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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 머물며 한국 사상 정신 씨앗 뿌린 화엄 성지
한글 창제 인연 희방사, 연화봉 천문대
제자 母 위해 화엄 강의했던 의상과 추동
금동미륵반가상 원 소장처 알려진 초암사
소백산 도인 머문 성혈사와 나한전 창살
영주 희방사 전경.
초암사 비로사 성혈사 그리고 희방사
소백산은 의상대사가 들여온 화엄교(華嚴敎)의 원천이다. 한국불교가 의상으로 인해 화엄세상으로 장엄됐으니 소백산은 한국불교 신앙의 뿌리인 셈이다. 의상의 화엄사상이 최초로 가람으로 형상화한 부석사, 부석사를 짓기 전에 머물렀던 초암사, 비로사, 성혈사 그리고 지금은 사라진 수많은 암자가 의상을 기린다. 화엄은 이 땅이 부처님 세상임을 보여주었으며 모든 차이와 분별을 넘는 화엄장 세계는 갈라진 삼국을 하나로 통일했다. 고려 중기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창하며 쇠락해가던 불교를 다시 일으킨 수선결사 역시 그 시작은 소백산이요 의상이었다. 수선결사 지눌은 이곳 소백산에서 9년간 머물며 화엄을 연구했으니 지금의 한국불교가 소백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셈이다.
3월 초 소백산을 찾았다. 전 날까지 심하게 불던 바람이 잦아들고 날도 따뜻했다. 목적지 풍기역 한 정거장 전 단양역에 승복 바지를 입은 보살님들이 우루루 들어오는 장면이 이채로웠다. 기도를 마치고 대구 부산으로 가는 보살님들이다. 철야 기도를 마친 듯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삼국이 다투던 시절 소백산을 사이에 두고 북쪽은 고구려, 남쪽은 신라가 맞섰다. 국경선을 놓고 격전이 벌어졌다. 죽령을 차지하는 자가 한반도의 주인이었다. 처음에 고구려가, 나중에 신라가 주인이 됐다. 죽령을 찾기 위해 파견된 고구려 온달장군이 왕에게 이르기를 “죽령 이북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했다.
의상이 중국에서 들어온 뒤 소백산으로 들어가 화엄의 씨앗을 뿌린 것도 군사적 지리적 중요성이 크게 작용했다. ‘화엄십찰’이 모두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맞섰던 옛 국경 지역에 자리한 것도 같은 이유다. 산중 암자는 당시 군사가 머무는 주둔지며 적국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선무하는 교화처 등 다양한 역할을 도맡았다.
전쟁이 끝나고 하나의 나라로 합친 뒤 수많은 사람과 물자가 오가는 교통의 중심지였다. 사찰은 또다시 영남과 서울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사 안녕을 기원하는 신앙지이며 험준한 산을 넘기 전 혹은 무사히 건너온 사람들이 고된 몸을 쉬는 쉼터였다. 소백산 곳곳에 넓은 풍기들에 수많은 사찰 암자가 들어선 까닭이다.
비로봉에서 바라본 소백산, 발 아래 비로사가 보인다.
호랑이와 처녀 전설 간직 희방사
먼저 희방사(喜方寺)를 찾았다. 소백산 연화봉 아래 자리한, 천년 고찰이다. 643년(선덕여왕 12)에 두운(杜雲)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창건 설화가 전해온다. 목에 비녀가 꽂혀 괴로워하던 호랑이를 구해주자 은혜를 갚는다며 입에 물고 온 여인을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내 이번에는 그 아비가 동굴 앞에 절을 짓고 농토를 마련하고 무쇠로 철다리를 놓아 은혜를 갚았다는 이야기다. 희방사역에 있는 수철리가 철다리(水鐵橋)에서 유래했으니 꾸며낸 이야기로만 넘길 일도 아니다.
희방사로 올라가는 길은 가파르다.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가 놓인 것이 신기할 정도다. 차도가 아닌 옛 산길로 길을 잡았다. 희방폭포가 반긴다. 폭포 옆에 계단이 없다면 이 길 또한 만만치 않아 보였다. 폭포를 지나 다리를 건너자 희방사가 눈에 들어온다. 종무소 등이 자리한 회관 건물이 먼저 눈에 띈다. 대웅보전 지장전 종각을 한 곳에, 계곡 건너 요사채 산신각을 배치했다.
한글 대장경 ‘월인석보’권1과 권2 판본(版本)을 소장했던, 한글 창제와 밀접한 인연을 간직한 희방사는 안타깝게도 6·25전쟁 때 불탔다. 희방사 뿐만 아니라 소백산 일대 사찰이 모두 당시 참화에 휩싸였다. 천만다행으로 두운화상이 정진했던 천연동굴에 봉안했던 주존불(主尊佛)이 무사하여 전쟁이 끝나고 1953년 주지 안대근(安大根)스님이 중건한 뒤 대웅전에 봉안했다.
희방사에서 설송스님을 친견했다. 1990년대 총무원 재무부장, 사업부장 등을 역임하고 종단 직영사찰 보문사 선본사 재산관리인을 역임한 종단 원로다. 총무원 호법부 조사국장 당시 희방사를 방문했다가 당시 주지 안대근스님에게서 인수하여 종단에 등록하면서 희방사를 일으키고 오늘의 가람으로 일신했다.
스님은 “이 일대 50만평이 모두 희방사 소유다. 전부 임야지만 옛부터 내려오는 사찰림이 우리 종단 아닌 세속인들에게 넘어간다면 불보살님과 조사님들께 큰 죄를 짓는 일이라 생각해서 무리해서라도 절을 인수했다”고 말했다.
스님에게 인사 하고 다시 소백산으로 올랐다. 돌계단 길이 처음부터 가파르게 이어졌다. 위로 올라갈수록 얼어붙은 눈길이 걸음을 더디게 했다. 체육부 소속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무리 지어 내려오며 인사한다.
희방사에서 연화봉을 오르다 바라보는 천문대 .
연화봉(蓮花峰, 1383m)에 오르자 사방이 산이다. ‘세속에 있으되 물들지 않으며 자비와 지혜를 동시에 구현한다’는 의미를 지닌,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소백산 봉우리에 얹었다. 연화봉에 서니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사방으로 산이 둘러싸고 그 산 무리를 다시 다른 무리가 겹겹이 둘렀다. 연꽃을 잎이 겹겹이 두른 형세다. 소백산 뿐만 아니라 서울 부산 통영 고창 등 전국에 연화봉이 있으니 이 민족의 연꽃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연화봉 옆에 소백산 천문대가 서있다. 1974년 국립천문대로 출발해 1986년 현재 이름으로 변경한 이 곳은 주변에 불빛이 없어 천문대로 가장 적격이다. 해발 1400m 연화봉에 천문대가 들어선 이유다.
비로봉으로 향했다. 연화봉에서 비로봉(毘盧峰, 1439m)까지는 4km 가량 떨어져 있다. 능선에는 눈이 그대로 얼어 빙판길이었다. 흙에서 1m 넘게 눈이 쌓여, 눈 많은 소백산을 실감나게 했다. 산 능선은 따뜻했다. 햇볕이 따가울 정도였다.
비로봉에서 비로사(毘盧寺) 방향으로 내려섰다. 동서로 길게 누운 소백산은 주 봉우리 연화봉 비로봉 국망봉에서 남·북 방향으로 큰 줄기가 뻗어나가는 모양이다. 그 줄기 사이 마다 의상이 사찰을 세웠다. 봉우리 근처에는 수많은 암자가 들어섰다. 연화봉 아래 희방사, 비로봉 아래 비로사, 국망봉 아래 초암사 성혈사가 그 주인공이다.
특히 북쪽 단양보다 순흥 방향 소백산 남쪽 사면에 집중됐다. 소백산 줄기와 줄기 사이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넓은 들을 이루고 남북을 오가는 교통 요지가 사람과 물자를 불러들였다. 그래서 풍기와 영주는 일찍부터 수많은 인재가 나왔으며 문화와 사상이 피어났다. 의상의 화엄사상, 지눌의 선불교가 그리고 유교가 이 땅에서 싹을 틔웠다.
비로봉에서 4km 가량 내려오면 비로사와 초암사 갈림길이 나온다. 1km 가량 차도를 따라 곧장 내려가면 비로사다. 소백산을 따라 계단식으로 꾸민 비로사는 비교적 규모가 크고 최근에 지은 듯 새 절이면서 옛 정취가 묻어났다. 의상이 90일간 화엄을 설했다는 추동(錐洞)이 비로사다. 부석사에 버금가는 역사와 의미를 지닌 사찰이다.
화엄사상은 신라말 고려시대에도 융성했으니 비로사 역시 그 위세가 대단했다. 고려 태조는 비로사 진공(眞空)대사를 존경해 입적 후 시호와 함께 탑호를 내렸다. 지금도 남아 전해오는 진공대사보법탑비가 그것이다. 왕이 김부식으로 하여금 부처님 치사리를 봉안토록 했고, 고려말 고승 환암대사가 중창했다. 조선 초에도 한글 창제에 앞장섰던 김수온이 왕실 복을 비는 도량으로 삼았다. 임진왜란 때 불타 숙종 때 중창했지만 다시 6·25전쟁 때 소실됐다. 영주 삼가동 석조 당간지주, 진공대사탑비, 적광전의 보물 제996호 석조아미타불과 석조비로자나불 등 신라말 고려초 귀중한 유물이 남아 오랜 역사를 전한다.
초암사 전경.
환갑에 출가 보원스님이 중창한 초암사
다시 소백산으로 올라가다 국망봉 방향으로 3km 가량 가면 초암사가 나온다. 비로사에서 초암사에 이르는 이 길은 일제시대 의병이 오가는 구국의 길이며, 6·25전쟁 때는 피난민들이 숨어 살았던 피난처였다. 지금은 그 후손 일부가 남아 소백산에서 나는 산채 등으로 음식점과 민박 등을 한다. 달밭골 이야기다.
초암사는 국망봉(國望峰) 아래 구곡계곡(九谷溪谷) 시작하는 곳에 자리한 비구니 암자다. 계곡을 따라 나란히 자리한 절은 작으면서 아늑하다.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지으려고 준비하던 어느 날, 서까래가 사라져 찾아보니 바로 소백산 국망봉 남쪽 계곡 아래 날아와 있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 세운 절이 초암사다. 날아온 서까래를 확인한 의상대사가 이것이 부처님 뜻이라 하고 먼저 이곳에 사찰을 짓고 초막을 얽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초암사(草庵寺)라는 이름을 붙였다. 초암사를 짓고 비로사를 짓고 그 다음에 부석사를 지었다는 것이다.
초암사를 일으킨 인물은 비구니 보원스님이다. 1970년대 후반 이곳에 온 스님은 1981년 대웅전을 중수한 것을 비롯 30여년에 걸쳐 대적광전 종각 요사채 등 불사를 일으켜 오늘의 가람으로 일궜다. 처음 왔을 때 대웅전 전각 위에 뱀 허물이 걸려 있을 정도로 초라했던 초암사에서 보원스님은 매일 수십 리를 걸어 풍기 등을 다니며 탁발하고 밭을 일궈 불사를 했다. 이에 감동한 지역유지와 기관장들이 힘을 보태 오늘날의 가람이 탄생했다. 보원스님 상좌 용운스님으로 이어져 소백산의 대표 가람으로 자리 잡았다.
소백산 아래 고려시대 숙수사 절 위에 세운 최초의 서원 소수서원에 있는 당간지주.
보원스님은 전설 같은 수행담을 남겼다. 안동 권씨 집안으로 출가했던 보원스님은 시부모 봉양은 물론 후처에게서 난 4남매를 친자식처럼 키워낸 자랑스러운 어머니요 며느리였다. 장성한 후처 소생 자식들이 큰 어머니 환갑날 크게 잔치를 벌였다. 잔치상을 받은 ‘큰 어머니’는 전혀 뜻 밖의 말을 했다. 출가를 선언한 것이다.
수원 광교산 청련암을 중건한 영선스님을 은사로 영주 석류선원에서 출가하여 인천 용화사에서 전강스님으로부터 계를 받고 보원(普元)스님이 되었다. 소백산에 도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소백산으로 갔다. 전강스님 제자로 성혈사에서 정진했던 봉철스님이다. 소백산으로 가기 전 날 동자승이 도량을 청소하다 자신을 보고 “진작 오신다더니 왜 이제 오십니까?”하며 인사하는 꿈을 꾸었다. 발길 닿는 대로 가다가 꿈에 본 도량을 만났다. 비가 새는 법당과 요사채, 삼층석탑과 부도 2기가 서 있는 초암사였다.
초암사 일주문 앞에 초암사 사적비가 서있다. 보원스님이 처음 왔을 때 있던 부도 2기도 절 앞으로 옮겼다. 이름이 바뀐 부도도 제 이름을 찾았다. 보원스님 부도도 함께 있다. 탁발과 농사로 중창불사 하고 병이 들면 병든 몸을 관하고 병을 화두 삼아 정진했던 스님은 100세 되던 해 생일날 입적했다.
국보 제78호 금동미륵보살 반가상 환수 운동
종무소 앞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반환받아야한다는 포스터가 걸려있다. 국보로 지정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두 점이다. 제78호, 제83호로 모두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국박(國博)이 박물관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삼을 정도로 세계적 명작이다. 두 불상 다 출토지가 분명하지 않다. 이 중 제78호가 이 곳 초암사 불상이라고 한다. ‘영주시사(榮州市史)’(2010년)에 따르면 한일합방 직후 영주경찰서장으로 와 있던 일본인이 초암사에 있던 이 불상을 훔쳐내었고, 이것을 1912년 일본인 후지카미 사다스케(淵上貞助)가 입수하여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 기증해 1916년 총독부 박물관으로 이관(移管)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초암사의 사세가 대단했다는 점은 초암사 주변 암자에서도 드러난다. 1549년 퇴계 이황이 소백산을 유람하고 기록으로 남긴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을 비롯한 자료에 따르면 철암(哲庵), 명경암(明鏡庵), 석륜암(石崙庵), 중백운암(中白雲庵), 상백운암(上白雲庵), 상가타암(上伽陀庵), 중가타암(中伽陀庵), 하가타암(下伽陀庵), 관음굴(觀音窟) 등 많은 암자가 있었다. 17세기까지도 존재했던 암자는 과도한 관청의 세금 때문에 조선 후기 폐사되었다고 한다. 영주관내 부석사를 비롯, 초암사, 중대사, 성혈사, 유석사, 희방사에 매년 봄가을로 납부해야 될 공역(公役)이 10여 가지에 이르러 그 고단함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초암사는 죽계구곡(竹溪九谷) 두 번째 청운대에 자리해 최근 영주는 물론 원근에서까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국망봉 초암사에서 순흥에 이르는 구간 물빛과 계곡이 뛰어난 죽계구곡 중에서도 초암사 바로 앞 거대한 바위 반석으로 이뤄진 청운대가 특히 유명하다. 제1경 이름이 금당(金堂)이다.
삼성각 앞에 돌로 만든 개가 한 마리 앉아있다. 원적봉이 초암사를 내려다 보는 모양이 도둑과 같아 이를 방지하기 위한 비보 차원에서 조성했다. 그 때문일까, 죽계구곡을 따라 7km 가량 마을 까지 내려오는데 개 여러 마리가 뒤 따라온다.
배점 마을에서 다시 사과 밭이 흐드러진 국망봉을 향해 올랐다. 가도 가도 암자는 보이지 않는다. 도로를 따라 초암사에서 거의 15km를 걸어 성혈사를 만났다.
성혈사(聖穴寺)라는 명칭에서 보듯 고승이 나온 작은 토굴이다. 나한전만 있던 작은 암자였는데 불사를 해서 큰 가람으로 변모했다. 최근에 조성한 듯 보이는 당우가 여기 저기 흩어져 있다. 차도가 놓여 있지만 가파르다.
성혈사 나한전 꽃창살
한가로운 연못 보는 듯 예쁜 꽃창살 성혈사
성혈사의 중심은 나한전이다. 조선 명종 8년(1553)에 처음 짓고 인조 12년(1634)에 다시 지었다. 건물도, 그 안의 비로자나불도 유명하지만 최고 인기는 꽃창살이다. 가운데 칸 양쪽 문에 연꽃과 연잎이 활짝 핀 가운데 물고기를 쪼는 두루미,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 맨 아래 연잎 밑에 숨은 듯한 물고기와 게, 연가지를 쥔 동자상 들이 새겨져 있다. 다른 절에서는 보기 힘든 명작이다. 300년 역사와 문살 조각으로 나한전은 보물 제832호로 지정돼 있다.
성혈사 전경.
이 곳 역시 전쟁으로 인해 나한전 한 채만 남기고 사라졌다. 소백산 도인 봉철스님이 다시 일으켰다. 스님은 소백산 너머 양백정사로 옮기기 전 까지 이 곳에 주석했다. 전쟁으로 무너진 소백산 사찰을 지키고 복원하며 정진했던, 소백산 도인 봉철스님은 전강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봉철스님에 대해 쓴 <행복을 좇아가지 마라>(운주사, 2009)에 따르면 스님은 전강스님 입적 후 남해 향일암 토굴에서 수도하다 우연히 소백산과 인연을 맺었다. 남해 향일암 토굴에서 홀로 정진하다 소백산에 들어온 스님은 성혈사 위 절 터에 효명암(孝明庵)이라는 암자를 짓고 수행했다. 그 후 정부에서 산중 암자를 철거하면 보상금을 준다는 말을 듣고 효명암을 철거하고 그 지원금으로 성혈사에 세평 남짓 작은 방을 만들었다. 이후 양백정사로 들어가 입적 때 까지 머물렀다.
의상이 머물며 화엄을 설하며 후학을 기르고 그들이 전국에 사찰을 지어 법을 펴 오늘에 이르렀다. 그 유산이 유학에까지 이르렀다. 소백산은 불교를 넘어 한국 사상의 원류다.
◼ 의상과 소백산
다섯 부석 중 4부석 소백산에, 추동서 90일간 화엄경 강의
의상대사가 90회 동안 화엄경을 설하며 제자를 길렀다는 비로사.
소백산은 의상을 품었으며 의상으로 인해 소백산은 한국 사상의 원류가 되었다. 의상은 통일신라 전후 오랜 전쟁에 시달린 대중들의 마음을 화엄수행과 신앙으로 달랬으며 그 주석처가 바로 소백산이다. 초암사 비로사 흑석사 성혈사에다 봉화 축서사를 합쳐 5부석이라 부를 정도로 소백산은 의상과 화엄사상의 집약지다.
의상의 화엄사상은 교학에 머물지 않고 미타 정토신앙을 중요시한 교학과 신앙의 일체화를 꾀했다. 소백산 사찰에 비로자나불과 함께 아미타불 무량수불을 볼 수 있는 것도 그 영향이다.
당나라에서 중국 화엄종 제2조 지엄(智儼)화상으로부터 화엄교학 진수를 전수받아 귀국한 의상대사는 676년 화엄 근본도량 부석사를 세우고 입적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며 화엄을 전파했다.
의상은 제자 교육과 교화를 중시했다. 부석사 40일회(日會) 일승십지문답, 황복사 법계도 강의, 태백산 대로방 행경10불(行境十佛)강의, 소백산 추동(錐洞) 90일 <화엄경> 강의가 있었다. 추동은 비로사로 알려져 있다. 추동에서 제자 진정의 어머니 천도를 위한 화엄경 강의에는 무려 3000명이나 되는 군중이 운집했다고 한다. 의상이 얼마나 제자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고 제자를 아꼈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문하의 수많은 제자가 스승의 사상을 계승하여 전국에 화엄십찰을 세워 화엄을 이었다. 마치 소백의 계곡이 흘러 낙동강을 이루어 바다로 흘러든 것처럼 소백의 의상교학은 전국으로 번져 오늘날 한국불교 중심 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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