축하여 천호상업전수학교를 설립하였다. 나는 학교를 찾아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보다 전국 어디든지 찾아가서 학생들을 모집하는 일에 열중하였다. 나와 연고가 있는 지방. 경남 산청과 삼천포, 전남 광주와 보성, 충북 보은과 진천, 충남 공주와 부여의 학생들을 공장이나 회사에 취직을 시켜주고 천호상업전수학교에서 공부를 시켜준다는 소문이 퍼지자 신문이나 TV에서 취재를 하였다. KBS에서는 ‘고마우신 선생님’ 프로를 만들어 방영을 하고 ‘고마우신 선생님상’까지 주었다. 그 때 친구가 교장이니 마땅히 상을 받아야 하는데  친구는 내가 받아야 한다고 양보를 하였다.
 1972년. 친구는 이진환 교장에게 학교를 넘기고 가족 모두 브라질로 이민을 갔다. 함께 이민을 가자고 제안하였으나 나는 학교에 남기로 하였다. 학교를 인수한 이진환 교장은 자신의 승용차를 빌려주면서 신입생을 500명만 모집해 달라 요청하였다. 일반인은 승용차가 없던 시절에 지방 어느 중학교든지 찾아가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학생들을 1,000명이나 모집하였다. 내 노력도 있었겠지만 당시 전국에서 유일하게 고등학교 학력인정이 있는 전수학교는 서울의 천호상업전수학교 뿐이었다.
 1970년대 초는 나의 전성시대였다. 학생들은 나를 ‘히틀러 선생’이라고 부르고, 선생님들은 ‘나폴레옹’이라 불렀다. 나에게 은혜를 입은 많은 학생들은 ‘페스탈로치 선생님!“이라고 존경을 하였다.
 1974년. 천호상업전수학교를 위례상업고등학교로 개명하였다. 전국에서 학년 당 주간 12학급, 야간 12학급 학생 수가 제일 많은 학교가 되었다. 공부는 못해도 운동을 잘 하여 태권도, 레슬링, 복싱부에는 국가대표선수가 많이 있었고 야구부는 전국 고등학교 경기에서 항상 중위권을 다투었다. 운동선수 뿐 아니라  싸움을 잘 하는 학생들이 많아서 타교생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도 무서워하였다. 채찍을 들고 불량학생들이나 밤늦게 귀가하는 학생들을 괴롭히는 깡패들을 때리고 다스리는 일은 내가 맡아 하였다. 그들은 나를 무서워하고 내 말은 듣기 때문이다.
 1984년. 마지막 박사과정 공부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정든 학교에 사직서를 제출하였다. 학교에서는 그동안의 공로를 인정하여 미국 코넽커트주에 있는 이름 없는 대학에 입학수속을 마쳐 놓았다.



유준웅 목사

 
 그 무렵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는 친구 유준웅이 찾아왔다. 아무 연고도 없는 미국에 가지 말고 자기가 있는 호주로 오라 하였다. 시드니에서 9년 동안 공부를 하고 있는 임평남 박사의 도움으로, 한국의 학력과 경력을 인정받아 N.S.W.대학교 교육대학원 박사과정을 서류전형만으로 입학이 허락되었다.
 이진환 교장이 JAL항공 비즈니스석 왕복표를 사주어 편하게 시드니 공항에 도착하였더니 유준웅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친구는 쌀로 만든 과자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우리는 옛날로 다시 돌아갔다. 친구는 주간에, 나는 야간에 일을 하였다. 학비는 무료이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으나 집으로 생활비를 송금해 주어야 했다. 낮에는 공부를 하고 밤에는 잠 한숨도 자지 못하고 일을 하였다. 일요일이 되면 친구와 함께 교회에 나가서 공부만 할 수 있는 날이 오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4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참고 견딘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모든 것이 싫고 짜증이 났다. 친구 유준웅도 위로가 되지 못 했다. 비록 박사학위를 받지 못하고 중도에 귀국을 하였으나 후회는 하지 않았다. 호주에서 4년 머무르는 동안 한국의 마지막 남은 선비 송담(松潭) 이백순(李栢淳)선생님과 서신으로 한문학 문답을 하여 면무식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2018년 들어서 인터넷에 ’유준웅‘을 검색하여 보았다. 나와 헤어진 후 친구는 다시 교육사업을 하였다. Austlian Pacific callege 학장이 되었다. 지금은 기대했던 것처럼 목사가 되어 시드니 가나안교회에서 시무하고 있다. 세계한민족문화예술총연합회 회장도 맡고 있다니 축하를 해야겠다. 유준웅의 자서전 『저 하늘의 태양』도 구입해서 한 번 읽어 볼 생각이다.


 여섯째. 마지막 친구는 김옥상(金玉相)이다.



가족사진(後列 中央 군의관 김옥상)

   
 김옥상은 초등학교 때 나를 잘 따라다니던 왜소한 친구였다. 어머니가 나를 아들처럼 사랑하여 주셔서 매일 친구의 집에 가서 놀았다. 고풍스런 기와집 대청마루와 넓은 정원에서 동생들과 함께 뛰어 놀던 생각이 난다. 그 때 꽃밭을 만들고 돌에 ‘나의 정원’ 이라고 새겨 놓았다. 친구는 목포고등학교로 진학하여 공부만 하였다. 지금은 키도 크고 나보다 더 성공을 하였다.
 
 1993년. 글을 쓰기 위해 2박 3일간 속초 현대콘도에 여장을 풀었다. 심심해서 40십년도 더 지난 옛 친구 김옥상에게 전화를 하였다.
 “김옥상! 나 정영기야. 속초에 와 있으니 현대콘도로 와. 오랜만에 한 번 만나보자‘”
 김옥상은 반가와 하지 않았다. 만나고 싶으면 강릉으로 오라 하였다. 강릉에서 명성을 떨치는 외과의사가 되었고 대한의사협회 강원도지부장으로서 강릉의 유지가 되었다.
 1995년. 문촌기행 위해 경포에 있는 효산콘도에 여장을 풀었다. 김옥상에게 전화를 하였더니 콘도로 찾아왔다. 키가 나만큼 크게 자랐으며 눈빛이 보통이 아니었다. 웃지도 않고 예리한 눈으로 나와 동행한 일행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 내가 4명의 젊은 여성들을 데리고 여행하는 것이 이상했나보다. 문촌기행팀들이 술을 권해도 마시지 못한다며 사양을 하였다. 수술환자가 왔다며 1시간도 머물지 않고 병원으로 돌아가 버렸다. 훗날 고백하기를 병원에 돌아가서 서울에 있는 친구들에게 정영기를 조회(照會)해 보았다고 하였다. 수많은 동창생들이나 고향 사람들이 강원도에 여행을 오면 한 턱 얻어먹고 여비를 뜯어간다 하였다.



40년 만에 효산콘도에서 처음 만남


 밤이 되자 김옥상이 다시 콘도로 찾아왔다. 이번에는 자기가 우리 일행에게 한 턱 내겠다며 “시내로 가자” 하였다. 고급횟집 문을 닫게 하고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도미를 예술적으로 썰어놓았다. ‘두 당 각 1병씩 마셔야 한다“고 권했다. 술을 마시지 못한다던 김옥상은 효산콘도에서는 간을 보았던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자 집으로 가지 않고 나와 떨어지기 싫다며 콘도까지 따라왔다. 새벽 4시가 넘도록 옛날이야기와 자기 자랑을 하였다.

 “초등학교 때는 김옥상이가 정영기 졸병이었지만 지금은 정영기가 김옥상 졸병이다. 너 나만큼 성공하고 돈을 벌었어? 외과수술은 전국에서 김옥상이 제일이다. 강릉역 뒷산과 경포대 가는 길가의 구릉지와 대관령 밑 왕산에 있는 넓은 땅도 내 것이다.”
 계속 듣기에 거북한 저속한 말로 나를 업신여기기에 참다못해 화를 버럭 내었다.  
 “나가! 40년 만에 친구라고 만났더니 너는 나쁜 놈이야."
 김옥상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새벽에 택시도 없는데 술 취한 사람을 혼자 가라면 안 된다며 집까지 데려다 주어야 한다고 일행들이 말을 하였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기 때문에 운전을 하여 그의 병원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다시는 ‘김옥상과 상대하지 않겠다.’ 다짐을 하고 잠을 청했다. 두어 시간 정도 눈을 붙였을까. 이른 아침에 김옥상에게서 전화가 왔다.
 “기침하셨는가? 강릉에 해장국을 잘 하는 집이 있는데 해장국 먹으러 가세.”
 귀찮고 불쾌하여 “여기에도 먹을 것이 많으니 해장국을 먹고 싶으면 콘도로 오라” 하였다. 김옥상은 병원에 출근하지 않은 채 달려왔다.
 “술이 취해 실수를 했으니 용서해 주게. 어느 때라도 영동지방에 여행을 하면 나를 찾아주소. 만일 전화도 하지 않고 강릉을 지나갔다면 나를 용서해주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겠네.”



이곳 왕산에 書齋를 지어주겠다.


 1996년 6월. 승용차 2대로 10명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 미천골을 답사하였다. 1년 전에 강릉에 동행했던 팀원이 친구에게 전화해 보라 하였다. 내키지 않았으나 전화를 하였다. 환자들 돌보느라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쁠 터인데 소금강 입구에서 기다리겠다 하였다. 진고개 깊숙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놓아서 기르는 토종닭 7마리를 백숙으로 만들어 우리 일행들을 대접하여 주었다.
 식후에 대관령 밑 왕산(강릉수원지 상류)으로 데리고 갔다. 경관이 빼어나게 아름답고 1급수 물이 콸콸 흐르고 있었다. 이곳에 와서 작품을 쓰라면서 집을 짓기 전에 우선 콘테이너를 이용하라 하였다. 사실 나는 고성 통일전망대 근처 금강산콘도에 1년이면 한 두 번씩 가서 작품 정리를 하고 온다. 그 때마다 아름답고 청정한 바닷가에 별장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그 후 세 번째 만났을 때도 나를 왕산으로 데리고 갔다. 친구는 바닷가 보다 바다 가까운 산이 좋다 하였다. 노후에 왕산에 집을 지을 터이니 와서 글을 쓰라 하였다. 나의 소원인 별장도 지어주겠다 약속하였다.



알라스카 홍연어 시식


 친구의 취미는 나무 기르기와 바다낚시였다. 향나무와 주목을 많이 기르고 있었다. 바다낚시는 우리나라 연안보다 멀리 남아메리카 칠레나 북아메리카 알라스카까지 원양낚시를 다녔다. 2001년 10월에는 알라스카에 가서 홍연어를 잡아왔다며 맛을 보러 오라 하였다. 손수 회를 떠서 입에 넣어 주었다. 내가 먹어 본 연어 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친구와 일행들은 흥이 나서 백포도를 마시면서 노래를 불렀다. 나는 시를 지어 읊으면서 분위기를 한층 끌어 올렸다.


 與金友玉相兄    친구 김옥상 형에게 주다


相逢隔歲胸襟新   해가 바뀌어서 만나니 흉금이 새롭고
竹馬故朋似一身   죽마고우는 한 몸과 같아라
白酒鰱魚稱別味   백포도주와 연어 안주는 별미라 하겠고
紅顔綠髮好風神   홍안 록발은 풍신이 좋구나
業多祥瑞曾修德   가업에 상서가 많은 것은 일찍이 덕을 닦은 것이오
體有光輝善養眞   몸에 광휘가 있는 것은 참된 것을 기름이다
富貴康寧天賦與   부귀강녕을 하늘이 주었으니
願爲後世要樞人   원컨대 여생에 중요한 사람이 되시라.


 친구는 내가 영동지방으로 문촌기행을 갈 때 마다 병원 일을 제쳐 놓고 나를 따라 나섰다. 속초, 삼척, 울진을 기행할 때는 아예 1박 2일간씩 휴무를 하였다. 친구는 우리 일행을 횟집으로 데리고 가서 싫도록 회를 사주었다.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강릉에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경포 앞바다에 가서 노랑가자미를 많이 잡아왔다. 일행이 많으면 한라그룹 회장과 통일주체대의원 강원도당 대표와 셋이 새벽에 배를 빌려 나가 새꼬시를 많이도 잡아왔다. 이렇게 후한 대접을 받은 사람이 어디 또 있을까? 지금 헤아려 보니 친구가 직접 바다에 나가 노랑가자미를 잡아서 새꼬시 회를 대접해 준 것이 네 번이나 되었다.
 이 뿐 아니다. 강릉 앞바다에서 20kg도 더 넘는 대형 대구를 낚았다고 기뻐하였다. 시외버스 편으로 보냈으니 동서울터미널에 가서 찾으라 했다. 대구가 너무나 커서 집에서는 요리를 할 수 없었다. 친척과 지인들을 모두 불러 놓고 음식점에 가서 대구탕을 끓여 먹였다. 큰 솥에 한꺼번에 넣고 끓여서인지 맛이 없었다.
 그 다음 해에도 대구를 많이 낚았다며 강릉으로 오라고 불렀다. 보통 크기의 대구 7마리를 스치로폴박스에 담아 주었다. 친척과 지인들에게 한 마리씩 선물로 나누어 주고 1마리를 끓여 먹었다. 이번에는 기가 막히게 시원한 대구 맛을 느껴 보았다.
 2010년 구정을 맞이했다. 주문진 앞바다에서 참복을 많이 잡았다고  자랑을 했다. 친구는 참복 40마리를 시외버스 편으로 보낸다면서 “복 많이 받아라.”하였다. 동서울터미널에 가서 참복을 찾아와 펼쳐 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커다란 참복이 가득 들어 있었다. 식구들은 이것 먹어도 되느냐? 하면서 겁을 먹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독을 제거하는 전문가가 손질을 잘 하였으니 염려 말고 먹으라 하였다. 이번에도 친척과 친지들에게 두 마리씩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지나놓고 생각해 보니 친구에게 미안했다. “너 참복 맛을 알아?”는 말이 들려오는 듯 했다. 아무에게도 주지 말고 두고두고 맛있게 오래도록 먹을 것을. 후회를 하였다.
 김옥상은 누구보다 내 시와 저서를 좋아했다. 첫 저서 『靜思齋』 제1집을 받아보고 왜 책을 싸구려로 인쇄했느냐? 하였다. 돈이 없어서 라는 말을 듣고 “돈이 없으면 내가 만들어줄게.” 큰 소리를 쳤다.
 김옥상은 유명한 서예가도 아닌 내 붓글씨를 좋아했다. 자기 고조부와 증조부 비석 글씨를 써달라고 요청하였다. 서예에 열중하고 있는 무렵이라서 남송체 예서(隸書)로 정성껏 써 주었다.


 
고조부와 증조부 비문


 김옥상은 나를 대단한 친구로 여기고 있다. 자기 주변에 국내외적으로 저명한 인물이 많을 터인데 장남 결혼식 주례를 나에게 부탁했다. 대신 나의 제2시집 출판기념회 때는 교향악단원인 아들을 데리고 와서 관현악 4중주를 연주해 주고 축사를 해주었다.


 2018년 9월 5일 김옥상으로부터 오랜만에 전화가 왔다. 보고 싶으니 용인시 수지구 자이아파트로 오라 불렀다. 급히 차를 몰고 달려갔더니 몹시 반가워하면서도 눈물을 흘렸다.
 “남에게 피해만 주는 신세가 되었으니 빨리 죽고 싶다.” 하였다. 그동안 상처(喪妻)를 하였고, 몸이 쇠약해져서 잘 듣지도 못하고, 고관절 수술을 두 번씩이나 하였으나 걷지를 못했다.
 친구는 외로워서 술과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몇 년 전까지 내 아파트에 찾아오면 밤이 새도록 아파트가 떠나갈 듯 큰 소리로 떠들고 웃던 김옥상이가 이제는 조용히 앉아만 있었다. 나는 선물로 가지고 간 시화액자(詩畫額子)를 보여 주었다. 액자 속에는 친구를 위해 쓴 시와 두 번째 만났을 때의 사진이다. 액자를 보는 순간 얼굴에 화색이 피어나고  옛날 생각이 떠오르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詩畫額子


 친구는 마지막으로 앨범 정리를 하고 있다면서 앨범을 꺼내어 보여 주었다. 앨범 속에는 가족사진들과 각종 졸업장과 임명장 그리고 도민증을 비롯한 신분증 들이었다.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것이 있는가 물었더니 “고향에 조상들 무덤을 하나의 무덤으로 만들어 광산김씨(光山金氏) 선산에 모셔놓고 싶다.” 그리고 자신도 그곳에 묻히고 싶다 하였다.


* 附言 : 자서전을 쓰지 않겠다면서 왜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썼는냐 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변명을 하자면 2018년 9월 5일과 6일 양일간 연이어서 ‘유년시절 친구’와 ‘마지막 친구’를 만나고 보니 충격이 너무 컸다. 나 자신에게 반문해 보았다. “그대는 管鮑之交와 같은 진정한 친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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