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보름 전(2022.11.6), 경남 고성 회화 삼덕리 치명 마을에서 우리 집안의 시제(時祭)가 있었다. 진주정씨 충장공파 신계공 치명 종중회(晉州鄭氏 忠壯公派 新溪公 雉鳴 宗中會) 주관이다. 열 집도 채 되지 않은 동족 마을에서 종중 재산을 관리하며 독립된 제실을 지어 해마다 벌초 행사와 더불어 시제를 모시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알고 있다. 그만큼 윗대 어른들의 조상숭배, 가문 사랑, 집안에 대한 자긍심이 자별했던 까닭이리라.
해마다 시제 참례 제관의 머릿수나 채웠던 내가 올해 각별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사연인즉 이러하다. 예년에 독축(讀祝)을 담당해왔던 정금식 아우(현 고성고등학교 교장)가 개인 사정으로 독축이 불가하다면서 내가 독축을 맡아달라고 완곡히 부탁을 해왔던 것이다. 그러면서 독축을 미리 준비해달라고 이미 작성된 축문도 사진으로 찍어 카톡으로 보내왔다.
당근, 돌아가신 날 모시는 기제(忌祭)에는 어릴 적부터 수십 번 참례하였으나 독축을 내가 직접 해본 적이 없다. 더욱이 시제의 축문은 대종중, 소종중, 12대에 걸친 조상님들 부부의 신위를 일일이 호명해야 하기에 그 길이가 상당하다. 그래서 근엄하게 제의를 차려입은 초헌관, 아헌관, 종헌관과 더불어 독축자가 제사의 가장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독축’은 그 제사의 유일한 ‘오디오’ 효과의 기능을 한다. 독축소리가 장엄하고 낭랑하게 울려 퍼지느냐, 아니냐에 따라 제사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다.
그래서 유튜브다, 구글이다, 검색을 하여 독축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독축하는 방법에는 정해진 격식이 없어 보였고 가문마다 서로 달랐다. 다만 일반적인 원칙을 이야기하는 다음과 같은 설명들이 있었다.
“축문 낭독은 조상을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여읍(如泣: 돌아가신 조상을 기리는 애절한 마음으로 흐느끼며) 읊조리듯, 여소(如訴: 조상에 대한 죄송스러움으로 하소연)하듯, 여원(如怨: 조상에 대한 효도를 다하지 못한 내 자신을 원망)하듯, 여모(如慕: 조상을 영원히 잊지 못하는 마음으로 사모)하듯이 읽되 함께 참여하는 분들이 모두 살짝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소리로 읽는다.”
“첫째, 축문내용을 잘 파악(把握)하여 적절하게 떼어 읽어야 합니다. 둘째, 내용의 문장과 글자 음에 따라 장단음(長短音)을 적절하게 맞추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위에 언급한 내용에 맞으면서 고저장단에 부합하고 너무 늘어지거나 너무 조급하게 읽어도 안 됩니다.”
“독축(讀祝)은 창홀(唱笏: 문단의 단어들을 가락에 맞추어 부르는 것) 방법과는 달리 독(讀)하되 경건하게 축(祝: 기원하다), 애(哀: 슬프다), 경(敬: 공경하다), 고(告: 고하다) 등 의식행사의 종류와 내용을 감안하여 사성(四聲)에 의한 고저장단(高低長短)에 맞게 읽어야 한다.”
‘사성에 의한 고저장단에 맞게’ 부분에서 기함을 하였다. 내가 한자 사성(평성, 상성, 거성, 입성)을 어떻게 알아? 차라리 안드로메다어를 안드로메다인의 억양으로 읽으라지! 그래서 내 나름, 내 쪼대로 궁리를 하여 몇 차례 연습을 하고는 시제 당일 고향으로 갔다.
[추모재기]
[제물 진설]
[유식 중 제관 모습]
내 생각에 독축은 무난하였다. 다만 너무 잘하면 해마다 독축을 맡을까봐 너무 잘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음복자리의 다른 사람들 평가도 무난하였다.
처음 축문을 받자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하, 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12대 동안 모든 할아버지, 할머니가 짝을 제대로 만나고 자손 생산에 성공하셨구나.” 너무도 당연한 사실인데 그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그리고 이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약 138억 년 전, 빅뱅으로 우주가 탄생하였다.
약 50억 년 전, 무한창망한 우주 공간에 '창백하고 푸른 점(Pale blue spot)', 지구가 생겨나고,
약 38억 년 전, 심해 열수구 주변에서 단세포 생명체가 생겨나고,
약 400만 년 전 고생대 데본기, 바닷속 생존경쟁에 밀려서, 또는 포식자를 피해 양서류의 형태로 육지로 기어 오르고, 또 장구한 시간이 흘러 흘러 진화와 진화를 거듭한 끝에 파충류와 포유류를 거쳐,
약 35만 년 전, 아프리카 북서부 또는 남부지역에서 드디어 현생 인류의 직계 조상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다.
자, 여기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한 개인이 태어나서 2세를 잇기까지의 기간을 ‘세대(世代: generation)’라 하고 지금 한 세대를 대략 30년으로 잡는다. 재미삼아, 35만 년 동안 과연 몇 세대가 이어졌는가를 계산하면, 그렇지, 35만 년 나누기 30년 = 약 1만 1천 700세대이다. 물경 1만 1천 700세대라! 놀랍지 않은가? 1만 1천 700번을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반복하여 후손이 이어져서 지금 내가,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각자의 직계 조상, 할아버지 만 천 700분과 할머니 만 천 700분이 모두 짝짓기에 성공하셨고 후손 생산에 성공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십 만 년 전의 척박한 자연조건, 생활환경을 상상해 보라! 끊임없는 기아, 질병에 위협 받고, 부족 전체가 몰살당하는 전쟁, 수많은 환난과 공포, 홍수, 가뭄, 화재 같은 천재지변들을, 그분들 모두는 살 떨리는 악전고투로 이겨내거나 운 좋게 피해서 살아남은 것이다. 우리가 생로병사의 이 고해에 본인 의사와는 상관없이 태어남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받아 들이는가는 젖혀 두자. 지금 우리의 목숨, 우리의 현존은 상상을 초월하는 피와 땀과 눈물의 분투, 그리고 수없는 행운과 기적의 중첩으로서만 가능했던 것이다. 최초 조상으로부터 96대 할아버지는 형, 아우가 모두 이웃 부족의 침입으로 죽임을 당했는데 그분만 살아 남으셨다. 784대 할머니는 5남 3녀의 자식을 두었는데 태풍이 와서 모두 급류에 떠내려 보내고 우리의 785대 할아버지가 되는 아들 한 분만 목숨을 건졌다. 어느 아들은 손가락을 잘라 병석에 계신 어머니의 입에 생피를 흘려 넣어 목숨을 구완했고, 어느 어머니는 전화(戰禍)의 한복판에서 자식을 품에 감싸 안아 자식은 살리고 당신은 목숨을 잃기도 했다. 6천 9백 52대 할아버지는 이름 모를 역병에 돌아가시면서 대가 끊겼다고 여겼는데 6953대 조상이 유복자로 태어났다. 35만 년의 역사가 내내 이런 식이었다. 그러하므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생명은 그토록 거룩하고 존귀한 것이다. 자, ‘신체발부는 수지부모라’는 고루한 타령이 고루하지 않고, 독축에도 가급적 정성을 기우려야 할 명분이 자명하지 않은가?
브라보! 유 앤드 마이 라이프, 브라바, 아우어 라이프!!!
“난 아이를 낳지 않을 거야!” 어느 소설가는 원래 이 풍진 세상에 아이를 낳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바람에 그 결심을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박 맛을 보여주고 싶지는 않아?” 남편은 이 세상에 모순이나 고통이 없다고 설득한 것도 아니고, 출산이 갖는 사회적 효용을 역설한 것도 아니다. 그저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 맛, 살아서 실제 먹어보지 않고는 상상이 어려운 그 맛에 대해서 이야기했을 뿐이다.”
―김영민 교수의 「인문학을 위한 인문학자에 의한 인문학적 설득」이라는 제목의 칼럼에 인용된 이야기 한 토막.
https://youtu.be/AGiIWN-TenM
첫댓글 최근 과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호모 사피엔스 출현이 35만년 전이 아닌 60만~70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한다. 그렇다면 1만 1천 700세대가 아닌 2만 3천 400세대를 면면히 이어온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